John Coltrane
「1957년, 나는 신의 은총으로 영적 각성을 겪었다.」 — 『어 러브 수프림』 라이너 노트에서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함께한 사람들 ⏳🌊
- 영향찰리 파커
1945년 필라델피아에서 처음 들은 그의 연주가 콜트레인을 비밥의 길로 이끌었다.
- 가족나이마 콜트레인
첫 아내로 1957년 약을 끊던 시기에 곁을 지켰고, 발라드 「나이마」의 주인공이 됐다.
- 동료마일스 데이비스
혹평받던 무명의 그를 퀸텟에 세워 1950년대 재즈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 스승텔로니어스 몽크
1957년 파이브 스폿 무대에서 화성과 음색을 피아노 앞에서 몸으로 가르쳤다.
- 동료엘빈 존스
클래식 쿼텟의 드러머로, 겹겹의 리듬으로 그의 긴 즉흥에 맞서고 받쳐 주었다.
- 가족앨리스 콜트레인
두 번째 아내이자 마지막 밴드의 피아니스트로, 그의 영적 탐구를 함께하고 이어 갔다.
I. 하이포인트의 소년 · 1926–1943 (0–17세)
(햄릿) 1926년 9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햄릿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존 로버트 콜트레인은 재단사였고, 틈틈이 우쿨렐레와 바이올린을 켰다. 어머니 앨리스 블레어 콜트레인은 교회에서 피아노를 치고 노래했다. 가족은 그가 갓난아기일 때 같은 주의 하이포인트로 옮겼다. 그곳에서 흑인 감리교 교단(AME 시온 교회)의 목사였던 외할아버지 윌리엄 블레어의 집에 함께 살았다. 한집에서 자란 사촌 메리는 훗날 곡 「커즌 메리」의 주인공이 된다. (상실) 1938년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외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비롯한 집안 어른들이 잇따라 세상을 떠났다. 열두 살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어머니는 남의 집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고, 살림은 눈에 띄게 어려워졌다. 전기 작가들은 이 무렵부터 그가 말수가 줄고 악기에 매달렸다고 적는다. (악기) 그는 동네 목사가 꾸린 소년 밴드에서 클라리넷을 거쳐 알토 색소폰을 잡았다. 레스터 영과 조니 호지스의 음반을 듣고 따라 불었고, 친구들은 그가 밤늦도록 연습했다고 회고했다. 어린 시절 교회에서 들은 찬송과 설교의 억양은 훗날 그의 음악으로 다시 돌아온다. (북행) 1943년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일자리를 찾아 먼저 북쪽으로 간 어머니를 따라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로 떠났다. 수많은 남부 흑인이 북부의 공업 도시로 옮겨 가던 대이주의 물결 속이었다.
II. 이름 없는 사이드맨 · 1943–1955 (17–29세)
(필라델피아) 필라델피아에서 그는 공장에서 일하며 음악 학교에 다녔다. 1945년 그곳에서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의 연주를 처음 들었고, 훗날 파커의 소리가 자신을 단번에 꿰뚫었다고 회고했다. 빠른 템포와 복잡한 화성 위에서 즉흥을 펼치는 새 재즈(비밥)가 그의 목표가 됐다. (해군) 같은 해 해군에 입대해 하와이 진주만에 배치됐고, 기지의 군악 밴드에서 연주했다. 1946년 그곳에서 동료들과 파커의 곡을 녹음한 것이 지금 남아 있는 그의 가장 이른 녹음이다. (수련) 제대 후 그는 에디 클린헤드 빈슨의 밴드에서 테너 색소폰으로 바꿨고, 1949년부터 디지 길레스피 악단에서 활동했다. 1951년 길레스피 밴드와 녹음한 「위 러브 투 부기」에 그의 첫 스튜디오 솔로가 남아 있다. 이어 얼 보스틱, 조니 호지스의 밴드를 떠돌며 생계를 이었다. 필라델피아의 기타 교사이자 이론가 데니스 샌돌에게 화성을 배운 것도 이 시기다. (헤로인) 1940년대 말부터 그는 헤로인과 술에 빠져들었다. 파커를 우상으로 삼은 젊은 연주자들 사이에 마약이 번지던 시절이었다. 무대에 늦거나 연주 중 조는 일이 잦았고, 호지스 밴드를 떠난 것도 그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실력은 동료들 사이에 알려졌지만, 서른 가까운 나이까지 그는 이름 없는 사이드맨이었다. (나이마) 이 무렵 그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여성 후아니타 그럽스, 곧 나이마를 만났다. 그녀는 그에게 종교와 철학 서적을 권했고, 떠돌던 그의 삶에 처음으로 단단한 곁이 되어 주었다.
III. 마일스의 퀸텟 · 1955–1957 (29–31세)
(퀸텟) 1955년 가을, 마일스 데이비스가 새 퀸텟의 테너 주자로 그를 불렀다. 마일스가 처음 원했던 소니 롤린스는 그때 연주를 쉬고 있었다. 레드 갈런드(피아노), 폴 체임버스(베이스), 필리 조 존스(드럼)가 함께한 이 밴드는 곧 1950년대 재즈를 대표하는 소편성이 됐다. 그해 10월 그는 나이마와 결혼했고, 그녀가 데려온 어린 딸을 제 딸처럼 키웠다. (혹평) 평단은 처음에 그의 소리를 거칠고 메마르다며 깎아내렸다. 여백이 많은 마일스의 트럼펫 옆에서 음을 몰아치는 그의 솔로는 낯설게 들렸다. 그래도 마일스는 그를 내보내지 않았다. (마라톤) 1956년 퀸텟은 프레스티지와의 계약을 마치고 컬럼비아로 옮기기 위해, 두 차례의 녹음일에 스무 곡이 넘는 곡을 공연하듯 연달아 녹음했다. 이 테이프가 『쿠킨』『릴랙신』『워킨』『스티민』이 됐다. 같은 해 5월에는 롤린스의 녹음에 불려 가 두 테너가 나란히 선 「테너 매드니스」를 남겼다. (해고) 그러나 헤로인과 술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1957년 봄 마일스는 그와 필리 조 존스를 밴드에서 내보냈다. 그 직전 무대 뒤에서 마일스가 그를 때렸고, 그 자리에 있던 텔로니어스 몽크가 함께 일하자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증언마다 조금씩 다르다. (각성) 필라델피아의 집으로 돌아간 그는 혼자 방에 틀어박혀 약을 끊었다. 어머니와 나이마가 방 앞에 물과 음식을 놓아두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훗날 이 해에 영적 각성을 겪었다고 적었다. 그해 프레스티지는 그의 첫 리더 음반을 냈다.
마일스 퀸텟의 리듬 섹션을 그대로 빌려 소니 롤린스와 나란히 선 단 한 번의 스튜디오 기록이다. 아직 혹평을 듣던 시절 그의 소리가 어디쯤 서 있었는지를 경쟁자 옆에서 들려준다.
- 12마디마다 같은 화음 순서가 돌아오는 형식(12마디 블루스)이다. 틀이 단순한 만큼 두 테너의 차이가 오히려 선명하게 드러난다.
- 콜트레인의 소리는 밝고 곧게 뻗으며 음을 촘촘히 채우고, 롤린스는 굵고 둥근 소리로 짧은 동기를 비틀어 가며 여유와 유머를 섞는다. 같은 악기의 두 가지 길을 견주어 듣는 재미가 있다.
- 레드 갈런드, 폴 체임버스, 필리 조 존스는 마일스 퀸텟의 리듬 섹션 그대로다. 체임버스가 한 박에 한 음씩 걸어가듯 짚는 베이스(워킹 베이스)가 긴 곡 내내 흔들림 없이 바닥을 받친다.
- 루디 반 겔더의 뉴저지 해컨색 스튜디오에서 녹음했고, 콜트레인은 이 음반에서 이 한 곡에만 참여했다.
IV. 몽크의 방에서 · 1957–1960 (31–34세)
(몽크) 1957년 여름부터 연말까지 그는 뉴욕 클럽 파이브 스폿에서 텔로니어스 몽크의 쿼텟으로 연주했다. 몽크는 악보보다 피아노 앞에서 직접 쳐 보이며 가르쳤고, 그는 몽크에게서 색소폰으로 한 번에 두세 음을 내는 법까지 배웠다고 회고했다. 앞서 6월 몽크의 『몽크스 뮤직』 녹음에서는 테너의 선배 콜먼 호킨스와 나란히 섰다. (블루노트) 9월에는 블루노트의 앨프리드 라이언과 맺은 약속대로 『블루 트레인』을 녹음했다. 당시 뉴욕을 휩쓸던 하드 밥의 한가운데에서, 약을 끊은 그의 연주는 눈에 띄게 단단해졌다. 이듬해에는 세실 테일러의 녹음에도 참여했다. (소리) 1958년 마일스의 밴드로 돌아간 그는 화음 하나를 잘게 쪼개 빠른 음을 쏟아붓는 연주로 주목받았다. 평론가 아이라 기틀러는 이를 시트 오브 사운드(소리의 판)라고 불렀다. 1959년 『카인드 오브 블루』에서는 음계 하나 위에서 길게 노는 모달 재즈를 함께 열었다. 그 무렵 뉴욕 퀸스에 집을 마련해 나이마와 정착했다. (애틀랜틱) 1959년 애틀랜틱과 계약한 그는 『자이언트 스텝스』에서 연습실에서 다듬어 온 화성 실험, 훗날 콜트레인 체인지라 불릴 진행을 곡으로 내놓았다. 수록곡 제목에는 그의 삶이 남았다. 아내에게 바친 「나이마」, 사촌을 그린 「커즌 메리」, 베이시스트 폴 체임버스를 위한 「미스터 P.C.」다. (독립) 그는 이미 자기 밴드를 원했다. 1960년 봄 마일스와의 유럽 순회에 마지못해 따라나섰고, 돌아오자 독립했다. 이 무렵 시드니 베셰 이후 재즈에서 거의 잊혔던 소프라노 색소폰을 손에 넣었다.
약을 끊고 몇 달 뒤 블루노트에 남긴 단 하나의 리더 음반이다. 되찾은 맑은 정신이 단단한 음색과 치밀한 작곡으로 드러난다.
- 타이틀곡은 리 모건(트럼펫), 커티스 풀러(트롬본), 콜트레인(테너)의 세 관악기가 화음으로 겹쳐 부르는 어둡고 묵직한 테마로 시작한다. 단조 빛깔이 짙은 블루스다.
- 콜트레인의 솔로는 느긋하게 출발해 형식 한 바퀴(코러스)를 거듭할수록 음을 촘촘히 쌓아 올린다. 곧 시트 오브 사운드라 불릴 연주의 싹이 보인다.
- 「모먼츠 노티스」는 코드가 짧은 간격으로 쉴 새 없이 바뀌는 곡이다. 2년 뒤 「자이언트 스텝스」로 이어질 화성 실험이 여기서 시작됐다.
- 케니 드루(피아노), 폴 체임버스(베이스), 필리 조 존스(드럼)의 리듬 섹션이 블루스와 교회 음악의 끈끈함을 품은 묵직한 스윙(하드 밥의 그루브)으로 관악기를 앞으로 민다.
연습실에서 수년간 갈고닦은 화성 이론을 처음 자기 곡으로 내놓은 음반이다. 아내와 사촌, 동료의 이름이 곡 제목으로 남았다.
- 타이틀곡은 열여섯 마디 안에서 곡의 중심음(조성)이 세 곳으로 쉴 새 없이 옮겨 다닌다. 이 진행은 훗날 콜트레인 체인지라 불리며 재즈 연주자들의 시험대가 됐다.
- 아주 빠른 템포에서 콜트레인은 네 음짜리 짧은 음형을 바뀌는 코드마다 옮겨 꽂으며 질주한다. 미리 다듬어 둔 패턴을 정확히 맞춰 넣는 솜씨가 들린다.
- 피아니스트 토미 플래너건의 솔로는 띄엄띄엄 끊기듯 들린다. 낯선 진행을 빠른 템포로 처음 받아 든 탓이라고 흔히 이야기되며, 그는 훗날 이 곡을 다시 녹음했다.
- 「나이마」는 정반대의 곡이다. 베이스가 한 음을 길게 붙든 채(페달 포인트) 그 위에서 화음이 천천히 바뀌고, 테너는 장식 없이 선율을 노래한다.
- 1959년 5월 뉴욕 애틀랜틱 스튜디오에서 녹음했다. 「나이마」는 그해 12월 윈턴 켈리, 지미 콥과 따로 녹음한 것이다.
V. 네 사람의 기도 · 1960–1964 (34–38세)
(쿼텟) 독립한 그는 필라델피아 시절부터 알던 피아니스트 맥코이 타이너를 불렀고, 가을에는 드러머 엘빈 존스가 합류했다. 1961년 말 베이시스트 지미 개리슨이 들어오며 이른바 클래식 쿼텟이 완성됐다. 존스의 폴리리듬과 타이너의 묵직한 화음이 그의 긴 즉흥을 받쳤다. 1960년 녹음한 「마이 페이버릿 싱스」가 뜻밖에 크게 팔려, 그는 처음으로 클럽을 채우는 리더가 됐다. (임펄스) 1961년 그는 신생 레이블 임펄스로 옮겼다. 당시로서는 후한 조건이었다고 전해지며, 이후 녹음은 프로듀서 밥 실이 거의 도맡았다. 그는 출판사 조콜 뮤직을 세워 자기 곡의 저작권을 직접 관리했다. (반재즈) 그해 에릭 돌피와 함께한 빌리지 뱅가드 실황이 알려지자, 『다운비트』의 평론가 존 타이넌은 그들의 음악을 반(反)재즈라고 불렀다. 그는 이듬해 같은 잡지 인터뷰에서 차분히 해명했다. 이어 낸 『발라드』, 듀크 엘링턴과의 협연 음반, 가수 조니 하트먼과의 음반은 그가 전통에도 깊이 닿아 있음을 보여 주었다. (앨라배마) 1963년 9월 앨라배마주 버밍엄의 흑인 교회 폭탄 테러로 소녀 넷이 숨졌다. 그는 두 달 뒤 「앨라배마」를 녹음해 말 대신 음으로 애도했다. (앨리스) 같은 해 그는 나이마와 헤어지고 피아니스트 앨리스 맥러드를 만났다. 1964년 아들 존 주니어가 태어났고, 가족은 롱아일랜드 딕스힐스로 옮겼다. 그해 6월 돌피가 베를린에서 숨지자 돌피의 부모는 아들의 플루트를 그에게 건넸다. 12월 그는 하룻저녁 녹음으로 『어 러브 수프림』을 남겼다. 신에게 바치는 네 악장의 감사였다.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의 경쾌한 왈츠를 십여 분의 주문 같은 즉흥으로 바꾼 곡이다. 이 뜻밖의 히트가 막 출발한 쿼텟을 버티게 했다.
- 원곡의 코드 진행 대신 화음 두 개를 오가는 반복 위에서 길게 즉흥한다(모달 재즈). 단조와 장조가 바뀔 때마다 빛이 달라지는 듯하다.
- 콜트레인은 테너 대신 소프라노 색소폰을 불었다. 가늘고 콧소리 섞인 음색이 인도나 중동의 관악기 같다는 평을 들었고, 이 녹음 뒤로 재즈에서 소프라노가 다시 쓰이기 시작했다.
- 맥코이 타이너는 4도 간격으로 쌓은 화음을 같은 리듬으로 되풀이하며 바닥을 깐다. 솔로가 아무리 멀리 나가도 돌아올 자리가 있다.
- 엘빈 존스는 세 박자 왈츠 위에 다른 박자 감각을 겹쳐(폴리리듬) 소용돌이를 만든다. 공연에서 이 곡은 해마다 길어져 훗날 삼십 분을 넘기기도 했다.
- 1960년 10월 애틀랜틱 스튜디오 녹음이며, 베이스는 지미 개리슨 이전의 스티브 데이비스다.
버밍엄 교회 폭탄 테러로 숨진 네 소녀를 위해 녹음한 곡이다. 말을 아끼던 그가 시대에 내놓은 가장 직접적인 응답이었다.
- 박자를 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늘이고 줄이며(루바토) 시작하는 테너 선율은 낮게 읊조리는 설교처럼 들린다. 마틴 루서 킹의 추도 연설 억양을 본떴다고 전해진다.
- 엘빈 존스는 박을 새기는 대신 심벌과 북을 잘게 떨어(트레몰로) 파도처럼 부풀렸다 가라앉힌다.
- 곡 가운데 잠시 박자가 붙어 걸음을 옮기다가 다시 처음의 애도로 돌아간다. 분노가 터지려다 억눌리는 듯한 짜임이다.
- 1963년 11월 반 겔더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어 클럽 실황과 함께 『라이브 앳 버드랜드』에 실렸다.
1957년의 영적 각성에 감사하며 네 악장으로 엮은 기도다. 그가 직접 쓴 고백과 시가 라이너 노트에 실렸다.
- 징 소리와 테너의 짧은 외침으로 열린 뒤 지미 개리슨의 베이스가 네 음짜리 동기를 되풀이한다. 1악장 끝에서 콜트레인은 이 동기를 열두 조성으로 옮겨 가며 불고, 이어 같은 음형에 맞춰 제목을 읊조리는 목소리가 겹친다.
- 개리슨, 존스, 타이너의 리듬 섹션은 박을 칼같이 맞추기보다 함께 숨 쉬듯 밀고 당긴다. 2악장과 3악장에서 그 밀도가 가장 높아진다.
- 4악장 「시편」에서 테너는 라이너 노트에 실린 시를 음절마다 음 하나씩 맞춰 낭송하듯 연주한다. 재즈 연구자 루이스 포터 등이 이 대응을 밝혀냈다.
- 1964년 12월 9일 뉴저지 잉글우드클리프스의 반 겔더 스튜디오에서 하룻저녁에 녹음됐다. 이튿날 연주자를 더한 녹음도 했지만 발매본에는 첫날의 네 사람이 남았다.
VI. 마지막 비상 · 1965–1967 (39–41세)
(어센션) 1965년 6월 그는 관악기 일곱 명을 포함한 열한 명으로 『어센션』을 녹음했다. 정해진 틀 없이 여럿이 한꺼번에 즉흥하는 프리 재즈였다. 그는 아치 셰프, 앨버트 아일러 같은 젊은 연주자를 임펄스에 소개하고 무대에 세워 길을 터 주었다. 그해 둘째 아들 라비가 태어났고, 앨리스와 결혼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이별) 음악이 바뀌자 오랜 동료가 떠났다. 1965년 말 타이너가, 이듬해 초 존스가 밴드를 나갔다. 그 자리를 앨리스(피아노), 라시드 알리(드럼), 테너의 패로아 샌더스가 채웠다. 그는 박자보다 소리의 밀도와 기도에 가까운 외침을 좇았다. (일본) 1966년 7월 일본 순회 중 그는 나가사키의 평화공원을 찾아 기도했다. 기자회견에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는 물음에 성인이 되고 싶다고 답했다. 여러 종교의 경전을 두루 읽은 그는 모든 신앙이 하나의 진리를 가리킨다고 믿었다. (병) 1967년 들어 그는 공연을 줄였다. 2월에는 라시드 알리와 단둘이 『인터스텔라 스페이스』를 녹음했고, 4월 뉴욕 올라툰지 아프리카 문화 센터에서 마지막 공연을 했다. 병은 간암이었다. 그는 병원을 오래 꺼렸다고 전해진다. (죽음) 1967년 7월 17일, 롱아일랜드 헌팅턴의 병원에서 마흔 살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에서는 아일러와 오넷 콜먼의 밴드가 연주했다. 세 아들이 남았다. 앨리스는 남편의 음악과 신앙을 이어 갔고, 맏아들 존 주니어는 1982년 교통사고로 숨졌다. 라비는 훗날 색소폰 연주자가 됐다.
죽기 다섯 달 전 드러머 라시드 알리와 단둘이 남긴 녹음이다. 그가 마지막까지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를 가장 맨몸으로 보여 준다.
- 피아노도 베이스도 없이 테너와 드럼뿐이다. 화음의 바닥이 사라지자 선율이 어느 방향으로든 갈 수 있게 된다.
- 알리는 일정한 박을 치지 않고 여러 방향의 리듬을 동시에 흩뿌린다. 박자에 기대지 않는 이 드럼이 프리 재즈 드럼의 한 전형이 됐다.
- 곡들은 콜트레인이 흔드는 작은 방울 소리로 시작하고, 제목은 화성·금성·목성·토성 같은 행성 이름이다.
- 테너는 높은 음역에서 소리를 찢듯 몰아붙이다가도 몇 음짜리 단순한 동기로 돌아와 숨을 고른다. 격렬함 속에서도 동기를 놓지 않는 것이 들린다.
- 1967년 2월 반 겔더 스튜디오에서 녹음했고, 그가 세상을 떠나고 몇 해 뒤인 1974년에야 발매됐다.
덜 알려진 이야기
그의 가장 이른 녹음은 1946년 7월 해군 복무 중 하와이에서 동료 병사들과 남긴 사적인 녹음이다. 알토로 찰리 파커의 곡을 충실히 따라가는 스무 살 청년의 연주는 훗날의 독자적인 소리와 거리가 멀다. 상업 음반이 아니었던 탓에 수십 년 뒤에야 앤솔러지 음반으로 공개됐고, 그래서 그의 출발점이 철저한 모방이었다는 사실은 신화에 가려 덜 알려져 있다. 2018년에 나온 『보스 디렉션스 앳 원스』는 1963년 3월 클래식 쿼텟이 하루 동안 녹음하고 잊힌 세션이다. 임펄스의 원본 테이프는 보관 공간을 줄이던 시절 폐기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콜트레인이 집에 가져간 참고용 사본이 나이마의 집안에 남아 있었다. 반세기 넘게 잠들어 있던 테이프였다. 『어 러브 수프림』도 판본이 하나가 아니다. 녹음 이튿날 그는 테너의 아치 셰프와 베이스의 아트 데이비스를 더해 같은 곡을 다시 녹음했고, 이 테이크는 2002년에야 공개됐다. 공연에서는 이 곡을 거의 연주하지 않았는데, 1965년 시애틀 클럽 공연을 지역 색소폰 연주자 조 브라질이 녹음해 둔 테이프가 발견되어 2021년 음반으로 나왔다. 그를 성인으로 모시는 교회도 있다. 샌프란시스코의 성 요한 콜트레인 교회는 1965년 그의 공연에 깊이 감화된 신자들의 모임에서 출발해 훗날 아프리카 정교회에 소속됐고, 예배에서 그의 음악을 연주한다. 1966년 일본에서 성인이 되고 싶다고 했던 말이 뜻밖의 방식으로 이어진 셈이다.
용어 노트 📚🔎
비밥
(말뜻) 비밥(bebop)이라는 이름은 빠르게 끊어지는 두 음을 입으로 흉내 낸 소리에서 왔다는 설이 널리 받아들여진다. 연주자들이 선율을 흥얼거릴 때 붙이던 뜻 없는 음절이 장르 이름이 됐다. (재즈에서) 1940년대 뉴욕에서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 등이 만든 재즈다. 춤추기 좋은 큰 악단 음악과 달리, 작은 밴드가 아주 빠른 템포와 복잡한 화음 위에서 솜씨를 겨루듯 즉흥연주를 펼친다. 축구로 치면 길게 차고 달리는 경기 대신, 좁은 공간에서 짧고 빠른 패스를 수없이 주고받는 경기와 비슷하다.
하드 밥
(말뜻) 하드(hard)는 단단하다, 세다는 뜻이다. 비밥보다 더 굵고 힘 있게 몰아붙이는 연주라는 느낌을 담은 이름이다. (재즈에서) 1950년대 중반 뉴욕을 중심으로, 비밥을 이어받되 블루스와 흑인 교회 음악의 뜨겁고 끈끈한 맛을 더 진하게 넣은 재즈다. 호레이스 실버, 아트 블레이키, 그리고 블루노트 레이블의 음반들이 대표적이다. 같은 떡볶이라도 고추장을 더 풀어 맛이 진하고 묵직해진 것에 빗댈 수 있다. 비밥이 날렵했다면 하드 밥은 더 무겁고 단단하게 몸을 흔든다.
시트 오브 사운드
(말뜻) 영어 sheets of sound 는 소리의 판, 소리의 장막이라는 뜻이다. 1958년 평론가 아이라 기틀러가 잡지 『다운비트』에 콜트레인의 연주를 묘사하며 쓴 말이다. (재즈에서) 화음 하나가 울리는 짧은 순간에 그 화음에 속한 음과 이웃한 음을 아주 빠르게 쏟아 내, 낱낱의 음보다 소리 덩어리가 한꺼번에 밀려오는 것처럼 들리게 하는 연주법이다. 빗방울 하나하나가 아니라 쏟아지는 소나기가 커튼처럼 보이는 것과 비슷하다. 콜트레인은 화음 하나를 여러 갈래로 동시에 보려 했다고 설명했다. (다른 데서는) 영어 sheet 는 일상에서 종이 한 장이나 침대 시트를 가리키고, 스프레드시트처럼 표 한 장을 뜻하기도 한다.
콜트레인 체인지
(말뜻) 체인지(change)는 재즈 연주자들이 코드 진행, 곧 화음이 바뀌어 가는 흐름을 줄여 부르는 말이다. (재즈에서) 콜트레인이 「자이언트 스텝스」 등에서 쓴 코드 진행으로, 곡의 중심음(조성)을 반음 네 개 간격의 세 곳으로 빠르게 옮겨 다닌다. 보통 곡이 한 집에 머물며 가끔 이웃집에 들르는 것이라면, 이 진행은 세 집을 쉬지 않고 돌아다니는 셈이다. 술래잡기에서 기지 세 곳을 번갈아 찍으며 뛰어야 하는 규칙이 생긴 것처럼, 즉흥연주자는 계속 바뀌는 중심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야 한다.
모달 재즈
(말뜻) 모드(mode)는 선법, 곧 어떤 음들로 음계를 짤지 고르는 방식을 말한다. 뿌리인 라틴어 modus 는 방식, 척도라는 뜻이다. (재즈에서) 화음이 몇 마디마다 빠르게 바뀌는 대신, 음계 하나나 둘을 오래 붙든 채 그 안에서 선율을 자유롭게 펼치는 재즈다. 1959년 마일스 데이비스의 『카인드 오브 블루』가 대표작이고, 콜트레인은 이 방식을 더 길고 깊게 밀고 나갔다. 정해진 순서대로 계단을 오르는 대신, 넓은 운동장 하나를 통째로 받아 마음껏 뛰어다니는 것과 같다. (다른 데서는) 일상에서 모드는 게임의 쉬움·어려움 모드나 휴대전화의 비행기 모드처럼 기기나 상황이 작동하는 방식을 뜻한다.
폴리리듬
(말뜻) 폴리(poly)는 그리스어로 여럿이라는 뜻이다. 여러 리듬이 한꺼번에 흐른다는 말이다. (재즈에서) 서로 다른 박자 감각을 동시에 겹쳐 연주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쪽은 셋씩, 다른 쪽은 둘씩 박을 세면서 함께 나아간다. 엘빈 존스는 기본 박을 지키면서 손과 발로 여러 리듬을 엇갈려 쳐서 밴드 전체가 소용돌이치는 느낌을 만들었다. 한 손으로 책상을 세 번 두드리는 동안 다른 손으로 두 번 두드려 보면, 처음엔 헷갈리지만 둘이 딱 맞아떨어지는 순간이 온다. 그것이 폴리리듬의 기본이다.
프리 재즈
(말뜻) 프리(free)는 자유롭다는 뜻이다. 이 이름은 오넷 콜먼이 1960년에 낸 음반 『프리 재즈』에서 굳어졌다. (재즈에서) 정해진 코드 진행, 일정한 박자, 마디 수 같은 약속을 줄이거나 버리고, 연주자들이 서로의 소리를 들으며 즉석에서 음악의 모양을 만들어 가는 재즈다. 여럿이 동시에 즉흥하는 경우가 많다. 친구들끼리 미리 정한 규칙 없이 놀면서 그때그때 규칙을 만들어 가는 놀이와 비슷하다. 아무렇게나 하는 것처럼 보여도, 서로를 잘 들어야 놀이가 무너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