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Blakey
‘나는 젊은이들 곁에 있겠다. 그들이 너무 나이 들면 더 젊은 이들을 데려오겠다. 그래야 머리가 살아 있다.’ — 무대에서 블레이키가 즐겨 하던 말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함께한 사람들 ⏳🌊
- 가족세라 올리버 패런
어머니를 잃은 아기 블레이키를 거두어 키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 동료빌리 엑스타인
길레스피·파커와 함께 비밥의 현장에 블레이키를 세운 빅밴드의 리더였다.
- 우정텔로니어스 몽크
1947년 첫 녹음부터 1970년대 자이언츠 오브 재즈까지 함께한 오랜 벗이었다.
- 후원앨프리드 라이언
블루노트의 창업자로 버드랜드 실황부터 메신저스의 전성기까지 녹음을 맡았다.
- 동료호레이스 실버
블레이키와 함께 재즈 메신저스를 세우고 하드 밥의 소리를 만든 피아니스트다.
- 제자웨인 쇼터
1959년부터 다섯 해 동안 음악 감독을 맡아 메신저스의 음악을 새로 빚었다.
I. 피츠버그의 소년 · 1919–1942 (0–23세)
(출생) 1919년 10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아서 블레이키였다. 아버지 버트럼 토머스 블레이키는 그가 태어날 무렵 가족을 떠났고, 어머니 마리 로더리커는 그가 아기였을 때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그를 거두어 키운 사람은 어머니의 사촌으로 알려진 세라 올리버 패런이었다. 블레이키는 자신이 친부모 밑에서 자라지 않았다는 사실을 꽤 늦게 알았다고 회고했다. (노동) 학교 공부는 오래 잇지 못했다. 십 대 초반부터 제철소와 탄광에서 일했다고 전해지며, 공장 연기 자욱한 피츠버그에서 일찍 생계를 짊어졌다. 음악은 고된 노동 바깥의 다른 길이었다. 그는 처음에 피아노를 쳤고, 십 대에 이미 클럽에서 작은 밴드를 이끌었다. (전향) 드럼으로 옮긴 사연은 그가 평생 즐겨 들려준 이야기로 남았다. 클럽 주인이 피아노를 훨씬 잘 치는 소년 에롤 가너를 피아노 앞에 앉히고 그에게는 드럼을 치라고 했다는 것이다. 주인이 권총을 꺼내 들었다는 대목까지 붙지만, 이는 블레이키 자신의 회고 말고는 확인할 길이 없다. 분명한 것은 그가 칙 웹과 시드 캐틀릿을 들으며 드럼을 거의 혼자 익혔다는 점이다. 작은 체구로 빅밴드 전체를 밀어붙이던 칙 웹의 박력은 평생 그의 기준으로 남았다. (뉴욕) 1942년 무렵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메리 루 윌리엄스와 함께 뉴욕으로 가 52번가 근처의 클럽 켈리스 스테이블 등에서 연주했다. 공장 노동자였던 청년이 뉴욕 재즈의 문턱에 선 것이다.
II. 빅밴드와 비밥 · 1943–1947 (24–28세)
(헨더슨) 1943년부터 이듬해까지 플레처 헨더슨 오케스트라에서 일하며 큰 편성을 뒤에서 받쳐 내는 법을 익혔다. 남부를 순회하던 이 무렵 조지아주 올버니에서 백인 경찰에게 심하게 맞아 머리를 크게 다쳤고 금속판을 넣는 수술을 받았다고 그는 회고했다. 인종 분리법 아래 흑인 악단의 남부 순회는 그런 위험을 늘 안고 있었다. (엑스타인) 1944년 가수 빌리 엑스타인이 꾸린 빅밴드에 들어갔다. 이 악단은 비밥의 요람이었다. 디지 길레스피와 찰리 파커, 덱스터 고든, 팻츠 나바로가 거쳐 갔고 젊은 마일스 데이비스도 잠시 몸담았으며, 사라 본이 노래했다. 길레스피와 파커의 빠르고 꺾인 선율 앞에서 블레이키는 박자를 쿵쿵 찍는 대신 심벌로 흐름을 잇고 베이스 드럼으로 불쑥 찌르는 새 드럼법을 몸에 익혔다. 그는 1947년 악단이 흩어질 때까지 머물렀다. (메신저) 1947년 열일곱 명 편성의 악단을 꾸려 세븐틴 메신저스라 불렀다. 큰 악단은 오래 버티지 못했지만, 그해 말 그는 블루노트에서 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건 녹음을 남겼다. 메신저라는 이름은 이후 사십여 년 그와 함께했다. (몽크) 같은 해 블루노트에서 녹음한 텔로니어스 몽크의 첫 리더 세션에서 드럼을 쳤다. 몽크의 음악이 기이하다는 평을 받던 때, 블레이키는 몽크의 엇박과 침묵을 이해하는 몇 안 되는 동료였다. 두 사람의 우정은 몽크가 무대를 떠날 때까지 이어졌다.
III. 부하이나 · 1947–1954 (28–35세)
(개종) 1940년대 후반, 이슬람의 아마디야 운동에 귀의하고 압둘라 이븐 부하이나라는 이름을 받았다. 동료들이 평생 그를 부른 별명 부(Bu)는 여기서 나왔다. 당시 뉴욕의 흑인 음악가들 사이에서 이슬람 개종은 하나의 흐름이었고, 차별받는 나라에서 다른 정체성과 공동체를 찾는 길이기도 했다. (아프리카) 1948년 무렵부터 한동안 서아프리카에 머물렀다. 이 여행이 훗날 그의 아프리카풍 드럼의 원천이라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으나, 그는 북을 배우러 간 것이 아니라 종교와 철학을 공부하러 갔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헤로인) 이 시기 그는 헤로인에 손을 댔고, 비밥 세대의 많은 동료가 그랬듯 중독은 오래 그를 따라다녔다. 수입은 들쭉날쭉했다. 그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1951년 앨범 「딕」, 몽크의 트리오 녹음 등에서 반주자로 일하며 생계를 이었다. 남의 음악을 받쳐 주던 이 몇 해 동안 그는 리듬 섹션(피아노·베이스·드럼처럼 박자와 화음의 바닥을 까는 악기들)의 중심에서 솔로이스트를 밀어 올리는 기술을 다듬었다. (버드랜드) 1954년 2월, 뉴욕 클럽 버드랜드에서 그가 이끈 5인조의 공연을 블루노트 사장 앨프리드 라이언이 녹음했다. 클리퍼드 브라운의 트럼펫, 루 도널드슨의 알토, 호레이스 실버의 피아노가 블레이키의 드럼 위에서 타올랐다. 이 밤은 비밥을 블루스와 가스펠 쪽으로 더 단단히 다진 하드 밥의 출발점으로 꼽힌다. 라이언은 블레이키를 믿었고, 블루노트는 그의 음악적 집이 되었다.
생계를 위해 남의 녹음을 받치던 블레이키가 자기 밴드의 리더로 선 밤이다. 앨프리드 라이언의 믿음이 하드 밥이라는 새 흐름의 첫 기록을 남겼다.
- 음반은 버드랜드의 사회자 피 위 마켓의 소개와 블레이키의 짧은 인사로 시작한다. 루디 반 겔더가 클럽에서 직접 녹음해 잔 부딪는 소리까지 담긴 현장감이 살아 있다.
- 「원스 인 어 와일」은 클리퍼드 브라운을 위한 발라드다. 두툼하고 따뜻한 음색으로 빠른 음표를 흘려도 선율이 흐트러지지 않는 그의 장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으로 꼽힌다.
- 「스플릿 킥」과 「퀵실버」는 실버가 기존 스탠더드곡의 코드 진행 위에 새 선율을 얹어 만든 곡이다. 익숙한 화음 위에서 블루스 맛이 짙은 실버의 오른손 프레이즈를 들어 보자.
- 솔로가 바뀌는 지점마다 블레이키가 스네어를 몰아치듯 굴려(프레스 롤) 다음 연주자를 밀어 넣는다. 이 신호가 하드 밥 드럼의 상징이 되었다.
IV. 재즈 메신저스 · 1954–1958 (35–39세)
(결성) 1954년 말 블레이키와 실버는 함께 밴드를 꾸렸고, 이듬해 재즈 메신저스라는 이름이 굳었다. 처음에는 리더가 따로 없는 협동 밴드였다. 케니 도럼의 트럼펫, 행크 모블리의 테너 색소폰, 더그 왓킨스의 베이스가 함께했다. 실버의 「더 프리처」와 「두들린」은 교회 음악과 블루스를 비밥에 섞은 곡으로, 이 밴드의 소리를 정했다. 블루노트는 녹음 전 리허설에도 돈을 치렀고, 그 덕에 밴드는 단단히 맞춘 앙상블을 들려줄 수 있었다. (분열) 1956년 실버는 동료 몇을 데리고 떠났다. 실버는 훗날 밴드 주변의 약물 문제가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고 회고했다. 블레이키는 이름을 지켰고 메신저스는 이때부터 그의 밴드가 되었다. 단원은 바뀌어도 이름과 정신은 남는, 학교 같은 밴드의 틀이 여기서 생겼다. (협연) 1957년은 분주했다. 존 콜트레인이 참여한 빅밴드 녹음을 이끌었고, 소니 롤린스의 블루노트 앨범에서 드럼을 쳤으며, 몽크와는 애틀랜틱에서 메신저스와 함께 한 장을 남겼다. 같은 해 여러 드러머와 타악기 주자를 모아 북만으로 꾸민 「오지 인 리듬」을 냈다. 아프리카와 카리브의 리듬에 대한 그의 오랜 관심이 처음 앨범으로 드러난 셈이었다. (모닌) 1958년 베니 골슨이 음악 감독으로 들어와 같은 필라델피아 출신의 리 모건, 바비 티먼스, 자이미 메릿을 불러 모았다. 그해 10월 녹음한 「모닌」은 메신저스 최대의 성공작이 되었다. 연말에는 유럽 순회에 나서 파리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늘 돈에 쫓기던 밴드가 비로소 이름값으로 일을 얻기 시작한 때였다.
1947년 몽크의 첫 녹음에서 맺은 우정이 십 년 만에 한 장의 앨범으로 결실했다. 몽크의 곡들이 메신저스의 뜨거운 에너지와 만난다.
- 몽크는 음을 촘촘히 깔지 않고 띄엄띄엄 찌르듯 반주한다. 그 빈자리를 블레이키의 베이스 드럼과 심벌이 메우며 둘이 대화하듯 주고받는 대목에 귀를 기울여 보자.
- 「에비던스」는 짧게 끊어 치는 음과 쉼표로 선율을 만든 곡이다. 멜로디가 일부러 박자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 듣는 이를 놀라게 한다.
- 테너 색소폰의 조니 그리핀은 매우 빠른 손놀림으로 유명했다. 몽크의 느긋하고 기묘한 화음 위에서 그가 음을 쏟아 내는 대비가 이 앨범의 재미다.
- 그리핀이 쓴 블루스 「퍼플 셰이즈」에서는 12마디가 한 바퀴인 블루스 형식 위에서 각 연주자가 어떻게 자기 색을 내는지 비교해 들을 수 있다.
골슨이 불러 모은 필라델피아의 젊은이들과 함께 메신저스가 처음 큰 성공을 거둔 앨범이다. 흑인 교회의 소리가 재즈 클럽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 타이틀곡은 피아노가 짧게 묻고 관악기들이 아멘 하듯 답하는 부름과 응답으로 시작한다. 바비 티먼스가 쓴 이 곡에 골슨이 가운데 부분(브리지)을 따로 써 넣으라고 권해 32마디 AABA 형식이 완성됐다고 전해진다.
- 스무 살 리 모건의 트럼펫 솔로는 음을 비틀어 끌어올리는 울부짖음 같은 소리로 시작한다. 이 앨범에서 가장 자주 회자되는 솔로다.
- 블레이키는 박자의 둘째·넷째 박을 하이햇으로 단단히 밟으며 무게를 싣는다. 교회 박수처럼 들리는 이 뒷박 강조가 곡의 흥을 만든다.
- 골슨의 「블루스 마치」에서는 군악대 행진처럼 스네어를 굴리는 블레이키의 드럼이 블루스와 섞인다. 1958년 10월 루디 반 겔더의 해컨색 스튜디오에서 녹음됐다.
V. 하드 밥 학교 · 1959–1971 (40–52세)
(쇼터) 1959년 골슨이 떠나자 웨인 쇼터가 테너 색소폰과 음악 감독을 맡았다. 1964년까지 머문 쇼터는 신비롭고 낯선 화성의 곡을 잇달아 써 밴드의 색을 바꿨다. 블레이키는 젊은 단원에게 작곡과 편곡을 맡기고 자신은 뒤에서 밀었다. 한 곡을 다 돌고 다음 바퀴(코러스)로 넘어가는 순간마다 스네어를 몰아치는 프레스 롤로 솔로이스트의 등을 떠미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일본) 1961년 1월의 첫 일본 순회는 그에게 각별했다. 공항부터 이어진 환대는 미국에서 흑인 음악가로서 겪지 못한 존중이었고, 그는 그 경험을 오래 이야기했다. (섹스텟) 1961년부터 프레디 허버드의 트럼펫, 커티스 풀러의 트롬본, 시더 월턴의 피아노가 합류해 관악기 셋의 6인조가 되었고, 1962년에는 레지 워크먼이 자이미 메릿에게서 베이스를 이어받았다. 「모자이크」, 「우게쓰」, 「프리 포 올」이 이 시기에 나왔다. 관악기가 하나 늘자 화음이 두꺼워지고 편곡이 촘촘해졌다. (침체) 1960년대 중반 이후 록과 소울이 젊은 청중을 가져가면서 재즈 클럽의 일거리가 줄었다. 메신저스의 멤버는 자주 바뀌었고, 키스 재럿과 척 맨지오니도 잠시 거쳐 갔다. 블레이키 자신의 약물 문제도 이어졌다. 녹음은 블루노트를 떠나 여러 레이블을 오갔고, 밴드는 순회 일정으로 근근이 이어졌다.
엑스타인 악단 시절의 동료 디지 길레스피가 쓴 곡을, 웨인 쇼터와 리 모건이 함께한 메신저스가 가장 격렬하게 다시 풀어냈다.
- 곡은 블레이키의 드럼이 홀로 리듬을 깔며 시작한다. 라틴 음악처럼 출렁이는 리듬이 쌓이다가 관악기가 들어오는 순간의 긴장을 느껴 보자.
- 주제 선율의 A 부분은 라틴 리듬으로, 가운데 부분은 4박이 고르게 흐르는 스윙으로 바뀐다. 두 리듬이 번갈아 나오며 곡에 굴곡이 생긴다.
- 주제가 끝나면 반주가 완전히 멈추고 솔로이스트 혼자 몇 마디를 채우는 브레이크가 온다. 리 모건이 이 빈칸을 빠른 음으로 꽉 채우는 대목이 유명하다.
- 곡 막바지 블레이키의 긴 드럼 솔로는 탐탐과 심벌을 천둥처럼 굴린다. 팔꿈치로 북면을 눌러 음높이를 바꾸는 그의 특기도 들린다.
관악기 셋의 6인조가 가장 거칠게 타오른 기록이다. 쇼터가 밴드를 떠나기 직전, 그와 블레이키가 서로를 끝까지 밀어붙였다.
- 쇼터가 쓴 타이틀곡은 매우 빠른 템포로 몰아친다. 블레이키는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심벌과 스네어로 밴드를 떠밀어, 드럼이 반주가 아니라 또 하나의 솔로이스트처럼 들린다.
- 쇼터의 테너 솔로는 짧은 동기를 던져 놓고 이를 조금씩 비틀며 쌓아 올린다. 블레이키의 드럼과 맞부딪치며 점점 격해지는 흐름이 이 앨범의 백미로 꼽힌다.
- 트럼펫·테너 색소폰·트롬본이 화음을 나누어 부는 주제부를 들어 보자. 관악기가 셋이라 둘일 때보다 소리의 층이 훨씬 두껍다.
- 허버드가 쓴 「더 코어」와 부드러운 라틴풍의 「펜사티바」는 같은 밴드의 다른 얼굴을 보여 준다.
VI. 마지막 메신저 · 1971–1990 (52–71세)
(자이언츠) 1971년부터 이듬해까지 디지 길레스피, 몽크, 소니 스팃, 카이 와인딩, 알 맥키번과 함께 자이언츠 오브 재즈라는 이름으로 세계를 돌았다. 엑스타인 악단 시절의 동료 길레스피, 그리고 오랜 벗 몽크와 다시 한 무대에 선 것이다. 이 순회는 몽크가 활발히 연주한 마지막 무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부활) 1970년대 후반 메신저스는 다시 기운을 찾았다. 1980년 열여덟 살의 트럼펫 연주자 윈턴 마살리스가 들어왔고, 그의 형 브랜퍼드 마살리스, 뒤이어 테렌스 블랜차드, 도널드 해리슨, 멀그루 밀러, 케니 개릿 등이 이 밴드를 거쳐 나갔다. 1980년대 재즈의 새 얼굴 상당수가 메신저스 출신이었다. 블레이키는 연주만이 아니라 무대에 서는 태도까지 가르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력) 말년의 그는 청력을 크게 잃었다. 수십 년을 드럼 바로 옆에서 산 대가였다. 그래도 그는 몸에 전해지는 울림으로 박자를 느끼며 무대에 섰다고 전해진다. (작별) 그는 평생 네 번 결혼했고 여러 자녀를 두었다. 1990년 10월 16일 뉴욕에서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일흔한 살이었다. 마지막 해까지 그는 메신저스를 이끌었고, 그가 떠나자 서른다섯 해 이어진 밴드도 함께 막을 내렸다.
샌프란시스코의 재즈 클럽 키스톤 코너에서 녹음한 실황이다. 예순을 넘긴 블레이키가 스무 살 남짓한 마살리스 형제를 이끌던 메신저스 마지막 전성기의 기록이다.
- 윈턴 마살리스의 트럼펫과 브랜퍼드 마살리스의 알토, 빌 피어스의 테너가 앞줄에 선다. 젊은 연주자들의 날렵한 솔로와 그 뒤를 받치는 노장의 드럼이 대조를 이룬다.
- 몽크의 곡 「인 웍트 버드」가 실렸다. 1947년 몽크의 첫 녹음에서 맺은 인연이 수십 년 뒤 다음 세대의 메신저스에게 이어진 셈이다.
- 블레이키의 프레스 롤과 하이햇은 1950년대와 다름없이 솔로이스트를 밀어 올린다. 노장이 젊은이를 몰아붙이는 쪽으로 들릴 만큼 기세가 여전하다.
- 클럽 실황이라 관객의 반응과 연주자들의 열기가 그대로 담겼다. 블레이키는 무대에서 단원을 직접 소개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덜 알려진 이야기
블레이키의 아프리카풍 드럼은 흔히 1940년대 말 서아프리카 체류에서 왔다고 소개된다. 그러나 블레이키 자신은 인터뷰에서 북을 배우러 간 것이 아니라 종교와 철학을 공부하러 갔다고 거듭 말했고, 아프리카 음악의 영향을 받았다는 해석에 선을 그었다. 그가 직접 부인했음에도 이 이야기가 계속 퍼진 데에는, 흑인 음악가가 아프리카에서 뿌리를 찾는다는 서사가 매력적이었던 탓이 크다. 1961년 1월 메신저스의 첫 일본 순회는 일본 재즈 붐의 계기로 꼽힌다. 블레이키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음악가이자 한 사람으로 존중받았다고 회고했다. 시더 월턴이 쓴 「우게쓰」는 본래 「판타지 인 디」라는 제목이었으나, 일본 영화 「우게쓰 이야기」에서 따온 이름으로 바뀌어 1963년 실황 앨범의 표제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미국 바깥의 청중이 이 밴드에 무엇을 의미했는지 보여 주는 대목이다. 메신저스 녹음의 단단한 앙상블 뒤에는 블루노트의 독특한 관행이 있었다. 앨프리드 라이언은 녹음 전 리허설 시간에도 연주자들에게 돈을 치렀다. 당시 대부분의 재즈 레이블은 녹음 당일 몇 시간에 모든 것을 끝냈기에 드문 일이었다. 음반 표지와 라이너 노트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장부 속 사정이지만, 늘 돈에 쫓기던 젊은 단원들에게 이 리허설은 연습이자 생계였다.
용어 노트 📚🔎
비밥
(말뜻) 비밥(bebop)이라는 이름은 이 음악의 짧고 빠른 두 음을 입으로 흉내 낸 소리에서 나왔다고 흔히 설명한다. (재즈에서) 1940년대 디지 길레스피와 찰리 파커 등이 만든 재즈 스타일이다. 춤추기 좋은 큰 악단의 음악 대신, 작은 밴드가 아주 빠른 템포와 복잡한 화음 위에서 실력을 겨루듯 즉흥연주를 펼친다. 반 전체가 박자 맞춰 부르던 합창 대신, 잘하는 친구 몇 명이 빠른 손놀림을 겨루는 줄넘기 시합을 떠올리면 된다. 드럼도 박자를 일정하게 찍기보다 심벌로 흐름을 잇고 베이스 드럼으로 불쑥 찌르는 식으로 바뀌었다.
하드 밥
(말뜻) 하드(hard)는 단단하다는 뜻이다. 비밥을 더 단단하고 묵직하게 다졌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재즈에서) 1950년대 중반 아트 블레이키와 호레이스 실버 등이 이끈 스타일이다. 비밥의 빠르고 복잡한 연주에 블루스와 흑인 교회 음악(가스펠)의 끈적한 맛을 더했다. 학교 급식처럼 정확하게 만든 요리에 할머니 집 양념을 넣어 더 깊고 친숙한 맛이 나게 한 것과 비슷하다. 재즈 메신저스는 하드 밥을 대표하는 밴드로 꼽힌다.
리듬 섹션
(재즈에서) 밴드에서 피아노, 베이스, 드럼처럼 박자와 화음의 바닥을 까는 악기들을 함께 부르는 말이다. 트럼펫이나 색소폰이 즉흥연주를 하는 동안 이들은 곡이 흐트러지지 않게 받치면서도, 솔로에 반응해 같이 달아오르거나 숨을 고른다. 축구에서 수비수와 미드필더가 공을 돌려 공격수가 마음껏 슛하게 만드는 것과 같다. 블레이키는 이 바닥을 깔면서도 솔로이스트를 앞으로 떠미는 드러머로 유명했다.
프레스 롤
(말뜻) 프레스(press)는 누르다, 롤(roll)은 굴리다라는 뜻이다. 스틱을 북면에 눌러 대어 소리를 잘게 굴리는 주법이다. (재즈에서) 스네어 드럼을 아주 빠르게 연달아 쳐서 드르륵 하는 긴 소리를 만드는 것이다. 블레이키는 솔로가 바뀌거나 다음 바퀴로 넘어가기 직전에 이 소리를 크게 몰아쳐 연주자들의 등을 떠밀었다. 긴 줄넘기에서 줄 돌리는 친구가 지금 들어와! 하고 외쳐 주는 신호 같은 역할이다. 이 주법은 블레이키의 상표처럼 여겨진다. (다른 데서는) 프레스는 일상에서 언론이나 인쇄를 뜻하는 말로도 흔히 쓰인다.
부름과 응답
(말뜻) 영어 콜 앤드 리스폰스(call and response)를 옮긴 말이다. 한쪽이 부르고(call) 다른 쪽이 응답한다(response)는 뜻 그대로다. (재즈에서) 한 악기나 한 사람이 짧은 가락을 던지면 다른 악기들이 그에 답하듯 받아 연주하는 방식이다. 아프리카의 노래와 미국 흑인 교회에서 목사가 외치고 신도들이 아멘으로 받는 전통에서 왔다. 운동회에서 응원단장이 선창하면 반 전체가 구호를 받아 외치는 것과 똑같은 구조다. 「모닌」의 첫머리에서 피아노가 묻고 관악기들이 답하는 대목이 대표적인 예다.
코러스
(재즈에서) 곡의 형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바퀴 도는 단위를 말한다. 예를 들어 32마디짜리 곡이라면 32마디를 한 번 연주한 것이 한 코러스다. 즉흥연주자는 이 바퀴를 몇 번이고 돌며 솔로를 이어 간다. 운동장 트랙을 한 바퀴, 두 바퀴 도는 것처럼, 누구의 솔로 세 번째 코러스라고 하면 그 연주자가 세 번째 바퀴를 돌 때를 가리킨다. (다른 데서는) 일상에서는 합창단이나 대중가요의 후렴을 뜻하는 말로 더 흔히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