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race Silver
아버지의 부엌에서 울리던 섬의 노래와 교회의 블루스를 다섯 개의 악기에 담아, 하드밥이라는 말의 뜻을 몸소 보여 준 피아니스트.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함께한 사람들 ⏳🌊
- 가족존 타바레스 실버
카보베르데에서 건너온 아버지로, 부엌에서 연주하던 섬의 민요가 「송 포 마이 파더」의 뿌리가 되었다.
- 영향버드 파월
실버가 피아노의 귀감으로 삼은 비밥 피아니스트로, 날렵한 오른손 악구가 그의 연주에 녹아들었다.
- 동료스탄 게츠
1950년 하트퍼드에서 실버의 트리오를 통째로 고용해 그를 전국 무대로 이끌었다.
- 후원알프레드 라이언
블루노트 사장으로, 리허설 비용까지 대며 실버가 근 30년 동안 자기 음악을 다듬게 했다.
- 동료아트 블레이키
재즈 메신저스를 함께 만든 드러머로, 실버가 떠난 뒤에도 이름을 이어받고 우정을 지켰다.
- 동료조 헨더슨
「송 포 마이 파더」에서 가장 회자되는 테너 솔로를 남긴 1960년대 중반 밴드의 주역이다.
I. 노워크의 부엌 · 1928–1949 (0–21세)
(노워크) 1928년 9월, 미국 코네티컷주 노워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호레이스 워드 마틴 타바레스 실버였다. 아버지 존 타바레스 실버는 당시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카보베르데(오늘날 카보베르데 공화국) 마이우섬에서 건너온 이민자로, 노워크의 공장에서 일했다. 어머니 거트루드 에드먼즈는 코네티컷주 뉴커넌 태생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고, 이후의 성장기는 아버지 곁에서 보냈다고 회고록에 적었다. (섬노래) 주말이면 아버지와 카보베르데 출신 친척·이웃들이 바이올린과 기타, 만돌린으로 고향의 민요를 연주하며 부엌에서 춤을 추었다. 실버는 이 부엌 파티를 음악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억으로 꼽았다. 훗날 그의 곡에 배어든 단조의 애수와 흔들리는 리듬은 이 기억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런스퍼드) 열한 살 무렵 인근 유원지에서 지미 런스퍼드 악단의 연주를 듣고 음악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피아노 레슨을 받는 한편 고등학교에서는 테너 색소폰을 불었다. 색소폰에서는 레스터 영을, 피아노에서는 부기우기와 블루스, 그리고 버드 파월과 텔로니어스 몽크를 귀감으로 삼았다. 파월의 빠르고 날렵한 오른손과 몽크의 각진 화음은 그의 손에서 블루스의 흙내와 섞였다. (하트퍼드) 1940년대 후반 그는 하트퍼드와 코네티컷 일대의 클럽에서 피아노와 색소폰을 오가며 일했다. 지방 도시 하우스 밴드의 벌이는 넉넉지 않았다. 그러나 순회 오는 스타들의 반주를 맡는 일은 레퍼토리와 반주법을 몸으로 익히는 학교가 되었다.
II. 하트퍼드에서 버드랜드로 · 1950–1953 (22–25세)
(게츠) 1950년, 하트퍼드의 클럽 선다운에 스탄 게츠가 객원으로 왔다. 하우스 밴드였던 실버의 트리오—베이스의 조 캘러웨이, 드럼의 월터 볼든—가 반주를 맡았고, 게츠는 그 자리에서 트리오를 통째로 고용했다. 스물두 살의 실버는 1년 남짓 게츠와 순회하며 처음으로 전국 무대와 레코딩 스튜디오를 경험했다. 그의 자작곡 몇 편도 게츠의 녹음에 실렸다. (뉴욕) 1951년 게츠 밴드를 떠난 그는 뉴욕으로 옮겨 정착했다. 버드랜드의 월요 잼 세션에서 하우스 피아니스트로 일하며 콜먼 호킨스, 레스터 영, 베이시스트 오스카 페티퍼드 같은 선배들과 무대에 섰다. 십대 시절 레코드로 따라 불던 레스터 영의 밴드에서 피아노를 친 경험은 그에게 각별했다. 대도시의 생활비는 빠듯했고, 그는 닥치는 대로 일을 받았다. (블루노트) 1952년 알토 색소폰 주자 루 도널드슨의 블루노트 녹음에 참여한 것이 전기가 되었다. 도널드슨이 다음 녹음에 나서지 못하게 되자 사장 알프레드 라이언이 그 시간을 실버에게 내주었다고 전해진다. 드럼에는 아트 블레이키가 앉았다. 이렇게 시작된 블루노트와의 관계는 1980년 무렵까지 근 30년 이어졌다. (리허설) 라이언은 녹음 전 리허설 비용을 지급하는 드문 제작자였다. 실버는 곡을 쓰고 밴드와 미리 맞춰 볼 시간을 얻었다. 그의 음악이 즉흥의 우연보다 짜임새 있는 편곡과 도입부, 배경 악구에 기대게 된 데에는 이 작업 방식이 큰 몫을 했다.
III. 메신저스 · 1954–1956 (26–28세)
(버드랜드) 1954년 2월, 실버는 블레이키가 이끈 5인조의 일원으로 버드랜드 실황 녹음에 참여했다. 트럼펫은 클리퍼드 브라운, 알토는 루 도널드슨, 베이스는 컬리 러셀이었다. 블루노트가 「어 나이트 앳 버드랜드」로 낸 이 녹음에는 실버의 곡 「퀵실버」와 「스플릿 킥」이 실렸고, 훗날 하드밥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로 꼽히게 되었다. (마일스) 같은 해 그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프레스티지 녹음에도 불려 갔다. 4월의 「워킹」 세션과 6월 소니 롤린스가 함께한 세션에서 그는 블루스 냄새가 짙은 반주로 서늘하고 정제된 쿨 재즈가 유행하던 시대에 다른 길을 보여 주었다. 데이비스의 재기 과정에 실버의 반주가 한몫했다는 평가가 많다. (메신저스) 1954년 11월과 1955년 2월, 실버는 블레이키, 트럼펫의 케니 도럼, 테너의 행크 모블리, 베이스의 더그 왓킨스와 블루노트에서 녹음했다. 이 다섯은 공동 운영 밴드 재즈 메신저스가 되었다. 가스펠 찬송처럼 단순한 「더 프리처」를 두고 라이언은 너무 구식이라며 주저했지만 실버가 고집해 실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곡은 주크박스에서 팔려 나가며 밴드의 이름을 알렸다. (독립) 1956년 실버는 메신저스를 떠났다. 그는 회고록에서 당시 밴드 주변의 헤로인 문제로 경찰과의 마찰이 잦아지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고 적었다. 그 자신은 헤로인에 손대지 않았다. 밴드 이름은 블레이키가 이어받아 30여 년을 이끌었고, 두 사람의 우정은 끝까지 이어졌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리더작이지만, 쿨 재즈의 시대에 블루스의 무게를 되찾은 이 녹음에서 실버의 반주는 하드밥의 예고처럼 울린다.
- 곡은 12마디 블루스(12마디짜리 틀을 되풀이하는 블루스 형식)를 느긋한 중간 빠르기로 13분 넘게 펼친다. 빠르기를 뽐내던 비밥과 달리 한 걸음씩 걷는 듯한 무게가 핵심이다.
- 퍼시 히스의 베이스가 한 박에 한 음씩 걸어가듯 짚는 연주(워킹 베이스)와 케니 클라크의 심벌이 바닥을 깔고, 그 위에서 데이비스, 트롬본의 J. J. 존슨, 테너의 럭키 톰프슨이 차례로 솔로를 이어 간다.
- 실버의 반주(컴핑)를 따로 들어 볼 만하다. 솔로이스트의 숨 사이사이에 짧은 블루스 악구를 던져 넣어 대화하듯 받친다.
- 1954년 4월 뉴저지주 해컨색의 루디 반 겔더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다. 평론가들은 흔히 이 세션을 하드밥의 이른 선언으로 꼽는다.
블레이키와 함께 만든 공동 밴드의 첫 기록으로, 라이언이 주저했던 「더 프리처」가 결국 밴드의 이름을 알렸다.
- 「더 프리처」는 찬송가처럼 단순한 장조 선율을 트럼펫과 테너가 한목소리로(유니즌) 부르고, 피아노는 교회 반주처럼 화음을 두드린다. 복잡한 비밥 대신 누구나 따라 흥얼거릴 수 있는 가락을 택한 것이 당시로서는 파격이었다.
- 「두들린」은 블루스 틀 위에서 관악기들이 느긋하게 주고받는 곡이다. 훗날 존 헨드릭스의 가사가 붙어 노래로도 불렸다.
- 블레이키의 드럼은 2박과 4박 뒤에 스네어를 굴려 몰아치는 연주(프레스 롤)로 솔로이스트를 다음 코러스로 밀어 올린다.
- 1954년 11월과 1955년 2월 두 차례, 반 겔더의 해컨색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다. 빠른 비밥 곡 「룸 608」을 함께 들으면 이 밴드가 비밥에 뿌리를 두고 블루스와 가스펠 쪽으로 몸을 튼 과정이 보인다.
IV. 다섯 개의 악기 · 1956–1963 (28–35세)
(퀸텟) 독립한 실버는 트럼펫·테너 색소폰·피아노·베이스·드럼의 5인조를 평생의 기본 틀로 삼았다. 초기에는 아트 파머, 도널드 버드, 행크 모블리, 더그 왓킨스, 드럼의 루이스 헤이스가 오갔다. 1956년 11월 녹음한 「식스 피시스 오브 실버」의 「세뇨르 블루스」는 그의 첫 대중적 성공이었다. (고정멤버) 1958년부터는 트럼펫 블루 미첼, 테너 주니어 쿡, 베이스 진 테일러, 드럼 루이스 헤이스(뒤에 로이 브룩스)로 이어진 편성이 6년 가까이 유지되었다. 같은 사람들과 순회와 녹음을 거듭한 덕에 밴드는 솔로 뒤에 깔리는 짧은 반복 악구(리프)와 정교한 끊김을 숨 쉬듯 소화했다. 「블로잉 더 블루스 어웨이」(1959), 「호레이스-스코프」(1960), 빌리지 게이트 실황(1961)이 이 시기에 나왔다. (펑키) 평론가들은 그의 음악에 밴 블루스와 교회 음악의 흙내를 펑키라고 불렀다. 「시스터 세이디」「필시 맥내스티」 같은 곡은 동료들의 레퍼토리가 되었다. 「니카스 드림」은 텔로니어스 몽크의 후원자로 알려진 판노니카 드 쾨니히스바르터 남작부인에게 바친 곡이었다. (저작권) 그를 경제적으로 지탱한 것은 출판권이었다. 그는 이름 Horace를 거꾸로 쓴 에카로(Ecaroh) 뮤직을 세워 자기 곡의 저작권을 직접 관리했다. 출판권을 레이블이나 매니저에게 넘기는 일이 흔하던 시절에 드문 선택이었다. 「두들린」이 레이 찰스에게 녹음되는 등 곡이 다른 이의 손에서 연주될 때마다 인세는 그에게 돌아왔다. (일본) 1962년 일본 순회를 다녀온 뒤에는 그곳의 인상을 담은 「더 도쿄 블루스」를 녹음했다. 여행은 그에게 늘 새 리듬을 가져다주는 통로였다.
메신저스를 떠나 처음 꾸린 5인조의 앨범으로, 수록곡 「세뇨르 블루스」는 그의 첫 대중적 성공이었다.
- 「세뇨르 블루스」는 한 마디를 셋씩 두 묶음으로 세는 박자(8분의 6박자) 위에 단조 블루스를 얹은 곡이다. 라틴 음악처럼 출렁이는 리듬이 아버지의 섬 음악을 떠올리게 한다는 평이 많다.
- 피아노 왼손과 베이스가 같은 음형을 고집스럽게 되풀이하는 동안 트럼펫의 도널드 버드와 테너의 행크 모블리가 어둡고 끈적한 주제를 함께 연주한다.
- 루이스 헤이스의 드럼은 라틴 리듬과 스윙(박자의 뒷부분을 살짝 끌어 밀고 당기는 느낌) 사이를 오가며 곡에 긴장을 준다.
- 1956년 11월 반 겔더 스튜디오 녹음. 같은 곡을 가사를 붙여 노래로 다시 녹음하기도 했을 만큼 실버 스스로 아낀 곡이었다.
6년 가까이 함께한 미첼·쿡 편성이 가장 단단하던 시기의 기록으로, 펑키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가장 잘 보여 준다.
- 「시스터 세이디」에서는 솔로 뒤에 관악기들이 짧은 반복 악구(리프)를 외치듯 넣는다. 교회에서 목사가 부르고 신도가 답하는 방식(콜 앤드 리스폰스)을 그대로 옮긴 듯한 짜임이다.
- 표제곡은 빠른 빠르기에서도 블루스 악구를 놓지 않는 실버의 피아노가 중심이다. 오른손의 짧고 날카로운 악구를 왼손이 낮은 화음으로 쿡쿡 찌르며 받친다.
- 「피스」는 조용한 발라드로, 화음 사이의 여백을 길게 남겨 이 밴드가 소리를 아낄 줄도 알았음을 보여 준다.
- 블루 미첼의 밝고 둥근 트럼펫과 주니어 쿡의 부드러운 테너가 늘 같은 자리에서 화음을 맞추어, 오래 함께한 밴드만의 앙상블이 들린다.
V. 아버지를 위한 노래 · 1964–1969 (36–41세)
(브라질) 1964년 초 실버는 브라질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들은 보사노바의 가볍게 흔들리는 리듬이 어린 시절 아버지가 부엌에서 연주하던 카보베르데 음악의 기억을 불러냈다고 그는 회고했다. 돌아와 쓴 곡이 「송 포 마이 파더」였다. (교체) 같은 해 오랜 편성이 흩어지고 트럼펫 카멜 존스, 테너 조 헨더슨, 베이스 테디 스미스, 드럼 로저 험프리스가 새로 들어왔다. 1964년 10월 녹음한 표제곡은 앞서 미첼·쿡과 녹음한 곡들과 함께 한 장의 앨범으로 묶였고, 표지에는 아버지 존의 사진이 실렸다. 앨범은 블루노트에서 가장 많이 팔린 음반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카보베르데) 이듬해 「더 케이프 버디언 블루스」에서 그는 아버지의 고향을 제목에 직접 내걸었다. 트럼펫 우디 쇼와 조 헨더슨이 앞에 섰고, 몇 곡에는 트롬본의 J. J. 존슨이 가세해 세 관악기의 화음을 두텁게 했다. 1966년 「더 조디 그라인드」로 이어진 이 시기의 음악은 단단한 하드밥 위에 춤의 리듬을 얹었다. 이민자 아버지에 대한 경의가 그의 음악에서 가장 대중적인 순간을 낳은 셈이었다. (블루노트) 1966년 블루노트는 리버티 레코드에 팔렸고, 라이언은 이듬해 물러났다. 실버는 레이블에 남았다. 젊은 트럼펫 주자 랜디 브레커 등이 그의 밴드를 거쳐 갔고, 그는 동료들이 하나둘 떠난 뒤에도 블루노트의 가장 오래된 전속 음악가로 남았다.
브라질에서 깨어난 카보베르데의 기억을 아버지에게 바친 곡으로, 앨범 표지에는 아버지 존의 사진이 실렸다.
- 곡은 테디 스미스의 베이스와 실버의 왼손이 같은 음형을 고집스럽게 되풀이하는 반주(오스티나토)로 시작한다. 이 짧은 음형 하나가 곡 전체의 얼굴이 된다.
- 로저 험프리스의 드럼은 보사노바처럼 가볍게 흔들리는 리듬을 깔고, 관악기 둘이 단조의 주제를 화음으로 노래한다.
- 실버의 솔로가 먼저 나온다. 몇 개의 블루스 동기를 되풀이하며 크게 꾸미지 않고 리듬으로 밀어붙인다.
- 가장 자주 회자되는 대목은 조 헨더슨의 테너 솔로다. 짧은 동기를 던지고 쉼표를 둔 뒤 조금씩 바꿔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재즈 학생들이 악보로 옮겨 연습하는 교재가 될 만큼 널리 분석되었다.
- 표제곡은 1964년 10월 뉴저지주 잉글우드클리프스의 반 겔더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다. 앨범에는 1963년 블루 미첼·주니어 쿡과 녹음한 곡들이 함께 실려 두 편성의 소리를 비교해 들을 수 있다.
아버지의 고향 이름을 제목에 내건 앨범으로, 「송 포 마이 파더」의 정서를 한층 활달한 춤의 리듬으로 이어 갔다.
- 표제곡은 실버가 아버지 고향의 춤 리듬을 염두에 두고 썼다고 밝힌 곡으로, 스윙과 라틴 리듬 사이를 오가는 경쾌한 흔들림이 들린다.
- 스무 살 남짓의 트럼펫 주자 우디 쇼의 날카롭고 넓은 음역의 솔로는 이 앨범에서 가장 신선한 소리로 꼽힌다. 빠른 곡 「너트빌」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 몇 곡에는 트롬본의 J. J. 존슨이 가세해 관악기가 셋이 된다. 두 관악기일 때보다 화음이 두텁고 무게 있게 울린다.
- 조 헨더슨의 테너는 거칠고 어두운 음색으로 쇼의 밝은 트럼펫과 대조를 이룬다.
VI. 마음의 합중국 · 1970–1980 (42–52세)
(전환) 1970년 무렵 실버는 형이상학과 자기 계발, 건강한 생활에 관한 책을 탐독하며 음악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는 음악이 듣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낫게 해야 한다고 믿었고, 직접 가사를 써서 가수에게 맡기기 시작했다. 블루스의 흙내 대신 위로와 권유의 말이 앞에 나섰다. (삼부작) 「더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마인드」 삼부작—「댓 힐링 필링」(1970), 「토털 리스폰스」(1971), 「올」(1972)—에는 앤디 베이, 게일 넬슨, 살로메 베이 같은 가수가 참여했다. 가사는 스스로를 돌보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권유에 가까웠다. 당시 평단은 설교조라며 대체로 냉담했고, 오랜 팬들도 당혹스러워했다. (가정) 이 무렵 그는 결혼해 아들 하나를 두었다. 가족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말을 아꼈다. (연작) 1975년부터 1978년까지 그는 5인조에 금관, 목관, 타악기, 합창, 현악을 차례로 덧붙인 「실버 앤」 연작을 냈다. 「실버 앤 브라스」에서 「실버 앤 스트링스 플레이 더 뮤직 오브 더 스피어스」까지, 작은 편성 안에서 다듬은 화성 감각을 큰 편성으로 넓히려는 시도였다. 마지막 편의 부제 '천구의 음악'은 그가 품은 우주적 조화에 대한 믿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서부) 1970년대 그는 캘리포니아로 거처를 옮겨 말리부에 자리 잡았다. 1980년 무렵 블루노트와의 관계가 끝났다. 1952년 트리오 녹음에서 시작된, 한 레이블과 한 음악가의 드물게 긴 동행이었다.
음악이 사람을 낫게 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직접 가사를 쓴 삼부작의 첫 편으로, 당시엔 외면받았으나 그의 내면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낸다.
- 노래들은 듣는 사람에게 스스로를 돌보고 마음을 열라고 조용히 권하는 말투다. 설교하듯 외치기보다 곁에서 타이르듯 다가오는 화법으로 들린다.
- 앤디 베이를 중심으로 재키 버델과 게일 넬슨이 곡을 나누어 가사를 맡는다. 베이의 낮고 깊은 음성은 메시지의 무게를 실어 주는 역할을 한다.
- 가사가 앞에 섰어도 밑바탕은 여전히 실버 퀸텟의 그루브(몸을 흔들게 만드는 리듬의 흐름)다. 연주곡들을 함께 들으면 하드밥의 문법이 그대로 살아 있음을 알 수 있다.
VII. 하드밥 그랜드팝 · 1981–2014 (53–86세)
(독립) 대형 레이블이 재즈 계약을 줄여 가던 1981년, 실버는 직접 레이블 실베토를 세웠다. 그는 이를 몸과 마음을 돌보는 음악을 위한 그릇으로 여겼고, 음반 판매는 상당 부분 우편 주문에 기댔다고 전해진다. 자기 곡의 출판권을 일찍부터 쥐고 있었기에 이런 독립이 가능했다. (복귀) 1990년대 그는 다시 큰 레이블로 돌아왔다. 컬럼비아에서 「잇츠 갓 투 비 펑키」(1993)와 「펜슬 패킨 파파」(1994)를, 임펄스에서 「더 하드밥 그랜드팝」(1996)과 「어 프리스크립션 포 더 블루스」(1997)를, 버브에서 「재즈 해즈 어 센스 오브 유머」(1999)를 냈다. 하드밥의 할아버지라는 제목은 스스로에게 붙인 농담 섞인 별명이었고, 음악은 다시 관악기가 앞에 선 블루스의 그루브로 돌아가 있었다. (영예) 1995년 미국 국립예술기금은 그를 재즈 마스터로 선정했다. (회고록) 2006년 캘리포니아대학교 출판부에서 자서전 「렛츠 겟 투 더 니티 그리티」를 냈다. 노워크의 부엌 파티에서 블루노트 시절까지를 담담히 적은 이 책은 그의 생애를 전하는 가장 중요한 1차 자료가 되었다. 책 곳곳에서 그는 동료들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음악이 사람을 낫게 한다는 믿음을 되풀이했다. (마지막) 말년에는 무대에서 물러났다. 2014년 6월 18일, 미국 뉴욕주 뉴로셸의 자택에서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송 포 마이 파더」와 「세뇨르 블루스」, 「시스터 세이디」는 지금도 잼 세션과 재즈 교육 현장의 표준 레퍼토리로 연주된다.
덜 알려진 이야기
(카보베르데) 「송 포 마이 파더」의 리듬은 흔히 브라질 보사노바의 영향으로만 소개된다. 그러나 실버 자신은 회고록과 인터뷰에서 그 뿌리를 아버지의 고향 카보베르데에 두었다. 19세기 이래 카보베르데 사람들은 포경선 선원으로, 또 크랜베리 농장 일꾼으로 뉴잉글랜드에 건너와 공동체를 이루었는데, 실버의 집안도 이 이민사의 한 갈래였다. 미국 사회의 흑백 구분에 잘 들어맞지 않는 작은 이민 집단이었던 탓에, 재즈사 서술에서 이 배경은 오랫동안 각주로 밀려나 있었다. (출판권) 에카로 뮤직은 실버 개인의 경제사를 넘어선다. 1950~60년대 많은 재즈 연주자가 녹음 대가로 받은 일시금 외에는 자기 곡에서 거의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실버는 일찍부터 출판권을 직접 쥐어, 「두들린」이나 「송 포 마이 파더」가 다른 연주자의 음반에 실릴 때마다 수입이 돌아오게 했다. 화려한 일화가 아니어서 대중적 전기에는 잘 오르지 않지만, 그가 1980년대에 대형 레이블 없이 독립 레이블을 꾸릴 수 있었던 바탕으로 연구자들이 주목하는 대목이다. (삼부작) 1970년대 초의 가창 삼부작은 발표 당시 평단의 외면을 받고 오랫동안 절판 상태로 남았다. 21세기 들어 블루노트가 이를 한데 묶어 재발매하면서, 설교조라는 평 아래 묻혀 있던 실버의 내면—음악이 사람을 치유해야 한다는 진지한 믿음—을 다시 들여다보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용어 노트 📚🔎
하드밥
(말뜻) 영어 hard bop 은 단단한(hard) 비밥(bop)이라는 뜻이다. 비밥의 뼈대 위에 더 묵직하고 단단한 살을 붙였다는 느낌이 이름에 담겨 있다. (재즈에서) 1950년대 중반 뉴욕을 중심으로 나타난 재즈 스타일이다. 비밥의 빠르고 복잡한 화음은 그대로 쓰되, 블루스와 교회 음악(가스펠)의 끈적하고 흥겨운 느낌을 짙게 섞었다. 트럼펫과 테너 색소폰 두 관악기에 피아노·베이스·드럼이 붙는 5인조가 흔한 편성이었고, 호레이스 실버와 아트 블레이키가 대표 주자다. 어려운 수학 공식을 다 쓰면서도 운동장에서 친구들이 다 같이 따라 부를 수 있는 응원가를 만든 것과 비슷하다.
펑키
(말뜻) 영어 funky 는 본래 퀴퀴하다, 냄새가 난다는 뜻의 속어였다. 재즈 연주자들은 이 말을 거꾸로 칭찬으로 써서, 땀내 나고 흙내 나는 진짜배기 느낌을 가리켰다. (재즈에서) 1950년대 재즈에서 펑키는 블루스와 가스펠에서 온 끈적하고 몸이 저절로 들썩이는 느낌을 말한다. 실버의 「더 프리처」「시스터 세이디」가 그 대표로 꼽혔다. 교과서처럼 깔끔하게 끓인 국보다 할머니가 대충 손맛으로 끓였는데 더 깊은 맛이 나는 국 — 그 손맛이 펑키다. (다른 데서는) 오늘날에는 1970년대에 유행한 춤 음악 장르 펑크(funk)나, 옷차림이 독특하고 멋지다는 뜻으로도 쓴다.
컴핑
(말뜻) 반주하다(accompany) 또는 보완하다(complement)라는 영어에서 줄여 만든 말로 알려져 있다. (재즈에서) 솔로이스트가 즉흥연주를 하는 동안 피아노나 기타가 뒤에서 화음을 끊어 치며 받쳐 주는 반주를 말한다. 악보대로 똑같이 치는 것이 아니라, 솔로이스트의 말을 듣고 그때그때 맞장구치듯 화음을 넣는 것이 핵심이다. 친구가 앞에 나가 발표할 때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거나 적절한 순간에 그렇지! 하고 받쳐 주는 것과 같다.
리프
(재즈에서) 몇 마디짜리 짧은 악구를 여러 번 되풀이하는 것이다. 실버의 밴드에서는 한 사람이 솔로를 하는 동안 다른 관악기들이 뒤에서 리프를 외치듯 넣어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운동회에서 달리는 친구 뒤로 응원단이 같은 구호를 박자 맞춰 되풀이하는 것과 비슷하다. (다른 데서는) 록 음악에서는 곡을 대표하는 기타의 반복 악구를 리프라고 부른다.
오스티나토
(말뜻) 이탈리아어 ostinato 는 고집스러운, 끈질긴이라는 뜻이다. 같은 음형을 끈질기게 되풀이한다는 이 기법의 성격이 이름 그대로 드러난다. (재즈에서) 베이스나 피아노 왼손이 짧은 음형을 곡 내내 혹은 한 부분 동안 똑같이 반복하는 반주다. 위에서 선율과 솔로가 바뀌어도 바닥의 음형은 변하지 않아 곡에 최면 같은 안정감을 준다. 「송 포 마이 파더」 첫머리가 대표적이다. 줄넘기할 때 친구 둘이 돌리는 줄이 일정하게 같은 박자로 돌아가고, 그 안에서 뛰는 사람만 이런저런 묘기를 부리는 모습을 떠올리면 된다.
코러스
(재즈에서) 곡의 형식 전체를 한 바퀴 도는 단위를 말한다. 12마디 블루스라면 12마디가 한 코러스다. 솔로이스트는 이 한 바퀴를 몇 번 도느냐로 솔로 길이를 정하고, 그래서 그의 세 번째 코러스가 절정이었다 같은 말을 한다. 운동장 트랙을 한 바퀴, 두 바퀴 도는 것과 같아서, 같은 길을 돌지만 바퀴마다 속도와 힘이 달라진다. (다른 데서는) 일반적으로는 여러 사람이 함께 부르는 합창이나, 대중가요에서 되풀이되는 후렴을 뜻한다.
보사노바
(말뜻) 포르투갈어 bossa nova 는 새로운 경향, 새 물결이라는 뜻이다. 1950년대 말 브라질 젊은 음악가들이 내놓은 새로운 감각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재즈에서) 브라질의 삼바 리듬을 더 조용하고 부드럽게 다듬어 재즈의 화음과 섞은 음악이다. 기타나 드럼이 가볍게 흔들리는 리듬을 계속 깔아 주는 것이 특징이고, 1960년대 초 미국 재즈 연주자들 사이에 크게 유행했다. 신나게 뛰는 삼바가 운동장 달리기라면, 보사노바는 해 질 녘 바닷가를 천천히 걷는 걸음걸이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