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is Redding
교회에서 배운 간청의 창법을 거친 목소리 그대로 세속의 노래에 실어, 남부 소울의 문법을 세운 가수.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함께한 사람들 ⏳🌊
- 영향리틀 리처드
같은 메이컨 출신의 우상으로, 레딩은 그의 밴드 업세터스에서 무대를 배웠다.
- 영향샘 쿡
발성과 작곡의 본보기였고, 레딩은 그의 죽음 뒤 「오티스 블루」에 그의 곡 세 곡을 실었다.
- 가족젤마 레딩
1961년 결혼한 아내로, 그의 사후 유산과 이름을 지키는 일을 맡았다.
- 동료필 월든
대학생 시절부터 매니저를 맡았고, 출판사 레드월 뮤직을 함께 세운 평생의 동업자였다.
- 동료스티브 크로퍼
MG's의 기타리스트로, 「미스터 피티풀」과 「더 독 오브 더 베이」를 함께 쓴 작곡 파트너였다.
- 영향아레사 프랭클린
그의 「리스펙트」를 다시 불러 빌보드 정상에 올리며, 그 노래를 시대의 찬가로 바꿔 놓았다.
I. 도슨과 메이컨의 소년 · 1941–1958
(출생) 1941년 9월, 미국 조지아주 도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오티스 레딩 시니어는 소작농으로 일하다 훗날 로빈스 공군 기지에서 일했고, 틈틈이 침례교회 설교자로 강단에 섰다. 어머니는 패니 로즈먼 레딩이었다. 그는 여섯 남매 가운데 넷째이자 첫아들이었고,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세 살 무렵 가족은 조지아 중부의 도시 메이컨으로 옮겨 흑인 공공 임대 주택단지인 틴들 하이츠에 자리를 잡았다. (성가대) 노래는 교회에서 시작됐다. 그는 바인빌 침례교회 성가대에서 가스펠을 불렀고, 기타와 피아노와 드럼도 거의 혼자 익혔다. 설교자였던 아버지는 세속 음악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전해진다. 그래도 소년의 귀는 라디오의 리듬앤드블루스, 특히 같은 메이컨 출신인 리틀 리처드의 소리로 향했다. (가장) 십 대 중반에 아버지가 결핵으로 쓰러지면서 집안 형편이 기울었다. 그는 열다섯 살 무렵 볼러드 허드슨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우물 파는 일과 주유소 일을 하며 생활비를 보탰다. 소년은 노래를 꿈으로만 두지 않고 벌이의 수단으로 진지하게 붙들었다. 일찍부터 돈의 무게를 안 이 경험은 훗날 그가 저작권과 사업을 손수 챙기는 태도로 이어졌다. (경연) 첫 돌파구는 메이컨 더글러스 극장의 십 대 장기 자랑이었다. 지역 디제이 햄프 스웨인이 진행하던 이 무대에서 그는 리틀 리처드의 「히비 지비스」 같은 곡을 불러 5달러의 상금을 받았고, 열다섯 주 연속으로 우승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교회에서 몸에 익힌 가스펠의 호소하는 창법을 세속의 리듬앤드블루스에 그대로 옮겨 담는 방식은, 이미 이 무렵에 그의 것이 되어 있었다.
II. 리틀 리처드의 그늘 · 1958–1962
(업세터스) 1957년 리틀 리처드가 로큰롤을 접고 신학의 길로 들어서자, 그의 밴드 업세터스는 주인 없이 남부 순회를 이어 갔다. 레딩은 한동안 이 밴드에 가수로 합류해 무대를 돌았다. 우상의 빈자리를 대신 메우는 동안 그는 객석을 휘어잡는 법, 땀에 젖은 채 끝까지 밀어붙이는 무대 매너를 몸으로 배웠다. (젤마) 1959년 무렵 그는 젤마 앳우드를 만났다. 두 사람은 1961년 8월에 결혼해 메이컨에 가정을 꾸렸고, 자녀들을 두었다. 젤마는 그의 짧은 생애 내내 곁을 지켰고,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의 유산과 이름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파인토퍼스) 생계를 위해 그는 메이컨의 인기 밴드 조니 젱킨스 앤 더 파인토퍼스에서 운전기사 겸 가수로 일했다. 기타리스트 젱킨스는 왼손잡이로 기타를 거꾸로 잡고 치는 화려한 연주로 이름이 나 있었다. 이 밴드의 공연을 잡아 주던 이가 백인 대학생 필 월든이었다. 월든은 곧 레딩의 매니저가 되었고, 인종 분리가 엄연하던 남부에서 맺어진 흑인 가수와 백인 매니저의 이 동업은 레딩이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습작) 1960년 그는 로스앤젤레스에 잠시 머물며 첫 녹음을 남겼고, 메이컨으로 돌아와 리틀 리처드의 외침을 빼닮은 「샤우트 바말라마」를 지역 레이블에서 냈다. 아직은 우상의 목소리를 빌려 쓰는 단계였다. 자기만의 목소리를 찾는 일은 뜻밖에도, 남의 녹음을 따라간 멤피스의 한 스튜디오에서 찾아왔다.
III. 남은 40분 · 1962–1964
(멤피스) 1962년 10월, 레딩은 젱킨스의 녹음을 위해 멤피스의 스택스 스튜디오까지 차를 몰았다. 옛 극장을 고쳐 만든 이 스튜디오는 짐 스튜어트와 그의 누나 에스텔 액스턴이 운영했고, 배급은 뉴욕의 애틀랜틱 레코드가 맡고 있었다. 젱킨스의 녹음이 신통치 않게 끝나자, 애틀랜틱 쪽 연락책 조 갤킨 등이 남은 시간을 운전기사 청년에게 달라고 청했다. 주어진 시간은 40분 남짓이었다고 전해진다. (데뷔) 그가 부른 곡은 직접 쓴 느린 발라드 「디즈 암스 오브 마인」이었다. 스티브 크로퍼가 피아노를, 젱킨스가 기타를 맡았다. 이 곡은 스택스의 자매 레이블 볼트에서 나와 1963년 리듬앤드블루스 차트 20위권에 들었고, 운전기사로 따라왔던 청년은 단숨에 레이블의 기대주가 됐다. (MG's) 스택스의 하우스 밴드 부커 T. 앤 더 MG's는 흑인과 백인 연주자가 섞인, 당시 남부에서 드문 조합이었다. 오르간의 부커 T. 존스, 기타의 크로퍼, 드럼의 앨 잭슨 주니어, 그리고 곧 베이스를 맡은 도널드 덕 던이 그의 소리를 받쳤다. 악보를 읽지 못했던 레딩은 혼 섹션이 불 가락을 입으로 흥얼거려 전했고, 연주자들은 그 자리에서 편곡을 짰다. 이런 헤드 어레인지먼트 방식은 스택스 사운드의 바탕이 됐다. (별명) 1964년의 「미스터 피티풀」은 그의 애처로운 창법을 두고 한 라디오 디제이가 붙인 별명을, 크로퍼와 함께 아예 곡으로 만든 것이었다. 자신을 놀리는 말을 노래의 무기로 바꾸는 여유가 이때부터 보였다. 같은 해 첫 앨범 「페인 인 마이 하트」가 나오며, 그는 남부 흑인 클럽 순회의 단골 주인공이 됐다.
남의 녹음 세션에 남은 40분 동안 붙든 데뷔곡이다. 운전기사로 따라온 청년의 목소리가 처음 테이프에 새겨진 순간이 그대로 담겼다.
- 크로퍼의 피아노가 한 박을 셋으로 쪼개 또박또박 짚는(셋잇단음) 반주가 곡 전체를 받쳐, 느린 춤곡처럼 흔들리는 리듬을 만든다.
- 첫 소절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럽다가, 같은 간청을 되풀이할수록 목에 힘이 실리며 거칠게 갈라지는 결이 드러난다.
- 젱킨스의 기타는 화려한 솔로 없이 짧은 장식음만 덧대고 물러나, 노래가 맨 앞에 서도록 자리를 비워 둔다.
- 급히 잡은 녹음이라 다듬어지지 않은 소박함이 남아 있는데, 그것이 오히려 데뷔곡의 진심처럼 들린다.
IV. 소울의 사전 · 1965–1966
(샘 쿡) 1964년 12월, 그가 가장 존경하던 가수 샘 쿡이 로스앤젤레스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 레딩은 쿡의 매끄러운 발성과 곡을 쓰는 능력을 늘 본보기로 삼았다. 이듬해 7월, 그는 공연 일정 사이 하루 남짓 동안 거의 앨범 한 장 분량을 녹음했고, 그렇게 나온 「오티스 블루」에는 쿡의 곡이 세 곡이나 실렸다. 그는 슬픔을 추모사가 아니라 커버로 표했다. (커버) 이 앨범에는 템테이션스가 그해 정상에 올린 「마이 걸」과 롤링 스톤스의 「새티스팩션」도 실렸다. 남의 히트곡을 자기 식으로 비틀어 부르는 솜씨가 여기서 만개했다. 그러나 무게중심은 자작곡에 있었다. 제리 버틀러와 함께 쓴 발라드 「아이브 빈 러빙 유 투 롱」은 팝 차트 21위에 올라 그의 첫 크로스오버 히트가 됐고, 직접 쓴 「리스펙트」는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온 남자의 고단한 요구를 담았다. (사업) 돈이 들어오자 그는 그것을 굴릴 줄 알았다. 월든과 함께 음악 출판사 레드월 뮤직을 세워 자기 곡의 저작권을 직접 챙겼고, 자기 레이블 조티스를 만들어 메이컨의 후배들을 녹음했다. 1960년대 중반에는 메이컨 북쪽 라운드오크에 넓은 목장을 사 빅 오 목장이라 불렀다. 우물을 파던 소년이 땅을 가진 사람이 된 셈이었다. (확장) 1966년 4월 로스앤젤레스의 클럽 위스키 어 고고 공연은 백인 록 관객이 그를 발견하는 계기가 됐다. 그해 가을 앨범 「컴플리트 앤드 언빌리버블: 디 오티스 레딩 딕셔너리 오브 소울」은 제목처럼 그가 쌓은 소울의 어휘를 집대성했고, 1930년대 스탠더드를 뜨겁게 뒤집은 「트라이 어 리틀 텐더니스」가 여기 실렸다. 9월에는 영국으로 건너가 TV 쇼 「레디 스테디 고!」의 특집에 출연했다.
제리 버틀러와 함께 쓴 발라드로, 그를 처음 팝 차트 깊숙이 올려놓았다. 오래된 사랑의 지침과 놓지 못함을 그는 외침보다 망설임으로 노래했다.
- 한 마디를 셋씩 묶어 흔들리듯 흐르는 느린 박자(6/8박자) 위에서, 혼 섹션이 길게 부풀었다 가라앉으며 숨 쉬듯 반주한다.
- 레딩은 박자보다 살짝 늦게 들어가며 말하듯 노래해, 오래 사랑해 온 사람의 지친 망설임을 그려 낸다.
- 끝부분에서 가사는 점점 짧아지고 같은 말과 외마디를 되풀이하는 즉흥(애드리브)으로 바뀌며 감정이 터져 나온다.
- 1967년 몬터레이 무대의 연주는 스튜디오판보다 더 느리고 길게 끌어, 그날 공연에서 객석이 가장 숨죽인 대목으로 꼽힌다.
「오티스 블루」에 실린 자작곡으로, 일하고 돌아온 남자의 요구를 담았다. 2년 뒤 아레사 프랭클린의 손에서 전혀 다른 노래로 다시 태어난다.
- 앨 잭슨의 드럼이 둘째·넷째 박을 세게 치는(백비트) 리듬으로 첫 박부터 몰아쳐, 빠른 행진처럼 곡을 끌고 간다.
- 혼 섹션이 짧게 끊어 반복하는 가락(리프)이 보컬의 말 사이사이를 받아쳐, 노래와 관악기가 대화하듯 주고받는다.
- 화자는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온 남자로, 거칠게 외치면서도 결국 바라는 것은 존중이라는 정서가 곡을 관통한다.
- 아레사 프랭클린 판에 새로 들어간 철자 부르기 대목과 코러스는 원곡에 없다. 두 판을 나란히 들으면 같은 곡이 화자에 따라 얼마나 달라지는지 들린다.
롤링 스톤스의 히트곡을 스택스의 방식으로 뒤집은 커버다. 남의 노래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솜씨가 가장 대담하게 드러난다.
- 원곡에서 퍼즈 기타(일부러 찌그러뜨린 전기 기타 소리)가 맡던 유명한 반복 가락을 여기서는 혼 섹션이 불어, 전혀 다른 질감이 된다.
- 원곡보다 빠르고 들썩이는 템포 위에서 덕 던의 베이스가 쉬지 않고 뛰어다니며 춤곡의 뼈대를 세운다.
- 레딩은 원곡의 가사를 충실히 따르기보다 소리와 리듬 위주로 뭉개거나 새로 지어 불러, 뜻보다 몸으로 전해지는 노래가 된다.
V. 사랑의 군중 · 1967
(유럽) 1967년 봄, 스택스는 소속 가수들을 묶은 스택스 볼트 레뷰로 유럽 순회를 떠났다. 런던과 파리의 객석은 미국보다 오히려 뜨겁게 반응했고, 그해 영국 음악지 멜로디 메이커의 독자 투표에서 그는 엘비스 프레슬리를 제치고 최고의 남자 가수로 뽑혔다. 같은 해 스택스의 가수 칼라 토머스와 듀엣 앨범 「킹 앤드 퀸」을 내 「트램프」를 히트시켰다. (아레사) 그해 봄 아레사 프랭클린이 그의 「리스펙트」를 다시 불러 빌보드 정상에 올렸다. 남자의 요구였던 노래는 여성의 당당한 선언으로 바뀌었고, 커버가 원곡보다 유명해졌다. 레딩은 그해 여름 무대에서 이 곡을 소개하며, 한 여자 친구가 자기 노래를 가져가 버렸다고 웃으며 말했다. (몬터레이) 6월 17일 밤, 그는 캘리포니아의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에 MG's와 함께 섰다. 히피 세대로 가득한 객석을 그는 사랑의 군중이라 부르며 「셰이크」로 시작해 「트라이 어 리틀 텐더니스」로 끝냈다. 남부의 흑인 소울 가수가 백인 록 세대의 축제를 사로잡은 이 무대는 그를 장르의 경계 너머로 데려갔다. 이 무렵 영국의 비지스는 「투 러브 섬바디」를 그에게 들려주었다고 전해지지만, 그가 이 곡을 녹음할 기회는 오지 않았다. (목) 그는 메이컨의 후배 아서 콘리를 이끌어, 샘 쿡의 곡을 바탕으로 한 「스위트 소울 뮤직」을 함께 쓰고 제작해 큰 히트로 만들었다. 그러나 쉼 없는 공연으로 목은 상해 있었다. 그해 가을 그는 성대에 생긴 혹(폴립)을 떼는 수술을 받았고, 한동안 노래도 말도 삼가야 했다. 목소리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다고 전해진다.
1930년대 스탠더드를 느린 발라드에서 폭발적인 소울로 끌어올린 곡이다. 1967년 몬터레이 무대를 닫은 곡이기도 하다.
- 처음 1분 남짓은 낮고 부드럽게 속삭이는 발라드로, 마이크 앞에서 부드럽게 노래하던 옛 가수들(크루너)의 원곡 정서를 존중하며 출발한다.
- 앨 잭슨의 드럼이 처음엔 북의 테두리만 가볍게 치다 점점 힘을 더해, 곡이 서서히 빨라지고 뜨거워지는 짜임을 이끈다.
- 후반부에서 레딩은 뜻 없는 짧은 음절을 잘게 쪼개 되풀이하며 리듬 악기처럼 노래하고, 밴드는 두 배로 치솟는 박자로 따라붙는다.
- 편곡에는 아이작 헤이스가 손을 보탰고, 반주는 부커 T. 앤 더 MG's가 맡았다.
- 몬터레이 무대에서는 곡이 끝난 듯하다가 다시 절정으로 돌아오기를 되풀이하며 공연을 닫아, 그날 밤의 가장 유명한 순간이 됐다.
VI. 부두에 앉아 · 1967
(소살리토) 그해 8월, 샌프란시스코의 클럽 공연을 위해 머물던 그는 만 건너 소살리토의 하우스보트에서 새 곡의 실마리를 붙들었다. 부두에 앉아 하릴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한 남자의 쓸쓸함을 담은, 그때까지의 그와는 결이 다른 노래였다. 그는 비틀스의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를 거듭 들으며 자기 소리를 넓히고 싶어 했다고 알려져 있다. (복귀) 수술에서 회복한 그는 11월 말부터 멤피스 스튜디오에 머물며 많은 곡을 녹음했다. 크로퍼와 함께 다듬은 「(시팅 온) 더 독 오브 더 베이」도 이때 완성됐다. 짐 스튜어트를 비롯한 스택스의 몇몇은 너무 낯선 곡이라며 고개를 저었지만, 레딩은 이것이 자신의 다음 단계라고 믿었다. (추락) 12월 9일 클리블랜드의 TV 쇼에 출연한 그는 이튿날 위스콘신주 매디슨 공연을 위해 자신이 사들인 쌍발기 비치크래프트에 올랐다. 12월 10일 오후, 비행기는 매디슨의 모노나 호수에 떨어졌다. 그의 백 밴드였던 젊은 그룹 바케이스의 멤버 넷과 그의 수행원, 조종사가 함께 숨졌고, 트럼펫 연주자 벤 콜리만 살아남았다. 그는 스물여섯이었다. (유산) 메이컨 시립 강당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수천 명이 모였고, 그는 빅 오 목장에 묻혔다. 1968년 1월에 나온 「더 독 오브 더 베이」는 빌보드 핫 100 1위에 올라 미국에서 사후에 정상에 오른 첫 싱글이 됐고, 이듬해 그래미 두 부문을 받았다. 같은 해 스택스와 애틀랜틱의 배급 계약이 끝나면서, 계약서의 조항에 따라 그의 녹음 마스터는 스택스가 아닌 애틀랜틱의 소유로 넘어갔다. 1989년 그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소살리토의 하우스보트에서 시작해 죽기 사흘 전에 마무리된 곡이다. 새 방향을 향한 그의 첫걸음은 그대로 마지막 걸음이 됐다.
- 크로퍼의 맑은 기타가 짧은 선율을 덧대, 그때까지의 뜨거운 스택스 소울보다 담담하고 포크에 가까운 분위기를 만든다.
- 수술 뒤의 목소리는 외치기보다 낮은 음역에서 담담하게 읊조려, 체념과 고요가 함께 들린다.
- 갈매기 울음과 파도 소리는 그가 세상을 떠난 뒤 크로퍼가 덧입힌 효과음이다.
- 끝의 휘파람은 원래 나중에 즉흥 가사(애드리브)를 채워 넣을 자리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기회가 오지 않아 결국 곡의 상징이 됐다.
덜 알려진 이야기
「리스펙트」는 레딩 혼자 쓴 곡으로 올라 있지만, 그 출발점에는 메이컨의 가수이자 그의 순회 매니저였던 스피도 심스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심스가 자기 그룹을 위해 가져온 초안을 레딩이 크게 고쳐 썼고, 심스는 작곡자 크레디트를 기대했으나 끝내 이름이 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 곡이 아레사 프랭클린의 찬가로 워낙 유명해진 탓에, 남부 지역 음악계의 이런 사정은 전기의 각주로만 남았다. 「새티스팩션」의 혼 편곡에는 묘한 사연이 있다. 키스 리처즈는 그 유명한 반복 가락을 원래 관악기로 연주할 생각이었고, 퍼즈 기타는 임시로 넣은 소리였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그러니 레딩판은 의도치 않게 작곡자의 처음 구상에 더 가까운 소리를 들려준 셈이다. 레딩은 원곡 가사를 다 알지 못해 상당 부분을 지어 불렀다고 스스로 밝히기도 했다. 1966년 4월 위스키 어 고고 공연은 녹음됐지만 생전에는 발매되지 않았다. 일부가 그의 사후인 1968년에야 앨범으로 나왔고, 남은 테이프 전체는 2016년에 이르러서야 정리돼 공개됐다. 그가 백인 록 관객을 처음 만난 결정적 무대가 반세기 가까이 부분적으로만 들렸던 셈이다.
용어 노트 📚🔎
소울
(말뜻) 영어 soul 은 영혼, 마음이라는 뜻이다. 노래하는 사람의 속마음을 그대로 쏟아 낸다는 느낌이 이름에 담겨 있다. (팝에서) 1960년대 미국 흑인 대중음악의 한 갈래로, 교회의 가스펠 창법과 리듬앤드블루스의 리듬을 합친 음악이다. 신을 향해 부르던 간절한 목소리로 사랑과 삶의 고단함을 노래한다. 교회 성가대에서 배운 큰 목소리와 떨림을 그대로 살려 연애 노래를 부른다고 생각하면 된다. (다른 데서는) 소울푸드라고 하면 미국 남부 흑인 가정에서 전해 내려온 음식, 넓게는 마음을 달래 주는 음식을 뜻한다.
하우스 밴드
(말뜻) house 는 집이라는 뜻으로, 그 집에 늘 머무는 밴드라는 말이다. (팝에서) 한 레이블이나 스튜디오에 소속되어 여러 가수의 녹음을 반주하는 전속 연주자들을 가리킨다. 스택스의 부커 T. 앤 더 MG's처럼, 가수는 바뀌어도 반주의 손맛이 같아서 레이블 고유의 소리가 생긴다. 학교 방송반이 매번 다른 학생의 발표를 같은 장비와 같은 솜씨로 도와주는 것과 비슷하다.
혼 섹션
(말뜻) horn 은 원래 짐승의 뿔이라는 뜻이다. 옛날에는 뿔을 불어 소리를 냈기 때문에, 입으로 부는 관악기를 이렇게 부르게 됐다. (팝에서) 트럼펫, 색소폰, 트롬본처럼 입으로 부는 악기 여럿을 묶은 연주 팀이다. 함께 짧게 끊어 치거나 길게 불어 노래에 힘과 색을 더한다. 운동회 응원단이 한목소리로 짧은 구호를 외쳐 분위기를 띄우는 것처럼, 혼 섹션은 노래 사이사이를 맞받아치며 흥을 돋운다.
헤드 어레인지먼트
(말뜻) head 는 머리, arrangement 는 편곡이라는 뜻이다. 종이 악보가 아니라 머릿속에서 짠 편곡이라는 말이다. (팝에서) 악보를 미리 쓰지 않고, 녹음 현장에서 연주자들이 서로 들려주고 맞춰 보며 그 자리에서 편곡을 정하는 방식이다. 악보를 읽지 못했던 레딩은 관악기가 불 가락을 입으로 흥얼거려 전했고, 연주자들이 그것을 받아 바로 연주했다. 친구들끼리 장기 자랑 춤을 준비할 때, 안무표 없이 거울 앞에서 동작을 하나씩 보여 주며 맞춰 가는 것과 비슷하다.
애드리브
(말뜻) 라틴어 ad libitum 을 줄인 말로, 마음 내키는 대로라는 뜻이다. (팝에서) 정해진 가사나 가락에 없는 소리, 외침, 말을 즉흥으로 덧붙이는 것이다. 소울 가수들은 곡의 끝부분에서 같은 말을 되풀이하거나 외마디를 터뜨리며 감정을 끌어올린다. 수업 시간 발표 중에 대본에 없던 농담을 즉석에서 덧붙였는데 반 친구들이 더 크게 반응하는 순간과 비슷하다. (다른 데서는) 연극이나 방송에서는 배우나 진행자가 대본에 없는 대사를 즉석에서 하는 것을 가리킨다.
마스터
(말뜻) master 는 주인, 그리고 모든 복사본의 바탕이 되는 원본이라는 뜻이다. (팝에서) 스튜디오에서 처음 만든 녹음 원본과, 그 원본에 대한 권리를 말한다. 마스터를 가진 쪽이 음반을 찍고, 영화나 광고에 쓰도록 허락하고, 그 수익을 가져간다. 반 단체 사진의 원본 파일을 누가 갖고 있느냐와 같다. 원본을 가진 사람만 새로 인화하거나 다른 곳에 쓸 수 있다. (다른 데서는) 대학에서는 석사 학위를, 일상에서는 모든 문을 여는 마스터키처럼 무언가를 완전히 다루는 사람이나 물건을 가리킨다.
커버
(팝에서) 다른 가수가 먼저 발표한 곡을 새로 불러 녹음하는 것이다. 좋은 커버는 원곡을 따라 하는 데 그치지 않고 템포, 편곡, 창법을 바꿔 다른 노래처럼 들리게 만든다. 학예회에서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내 목소리와 내 방식으로 부르는 것과 같다. 아레사 프랭클린의 「리스펙트」처럼 커버가 원곡보다 유명해지는 일도 있다. (다른 데서는) 책의 표지나 덮개를 뜻하고, 커버한다고 하면 감싸 주거나 대신 맡아 준다는 뜻으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