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rles Mingus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일은 흔하다.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놀랍도록 단순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창조다.' — 찰스 밍거스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함께한 사람들 ⏳🌊
- 우정버디 콜렛
고교 시절 친구로, 첼로를 붙들던 밍거스에게 베이스를 권했다고 전해진다.
- 스승레드 캘린더
로스앤젤레스에서 소년 밍거스에게 재즈 베이스의 기초를 가르쳤다.
- 영향듀크 엘링턴
평생의 우상으로, 한때 자신을 악단에서 내보냈지만 1962년 「머니 정글」에서 다시 만났다.
- 영향찰리 파커
밍거스가 가장 존경한 연주자로, 매시 홀 공연을 함께하며 그 녹음을 데뷔 레코드에서 냈다.
- 동료에릭 돌피
말하는 듯한 관악 소리로 밍거스 음악의 새 목소리가 되었으나 1964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 가족수 그레이엄 밍거스
마지막 아내로 그의 말년을 지켰고, 사후 밍거스 빅 밴드와 「에피타프」 초연으로 음악을 이어 갔다.
I. 와츠의 소년 · 1922–1942 (0–20세)
(노갈레스) 1922년 4월, 미국 애리조나주 노갈레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찰스 밍거스 시니어는 그곳 육군 주둔지의 하사관이었고, 어머니 해리엇은 아들이 태어난 그해 가을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두 딸 그레이스와 비비언, 그리고 갓난 아들을 데리고 로스앤젤레스 남쪽 와츠로 옮겨 정착했고, 곧 메이미 카슨과 재혼했다. 밍거스는 훗날 자서전에서 아버지가 엄했고 피부색의 밝고 어두움에 유난히 마음을 썼다고 회고했다. 그는 자기 집안에 흑인과 백인, 중국계의 피가 섞였다고 말했고, 피부가 밝은 탓에 어느 무리에서도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교회) 새어머니를 따라간 성결교회에서 그는 신도들이 손뼉 치고 외치며 목사의 말에 노래로 답하는 소리를 들었다. 한 사람이 부르면 여럿이 받는 이 방식(콜 앤드 리스폰스)은 훗날 그의 음악 곳곳에 되살아났다. 어린 시절 라디오에서 듀크 엘링턴 악단을 듣고 크게 흔들렸다고도 회고했다. (베이스) 처음엔 트롬본, 이어 첼로를 배웠다. 고교 친구인 색소폰 주자 버디 콜렛이 흑인 첼리스트가 교향악단에 들어가기는 어렵다며 학교 밴드에 빈자리가 있던 콘트라베이스를 권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베이시스트 레드 캘린더에게 재즈 연주를, 뉴욕 필하모닉에서 연주했던 헤르만 라인스하겐에게 5년 가까이 클래식 기법을, 로이드 리스에게 화성과 작곡을 배웠다. 열일곱 무렵 쓴 관현악곡 「하프마스트 인히비션」은 1960년에야 녹음됐는데, 소년이 이미 큰 편성의 소리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II. 서부의 떠돌이 베이시스트 · 1943–1951 (21–29세)
(암스트롱) 1943년 무렵 그는 루이 암스트롱 악단과 순회했다. 악단이 인종 분리가 엄격한 남부로 향하게 되자 그만두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뉴올리언스 출신 트롬보니스트 키드 오리의 악단, 로스앤젤레스 센트럴 애비뉴의 클럽들을 오가며 연주했고, 작은 레이블에 '배런 밍거스'라는 이름으로 첫 녹음을 남겼다. 1944년 첫 결혼을 했다. (햄프턴) 1947년 라이어널 햄프턴 악단에 들어가 자작곡 「밍거스 핑거스」를 녹음했다. 베이스는 대개 한 박에 한 음씩 걸어가듯 코드를 짚으며 밴드의 바닥을 받치는 악기(워킹 베이스)였지만, 이 곡에서 그는 베이스를 가락의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반주자로 머물지 않겠다는 생각이 일찍부터 음악에 드러난 셈이다. (우체국) 음악만으로 가족을 부양하기 어려워 한동안 우체국에서 일했다고 전해진다. 1950년 비브라폰 주자 레드 노보가 기타리스트 탈 팔로와 함께하는 트리오에 그를 불렀다. 드럼이 없는 편성이라 베이스가 리듬의 무게를 혼자 지고 빠른 템포를 버텨야 했고, 이 경험이 그의 기교를 크게 다듬었다. 트리오는 인기를 얻어 뉴욕까지 진출했다. (차별) 그러나 뉴욕의 한 텔레비전 출연을 앞두고 밍거스는 뉴욕 음악가 노조 카드가 없다는 이유로 백인 베이시스트로 교체됐다. 그는 이것을 인종 차별로 받아들였고, 1951년 트리오를 떠나 그대로 뉴욕에 남았다. 서부에서 쌓인 모욕과 분노는 이후 그의 곡 제목과 무대 발언에 고스란히 실리게 된다.
III. 뉴욕과 데뷔 레코드 · 1951–1957 (29–35세)
(비밥) 뉴욕에서 그는 찰리 파커, 버드 파월, 디지 길레스피 등 빠른 템포와 복잡한 화성으로 재즈를 새로 쓴 세대(비밥)와 어울렸다. 그는 파커를 가장 존경했고, 파커의 연주를 흉내만 내는 젊은 주자들을 공개적으로 꾸짖곤 했다. 1953년 초에는 어린 시절의 우상 듀크 엘링턴 악단에 잠시 몸담았으나, 트롬보니스트 후안 티졸과 무대 뒤에서 충돌한 뒤 엘링턴이 직접 그를 내보냈다고 전해진다. (데뷔) 1952년 그는 드러머 맥스 로치, 당시 아내 셀리아와 함께 데뷔 레코드를 세웠다. 음악가가 자기 음반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1953년 5월 캐나다 토론토 매시 홀에서 파커, 길레스피, 파월, 로치와 함께한 공연 녹음이 이 레이블에서 나왔고, 1955년에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블루 무즈」도 냈다. 그러나 유통과 회계에 밝지 못해 레이블은 1957년 무렵 사실상 문을 닫았다. (워크숍) 그는 작곡가들의 실험 모임에서 클래식과 재즈를 잇는 음악(서드 스트림)을 시도했고, 곧 자신의 밴드를 '재즈 워크숍'이라 불렀다. 악보를 다 적어 주는 대신 피아노로 가락을 들려주고 귀로 익히게 했는데, 단원들이 저마다의 개성으로 동시에 즉흥하며 짜임을 만들어 가는 연주(집단 즉흥연주)를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1956년 드러머 대니 리치먼드가 합류해 이후 20여 년을 함께했다. (진화) 1956년 「피테캔트로푸스 에렉투스」는 인간의 오만과 몰락을 그린 곡으로, 차별에 대한 그의 분노가 처음으로 큰 형식을 얻은 작품이었다. 1957년에는 멕시코 국경 도시 티후아나를 다녀온 기억을 담아 「티후아나 무즈」를 녹음했다.
비밥의 거장 다섯이 한 무대에 선 거의 유일한 기록으로, 밍거스가 세운 데뷔 레코드에서 나왔다. 음악가가 음반의 주인이 되려 했던 그의 꿈이 남긴 가장 빛나는 결실이다.
- 찰리 파커는 계약 문제로 음반에 '찰리 챈'이라는 가명으로 실렸고, 플라스틱 색소폰으로 불었다. 그런데도 「나이트 인 튀니지아」의 솔로 첫머리, 반주를 잠시 멈춘 사이 혼자 내달리는 짧은 구간(브레이크)은 이 공연의 백미로 꼽힌다.
- 「솔트 피넛츠」에서는 디지 길레스피가 곡 제목을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빠른 템포 위에서 맥스 로치의 드럼이 솔로이스트들을 몰아붙이는 긴장감에 귀를 기울여 볼 만하다.
- 현장 녹음에서 베이스 소리가 약하게 잡히자 밍거스는 뒤에 스튜디오에서 베이스 파트를 다시 녹음해 덧입혔다(오버더빙). 실황 음반이지만 베이스만은 나중에 녹음된 셈이다.
- 버드 파월의 피아노는 오른손이 관악기처럼 긴 줄기의 가락을 뽑아내고, 왼손이 짧게 코드를 찍어 받친다. 비밥 피아노의 전형이 어떤 소리인지 들을 수 있다.
차별에 대한 분노를 인간의 진화와 몰락이라는 우화로 옮긴 첫 대작이다. 악보 대신 귀로 가르친 재즈 워크숍 방식이 처음으로 큰 형식을 얻었다.
- 밍거스는 이 10분 남짓한 곡을 진화, 우월감, 쇠퇴, 파멸의 네 부분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곡이 차분히 걸어가다 점점 혼란스러워지는 흐름을 이야기의 줄거리처럼 따라가 보면 좋다.
- 같은 가락이 짧게 되풀이되며 밑을 받치는 베이스(오스티나토)가 긴장을 쌓는다. 그 위에서 질서가 무너지는 대목에 이르면 관악기들이 비명처럼 울부짖는다.
- 재키 매클린의 알토 색소폰은 날카롭고 거친 음색으로 분노를 그대로 드러낸다. 매끈하게 다듬은 소리와는 거리가 먼 이 음색이 곡의 성격을 정한다.
- 같은 앨범의 「어 포기 데이」에서는 자동차 경적과 호루라기 같은 도시의 소리를 악기로 흉내 낸다. 무거운 타이틀곡과 대비되는 밍거스의 유머를 엿볼 수 있다.
IV. 분노와 기도 · 1958–1961 (36–39세)
(벨뷰) 1958년 그는 스스로 뉴욕 벨뷰 병원을 찾아가 정신과 병동에 한동안 머물렀다. 자서전에서 그는 도움을 구하러 갔다가 쉽게 나오지 못했던 경험을 쓰라리게 회고했다. 이후 정신과 의사 에드먼드 폴락과 오래 상담을 이어 갔고, 들끓는 감정을 다스리려는 이 씨름은 그의 음악의 한 축이 되었다. (성가) 1959년은 그의 정점이었다. 애틀랜틱에서 「블루스 앤드 루츠」를, 컬럼비아에서 「밍거스 아 엄」을 녹음했다. 어린 시절 교회의 외침과 손뼉이 「베러 깃 잇 인 유어 솔」에서 되살아났고, 그해 3월 레스터 영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상징이던 납작한 모자를 제목 삼아 애가 「굿바이 포크 파이 햇」을 썼다. 테너 색소폰 주자 존 핸디가 그 슬픔을 노래하듯 불었다. (포버스) 1957년 아칸소주 리틀록에서 주지사 오벌 포버스가 흑인 학생들의 등교를 막자, 밍거스는 그를 조롱하는 「포버스의 우화」를 썼다. 컬럼비아는 가사를 빼고 연주곡으로만 실었고, 1960년 평론가 냇 헨토프가 이끌던 캔디드 레이블에서 그는 가사를 살린 판을 다시 녹음했다. 이때 함께한 에릭 돌피의 색소폰과 베이스 클라리넷은 그의 음악에 말하는 듯한 새 목소리를 더했다. (돈) 같은 해 그는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이 음악가에게 박한 출연료를 준다며 맥스 로치 등과 함께 근처에서 대항 공연을 열었다. 1960년 프랑스 앙티브 공연에서는 유럽에 머물던 버드 파월이 무대에 올라 옛 동료와 함께 연주했다.
어린 시절의 교회, 세상을 떠난 레스터 영, 리틀록의 분노가 한 장에 담겼다. 그의 삶의 여러 갈래가 가장 정돈된 형태로 모인 음반이다.
- 「베러 깃 잇 인 유어 솔」은 한 마디를 세 박씩 두 번으로 나누는 출렁이는 박자(6/8박자) 위에서 손뼉과 외침이 터진다. 밍거스가 어린 시절 들은 성결교회 예배의 열기를 되살린 곡이다.
- 「굿바이 포크 파이 햇」에서 존 핸디의 테너 솔로는 낮고 느리게 시작해 서서히 울음에 가까워진다. 레스터 영을 기리는 애가로, 곡 자체가 12마디 블루스 형식에 바탕을 둔다.
- 「포버스의 우화」는 컬럼비아가 가사를 거부해 연주곡으로만 실렸다. 그럼에도 비틀거리듯 우스꽝스러운 주제 가락만으로 조롱의 뜻이 충분히 전해진다. 곡 중간에 템포가 갑자기 바뀌는 대목에 귀를 기울여 보자.
- 프로듀서 테오 마세로는 LP 한 장에 담기 위해 여러 곡을 잘라 붙여 짧게 편집했다. 훗날 재발매판에서 편집 이전의 긴 판이 복원됐으니, 두 판을 비교해 들어 보는 것도 재미있다.
컬럼비아에서 빠졌던 포버스 조롱 가사를 되살린 음반으로, 에릭 돌피와의 짧은 동행이 남긴 정수다.
- 스튜디오 녹음이지만 밍거스는 클럽 공연처럼 꾸미려고 첫머리에 청중에게 말을 거는 듯한 소개말을 넣었다. 박수 대신 잔 부딪치는 소리를 내지 말아 달라는 농담 섞인 말로 분위기를 연다.
- 「오리지널 포버스의 우화」에서는 밍거스와 드러머 대니 리치먼드가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화법(콜 앤드 리스폰스)으로 인종 분리주의 정치인들을 조롱한다. 교회의 주고받기 형식을 풍자의 무기로 바꾼 셈이다.
- 「왓 러브」에서는 돌피의 베이스 클라리넷과 밍거스의 베이스가 마치 사람이 다투듯 대화한다. 높낮이와 억양이 말소리처럼 들리는 이 대목은 두 사람의 교감을 잘 보여 준다.
- 피아노가 없는 4인조여서 화음을 깔아 주는 악기가 없다. 그래서 네 악기가 각자 더 자유롭게 움직이며, 서로의 소리 사이 빈 공간이 넓게 들린다.
V. 검은 성자 · 1962–1964 (40–42세)
(정글) 1962년 9월, 그는 듀크 엘링턴, 맥스 로치와 트리오로 「머니 정글」을 녹음했다. 9년 전 자신을 내보냈던 우상과의 재회였다. 녹음 도중 밍거스가 로치의 연주에 불만을 품고 짐을 싸려 하자 엘링턴이 달래어 붙잡았다고 전해진다. (타운홀) 같은 해 10월 뉴욕 타운 홀 공연은 준비가 크게 부족했다. 사보가들이 무대 위에서 악보를 베끼는 가운데 공연이 진행됐고, 음반사와의 갈등 속에 그는 깊이 낙심했다. 그 무렵 리허설 중 트롬보니스트 지미 네퍼를 때려 이를 부러뜨렸고, 네퍼는 이후 한동안 고음을 내기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그의 분노가 가까운 동료에게 상처를 입힌 사건으로 남았다. (성자) 1963년 1월, 그는 11인조로 「블랙 세인트 앤드 더 시너 레이디」를 녹음했다. 발레를 위해 쓴 이 모음곡에는 엘링턴의 관현악 색채와 플라멩코 기타, 교회 음악의 외침이 한데 얽혔다. 앨범 해설은 그의 정신과 의사 폴락이 썼다. 그는 녹음된 연주 위에 다른 소리를 덧입히는 기법(오버더빙)을 과감히 써서 하나의 거대한 소리 덩어리를 빚었다. 같은 해 「밍거스 밍거스 밍거스 밍거스 밍거스」도 녹음했다. (돌피) 1964년 봄 그는 돌피, 피아니스트 재키 바이어드, 리치먼드 등과 유럽을 순회했다. 돌피가 밴드를 떠나 유럽에 남겠다고 하자 작별곡 「소 롱 에릭」을 연주했는데, 그해 6월 돌피는 베를린에서 당뇨 합병증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밍거스는 이 상실을 오래 괴로워했다.
9년 전 자신을 내보냈던 우상 엘링턴과의 재회다. 존경과 긴장이 함께 흐르는 세 사람의 대화를 들을 수 있다.
- 타이틀곡에서 밍거스는 베이스 현을 세게 뜯고 비틀어 윙윙 떨리는 소리를 낸다. 엘링턴은 이에 맞서 피아노를 타악기처럼 두드리며 일부러 부딪치는 화음을 찍는다.
- 「플뢰레트 아프리켄」은 반대로 고요하다. 엘링턴의 피아노가 맑은 음을 흩뿌리고, 베이스와 드럼은 박자를 정확히 짚는 대신 그 둘레를 맴돈다.
- 녹음 중 밍거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 하자 엘링턴이 달래어 붙잡았다고 전해진다. 그런 사정을 알고 들으면 세 사람이 서로를 떠보며 주고받는 긴장이 더 생생하게 들린다.
- 엘링턴은 화려한 악단의 지휘자로 알려졌지만, 이 트리오에서는 피아니스트로서의 거칠고 현대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그 면모를 끌어낸 것은 밍거스와 로치의 젊은 에너지였다.
정신과 의사가 해설을 쓴 이 모음곡은 내면의 소용돌이를 거대한 관현악으로 옮긴, 그의 작곡가 경력의 정점이다.
- 발레를 위해 쓴 곡으로, 여러 악장이 끊기지 않고 이어진다. 한 곡이 아니라 하나의 긴 이야기로 생각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 보기를 권한다.
- 찰리 마리아노의 알토 색소폰은 애절하게 흐느끼는 음색이다. 밍거스는 그의 연주를 여러 번 녹음해 겹쳐 입히는 기법(오버더빙)으로 소리의 층을 두껍게 쌓았다. 당시 재즈 녹음에서는 드물게 과감한 시도였다.
- 엘링턴 악단 출신 트롬보니스트 퀜틴 잭슨은 고무 흡착컵 같은 뮤트(플런저 뮤트)를 나팔 끝에 댔다 뗐다 하며 사람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를 낸다. 엘링턴의 음색을 이어받은 대목이다.
- 곡 중간에 플라멩코 기타가 갑자기 끼어들어 스페인풍 색채를 더한다. 교회 음악, 엘링턴, 스페인 음악이 한데 뒤섞이는 이 짜임새가 밍거스만의 소리다.
VI. 침묵의 시절 · 1965–1970 (43–48세)
(통신판매) 음반사들이 자신을 착취한다고 믿었던 그는 1960년대 중반 직접 음반을 찍어 우편으로 파는 일을 벌였다. 1964년 몬터레이 재즈 페스티벌 실황과 1965년 UCLA 공연 녹음이 이렇게 나왔다. 음악가가 돈의 흐름을 쥐어야 한다는 데뷔 레코드 시절의 생각을 다시 밀어붙인 것이었지만, 판매는 보잘것없었다. (퇴거) 1966년 그는 집세를 내지 못해 뉴욕의 작업실 겸 거처에서 쫓겨났다. 그의 악보와 악기, 살림이 거리에 나앉는 장면은 감독 토머스 라이크먼의 기록영화 「밍거스」에 담겼다. 영화 속 그는 지치고 쓸쓸한 얼굴로 자신의 처지와 미국 사회를 이야기한다. 한때 재즈의 가장 야심 찬 작곡가였던 이가 거리에서 짐을 옮기는 모습은 당시 재즈 음악가의 경제적 처지를 보여 주는 장면으로도 남았다. (침묵) 이후 그는 1969년 무렵까지 거의 무대에 서지 않았다. 깊은 우울에 빠져 있었다고 주변 사람들은 회고했다. 대신 그는 오래 붙들고 있던 자서전 원고를 계속 써 나갔다. 어린 시절의 상처, 피부색을 둘러싼 혼란, 음악계에서 겪은 모욕을 거칠고 솔직하게 쏟아 낸 글이었다. 연주는 멈췄지만, 그의 음악을 이루던 기억과 감정은 이 원고 속에서 정리되고 있었다. 1969년 그는 작은 밴드를 꾸려 조용히 클럽 무대로 돌아왔다.
VII. 마지막 노래 · 1971–1979 (49–57세)
(귀환) 1971년 자서전 「비니스 디 언더독」이 편집자 넬 킹의 손을 거쳐 출간됐고, 같은 해 그는 작곡 분야 구겐하임 펠로십을 받았다. 대편성 앨범 「렛 마이 칠드런 히어 뮤직」으로 작곡가로서의 위상도 되찾았다. 뉴욕 주립대 버펄로 캠퍼스에서 강의를 맡기도 했다. (수) 1960년대부터 곁을 지킨 수 그레이엄과 1975년 결혼했다. 네 번째 결혼이었고, 그는 여러 결혼에서 자녀를 두었다. 수는 그의 일정과 계약을 맡아 삶을 안정시켰다. 그는 테너 색소폰의 조지 애덤스, 피아노의 돈 풀런, 트럼펫의 잭 월래스, 그리고 리치먼드와 새 5인조를 꾸렸고, 1974년 「체인지스」 연작을 녹음했다. 그중 「수의 변화」는 아내의 여러 얼굴을 그린 곡이었고, 그해 세상을 떠난 엘링턴에게 바치는 곡도 함께 실렸다. (루게릭) 1977년 그는 근육이 서서히 굳는 병(루게릭병) 진단을 받았다. 곧 베이스를 쥘 수 없게 되자 휠체어에 앉아 녹음기에 가락을 노래해 곡을 썼다. 싱어송라이터 조니 미첼과 함께 작업한 곡들은 그녀의 앨범 「밍거스」로 이어졌다. 1978년 6월 백악관 재즈 축제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이 그에게 경의를 표하자 그는 눈물을 흘렸다. (쿠에르나바카) 치료법을 찾아 멕시코 쿠에르나바카로 간 그는 1979년 1월 5일, 56세로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인도 갠지스강에 뿌려졌다. 수는 그 뒤 밍거스 빅 밴드 등을 꾸려 그의 곡을 무대에 올렸고, 1989년 미완의 대작 「에피타프」가 처음 연주됐다.
침묵을 딛고 돌아와 새 5인조와 녹음한 마지막 전성기의 기록이다. 아내 수에게 바친 곡과 엘링턴을 기리는 곡이 함께 실렸다.
- 「수의 변화」는 느린 서정과 격렬한 질주가 번갈아 나오며 템포가 여러 번 바뀐다. 한 사람의 여러 얼굴을 그리려 한 곡이라는 점을 떠올리며 들으면 흐름이 잘 잡힌다.
- 돈 풀런의 피아노 솔로에서는 손바닥이나 손등으로 건반을 굴리듯 여러 음을 한꺼번에 누르는 소리(톤 클러스터)가 나온다. 거친 소리 덩어리 속에서도 박자는 흐트러지지 않는다.
- 조지 애덤스의 테너 색소폰은 굵고 거칠며 블루스의 외침에 가깝다. 같은 앨범의 「데빌 블루스」에서는 그가 직접 블루스를 노래하기도 한다.
- 그해 세상을 떠난 엘링턴을 기리는 「듀크 엘링턴스 사운드 오브 러브」는 앨범에서 가장 부드러운 곡이다. 소년 시절 라디오로 처음 들었던 우상에게 바친 밍거스의 인사다.
덜 알려진 이야기
매시 홀 공연 음반은 흔히 비밥의 날것 그대로인 실황으로 소개되지만, 정작 그 녹음의 베이스는 현장 소리가 아니다. 공연 녹음에서 베이스가 거의 들리지 않자 밍거스는 나중에 스튜디오에서 자기 파트를 다시 녹음해 덧입혔다. 이 사실은 음반 해설과 디스코그래피에 기록돼 있지만, 전설적인 하룻밤이라는 이미지에 가려 잘 언급되지 않는다. 자서전 「비니스 디 언더독」은 원래 훨씬 방대한 원고였다. 밍거스가 오랜 세월 써 모은 글은 편집자 넬 킹의 손을 거치며 크게 줄었고, 출판된 책은 성적 무용담과 거친 일화가 두드러지는 형태가 되었다. 음악 이론과 작곡에 대한 그의 생각 상당 부분이 빠졌다는 점은 전기 작가들이 지적해 왔다. 그래서 이 책을 사실 기록으로 읽기보다 그가 스스로 빚은 자화상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대체적인 합의다. 그는 생계와 사업 수완을 함께 보여 주는 뜻밖의 일도 벌였다. 고양이에게 사람 변기를 쓰도록 훈련시키는 방법을 직접 정리한 안내서를 만들어 우편으로 팔았다는 사실이 전기에 기록돼 있다. 음악가가 자기 상품을 직접 팔아야 한다는 그의 고집이 음악 밖에서도 드러난 장면이다. 대작 「에피타프」는 그가 생전에 끝내 온전히 연주하지 못한 곡이었다. 사후 그의 악보를 정리하던 음악학자 앤드루 호미지가 500여 쪽에 이르는 악보를 찾아냈고, 지휘자 군터 슐러가 이를 복원해 1989년 뉴욕 링컨 센터에서 30명 남짓한 대편성으로 초연했다. 1962년 타운 홀 공연의 실패로 묻혔던 꿈이 27년 만에 소리를 얻은 셈이다.
용어 노트 📚🔎
비밥
(말뜻) 빠른 가락을 입으로 흉내 낼 때 나는 소리에서 온 말로 전해진다. 특별한 뜻이 있는 단어라기보다 음악의 생김새를 소리로 흉내 낸 이름이다. (재즈에서) 1940년대 뉴욕에서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 같은 젊은 음악가들이 만든 재즈다. 춤추기 좋은 큰 악단 음악과 달리, 아주 빠른 템포와 복잡한 화음 위에서 작은 밴드가 실력을 겨루듯 즉흥연주를 펼친다. 줄넘기를 할 때 처음엔 천천히 넘다가 친구들끼리 누가 더 빨리, 더 어려운 기술로 넘는지 겨루기 시작하는 것과 비슷하다.
워킹 베이스
(말뜻) 영어 walking 은 걷는다는 뜻이다. 베이스가 한 걸음씩 걸어가듯 음을 하나씩 짚어 나간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재즈에서) 베이스가 한 박에 한 음씩 고르게 짚으며 코드의 음들을 따라 위아래로 움직이는 연주 방식이다. 밴드 전체가 박자를 잃지 않게 바닥을 받쳐 주는 역할을 한다. 체육 시간에 줄을 맞춰 행진할 때 맨 앞에서 하나, 둘, 하나, 둘 발을 맞춰 주는 친구가 있으면 모두 박자를 놓치지 않는 것처럼, 워킹 베이스가 밴드의 발걸음을 맞춰 준다.
콜 앤드 리스폰스
(말뜻) 영어로 부름(call)과 응답(response)이라는 뜻이다. (재즈에서) 한 사람이 가락을 부르면 다른 사람이나 여럿이 그에 답하는 방식이다. 아프리카 음악과 미국 흑인 교회의 예배에서 이어져 내려왔고, 재즈에서는 독주 악기와 밴드가, 혹은 악기와 악기가 주고받는 형태로 나타난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질문하면 반 친구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하는 장면을 떠올리면 된다. 밍거스는 어린 시절 교회에서 들은 이 방식을 평생 곡에 썼다. (다른 데서는) 응원단장이 구호를 외치면 관중이 받아 외치는 응원도 같은 원리다.
집단 즉흥연주
(말뜻) 즉흥(卽興)은 그 자리에서(卽) 흥이 나는 대로(興) 한다는 뜻이다. 집단 즉흥은 여럿이 함께 그 자리에서 음악을 만들어 낸다는 말이다. (재즈에서) 보통 재즈에서는 한 사람씩 차례로 솔로를 하지만, 집단 즉흥연주에서는 여러 악기가 동시에 저마다의 가락을 즉흥으로 연주하며 서로 엮인다. 서로의 소리를 잘 듣지 않으면 시끄러운 소음이 되기 쉬워서, 듣는 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친구 여럿이 대본 없이 즉석에서 역할극을 할 때, 누가 한마디 하면 다른 친구가 받아서 이야기를 이어 가는 것과 비슷하다. 밍거스가 악보를 다 써 주지 않고 귀로 익히게 한 것도 이런 연주를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서드 스트림
(말뜻) 영어로 세 번째 물줄기라는 뜻이다. 클래식이라는 첫 번째 물줄기와 재즈라는 두 번째 물줄기가 만나 생긴 새 흐름이라는 뜻으로, 작곡가 군터 슐러가 붙인 이름이다. (재즈에서) 클래식 음악의 작곡 기법과 악기 편성을 재즈의 즉흥연주, 리듬과 섞으려 한 1950년대의 음악 흐름이다. 밍거스는 어려서 클래식 베이스와 작곡을 배웠기 때문에 이런 시도에 일찍부터 관심을 가졌다. 요리로 치면 한식 재료로 파스타를 만드는 것처럼, 서로 다른 전통의 장점을 한 접시에 담으려는 시도다.
오버더빙
(말뜻) 영어 over 는 위에, dub 은 소리를 입힌다는 뜻이다. 이미 녹음된 소리 위에 새 소리를 덧입힌다는 말이다. (재즈에서) 먼저 녹음해 둔 연주를 들으면서 다른 파트를 따로 녹음해 겹치는 기법이다. 재즈는 원래 여럿이 한자리에서 동시에 연주하는 현장성을 중시했기 때문에, 1950~60년대에는 이 기법을 크게 쓰는 일이 드물었다. 밍거스는 매시 홀 음반에서 자신의 베이스를 다시 녹음했고, 「블랙 세인트 앤드 더 시너 레이디」에서는 색소폰 소리를 여러 겹 쌓았다. 동영상을 만들 때 찍어 둔 화면 위에 나중에 내레이션이나 배경 음악을 입히는 것과 같은 원리다. (다른 데서는) 영화에서 외국어 대사를 우리말 목소리로 바꿔 입히는 더빙도 같은 뿌리의 말이다.
오스티나토
(말뜻) 이탈리아어로 고집스러운, 끈질긴이라는 뜻이다. 같은 음형을 고집스럽게 되풀이한다는 데서 이름이 붙었다. (재즈에서) 짧은 가락이나 리듬을 곡 내내 또는 한 부분 동안 계속 되풀이하는 것이다. 되풀이되는 밑바탕 위에서 다른 악기들이 자유롭게 움직이면, 듣는 사람은 점점 긴장이 쌓이는 느낌을 받는다. 밍거스는 「피테캔트로푸스 에렉투스」에서 이 방법으로 불안한 긴장을 쌓았다. 돌림노래를 부를 때 한 모둠이 같은 구절만 계속 반복하고 다른 모둠이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떠올리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