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nonball Adderley
「때로 우리는 역경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 「머시, 머시, 머시」를 연주하기 전 청중에게 건넨 말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함께한 사람들 ⏳🌊
- 가족냇 애덜리
세 살 아래 동생이자 코넷 주자로, 평생 형의 밴드를 지키며 「워크 송」을 썼다.
- 영향찰리 파커
그의 비밥 어법을 깊이 흡수했고, 파커가 세상을 떠난 해에 등장해 새 버드라 불렸다.
- 동료마일스 데이비스
그의 악단에서 2년 가까이 연주하며 여백과 절제를 배웠고, 「카인드 오브 블루」를 함께 남겼다.
- 동료존 콜트레인
마일스 악단에서 나란히 선 테너 주자로, 그 곁에서 화성을 새로 공부했다고 애덜리는 회고했다.
- 후원오린 키프뉴스
리버사이드의 프로듀서로 샌프란시스코 실황 등 전성기 음반을 함께 만들었다.
- 동료조 자비눌
9년간 피아노를 맡아 「머시, 머시, 머시」를 썼고, 그의 죽음 뒤 추모곡 「캐넌 볼」을 바쳤다.
I. 탬파의 먹보 소년 · 1928–1948 (0–20세)
(탬파) 1928년 9월, 미국 플로리다주 탬파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줄리언 에드윈 애덜리였다. 아버지 줄리언 칼라일 애덜리는 교사이자 코넷 연주자였고, 어머니 제시 역시 교사였다. 1931년 동생 냇이 태어났다. 형제는 공부와 음악을 함께 중시하는 흑인 교육자 집안에서 자랐고, 이 가정의 분위기는 평생 두 사람을 따라다녔다. (별명) 캐넌볼이라는 별명은 어린 시절 먹성이 좋아 친구들이 붙인 카니발(cannibal, 식인종)이라는 놀림말이 변한 것이라고 그는 회고했다. 몸집이 큰 편이었고, 그 체구는 무대 위의 넉넉한 인상이 되었지만 훗날 건강의 짐이 되기도 했다. (탤러해시) 가족은 이후 플로리다의 주도 탤러해시로 옮겼고, 부모는 흑인 대학인 플로리다 A&M에서 가르쳤다. 그는 트럼펫으로 시작해 알토 색소폰으로 옮겼고, 처음에는 베니 카터 같은 스윙 시대 알토 주자를 본보기로 삼았다. 인종 분리가 법으로 강제되던 남부에서 형제는 흑인 사회의 학교와 교회, 작은 클럽 안에서 음악을 익혔다. 교회에서 들은 손뼉과 외침, 블루스의 꺾이는 음은 이때 몸에 밴 것이었다. (레이 찰스) 1940년대 중반 탤러해시에 머물던 젊은 레이 찰스가 애덜리 형제와 함께 연주했다는 회고가 전해진다. 훗날 두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가스펠과 재즈를 잇는 음악을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같은 토양에서 자란 인연이었다. (졸업) 1948년 플로리다 A&M에서 음악 교육 과정을 마쳤다. 그 집안에서는 연주가보다 교사가 더 자연스러운 길이었다. 남을 가르치는 사람의 기질은 훗날 곡마다 청중에게 그 유래를 풀어 주던 무대 위의 말솜씨로 이어졌다.
II. 교단과 군악대 · 1948–1955 (20–27세)
(교단) 졸업 직후 플로리다주 포트로더데일의 흑인 학교 딜라드 고등학교에서 밴드 지도 교사가 되었다. 낮에는 학생들에게 악기 잡는 법과 합주를 가르쳤고, 밤에는 지역 클럽에서 연주했다. 그는 학생 하나하나의 소리를 듣고 고쳐 주는 일을 즐겼다고 전해지며, 평생 스스로를 교사로 여겼다. (군대) 1950년 징집되어 1953년까지 복무했다. 군에서 육군 댄스 밴드를 이끌었고, 워싱턴의 해군 음악학교에서도 공부했다. 편곡하고 지휘하고 단원들을 꾸려 나가는 일을 몸으로 익힌 시기였다. 이 경험은 뒷날 여러 명의 생계를 책임지는 밴드 리더가 되었을 때 밑천이 되었다. (복귀) 제대 후 그는 다시 딜라드로 돌아가 교단에 섰다. 플로리다에서는 이미 이름난 알토 주자였지만 뉴욕의 재즈계는 그를 알지 못했다. 안정된 교사 봉급과 불확실한 연주자의 삶 사이에서 그는 한동안 교사 쪽을 택했다. (비밥) 그사이 찰리 파커가 빠른 속도와 복잡한 화음으로 즉흥하는 새 재즈(비밥)로 알토 색소폰의 언어를 바꾸어 놓았다. 애덜리도 파커를 깊이 들었지만, 그의 뿌리는 남부 흑인 교회와 블루스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빠른 비밥의 어법과 끈적한 블루스의 감각, 이 두 바탕이 겹친 자리에서 그만의 소리가 자라고 있었다. (상경) 1955년 여름, 그는 대학원 공부를 하겠다며 냇과 함께 뉴욕으로 올라갔다. 공부가 명분이었지만 형제는 도착하자마자 밤마다 클럽을 돌았다. 교사의 길을 잠시 접어 둔 이 여행이 그의 삶을 통째로 바꾸게 된다.
III. 카페 보헤미아의 밤 · 1955–1957 (27–29세)
(보헤미아) 1955년 6월, 그리니치빌리지의 클럽 카페 보헤미아에서 베이시스트 오스카 페티퍼드의 밴드가 연주하고 있었다. 색소폰 주자가 자리에 없자 객석에 있던 애덜리가 즉석에서 무대에 끼어들었다(시팅 인). 페티퍼드가 낯선 시골 교사를 시험하려고 「아일 리멤버 에이프릴」을 아주 빠른 템포로 시작했는데, 그가 거침없이 따라붙어 클럽이 술렁였다고 전해진다. (새버드) 그해 3월 찰리 파커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 재즈계는 곧장 그를 새 버드라고 불렀다. 그 비교는 영광이자 짐이었다. 그는 파커를 존경했지만 흉내로 들리는 것을 경계했고, 블루스와 가스펠의 따뜻한 음색을 앞세워 자기 색을 찾으려 애썼다. (계약) 몇 주 만에 사보이 레이블에서 냇, 드러머 케니 클라크 등과 첫 리더 음반을 녹음했고, 곧 머큐리 산하 엠아시와 계약했다. 플로리다의 교사직은 그대로 정리했다. 하룻밤의 연주가 직업을 바꾼 셈이었다. (퀸텟) 1956년 그는 냇과 함께 첫 퀸텟을 꾸렸다. 평은 나쁘지 않았지만 흥행이 따르지 않았다. 클럽 개런티로는 다섯 사람의 생활비와 이동 경비를 감당하기 어려웠고, 1957년 그는 빚을 안은 채 밴드를 해산했다. (교훈) 이 실패는 그에게 음악만큼 운영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쳤다. 이후 그는 매니저 존 레비와 손잡고 출연료와 일정, 레퍼토리를 꼼꼼히 챙기는 리더가 되었다. 동생과 함께 꾼 꿈이 좌절된 바로 그때, 그를 부른 사람이 마일스 데이비스였다.
IV. 마일스의 악단에서 · 1957–1959 (29–31세)
(합류) 1957년 10월, 마일스 데이비스의 악단에 들어갔다. 마일스는 그의 블루스 감각을 원했다. 이듬해 존 콜트레인이 돌아오면서 알토와 테너 색소폰이 나란히 선 여섯 명의 악단이 만들어졌다. 헤로인이 흔하던 시절이었지만 애덜리는 마약과 거리가 먼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고, 쾌활하고 말이 많은 성격으로 악단의 분위기를 풀었다. (대비) 콜트레인이 화음을 겹겹이 쌓아 몰아치는 연주였다면, 애덜리는 밝고 둥근 음색으로 노래하듯 흘렀다. 두 사람은 서로를 존중했고, 애덜리는 콜트레인 옆에서 화성을 새로 공부하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마일스에게서는 음을 덜어 내고 여백을 쓰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섬싱엘스) 1958년 3월, 블루노트에서 자기 이름으로 「섬싱 엘스」를 녹음했다. 다른 레이블과 계약 중이던 마일스가 사이드맨으로 참여한 보기 드문 음반이었고, 드럼은 아트 블레이키가 맡았다. 같은 해 리버사이드와도 계약을 맺으며 프로듀서 오린 키프뉴스와의 오랜 인연이 시작되었다. (모드) 1958년 「마일스톤스」와 1959년 「카인드 오브 블루」에서 마일스는 정해진 코드 진행 대신 음계 하나 위에서 길게 즉흥하는 방식(모달 재즈)을 시험했다. 애덜리의 블루스 어법은 이 낯선 틀 안에서도 땅에 발을 디딘 소리로 남아, 음반 전체에 온기를 보탰다. (시카고) 1959년 2월에는 마일스가 빠진 채 콜트레인, 윈턴 켈리, 폴 체임버스, 지미 콥과 함께 「캐넌볼 애덜리 퀸텟 인 시카고」를 녹음했다. 2년 가까운 이 시기를 그는 배움의 시간으로 여겼다. 그해 가을, 그는 자신의 밴드를 다시 꾸리기 위해 마일스를 떠났다.
자기 이름의 음반에 마일스 데이비스와 아트 블레이키가 함께한, 마일스 악단 시절의 결실이다. 대표곡 「어텀 리브스」는 두 사람의 대비되는 소리를 가장 잘 들려준다.
- 「어텀 리브스」 도입에서 같은 음형을 고집스럽게 되풀이하는 베이스(오스티나토)는 피아니스트 아마드 자말의 편곡에서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마일스는 트럼펫 나팔 끝에 금속 마개(하먼 뮤트)를 끼워 가늘고 속삭이는 소리로 선율을 아끼듯 분다. 음과 음 사이의 침묵이 그의 문장이다.
- 뒤이은 애덜리의 솔로는 정반대로 밝고 유려하게 쏟아진다. 빠른 음형 사이사이에 블루스의 꺾이는 음을 끼워 넣는 것이 그의 서명이다.
- 평소 폭발적인 블레이키가 절제된 반주로 물러서 있고, 행크 존스의 피아노가 군더더기 없이 화음을 받친다. 1958년 3월 뉴저지 해켄색의 루디 반 겔더 스튜디오에서 녹음했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음반이지만, 애덜리의 블루스 감각은 이 차분한 실험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콜트레인과 나란히 선 그의 솔로는 두 색소폰의 대비를 영원히 남겼다.
- 「소 왓」은 베이스가 묻고 피아노와 호른이 두 음으로 답하는 짜임으로 시작한다. 솔로 순서는 마일스, 콜트레인, 애덜리이며, 콜트레인의 촘촘한 연주 뒤에 나오는 애덜리의 경쾌한 솔로가 대비를 이룬다.
- 정해진 코드 진행 대신 음계 하나 위에서 길게 노는 연주(모달 재즈)인데도, 애덜리는 블루스의 어법을 놓지 않아 낯선 틀에 익숙한 감정을 실어 준다.
- 「올 블루스」는 한 마디를 셋씩 두 번 나눠 흔들리듯 세는 박자(6/8박자)의 블루스다. 여기서는 마일스 다음에 애덜리가 솔로를 맡는다.
- 1959년 3월과 4월 뉴욕 컬럼비아 30번가 스튜디오의 두 차례 세션으로 녹음했다. 마일스는 간단한 스케치만 가져왔고 리허설은 거의 없었으며, 애덜리는 「블루 인 그린」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V. 디스 히어 · 1959–1964 (31–36세)
(재결성) 1959년 가을, 냇(코넷), 바비 티먼스(피아노), 샘 존스(베이스), 루이스 헤이스(드럼)와 퀸텟을 다시 꾸렸다. 10월 샌프란시스코의 클럽 재즈 워크숍에서 녹음한 실황 음반이 리버사이드에서 크게 팔렸다. 티먼스의 곡 「디스 히어」는 교회의 손뼉 같은 리듬으로 청중을 사로잡았고, 2년 전 빚을 지고 해산했던 형제의 밴드는 단숨에 가장 잘 팔리는 재즈 악단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소울) 가스펠과 블루스의 느낌을 앞세운 이 음악(소울 재즈)은 흑인 청중의 마음을 움직였다. 일부 비평가는 상업적이라며 낮춰 보았지만, 그는 그것이 자신이 자란 교회와 남부의 음악이라는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1960년 냇이 쓴 「워크 송」은 남부의 노동요를 떠올리게 하는 곡으로, 형제의 고향 기억이 그대로 음악이 된 경우였다. (안목) 프로듀서 키프뉴스는 1959년 인디애나폴리스에서 기타리스트 웨스 몽고메리를 듣고 녹음을 권한 사람이 애덜리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자기 연주만큼 남의 재능을 알아보고 밀어 주는 일에 열심이었다. 오하이오 콜럼버스에서 활동하던 가수 낸시 윌슨에게 뉴욕행을 권하고 매니저 존 레비에게 소개한 것도 그였고, 두 사람은 1961년 함께 음반을 냈다. (편성) 피아노는 빅터 펠드먼을 거쳐 1961년 오스트리아 출신 조 자비눌에게 넘어갔다. 1962년부터는 테너 색소폰과 플루트의 유세프 라티프가 가세해 여섯 명의 악단이 되었다. (결혼) 1962년 그는 배우이자 가수인 올가 제임스와 결혼했다. (이적) 1963년 리버사이드의 공동 사주 빌 그라우어가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레이블이 파산하자, 그는 1964년 캐피톨 레코드로 옮겼다.
빚을 지고 해산했던 형제의 밴드를 하룻밤에 일으켜 세운 실황 음반이다. 교회에서 자란 감각이 클럽의 열기와 만나 소울 재즈의 문을 열었다.
- 「디스 히어」 앞에서 애덜리가 청중에게 곡을 소개하는 목소리가 그대로 담겨 있다. 교사 출신다운 차분하고 유머 있는 말투가 음악의 일부다.
- 곡은 셋씩 세는 박자 위에서 교회의 손뼉처럼 강세를 밀어 넣는다. 바비 티먼스는 화음을 덩어리째 두드려 교회 오르간 같은 울림을 만든다.
- 샘 존스의 베이스와 루이스 헤이스의 드럼은 서두르지 않고 깊게 몸을 흔드는 리듬(그루브)을 지킨다. 객석의 탄성과 박수가 솔로와 주고받듯 끼어든다.
- 1959년 10월 샌프란시스코의 클럽 재즈 워크숍에서 오린 키프뉴스가 녹음했다. 스튜디오에서는 얻기 어려운 현장의 열기가 이 음반의 힘이다.
동생 냇이 쓴 「워크 송」이 실린 음반이다. 플로리다에서 함께 자란 형제의 기억이 남부 노동요의 울림으로 되살아났다.
- 「워크 송」은 짧은 선율을 던지고 쉬었다가 다시 받는, 부르고 답하기(콜 앤 리스폰스)의 짜임이다. 쉼표마다 내려치는 망치질이 들리는 듯하다.
- 곡은 단조 16마디 형식으로, 블루스의 어두운 색을 띠면서도 12마디 블루스와는 다른 호흡으로 돌아간다.
- 냇의 코넷은 거칠고 짧게 끊어 치는 반면, 캐넌볼의 알토는 길고 둥글게 노래한다. 한 무대에 선 형제의 음색 차이를 비교해 들을 만하다.
- 샘 존스의 베이스가 곡의 뼈대를 무겁게 받치며, 리듬이 앞으로 쏠리지 않고 묵직하게 걸어간다.
그가 뉴욕행을 권하고 매니저에게 소개한 가수 낸시 윌슨과 만든 음반이다. 남의 재능을 알아보고 밀어 주던 그의 면모가 그대로 담겼다.
- 「세이브 유어 러브 포 미」에서 윌슨은 연인에게 마음을 다른 데 쓰지 말고 아껴 두라고 낮고 다정하게 부탁하는 화법으로 노래한다. 또렷한 발음과 절제된 호흡이 특징이다.
- 애덜리의 알토는 노래 뒤에서 대선율을 덧대며, 앞에 나서기보다 가수의 말끝을 받아 주는 반주자로 움직인다.
- 음반은 윌슨의 노래 곡과 퀸텟의 연주곡이 번갈아 실려 있어, 같은 밴드가 가수를 받칠 때와 스스로 앞에 설 때의 차이를 들을 수 있다.
VI. 머시, 머시, 머시 · 1964–1970 (36–42세)
(캐피톨) 캐피톨에서 그는 프로듀서 데이비드 액슬로드와 일했다. 대형 레이블의 유통망은 그의 음악을 재즈 클럽 바깥, 라디오와 일반 음반 가게까지 실어 날랐다. 1964~65년에는 테너의 찰스 로이드가 함께했고, 1965년 드러머 로이 매커디가 들어와 이후 밴드의 리듬을 오래 지켰다. (히트) 1966년 10월, 할리우드의 캐피톨 스튜디오에 관객을 초대해 클럽처럼 꾸며 놓고 녹음했다. 표제곡 「머시, 머시, 머시」는 자비눌이 전기 피아노로 연주한 느린 가스펠 풍의 곡이었고, 1967년 빌보드 싱글 차트 11위까지 올랐다. 히트곡의 작곡자는 피아니스트였지만, 애덜리는 동료의 곡을 앞세우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야기) 그는 곡 앞에서 청중에게 말을 건네는 리더로 유명했다. 곡이 어디서 왔고 무엇을 뜻하는지 차분하게 풀어 주는 말투에는 교단에 섰던 시절의 습관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머시, 머시, 머시」 앞에서 역경을 맞을 준비가 안 된 사람들에 대해 한 짧은 이야기는 음악만큼 자주 회자된다. (자긍심) 민권 운동이 절정을 지나던 1960년대 말, 그는 흑인 공동체의 자긍심을 음악 안에 분명히 담았다. 1969년 시카고에서 흑인 경제 자립 운동을 벌이던 브레드바스킷 작전의 모임에 나가 「컨트리 프리처」를 실황 녹음했다. 교회와 집회의 공기를 고스란히 담은 이 음반은 그의 음악이 늘 어디를 향해 있었는지 보여 준다. (실험) 같은 시기 자비눌의 전기 피아노와 함께 밴드의 소리는 점점 넓어졌다. 그는 유행을 좇는다는 평을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 소울과 전기 악기는 같은 뿌리에서 뻗은 가지였다.
캐피톨 시절의 정점이자 재즈로는 드물게 대중 차트에 오른 음반이다. 동료 자비눌의 곡을 앞세우고 청중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리더의 모습이 모두 담겼다.
- 표제곡 앞에서 애덜리는 역경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 짧게 이야기한다. 이 말이 곡 전체의 정서를 미리 깔아 준다.
- 조 자비눌이 전기 피아노(우릴처)로 반복하는 가락이 곡의 중심이다. 가스펠의 화음을 따르면서 느릿하게 몸을 흔드는 리듬이 이어진다.
- 호른은 화려한 솔로보다 합창하듯 선율을 함께 받쳐 주는 역할에 머문다. 덜어 냄으로써 대중에게 다가간 편곡이다.
- 제목에는 클럽 실황처럼 적혀 있지만, 실제로는 할리우드 캐피톨 스튜디오에 관객을 초대하고 술자리를 마련해 녹음했다.
시카고 흑인 경제 자립 운동의 모임에서 녹음한 실황이다. 그의 음악이 교회와 공동체를 향해 있었다는 사실을 가장 직접 보여 준다.
- 표제곡은 자비눌의 전기 피아노가 이끄는 느린 가스펠 풍의 곡으로, 설교단 앞의 회중이 함께 흔들리는 듯한 리듬을 지닌다.
- 애덜리의 알토는 음을 길게 끌다가 끝을 꺾어 울음처럼 떨어뜨린다. 블루스와 교회 음악에서 배운 표현이다.
- 객석의 응답과 박수가 연주와 섞여, 무대와 청중이 부르고 답하는 집회의 공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VII. 마지막 무대 · 1970–1975 (42–47세)
(전환) 1970년 자비눌이 웨인 쇼터와 웨더 리포트를 꾸리기 위해 떠났다. 9년을 함께한 동료의 빈자리는 조지 듀크 등이 채웠고, 1971년 실황 음반 「더 블랙 메시아」에서는 록과 펑크의 리듬, 전기 악기가 한층 전면에 나섰다. 그는 마흔을 넘겨서도 새로운 소리에 귀를 닫지 않았다. (존헨리) 1970년대에 그는 판타지 레이블로 옮겼다. 생애 마지막 해에는 냇과 함께 쇠망치로 기계와 겨루다 쓰러진 흑인 노동자의 전설을 다룬 민속 뮤지컬 「빅 맨: 존 헨리의 전설」을 녹음했다. 남부의 노동과 흑인의 존엄이라는 그의 오랜 주제가 한데 모인 작업이었다. (건강) 그는 당뇨를 앓았고 체중이 무거웠다. 쉼 없는 순회공연은 몸에 큰 부담이었다. 1975년 7월, 인디애나주 게리에서 순회공연 중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4주가량 병상에 있다가 8월 8일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마흔여섯 살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을 보낸 탤러해시에 묻혔다. (추모) 그해 그는 다운비트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1976년 자비눌은 웨더 리포트의 음반에 그를 기리는 곡 「캐넌 볼」을 실었다. (형제) 평생 그의 곁을 지킨 냇은 200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형의 레퍼토리를 이어 연주했다. 교사로 출발해 무대 위에서도 끝까지 가르치는 사람으로 남은 그의 음악은, 비밥의 정교함과 남부 교회의 온기가 한 사람 안에서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덜 알려진 이야기
(클럽) 「머시, 머시, 머시!」의 부제는 클럽 실황이지만, 녹음은 1966년 할리우드의 캐피톨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졌다. 초대한 관객에게 술을 내고 클럽처럼 꾸며 실황의 분위기를 만든 것이다. 음반에 클럽 이름이 적혀 있어 오랫동안 시카고의 클럽에서 녹음된 것으로 여겨졌고, 사실은 재발매 자료와 관계자 증언으로 뒤늦게 널리 알려졌다. (사이드맨) 「섬싱 엘스」는 애덜리의 이름으로 나왔지만, 곡 선정과 진행은 사실상 마일스 데이비스가 주도했다고 평가된다. 다른 레이블과 계약 중이던 마일스가 블루노트 사주 앨프리드 라이언에게 신세를 갚는 뜻으로 참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계약의 사정이 음반 표지의 이름을 정한 셈이어서, 표지만 보는 감상자에게는 이 사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 (스크린) 1971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주연한 영화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에는 1970년 몬터레이 재즈 페스티벌에서 연주하는 애덜리 밴드의 모습이 담겨 있다. 스릴러 영화의 한 장면으로 지나가기 때문에 재즈 팬들 사이에서도 잘 언급되지 않지만, 전성기 후반 그의 무대를 볼 수 있는 귀한 영상이다. (교사) 그는 유명해진 뒤에도 자신을 교사로 소개하곤 했고, 무대의 곡 소개는 짧은 강의에 가까웠다. 연주자의 화려한 경력 뒤에 가려져 있지만, 고등학교 밴드 교사로 보낸 몇 해가 그의 무대 화법과 남을 밀어 주는 태도의 뿌리였다.
용어 노트 📚🔎
비밥
(말뜻) 빠른 선율을 입으로 흉내 낼 때 나오는 소리(바-밥, 비-밥)에서 온 이름이라는 설명이 널리 받아들여진다. 뜻이 있는 단어라기보다 음악의 리듬을 닮은 의성어다. (재즈에서) 1940년대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 등이 만든 재즈로, 춤추기 위한 음악이던 스윙보다 훨씬 빠르고 화음이 복잡하다. 연주자가 짧은 시간에 많은 음을 정확하게 엮어야 해서, 듣는 음악이자 실력을 겨루는 음악이 되었다. 줄넘기에 비유하면, 박자에 맞춰 넘기만 하던 줄넘기에서 이중 뛰기와 엇갈려 뛰기를 쉬지 않고 이어 가는 고난도 줄넘기로 바뀐 것과 비슷하다.
시팅 인
(말뜻) 영어 sit in은 끼어 앉다라는 뜻이다. 남의 자리에 잠시 앉는다는 말이 그대로 음악 용어가 되었다. (재즈에서) 정식 단원이 아닌 연주자가 클럽에서 즉석으로 무대에 올라 함께 연주하는 일이다. 무명 연주자에게는 실력을 보여 줄 기회였고, 밴드 쪽에서는 일부러 어려운 곡이나 빠른 템포로 시험하기도 했다. 학교 운동장에서 낯선 아이가 축구 경기에 끼워 달라고 했을 때, 일단 공을 줘 보고 실력을 확인하는 것과 비슷하다. (다른 데서는) 시트인(sit-in)은 민권 운동에서 차별하는 식당 자리에 앉아 비켜 주지 않는 농성 시위를 가리키기도 한다.
모달 재즈
(말뜻) 모달은 선법(mode)에서 온 말이고, mode의 라틴어 뿌리 modus는 방식이나 척도를 뜻한다. 음을 늘어놓는 하나의 방식, 즉 음계의 틀이라는 뜻이다. (재즈에서) 정해진 코드 진행을 빠르게 따라가는 대신, 음계 하나 위에서 오래 머물며 즉흥하는 재즈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카인드 오브 블루」가 대표작이다. 그림 그리기에 빗대면, 칸마다 정해진 색을 칠하는 색칠 공부 대신 큰 도화지에 몇 가지 색만 주고 자유롭게 그리게 하는 것과 같다. (다른 데서는) 모달(modal)은 컴퓨터 화면에서 다른 조작을 막고 앞에 뜨는 창(모달 창)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소울 재즈
(말뜻) 소울(soul)은 영혼이라는 뜻이다. 흑인 교회 음악에서 온 깊은 감정을 담았다는 의미로 이 이름이 붙었다. (재즈에서) 1950년대 말부터 유행한 재즈로, 가스펠의 화음과 손뼉 같은 리듬, 블루스의 꺾이는 음을 앞세워 듣기 쉽고 몸이 저절로 움직이게 만든다. 애덜리의 「디스 히어」와 「머시, 머시, 머시」가 대표적이다. 어려운 기술보다 다 함께 따라 부를 수 있는 응원가처럼, 듣는 사람이 바로 함께할 수 있는 음악을 지향했다. (다른 데서는) 소울은 음식에서 미국 남부 흑인 가정 요리(소울 푸드)를 가리킬 때도 쓰인다.
콜 앤 리스폰스
(말뜻) 영어 call and response는 부르고 답하기라는 뜻이다. (재즈에서) 한 사람이나 한 악기가 짧은 가락을 던지면 다른 쪽이 그에 답하는 짜임이다. 아프리카의 노래와 미국 흑인 교회의 설교, 노동요에서 이어져 온 전통으로, 「워크 송」이 이 방식으로 짜여 있다. 체육 시간에 선생님이 하나, 둘 하고 외치면 반 전체가 셋, 넷으로 받는 구령과 똑같은 원리다.
오스티나토
(말뜻) 이탈리아어 ostinato는 고집스러운이라는 뜻이다. 같은 음형을 고집스럽게 되풀이한다는 데서 온 이름이다. (재즈에서) 짧은 음형을 곡 내내 또는 한 구간 동안 반복하는 것으로, 재즈에서는 베이스가 이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다. 「어텀 리브스」의 도입이 그 예다. 줄넘기를 할 때 줄을 돌리는 친구 둘이 같은 박자로 계속 돌려 주면 그 위에서 뛰는 친구가 마음껏 재주를 부릴 수 있는 것처럼, 오스티나토는 솔로 연주자의 바닥이 되어 준다.
하먼 뮤트
(말뜻) 뮤트(mute)는 소리를 죽인다는 뜻이고, 하먼은 이 도구를 만든 미국 회사의 이름이다. (재즈에서) 트럼펫 나팔 끝에 끼우는 금속 마개로, 소리를 작게 줄이면서 가늘고 윙윙거리는 독특한 음색을 만든다. 마일스 데이비스가 즐겨 써서 그의 상징이 되었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하면 목소리가 작아지면서 색깔도 바뀌는 것처럼, 같은 악기에서 전혀 다른 소리가 나온다. (다른 데서는) 뮤트는 텔레비전이나 컴퓨터에서 소리를 끄는 버튼의 이름으로도 흔히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