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etano Donizetti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지하에서 태어나, 일흔 편 가까운 오페라로 19세기 무대를 밝힌 사람.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곁의 사람들 ⏳🌊
- 스승시모네 마이르
가난한 소년을 무료 학교에 받아들여 하이든·모차르트를 가르치고 유학길을 열어 준 평생의 스승이다.
- 영향조아키노 로시니
초기 양식의 본보기였고, 훗날 파리 초청과 볼로냐 〈스타바트 마테르〉 지휘를 맡기며 그를 신뢰했다.
- 가족비르지니아 바셀리
1828년 결혼한 아내로, 아이들을 모두 먼저 보내고 1837년 스물여덟에 세상을 떠났다.
- 경쟁빈첸초 벨리니
같은 극장과 시즌에서 맞선 경쟁자였고, 그의 죽음 뒤 도니체티는 그를 기리는 레퀴엠을 썼다.
- 영향주세페 베르디
도니체티가 빈에서 〈나부코〉 상연을 이끌어 소개한 후배로, 그의 극적 어법을 이어받았다.
I. 베르가모의 지하실 · 1797–1815 (0–18세)
(지하실) 1797년 11월 29일, 이탈리아 북부 베르가모에서 태어났다. 베르가모를 오래 다스린 베네치아 공화국이 무너지고 프랑스 혁명군의 영향 아래 새 공화국이 들어선 해였다. 아버지 안드레아는 전당포의 관리인으로 일했고, 어머니 도메니카 나바는 직조 일을 했다고 전해진다. 여섯 남매 가운데 다섯째였던 그는 성벽 밖 보르고 카날레의 반지하 셋방에서 자랐다. 훗날 그는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지하실 계단 아래에서 태어났다고 회고했다. (형) 열 살 위인 맏형 주세페는 군악대원이 되어 나폴레옹 군대에 몸담았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에서 음악은 손에 쥘 수 있는 몇 안 되는 생계의 길이었고, 형제는 일찍부터 그 길을 보며 자랐다. (자선학교) 1806년, 베르가모 대성당 악장이던 독일 태생 작곡가 시모네 마이르가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무료 음악 학교를 열었다. 아홉 살 가에타노는 첫 학생 가운데 하나였다. 변성기에 목소리가 고르지 못해 학교에서 내보낼지 논의가 오갔지만, 마이르가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붙잡아 두었다. (스승) 마이르는 하이든과 모차르트를 깊이 존경한 음악가였다. 소년은 그에게서 빈 고전파의 4중주와 교향곡을 배웠고 문학과 교양까지 익혔다. 1811년에는 마이르가 학생들을 위해 쓴 소극 〈어린 작곡가〉에서 주인공을 맡아 재담 많은 쾌활한 기질을 드러냈다. 1815년, 마이르는 그를 더 큰 곳으로 보내기로 하고 유학 비용을 마련하는 데 힘을 보탰다.
II. 볼로냐에서 나폴리로 · 1815–1827 (18–30세)
(대위법) 1815년부터 2년 동안 볼로냐에서 스타니슬라오 마테이 신부에게 대위법을 배웠다. 로시니를 가르친 바로 그 스승으로, 엄격하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이 시기에 첫 오페라 〈피그말리오네〉를 썼지만 생전에는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4중주) 1817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마이르 주변의 실내악 모임을 위해 현악 4중주를 잇달아 썼다. 열여덟 곡가량 남은 이 4중주들에는 마이르가 심어 준 하이든의 어법이 짙게 배어 있다. 군 복무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한 귀부인 후원자가 면제 비용을 대신 치러 준 덕분이었다고 전해진다. (데뷔) 1818년 베네치아에서 〈부르고뉴의 엔리코〉로 극장 무대에 데뷔했고, 1822년 로마 아르젠티나 극장에서 올린 〈그라나다의 조라이다〉가 호평을 받았다. 이 성공으로 나폴리의 거물 흥행사 도메니코 바르바야와 손을 잡았다. 계약은 한 해에 여러 편을 써야 하는 고된 조건이었고, 그는 나폴리·로마·밀라노를 쉼 없이 오갔다. (로시니) 당시 이탈리아 오페라는 로시니의 시대였다. 젊은 도니체티의 초기작들은 로시니의 화려한 장식 선율과 경쾌한 리듬을 충실히 따랐고, 비평가들도 그를 로시니의 아류로 보곤 했다. (팔레르모) 1825년부터 이듬해까지는 시칠리아 팔레르모의 카롤리노 극장 음악감독을 맡았다. 급여는 제때 나오지 않았고 단원들의 수준도 낮아, 그는 편지마다 불평을 쏟아 냈다. 빠른 손과 생활의 압박이 함께 그를 단련한 시기였다.
III. 비르지니아와 안나 볼레나 · 1828–1834 (31–37세)
(결혼) 1828년 6월, 로마의 법률가 집안 딸 비르지니아 바셀리와 결혼해 나폴리에 살림을 차렸다. 그녀의 오빠 안토니오, 애칭 토토는 평생 가장 허물없는 벗이 되어 수백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오늘날 그의 속마음을 아는 것은 대부분 이 편지 덕분이다. (아들) 1829년 첫아들 필리포가 태어났지만 두 주를 넘기지 못하고 숨졌다. 부부가 겪은 첫 상실이었다. (돌파) 1830년 12월, 밀라노 카르카노 극장에서 펠리체 로마니의 대본에 붙인 〈안나 볼레나〉가 초연되었다. 명가수 주디타 파스타가 헨리 8세의 버림받은 왕비를 노래했고, 작품은 곧 런던과 파리로 퍼졌다. 처음으로 로시니의 그늘을 벗어난 자기 목소리였다. (벨리니) 같은 극장, 같은 시즌에 벨리니의 〈몽유병의 여인〉이 무대에 올랐다. 벨리니는 편지에서 도니체티를 경계하는 속내를 자주 내비쳤으나, 도니체티 쪽에서 벨리니를 깎아내린 기록은 거의 없다. 이 경쟁은 두 사람 모두를 더 날카롭게 했다. (속도) 1832년의 희극 〈사랑의 묘약〉은 몇 주 만에 완성되었다고 전해지며, 1833년에는 라 스칼라에서 〈루크레치아 보르자〉를 올렸다. 1834년 나폴리의 〈마리아 스투아르다〉는 리허설 중 두 프리마돈나가 실제로 몸싸움을 벌인 끝에 국왕의 명으로 상연이 금지되어, 음악을 다른 줄거리에 옮겨 붙여야 했다.
결혼 직후 첫아들을 잃은 시기에 쓴 첫 국제적 성공작으로, 버림받은 왕비의 마지막 장면에 비극을 노래로 그리는 그의 재능이 처음 온전히 드러났다.
- 마지막 장면에서 안나는 정신이 흐려져 어린 시절의 성을 떠올리며 「Al dolce guidami(나를 그리운 곳으로 이끌어 주오)」를 부른다. 장식이 적은 느린 선율이라 가수의 숨과 음색이 그대로 드러난다.
- 이어지는 대목에는 영국 노래 〈즐거운 나의 집(Home! Sweet Home!)〉과 닮은 가락이 흘러, 영국 왕비라는 배경을 슬며시 비춘다.
- 멀리서 축포와 종소리가 왕과 새 왕비의 결혼을 알리면, 안나는 빠르고 격렬한 마무리 노래(카발레타) 「Coppia iniqua(사악한 한 쌍이여)」로 저주를 퍼붓는다. 느린 체념에서 분노로 뒤집히는 대비를 들어 보자.
- 1957년 라 스칼라에서 칼라스가 이 역을 부른 공연은 잊혀 가던 이 작품을 되살린 사건으로 꼽힌다.
몇 주 만에 완성됐다고 전해지는 이 희극은 쉼 없이 써야 했던 그의 빠른 손과, 웃음 속에 눈물을 섞는 솜씨를 함께 보여 준다.
- 2막의 테너 아리아 「Una furtiva lagrima(남몰래 흐르는 눈물)」는 바순 한 대의 쓸쓸한 독주로 시작한다. 하프가 화음을 한 음씩 펼쳐 받쳐 주는(분산화음, 아르페지오) 반주 위로 순박한 청년의 마음이 흐른다.
- 같은 아리아 안에서 어두운 단조가 밝은 장조로 바뀌는 순간, 네모리노가 그녀의 사랑을 확신하는 기쁨이 소리로 드러난다.
- 떠돌이 약장수 둘카마라의 「Udite, udite, o rustici(들어 보시오, 마을 사람들)」는 말을 빠르게 쏟아 내는 노래(파터)로, 베이스 가수의 혀 놀림과 익살 연기가 볼거리다.
IV. 루치아, 그리고 빈집 · 1835–1838 (38–41세)
(파리) 1835년 초, 로시니의 초청으로 파리 이탈리아 극장에서 〈마리노 팔리에로〉를 올렸다. 같은 시즌 벨리니의 〈청교도〉가 더 큰 박수를 받았고, 그는 첫 파리 도전에서 한발 물러서야 했다. (루치아) 그해 9월 26일, 나폴리 산카를로 극장에서 월터 스콧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람메르무어의 루치아〉가 초연되었다. 대본은 이후 오랜 동반자가 된 살바도레 카마라노가 썼다. 사흘 전 벨리니가 파리 근교에서 서른셋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뒤늦게 닿자, 그는 옛 경쟁자를 기리는 레퀴엠을 썼다. (상실) 이어진 두 해는 잔혹했다. 1835년 말과 이듬해 초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잇따라 세상을 떠났고, 1836년과 1837년에 태어난 아이들도 살아남지 못했다. 1837년 7월 30일, 콜레라가 돌던 나폴리에서 아내 비르지니아가 스물여덟으로 숨졌다. 그는 토토에게 부모도 아내도 자식도 없이 무엇을 위해 일하느냐고 썼다. (엘리자베타) 석 달 뒤 초연된 〈로베르토 데브뢰〉에서, 사랑하는 이를 처형대로 보낸 엘리자베스 1세는 무너지듯 절규한다. 그는 이 시기 이후 비르지니아의 방을 그대로 두었다고 전해진다. (검열) 나폴리 음악원 원장 대행까지 맡았으나 정식 자리는 메르카단테에게 돌아갔다. 1838년에는 성인의 순교를 그린 〈폴리우토〉가 국왕의 검열로 금지되었다. 그해 가을, 그는 나폴리를 떠나 파리로 향했다.
벨리니가 세상을 떠난 그달에 초연되었고, 부모와 아내를 잇따라 잃기 직전의 작품이다. 사랑 때문에 무너지는 한 여인을 그린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 1막 루치아의 등장 장면 앞에서 하프가 홀로 긴 전주를 연주해, 유령 이야기가 깃든 샘가의 서늘한 밤을 연다.
- 2막 끝의 6중창 「Chi mi frena in tal momento(이 순간 무엇이 나를 막는가)」는 여섯 인물이 각기 다른 감정을 동시에 노래하는 대목이다. 낮은 남성 성부에서 시작해 목소리가 하나씩 겹쳐 쌓이는 과정을 따라가 보자.
- 3막 광란의 장면에서 루치아의 목소리와 플루트가 서로 메아리처럼 주고받는다. 이 유명한 맞대응 즉흥 장식(카덴차)은 도니체티 악보에는 없고 19세기 후반 가수들이 덧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근래에는 이 장면을 도니체티가 처음 의도한 유리 하모니카(물 묻은 유리 그릇을 문질러 소리 내는 악기)로 연주하는 공연도 있다. 플루트판과 비교해 들으면 훨씬 몽환적으로 들린다.
아내 비르지니아를 잃고 석 달 만에 초연된 작품으로, 사랑하는 이를 스스로 죽음에 보낸 여왕의 절망이 이 시기 그의 상실과 겹쳐 읽힌다.
- 서곡에는 영국 국가 〈신이여 왕을 지켜 주소서〉의 가락이 섞여 들어가 엘리자베스 1세의 궁정이라는 배경을 알린다.
- 마지막 장면 「Vivi, ingrato(살아라, 배은망덕한 자여)」에서 여왕은 체면을 벗어던지고 연인의 목숨을 구하려 애원한다. 느린 선율이 점점 흐트러지는 과정에 귀를 기울이자.
- 처형을 알리는 대포 소리 뒤의 「Quel sangue versato(흘린 그 피가)」는 높은 음역에서 숨 가쁘게 몰아치는 마무리 노래(카발레타)로, 소프라노에게 가장 혹독한 대목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 베벌리 실스가 〈안나 볼레나〉, 〈마리아 스투아르다〉와 함께 이 작품의 여왕까지 세 튜더 왕비를 모두 노래한 일은 애호가들 사이에서 자주 회자된다.
V. 파리와 빈 · 1838–1845 (41–48세)
(정복) 파리는 그를 받아들였다. 1840년 한 해에만 오페라 코미크에서 〈연대의 딸〉, 오페라 극장에서 〈순교자들〉(〈폴리우토〉의 개작)과 〈라 파보리트〉가 초연되었다. 수입은 나폴리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이 커졌다. (베를리오즈) 모두가 반기지는 않았다. 베를리오즈는 『주르날 데 데바』에서 도니체티가 파리를 정복한 나라처럼 다루고 있다며 그의 극장 독점을 꼬집었다. 반면 무명으로 파리에서 궁핍하게 지내던 바그너는 출판업자 슐레징거의 주문을 받아 〈라 파보리트〉의 피아노 편곡을 하며 생계를 이었다. (빈) 1842년 빈에서 〈샤모니의 린다〉가 성공하자 오스트리아 황실은 그에게 궁정 악장 겸 작곡가의 칭호를 내렸고, 이후 해마다 빈 시즌을 맡았다. 같은 해 봄에는 로시니의 부탁으로 볼로냐에서 〈스타바트 마테르〉의 이탈리아 초연을 지휘했다. 로시니는 그를 볼로냐에 붙잡아 두고 싶어 했지만 그는 사양했다. (파스콸레) 1843년 1월 파리 이탈리아 극장의 〈돈 파스콸레〉는 늙은 독신자를 놀리는 희극이지만, 곳곳에 늙음의 쓸쓸함이 비친다. 같은 해 빈에서는 베르디의 〈나부코〉 상연을 이끌며 젊은 후배를 소개했다. 이 무렵부터 두통과 열, 신경질적인 기분 변화가 잦아졌고, 1844년 〈카테리나 코르나로〉가 생전 마지막 초연이 되었다.
나폴리를 떠나 파리에 정착한 뒤 프랑스어 대본으로 쓴 희극으로, 낯선 도시의 취향에 재빨리 녹아든 그의 적응력을 보여 준다.
- 테너 아리아 「Ah! mes amis, quel jour de fête(아, 친구들이여, 즐거운 날이여)」에는 높은 도(하이 C)가 아홉 번 나온다. 1972년 파바로티가 이 대목으로 큰 화제를 모았다.
- 같은 아리아를 2007년 라 스칼라에서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가 앙코르로 다시 부른 일은, 앙코르를 금기시하던 그 극장에서 수십 년 만의 일로 기록되었다.
- 마리의 「Chacun le sait(누구나 알지요)」는 군대 행진곡처럼 북 장단과 경쾌한 리듬을 타며, 병사들 손에 자란 아가씨의 씩씩함을 그린다.
- 마리가 연대와 작별하는 「Il faut partir(떠나야 해요)」는 앞선 활기와 대조되는 느리고 애잔한 노래다. 희극 한가운데 놓인 눈물의 순간을 놓치지 말자.
병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하던 무렵 파리에서 초연된 마지막 걸작 희극이다. 웃음 사이로 늙음의 서글픔이 비친다.
- 3막 정원 장면의 세레나데 「Com'è gentil(얼마나 다정한가)」에서는 오케스트라가 현을 손가락으로 튕기는 주법(피치카토)으로 기타 반주를 흉내 내고, 무대 밖 합창이 아련하게 받친다.
- 노리나가 파스콸레의 뺨을 때리는 순간 음악이 갑자기 어두워진다. 웃기던 노인이 굴욕을 삼키는 이 대목은 작품 전체에서 가장 쓸쓸한 순간으로 꼽힌다.
- 3막 이중창 「Cheti, cheti, immantinente(조용히, 조용히, 당장)」는 두 베이스가 숨 돌릴 틈 없이 말을 쏟아 내는 빠른 대목으로, 가사를 또렷하게 살려 내는지가 명연의 기준이 된다.
- 1막 노리나의 아리아 「Quel guardo il cavaliere(그 기사의 눈길)」는 책을 소리 내어 읽으며 비웃는 장면으로 시작해, 영리한 여인의 성격을 단번에 보여 준다.
VI. 어둠 속의 귀향 · 1845–1848 (48–51세)
(발병) 1845년 여름, 파리에서 몸 한쪽에 마비가 왔다. 오래 잠복해 있던 매독이 뇌와 신경을 침범한 것으로, 당시 의사들의 기록과 사후 부검 소견이 이를 뒷받침한다. 말과 행동이 갈수록 흐려졌다. (이브리) 1846년 2월, 형 주세페가 보낸 조카 안드레아와 의사들은 그를 파리 근교 이브리의 요양원에 입원시켰다. 그는 한동안 자신이 왜 그곳에 있는지 몰라 괴로워했고, 그를 고향으로 데려가는 문제를 두고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당국 사이에 긴 실랑이가 오갔다. (귀향) 1847년 10월, 마침내 베르가모로 돌아와 그를 아끼던 스코티 남작부인의 저택에 머물렀다. 그는 거의 말을 하지 못했다. 1848년 4월 8일, 롬바르디아가 오스트리아에 맞선 혁명으로 들끓던 봄에 세상을 떠났다. 쉰 살이었다. (안식) 1875년 그의 유해는 베르가모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으로 옮겨져, 세 해 앞서 세상을 떠난 스승 마이르의 무덤 가까이 안장되었다. 지하 셋방에서 시작한 생애가 스승 곁에서 끝난 셈이었다. (유산) 리스트는 〈루치아〉를 바탕으로 피아노 판타지를 써 유럽에 퍼뜨렸고, 베르디는 그가 다져 놓은 극적 선율 위에서 출발했다. 한동안 몇 편만 무대에 남았던 그의 오페라들은 20세기 중반 칼라스, 서덜랜드, 실스 같은 가수들을 통해 다시 깨어났다.
덜 알려진 이야기
(형) 맏형 주세페 도니체티는 1828년 오스만 제국 술탄 마흐무트 2세의 초청으로 콘스탄티노플에 건너가 궁정 군악대를 서양식으로 재편했다. 그가 쓴 〈마흐무디예 행진곡〉은 제국의 공식 행진곡으로 쓰였고, 그는 파샤 칭호까지 받았다. 동생의 명성에 가려 이탈리아에서는 잘 언급되지 않지만, 튀르키예 음악사에서는 서양 음악 도입의 출발점으로 꼽힌다. 도니체티를 이브리에서 고향으로 데려온 조카 안드레아가 바로 이 형의 아들이었다. (유리) 〈루치아〉 광란의 장면은 원래 플루트가 아니라 유리 하모니카를 위해 쓰였다. 자필 악보에 그 흔적이 남아 있지만, 초연 직전 극장과 연주자 사이의 사정으로 플루트로 바뀌었고 한 세기 넘게 플루트판이 표준이 되었다. 20세기 후반 원전 악보 연구가 진행되면서 비로소 원래 악기를 되살린 공연이 나오기 시작했다. (두개골) 1848년 사후 부검 때, 입회한 한 의사가 두개골 윗부분을 몰래 떼어 갔다. 1875년 유해를 성당으로 옮기며 무덤을 열었을 때에야 이 사실이 드러났고, 조각은 그 의사의 친척 집에서 되찾아 베르가모 시립 도서관과 도니체티 박물관에 보관하다 1951년에야 본래의 유해와 함께 묻혔다. 당시 뇌 질환에 대한 의학적 호기심과 유명인의 유골을 수집하던 풍조가 겹친 일로, 가족과 시 당국이 오랫동안 드러내기를 꺼린 탓에 지역 기록에만 남았다.
용어 노트 📚🔎
벨칸토
(말뜻) 이탈리아어로 아름다운(bel) 노래(canto)라는 뜻이다. (음악에서) 19세기 전반 로시니, 벨리니, 도니체티의 오페라에서 꽃핀 노래 방식을 가리킨다. 숨을 고르게 다스려 긴 선율을 매끄럽게 잇고, 빠르고 화려한 장식음도 힘들이지 않은 듯 부르는 것이 핵심이다. 큰 목소리로 밀어붙이기보다 아름다운 소리를 끝까지 유지하는 데 힘을 쏟는다. 합창 시간에 소리를 지르지 않고도 노래가 교실 끝까지 또렷이 들리게 부르는 친구를 떠올리면 된다. 벨칸토 가수는 그 위에 눈부신 기교까지 얹는 셈이다.
리브레토
(말뜻) 이탈리아어 책(libro)에 작다는 뜻의 꼬리가 붙어 작은 책이라는 뜻이 되었다. 옛날 관객이 극장에서 사서 보던 얇은 가사 책자에서 나온 이름이다. (음악에서) 오페라의 대본, 곧 등장인물이 노래하고 말하는 모든 가사를 적은 글이다. 작곡가는 이 대본을 받아 음악을 붙인다. 도니체티는 펠리체 로마니, 살바도레 카마라노 같은 대본 작가와 짝을 이뤄 일했다. 학예회 연극을 준비할 때 먼저 대본을 쓰고 그다음에 배경음악을 고르는 것과 비슷하다. 다만 오페라에서는 대본의 거의 모든 줄이 노래가 된다.
레치타티보
(말뜻) 이탈리아어 recitare(낭송하다)에서 나온 말로, 낭송하듯 부르는 노래라는 뜻이다. (음악에서) 오페라에서 줄거리를 빠르게 진행시키는 말하듯 노래하는 부분이다. 선율보다 말의 리듬이 앞서고, 반주도 간단한 화음 몇 개로 받쳐 주는 경우가 많다. 이어지는 아리아에서는 인물이 멈춰 서서 감정을 길게 노래한다. 게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전 상황을 설명하는 대화 장면이 레치타티보라면, 실제로 실력을 보여 주는 본 게임 구간이 아리아인 셈이다.
카발레타
(음악에서) 벨칸토 오페라에서 아리아의 뒷부분에 붙는 빠르고 화려한 마무리 노래다. 앞의 느린 노래에서 슬픔이나 그리움을 길게 펼친 뒤, 상황이 바뀌면 인물이 결심이나 분노를 빠른 리듬으로 터뜨린다. 보통 같은 가락을 두 번 부르는데, 두 번째에는 가수가 장식을 더해 기교를 뽐낸다. 〈안나 볼레나〉 마지막의 「Coppia iniqua」가 대표적이다. 체육대회 이어달리기에서 마지막 주자가 남은 힘을 다 쏟아 결승선으로 내달리는 구간과 닮았다.
오페라 부파
(말뜻) 이탈리아어 buffa는 익살스럽다는 뜻이다. 어릿광대를 뜻하는 buffone와 뿌리가 같다. (음악에서) 일상 속 평범한 인물들이 나와 소동을 벌이는 이탈리아 희극 오페라다. 신화나 역사 속 영웅이 나오는 진지한 오페라(오페라 세리아)와 짝을 이룬다. 빠르게 말을 쏟아 내는 노래, 엇갈리는 오해, 마지막의 화해가 단골 요소다. 도니체티의 〈사랑의 묘약〉과 〈돈 파스콸레〉가 이 전통의 마지막 걸작으로 꼽힌다. 반 친구들이 서로 쪽지를 잘못 전해 벌어지는 소동을 노래로 만든 연극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랑 오페라
(말뜻) 프랑스어로 큰(grand) 오페라라는 뜻이다. (음악에서) 1830~40년대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유행한 대형 오페라다. 보통 다섯 막으로 길고,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거대한 합창과 화려한 무대 장치, 발레 장면을 반드시 넣었다. 도니체티는 파리에서 〈라 파보리트〉와 〈돔 세바스티앵〉으로 이 양식에 도전했다. 교실에서 하는 연극이 아니라 학교 전체가 강당에서 무대와 조명과 춤까지 갖춰 올리는 대형 공연에 가깝다.
카덴차
(말뜻) 라틴어 cadere(떨어지다)에서 나온 말로, 음악이 끝을 향해 내려앉는 마침을 뜻했다. 그 마침 직전에 연주자가 솜씨를 뽐내던 대목이 따로 이 이름을 얻었다. (음악에서) 반주가 잠시 멈춘 사이 독창자나 독주자가 혼자서 자유롭게 펼치는 화려한 장식 대목이다. 작곡가가 직접 써 두기도 하지만, 벨칸토 시대에는 가수가 스스로 만들어 부르는 일이 많았다. 〈루치아〉 광란의 장면에서 목소리와 플루트가 주고받는 유명한 카덴차도 후대 가수들이 덧붙인 것이다. 노래방에서 반주가 잠깐 비는 마지막 소절에 자기만의 꾸밈을 넣어 부르는 것과 같은 자리다. (다른 데서는) 영어로 같은 뿌리인 케이던스는 자전거에서 1분 동안 페달을 돌리는 횟수를 가리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