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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useppe Verdi

주세페 베르디 (1813–1901)

"실재를 베끼는 것도 좋지만, 실재를 만들어 내는 편이 훨씬 낫다." — 클라리나 마페이에게 보낸 편지, 1876년

한눈에 보기 🔭💭

1. 뿌리이탈리아 레 론콜레 출생여관집 아들바레치의 후원2. 상실아내와 두 자녀 잃음오페라 흥행 실패나부코로 재기3. 질주갤리선살이 다작기리골레토라 트라비아타4. 통일산타가타 농장국회의원비바 베르디5. 원숙아이다레퀴엠보이토와 화해6. 말년오텔로팔스타프음악가 요양원베르디1813–1901상실과 사랑을 오페라로 빚어 이탈리아의 목소리…
삶의 여정 🧭🗺️
N이탈리아부세토1823–1839밀라노1832–1848산타가타1848–1901제노바1874–1901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곁의 사람들 ⏳🌊

  • 후원안토니오 바레치

    장인이자 평생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다.

  • 가족마르게리타 바레치

    첫 아내로, 두 자녀와 함께 일찍 세상을 떠났다.

  • 가족주세피나 스트레포니

    소프라노였고, 오랜 동반자 끝에 정식 아내가 되었다.

  • 존경조아키노 로시니

    선배 작곡가로 존경했고, 그의 사후 추모 레퀴엠을 구상했다.

  • 경쟁리하르트 바그너

    동시대 오페라 개혁가로 자주 비교되었으나 서로 만난 적은 없었다.

  • 우정아리고 보이토

    초기 불화를 딛고 화해해 말년 걸작들의 대본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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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레 론콜레의 여관집 아들 · 1813–1823 (0–10세)

(여관) 1813년 10월, 당시 나폴레옹 치하 프랑스 제1제국의 타로 주(오늘날 이탈리아 파르마 현)에 속한 작은 마을 레 론콜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카를로 베르디는 마을 어귀에서 여관 겸 잡화상을 운영했고, 어머니 루이자 우티니는 길쌈으로 생계를 보탰다. 유복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시골 소매상 집안의 장남이었다. (전쟁) 갓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폴레옹 전쟁의 포화가 마을까지 번졌다. 오스트리아와 연합한 군대가 레 론콜레를 휩쓸었을 때 어머니가 어린 베르디를 안고 교회 종탑으로 피신해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실 여부를 둘러싸고 전기 작가들 사이에 이견이 있지만, 전쟁의 그림자 속에서 유년을 시작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오르간) 일곱 살 무렵부터 마을 성당의 오르간 소리에 사로잡혔다. 미사 도중 오르간 연주에 정신이 팔려 사제의 부름에 응하지 못해 꾸중을 들었다는 일화를 노년의 베르디가 직접 회고하기도 했다. 교구 오르가니스트 피에트로 바이스트로키에게 처음으로 음악을 배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스피넷) 아들의 재능을 알아본 카를로는 중고 스피넷(소형 건반악기)을 구해 주었다. 건반 장인 스테파노 카발레티가 고장 난 부분을 손봐 주면서 보수를 받지 않았다는 영수증이 지금도 전해지는데, 소년의 열의에 대한 호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 악기는 훗날 밀라노의 박물관에 전시되었고, 베르디 자신도 평생 소중히 간직했다.

II. 부세토의 바레치 · 1823–1832 (10–19세)

(후원) 열 살 무렵, 더 나은 교육을 위해 인근 소도시 부세토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식료품과 증류주를 취급하던 상인이자 아마추어 음악가 안토니오 바레치의 눈에 들었다. 바레치는 집에 숙식을 제공하며 소년의 음악 교육 비용을 댔고, 평생 베르디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자 훗날 장인이 되었다. (필하모닉) 부세토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 페르디난도 프로베시에게 작곡과 대위법을 배우는 한편, 바레치가 회장을 맡은 부세토 필하모닉 협회에서 연주하고 지휘했다. 열다섯 무렵에는 이미 협회 행사를 위해 서곡과 행진곡을 쓸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좌절) 1832년, 더 큰 물을 찾아 밀라노 음악원 입학을 시도했으나 거절당했다. 나이가 많고(열여덟) 피아노 주법이 음악원 기준과 달랐으며 지역 정원 제한에도 걸렸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 거절은 두고두고 회자되었고, 베르디 자신도 훗날 성공한 뒤 이를 담담히 언급하곤 했다. (사사) 음악원 대신 라 스칼라 극장에서 활동했던 작곡가 빈첸초 라비냐에게 개인적으로 대위법과 극음악을 배웠다. 라비냐는 밀라노 오페라계의 생리를 가르쳤고, 베르디는 이 시기 틈틈이 라 스칼라의 공연을 접하며 당대 이탈리아 오페라의 흐름 — 로시니와 도니체티의 작품들 — 을 익혔다.

III. 결혼과 거듭된 상실 · 1833–1840 (20–27세)

(귀향) 1835년 부세토로 돌아와, 지역 음악 감독 자리를 둘러싼 긴 갈등 끝에 시의 음악 선생(마에스트로 디 무지카) 직을 얻었다. 성당 측과 필하모닉 협회 측이 서로 다른 후보를 민 탓에 임명까지 진통이 있었고, 이는 훗날에도 베르디가 작은 도시의 파벌 다툼에 대해 씁쓸한 기억을 갖게 된 계기였다. (결혼) 1836년, 후원자 바레치의 딸 마르게리타와 결혼했다. 이듬해 딸 비르지니아가, 그다음 해 아들 이칠리오가 태어나며 단란한 가정을 이루는 듯했다. (상실) 그러나 비르지니아는 1838년 돌을 갓 넘기고, 이칠리오는 1839년 역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1840년에는 아내 마르게리타마저 뇌염으로 급사했다. 불과 2년 사이 가족 전부를 잃은 것이다. 베르디는 훗날 이 시기를 거의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깊은 절망이 드러난다. (실패) 공교롭게도 이 비극과 맞물려 작곡가로서 첫발을 뗐다. 첫 오페라 《오베르토》는 1839년 라 스칼라에서 무난한 평가를 받았으나, 아내가 죽어 가던 와중에 의뢰받아 쓴 희극 오페라 《하루 동안의 임금님》(1840)은 참혹하게 실패했다. 베르디는 이 시기를 돌아보며 다시는 작곡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훗날 밝혔다.

IV. 나부코와 재기 · 1841–1842 (28–29세)

(설득) 절필을 선언한 베르디를 라 스칼라의 흥행주 바르톨로메오 메렐리가 끈질기게 설득했다. 메렐리는 다른 작곡가가 포기한 대본 《나부코》를 억지로 그의 손에 쥐여 주었고, 내키지 않던 베르디는 집에 돌아와 대본을 아무렇게나 펼쳤다가 한 합창 장면의 가사에 눈이 멈췄다고 회고했다. (탄식) 그 장면은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온 히브리인들이 잃어버린 고향을 그리며 부르는 합창, "가라 내 마음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였다. 가족을 모두 잃고 평온한 삶을 상실한 자신의 처지가 겹쳐 보였다고 그는 전한다. (성공) 1842년 3월 라 스칼라에서 초연된 《나부코》는 크게 성공했다. 소프라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가 아비가일레 역을 맡아 호평받았고, 이 공연을 계기로 두 사람의 관계도 시작되었다. 실패를 거듭하던 작곡가는 하루아침에 이탈리아에서 가장 주목받는 이름이 되었다. (해석) 포로가 된 히브리인의 합창은 후대에 오스트리아 지배하 이탈리아인의 처지를 빗댄 노래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다만 최근 연구자들은 초연 당시부터 그런 정치적 해석이 뚜렷했는지에는 신중한 입장을 보인다 — 그 신화는 수십 년에 걸쳐 덧입혀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선율이 훗날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상징이 된 것은 사실이다.

♪오페라 《나부코》 중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가라, 내 마음이여"(Va, pensiero)1842 (29세)실황 Teatro La Fenice 오케스트라·합창단 · James Conlon 지휘

가족을 모두 잃은 베르디가 우연히 펼친 대본에서 눈을 멈춘 바로 그 장면으로, 그의 재기를 알린 곡이다.

  • 합창단 전원이 하나의 선율을 똑같이 부르는(제창) 방식으로 시작해, 개인의 탄식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비가처럼 들린다.
  • 가사는 포로가 된 히브리인들이 잃어버린 고향 땅을 그리워하며 금빛 날개를 타고 날아가고 싶다고 노래하는 내용이다.
  • 낮게 깔린 소리로 시작해 점점 커지는(크레셴도) 흐름을 따라가면, 절제된 슬픔이 서서히 북받치는 감정으로 바뀌는 과정이 느껴진다.
  • 오늘날 이탈리아에서는 비공식 애국가처럼 공공 행사에서 즉흥적으로 합창되곤 하는데, 그 유래가 된 선율이 바로 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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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갤리선살이'의 세월 · 1842–1853 (29–40세)

(다작) 나부코 이후 10여 년을 베르디 스스로 "갤리선살이"라 불렀다. 거의 해마다 두세 편씩 오페라를 쏟아 내야 하는 극장들의 요구에 시달리며 《에르나니》, 《맥베스》 같은 작품을 연이어 내놓았다. 훗날 그는 이 시절의 혹사가 건강과 신경을 갉아먹었다고 토로했다. (스트레포니) 나부코의 아비가일레를 불렀던 스트레포니와의 관계는 이 무렵 깊어졌다. 두 사람은 결혼하지 않은 채 함께 살기 시작했는데, 이는 보수적인 부세토 사회에서 큰 추문이 되었다. 과거 사생아를 둔 적 있던 스트레포니에 대한 마을의 시선은 특히 가혹했고, 베르디의 부모조차 못마땅해했다고 전해진다. 베르디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 곁을 지켰다. (검열) 1851년 《리골레토》는 빅토르 위고의 희곡을 바탕으로 했으나, 오스트리아가 지배하던 롬바르디아-베네치아의 검열 당국이 군주 모독을 문제 삼아 무대 배경과 인물의 신분을 바꾸도록 강요했다. 베르디는 거세게 맞서면서도 끝내 일부를 양보해 초연에 성공시켰다. (동백꽃) 1853년 《라 트라비아타》는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사교계 여인과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그렸다. 결혼하지 않은 채 사회의 눈총을 받던 자신과 스트레포니의 처지가 투영되었다는 해석이 많다. 초연은 주역 소프라노의 체형이 결핵으로 죽어 가는 역할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실패했으나, 이듬해 재공연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오페라 《리골레토》 중 "여자의 마음"(La donna è mobile)1851 (38세)무대 The Three Tenors (카레라스·도밍고·파바로티) · 1994 콘서트

검열과 싸우며 완성한 오페라 속, 변덕스러운 공작의 노래이자 당대 거리에서 가장 많이 불린 선율이다.

  • 경쾌한 세 박자 리듬에 실린 선율은 듣는 순간 흥얼거리게 되는데, 정작 노래하는 공작은 여자의 변심을 조롱하는 인물이라 가사와 음악의 쾌활함 사이에 아이러니가 숨어 있다.
  • 베르디는 이 곡이 공연 전 거리에서 유행해 극적 효과가 반감될 것을 우려해, 초연 전날까지 가수와 악단에게 가사를 비밀에 부쳤다고 전해진다.
  • 3막, 리골레토가 딸의 시신이 담긴 줄 알았던 자루 너머로 이 선율이 다시 들려오는 순간은, 희극적이던 노래가 비극의 복선으로 뒤집히는 대목이라 연출가들이 특히 공들이는 장면이다.
  • 테너의 높은 음을 가볍고 자신만만하게 내지르는 처리가 전통인데, 너무 무겁게 부르면 공작의 경박함이 살지 않는다는 평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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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라 트라비아타》1853 (40세)무대 The Three Tenors (카레라스·도밍고·파바로티) · 1994 콘서트

결혼하지 않은 채 세간의 시선을 받던 스트레포니와의 삶이 비치는, 사랑과 사회적 낙인에 관한 오페라다.

  • 1막 전주곡은 높은 음역의 현악기만으로 연주되어, 폐결핵을 앓는 주인공 비올레타의 연약한 숨결을 미리 들려주는 듯하다.
  • "언제나 자유롭게"(Sempre libera)에서는 화려하게 음을 쪼개어 꾸미는 기교(콜로라투라)로 쾌락을 좇는 모습을 그리다가, 사랑을 속삭이는 테너의 목소리가 멀리서 끼어들며 내면의 균열을 드러낸다.
  • 3막 "지난날이여, 안녕"(Addio del passato)은 느린 템포에 가느다란 현악 반주만 받쳐, 죽음을 앞둔 체념이 숨소리처럼 느껴진다.
  • 초연에서는 몸집이 있는 소프라노가 폐결핵 환자 역을 맡아 관객의 실소를 샀다는 일화가 유명해, 오늘날에도 배역의 설득력을 두고 캐스팅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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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산타가타의 농장주 · 1848–1874 (35–61세)

(농장) 1848년 고향 부세토 인근에 산타가타의 농장을 사들였다. 이후 평생의 거처로 삼아 토지를 넓히고 관개 수로를 직접 설계하는 등 농사일에 깊이 몰두했다.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오페라보다 곡물 수확량과 가축 사육 이야기가 더 많이 등장할 정도였다. 그는 스스로를 "무엇보다 농부"라 불렀다. (의원) 이탈리아 통일운동(리소르지멘토)의 상징적 인물로 떠올랐다. 그의 성(姓)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이탈리아의 왕"의 머리글자와 일치한다는 점을 이용해 "비바 베르디"라는 구호가 통일 지지의 암호처럼 쓰였다. 정치가 카보우르의 권유로 1861년 통일 이탈리아 첫 하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의정 활동에는 큰 흥미를 보이지 않고 대체로 조용히 임기를 보냈다. (결혼) 오랜 동반자 스트레포니와는 1859년 비로소 정식으로 결혼해 주변의 뒷말을 잠재웠다. 같은 시기 조아키노 로시니가 세상을 떠나자(1868년), 베르디는 이탈리아 작곡가들이 합동으로 레퀴엠을 지어 추모하자고 제안했다. 공동 작업은 결국 성사되지 못했지만, 베르디가 맡았던 부분은 훗날 독자적인 작품의 씨앗이 되었다. (아이다) 1871년 이집트 카이로 가극장의 위촉으로 《아이다》를 작곡했다. 고대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웅장한 서사였지만, 정작 베르디 자신은 초연에 가지 않고 산타가타에서 농사일을 돌보았다. 1873년 알레산드로 만초니가 세상을 떠나자, 로시니 레퀴엠 구상의 일부를 확장해 《레퀴엠》을 완성하며 깊이 존경하던 이 작가에게 바쳤다.

♪오페라 《아이다》 중 개선 행진곡1871 (58세)실황 Lunds Stadsorkester · Roger Andersson 지휘 · 2010 룬드

카이로의 위촉으로 쓴 대작이지만, 정작 베르디는 초연에 가지 않고 산타가타에서 농사를 돌보고 있었다.

  • 곡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길고 곧은 나팔(아이다 트럼펫)이 무대 양쪽에서 교대로 울리는 대목은 금관악기의 화려함을 극대화하려는 베르디의 의도가 뚜렷이 드러난다.
  • 수많은 합창단과 무용, 행진이 어우러지는 스펙터클은 이집트풍 선율과 타악기 리듬으로 이국적 분위기를 입힌 점이 특징이다.
  • 이 거대한 공공의 장면 직후 이어지는 나일강 변의 조용한 이중창과 대비해서 들으면, 베르디가 웅장함과 내밀함을 어떻게 번갈아 배치했는지가 더 또렷이 느껴진다.
  • 오늘날에도 대관식·스포츠 행사 등에서 자주 인용될 만큼 대중적으로 친숙한 선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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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퀴엠(만초니를 위한 미사) 중 "진노의 날"(Dies irae)1874 (61세)실황 Metropolitan Opera 오케스트라·합창단 · Yannick Nézet-Séguin 지휘 · 2021

존경하던 작가 알레산드로 만초니를 기리며, 로시니 추모를 위해 구상했던 음악을 바탕으로 완성한 곡이다.

  • 곡 시작과 함께 합창과 오케스트라 전체가 한꺼번에 터지는 순간, 큰북(베이스드럼)의 강타가 심판의 날이 닥쳐오는 공포를 물리적인 충격으로 전달한다.
  • 지휘자 한스 폰 뷜로가 이 곡을 두고 "교회 제의를 입은 오페라"라 비꼬았을 만큼, 극적인 솔로와 중창 대목은 그의 오페라 어법을 그대로 가져왔다.
  • "기억하소서"(Recordare)에서는 소프라노와 메조소프라노 두 목소리가 서로 부드럽게 얽히며, 앞선 진노의 날의 폭풍과 대비되는 간구의 정서를 들려준다.
  • 마지막 "나를 구원하소서"(Libera me)에서 소프라노가 거의 반주 없이 홀로 노래하는 대목은 성악가에게 가장 큰 부담이 걸리는 자리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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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 보이토, 그리고 말년 · 1879–1901 (66–88세)

(화해) 젊은 작곡가 겸 시인 아리고 보이토와는 애초 사이가 좋지 않았다. 1863년 보이토가 쓴 송시에서 이탈리아 오페라의 낡음을 꼬집은 구절이 베르디를 겨냥한 것으로 읽히며 오랫동안 거리를 두었다. 두 사람은 1879년 출판업자 줄리오 리코르디의 중재로 화해했고, 이후 보이토는 베르디 말년 걸작들의 대본가가 되었다. (오텔로) 《아이다》 이후 16년 만인 1887년, 보이토가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각색한 대본으로 《오텔로》를 내놓았다. 전통적인 독립 아리아 중심 구성에서 벗어나 극의 흐름이 끊기지 않는 긴밀한 음악극으로, 평단은 이를 베르디 예술의 정점으로 평가했다. 바그너가 악극으로 음악극의 틀을 바꾸던 시기, 베르디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 위에서 같은 문제에 다른 답을 내놓은 셈이었다. (팔스타프) 1893년,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 셰익스피어의 또 다른 작품을 바탕으로 생애 유일하게 성공한 희극 《팔스타프》를 완성했다. 1840년의 희극 실패를 반세기 만에 설욕한 셈이었다. 마지막 장면의 푸가(돌림노래처럼 쌓이는 합창)로 "세상만사는 농담일 뿐"이라 노래하며 작품을 맺는다. (별세) 1897년 아내 주세피나가 세상을 떠났다. 베르디는 밀라노에 음악가들을 위한 요양원 '카사 디 리포소 페르 무지치스티'를 사재로 설립했는데, 본인은 이를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 불렀다. 1901년 1월 27일, 밀라노의 그랜드 호텔에서 뇌졸중으로 숨을 거두었다. 장례 행렬에는 수많은 시민이 모였고, 한 달 뒤 유해를 카사 디 리포소로 옮길 때는 군중이 자발적으로 '가라 내 마음이여'를 합창했다고 전해진다.

♪오페라 《오텔로》1887 (74세)무대 Jonas Kaufmann·Marco Vratogna · Royal Opera 2017

오랜 불화를 접고 화해한 보이토와 함께, 16년의 침묵을 깨고 내놓은 셰익스피어 비극의 음악화다.

  • 막이 오르자마자 폭풍우 속에서 오텔로의 배가 항구에 닿기를 기다리는 군중의 합창이 몰아치고 상륙한 오텔로가 "환호하라"(Esultate)로 등장하는데, 쉬는 대목 없이 긴장을 끌고 가는 구성이 이전 작품들과 다르다.
  • 전통적인 독립된 아리아를 거의 쓰지 않고 대사와 노래가 끊김 없이 이어지는 구성이어서, 바그너의 악극과 종종 비교되지만 선율의 뿌리는 여전히 이탈리아적이다.
  • 데스데모나의 "버드나무 노래"와 "아베 마리아"는 죽음을 예감한 여인의 체념을 낮고 단순한 선율로 그려, 극 전체의 격렬함과 대조를 이룬다.
  • 오텔로 역은 성량과 극적 표현력을 동시에 요구하는 테너 최고난도 배역 중 하나로 꼽혀, 이 역을 누가 맡느냐가 공연마다 화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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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팔스타프》1893 (80세)실황 Metropolitan Opera · James Levine 지휘 · 2013

여든에 가까운 나이에 완성한 생애 유일한 성공작 희극으로, 반세기 전의 실패를 뒤집었다.

  • 극 전체가 짧은 대사와 재치 있는 악구들로 빠르게 주고받듯 전개되어, 느긋한 아리아 대신 대화의 리듬 자체가 음악이 된다.
  • 마지막 장면의 푸가(돌림노래처럼 한 성부씩 같은 가락을 뒤따라 들어오는 합창) "세상만사는 농담일 뿐"(Tutto nel mondo è burla)은 등장인물 전원이 차례로 끼어들며 쌓여 가는데, 인생을 달관한 노(老) 작곡가의 웃음처럼 들린다.
  • 오케스트라 편성은 가볍고 민첩하게 다듬어져 있어, 《오텔로》의 무거운 드라마와 뚜렷이 대비된다.
  • 현악기들이 빠르게 오가며 당황한 팔스타프의 허둥대는 모습을 그려내는 대목은 연주자들 사이에서 합을 맞추기 까다로운 구간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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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알려진 이야기

밀라노 음악원 낙방은 흔히 '천재를 못 알아본 심사'로 전설처럼 회자되지만, 실제 심사 기록에는 나이 제한(지역 외 지원자는 열네 살 이하만 가능)과 피아노 주법에 대한 구체적 지적이 남아 있어 단순한 편견의 일화만은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음악원은 베르디 사후 그의 이름을 따 '주세페 베르디 음악원'으로 개칭되었다. 아버지가 구해 준 중고 스피넷을 손봐 준 건반 장인 스테파노 카발레티가 수리비를 받지 않았다는 영수증이 지금도 남아 있다. 넉넉지 않던 집안에서 아들의 재능에 걸었던 기대를 보여 주는 작은 증거로, 이 악기는 지금도 밀라노에 보존되어 있다. 베르디는 말년에 상당한 부를 쌓았지만 그 씀씀이를 드러내지 않았다. 산타가타 인근 빌라노바 술라르다에 병원을 사재로 지어 주었고, 밀라노의 음악가 요양원 건립에도 전 재산에 가까운 돈을 들였다. 정작 그 자신은 이를 자랑하기보다 조용히 처리하기를 바랐다고 전해진다. 명성이 절정에 달한 뒤에도 자신의 작품 초연에 직접 가지 않는 일이 잦았다. 《아이다》 카이로 초연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출판업자 줄리오 리코르디에게 보낸 여러 편지에서 박수갈채와 대중의 이목을 불편해하는 심경을 내비쳤다. 통일 이탈리아의 상징적 인물로 떠받들어졌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정작 본인은 무대 뒤로 물러서기를 택한 셈이다.

용어 노트 📚🔎

오페라

(말뜻) 오페라(opera)는 '작품'이라는 뜻의 라틴어 opus의 복수형에서 왔다. 노래, 연기, 관현악, 무대미술이 한데 모인 '종합 작품'이라는 의미가 이름에 담겨 있다. (음악에서) 대사를 모두 노래로 부르며 이야기를 펼치는 음악극이다. 배우가 대사 대신 노래로 감정을 전하고, 오케스트라가 반주와 극적 효과를 함께 맡는다. 연극에 음악 반주가 붙은 뮤지컬을 떠올리면 비슷하지만, 오페라는 거의 모든 대사가 노래라는 점이 다르다. (다른 데서는) 일상에서는 과장되고 극적인 상황을 비유할 때도 오페라라는 말을 쓴다. 외국에서 막장 드라마를 '소프 오페라'라 부르는 것이 한 예다.

아리아

(말뜻) 이탈리아어로 '선율'을 뜻하는 말에서 왔다. 오페라 속에서 등장인물이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마음을 노래로 길게 풀어내는 대목을 가리킨다. (음악에서) 줄거리가 진행되는 레치타티보와 달리, 아리아에서는 극의 흐름이 멈추고 한 인물의 감정이 집중적으로 펼쳐진다. 학예회에서 대사를 주고받다가 한 사람이 혼자 노래를 부르는 순서가 되는 장면을 떠올리면 가깝다.

레치타티보

(말뜻) 이탈리아어로 '낭독하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왔다. 노래하듯 말하듯 대사를 전달하는 부분이라는 뜻이 그대로 담겨 있다. (음악에서) 아리아처럼 선율을 뚜렷이 드러내기보다, 말의 리듬에 가깝게 음을 붙여 줄거리를 빠르게 전달하는 대목이다. 연극의 대사 장면과 노래 장면 사이, 즉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구간이라 보면 된다.

중창(앙상블)

(말뜻) 중창(重唱)은 '겹쳐서(重) 노래한다(唱)'는 뜻으로, 두 명 이상이 동시에 서로 다른 선율과 가사를 노래하는 것을 가리킨다. 서양 음악에서는 '다 함께'라는 뜻의 프랑스어 ensemble을 그대로 쓴다. (음악에서) 등장인물 여럿이 동시에 각자의 생각을 노래하면서도 음악적으로는 하나로 어우러지는 장면이다. 교실에서 서로 다른 모둠이 동시에 각자의 구호를 외치는데, 신기하게도 전체가 하나의 소리처럼 들리는 상황과 비슷하다.

레퀴엠

(말뜻) 라틴어로 '안식'을 뜻하는 requies에서 왔다. 죽은 이를 위한 미사곡의 첫머리 가사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음악에서) 세상을 떠난 이를 추모하기 위해 쓰는 미사 형식의 대규모 성악곡이다. 베르디의 레퀴엠은 교회 음악치고 지나치게 극적이라는 비판도 받았는데, 이는 그가 오페라 작곡가로서 쌓은 어법을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이다.

벨칸토

(말뜻) 이탈리아어로 '아름다운(bel) 노래(canto)'라는 뜻이다. (음악에서) 매끄럽게 이어지는 선율, 고르고 유연한 음색, 화려한 기교를 중시하는 이탈리아 창법과 작곡 양식을 가리킨다. 로시니, 도니체티, 벨리니의 시대에 꽃핀 이 양식은 베르디의 초기 작품에도 짙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