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oachino Rossini
「가수만 없다면 오페라는 얼마나 근사할까.」
한눈에 보기 🔭💭
곁의 사람들 ⏳🌊
- 가족주세페 로시니아들에게 호른을 가르치고 초연마다 눈물을 흘리던 아버지였다.
- 가족안나 귀다리니생계를 위해 가수가 된 어머니로, 아들에게 무대의 감각을 물려주었다.
- 스승스타니슬라오 마테이볼로냐 음악원에서 대위법을 가르쳤으나, 제자는 규칙보다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총보에서 더 많이 배웠다.
- 가족이사벨라 콜브란나폴리 극장의 프리마돈나이자 첫 아내로, 여러 오페라의 주역을 맡아 그의 뮤즈가 되었다.
- 영향루트비히 판 베토벤1822년 빈에서 만난, 청력을 잃은 대작곡가로 로시니에게 희극에 머물라 권하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 가족올랭프 펠리시에가장 힘겨운 투병의 시절 그를 간병하며 곁을 지킨 두 번째 아내였다.
I. 페사로의 소년 · 1792–1806 (0–14세)
(탄생) 1792년 2월, 이탈리아 아드리아해 연안의 소도시 페사로에서 태어났다. 윤년의 마지막 날에 태어난 탓에 훗날 그는 자신의 생일이 4년에 한 번만 돌아온다고 즐겨 농담했다. (아버지) 아버지 주세페 로시니는 마을의 트럼펫과 호른 연주자였고 도살장 검사관으로도 일했다. 나폴레옹 군대에 동조하는 정치적 성향 탓에 여러 차례 투옥과 실직을 겪었으며, 그 불안정함은 어린 로시니의 유년을 흔들었다. (어머니) 어머니 안나 귀다리니는 원래 빵집 딸이었으나 남편이 수감된 뒤 생계를 위해 노래를 배워 소프라노로 무대에 섰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성실한 가수였고, 아들은 훗날 어머니의 소박한 노래 안에서 이미 극장의 리듬을 배웠다고 회고했다. (유랑) 가족은 이탈리아 각지의 소극장을 떠도는 순회 오페라단을 따라다니며 살았다. 로시니는 무대 뒤에서 자랐고, 성가대에서 노래하고 아버지에게 호른을, 마을 대장장이에게 피아노 초보를 배웠다. (재능) 변성기가 지나며 노래는 접었지만 반주와 즉흥연주에 재능을 보였고, 극장 오케스트라의 첼로와 비올라 자리를 채우며 실전으로 음악을 익혔다. 악보를 눈으로 훑고 바로 연주하는 능력은 이 무렵 이미 주변을 놀라게 했다.
II. 볼로냐의 수업 시대 · 1806–1810 (14–18세)
(리체오) 1806년 볼로냐 음악원(리체오 무지칼레)에 입학해 첼로와 대위법을 배웠다. 스승 스타니슬라오 마테이 신부는 엄격한 대위법 교육으로 유명했으나, 로시니는 규칙을 외우기보다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총보를 직접 베껴 쓰며 화성과 관현악법을 스스로 익혔다. (별명) 이 무렵 동료들은 그를 '작은 독일인(일 테데스키노)'이라 불렀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본고장에서 독일 기악의 정교함을 그토록 좋아하는 학생은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이 시리즈에서 다룬 하이든과 모차르트에 대한 존경은 평생 이어졌다. (생계) 학비와 생활비는 늘 빠듯했다. 소극장의 반주자, 편곡자, 대역 가수로 뛰며 돈을 벌었고, 아버지가 다시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동안 사실상 집안의 수입원 노릇을 했다. 돈에 대한 감각은 이 궁핍한 시절에 몸에 밴 것이었다. (첫작) 1810년 베네치아의 한 극장이 짧은 희극 오페라를 의뢰했다. 열여덟 살의 로시니는 단 며칠 만에 '결혼 어음'을 완성했고, 이 소품의 성공으로 이탈리아 각지 극장에서 위촉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III. 질주하는 성공 · 1810–1815 (18–23세)
(속도) 이후 몇 해 동안 로시니는 거의 공장처럼 오페라를 찍어냈다. 한 해에 서너 편을 위촉받아 몇 주 만에 완성하는 일이 흔했고, 서곡을 다른 작품에서 재사용하거나 급한 대목은 조수에게 맡기는 관행도 이때 자리 잡았다. (탄크레디) 1813년 베네치아에서 초연한 '탄크레디'는 그를 이탈리아 전역에 알렸다. 여주인공의 아리아 '디 탄티 팔피티'는 곤돌라 뱃사공과 시장 상인들까지 흥얼거릴 만큼 널리 퍼졌고, 훗날 사람들은 이 곡을 리허설 중 쌀 요리를 기다리며 썼다는 뜻에서 '쌀의 아리아'라 부르기도 했다. (이탈리아나) 같은 해 발표한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은 희극적 재기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포로로 잡힌 이탈리아 여인이 지략으로 술탄을 골탕 먹이는 줄거리에는, 늘 떠돌며 낯선 극장 사정에 적응해야 했던 그 자신의 생존 감각이 겹쳐 보인다. (효도) 성공과 함께 들어온 수입은 대부분 부모에게 돌아갔다. 아버지는 아들의 악보 인쇄를 돕고 초연마다 객석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지며, 로시니는 평생 부모를 가까이 두고 부양했다.
명성이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지던 시기, 곤돌라 사공까지 흥얼거렸다는 히트곡이었다.
- 등장 아리아 특유의 흔들리는 리듬(카바티나)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들린다.
- 단순하고 반복적인 선율선이 오히려 귀에 쉽게 붙어, 초연 직후 거리에서까지 불렸다는 일화가 전한다.
- 탄크레디 역은 여성 성악가가 남성 인물을 노래하는 바지역할이어서, 낮고 힘 있는 여성 저음(콘트랄토)의 색채를 즐겨 들을 만하다.
- 후반부로 갈수록 장식음이 늘어나는 대목에서 가수마다 다른 화려한 장식(콜로라투라) 즉흥을 덧붙이곤 해, 여러 음반을 비교해 듣는 재미가 있다.
낯선 곳에 던져진 이탈리아 여인이 지략으로 위기를 헤쳐가는 이야기에, 떠돌이 극장 생활로 다져진 로시니의 생존 감각이 겹친다.
- 서곡 도입부의 조용한 목관 선율 뒤로 오케스트라가 같은 악구를 되풀이하며 점점 커지는 대목이 이른바 '로시니 크레센도'의 전형이다.
- 1막 피날레에서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다른 의성어를 반복해 부르며 뒤엉키는 장면은 혼란 자체를 음악으로 그린 대목으로 유명하다.
- 가벼운 관악기가 음을 짧게 끊어 연주하는 주법(스타카토)이 극 전체의 경쾌한 분위기를 이끈다.
IV. 세비야의 이발사, 나폴리의 여인 · 1815–1822 (23–30세)
(바르비에레) 1816년 로마에서 초연한 '세비야의 이발사'는 초연 당일 배우의 실수와 관객의 야유로 참패했다. 그러나 로시니는 불과 두세 주 만에 이 작품을 써냈고, 서곡조차 이전 작품에서 가져와 붙인 것이었다. 이튿날 공연부터 반응이 뒤집혀 곧 그의 대표작으로 자리 잡았다. (나폴리) 흥행사 도메니코 바르바야의 초청으로 나폴리 산카를로 극장의 전속 작곡가가 되면서 생활은 비로소 안정되었다. 정기 급여와 극장장이라는 지위는 그때까지 곡마다 원고료를 받던 삶과는 다른 여유를 주었다. (콜브란) 이곳에서 극장의 프리마돈나 이사벨라 콜브란을 만났다. 스페인 출신의 화려한 소프라노였던 그는 로시니의 여러 오페라에서 주역을 맡으며 사실상 그의 뮤즈가 되었고, 둘의 관계는 연인에서 1822년 부부로 이어졌다. 결혼에는 콜브란의 재산도 얽혀 있었다는 것이 당대의 뒷말이었다. 둘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베토벤) 결혼한 해 빈을 방문해 이미 청력을 완전히 잃은 베토벤을 예방했다. 통역과 필담으로 짧게 이어진 만남에서 베토벤은 '세비야의 이발사'를 칭찬하며 진지한 오페라보다 희극에 머물라고 권했다고 전해진다. 로시니는 이 만남을 평생 소중히 여겼고, 초라한 방에서 지내던 대작곡가의 모습에 깊이 충격받았다.
초연 참패에서 며칠 만에 대역전을 이룬 이 곡은, 궁핍과 촉박함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던 그의 순발력을 보여준다.
- 피가로의 등장 아리아 '나는 만물박사'는 매우 빠른 속도로 가사를 쏟아내야 하는 곡(패터 아리아)의 대표곡으로, 가수의 혀가 꼬이기 쉬운 악명 높은 난곡이다.
- "피가로, 피가로, 피가로"를 외치는 대목은 관객이 함께 기다리는 곡의 절정으로 회자된다.
- 서곡은 사실 이전 작품에서 가져와 붙인 것인데도 극과 절묘하게 어울려, 그의 재활용 습관을 잘 보여주는 예로 꼽힌다.
- 로지나의 '방금 들린 그 목소리'에서는 화려한 장식(콜로라투라)으로 인물의 영리함과 고집을 함께 드러낸다.
재투성이 소녀가 신분을 뛰어넘어 사랑을 이루는 이 결말부는, 나폴리에서 안정과 사랑을 함께 얻은 로시니의 심경과 겹쳐 읽힌다.
- 신데렐라에 해당하는 안젤리나가 마지막 장면에서 부르는 이 곡은 갈수록 음역과 기교가 치솟아, 저음이 풍부한 여성 성부(메조소프라노)가 부르는 몇 안 되는 오페라 대미 아리아로 꼽힌다.
- 짧은 선율구가 반복되며 점점 화려하게 장식되는 구조는 '로시니 크레센도'의 어법을 성악에 옮겨놓은 예다.
- 폭풍우와 재채기가 뒤섞인 앙상블 장면은 우스꽝스러운 소동을 관현악으로 그려낸 대목으로 자주 언급된다.
V. 파리와 침묵의 시작 · 1823–1830 (31–38세)
(파리) 1824년 파리로 옮겨 이탈리아 극장(테아트르 이탈리앵)의 감독을 맡았고, 곧이어 프랑스 왕실 작곡가로 임명되며 두둑한 종신 연금을 받았다. 이탈리아 시절의 불안정한 원고료 생활과는 완전히 다른 지위였다. (텔) 1829년 스위스 독립 영웅을 그린 대작 '빌헬름 텔'을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했다. 네 시간에 달하는 웅장한 규모와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 양식으로의 전환을 보여준 이 작품이 그의 마지막 오페라가 되리라고는 당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침묵) 이후 그는 세상을 떠나기까지 39년 동안 단 한 편의 오페라도 새로 쓰지 않았다. 서른일곱 살, 아직 왕성한 나이의 절필이었다. 1830년 7월혁명으로 프랑스 왕정이 무너지며 연금 지급이 불투명해진 정치적 타격과, 지병이던 요로 질환의 악화, 그리고 마이어베어로 대표되는 새로운 그랜드 오페라 유행 속에서 스스로 시대가 지났다고 느낀 심경이 겹쳐 작용했다는 것이 대체적인 설명이다. (건강) 젊어서 앓은 임질의 후유증으로 요로 협착과 만성 통증에 시달렸고, 이는 이후 수십 년간 그를 괴롭힌 우울증의 한 원인이 되었다. 화려한 성공의 정점에서 그는 이미 육체적으로 지쳐 있었다.
39년의 침묵을 앞둔 마지막 오페라의 서곡으로, 웅장한 규모만큼이나 한 시대와의 작별을 예고하는 곡이었다.
- 첼로 다섯 대가 나직이 노래하는 도입부는 알프스의 새벽을 그린 장면으로 널리 해석된다.
- 이어지는 금관과 팀파니의 격렬한 총주는 산악 지대를 덮치는 폭풍우를 묘사한다.
- 오보에보다 낮고 부드러운 목관 악기(잉글리시 호른)와 플루트가 주고받는 목가적인 이중주는 알프스 목동의 옛 가락(랑데바슈)을 인용한 대목으로, 폭풍이 지나간 뒤의 평화를 그린다.
- 마지막 트럼펫 팡파르와 함께 질주하는 현악 주제는 스위스 병사들의 돌격을 묘사하며, 훗날 영화와 방송에 숱하게 재사용될 만큼 대중에게 각인된 선율이다.
VI. 병과 우울의 세월 · 1830–1855 (38–63세)
(신경쇠약) 1830년대와 40년대에 걸쳐 극심한 불면과 무기력, 오늘날 신경쇠약이라 불릴 법한 증상에 시달렸다. 그는 온천 요양지를 전전했고, 한때는 자살을 걱정할 만큼 상태가 나빴다는 지인들의 증언이 남아 있다. (스타바트) 이런 와중에도 1832년 스페인 귀족의 위촉으로 '스타바트 마테르'의 작곡을 시작해 1841년 완성했다. 십자가 아래 슬퍼하는 성모를 그린 이 곡은 오페라적인 성악 기법을 종교음악에 그대로 옮겨 놓아 당대에 찬반이 엇갈렸으나, 병약한 시기의 개인적 비탄이 배어 있다는 평도 뒤따랐다. (별거) 1837년 콜브란과 별거에 들어갔다. 목소리를 잃고 도박벽까지 겹친 아내와의 관계는 이미 오래전부터 소원해져 있었고, 그는 볼로냐로 옮겨 지내며 병 치료에 매달렸다. 콜브란은 1845년 파리 근교에서 세상을 떠났다. (재혼) 그의 곁을 지킨 이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올랭프 펠리시에였다. 파리 사교계의 여성이던 그는 로시니가 가장 힘겨웠던 시기에 그를 간병하며 곁을 지켰고, 콜브란 사후인 1846년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했다. 이 결혼에서도 자녀는 없었다. (귀향) 볼로냐와 피렌체를 오가며 요양하던 이 시기, 건강은 조금씩 회복되었으나 오페라 무대로 돌아갈 마음은 다시 일지 않았다.
가장 어둡던 투병의 세월 한복판에서 완성한 이 종교곡에는, 그 시절의 개인적 비탄이 오페라적인 목소리로 스며 있다.
- '쿠유스 아니맘'에서 테너가 부르는 격정적인 고음은 오페라 아리아를 연상시켜, 종교음악치고 지나치게 극적이라는 당대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 '인플라마투스'에서 소프라노가 다다르는 높은 음역은 마리아의 격렬한 슬픔을 육성으로 토해내는 대목으로 꼽힌다.
- 합창이 낮게 깔리며 시작하는 도입부는 십자가 아래 선 성모의 무거운 침묵을 그린 것으로 해석된다.
VII. 파리의 황혼 · 1855–1868 (63–76세)
(파리복귀) 1855년 펠리시에와 함께 파리로 돌아오면서 건강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파시 지구의 저택에 정착한 그는 매주 토요일 밤 음악가와 문인, 화가를 초대하는 살롱을 열었고, 이는 곧 파리 사교계의 명물이 되었다. (미식) 미식가로서의 명성도 이 무렵 굳어졌다. 스스로 조리법을 궁리하고 요리사들과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그의 이름을 딴 스테이크 요리가 전해질 정도였다. 「먹는 것, 사랑하는 것, 노래하는 것, 소화하는 것—이것이 인생 오페라의 4막이다」라는 그의 농담은 이 시절의 여유를 그대로 보여준다. (노년의죄) 오페라는 쓰지 않았지만 붓을 완전히 놓지는 않았다. 살롱에서 지인들에게 들려주려 쓴 피아노곡과 성악 소품 수백 편을 모아 스스로 '노년의 죄'라 이름 붙였다. 재치와 자조가 담긴 제목들은 한때 유럽을 뒤흔들었던 그가 더 이상 세상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바그너) 1860년 파리를 방문한 리하르트 바그너가 그를 예방했다. 옛 유행이 되었다는 평판에 시달리던 두 작곡가는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었고, 로시니는 자신이 시대에 뒤졌다는 세간의 평가에 담담히 반박하면서도 젊은 세대의 음악에 진지한 관심을 보였다. (프티메세) 1863년 마지막 대작 '작은 장엄 미사'를 완성했다. 두 대의 피아노와 하모늄, 소규모 합창으로 편성한 이 소박한 곡의 악보 끝에 그는 「선하신 하느님, 이 하찮은 작품을 받아주소서. 나는 교회 음악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습니다」라고 적어 넣었다. (죽음) 1868년 11월 13일, 파시의 자택에서 대장암 수술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는 파리 페르라셰즈 묘지에 묻혔으나 1887년 이탈리아 정부의 요청으로 유해가 피렌체 산타크로체 성당으로 옮겨져, 미켈란젤로와 갈릴레이 곁에 안치되었다.
노년의 소박한 살롱 편성으로 완성한 마지막 대작으로, 세상의 평가에서 자유로워진 만년의 심경이 담겨 있다.
- 원래 피아노 두 대와 작은 오르간 같은 건반악기(하모늄), 소규모 합창만으로 편성되어, 화려한 오페라 관현악과는 대조적인 소박한 울림을 낸다.
- '크리스테 엘레이손'에서 여러 성부가 시간차를 두고 겹쳐 들어오는 대목은 대위법 기법(푸가)으로 짜여 있어, 노년의 로시니가 옛 스승에게 배운 기법으로 돌아갔음을 보여준다.
- 악보 끝에 남긴 짧은 헌사처럼, 전체적으로 진지함과 자조적인 유머가 함께 느껴지는 곡으로 회자된다.
용어 노트 📚🔎
카바티나
오페라에서 등장인물이 처음 등장할 때 부르는 비교적 짧고 단순한 아리아. 화려한 기교보다 성격을 소개하는 데 중점을 둔다.
콜로라투라
빠르고 화려한 장식음으로 가득한 성악 창법. 음이 촘촘히 오르내리며 가수의 기교를 과시한다.
로시니 크레센도
같은 짧은 악구를 반복하면서 악기와 음량을 점점 더하는 관현악 기법. 흥분과 소란을 극적으로 쌓아올릴 때 쓰인다.
랑데바슈
알프스 목동들이 소를 부를 때 부르던 소박한 가락. '빌헬름 텔' 서곡의 목가적인 대목에 인용되었다.
푸가
하나의 짧은 주제가 여러 성부에서 시간차를 두고 겹쳐 들어오며 진행되는 대위법 작곡 기법.
바지역할
여성 성악가가 맡아 부르는 남성 등장인물 역할. '탄크레디'의 주인공이 대표적이다.
패터 아리아
매우 빠른 속도로 많은 가사를 쏟아내듯 노래하는 희극적인 아리아. 피가로의 등장 아리아가 대표적인 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