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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ncenzo Bellini

빈첸초 벨리니 (1801–1835)

“음악극은 노래로써 사람을 울리고, 몸서리치게 하고, 죽게 해야 한다.” — 카를로 페폴리에게 보낸 편지(1834)

한눈에 보기 🔭💭

1. 뿌리이탈리아 카타니아 출생할아버지 스승시 장학금2. 나폴리칭가렐리 문하플로리모와 우정비앙카와 제르난도3. 밀라노「해적」 성공로마니 대본투리나와 사랑4. 정점「몽유병의 여인」「노르마」도니체티와 경쟁5. 결별「베아트리체」 실패로마니와 불화런던 체류6. 파리쇼팽·로시니「청교도」서른셋 요절벨리니1801–1835긴 선율 하나로 오페라의 극을 이끈 시칠리아의…
삶의 여정 🧭🗺️
N이탈리아프랑스카타니아1801–1819나폴리1819–1827밀라노1827–1833파리1833–1835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곁의 사람들 ⏳🌊

  • 가족빈첸초 토비아 벨리니

    같은 이름을 쓰던 할아버지로, 카타니아에서 손자에게 작곡의 기초를 가르친 첫 스승이었다.

  • 스승니콜로 칭가렐리

    나폴리 음악원 원장으로, 장식보다 노래가 되는 선율을 쓰라고 가르쳐 벨리니 음악의 바탕을 놓았다.

  • 우정프란체스코 플로리모

    음악원 동창이자 평생의 벗으로, 벨리니 사후 그의 편지와 기억을 지키면서 동시에 다듬은 사람이다.

  • 우정펠리체 로마니

    「해적」부터 「텐다의 베아트리체」까지 일곱 편의 대본을 쓴 동반자였으나 1833년 공개 다툼 끝에 갈라섰다.

  • 경쟁가에타노 도니체티

    밀라노와 파리에서 같은 시즌, 같은 가수를 두고 맞선 동시대 작곡가로, 벨리니는 그를 늘 경계했다.

  • 후원조아키노 로시니

    나폴리 시절 극장을 지배한 선배였고, 파리에서는 「청교도」 작업에 조언하며 그를 보살폈다.

YouTube에서 6곡 이어 듣기 ↗

I. 카타니아의 맏아들 · 1801–1819 (0–18세)

(출생) 1801년 11월, 시칠리아 왕국(오늘날 이탈리아) 카타니아에서 태어났다. 날짜는 11월 3일이었다. 아버지 로사리오 벨리니는 교회와 귀족 집안을 오가며 오르간을 치고 음악을 가르치던 음악가였고, 어머니는 아가타 페를리토였다. 벨리니는 일곱 남매의 맏이였으며, 동생 카르멜로도 훗날 작곡가의 길을 걸었다. (할아버지) 음악의 첫 스승은 같은 이름을 쓰던 할아버지 빈첸초 토비아 벨리니였다. 이탈리아 중부 아브루초 출신으로 나폴리에서 공부한 뒤 카타니아에 자리 잡은 그는 손자에게 화성과 대위법의 기초를 가르쳤다. 소년은 할아버지 곁에서 교회용 미사곡과 성가, 귀족 살롱에서 부를 짧은 노래를 썼다. 아주 어린 나이에 곡을 썼다는 일화가 여럿 전하지만, 대부분 그가 죽은 뒤 가족과 지인이 남긴 회고에 기댄 것이라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장학금) 집안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다. 지방 도시에서 이름이 난다고 오페라 작곡가가 될 길이 열리는 것도 아니었다. 1819년, 카타니아 시 당국이 나폴리 음악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몇 해 기한의 장학금을 내주기로 했다. 열일곱 살의 벨리니는 고향을 떠났다. 고향의 돈으로 공부한다는 의식은 오래 남아, 성공한 뒤에도 그는 카타니아가 자신을 어떻게 볼지를 자주 신경 썼다.

II. 나폴리의 학생 · 1819–1827 (18–26세)

(음악원) 벨리니가 들어간 곳은 나폴리의 산 세바스티아노 왕립 음악원이었다. 조반니 푸르노와 자코모 트리토에게 기초를 다진 뒤 원장 니콜로 칭가렐리의 지도를 받았다. 칭가렐리는 페르골레시로 이어지는 옛 나폴리 악파의 전통을 고집했고, 학생들에게 화려한 장식보다 노래가 되는 선율을 쓰라고 거듭 말했다. 이 무렵 쓴 오보에 협주곡에서 이미 독주 악기가 성악가처럼 긴 숨으로 노래한다. (로시니) 그러나 당시 나폴리의 극장은 로시니의 것이었다. 흥행주 도메니코 바르바야가 운영하던 산 카를로 극장에서는 로시니의 오페라가 잇달아 올랐고, 학생들은 원장의 못마땅한 눈길 속에서도 그 음악을 들으며 자랐다. 벨리니는 로시니의 화려함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그 극장 감각만 자기 식으로 걸러 받아들였다. (우정) 음악원에서 평생의 친구 프란체스코 플로리모를 만났다. 훗날 음악원 도서관 사서가 된 플로리모는 벨리니가 가장 솔직한 편지를 보낸 상대였다. (사랑) 나폴리 시절 벨리니는 판사의 딸 마달레나 푸마롤리를 사랑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자리 잡지 못한 음악가에게 딸을 줄 수 없다며 혼인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데뷔) 1825년 학생 공연으로 첫 오페라 「아델손과 살비니」를 올렸고, 이듬해 산 카를로 극장에서 「비앙카와 제르난도」를 발표했다. 원래 이름 ‘페르난도’는 국왕 페르디난도와 겹친다는 이유로 바뀌었다. 이 성공을 보고 바르바야는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의 신작을 그에게 주선했다.

♪오보에 협주곡 내림마장조 (작품번호 없음, 음악원 시절 작)1823년경 (22세)연주 Anne Gilby (오보에) · Heidelberg Symphony Orchestra

칭가렐리 문하에서 노래가 되는 선율을 익히던 학생 시절의 작품이다. 오페라 작곡가가 되기 전부터 그가 악기에게도 아리아를 부르게 했음을 보여 준다.

  • 첫머리의 짧고 힘찬 관현악 도입(마에스토소, ‘장엄하게’)은 오페라의 막이 오르기 직전처럼 분위기를 세운다.
  • 느린 부분(라르게토 칸타빌레, ‘조금 느리게, 노래하듯’)에서 오보에는 소프라노처럼 숨이 긴 선율을 부른다. 반주가 얼마나 단순하게 물러나 있는지도 함께 들어 보라.
  • 마지막 빠른 부분은 폴란드 춤의 리듬(폴라카)에 실려 경쾌하게 움직이고, 오보에가 빠른 음을 굴리는 장식 기교를 보여 준다.
  • 10분 남짓의 짧은 곡이라 오보에 연주자들이 즐겨 고르는 레퍼토리로, 연주마다 느린 부분의 숨 쉬는 자리가 다르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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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라 스칼라의 새 이름 · 1827–1830 (26–29세)

(성공) 1827년 10월 라 스칼라에서 초연된 「해적」은 스물다섯 살 작곡가를 단번에 이탈리아 전역에 알렸다. 대본은 당대 으뜸가는 대본가 펠리체 로마니가 썼다. 벨리니는 테너 조반니 바티스타 루비니에게 기교를 자랑하기보다 말에 감정을 실어 노래하라고 요구했고, 그 결과 관객은 장식보다 인물의 고통을 먼저 들었다. (로마니) 이후 로마니와 「이방의 여인」, 「자이라」, 「캐퓰렛가와 몬터규가」, 「몽유병의 여인」, 「노르마」, 「텐다의 베아트리체」까지 함께했다. 벨리니는 시구를 몇 번이고 고쳐 달라고 했고, 말과 선율이 하나로 붙을 때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연인) 1828년 제노바에서 비단 상인의 아내 주디타 투리나를 만났다. 둘의 관계는 몇 해 이어졌고 밀라노 사교계에서도 공공연했다. (작곡료) 그는 한 해에 한 편 남짓만 쓰고 그 대신 높은 작곡료를 요구했다. 같은 시기 도니체티가 한 해 서너 편씩 쓰던 것과 대조적이었다. 흥행주와 액수를 놓고 끈질기게 흥정한 것도 작품 하나에 공을 들이려는 방식과 맞물려 있었다. (재활용) 1829년 파르마에서 올린 「자이라」는 실패했다. 이듬해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에서 급히 신작을 맡게 되자, 그는 약 6주 만에 「캐퓰렛가와 몬터규가」를 완성하면서 「자이라」의 음악을 상당 부분 옮겨 썼다. 실패작의 선율은 새 극에서 살아나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해 그는 밀라노에서 심한 위장 질환을 앓았는데, 이는 그를 평생 따라다닌 소화기 병의 첫 경고였다.

♪오페라 「해적」 (Il pirata, 작품번호 없음)1827 (26세)노래 Maria Dragoni · 1983 칼라스 콩쿠르

라 스칼라 데뷔작이자 출세작으로, 루비니에게 기교보다 감정을 요구한 벨리니의 노래 방식이 처음 크게 드러났다.

  • 1막에서 주인공 괄티에로가 부르는 「폭풍의 분노 속에서(Nel furor delle tempeste)」는 루비니를 위해 쓴 아주 높은 음역의 아리아로, 바다의 폭풍과 인물의 분노가 겹쳐 들린다.
  • 2막 끝 이모제네의 광란의 장면(정신이 흐트러진 인물이 노래하는 장면) 앞에서 잉글리시 호른(오보에보다 낮은 목관악기)이 긴 독주로 그녀의 흔들리는 마음을 먼저 들려준다.
  • 「순진한 미소로(Col sorriso d'innocenza)」는 느리고 꿈꾸는 듯하다가, 이어지는 「오 태양이여, 가려다오(O sole, ti vela)」에서 빠르고 격렬한 카발레타(아리아 끝의 빠른 마무리 부분)로 폭발한다.
  • 마리아 칼라스의 1950년대 공연 녹음이 이 장면의 명연으로 자주 꼽히며, 오래 잊혔던 이 오페라가 다시 무대에 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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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캐퓰렛가와 몬터규가」 (I Capuleti e i Montecchi, 작품번호 없음)1830 (29세)

실패한 「자이라」와 학생 시절 오페라의 선율을 6주 만에 새 극으로 다시 엮은 작품이다. 버리지 않고 살려 낸 음악이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으로 다시 태어났다.

  • 로메오는 메조소프라노가 남자 옷을 입고 부르는 바지 역할로, 줄리에타와의 2중창에서 두 여성 목소리가 포개지며 독특한 빛깔을 낸다.
  • 1막 줄리에타의 「아, 몇 번이나(Oh! quante volte)」 앞에는 호른 독주가 부드럽게 길을 연다. 이 선율은 학생 시절 오페라 「아델손과 살비니」에서 옮겨 온 것이다.
  • 로메오의 등장 아리아는 느린 부분에 이어 「무서운 복수의 칼(La tremenda ultrice spada)」이라는 빠른 카발레타로 넘어가며 결의를 드러낸다.
  • 마지막 무덤 장면은 짧게 끊기는 대화처럼 진행된다. 19세기에는 가수들이 이 장면을 니콜라 바카이의 곡으로 바꿔 부르는 관습이 있었고, 이 차이는 지금도 애호가들 사이에서 거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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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두 걸작의 해 · 1831–1832 (30–31세)

(경쟁) 1830~31년 시즌 밀라노의 카르카노 극장은 같은 가수들, 곧 소프라노 주디타 파스타와 루비니를 위해 두 작곡가에게 신작을 맡겼다. 먼저 나온 도니체티의 「안나 볼레나」가 크게 성공하자 벨리니는 긴장했다. 이 시기 그의 편지에는 도니체티와 조반니 파치니 같은 경쟁자를 향한 경계심과 의심이 자주 보인다. (검열) 원래 그는 빅토르 위고의 「에르나니」를 오페라로 만들려 했으나, 정치적 내용이 검열에 걸릴 것을 우려해 접었다. 대신 고른 것이 스위스 산골 마을의 몽유병 처녀를 다룬 목가극이었다. 1831년 3월 초연된 「몽유병의 여인」은 경쟁의 열기와 정반대로 조용하고 투명한 음악이었다. (노르마) 같은 해 12월 26일 라 스칼라에서 「노르마」가 초연되었다. 로마 총독과의 사이에 몰래 두 아이를 둔 갈리아의 여사제가 배신을 겪고 끝내 스스로 불길에 오르는 이야기였다. 파스타가 노르마를, 줄리아 그리시가 아달지사를 맡았다. 첫날 반응은 미지근했고 벨리니는 실망을 플로리모에게 써 보냈지만, 공연이 거듭되며 작품은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그가 자기 작품 가운데 이 곡을 가장 아꼈다고 전해진다. (귀향) 1832년 봄 그는 나폴리를 거쳐 시칠리아로 갔다. 열세 해 만의 귀향이었다. 카타니아와 팔레르모는 그를 성대히 맞았고, 그는 오랜만에 부모와 동생들을 만났다.

♪오페라 「몽유병의 여인」 (La sonnambula, 작품번호 없음)1831 (30세)노래 Natalie Dessay (소프라노) · 2009 Met

도니체티와의 경쟁이 달아오르던 시즌, 검열로 정치극을 접고 택한 산골 목가극이다. 경쟁의 열기와 정반대로 가장 투명하고 조용한 음악이 나왔다.

  • 마지막 장면의 「아, 너를 이렇게 빨리 보리라곤(Ah! non credea mirarti)」에서 아미나는 잠든 채 시든 꽃에 말을 건다. 반주는 거의 숨죽이고 선율만 길게 이어진다.
  • 잠에서 깨어나 오해가 풀리자 곧바로 「아, 인간의 생각으로는(Ah! non giunge)」이라는 빠르고 화려한 카발레타로 기쁨이 터져 나온다. 느린 슬픔과 빠른 환희의 대비를 들어 보라.
  • 엘비노 역은 루비니를 위해 쓰여 테너에게 아주 높은 음을 요구하며, 오늘날에도 이 역을 맡을 수 있는 테너는 많지 않다.
  • 칼라스와 조앤 서덜랜드의 녹음 비교가 자주 이야기된다. 한쪽은 말의 표정을, 다른 쪽은 목소리의 고른 아름다움을 앞세운다는 평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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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노르마」 (Norma, 작품번호 없음)1831 (30세)노래 Maria Callas (소프라노)

같은 해 연달아 나온 두 번째 걸작으로, 첫날의 냉담한 반응을 딛고 벨리니가 가장 아낀 작품이 되었다. 배신과 희생의 비극을 긴 선율 하나로 끌고 간다.

  • 「정결한 여신(Casta diva)」은 플루트의 긴 도입 뒤 노르마가 달의 여신에게 평화를 비는 기도다. 원래 사장조로 썼다가 초연 가수 파스타를 위해 바장조로 낮춰 불렀다.
  • 2막 2중창 「보라, 노르마(Mira, o Norma)」에서 두 소프라노는 세 음 간격(3도)으로 나란히 움직이며 하나의 목소리처럼 어우러진다.
  • 마지막 장면 「네가 배신한 마음(Qual cor tradisti)」에서 「아, 그들을 희생시키지 마세요(Deh! non volerli vittime)」로 이어지며 합창과 독창이 점점 커지는(크레셴도) 큰 물결을 이룬다.
  • 노르마 역은 악명 높게 어려워서, 바그너 가수 릴리 레만이 브륀힐데 세 역을 부르는 편이 노르마 하나보다 쉽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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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결별의 해 · 1833 (32세)

(베네치아) 1833년 라 페니체 극장의 위촉으로 「텐다의 베아트리체」를 쓰게 되었다. 그러나 여러 극장의 일을 겹쳐 맡은 로마니의 대본이 한참 늦었다. 다급해진 벨리니는 당국에 호소하기까지 했고, 시간에 쫓긴 작품은 3월 초연에서 실패했다. 이어 베네치아 신문에서 벨리니를 옹호하는 글과 로마니의 반박이 오가는 공방이 벌어졌고, 여섯 해 이어진 협업은 여기서 끝났다. (이별) 같은 해 주디타 투리나의 남편이 두 사람의 편지를 발견해 부부는 갈라섰다. 벨리니는 그녀와 함께할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았다.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 관계가 일에 방해가 된다는 투로 썼고, 차츰 거리를 두었다. 사랑받기를 바라면서도 묶이기를 두려워한 그의 성격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런던) 4월에는 파스타와 함께 런던으로 건너가 「노르마」와 「몽유병의 여인」 공연을 지켜보았다. 그곳에서 마리아 말리브란이 영어로 부르는 아미나를 듣고 깊이 감동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8월에는 파리에 도착했다. 잠시 들를 생각이던 이 도시가 그의 마지막 거처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극장과 대본가를 잃은 채, 그는 더 큰 무대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VI. 파리의 마지막 노래 · 1833–1835 (32–34세)

(살롱) 파리에서 그는 망명 이탈리아 귀족 벨조이오소 공작부인의 살롱을 드나들며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 프레데리크 쇼팽과 가까워졌다. 노래하듯 길게 이어지는 쇼팽 녹턴의 선율에서 벨리니의 흔적을 읽는 해석은 널리 받아들여진다. 하이네는 천재는 일찍 죽는다는 농담에 벨리니가 질겁하며 액막이 손짓을 했다고 기록했다. (로시니) 은퇴한 로시니는 그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테아트르 이탈리앵이 그에게 신작을 위촉하면서 같은 시즌 도니체티에게도 「마리노 팔리에로」를 맡기자, 벨리니는 자신을 견제하려는 음모라 의심하는 편지를 썼다. (청교도) 대본은 극작 경험이 없던 망명 시인 카를로 페폴리가 맡았고, 벨리니는 그에게 음악극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편지로 거듭 가르쳤다. 1835년 1월 24일 초연된 「청교도」는 그리시, 루비니, 안토니오 탐부리니, 루이지 라블라슈가 노래해 대성공을 거두었고, 그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이 무렵 외삼촌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재산 있는 여성과 결혼해 생활을 안정시키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죽음) 그해 여름 파리 근교 퓌토의 지인 집에 머물다 병이 깊어졌고, 외부와 거의 단절된 채 9월 23일 서른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독살 소문이 돌자 부검이 이루어졌는데 장의 심한 염증과 간 농양이 확인되어, 오늘날에는 아메바성 이질로 본다. 장례에는 로시니도 함께했고, 그는 페르라셰즈 묘지에 묻혔다가 1876년 카타니아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오페라 「청교도」 (I puritani, 작품번호 없음)1835 (34세)노래 Rosa Feola (소프라노) · 2017 라 페니체 신년음악회

이탈리아의 무대와 대본가를 잃고 파리에서 다시 시작해 거둔 마지막 성공이다. 초연 여덟 달 뒤 그는 세상을 떠났다.

  • 엘비라의 광란의 장면 「여기서 그 목소리가(Qui la voce)」는 실성한 여주인공이 연인을 부르는 느린 노래로, 이어지는 카발레타 「오라, 사랑하는 이여(Vien, diletto)」와 짝을 이룬다.
  • 아르투로의 등장 노래 「그대에게, 오 사랑하는 이여(A te, o cara)」에 이어, 3막 「불쌍한 여인이라 생각했건만(Credeasi, misera)」에서는 테너에게 높은 F를 요구한다. 보통 테너 최고음으로 여기는 하이 C보다 훨씬 높아 가성을 섞거나 낮춰 부르는 경우가 많다.
  • 바리톤과 베이스가 자유를 외치는 2중창 「나팔을 울려라(Suoni la tromba)」는 행진곡 같은 힘이 있다. 훗날 리스트와 쇼팽 등 여섯 작곡가가 이 선율로 변주곡집 「헥사메론」을 엮었다.
  • 초연의 네 주역은 ‘청교도 4중창단’이라 불릴 만큼 유명했다. 네 사람이 한데 모이는 앙상블에서 각 성부가 어떻게 따로 또 같이 움직이는지 들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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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알려진 이야기

(편집) 오늘날 전하는 벨리니의 모습은 상당 부분 친구 플로리모가 1880년대에 펴낸 회고와 편지 모음에서 나왔다. 20세기 후반 학자들이 자필 원본과 대조하자, 플로리모가 경쟁자를 향한 독설이나 연애에 대한 냉정한 계산을 지우거나 고치고, 일부 문장은 직접 써 넣은 정황이 드러났다. 순정한 청년 예술가라는 이미지, 그리고 마달레나 푸마롤리와의 비련도 그가 크게 부풀린 대목으로 본다. 존 로젤리 등 최근 전기 작가들은 이 자료를 걸러 읽는다. (바그너) 훗날 이탈리아 오페라를 깎아내린 것으로 유명한 바그너는 젊은 시절 벨리니를 높이 샀다. 1837년 리가에서 「노르마」를 지휘하며 그 단순한 선율의 힘을 옹호하는 글을 썼고, 1839년 파리에서는 베이스 라블라슈를 위해 오로베소의 아리아를 새로 지어 넣으려 했으나 쓰이지 않았다. 바그너의 후기 명성에 가려 잘 언급되지 않는 일이다. (재활용) 벨리니는 실패작을 버리지 않았다. 「자이라」의 많은 부분이 「캐퓰렛가와 몬터규가」로 옮겨졌고, 줄리에타의 아리아 선율은 학생 시절 「아델손과 살비니」에서 왔다. 한 해 한 편을 고집한 작곡가에게도 시간은 늘 모자랐다는 증거다. (베르디) 벨리니의 관현악이 빈약하다는 평이 굳어진 뒤인 1898년, 노년의 베르디는 편지에서 그가 이전 누구도 쓰지 못한 ‘길고, 길고, 긴 선율’을 썼다고 적었다. 같은 전통에서 출발한 후배의 이 증언은 벨리니를 다시 읽게 하는 근거로 자주 인용된다.

용어 노트 📚🔎

벨칸토

(말뜻) 이탈리아어 bel canto는 아름다운(bel) 노래(canto)라는 뜻이다. (음악에서) 19세기 초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발달한 노래 방식으로, 고르고 부드러운 소리, 긴 호흡, 빠른 장식음을 깨끗하게 해내는 기술을 중시한다. 로시니, 도니체티, 벨리니가 대표 작곡가다. 큰 소리로 밀어붙이기보다, 숨 한 번에 긴 문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목소리로 고르게 읽어 내는 것에 가깝다. 국어 시간에 긴 시를 중간에 숨 쉬지 않고 또박또박 낭독해 본 경험을 떠올리면 된다.

리브레토(대본)

(말뜻) 이탈리아어 libretto는 책(libro)에 ‘작은’을 뜻하는 꼬리가 붙어 ‘작은 책’이라는 뜻이다. 옛 극장에서 관객이 손에 들고 보던 얇은 가사집에서 나온 이름이다. (음악에서) 오페라의 이야기와 가사를 적은 대본을 가리키며, 이를 쓰는 사람을 대본가라 한다. 작곡가는 대본의 시구에 맞춰 선율을 붙이므로 대본가와의 호흡이 작품의 성패를 좌우한다. 학예회 연극을 준비할 때 대본이 늦게 나오면 연습도 노래도 다 밀리는 것과 같다. 벨리니가 로마니의 대본을 기다리다 일을 그르친 것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아리아

(말뜻) 이탈리아어 aria는 본래 ‘공기’, ‘분위기’를 뜻하고, 거기서 ‘곡조’라는 뜻이 나왔다. (음악에서) 오페라에서 한 인물이 혼자 감정을 쏟아 내며 부르는 노래다. 이야기가 잠시 멈추고, 그 인물의 마음속을 확대해 보여 주는 자리라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배경음악이 깔리며 속마음이 흘러나오는 장면과 비슷하다. (다른 데서는) 일상 이탈리아어에서 aria는 그냥 숨 쉬는 ‘공기’를 말한다.

레치타티보

(말뜻) 이탈리아어 recitare(낭송하다, 연기하다)에서 왔다. 말하듯 읊는 노래라는 뜻이다. (음악에서) 오페라에서 대화를 주고받거나 사건을 진행할 때, 말의 리듬을 따라 빠르게 읊조리듯 부르는 부분이다. 반주는 간단하게 화음만 짚어 주는 경우가 많다. 뮤지컬에서 배우들이 노래와 대사 사이쯤의 말투로 상황을 설명한 뒤, 본격적인 노래가 시작되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 벨리니는 이 부분에서도 선율의 표정을 살리려 애썼다.

카발레타

(음악에서)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의 아리아는 흔히 느리고 서정적인 앞부분과, 빠르고 화려한 뒷부분으로 짜였는데, 이 뒷부분을 카발레타라 한다. 앞부분에서 감정을 깊이 드러낸 인물이 무언가 결심하거나 기쁨·분노가 터질 때 카발레타로 넘어가며, 같은 선율을 두 번 부르면서 두 번째에 장식을 더 화려하게 붙이는 일이 많다. 이어달리기에서 마지막 주자가 바통을 받자마자 전력으로 내달리며 경기를 끝내는 것과 비슷하다. 관객의 박수가 가장 크게 터지는 자리이기도 하다.

광란의 장면

(말뜻) 이탈리아어 scena della pazzia, 곧 ‘미친 장면’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음악에서) 견딜 수 없는 슬픔이나 배신 때문에 정신이 흐트러진 인물, 주로 여주인공이 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부르는 긴 장면이다. 선율이 갑자기 끊겼다 이어지고, 예전에 나왔던 가락이 조각처럼 다시 떠오르며, 목소리는 아주 높고 어려운 장식음을 소화해야 한다. 꿈속에서 예전 기억들이 뒤죽박죽 섞여 나오는 것을 노래로 옮겼다고 생각하면 된다. 벨리니의 「해적」과 「청교도」, 도니체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가 유명하다.

바지 역할

(말뜻) 영어 trouser role, 곧 ‘바지를 입는 역할’이라는 뜻이다. 여성 가수가 남자 옷을 입고 무대에 서는 데서 나온 말이다. (음악에서) 남성 인물을 여성 가수, 주로 메조소프라노가 맡아 부르는 역할을 가리킨다. 소년이나 젊은 연인을 표현할 때 많이 썼고, 남녀 사랑 노래인데도 두 여성 목소리가 겹쳐 독특한 울림이 난다. 학교 연극에서 여학생이 왕자 역을 맡아 멋지게 해내는 것과 같다. 벨리니의 「캐퓰렛가와 몬터규가」에서 로메오가 이렇게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