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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briel Fauré

가브리엘 포레 (1845–1924)

“사람들은 내 레퀴엠을 죽음의 자장가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죽음을 그렇게 본다. 고통스러운 경험이 아니라 행복한 해방으로.”

한눈에 보기 🔭💭

1. 뿌리프랑스 파미에 출생교장 아버지의 막내예배당 하르모니움2. 수업니데르메예르 학교생상스와의 우정장 라신 찬가3. 생활렌 오르가니스트마리안과의 파혼레슨으로 꾸린 생계4. 위로부모를 잃다레퀴엠파반5. 스승음악원 작곡 교수제자 라벨원장의 개혁6. 말년일그러진 청력현악 사중주1924년 파리 영면포레1845–1924생계와 상실 속에서 레퀴엠과 가곡을 남긴 프랑…
삶의 여정 🧭🗺️
N프랑스파미에1845–1849푸아(몽고지)1849–1854파리1854–1866, 1870–1924렌1866–1870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곁의 사람들 ⏳🌊

  • 스승루이 니데르메예르

    옛 성가와 선법 화성을 가르쳐 포레 음악의 뿌리를 만들어 준 학교 설립자.

  • 스승카미유 생상스

    열여섯 살에 만난 피아노 교사로, 슈만·리스트·바그너를 알려 주고 평생 친구로 이끌어 준 사람.

  • 영향프란츠 리스트

    1877년 바이마르에서 만난 노대가로, 젊은 포레의 피아노곡을 직접 보아 주었다.

  • 가족마리 프레미에

    조각가 프레미에의 딸로 1883년 아내가 되어 두 아들을 낳았고, 포레의 편지 대부분의 수신인이 되었다.

  • 후원위나레타 싱어

    베네치아에 그를 초대하는 등 살롱의 후원자로서 생계에 쫓기던 작곡가에게 숨통을 열어 주었다.

  • 제자모리스 라벨

    음악원 작곡 교실의 제자로, 「물의 유희」를 스승에게 바쳤고 그의 로마대상 낙선이 포레를 원장 자리에 앉혔다.

YouTube에서 7곡 이어 듣기 ↗

I. 몽고지 예배당의 아이 · 1845–1854 (0–9세)

(막내) 1845년 5월 12일, 프랑스 남서부 아리에주 지방의 파미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투생오노레 포레는 교사였고, 어머니 마리앙투아네트엘렌 랄렌라프라드는 기울어 가던 소귀족 집안 출신이었다. 가브리엘은 여섯 남매 가운데 막내였다. (유모) 태어나자 곧 인근 마을 베르니올의 유모에게 맡겨져 네 살 무렵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당시 이 지방에서 드물지 않은 관습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는 말수가 적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고 전해진다. (하르모니움) 1849년 아버지가 푸아 근교 몽고지의 사범학교 교장이 되자 가족은 학교 관사로 옮겼다. 학교에 딸린 작은 예배당에는 발로 바람을 넣는 소형 오르간인 하르모니움이 있었고, 소년은 틈이 날 때마다 그 앞에 앉아 혼자 소리를 지어냈다. 포레는 훗날 이 시절을 회고하며, 앞을 보지 못하는 한 노부인이 자주 연주를 들으러 와서 조언을 해 주었다고 이야기했다. (결단) 소년의 연주를 들은 지역 유력 인사가 아버지에게 파리의 교회음악 학교를 권했다. 교사의 봉급으로 여섯 자녀를 키우던 아버지에게 음악가, 그것도 교회 음악가는 넉넉한 장래가 아니었다. 그는 한동안 망설였지만, 학교가 학비 부담을 덜어 준다는 조건 아래 결국 1854년 가을 아홉 살 막내를 홀로 파리로 보냈다. 이후 포레는 다시는 고향에서 오래 살지 않았다.

II. 니데르메예르 학교 · 1854–1865 (9–20세)

(기숙) 루이 니데르메예르가 세운 이 학교는 성당 오르가니스트와 합창장을 길러 내는 기숙학교였다. 규율이 엄했고 방학에도 먼 남쪽 집에 자주 갈 수 없었다. 포레는 이곳에서 열한 해를 보냈다. (선법) 수업의 중심은 오페라가 아니라 그레고리오 성가와 르네상스 시대의 여러 성부 합창음악이었다. 니데르메예르는 옛 성가를 오늘날의 장조·단조가 아닌 중세의 선법(음계의 옛 틀)에 맞추어 반주하는 법을 가르쳤다. 장조인지 단조인지 경계가 흐릿하고, 예상하지 못한 조로 슬며시 미끄러지는 포레 특유의 화성은 이 교실에서 뿌리를 내렸다. (생상스) 1861년 니데르메예르가 세상을 떠나자 스물다섯 살의 카미유 생상스가 피아노 교사로 왔다. 그는 교과 과정에 없던 슈만과 리스트, 바그너의 음악을 학생들에게 들려주었고, 수업이 끝나면 아이들을 집으로 불러 함께 피아노를 쳤다. 열 살 차이의 이 사제는 곧 친구가 되었고, 그 우정은 반세기 넘게 이어졌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는 지금도 남아 있다. (찬가) 1865년, 열아홉 살의 포레는 졸업을 앞두고 쓴 합창곡 「장 라신 찬가」로 학교의 작곡 부문 1등상을 받았다. 17세기 극작가 라신이 라틴어 찬미가를 프랑스어로 옮긴 시에, 합창과 건반을 위한 단정한 음악을 붙인 곡이었다. 옛 교회음악의 절제와 낭만주의의 따뜻한 화성이 이미 한 몸이 되어 있었다.

♪장 라신 찬가 (Op. 11)1864–1865 (19–20세)실황 Maîtrise de Radio France · Sofi Jeannin 지휘

니데르메예르 학교에서 배운 교회음악의 절제가 열아홉 살의 손에서 처음 온전한 곡이 된 졸업 작품이다.

  • 도입부에서 건반이 화음을 한 음씩 펼쳐 물결처럼 흘려보내는 분산화음(아르페지오)을 들어 보라. 이 잔잔한 물결이 곡 전체를 받쳐 준다.
  • 합창 성부가 하나씩 차례로 들어와 겹쳐지는 대목은 기도 소리가 점점 모여드는 것처럼 들린다.
  • 가사는 새벽 기도를 위한 라틴어 찬미가를 라신이 옮긴 것으로, 잠든 영혼을 깨워 달라는 내용이다. 큰 소리로 치닫지 않고 끝까지 고요한 것이 이 곡의 품격이다.
  • 원래 건반 반주였으나 현악 합주와 하르모니움 판, 관현악 판도 있어 연주마다 질감을 비교하는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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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오르간 벤치와 파혼 · 1866–1877 (21–32세)

(렌) 1866년 브르타뉴 지방 렌의 생소뵈르 성당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지방 도시의 생활은 지루했고, 그는 부유한 집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며 시간을 보냈다. 1870년 초 그는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설교 도중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갔다거나, 밤새 무도회에 있다가 연미복 차림 그대로 아침 미사에 나타났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전쟁) 파리로 돌아와 작은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일하던 그해 여름, 프로이센과의 전쟁이 터졌다. 포레는 자원 입대해 파리 포위전의 여러 전투에 나갔다. 전쟁 뒤 파리 코뮌의 혼란을 피해 스위스로 옮겨 가 있던 옛 학교에서 잠시 가르쳤는데, 이때의 제자 앙드레 메사제와는 평생 가까이 지냈다. (협회) 1871년 생상스, 세자르 프랑크 등과 함께 국민음악협회를 세웠다. 오페라에 쏠린 파리에서 프랑스인의 기악과 실내악을 들려주자는 모임이었다. 그는 생쉴피스 성당에서 비도르를 보좌했고, 마들렌 성당에서는 생상스의 대리 오르가니스트를 맡았다. (파혼) 생상스의 소개로 드나들던 명가수 폴린 비아르도의 집에서 그는 딸 마리안을 사랑하게 되었다. 다섯 해에 걸친 구애 끝에 1877년 7월 약혼했으나, 석 달 뒤 마리안이 약혼을 깨뜨렸다. 같은 해 1월 초연한 바이올린 소나타 1번은 생상스의 호평을 받으며 성공했지만, 라이프치히의 출판사는 인세 없이 악보를 냈다. 서른두 살의 포레는 사랑도 돈도 손에 쥐지 못한 채 그해를 보냈다.

♪바이올린 소나타 1번 A장조 (Op. 13)1875–1876 (30–31세)연주 김서현 (바이올린)·홍소유 (피아노)

마리안 비아르도에게 구애하던 시기에 쓴 곡으로, 성공적인 초연과 달리 인세 한 푼 받지 못한 그의 처지를 상징하는 작품이 되었다.

  • 1악장은 피아노가 혼자 긴 주제를 다 펼친 뒤에야 바이올린이 들어온다. 피아노가 반주가 아니라 대등한 대화 상대라는 점이 처음부터 드러난다.
  • 3악장(빠르고 익살스러운 스케르초)에서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짧은 음을 튕기듯 주고받는데, 두 악기의 호흡이 맞는지가 명연주를 가르는 지점이다.
  • 생상스는 이 곡을 평하며 새로운 화성과 대담한 조 바꿈(전조)을 칭찬했다. 선율이 예상 밖의 조로 미끄러지는 순간들을 찾아 들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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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꾼 뒤에 (Op. 7 No. 1)1870년대 (25세)연주 Daniel Hope (바이올린)·Christoph Israel

사랑에 들떴다 무너지던 젊은 날 무렵의 가곡으로, 꿈속의 연인에게서 깨어나는 슬픔을 노래한다.

  • 피아노가 같은 화음을 고르게 되풀이하는 반주는 꿈속의 고요한 맥박처럼 들린다.
  • 곡 끝의 '아, 슬픈 깨어남이여'라는 대목에서 선율이 높이 올랐다가 무너지듯 내려온다. 이 곡의 감정이 한꺼번에 터지는 지점이다.
  • 첼로 독주 편곡이 노래만큼 유명해서, 성악판과 첼로판을 나란히 들으며 가사 없이 노래가 어떻게 전해지는지 비교해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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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생활인의 작곡 · 1877–1891 (32–46세)

(바이마르) 파혼의 상처가 가시기 전인 1877년 말, 생상스를 따라 바이마르에 가 리스트를 만났다. 피아노곡 「발라드」의 악보를 보여 주자 노대가가 너무 어렵다며 돌려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후 쾰른과 뮌헨 등지로 바그너의 오페라를 보러 다니며 깊이 감탄했지만, 그의 음악은 끝내 바그너를 닮지 않았다. (결혼) 1883년 조각가 에마뉘엘 프레미에의 딸 마리와 결혼했다. 그해 장남 에마뉘엘이, 1889년 차남 필리프가 태어났다. 에마뉘엘은 훗날 원생동물을 연구한 생물학자가 되어 과학 아카데미 회원에 올랐고, 필리프는 작가가 되어 아버지의 편지를 엮어 펴냈다. 내성적인 마리는 바깥으로만 도는 남편 곁에서 자주 외로워했다. (생계) 마들렌 성당 합창장의 급여만으로는 살림이 되지 않아, 그는 파리의 상류층 가정을 돌며 피아노와 화성학을 가르쳤다. 작곡은 여름 휴가에나 할 수 있었다. 출판사 아멜은 그의 곡을 헐값에 통째로 사들였다. 1884년 교향곡 한 곡을 초연했다가 스스로 거두어들인 것도 이 무렵이다. (상실) 1885년 아버지가, 1887년 마지막 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레퀴엠(죽은 이를 위한 미사곡)을 쓰고 있었고, 1888년 1월 마들렌 성당의 한 장례식에서 처음 연주했다. 포레는 이 곡이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고 했지만, 부모를 잃은 시기와 겹친 이 음악에는 심판의 공포 대신 고요한 위로가 담겼다. 같은 무렵 쓴 「파반」은 그를 후원하던 그레퓔 백작부인에게 바쳐졌다.

♪레퀴엠 D단조 (Op. 48)1887–1900 (42–55세)실황 James Gaffigan 지휘 · Concertgebouw

부모를 잇달아 잃은 시기에 쓴, 공포가 아닌 평안으로 죽음을 바라본 레퀴엠이다.

  • 대부분의 레퀴엠이 공들여 그리는 최후 심판의 장면(디에스 이레)이 이 곡에는 거의 없다. 포레가 무엇을 빼고 무엇을 남겼는지 듣는 것이 이 곡을 이해하는 열쇠다.
  • 「자비로우신 예수」는 소프라노 독창이 거의 반주 없이 부르는 짧은 기도로, 소년 합창단원이 부르는 연주와 성인 소프라노가 부르는 연주가 서로 다른 맛을 낸다.
  • 「상투스」에서는 독주 바이올린이 합창 위로 높게 떠다니며 천상의 빛처럼 들린다.
  • 마지막 「낙원으로」에서 오르간의 잔잔한 분산화음(아르페지오) 위로 소프라노가 영혼을 낙원으로 배웅한다. 곡이 큰 마무리 없이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포레다운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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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반 F♯단조 (Op. 50)1887 (42세)실황 Radio Philharmonic · Peter Dijkstra 지휘

생계에 쫓기던 시기 후원자 그레퓔 백작부인에게 바친 곡으로, 옛 궁정 춤의 걸음을 빌려 우아한 쓸쓸함을 그렸다.

  • 현악기들이 줄을 손가락으로 튕기는(피치카토) 반주 위로 플루트가 주제를 부른다. 이 단순한 조합이 곡의 얼굴이다.
  • 파반은 16세기 궁정의 느린 행렬 춤이다. 연주자마다 빠르기가 크게 달라, 느린 애가처럼 연주하는 쪽과 가볍게 걷는 춤으로 연주하는 쪽을 비교해 들을 만하다.
  • 합창을 곁들인 판도 있는데, 가사는 연인들의 엇갈림을 비꼬는 내용이어서 음악의 우아함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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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살롱과 교단 · 1891–1905 (46–60세)

(베네치아) 1891년 재봉틀 재벌의 딸이자 후원자인 위나레타 싱어의 초대로 베네치아에 머물며 베를렌의 시에 붙인 가곡들을 썼다. 파리 살롱의 후원자들은 그에게 생계 밖의 숨통이었다. (시찰) 1892년 지방 음악원을 둘러보는 장학관이 되어 기차로 프랑스 곳곳을 오갔다. 안정된 수입이었으나 고된 여행이었고, 그는 여행지에서 아내에게 거의 날마다 편지를 썼다. (에마) 이 무렵 그는 은행가의 아내이자 아마추어 가수인 에마 바르다크와 가까워졌다. 그녀를 위해 쓴 연가곡 「좋은 노래」에는 그 시절의 설렘이 짙게 배어 있다. 그녀의 어린 딸 엘렌, 애칭 돌리의 생일마다 써 준 피아노 이중주 소품들은 「돌리 모음곡」으로 묶였다. 에마는 훗날 드뷔시의 아내가 되었다. (교수) 1896년 마들렌 성당 수석 오르가니스트가 되었고, 마스네의 뒤를 이어 파리 음악원 작곡 교수가 되었다. 라벨, 쾨클랭, 에네스쿠, 플로랑 슈미트, 나디아 불랑제가 그의 교실을 거쳤다. 그는 학생에게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지 않았고, 라벨은 「물의 유희」를 '친애하는 스승 가브리엘 포레께' 바쳤다. (펠레아스) 1898년 런던에서 열린 마테를링크의 연극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를 위해 극중 음악을 맡았다. 시간이 모자라 관현악 편곡 일부를 제자 쾨클랭에게 맡겼다. 1900년 무렵부터는 피아니스트 마르그리트 아셀만스와 생애 끝까지 이어진 관계를 맺었다. 1903년 『르 피가로』의 음악 비평을 맡던 해, 그는 귀에서 이상한 징후를 느끼기 시작했다.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모음곡 (Op. 80)1898 (53세)지휘 François Leleux · hr-Sinfonieorchester

교수로 자리 잡던 시기에 런던 연극을 위해 서둘러 쓴 극중 음악으로, 제자 쾨클랭의 손이 관현악 편곡에 보태졌다.

  • 「물레 잣는 여인」에서 현악기가 쉬지 않고 빠르게 돌리는 음형은 돌아가는 물레처럼 들리고, 그 위로 오보에가 선율을 노래한다.
  • 「시칠리엔」은 플루트와 하프가 주고받는 흔들리는 리듬으로 가장 널리 사랑받는 대목이다.
  • 마지막 「멜리장드의 죽음」은 무거운 장송 행진으로, 레퀴엠과 마찬가지로 절규 대신 조용한 슬픔을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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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음악원장 · 1905–1920 (60–75세)

(라벨) 1905년 제자 라벨이 로마대상 예선에서 탈락하자 파리 음악계가 들끓었다. 이미 인정받는 작곡가를 심사위원들이 떨어뜨렸다는 비판 속에 원장 뒤부아가 물러났고, 정부는 포레를 후임으로 앉혔다. 정식 음악원 교육을 받지 않은 예순 살의 원장이었다. (개혁) 그는 연줄로 이뤄지던 교수 임용을 바로잡고, 르네상스 음악부터 당대 음악까지 가르칠 범위를 넓혔다. 반발한 교수들이 떠났고, 온화한 그에게 '로베스피에르'라는 별명이 붙었다. 1909년 제자들이 보수적인 국민음악협회에서 갈라져 독립음악협회를 세우자 그 회장을 맡았다. 같은 해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여유) 원장 급여로 그는 처음으로 돈 걱정에서 벗어났다. 여름이면 스위스 호숫가에 머물며 오페라 「페넬로페」를 썼다. 1913년 몬테카를로에서 초연하고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 올렸지만, 몇 주 뒤 같은 극장의 「봄의 제전」 소동과 극장의 재정난 속에 금세 묻혔다. (난청) 청력은 계속 나빠졌다. 단지 소리가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높은 음은 낮게, 낮은 음은 높게 일그러져 들렸다. 그는 회의와 연주회에서 이를 숨기려 애썼고, 자기 음악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고통을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털어놓았다. (전쟁) 1914년 전쟁이 터질 때 독일의 온천에 머물던 그는 스위스를 거쳐 겨우 돌아왔다. 전쟁 중 쓴 바이올린 소나타 2번과 첼로 소나타 1번에는 젊은 날의 부드러움 대신 단단하고 날 선 목소리가 들어섰다.

VII. 마지막 사중주 · 1920–1924 (75–79세)

(은퇴) 1920년, 일흔다섯의 포레는 청력과 건강 탓에 음악원장에서 물러났다. 국가는 레지옹 도뇌르 최고 등급을 주었고, 1922년에는 소르본에서 그를 기리는 공식 음악회가 열렸다. 그러나 고정 수입이 줄어 형편은 다시 빠듯해졌고, 오랜 흡연으로 기관지도 약해져 있었다. (작별) 1921년 12월 생상스가 알제에서 세상을 떠났다. 열여섯 살에 만난 스승이자 육십 년 친구였다. 노년의 생상스는 제자의 후기 음악을 다 따라가지 못했지만, 두 사람의 편지는 끝까지 다정했다. (후기) 그런데도 마지막 몇 해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풍성한 시기였다. 바다로 떠나는 꿈을 노래한 연가곡 「환상의 수평선」, 피아노 오중주 2번, 녹턴 13번, 피아노 삼중주가 잇달아 나왔다. 잘 들리지 않는 귀로 쓴 이 곡들은 장식을 덜어 내고 선과 화성만 남긴, 맑고 엄격한 음악이었다. (사중주) 마지막으로 그는 평생 피해 온 현악 사중주에 손을 댔다. 베토벤의 그림자가 너무 큰 장르였다. 1924년 9월 완성했지만 직접 들어 보지는 못했고, 출판 여부를 제자 로제뒤카스 등에게 맡겼다. (영면) 1924년 11월 4일, 파리의 집에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마들렌 성당에서 국장이 치러졌고, 그의 레퀴엠이 연주되었다. 숨지기 전 두 아들에게, 자신의 음악이 잊히더라도 괴로워하지 말라는 뜻의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그는 파시 묘지에 묻혔다.

♪현악 사중주 E단조 (Op. 121)1923–1924 (78–79세)연주 Castalian Quartet (현악 사중주)

생의 마지막 해, 잘 들리지 않는 귀로 완성하고도 직접 듣지 못한 채 남긴 마지막 작품이다.

  • 1악장 첫머리의 주제는 그가 젊은 시절 쓰다 만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생애 끝에서 젊은 날의 선율로 돌아간 셈이다.
  • 1악장은 비올라가 먼저 주제를 꺼내는데, 화려한 바이올린보다 중간 음역의 어두운 목소리를 앞세운 선택에 귀를 기울여 보라.
  • 2악장의 느린 음악은 네 악기가 거의 속삭이듯 엮여 마치 혼잣말처럼 들린다. 장식 없이 선만 남은 후기 포레의 정수다.
  • 마지막 악장은 조금 밝아지지만 크게 들뜨지 않는다. 마지막 작품을 승리의 피날레로 끝내지 않은 것이 그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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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알려진 이야기

오늘날 가장 자주 연주되는 레퀴엠의 대편성 관현악판이 포레의 원래 구상과는 거리가 있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 1888년 처음 연주된 판은 바이올린을 빼고 비올라와 첼로, 하프, 오르간 위주로 꾸린 작은 편성이었고, 바이올린은 「상투스」의 독주에만 쓰였다. 1900년 출판사의 요청으로 나온 대편성판은 제자의 손을 빌린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1980년대에 장미셸 넥투와 존 러터가 각각 소편성판을 되살려 내면서, 포레가 처음 들었던 어둡고 친밀한 소리가 다시 연주되기 시작했다. 엄숙한 교회음악가의 이미지와 달리 그에게는 장난기도 있었다. 1880년대에 그는 제자이자 친구인 메사제와 함께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선율들을 춤곡으로 비튼 피아노 이중주 「바이로이트의 추억」을 만들어 모임에서 연주하곤 했다. 바그너에 깊이 감탄하면서도 그 열광을 웃음거리로 삼을 줄 알았던 셈인데, 이 곡은 사적인 여흥으로 여겨져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출판되었다. 그의 난청이 단순한 청력 저하가 아니라 음높이가 일그러지는 증상이었다는 것은 주로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확인된다. 그는 높은 음과 낮은 음이 뒤틀려 들려 자기 음악이 소음처럼 느껴진다고 털어놓았다. 이 편지들은 둘째 아들 필리프가 1951년 서간집으로 엮어 낸 뒤에야 널리 읽혔고, 그 전까지는 그가 음악원장 시절 내내 이 고통을 얼마나 감추고 있었는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용어 노트 📚🔎

선법

(말뜻) 선법(旋法)은 가락(旋)을 만드는 법(法)이라는 뜻이다. 서양 이름 모드(mode)는 라틴어 modus 에서 왔고, 방식이나 틀이라는 뜻이다. (음악에서) 음계를 이루는 음들 사이의 간격을 어떻게 배열하느냐에 따라 생기는 여러 가지 음계의 틀이다. 오늘날 익숙한 장조와 단조도 선법의 일종이지만, 중세 교회음악에는 도리아, 프리지아 같은 다른 선법이 더 많았다. 피아노 흰 건반만 눌러도, '도'에서 시작하면 밝은 장조처럼 들리고 '레'에서 시작하면 어딘가 옛 노래처럼 묘하게 들린다. 같은 재료로 출발점만 바꾼 것인데 느낌이 달라지는 것, 그것이 선법의 차이다. (다른 데서는) 모드라는 말은 게임에서 '하드 모드', 휴대폰의 '비행기 모드'처럼 작동 방식을 뜻하는 말로 흔히 쓴다.

전조

(말뜻) 전조(轉調)는 조(調)를 바꾼다(轉)는 뜻이다. (음악에서) 곡이 진행되는 도중에 중심이 되는 음, 곧 으뜸음과 조성을 다른 것으로 옮기는 일이다. 노래방에서 마지막 후렴을 한 단계 올려 부르는 것이 가장 쉬운 예다. 포레는 이런 이동을 아주 매끄럽고 뜻밖의 방향으로 해서, 듣는 사람이 언제 바뀌었는지도 모르게 다른 빛깔 속에 들어가 있게 만들었다. (다른 데서는) 일상에서 '조를 바꾼다'는 말은 음악 밖에서는 잘 쓰이지 않지만, 분위기를 갑자기 바꾸는 것을 비유적으로 '전조'라고 하지는 않는다. 흔히 쓰는 '전조 증상'의 전조(前兆)는 미리 나타나는 조짐이라는 뜻으로, 한자가 다른 별개의 말이다.

레퀴엠

(말뜻) 레퀴엠(Requiem)은 라틴어로 '안식을'이라는 뜻이다. 이 미사의 첫 기도문 '주여,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Requiem aeternam)'의 첫 단어가 곡 이름이 되었다. (음악에서) 가톨릭에서 죽은 사람을 위해 드리는 미사, 또는 그 미사의 기도문에 붙인 음악이다. 정해진 기도문들을 차례로 노래하는데, 작곡가마다 어떤 부분을 넣고 빼느냐가 다르다. 모차르트나 베르디의 레퀴엠은 최후 심판의 두려움을 크게 그렸지만, 포레는 그 부분을 거의 빼고 위로와 평안을 앞세웠다. 친구를 잃은 사람에게 어떤 이는 함께 울어 주고 어떤 이는 조용히 손을 잡아 주는 것처럼, 같은 기도문으로도 전혀 다른 위로를 건넬 수 있다. (다른 데서는) 영화나 소설 제목에서 '무엇에 대한 레퀴엠'이라고 하면, 사라진 것을 애도하는 작품이라는 비유로 쓰인다.

파반

(말뜻) 이름의 뿌리는 분명하지 않다. 이탈리아 도시 파도바에서 왔다는 설과 공작(pavo)의 위엄 있는 걸음에서 왔다는 설이 함께 전한다. (음악에서) 16세기 유럽 궁정에서 추던 느리고 위엄 있는 행렬 춤, 또는 그 춤을 위한 음악이다. 두 박자 계열의 일정한 걸음에 맞춰 사람들이 줄지어 천천히 걸었다. 졸업식에서 입장 음악에 맞춰 한 걸음씩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장면을 떠올리면 그 느낌에 가깝다. 포레와 라벨 같은 프랑스 작곡가들은 이 옛 춤의 이름을 빌려 우아하고 쓸쓸한 분위기의 곡을 썼다.

부수음악

(말뜻) 부수(附隨)는 '붙어서(附) 따라간다(隨)'는 뜻이다. 연극에 딸려 붙는 음악이라는 말이다. (음악에서) 연극을 공연할 때 막과 막 사이, 장면 전환, 극 속의 노래 등을 위해 쓰는 음악이다. 오페라와 달리 배우들은 대사로 연기하고, 음악은 그 곁에서 분위기를 받쳐 준다. 학예회 연극에서 장면이 바뀔 때 흘러나오는 배경음악을 떠올리면 된다. 공연이 끝나면 좋은 대목만 골라 관현악 모음곡으로 묶어 연주회에서 따로 연주하는 경우가 많은데, 포레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모음곡이 그렇다. (다른 데서는) 영화에서는 같은 역할을 하는 음악을 영화음악이나 배경음악이라고 부른다.

현악 사중주

(말뜻) 사중주(四重奏)는 네(四) 사람이 겹쳐(重) 연주한다(奏)는 뜻이다. (음악에서) 바이올린 두 대, 비올라 한 대, 첼로 한 대가 함께 연주하는 편성, 또는 이 편성을 위해 쓴 곡이다. 지휘자 없이 네 사람이 서로 눈빛과 숨소리로 맞춰야 해서, 실내악 가운데서도 가장 정교하고 친밀한 장르로 여겨진다. 하이든이 틀을 세우고 베토벤이 깊이를 더한 뒤로, 작곡가들은 이 장르를 실력을 드러내는 시험대처럼 여겼다. 네 명이 한 팀으로 하는 조별 과제처럼, 누구 하나가 튀거나 빠지면 전체가 무너진다. 포레가 평생 이 장르를 피하다 마지막 해에야 썼던 것도 그 무게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