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nold Schoenberg
“누군가는 그래야 했는데, 아무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맡았다.” — 군 복무 중 ‘그 악명 높은 쇤베르크’냐는 물음에 답하며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곁의 사람들 ⏳🌊
- 스승알렉산더 폰 젬린스키
그가 배운 사실상 유일한 스승이자 첫 아내 마틸데의 오빠로, 평생 음악적 동지였다.
- 후원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베를린 시절 장학금과 교직을 주선하고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를 소재로 권했으나, 뒷날 사이가 멀어졌다.
- 후원구스타프 말러
그의 음악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면서도 공개적으로 감쌌고, 『화성학』을 헌정받았다.
- 제자알반 베르크
1904년 베베른과 함께 제자로 들어와 스승과 더불어 제2 빈악파를 이뤘다.
- 우정바실리 칸딘스키
1911년부터 편지로 예술관을 나눈 화가 친구였으나 1923년 반유대주의 문제로 관계가 틀어졌다.
- 가족게르트루트 콜리슈
1924년 결혼한 두 번째 아내로, 오페라 대본을 쓰고 망명길을 함께했다.
I. 레오폴트슈타트의 독학자 · 1874–1899 (0–25세)
(출생) 1874년 9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오늘날 오스트리아) 빈의 레오폴트슈타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자무엘은 헝가리 출신 유대인으로 작은 구둣가게를 꾸렸고, 어머니 파울리네 나호트는 프라하 출신의 피아노 교사였다. 아래로 여동생 오틸리에와, 훗날 베이스 가수가 된 남동생 하인리히가 있었다. 여덟 살에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고, 배운 곡을 흉내 내 이중주를 쓰며 작곡에 손을 댔다. (가장) 1889년 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열여섯 살의 그는 실업학교를 그만두고 은행 견습 사원이 되었다. 낮에는 장부를 맞추고 밤에는 친구 오스카 아들러와 실내악을 연주하며 화성의 기초를 익혔다. 첼로는 혼자 배웠다. 1895년 은행이 파산해 일자리를 잃었을 때 그는 오히려 홀가분해했다고 전해지며, 이후 노동자 합창단을 지휘해 생계를 이었다. (젬린스키) 그가 받은 정식 교육이라 할 만한 것은 아마추어 관현악단 ‘폴리힘니아’에서 만난 알렉산더 폰 젬린스키에게 몇 달 배운 대위법이 거의 전부였다. 당시 빈은 브람스파와 바그너파로 갈라져 있었지만 그는 두 사람을 모두 깊이 공부했다. 1897년의 현악 4중주 D장조는 브람스의 그늘 안에 있었고, 그해 브람스가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그는 유대교를 떠나 개신교(루터교)로 개종했다. (정화된 밤) 1899년 가을, 젬린스키 남매와 함께 머물던 파이어바흐에서 리하르트 데멜의 시에 붙인 현악 6중주 「정화된 밤」을 석 주 만에 썼다.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여인을 남자가 받아들이는 이야기였고, 그 무렵 그는 젬린스키의 누이 마틸데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 빈 음악가협회는 이 곡의 연주를 거절했는데, 교과서에 없는 화음 하나가 들어 있다는 이유였다고 그는 훗날 회고했다.
마틸데를 향한 사랑이 무르익던 여름, 용서와 변화를 그린 데멜의 시를 한 악장의 실내악으로 옮겼다. 거절당한 화음 하나가 훗날의 혁명을 예고한다.
- 곡은 두 사람이 달빛 아래 숲을 걷는 시의 흐름을 따라 다섯 부분으로 이어진다. 비올라와 첼로가 낮게 걷듯 내려가는(하행) 첫머리는 무거운 고백을 앞둔 발걸음처럼 들린다.
- 여인의 고백이 끝나고 남자가 답하는 대목에서 음악은 어두운 라단조(D단조)에서 따뜻한 라장조(D장조)로 바뀐다. 첼로가 넓게 노래하는 선율이 그 전환의 신호다.
- 그가 거절 사유로 든 ‘교과서에 없는 화음’은 9화음(밑음 위로 아홉째 음까지 쌓은 화음)을 자리바꿈해 아홉째 음을 맨 아래 둔 것이었다. 고백 대목의 긴장된 화음들에 귀를 기울여 보자.
- 마지막 부분은 높은 음역의 하모닉스(현을 살짝 짚어 내는 투명한 소리)와 잔잔한 분산화음(아르페지오)으로 끝나는데, 시가 말하는 ‘밝은 밤’의 달빛처럼 들린다.
- 원래 여섯 대의 현악기(바이올린·비올라·첼로 각 둘)를 위한 곡이지만 1917년과 1943년에 현악 합주판이 나왔다. 실내악판의 긴장감과 합주판의 풍성함을 비교해 듣는 애호가가 많다.
II. 카바레와 두 후원자 · 1900–1907 (26–33세)
(생계) 1901년 10월 마틸데와 결혼했고, 그해 12월 베를린으로 옮겨 에른스트 폰 볼초겐의 문학 카바레 ‘위버브레틀’에서 지휘를 맡았다. 수입이 넉넉지 않아 남의 오페레타를 관현악으로 편곡하는 일로 수천 쪽을 채웠다. 1902년 1월 딸 게르트루트가 태어났다. 1900년에 시작한 대작 「구레의 노래」는 이런 생활 속에서 오랫동안 미완으로 남았다. (슈트라우스) 베를린에서 그를 도운 이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였다. 슈트라우스는 「구레의 노래」 악보를 보고 그를 리스트 장학금에 추천했고, 슈테른 음악원의 강사 자리를 주선했다. 마테를링크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를 소재로 권한 것도 그였다. 쇤베르크는 이를 교향시 Op.5로 썼는데, 같은 해 파리에서 드뷔시의 같은 제목 오페라가 초연된 줄은 몰랐다. (제자) 1903년 빈으로 돌아와 교습으로 살았다. 이듬해 알반 베르크와 안톤 베베른이 제자로 들어왔다. 그는 학생에게 자기 양식을 흉내 내게 하지 않고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의 악보를 분석하게 했다. 세 사람의 관계는 평생 이어졌고, 훗날 ‘제2 빈악파’라 불리게 된다. 1906년에는 아들 게오르크가 태어났다. (말러) 빈 궁정 오페라 감독 구스타프 말러는 그의 음악을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고 털어놓으면서도 그를 감쌌다. 1907년 현악 4중주 1번 Op.7과 실내교향곡 1번 Op.9가 초연에서 야유를 받자, 말러는 소란을 일으키는 청중에게 맞섰다고 전해진다. 열다섯 대의 독주 악기로 교향곡을 한 악장에 압축한 실내교향곡은 조성의 끈이 한계까지 당겨진 음악이었다.
말러가 야유하는 청중에게 맞서 감싼 초연의 곡이다. 조성의 끈을 한계까지 당긴 이 시기의 자신감이 압축되어 있다.
- 시작 직후 호른이 4도 간격으로 껑충껑충 뛰어오르는(4도 상행) 신호를 분다. 3도씩 쌓는 보통 화음 대신 4도씩 쌓은 화음이 곡 전체의 뼈대가 된다.
- 교향곡의 네 악장(빠름·스케르초·느림·피날레)을 쉼 없는 한 악장 안에 압축했다. 빠르고 경쾌한 스케르초 부분과 느린 부분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찾아 들으면 구조가 보인다.
- 열다섯 대의 독주 악기가 저마다 주인공처럼 움직여 소리가 매우 빽빽하다. 연주자들 사이에서는 악기 간 균형을 잡기 어려운 곡으로 꼽힌다.
- 1935년 그는 이 곡을 큰 관현악용으로 다시 편곡했다(Op.9b). 독주 앙상블판의 날 선 투명함과 관현악판의 두께를 비교해 들을 만하다.
III. 다른 행성의 공기 · 1908–1913 (34–39세)
(위기) 1908년 여름, 마틸데가 젊은 화가 리하르트 게르스틀에게로 떠났다. 게르스틀은 부부의 초상을 그리고 쇤베르크에게 그림을 가르치던 이웃이었다. 마틸데는 베베른 등의 설득으로 아이들 곁에 돌아왔고, 홀로 남은 게르스틀은 그해 11월 스물다섯 살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4중주) 이 무렵 완성한 현악 4중주 2번 Op.10은 아내에게 헌정되었다. 2악장에는 ‘다 끝났다’는 가사로 끝나는 민요 「오 사랑하는 아우구스틴」이 섞여 들었고, 마지막 악장의 소프라노는 슈테판 게오르게의 시로 “다른 행성의 공기를 느낀다”고 노래한다. 12월 초연장은 웃음과 야유로 뒤덮였다. (무조) 이후 그는 조성 없이 쓰기 시작했다. 「공중정원의 책」 Op.15, 「관현악을 위한 다섯 개의 소품」 Op.16에 이어, 밤 숲에서 연인의 시체를 발견하는 여인의 독백극 「기대」 Op.17을 1909년 열이레 만에 썼다. 같은 시기 그는 ‘시선’이라 불리는 자화상들을 그렸다. 1911년 칸딘스키가 그의 연주회를 듣고 편지를 보내며 우정이 시작되었고, 그의 그림은 ‘청기사’ 전시에도 걸렸다. (상실) 빚에 시달리는 그를 말러는 남몰래 그림을 사 주며 도왔다고 전해진다. 1911년 5월 말러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장례의 기억을 피아노 소곡집 Op.19의 마지막 곡에 담았고, 그해 낸 『화성학』을 말러에게 바쳤다. 가을에는 다시 베를린으로 옮겨, 1912년 배우 알베르티네 체메의 위촉으로 「달에 홀린 피에로」 Op.21을 썼다. (갈채) 1913년 2월 「구레의 노래」 빈 초연은 생애 최대의 갈채를 받았지만, 그는 청중이 아니라 연주자들에게만 고개를 숙였다고 전해진다. 한 달 뒤 그가 지휘한 연주회는 베르크의 가곡에서 객석의 난투가 벌어져 중단되었다.
가정이 무너질 뻔한 1908년에 완성되어 아내에게 바쳐졌다. 조성의 세계를 떠나는 순간이 한 곡 안에 기록되어 있다.
- 2악장(스케르초) 중간에 빈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오 사랑하는 아우구스틴」의 가락이 비틀린 채 튀어나온다. 원래 가사가 ‘다 끝났다’로 끝난다는 점에서 그해 여름의 위기를 떠올리는 해석이 많다.
- 3악장과 4악장에서는 소프라노가 등장해 슈테판 게오르게의 시를 노래한다. 현악 4중주에 성악을 넣은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파격이었다.
- 4악장 「황홀」은 “다른 행성의 공기를 느낀다”는 구절로 시작한다. 그 앞 현악기의 서주는 중심이 되는 음(으뜸음)이 느껴지지 않아 땅에서 발이 떨어진 듯 들린다.
- 그렇게 떠돌던 음악은 끝에서 올림바장조(F♯장조) 화음에 내려앉는다. 조성을 떠나는 곡이 조성으로 끝맺는 이 대목은 옛 세계에 건네는 작별처럼 들린다.
베를린으로 옮긴 이듬해 카바레 배우의 위촉으로 썼다. 위버브레틀 시절 익힌 카바레의 감각이 무조의 언어와 만났다.
- 알베르 지로의 시 21편을 일곱 편씩 세 부분으로 나눴다. 그는 이 곡을 ‘세 번 일곱 편의 시’라고 불렀다.
- 노래와 말의 중간인 슈프레히슈티메(말하듯 노래하기)로 부른다. 음높이는 악보에 적혀 있지만 그 음을 짚자마자 떠나야 해서 가수마다 해석이 크게 갈린다.
- 다섯 연주자가 플루트와 피콜로, 클라리넷과 베이스클라리넷,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바꿔 들며 연주한다. 이 편성은 훗날 ‘피에로 앙상블’이라 불리며 현대 실내악의 표준 편성이 되었다.
- 8번 「밤」에서는 낮은 악기들이 세 음으로 된 짧은 동기를 끈질기게 되풀이한다. 거대한 검은 나방들이 햇빛을 지워 버린다는 시의 어둠이 그대로 소리가 된다.
- 18번 「달의 얼룩」은 중간부터 음악이 거꾸로 되돌아가는 회문(앞뒤가 대칭인 구조)으로 짜여 있다. 등에 묻은 하얀 얼룩을 털려고 뱅뱅 도는 피에로의 모습과 겹친다.
IV. 침묵 끝의 열두 음 · 1914–1925 (40–51세)
(전쟁)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그는 처음에는 독일어권의 대의를 믿었다. 1915년과 1917년 두 차례 징집되었는데, 장교가 그 악명 높은 쇤베르크냐고 묻자 “누군가는 그래야 했는데 아무도 원하지 않아서 내가 맡았다”고 답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이 무렵 착수한 오라토리오 「야곱의 사다리」는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자유로운 무조 음악을 붙들어 줄 새 질서를 그는 아직 찾지 못하고 있었다. (협회) 1918년 빈 근교 뫼들링에 정착해 ‘사적 음악 연주 협회’를 세웠다. 비평가의 출입을 막고 박수와 야유를 금했으며, 새 작품을 충분히 연습해 여러 번 들려주었다. 프로그램에는 말러, 드뷔시, 레거, 버르토크, 스트라빈스키 등이 고루 올랐고 그 자신의 곡은 오히려 드물었다. 협회는 1921년 인플레이션으로 문을 닫았다. (마트제) 1921년 여름, 잘츠부르크 근교 휴양지 마트제에서 그는 유대인은 머물 수 없다는 통보를 받고 떠나야 했다. 개종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소용없었다. 1923년에는 바우하우스에 반유대 정서가 있다는 말을 듣고 칸딘스키에게 날 선 편지를 보내 관계를 끊었다. 그는 이 무렵부터 자신이 무엇보다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의식하게 되었다. (12음) 같은 시기 그는 옥타브 안의 열두 음을 한 번씩 모두 쓰는 순서(음렬)를 정해 곡 전체를 짜는 방법을 다듬었다. 제자 요제프 루퍼에게 앞으로 백 년 동안 독일 음악의 우위를 보장할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말한 것이 이때다. 「피아노 모음곡」 Op.25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방법으로 쓰였다. 1923년 10월 마틸데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 그는 바이올리니스트 루돌프 콜리슈의 누이로 스물네 살 아래인 게르트루트와 재혼했다.
새 질서를 찾던 침묵의 시기 끝에, 처음부터 끝까지 12음 기법으로 완성한 첫 작품이다.
- 전주곡·가보트·뮈제트·간주곡·미뉴에트·지그로 이뤄져, 바흐 시대 춤곡 모음곡의 틀을 빌렸다. 가장 새로운 방법을 가장 오래된 형식에 담은 셈이다.
- 곡을 이루는 열두 음의 순서(음렬) 가운데 마지막 네 음은 시·도·라·시♭이다. 독일식 음이름으로 바흐(B-A-C-H)를 거꾸로 읽은 것이다.
- 「뮈제트」는 백파이프의 일종인 뮈제트처럼 한 음을 계속 울리는 지속음 위에서 진행된다. 낮은 쪽에서 붙박인 듯 되풀이되는 음을 찾아 들어 보자.
- 춤곡의 리듬이 살아 있어 생각보다 경쾌하다. 글렌 굴드의 날카롭고 튀는 연주와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균형 잡힌 연주가 자주 비교된다.
V. 아카데미에서 망명까지 · 1926–1933 (52–59세)
(아카데미) 1926년 1월, 세상을 떠난 페루초 부소니의 뒤를 이어 베를린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의 작곡 마스터클래스를 맡았다. 보수가 넉넉했고 1년 중 반년만 가르치면 됐다. 니코스 스칼코타스, 로베르토 헤라르드 같은 제자들이 여러 나라에서 모였다. 처음으로 경제적 안정을 누린 이 시기에 그는 「관현악을 위한 변주곡」 Op.31을 썼고, 1928년 푸르트벵글러가 초연했을 때 베를린 청중은 야유로 답했다. (오페라) 아내 게르트루트는 ‘막스 블론다’라는 필명으로 1막 희가극 「오늘에서 내일로」의 대본을 써 주었다. 유행을 좇는 부부를 풍자한 이 작품은 12음 기법으로 쓴 첫 오페라였다. 1930년부터는 「모세와 아론」에 매달렸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을 붙든 모세와, 그 신을 백성이 볼 수 있는 형상으로 전하려는 말 잘하는 형 아론의 대립은, 자기 생각이 대중에게 닿지 않는다고 느낀 작곡가 자신의 고뇌와 겹쳤다. 2막까지 쓰고 3막은 끝내 음악을 붙이지 못했다. 1931년 가을부터 이듬해까지는 천식 요양을 겸해 바르셀로나에 머물렀고, 그곳에서 딸이 태어났다. (추방) 1933년 3월, 나치 집권 직후 아카데미 원장 막스 폰 실링스가 회의에서 유대인의 영향력을 없애겠다고 선언하자 쇤베르크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5월 가족과 함께 파리로 떠났고, 7월 파리의 한 회당에서 유대교로 돌아갔다. 증인 가운데 한 사람은 화가 마르크 샤갈이었다. 10월, 그는 보스턴의 작은 음악원 자리를 얻어 대서양을 건넜다.
베를린 아카데미에서 안정을 얻은 시기의 대작으로, 12음 기법으로 쓴 첫 대편성 관현악곡이다. 바흐의 이름을 곳곳에 새겼다.
- 도입부, 주제, 아홉 개의 변주, 피날레로 이뤄진다. 주제는 도입부가 끝난 뒤 첼로가 조용히 처음 들려준다.
- 도입부에서 트롬본이 시♭-라-도-시, 곧 바흐(B-A-C-H) 음형을 처음 내놓는다. 이 음형은 피날레에서 훨씬 뚜렷하게 돌아온다.
- 변주마다 악기 편성이 크게 바뀐다. 몇몇 독주 악기가 실내악처럼 대화하는 변주와 관현악 전체가 몰아치는 변주의 대비를 따라가 보자.
- 1928년 베를린 초연은 큰 소란을 불렀다. 쇤베르크는 몇 년 뒤 라디오 강연에서 이 곡을 직접 해설하며 청중을 설득하려 했다.
VI. 브렌트우드의 망명자 · 1934–1944 (60–70세)
(서부) 보스턴의 첫 겨울에 건강이 나빠진 그는 1934년 따뜻한 로스앤젤레스로 옮겼다. 1935년 남캘리포니아 대학교(USC), 이듬해 UCLA 교수가 되었고 브렌트우드에 집을 마련했다. 미국에서 두 아들이 더 태어나 집은 세 아이로 북적였다. 그는 테니스를 즐겼는데 조지 거슈윈이 자주 함께 친 상대였고, 거슈윈은 그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1941년 미국 시민이 되었다. (교실) 그는 서툰 영어로 가르치며 미국 학생들에게 화성과 대위법의 기초부터 다지게 했다. 존 케이지도 그의 제자였다. 케이지가 화성 감각이 없다고 하자 그는 그러면 늘 벽에 부딪힐 것이라 했고, 케이지는 평생 그 벽에 머리를 부딪히겠다고 답했다고 훗날 회고했다. 학생들을 위해 조성 음악인 「현악 합주를 위한 모음곡」을 쓰기도 했다. (분노) 이 시기의 중요한 작품은 베베른에게 헌정한 「바이올린 협주곡」 Op.36과 현악 4중주 4번 Op.37이었다. 유대교 속죄일 기도에 붙인 「콜 니드레」 Op.39, 바이런의 시로 폭군의 몰락을 노래해 히틀러를 겨냥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바치는 송가」 Op.41에는 유럽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대한 분노와 신앙이 담겼다. 1937년에는 브람스의 피아노 4중주 1번을 관현악으로 편곡했는데, 그는 브람스를 보수주의자가 아니라 ‘진보주의자’로 본 강연과 글을 남긴 사람이었다. (퇴직) 1944년 일흔 살이 되자 UCLA 규정에 따라 물러나야 했다. 재직 기간이 8년뿐이라 연금은 한 달 30달러 남짓이었고, 아이들은 아직 어렸다. 이듬해 미완성 작품을 마칠 수 있도록 구겐하임 재단에 지원을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는 개인 교습으로 생계를 이었다.
망명지 캘리포니아에서 완성해 빈의 제자 베베른에게 바쳤다. 멀어진 유럽과의 끈이 이 헌정에 남아 있다.
- 독주자에게 극도로 어려운 곡이다. 쇤베르크는 ‘연주 불가능한’ 작품을 하나 더 보태게 되어 기쁘며 새끼손가락이 길어질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 1악장 첫머리에서 독주 바이올린이 짧게 끊는 음과 길게 끄는 음을 섞어 주제를 내놓는다. 12음 기법이지만 선율의 흐름을 따라가면 낭만 협주곡처럼 노래하는 대목이 많다.
- 2악장은 ‘우아한 안단테(Andante grazioso)’라는 지시대로 부드럽고, 3악장은 행진곡풍 리듬이 몰아치다가 긴 카덴차(독주자 홀로 기량을 펼치는 부분)로 이어진다.
- 1940년 베르크의 협주곡도 초연했던 루이스 크래스너가 스토코프스키 지휘로 초연했다. 오늘날에는 힐러리 한의 녹음(2008)이 이 곡을 다시 알린 연주로 자주 꼽힌다.
VII. 열세 번째 날 · 1945–1951 (71–77세)
(상실) 1945년 9월, 전쟁이 끝난 오스트리아에서 베베른이 미군 병사의 오인 사격으로 숨졌다. 베르크는 이미 1935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빈 시절의 두 제자를 모두 잃은 셈이었다. 1949년 빈시는 그에게 명예시민권을 주었지만 그는 끝내 돌아가지 않았다. (심장) 1946년 8월 심한 심장 발작으로 맥박이 멎었다가 심장에 직접 놓은 주사로 되살아났다. 회복 직후 하버드 대학교의 위촉으로 쓴 「현악 3중주」 Op.45에 대해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병과 치료 과정을 담았다고 말했다. 끊기고 뒤엉키는 음형 사이로 빈의 왈츠 같은 선율이 잠깐씩 비친다. (증언) 1947년 쿠세비츠키 재단의 위촉으로 「바르샤바의 생존자」 Op.46을 썼다. 게토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대본도 직접 썼다. 같은 해 토마스 만의 소설 『파우스트 박사』가 주인공에게 12음 기법을 창안하게 한 것을 알고 강하게 항의했고, 만은 이후 판본 끝에 그 기법이 쇤베르크의 것임을 밝히는 주석을 덧붙였다. (13) 그는 13이라는 숫자를 평생 두려워했다. 13일에 태어난 사실을 의식했고, 1950년 일흔여섯 살이 되자 7과 6을 더하면 13이라는 지적에 더욱 불안해했다고 전해진다. 1951년 7월 13일 금요일, 그는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자정을 몇 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아내 게르트루트는 그의 마지막 말이 ‘하모니’였다고 전했다. 유해는 1974년 빈 중앙묘지로 옮겨졌다.
심장이 멎었다 살아난 이듬해, 학살의 소식 앞에서 7분 남짓한 증언의 음악을 썼다. 망명 이후의 신앙과 분노가 가장 짧고 강하게 응축되었다.
- 트럼펫의 날카로운 기상나팔 같은 신호로 시작한다. 내레이터는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다’는 말로 증언을 연다.
- 내레이션은 영어지만 독일군 상사의 명령은 독일어로 외치고, 마지막 기도는 히브리어다. 세 언어가 뒤섞이는 것 자체가 상황의 폭력을 드러낸다.
- 상사가 쓰러진 사람의 수를 세라고 명령하자 숫자를 외치는 소리가 점점 빨라진다. 대본은 그것이 ‘야생마 떼가 날뛰는 소리처럼’ 들렸다고 말하고, 관현악도 그만큼 몰아친다.
- 그 한가운데서 남성 합창이 히브리어 기도 「셰마 이스라엘(들어라, 이스라엘아)」을 부르며 곡이 끝난다. 1948년 앨버커키 초연에서는 청중의 요청으로 곧바로 한 번 더 연주되었다.
덜 알려진 이야기
(슈트라우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젊은 쇤베르크의 후원자로 기억되지만 관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1913년 말러 재단의 지원금 문제로 알마 말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슈트라우스는, 가엾은 쇤베르크를 도울 수 있는 건 이제 정신과 의사뿐이고 오선지에 끄적이느니 눈을 치우는 편이 낫겠다고 썼다. 알마를 통해 이 말을 전해 들은 쇤베르크는 이후 슈트라우스와 거리를 두었다. 베를린 시절의 도움이 널리 알려진 것과 달리, 이 대목은 주로 편지 기록과 알마 주변의 증언으로만 남아 있다. (할리우드) 1935년 작가 잘카 피어텔의 주선으로 MGM의 제작자 어빙 솔버그를 만나 영화 「대지」의 음악을 제안받은 일이 있다. 그는 5만 달러와 함께, 배우들의 대사 높낮이까지 자신이 정하게 해 달라는 조건을 내걸었고 계약은 성사되지 않았다. 유럽에서 건너온 음악가들이 할리우드 영화음악으로 생계를 잇던 시절이었지만 그는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이 일화는 피어텔의 회고록에 남아 있다. (발명) 그는 손재주 좋은 발명가이기도 했다. 1909년에는 악보용 타자기를 구상해 특허를 신청했고, 1920년대에는 네 사람이 두 편으로 나뉘어 겨루는 ‘연합 체스’를 고안해 말을 직접 만들었다. 오선을 긋는 도구, 손수 제본한 책, 직접 그린 카드도 남아 있다. 이런 물건들은 오랫동안 남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쇤베르크 연구소에 있다가 1998년 빈의 아르놀트 쇤베르크 센터로 옮겨진 뒤에야 널리 소개되었다.
용어 노트 📚🔎
조성
(말뜻) 조성(調性)은 ‘조(調)’의 성질(性)이라는 뜻이다. 조는 곡의 중심이 되는 음과 그 주변 음들이 이루는 질서를 말한다. (음악에서) 한 음을 중심(으뜸음)으로 삼고 나머지 음들이 그 음을 향해 끌려가도록 짜인 체계다. 다장조 곡은 마지막에 ‘도’로 돌아오면 끝났다는 느낌을 준다. 노래방에서 노래 마지막 음이 집에 돌아온 듯 편안하게 들리는 것이 바로 조성 덕분이다. 쇤베르크는 바로 이 중심을 없애는 쪽으로 나아갔다.
반음계
(말뜻) 반음계(半音階)는 반음(半音)씩 오르내리는 음의 사다리(階)라는 뜻이다. (음악에서) 피아노의 흰 건반과 검은 건반을 하나도 건너뛰지 않고 차례로 누르면 한 옥타브에 열두 음이 나온다. 이 열두 음을 모두 쓰는 것이 반음계다. 계단을 한 칸도 빼먹지 않고 밟아 올라가는 것과 같다. 바그너 이후 반음계가 많이 쓰이면서 조성의 중심이 점점 흐려졌고, 쇤베르크는 그 끝까지 갔다.
무조
(말뜻) 무조(無調)는 조가 없다는 뜻이다. (음악에서) 으뜸음이 없어 어느 음으로도 ‘돌아갈 집’이 정해져 있지 않은 음악이다. 긴장된 화음(불협화음)이 나와도 편안한 화음으로 풀리지 않은 채 다음으로 넘어간다. 술래 없이 모두가 똑같은 자격으로 뛰어다니는 놀이를 떠올리면 된다. 정작 쇤베르크는 무조라는 말을 싫어해 차라리 모든 조를 품는다는 뜻의 ‘범조성’이라 부르자고 했다.
12음 기법
(음악에서) 한 옥타브의 열두 음을 한 번씩 모두 쓰는 순서(음렬)를 미리 정하고, 그 순서와 그것을 거꾸로 하거나 위아래로 뒤집은 형태로 곡 전체를 짜는 방법이다. 어느 한 음이 중심이 되지 않도록 열두 음에게 똑같은 권리를 준다. 반 친구 열두 명이 발표 순서를 정해 한 바퀴를 다 돌기 전에는 누구도 두 번 나서지 못하는 규칙과 비슷하다. 1920년대 초 쇤베르크가 체계화했고, 베르크와 베베른을 거쳐 20세기 음악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음렬
(말뜻) 음렬(音列)은 음(音)을 한 줄로 늘어세운 것(列)이다. 영어로는 톤 로(tone row) 또는 시리즈(series)라고 한다. (음악에서) 12음 기법에서 곡의 재료가 되는 열두 음의 순서다. 처음 정한 원형 말고도 뒤에서부터 읽는 역행, 위아래를 뒤집는 전위, 둘을 합친 역행 전위를 쓰고, 이를 다른 높이로 옮길 수도 있다. 휴대전화 비밀번호를 거꾸로 누르거나, 숫자 사이의 간격을 반대 방향으로 바꿔 누르는 변형을 상상하면 된다. (다른 데서는) 시리즈는 흔히 텔레비전 연속극이나 책의 연작을 가리키는 말로 쓴다.
슈프레히슈티메
(말뜻) 독일어 Sprechstimme는 말하다(sprechen)와 목소리(Stimme)를 합친 말로, ‘말하는 목소리’라는 뜻이다. (음악에서) 노래와 말의 중간쯤 되는 발성이다. 악보에 음높이와 리듬이 적혀 있지만, 가수는 그 음을 길게 끌지 않고 짚자마자 말처럼 미끄러져 오르내린다. 동생에게 동화책을 실감 나게 읽어 줄 때 목소리가 노래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과 비슷하다. 「달에 홀린 피에로」에서 본격적으로 쓰였고, 어느 정도까지 노래에 가깝게 할지는 지금도 가수마다 다르다.
카논
(말뜻) 카논(canon)은 그리스어로 ‘규칙’ 또는 ‘자’라는 뜻이다. 한 성부가 엄격한 규칙에 따라 다른 성부를 따라 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음악에서) 한 성부가 선율을 시작하면 다른 성부가 조금 늦게 같은 선율을 그대로 따라 부르는 방식이다. 돌림노래에서 뒷사람이 앞사람의 가락을 몇 박 늦게 따라 부르는 것이 바로 카논이다. 쇤베르크는 따라 부르는 쪽이 선율을 뒤집거나 거꾸로 부르는 복잡한 카논을 즐겨 썼다. (다른 데서는) 영어 canon은 종교에서 공인된 경전(정경)을 뜻하고, 소설·영화 팬들 사이에서는 ‘공식 설정’을 가리키는 말로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