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chard Strauss
“죽는다는 것은 내가 〈죽음과 변용〉에 쓴 그대로더군.”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곁의 사람들 ⏳🌊
- 가족프란츠 슈트라우스
뮌헨 궁정 악단의 수석 호른 주자인 아버지로, 고전주의 취향과 엄격한 음악 기초를 물려주었다.
- 스승한스 폰 뷜로
스무 살의 그를 발탁해 마이닝겐 궁정 악단을 맡기며 지휘자로 키워 냈다.
- 영향알렉산더 리터
바그너와 리스트의 길로 이끌어 고전주의자였던 그를 교향시 작곡가로 돌려세웠다.
- 가족파울리네 데 아나
소프라노이자 55년을 함께한 아내로, 그의 가곡과 오페라 속 여인들의 원형이 되었다.
- 경쟁구스타프 말러
동시대 최고의 지휘자이자 작곡가로, 기질은 달랐지만 서로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며 재능을 인정했다.
- 우정후고 폰 호프만슈탈
〈엘렉트라〉부터 〈아라벨라〉까지 20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함께 오페라를 빚은 대본가였다.
I. 호른 주자의 아들 · 1864–1884 (0–20세)
(출생) 1864년 6월 11일, 바이에른 왕국(오늘날 독일)의 뮌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뮌헨 궁정 관현악단의 수석 호른 주자였고, 어머니 요제피네는 뮌헨의 이름난 맥주 양조 가문인 프쇼르 집안의 딸이었다. 세 살 아래 누이 요한나와는 평생 가깝게 지냈다. 외가의 넉넉함 덕분에 가정은 안정되어 있었으나, 어머니는 훗날 신경 쇠약으로 여러 차례 요양 시설에 머물렀다. (아버지) 아버지는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떠받들고 바그너를 몹시 싫어했다. 그러면서도 궁정 악단의 수석으로서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초연에서 호른을 불었고, 연습장에서 바그너와 정면으로 부딪치기도 했다. 아들은 이 엄격한 고전주의 취향 속에서 자랐다. 여섯 살 무렵 첫 작품을 썼고, 궁정 악단의 지휘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마이어에게 화성과 대위법을 체계적으로 배웠다. (조숙) 열여섯 살에 쓴 교향곡 d단조는 1881년 궁정 지휘자 헤르만 레비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김나지움을 마친 뒤 뮌헨 대학에 잠시 적을 두었지만 곧 음악에 전념했다. 이 무렵의 그는 스스로를 브람스의 숭배자로 여길 만큼 고전적 형식에 충실했고, 아버지가 금기로 여긴 바그너에게는 아직 마음을 열지 않았다. (뷜로) 1883년 겨울 베를린에 머물며 연주회장과 사교계를 드나들던 그는 당대 최고의 지휘자 한스 폰 뷜로의 눈에 들었다. 뷜로는 그의 관악 세레나데 작품 7을 자신의 마이닝겐 궁정 악단 레퍼토리에 넣었고, 이어 관악 모음곡을 위촉했다. 1884년 11월 뮌헨에서 그는 리허설도 없이 이 모음곡을 지휘하며 지휘자로 첫발을 디뎠다. 작곡가이자 지휘자라는 평생의 두 길이 이때 함께 열렸다.
II. 미래의 음악 · 1885–1894 (21–30세)
(마이닝겐) 1885년 가을 뷜로의 부름으로 마이닝겐 궁정 악단의 부지휘자가 되었다. 이곳에서 브람스가 교향곡 4번 초연을 준비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았고, 브람스는 그의 교향곡 f단조를 듣고 ‘꽤 예쁘다’고 짧게 평했다고 전해진다. 그해 말 뷜로가 떠나자 스물한 살의 나이로 악단을 홀로 맡았다. (리터) 결정적인 만남은 악단의 바이올린 주자 알렉산더 리터였다. 바그너의 조카딸과 결혼한 그는 젊은 슈트라우스에게 바그너의 논문과 쇼펜하우어를 읽히고, 리스트가 연 교향시의 길을 가라고 설득했다. 아버지의 가르침과 정반대 방향이었다. 1886년 이탈리아 여행의 인상을 담은 〈이탈리아에서〉가 그 전환의 첫걸음이었다. (바이마르) 뮌헨 궁정 오페라의 제3지휘자로 3년을 보낸 뒤, 1889년 리스트가 활동하던 도시 바이마르의 궁정 악장이 되었다. 그해 11월 초연한 〈돈 후안〉으로 단숨에 이름을 알렸고, 이듬해 〈죽음과 변용〉을 내놓았다. 글루크의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아〉를 독일 무대에 맞게 손질했고, 1893년에는 훔퍼딩크의 〈헨젤과 그레텔〉 초연을 지휘했다. 1891년 폐렴으로 생사를 오갔고, 요양을 겸한 그리스·이집트 여행 중 첫 오페라 〈군트람〉을 썼다. (파울리네) 성악 제자였던 장군의 딸 파울리네 데 아나가 그의 무대에서 주역을 맡으며 가까워졌다. 1894년 5월 〈군트람〉 초연은 실패했지만, 여주인공을 부른 파울리네와는 그 직후 약혼했다. 리허설 중 그녀가 악보를 내던지고 분장실로 들어가자 따라 들어가 청혼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두 사람은 9월 10일 결혼했고, 그는 가곡집 작품 27의 네 곡을 결혼 선물로 바쳤다. 한편 주인공이 공동체의 규율을 버리는 〈군트람〉의 결말 때문에 리터와는 사상적으로 멀어졌다.
리터의 설득으로 교향시의 길에 들어선 스물다섯 살의 그가 바이마르에서 초연해 단숨에 이름을 알린 곡이다. 시인 레나우의 시를 따라, 끝없이 이상의 여인을 좇다 지쳐 스러지는 사내를 그렸다.
- 첫머리에서 현악기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단숨에 치솟는(상행) 선율은 정력적인 주인공의 등장을 알린다. 빠르고 정확하게 맞추기 어려워 오케스트라 바이올린 입단 시험의 단골 과제로 악명이 높다.
- 중간의 사랑 장면에서 오보에가 길고 느리게 부르는 선율에 귀 기울여 보자. 곡 전체에서 가장 깊고 고요한 사랑의 순간으로 여겨진다.
- 그 뒤 호른 네 대가 한 목소리로 함께 부르는(유니즌) 당당한 주제가 터져 나온다. 슈트라우스의 호른 선율 가운데 가장 유명한 대목으로, 호른 주자였던 아버지의 악기가 주인공의 목소리가 된다.
- 끝부분은 절정에서 오케스트라가 갑자기 멈춘 뒤(총휴지) 트럼펫의 날카로운 불협화음이 꽂히고, 현악기가 가늘게 떨다 사그라진다. 레나우의 시에서 돈 후안이 결투에서 스스로 칼을 내려놓고 죽는 장면에 해당한다.
파울리네와 결혼하며 선물로 바친 가곡집의 마지막 곡이다. 내일도 해는 다시 빛나리라는 존 헨리 매케이의 시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고요한 앞날을 그렸다.
- 노래가 시작되기 전 피아노가 선율을 거의 끝까지 먼저 들려주고, 목소리는 그 선율이 흐르는 도중에 슬며시 끼어들듯 들어온다. 노래가 주인공이 아니라 이미 흐르던 시간 속에 합류하는 느낌을 준다.
- 가수는 큰 소리 없이 아주 느리게, 거의 말하듯 부른다. 극적인 고음이 없어 오히려 숨 조절과 음색만으로 버텨야 하는 곡으로 성악가들 사이에서 꼽힌다.
- 마지막 ‘침묵’이라는 낱말에서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고, 피아노의 뒷마무리(후주)가 여운을 길게 남긴다.
- 1897년 그가 직접 만든 관현악판에서는 피아노 대신 독주 바이올린이 앞부분 선율을 맡는다. 피아노판과 비교해 들으면 같은 곡이 얼마나 다른 빛을 띠는지 알 수 있다.
III. 교향시의 시대 · 1894–1898 (30–34세)
(귀향) 결혼한 해 가을 고향 뮌헨의 궁정 지휘자로 돌아갔다. 모차르트 오페라를 아껴 레지덴츠 극장에서 〈코지 판 투테〉 등을 정성껏 되살렸다. 1895년에는 실패작 〈군트람〉의 악보를 여든한 살의 베르디에게 보냈고, 베르디는 정중한 답장을 보내왔다. 1897년 4월 외아들 프란츠가 태어났다. (부부) 파울리네는 오랫동안 남편의 피아노 반주로 가곡 무대에 섰다. 성미가 급하고 말이 직설적이어서 손님들을 당황시키는 일이 잦았다는 증언이 여럿 남아 있지만, 슈트라우스는 그녀가 곁에 있어야 일이 된다고 여겼다. 그 자신은 카드놀이 스카트를 즐기는 사교적인 바이에른 사람이면서, 책상 앞에서는 정해진 시간에 꾸준히 써 나가는 성실한 일꾼이었다. (교향시) 4년 남짓한 사이 대표 교향시가 잇따라 나왔다. 민담 속 장난꾸러기를 그린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1895), 니체의 책에서 제목을 빌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96), 세르반테스의 기사를 독주 첼로로 그린 〈돈키호테〉(1897), 그리고 〈영웅의 생애〉(1898)다. 이 무렵 그는 교회 신앙과 거리를 두고 니체를 탐독했다. (자화상) 〈영웅의 생애〉의 영웅은 작곡가 자신에 가까웠다. 비평가들은 목관악기의 날카롭게 깎아지르는 소리로 조롱당하고, 영웅의 반려자는 변덕스러우면서 다정한 독주 바이올린으로 그려지는데 흔히 파울리네의 초상으로 받아들여진다. 끝부분 ‘평화의 업적’에서는 〈돈 후안〉 등 자기 작품을 줄줄이 인용했다. 같은 해 그는 베를린으로 자리를 옮겼다.
〈군트람〉의 실패 뒤 고향 뮌헨으로 돌아와 쓴 곡으로, 권위를 비웃다 결국 교수대에 오르는 민담의 장난꾸러기를 그렸다. 무거운 철학에서 벗어난 그의 익살과 재치가 가장 잘 드러난다.
- 첫머리에서 현악기가 ‘옛날 옛적에’ 하듯 부드럽게 이야기를 열면, 곧이어 호른이 박자를 비틀어 넘어지듯 굴러가는 틸의 주제를 분다. 호른 주자 오디션의 단골 과제로 유명한 대목이다.
- 높고 작은 D조 클라리넷이 끽끽거리며 내지르는 짧은 음형은 사람들을 놀려 먹는 틸의 웃음소리처럼 들린다.
- 곡 중간에는 장터에서 말을 몰아 그릇을 깨뜨리고, 성직자로 변장하고, 학자들을 조롱하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작곡가가 남긴 메모에 장면들이 적혀 있어 어떤 소동인지 짐작하며 들을 수 있다.
- 재판 장면에서 작은북의 연타와 금관악기의 무거운 판결 화음이 울린 뒤, 클라리넷이 높은 음에서 뚝 떨어지는 음형으로 교수형을 그린다. 그 뒤 첫머리의 ‘옛날 옛적에’가 돌아와 이야기를 닫는다.
니체를 탐독하던 시기에 그의 책 제목을 빌려 쓴 교향시다. 철학을 음악으로 옮긴다기보다 인류가 원시에서 종교와 학문을 거쳐 자유로운 정신에 이르는 길을 그렸다고 그는 설명했다.
- 도입 ‘해돋이’에서는 오르간과 콘트라베이스가 아주 낮은 ‘도’를 길게 깔고, 그 위로 트럼펫이 ‘도-솔-도’ 세 음으로 솟아오르며, 팀파니가 둥둥 응답한다.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에 쓰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도입부가 되었다.
- ‘학문에 대하여’에서는 콘트라베이스와 첼로가 낮고 어둡게 주제를 내놓고 다른 악기들이 차례로 뒤쫓는 푸가가 시작된다. 이 주제는 한 옥타브 안의 열두 음을 모두 쓰는데, 메마르고 복잡한 학문을 상징한다고 풀이된다.
- ‘춤의 노래’에서는 독주 바이올린이 앞장서 경쾌한 왈츠를 이끈다. 무거운 사색 뒤에 찾아오는 가벼움을 느껴 보자.
- 마지막에는 높은 목관악기의 밝은 ‘시’ 화음과 낮은 현악기의 ‘도’ 음이 번갈아 울리며, 서로 어울리지 않은 채 끝난다. 인간과 자연의 대립이 풀리지 않는다는 해석이 널리 퍼져 있다.
IV. 베를린의 무대 · 1898–1918 (34–54세)
(베를린) 1898년 프로이센 궁정 오페라의 지휘자로 베를린에 자리 잡았고, 1908년 음악총감독이 되었다. 그는 작곡가의 권리에 예민했다. 1903년 동료들과 독일 작곡가 협회를 세워 곡이 연주될 때마다 작곡가가 사용료를 받는 제도를 만드는 데 앞장섰다. 1905년에는 베를리오즈의 관현악법 교본을 개정·증보해 펴냈다. 같은 해 아버지를, 1910년 어머니를 잃었다. (가정) 1903년 〈가정 교향곡〉에는 남편과 아내와 아기가 등장하고, 아기의 목욕과 부부의 말다툼까지 담겼다. 이듬해 미국 순회에서 이 곡을 초연했는데, 뉴욕의 백화점 안에서 연주회를 열어 품위를 떨어뜨렸다는 비난도 받았다. 그는 돈 이야기에 거리낌이 없었고, 그 솔직함이 동시대인들에게 자주 오해를 샀다. (살로메) 1905년 드레스덴에서 초연된 오스카 와일드 원작의 〈살로메〉는 추문과 대성공을 함께 거두었다. 황제가 이 곡이 그에게 해가 될 것이라 했다는 말을 듣고, 그 ‘해’로 가르미슈의 집을 지었다고 응수했다고 한다. 1908년 알프스 기슭에 완공된 그 집은 평생의 거처가 되었다. 네 살 위의 구스타프 말러는 〈살로메〉를 빈 궁정 오페라에 올리려다 검열에 막혔고, 슈트라우스는 앞서 1902년 독일음악협회 회장으로서 말러 교향곡 3번의 전곡 초연 무대를 열어 주었다. (호프만슈탈) 1909년 〈엘렉트라〉에서 시인 후고 폰 호프만슈탈과의 협업이 시작되었다. 거친 불협화음의 끝까지 간 뒤 두 사람은 1911년 〈장미의 기사〉에서 모차르트 시대를 떠올리는 빈의 희극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어 〈낙소스의 아리아드네〉와 〈알프스 교향곡〉(1915)이 나왔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런던에 맡겨 둔 저축을 적국 재산으로 몰수당해 오랜 벌이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
베를린 시절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을 거의 그대로 대본으로 삼은 단막 오페라로, 추문과 흥행을 함께 몰고 왔다. 이 성공으로 그는 가르미슈의 집을 짓고 평생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 ‘일곱 베일의 춤’은 동방풍 선율로 느리게 시작해 점점 빨라지고 거세지는 관현악 춤곡이다. 오페라 밖 연주회에서도 단독으로 자주 연주된다.
- 지하 감옥에서 요카난이 처형되는 순간, 콘트라베이스가 높은 음을 손가락으로 꽉 집어 활로 짧게 긁는 기묘한 소리를 낸다. 작곡가가 악보에 직접 지시한 효과로, 숨 막힌 신음처럼 들린다.
- 마지막 장면에서 살로메가 잘린 머리에 입을 맞추는 대목에는 귀를 찌르는 불협화음이 울린다. 오페라 역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화음 가운데 하나로 회자된다.
- 슈트라우스는 이 역에 ‘이졸데의 목소리를 지닌 열여섯 살 공주’가 필요하다고 했다고 전해진다. 거대한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가면서도 소녀처럼 들려야 해서, 가수마다 해석이 크게 갈리는 역이다.
〈엘렉트라〉의 격렬함 뒤에 호프만슈탈과 함께 모차르트를 떠올리며 쓴 빈의 희극이다. 젊은 연인에게 사랑을 양보하는 원수 부인의 체념은 작곡가 생애 마지막 날 장례식에서도 울렸다.
- 서곡에서는 호른이 위로 힘차게 솟구치는 음형으로 시작해, 막이 오르기 전 원수 부인과 젊은 옥타비안의 밤을 그린다. 호른 주자들에게 대담함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 2막 ‘은장미의 전달’에서 플루트·첼레스타(종소리 같은 건반 악기)·하프·독주 바이올린이 높은 곳에서 반짝이는 화음을 울린다. 옥타비안과 조피가 처음 눈을 마주치는 순간으로, 시간이 멈춘 듯한 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
- 허풍쟁이 옥스 남작의 왈츠는 18세기 빈이 배경인데 19세기 빈 왈츠 풍으로 쓰였다. 일부러 시대를 어긋나게 한 이 선택이 작품 특유의 향수 어린 분위기를 만든다.
- 3막 삼중창 ‘나는 맹세했지’에서는 세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서로 다른 마음을 품은 채 하나로 겹쳐 오른다. 원수 부인의 체념과 젊은 연인의 설렘이 함께 들리는 이 대목은 슈트라우스의 장례식에서 연주되었다.
V. 빈과 잘츠부르크 · 1919–1932 (55–68세)
(빈) 제국이 무너진 1919년 빈 국립 오페라의 공동 감독이 되었다. 그해 가을 호프만슈탈과의 대작 〈그림자 없는 여인〉이 이곳에서 초연되었다. 그러나 공동 감독 프란츠 샬크와의 갈등, 예산과 그의 높은 보수를 둘러싼 불만 끝에 1924년 자리를 내놓았다. 1920년에는 호프만슈탈, 연출가 막스 라인하르트와 함께 잘츠부르크 축제를 세우는 데 참여했고, 모차르트를 축제의 중심에 두었다. (인터메조) 1924년 오페라 〈인터메조〉는 부부 생활을 거의 그대로 옮겼다. 1902년 다른 지휘자에게 가야 할 여성의 편지가 잘못 배달되자 파울리네가 남편을 의심해 이혼을 요구했던 소동이 줄거리의 뼈대다. 그는 대본도 직접 썼다. 아내를 우스꽝스럽게 그린 듯하면서도 끝내 부부의 화해로 맺는 이 작품에는 그가 결혼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가 담겨 있다. (며느리) 같은 해 아들 프란츠는 프라하의 유대계 실업가 집안 딸 알리체 폰 그라프와 결혼했다. 슈트라우스는 가르미슈의 집을 아들 내외와 함께 쓰며 손자 둘을 보았다. 알리체는 이후 시아버지의 비서이자 기록 관리자 역할을 맡았다. 이 결혼은 10년 뒤 그의 처지를 크게 흔들어 놓게 된다. (이별) 1929년 7월, 호프만슈탈은 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이틀 뒤 장례식에 나서려다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슈트라우스는 그가 마지막으로 보낸 〈아라벨라〉 1막 대본을 한 글자도 고치지 않고 곡을 붙였다. 20년 동안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는 작품을 함께 다듬어 간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기록으로 남았다.
VI. 어두운 시대 · 1933–1945 (69–81세)
(총재) 1933년 나치가 집권하자 일흔을 앞둔 그는 제국음악원 총재를 맡았다. 같은 해 정권의 압박으로 물러난 브루노 발터 대신 베를린 무대에 섰고, 토스카니니가 거부한 바이로이트의 〈파르지팔〉을 지휘했다. 그는 작곡가의 권익과 저작권 보호 기간 연장을 위해 자리를 이용하려 했다고 훗날 말했지만, 이 선택은 그의 이름에 오래 그림자를 드리웠다. (츠바이크) 호프만슈탈의 뒤를 이을 대본가로 유대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를 택했다. 1935년 〈말 없는 여인〉 초연 때 포스터에서 츠바이크의 이름이 빠지자 다시 넣으라고 고집했다. 직후 츠바이크에게 총재 노릇을 시늉만 할 뿐이라고 쓴 편지가 게슈타포에 가로채졌고, 그는 총재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가족) 이후 그의 처신은 가족을 지키는 일과 떼어 볼 수 없다. 며느리 알리체와 손자들은 나치의 기준으로 유대인이었고, 손자들은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했다. 1942년 그는 가족과 함께 빈으로 옮겨 그곳 고위 관리의 보호를 구했다. 알리체의 할머니를 비롯한 친척 여럿이 수용소에서 숨졌고, 그가 테레지엔슈타트 수용소 앞까지 찾아가 석방을 청했다는 이야기가 가족의 증언으로 전해진다. (폐허) 1942년 뮌헨에서 마지막 오페라 〈카프리치오〉가 초연되었다. 이듬해 뮌헨 국립극장이, 1945년 2월에는 드레스덴이, 3월에는 빈 국립 오페라가 폭격으로 무너졌다. 평생의 무대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 그는 삶의 바탕이 끝났다는 심경을 편지에 적었다. 그해 4월 12일, 23대의 현악기를 위한 〈메타모르포젠〉을 완성했고, 그 끝에 베토벤 〈영웅〉 교향곡의 장송 행진곡을 인용했다.
평생의 무대였던 뮌헨·드레스덴·빈의 오페라 극장이 폭격으로 무너진 뒤 완성한 애도의 음악이다. 독일 문화가 무너지는 것을 지켜본 노작곡가의 슬픔이 끝에 베토벤의 장송 행진곡으로 모인다.
- 바이올린 열, 비올라 다섯, 첼로 다섯, 콘트라베이스 셋, 모두 스물세 명이 각자 다른 성부를 맡는다. 합주처럼 들리다가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선이 따로 떠오르는 순간에 귀 기울여 보자.
- 첫머리에서 첼로와 비올라가 낮고 어둡게 화음을 깔며 천천히 아래로 가라앉는 선율을 시작한다. 이 짧은 머리 선율이 곡 내내 모양을 바꾸며(변형) 되풀이된다.
- 끝부분에서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 2악장 장송 행진곡의 주제를 낮게 들려준다. 슈트라우스는 그 자리에 ‘IN MEMORIAM!’(추모하며)이라고 적었다.
- 그 인용이 나오고 나면, 처음부터 들려온 머리 선율이 이 장송 행진곡과 닮아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때문에 곡 전체가 이 순간을 향해 걸어온 것처럼 들린다.
VII. 마지막 노래 · 1945–1949 (81–85세)
(종전) 1945년 4월 말 미군이 가르미슈에 들어오자 그는 문 앞에 나가 자신이 〈장미의 기사〉와 〈살로메〉의 작곡가라고 밝혔다고 한다. 집을 찾은 병사 가운데 피츠버그 교향악단의 오보에 주자였던 존 드 랜시가 오보에 협주곡을 써 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는 거절했지만 그해 협주곡을 완성했다. (스위스) 그해 10월 부부는 스위스로 건너가 바덴과 몽트뢰 등지의 호텔에서 지냈다. 독일에서의 수입이 묶여 형편은 넉넉지 않았고, 자필 악보를 팔아 생활비를 마련하기도 했다. 1947년에는 지휘자 토머스 비첨이 마련한 런던의 슈트라우스 축제에 여든세 살의 나이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직접 지휘대에 섰다. 1948년 6월 뮌헨의 비나치화 심판소는 그에게 혐의 없음을 결정했다. (노을) 1948년 그는 헤르만 헤세의 시 세 편과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의 시 한 편에 관현악 반주의 노래를 붙였다. 늙은 부부가 저녁노을 속을 함께 걷는 〈저녁노을에〉는 그해 5월 완성되었다. 1949년 5월 가르미슈로 돌아왔고, 6월 여든다섯 번째 생일을 여러 도시의 축하 속에 맞았다. 그해 여름 뮌헨에서 마지막으로 지휘봉을 들었다. (죽음) 1949년 9월 8일 가르미슈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임종이 가까웠을 때 며느리에게 죽는다는 것이 〈죽음과 변용〉에 쓴 그대로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뮌헨의 장례식에서는 게오르크 솔티의 지휘로 〈장미의 기사〉 3막의 삼중창이 연주되었다. 반세기 넘게 곁을 지킨 파울리네는 이듬해 5월 남편을 따라갔다.
스위스에 머물던 여든넷의 그가 헤세와 아이헨도르프의 시에 붙인 소프라노와 관현악의 노래다. 반세기 넘게 함께한 파울리네와 걸어온 길, 그리고 다가오는 죽음을 담담히 바라본 작별 인사로 들린다.
- ‘봄’에서 소프라노는 높은 음역에서 길게 휘감기는 선율을 부른다. 숨이 긴 노래로, 가수의 음색과 호흡 조절을 비교해 듣는 재미가 크다.
- ‘9월’의 끝에서는 호른이 홀로 여름의 작별 인사를 건넨다. 호른 주자였던 아버지의 악기가 마지막 노래에서 다시 목소리를 낸다는 점을 떠올리며 들어 보자.
- ‘잠자리에 들 때’ 한가운데에서 독주 바이올린이 노래하듯 긴 간주를 연주한 뒤, 영혼이 날아오르고 싶다는 대목에서 목소리가 크게 솟아오른다.
- ‘저녁노을에’에서는 두 대의 플루트가 같은 음 둘을 빠르게 떠는(트릴) 소리로 하늘로 오르는 종달새를 그린다. 마지막 ‘이것이 죽음일까?’ 뒤에는 그가 스물여섯 살에 쓴 〈죽음과 변용〉의 ‘변용’ 주제가 조용히 인용된다.
덜 알려진 이야기
1895년 서른 살의 슈트라우스는 초연에 실패한 첫 오페라 〈군트람〉의 악보를 여든한 살의 베르디에게 헌정의 말과 함께 보냈다. 베르디는 아직 다 읽지 못했지만 훌륭한 솜씨가 보인다는 정중한 답장을 보냈고, 슈트라우스는 이 편지를 소중히 간직했다. 그는 베르디의 마지막 오페라 〈팔스타프〉를 깊이 존경했다. 바그너와 베르디를 맞세우던 당시 분위기 탓에, 독일 낭만주의의 후계자가 이탈리아 거장에게 먼저 손을 내민 이 일화는 서간집 속에만 조용히 남았다. 1905년 그는 베를리오즈의 관현악법 교본을 개정·증보해 펴냈다. 원저의 설명에 바그너 등 이후 작곡가들의 악보 예시와 자신의 해설을 더한 이 책은 오랫동안 독일어권 작곡 학생의 교재로 쓰였다. 베를리오즈가 연 관현악 색채의 탐구를 슈트라우스가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책이지만, 작품이 아니라 참고서로 여겨진 탓에 그의 전기에서 대개 한 줄로 지나간다. 〈네 개의 마지막 노래〉라는 제목은 슈트라우스가 붙인 것이 아니다. 그가 죽은 뒤 출판사 부지 앤드 호크스의 에른스트 로트가 네 곡을 묶어 이 이름을 붙이고 지금의 곡 순서를 정했다. 같은 1948년에 그는 소프라노 마리아 예리차를 위해 가곡 〈접시꽃〉을 썼는데, 이 악보는 예리차가 세상을 떠난 1982년 이후에야 알려져 1985년에 초연되었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노래’는 사실 다섯 곡이었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용어 노트 📚🔎
교향시
(말뜻) 교향시(交響詩)는 여러 소리가 어우러져(交) 울리는(響) 시(詩)라는 뜻이다. 시나 이야기처럼 무언가를 그려 내는 관현악곡이라는 성격이 이름에 담겨 있다. (음악에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대개 한 악장짜리 곡으로, 이야기·인물·풍경·철학처럼 음악 바깥의 내용을 소리로 그린다. 리스트가 이 이름을 붙였고, 슈트라우스가 〈돈 후안〉과 〈틸 오일렌슈피겔〉 같은 곡으로 정점에 올려놓았다. 그림 없이 선생님이 목소리와 효과음만으로 동화를 들려줘도 발소리, 문 열리는 소리, 웃음소리만으로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처럼 — 교향시는 그 일을 오케스트라 전체로 한다.
대위법
(말뜻) 대위법(對位法)은 음과 음을 마주(對) 세우는(位) 방법이라는 뜻이다. 서양 이름 카운터포인트의 라틴어 뿌리 punctus contra punctum 도 ‘점(음표)에 맞서는 점’이라는 뜻이다. (음악에서) 둘 이상의 독립된 선율을 동시에 흘려보내면서도 서로 잘 어울리게 짜 맞추는 기술이다. 화음이 음을 위로 ‘쌓는’ 것이라면, 대위법은 여러 줄의 선율을 옆으로 ‘엮는’ 것에 가깝다. 돌림노래를 부를 때 서로 다른 때에 시작한 가락들이 부딪치지 않고 함께 어울리는 것을 떠올려 보자 — 그렇게 어울리도록 미리 계산해 짜는 것이 대위법이다.
가곡(리트)
(음악에서) 시에 곡을 붙여 성악가와 피아노가 함께 연주하는 예술 노래다. 독일어로는 그냥 ‘노래’라는 뜻의 리트(Lied)라고 부르는데, 슈베르트·슈만·브람스를 거쳐 슈트라우스까지 독일어권에서 특히 크게 발전했다. 피아노는 단순한 반주가 아니라 시의 풍경과 감정을 함께 그리는 동반자다. 국어 시간에 친구가 시를 낭송할 때 다른 친구가 잔잔한 배경음악을 깔아 주면 같은 시도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것처럼 — 가곡에서 피아노는 그 배경음악보다 훨씬 깊이 시와 함께 이야기한다.
불협화음
(말뜻) 불협화음(不協和音)은 서로 어울리지(協和) 않는(不) 음이라는 뜻이다. (음악에서) 함께 울릴 때 긴장되고 거칠게 들려서, 듣는 사람이 어딘가 편안한 화음으로 풀려 가기를 바라게 만드는 화음이다. 예전에는 불협화음을 곧 어울리는 화음(협화음)으로 풀어 주는 것이 규칙이었지만, 슈트라우스는 〈살로메〉와 〈엘렉트라〉에서 이를 오래 붙들어 두어 공포와 광기를 그렸다. 수학 문제를 풀다 답이 안 맞아 찜찜하다가, 실수한 곳을 찾아내 답이 딱 맞았을 때 시원해지는 것 — 그 찜찜함이 불협화음, 시원함이 ‘해결’이다. (다른 데서는) 일상에서는 사람이나 집단 사이가 서로 맞지 않아 삐걱거리는 상태를 가리킬 때 흔히 쓴다.
대본(리브레토)
(말뜻) 이탈리아어 리브레토(libretto)는 ‘작은 책’이라는 뜻이다. 오페라 극장에서 관객이 손에 들고 보던 얇은 가사집에서 이름이 나왔다. (음악에서) 오페라의 가사와 줄거리를 담은 글이다. 대본가가 글을 쓰고 작곡가가 거기에 곡을 붙이는데, 슈트라우스와 호프만슈탈처럼 둘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한 장면 한 장면 함께 다듬기도 한다. 〈인터메조〉처럼 작곡가가 직접 쓰는 경우도 있다. 학교 연극을 준비할 때 친구가 쓴 대본에 음악 선생님이 노래를 붙이고, 노래가 잘 붙지 않는 대사는 둘이 상의해 고치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
관현악법
(말뜻) 관현악(管絃樂)은 관(管, 관악기)과 현(絃, 현악기)이 함께하는 음악이라는 뜻이고, 관현악법은 그 악기들을 다루는 방법이다. (음악에서) 어떤 선율이나 화음을 어느 악기에, 어떤 음높이와 세기로 맡길지 정하는 기술이다. 같은 선율도 플루트가 부르느냐 트롬본이 부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이 난다. 베를리오즈가 이 분야의 교본을 썼고, 슈트라우스는 그것을 손질해 펴냈을 만큼 관현악법의 거장으로 꼽힌다. 똑같은 재료로 볶음밥을 만들어도 불 세기와 양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맛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과 같다.
푸가
(말뜻) 푸가(fuga)는 라틴어와 이탈리아어로 ‘도망’이라는 뜻이다. 한 성부가 주제를 내놓고 달아나면 다른 성부가 같은 주제로 뒤쫓아 오는 모습에서 이름이 붙었다. (음악에서) 짧은 주제를 여러 성부가 차례로 이어받아 대위법으로 엮어 가는 곡, 또는 그런 기법이다. 돌림노래에서 뒷사람이 같은 가락을 한 박 늦게 따라 부르는 것과 비슷하게 시작하지만, 푸가에서는 따라 부르는 쪽이 음높이를 옮겨 부른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학문에 대하여’는 낮은 현악기에서 푸가로 시작한다. (다른 데서는) 정신의학에서 ‘해리성 둔주(fugue)’는 자기가 누구인지 잊은 채 집을 떠나 떠도는 상태를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