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rinelli
사라진 카스트라토의 목소리를 두 가수와 컴퓨터로 다시 빚었고, 그 목소리로 18세기 아리아를 형제의 고백처럼 부르게 한 음악이다.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만든 사람들 ⏳🌊
- 감독제라르 코르비오
「가면 속의 아리아」, 이 영화, 「왕의 춤」으로 음악가를 다룬 영화를 잇따라 만든 벨기에 감독이다.
- 지휘크리스토프 루세
레 탈랑 리리크를 이끌고 사운드트랙을 녹음했다.
- 작곡가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리날도」의 아리아들이 영화의 절정을 이루며, 극 중에서는 예룬 크라베가 헨델을 연기했다.
- 작곡가니콜라 포르포라
파리넬리의 스승이자 런던 귀족 오페라의 작곡가로, 「폴리페모」의 아리아가 영화에 쓰였다.
- 작곡가리카르도 브로스키
파리넬리의 형으로, 그가 쓴 아리아들이 사운드트랙의 중심을 이룬다.
- 주연스테파노 디오니시
파리넬리 역을 맡아 합성한 노래에 입을 맞추며 연기했다.
I. 사라진 목소리를 찾아서
(출발) 「파리넬리」는 벨기에 감독 제라르 코르비오의 영화다. 코르비오는 전작 「가면 속의 아리아」에서 은퇴한 바리톤과 그 제자들의 이야기를 그려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랐다. 이번에는 18세기 유럽 오페라 무대를 휩쓴 카스트라토 카를로 브로스키, 곧 파리넬리의 삶을 골랐다. 이 영화를 위해 새로 쓴 곡은 없다. 영화에 나오는 음악은 모두 파리넬리 시대의 오페라에서 가져왔다. 헨델과 포르포라, 하세, 그리고 파리넬리의 친형 리카르도 브로스키의 곡들이다. (지휘) 음악 감독은 프랑스 하프시코드 연주자 크리스토프 루세가 맡았다. 1961년 아비뇽에서 태어난 루세는 윌리엄 크리스티가 이끄는 레 자르 플로리상에서 연주하며 바로크 음악을 익혔고, 1991년 자신의 악단 레 탈랑 리리크를 세웠다. 이 악단은 바로크 시대의 악기와 연주법을 따르는 시대악기 악단이다. 창단한 지 2년 남짓 된 이 악단이 1993년 여름 프랑스 메스의 아르스날 공연장에서 사운드트랙을 녹음했다. 음반은 100만 장 넘게 팔렸고 악단의 이름은 세계에 알려졌다. (합성) 가장 어려운 문제는 노래하는 목소리였다. 마지막 카스트라토 알레산드로 모레스키는 1922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녹음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파리넬리 시대의 화려한 소리를 짐작하기에는 모자란다. 제작진은 미국 카운터테너 데릭 리 레이긴과 폴란드 소프라노 에바 마와스고들레프스카의 노래를 따로 녹음한 다음, 파리의 음향 연구소 IRCAM과 함께 두 소리를 디지털로 이어 붙였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 없던 목소리 하나가 생겼다. (이웃) 같은 해에 나온 「불멸의 연인」은 이 시리즈에서도 다뤘는데, 베토벤이라는 작곡가의 속마음을 따라간 영화였다. 「파리넬리」는 반대로 작곡가의 음악을 몸으로 전하는 가수의 이야기이고, 그 가수를 만들어 낸 작곡가 형의 이야기다.
사운드트랙의 여러 곡 사이에서 노래 없이 관현악만으로 된 서곡이다. 파리넬리의 대표 배역 아르바체가 나오는 하세의 오페라 「아르타세르세」의 막을 여는 곡이라, 목소리가 나오기 전에 레 탈랑 리리크의 소리를 먼저 들어 볼 수 있다.
- 18세기 이탈리아 오페라의 서곡을 신포니아(sinfonia)라고 부른다. 빠르게-느리게-빠르게의 세 부분으로 짜여 있고, 막이 오르기 전 떠들썩한 극장을 가라앉히는 역할을 했다.
- 바로크 시대의 악기와 연주법을 되살린 시대악기 연주다. 양의 창자로 꼰 거트현을 쓰기 때문에 현대 오케스트라보다 소리가 가볍고, 활이 움직이는 결이 또렷하게 들린다.
- 하세는 파리넬리와 같은 시대에 가장 인기 있던 오페라 작곡가였다. 1730년 베네치아에서 처음 올린 「아르타세르세」는 그 뒤로 여러 도시에서 고쳐 가며 다시 무대에 올랐다.
II. 트럼펫과 겨룬 소년
(액자) 영화는 스페인 궁정에서 시작한다. 명성이 절정에 오른 파리넬리가 자신을 찾아온 형 리카르도를 모른 척하는 장면이 먼저 나온다. 그다음 이야기는 형제의 젊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생이 왜 형을 피하는지,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조금씩 밝혀진다. (대결) 회상의 첫 장면은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다. 떠돌이 트럼펫 연주자가 어린 카스트라토를 조롱하자 카를로가 무대에 올라 트럼펫과 노래 솜씨를 겨룬다. 트럼펫이 길게 뻗는 음을 카를로의 목소리가 더 길고 더 높게 받아 내고, 구경꾼들은 환호한다. 젊은 파리넬리가 트럼펫 주자와 겨뤘다는 이야기는 18세기 기록에 남아 있지만 사실인지는 확인되지 않아 전설에 가깝다. 영화는 이 전설로 주인공을 처음 소개한다. (형제) 이 시절 형제는 한 몸처럼 움직인다. 형 리카르도가 곡을 쓰고 동생 카를로가 부른다. 리카르도의 아리아에는 숨 돌릴 틈 없이 몰아치는 빠른 음표가 가득하고, 카를로는 그것을 묘기 부리듯 해낸다. 관객은 열광한다. 하지만 영화는 이 화려함이 곧 형제의 한계가 된다는 점을 일찍부터 암시해 둔다. (겹침) 흥미롭게도 영화의 소리 자체가 이 형제의 관계를 닮았다. 화면 속 카를로는 한 사람이지만 들리는 목소리는 두 가수의 소리를 이어 붙인 것이다. 형이 쓰고 동생이 부르는 두 사람의 예술이 있고, 남자와 여자의 소리를 합친 하나의 목소리가 있다. 영화가 다루는 주제와 녹음한 방식이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셈이다.
형 리카르도가 동생을 위해 쓴 아리아로, 파리넬리의 런던 무대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형이 쓰고 동생이 부르던 시절의 화려함이 이 한 곡에 모여 있다.
- 자신을 폭풍에 흔들리는 배에 빗대는 노래다. 현악기의 거센 물결 같은 음형이 바다를, 그 위를 오르내리는 목소리가 흔들리는 배를 그려 낸다.
- 긴 음을 여리게 시작해 점점 키웠다가 다시 줄이는 메사 디 보체(messa di voce, 목소리 놓기)를 들어 볼 만하다. 파리넬리는 이 기술의 명수로 이름났다.
- 8분이 넘는 긴 곡이다. 사람이 숨 한 번으로 낼 수 없을 만큼 길게 이어지는 음은 녹음한 소리를 되풀이해 이어 붙인 결과라는 지적이 있다.
- 가락이 A-B-A로 돌아오는 다 카포 아리아(처음으로 돌아가는 아리아)다. 다시 나오는 A 부분에서 처음보다 훨씬 화려하게 덧붙인 꾸밈음과, 반주가 멈춘 사이 혼자 기교를 펼치는 카덴차(독창 끝맺음)를 견주어 들어 보면 좋다.
III. 형의 아리아, 동생의 무대
(스승) 형제의 재능을 알아보는 사람은 성악 교사 니콜라 포르포라다. 실제로도 포르포라는 파리넬리의 스승이었다. 포르포라의 오페라는 숨을 길게 이어 가는 선율과 넓은 음역으로 이름났다. 영화에서 포르포라는 카를로를 더 큰 무대로 이끄는 사람이다. (순회) 형제는 여러 도시의 극장을 돌며 이름을 얻는다. 무대 위의 카를로는 신처럼 떠받들어지지만, 무대 밖에서는 사람들의 호기심과 뒷말을 견뎌야 한다. 영화는 화려한 무대 장면과 텅 빈 분장실 장면을 번갈아 보여 주며 이 차이를 드러낸다. 이 무렵 카를로 곁에 알렉산드라라는 여인이 나타나 형제 사이에서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이 된다. (집착) 리카르도는 동생의 목소리를 위해 대작 오페라 「오르페오」를 완성하겠다는 꿈에 매달린다. 그러나 곡은 좀처럼 끝나지 않고, 리카르도는 동생이 자기 곡만 불러야 한다고 고집한다. 동생의 명성이 커질수록 작곡가로서 형의 불안도 커진다. 두 사람을 이어 주던 음악이 차츰 두 사람을 옭아매는 끈으로 바뀌어 간다. (서정) 영화 속 리카르도는 악인이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 동생을 아끼고, 동생의 목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믿는다. 다만 그 믿음 때문에 동생의 삶 전체를 자기 음악 안에 가두려 한다. 사운드트랙에 실린 리카르도의 느린 아리아를 들어 보면 뜻밖에 깊은 서정이 있다. 그래서 이 인물을 기교만 파는 작곡가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영화가 형을 미워하게만 만들지 않는 것도 이 음악 덕분이다.
리카르도의 오페라 「이다스페」에서 파리넬리가 불렀던 느린 아리아다. 영화 속 형을 기교만 아는 작곡가로 단정하기 어렵게 만드는, 형의 서정적인 얼굴이 담겨 있다.
- 사운드트랙에서 가장 긴 곡으로 9분이 조금 넘는다. 서두르지 않는 느린 박자 위에서 목소리가 한 음절을 여러 음으로 길게 늘여 부른다.
- 느린 곡이라 두 가수의 목소리가 이어지는 곳을 찾아 들어 보는 재미가 있다. 평자들은 한 목소리가 언제 다른 목소리로 넘어가는지 귀로 가려내기 어렵다고 했다.
- 제목의 그림자라는 말은 형제 이야기에 겹쳐 들으면 남다르게 들린다. 누가 누구의 그림자인가 하는 물음처럼 들리기도 한다.
- 영화가 나온 뒤 다른 가수들도 이 곡을 녹음했다.
IV. 런던의 두 극장
(런던) 이야기는 런던으로 옮겨 간다. 1730년대 런던에서는 두 오페라 극장이 경쟁하고 있었다. 하나는 헨델의 극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귀족들이 돈을 대어 세운 이른바 귀족 오페라였다. 포르포라는 이 귀족 오페라의 작곡가로 런던에 불려 왔다. 실제 파리넬리도 1734년 귀족 오페라에 합류해 런던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영화는 이 역사 속 경쟁을 형제 이야기의 한가운데에 놓는다. (헨델) 네덜란드 배우 예룬 크라베가 연기하는 헨델은 오만하고 날카로운 사람이다. 헨델은 카를로의 목소리를 탐내면서도 리카르도의 음악은 기교만 남은 빈 껍데기라고 깎아내린다. 카를로를 자기 극장으로 데려가려는 헨델과 그것을 막으려는 형 사이에서 카를로는 흔들린다. (악보) 카를로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헨델이라는 사람이 아니라 헨델의 음악이다. 형의 곡은 목소리의 재주를 뽐내게 하지만, 헨델의 곡은 목소리로 사람의 마음을 이야기하게 한다. 알렉산드라의 손을 거쳐 헨델의 악보가 카를로에게 건네지는 대목이 있다. 이것은 단순한 배신이라기보다 가수가 처음으로 자기가 부를 노래를 스스로 고르는 순간으로 읽힌다. (충돌) 런던 대목의 음악에서는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부딪친다. 포르포라의 오페라에서 가져온 숨이 긴 아리아와 헨델의 「리날도」에서 가져온 노래들이 같은 목소리로 불리면서 서로 다른 성격이 드러난다. 객석에서는 환호가 터지지만 그 뒤에서 형제 사이의 금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벌어진다. 영화는 이 갈라짐을 대사보다 곡이 어떻게 바뀌는지로 먼저 들려준다.
포르포라가 런던의 귀족 오페라를 위해 쓴 「폴리페모」의 아리아다. 실제 파리넬리가 런던에서 불러 큰 인기를 얻었으니, 헨델과 겨루던 극장의 무기였던 셈이다.
-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에게 목숨을 잃은 양치기 아치가 신의 은총으로 강물이 되어 다시 살아난 뒤 최고신 주피터에게 감사를 바치는 노래다.
- 빠른 기교보다 길게 뻗는 음과 넓게 뛰는 음정이 중심이다. 포르포라가 제자의 숨과 음역을 얼마나 잘 알았는지 보여 주는 곡처럼 들린다.
- 현악기가 차분한 박자를 지키는 동안 목소리만 높이 떠 있다. 이 대비가 신에게 올리는 기도라는 노래의 성격을 만든다.
- 플로리다 주립대 도서관의 작곡가 안내문은 이 곡이 포르포라의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아마 이 영화 덕분일 것이라고 적었다.
헨델의 「리날도」에서 기사 리날도가 납치된 연인을 그리며 부르는 아리아다. 영화가 런던 대목에서 꺼내 드는 헨델의 노래 가운데 하나로, 리카르도의 곡과는 결이 전혀 다르다.
- 느리고 어두운 단조의 탄식으로 시작한다. 반음씩 미끄러지듯 내려가는 반음계 진행이 슬픔을 더 짙게 만드는 것처럼 들린다.
- 가운데 부분에서는 빠르기와 분위기가 확 바뀌어, 연인을 빼앗아 간 어둠의 세력을 꾸짖는 거센 노래가 된다. 다 카포 아리아(처음으로 돌아가는 아리아)의 A-B-A 짜임을 슬픔과 분노를 맞세우는 데 쓴 예다.
- 1711년 런던 초연에서 이 곡을 부른 사람은 카스트라토 니콜로 그리말디, 곧 니콜리니였다. 처음부터 카스트라토의 노래였던 셈이다.
- 기교를 뽐내는 대목이 거의 없다. 헨델의 음악은 목소리를 감정을 전하는 데 쓴다는 영화 속 대비가 이 곡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V. 울게 하소서
(고백) 런던에서 형제의 관계는 끝내 무너진다. 리카르도가 오랫동안 숨겨 온 진실이 드러나고, 카를로는 자기 목소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게 된다. 영화는 이 장면을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그 충격을 곧바로 노래로 옮긴다. (노래) 카를로가 부르는 곡은 헨델의 「울게 하소서」다. 오페라 「리날도」에서 포로로 잡힌 여인이 자기 운명을 두고 울게 해 달라고 비는 아리아다. 원래는 여성 배역의 노래지만, 영화에서는 자기 몸에 일어난 일을 막 알게 된 남자의 노래가 된다. 노래 사이사이로 어린 시절의 기억이 끼어들어 무대 위의 소리와 기억 속의 소리가 겹친다. (허구) 객석의 헨델은 이 노래를 듣다가 정신을 잃는다. 자신이 쓴 곡이 그토록 깔보던 가수의 목소리로 이렇게 울릴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닫는 순간이다. 실제 파리넬리는 헨델의 오페라를 부른 적이 없으니 이 장면은 영화가 지어낸 것이다. 그래도 영화 전체의 감정이 모이는 곳은 바로 여기다. (단순) 이 장면이 오래 남는 까닭은 음악이 단순하기 때문이다. 앞 장들에서 목소리는 빠른 음표를 쉬지 않고 굴리며 재주를 보여 주었다. 「울게 하소서」에서 목소리는 처음으로 그 재주를 내려놓고, 느린 춤곡의 걸음에 맞춰 한 음 한 음을 고르게 놓는다. 화려함을 버린 자리에서 비로소 한 사람의 고통이 들린다. 영화가 이 곡을 절정에 둔 것은 기교보다 노래가 먼저라는 이 영화의 주장을 가장 분명하게 들려주는 선택이었다.
형이 숨겨 온 진실을 알게 된 카를로가 부르는 노래이고, 이 노래를 듣던 헨델이 정신을 잃는다. 이 영화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장면이다.
- 느린 3박자 춤곡인 사라반드(sarabande)의 걸음을 따른다. 둘째 박에 무게가 실려 걷다가 잠깐 멈칫하는 듯한 리듬이 흐느낌처럼 들린다.
- 원래 「리날도」에서 포로로 잡힌 여인 알미레나가 부르는 소프라노 아리아다. 영화는 이 여성의 노래를 자기 몸에 일어난 일을 막 알게 된 남자의 노래로 바꿔 놓았다.
- 가락의 뿌리는 헨델이 젊은 시절에 쓴 오페라 「알미라」(1705)의 춤곡이다. 오라토리오 「시간과 깨달음의 승리」(1707)에서도 다른 가사를 붙여 썼다. 헨델이 아껴서 여러 번 고쳐 쓴 선율이다.
- 노래 사이로 어린 시절의 기억 장면이 끼어든다. 무대의 노래와 과거의 소리가 겹치면서 음악이 인물의 기억을 여는 열쇠 노릇을 한다.
VI. 해를 부르는 노래
(궁정) 이야기는 처음의 스페인 궁정으로 돌아온다. 역사 속 파리넬리는 1737년 마드리드로 건너가 깊은 우울에 빠져 있던 국왕 펠리페 5세를 위해 노래했고, 그 뒤로 오랫동안 공연 무대를 떠나 궁정에 머물렀다. 영화는 런던의 환호를 뒤로한 가수가 단 한 사람의 청중을 위해 노래하는 삶을 골랐다는 사실을 조용히 보여 준다. (일식) 궁정 사람들이 그을린 유리를 들고 일식을 지켜보는 장면이 있다. 해가 완전히 가려지자 왕은 파리넬리에게 해를 다시 불러오도록 노래해 달라고 청한다. 어둠 속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이 영화가 음악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가장 직접 보여 주는 비유다. 노래가 해를 되돌리지는 못해도 듣는 사람의 마음속 무언가는 되돌려 놓는다. (형) 그 목소리는 궁정 주변을 떠돌던 리카르도에게도 닿는다. 형제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는 여기서 밝히지 않는다. 다만 영화의 마지막 대목에서 음악은 더 이상 어느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형과 동생이 함께 짊어진 무언가로 들린다. 오래 끝내지 못한 그 곡의 운명도 그 자리에서 정해진다. (여운) 영화가 끝나도 남는 것은 이 목소리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파리넬리의 노래는 녹음으로 남지 않았다. 우리가 들은 것은 두 가수와 연구소가 함께 만든 상상의 소리다. 영화는 이 사실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사라진 목소리를 그리워하는 마음 자체를 음악으로 만들었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사운드트랙 음반을 찾아 들은 것도 아마 그 그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덜 알려진 이야기
영화와 달리 실제 파리넬리는 헨델의 오페라를 부른 적이 없다. 1734년 런던에 온 그는 헨델과 겨루던 귀족 오페라 무대에 섰고, 그사이 헨델의 극장은 관객을 잃어 어려움을 겪었다. 영화 속 두 사람의 만남과 헨델이 정신을 잃는 장면은 이 경쟁 관계를 극으로 옮기면서 지어낸 것이다. 영화의 인상이 워낙 강해서 두 사람이 직접 얽혔던 것처럼 기억되곤 한다. 마드리드 시절을 이야기할 때는 영국 음악사가 찰스 버니의 기록이 자주 인용된다. 버니는 1770년 볼로냐에서 은퇴해 살던 파리넬리를 찾아갔다. 그리고 파리넬리가 펠리페 5세를 위해 10년 가까이 매일 밤 같은 노래 네 곡을 불렀다고 전했다. 그중 두 곡은 하세의 「아르타세르세」에 나오는 아리아였다. 이 일화는 파리넬리 자신의 회고에 기댄 것이어서 과장이 섞였을 수 있다는 점도 함께 짚어진다. 파리넬리와 대본 작가 메타스타시오는 평생 서로를 쌍둥이라고 불렀다. 1720년 나폴리에서 포르포라의 세레나타 「안젤리카와 메도로」로 함께 이름을 알렸기 때문이다. 메타스타시오가 파리넬리에게 보낸 많은 편지가 남아 있어, 무대를 떠난 뒤 파리넬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려 주는 귀한 자료가 되었다. 2006년 볼로냐 대학 연구진은 파리넬리의 유해를 발굴해, 어린 나이에 받은 거세가 뼈와 몸에 남긴 흔적을 조사했다. 노래로만 전해지던 사람이 250년 가까이 지나 과학 연구의 대상이 된 것이다.
용어 노트 📚🔎
카스트라토
(말뜻) 이탈리아어 castrato는 거세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영화·뮤지컬 음악에서) 변성기가 오기 전에 거세를 받아 소년의 높은 음역을 그대로 지닌 채 어른의 폐와 몸집으로 노래한 남성 가수다. 17~18세기 이탈리아 오페라의 최고 스타였고, 이 영화의 주인공 파리넬리가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했다. 합창 시간에 소프라노를 맡던 남자아이가 변성기가 와서 낮은 파트로 옮겨 가는 일을 떠올려 보자. 카스트라토는 그 변화가 오지 않게 막은 경우다. 지금은 사라진 관습이라 그 목소리를 실제로 들을 수 없다.
카운터테너
(말뜻) 중세 여러 성부 음악에서 테너 성부에 맞서는(contra) 성부를 가리키던 말 콘트라테노르에서 나왔다. (영화·뮤지컬 음악에서) 머리 쪽으로 울리는 가성을 갈고닦아 여성의 음역을 노래하는 남성 가수다. 카스트라토가 사라진 뒤 카스트라토의 배역을 많이 맡아 왔고, 이 영화에서는 데릭 리 레이긴이 그 목소리의 한쪽을 맡았다. 남학생이 장난으로 여자 목소리를 흉내 낼 때 쓰는 가늘고 높은 소리가 가성이다. 그 소리를 오랫동안 훈련해 무대에서 오페라를 부를 만큼 키운 것이 카운터테너다.
다 카포 아리아
(말뜻) 이탈리아어 da capo는 머리부터, 곧 처음부터라는 뜻이다. (영화·뮤지컬 음악에서) A 부분을 부르고, 분위기가 다른 B 부분을 부른 다음, 다시 A로 돌아가는 A-B-A 짜임의 아리아다. 돌아온 A에서 가수는 같은 가락에 즉석으로 꾸밈음을 덧붙여 실력을 보여 준다. 노래방에서 1절은 원곡대로 부르고, 마지막 후렴에서는 같은 가락에 나만의 애드리브를 얹어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18세기 관객은 이 꾸밈음을 들으려고 극장에 가기도 했다.
메사 디 보체
(말뜻) 이탈리아어 messa di voce는 목소리를 놓는다는 뜻이다. (영화·뮤지컬 음악에서) 한 음을 아주 여리게 시작해 점점 크게 키운 뒤 다시 여리게 줄여 가는 노래 기술이다. 숨을 고르게 나눠 써야 해서 바로크 시대에는 가수의 실력을 재는 잣대였고, 파리넬리는 이 기술로 특히 이름났다. 리코더로 한 음을 길게 불면서 소리를 점점 세게 했다가 다시 여리게 줄여 보면, 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카덴차
(말뜻) 이탈리아어 cadenza는 떨어지다라는 뜻의 cadere에서 나왔다. 곡이 마침표를 찍으며 내려앉는 자리라는 뜻이 담겨 있다. (영화·뮤지컬 음악에서) 아리아나 협주곡이 끝나기 직전에 반주가 멈추고 독주자나 가수가 혼자 화려한 기교를 펼치는 대목이다. 원래는 즉석에서 지어 불렀고, 같은 곡이라도 가수마다 카덴차가 달랐다. 학예회 합주에서 모두 소리를 멈춘 사이 한 친구가 혼자 솜씨를 뽐내고, 그다음 다 같이 마지막 화음을 치는 장면을 떠올리면 된다. (다른 데서는) 영어 cadence는 말의 억양이나 걸음의 박자를 가리킬 때도 쓴다.
시대악기 연주
(영화·뮤지컬 음악에서) 곡이 쓰인 시대의 악기와 연주법을 되살려 연주하는 방식이다. 바로크 음악이라면 양의 창자로 꼰 거트현, 밸브가 없는 트럼펫, 하프시코드 같은 악기를 쓰고 당시 문헌에 따라 빠르기와 꾸밈음을 정한다. 이 영화의 레 탈랑 리리크가 그런 악단이다. 할머니의 옛날 조리법대로 가마솥에 밥을 지으면 전기밥솥 밥과 맛이 다르다. 시대악기 연주도 같은 곡을 그 시대의 맛 그대로 들려주려는 시도다.
사라반드
(영화·뮤지컬 음악에서) 느린 3박자 춤곡으로, 둘째 박에 무게가 실리는 것이 특징이다. 바로크 시대에 궁정 춤곡과 기악 모음곡의 한 악장으로 널리 쓰였다. 헨델의 「울게 하소서」가 이 걸음을 따른다. 하나-둘-셋을 세며 걸을 때 둘에서 발을 조금 오래 디디고 서 보면, 걸음이 잠깐 멈칫하면서 무게가 실리는 느낌이 든다. 그 멈칫함이 사라반드의 표정이다.
신포니아
(말뜻) 그리스어 심포니아(symphonia)에서 온 말로, 함께(syn) 울리는 소리(phone)라는 뜻이다. (영화·뮤지컬 음악에서) 18세기 이탈리아 오페라의 막을 여는 관현악 서곡으로, 빠르게-느리게-빠르게의 세 부분으로 짜여 있다. 이 짜임이 나중에 독립된 관현악곡으로 자라 교향곡이 되었다. 수업 시작종이 울리면 떠들던 교실이 조용해지듯, 신포니아는 막이 오르기 전 시끄러운 객석을 무대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다. (다른 데서는) 심포니라는 말은 교향곡뿐 아니라 교향악단의 이름에도 흔히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