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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Frideric Handel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1685–1759)

“나는 하늘 전체와 위대하신 하느님 그분을 눈앞에 보는 듯했다” — 메시아의 할렐루야 합창을 쓰며 남겼다고 전해지는 말

한눈에 보기 🔭💭

1. 뿌리독일 할레 출생아버지 반대차하우 사사2. 수학함부르크 결투이탈리아 유학스카를라티 교류3. 정착런던 리날도조지 1세 인연수상음악4. 격동오페라 전쟁디바 반목파산과 발작5. 전환메시아 작곡파운들링 자선불꽃놀이 음악6. 말년실명오르간 즉흥웨스트민스터 안장헨델1685–1759왕의 옛 신하에서 런던 오라토리오의 거장이 된…
삶의 여정 🧭🗺️
N영국이탈리아아일랜드독일할레1685–1703함부르크1703–1706로마1706–1710런던1710–1759아헨1737더블린1741–1742

곁의 사람들 ⏳🌊

  • 가족
    게오르크 헨델
    법률가가 되길 바라며 아들의 음악 수업을 오래 반대했던 아버지다.
  • 스승
    프리드리히 빌헬름 차하우
    할레의 오르가니스트로 어린 헨델에게 작곡과 오르간의 기초를 가르쳤다.
  • 경쟁
    요한 마테존
    함부르크에서 절친하게 지내면서도 결투까지 벌인 동료 작곡가다.
  • 우정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로마에서 건반 시합을 벌인 뒤 서로를 인정하며 평생의 벗으로 지냈다.
  • 영향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같은 해에 태어난 독일 거장으로, 서로 만나길 원했으나 끝내 만나지 못했고 훗날 같은 안과의에게 수술받아 실명한 공통점을 남겼다.
  • 우정
    찰스 제넨스
    메시아를 비롯한 여러 오라토리오의 대본을 썼으며 신학 해석을 두고 헨델과 자주 편지로 다투었다.

I. 할레의 소년 · 1685–1703 (0–18세)

1685년 2월, 독일 할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아버지 게오르크 헨델은 할레 궁정과 시청에서 일하던 이발외과의사였다. 예순셋에 얻은 늦둥이 아들이 법률가가 되기를 바랐고, 음악은 신사의 소양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어머니) 어머니 도로테아 타우스트는 목사의 딸이었다. 남편 몰래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눈감아 주었고, 훗날 헨델이 런던에서 보낸 편지 대부분은 그녀에게 향한 것이었다. (다락) 아버지가 악기를 금지하자 어린 헨델이 다락방에 클라비코드를 몰래 들여놓고 밤마다 연습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실 여부는 확실치 않지만 어릴 때부터 억눌린 열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차하우) 궁정을 방문했을 때 우연히 연주를 들은 작센바이센펠스 공이 재능을 알아보고 권한 덕분에 아버지는 마음을 바꾸었다. 이후 할레의 오르가니스트 프리드리히 빌헬름 차하우에게 작곡과 오르간을 정식으로 배웠다. (상실) 1697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헨델은 유지를 따라 할레 대학에 입학해 법학을 공부했지만 이듬해 곧 교회 오르가니스트 자리를 얻으며 음악의 길로 완전히 들어섰다. (동갑) 같은 해 1685년, 백여 킬로미터 떨어진 아이제나흐에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태어났다. 두 사람은 평생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독일 바로크 음악을 대표하는 동갑내기로 자주 나란히 놓인다.

II. 함부르크와 이탈리아 · 1703–1710 (18–25세)

(함부르크) 1703년 할레를 떠나 함부르크 오페라 극장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작곡가 요한 마테존과 가까워졌고 동시에 경쟁했다. (결투) 마테존과 헨델은 자신의 오페라 무대에서 자리다툼을 벌이다 검을 뽑아 결투까지 치렀다. 마테존의 칼끝이 헨델의 조끼 단추에 맞아 부러지며 목숨을 건졌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오페라) 1705년 함부르크에서 첫 오페라 알미라를 무대에 올려 호평받았다. 이 성공으로 그는 이탈리아 유학을 결심했다. (이탈리아) 1706년부터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를 오가며 이탈리아 양식을 흡수했다. 로마에서는 작곡가 아르칸젤로 코렐리, 추기경 오토보니 같은 후원자들과 교류했다. (스카를라티) 로마의 어느 저택에서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와 하프시코드와 오르간 실력을 겨루는 시합이 열렸다. 하프시코드는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으나 오르간에서는 헨델이 앞선다는 평이었고, 이후 두 사람은 평생의 벗으로 남았다. (교회음악) 로마에서는 오페라가 교황청의 제재를 받아 대신 교회음악을 여럿 썼다. 시편에 곡을 붙인 딕시트 도미누스는 스물두 살 청년의 야심과 기교를 한꺼번에 쏟아부은 작품이다. (베네치아) 베네치아에서는 오페라 아그리피나를 상연해 갈채를 받았고, 이 도시에서 활동하던 안토니오 비발디의 협주곡 양식도 접하며 이후 기악 작품에 흔적을 남겼다.

딕시트 도미누스 (Dixit Dominus, HWV 232)1707 (22세)

로마에서 교회음악에 매달리던 스물두 살 청년이 야심과 기교를 한꺼번에 쏟아부은 초기 걸작이다.

  • 도입부 합창에서 현악과 성부가 촘촘하게 얽히며 몰아치듯 밀어붙이는 리듬은 젊은 헨델의 패기를 그대로 드러낸다.
  • 'Juravit Dominus' 대목에서 짧은 음형을 곡 내내 집요하게 되풀이하는 반복 기법(오스티나토)은 단호한 맹세를 새기듯 들린다.
  • 소프라노 두 성부가 서로 쫓고 쫓기듯 얽히는 'De torrente' 이중창은 성악가들에게 호흡과 음정 모두에서 까다로운 대목으로 꼽힌다.
  • 마지막 'Gloria Patri' 합창의 폭발적인 클라이맥스는 이 곡 전체의 야심을 집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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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왕의 옛 신하 · 1710–1728 (25–43세)

(하노버) 1710년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루트비히의 궁정악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휴가를 얻어 런던으로 건너가 오페라 리날도를 무대에 올려 대성공을 거두었다. (런던행) 런던의 반응에 이끌려 그는 하노버로 돌아가지 않고 눌러앉았다. 이는 계약 위반이자 후원자에 대한 배신으로 보일 수 있었다. (반전) 1714년 앤 여왕이 죽자 왕위는 다름 아닌 하노버의 선제후, 즉 헨델이 저버린 옛 주인에게 돌아가 조지 1세가 되었다. 헨델은 궁색해졌으나 템스강 뱃놀이를 위해 수상음악을 작곡해 왕의 마음을 되돌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정착) 이후 그는 평생 런던에 머물렀고 1727년 영국으로 귀화했다. 결혼은 하지 않았고 알려진 자녀도 없다. 사생활에 관한 기록이 극히 드물어 음악 활동이 사실상 삶의 전부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왕립음악원) 1719년 귀족들의 출자로 왕립음악아카데미가 세워지고 헨델이 음악감독을 맡았다. 이탈리아 오페라를 영국 무대에 정착시키려는 야심 찬 사업이었다. (경제) 그는 작곡뿐 아니라 극장 운영, 가수 섭외, 투자에도 깊이 관여했다. 씀씀이는 크지 않았고 오히려 검약하고 치밀하게 돈을 관리해 훗날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리날도 중 '울게 하소서' (Lascia ch'io pianga, HWV 7)1711 (26세)

런던 데뷔작 리날도의 아리아로, 낯선 도시에서 성패를 걸었던 그의 초조함이 절제된 슬픔의 선율에 스며 있다.

  • 느리고 무게감 있는 3박자 춤곡 리듬(사라방드)이 슬픔을 절제된 걸음으로 표현한다.
  • '나를 울게 하소서'라는 체념과 탄원이 단순하지만 긴 호흡의 프레이즈로 이어져 성악가의 숨 조절 능력을 시험한다.
  • 반주가 최소화되고 목소리만 남는 순간은 오늘날에도 소프라노와 카운터테너(가성으로 높은 음역을 내는 남성 성부) 등 다양한 성부로 편곡되어 불리며 해석이 크게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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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음악 (Water Music, HWV 348-350)1717 (32세)

옛 주인이었던 조지 1세와의 어색한 관계를 풀기 위해 템스강 뱃놀이용으로 썼다고 전해지는 화해의 음악이다.

  • 호른과 트럼펫이 강물 위에서 울려 퍼지도록 야외 연주를 염두에 두고 쓰여, 관악기의 화려한 팡파르가 자주 등장한다.
  • F장조 모음곡의 경쾌한 호른 신호는 오늘날까지 대관식이나 축제 영상에 흔히 쓰이는 대목이다.
  • 현악과 목관이 주고받는 대화 같은 프레이즈는 뱃놀이의 흥겨움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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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오페라 전쟁과 몰락 · 1728–1737 (43–52세)

(경쟁) 왕립음악아카데미에서 그는 작곡가 조반니 보논치니와 대중의 인기를 놓고 경쟁했다. 런던 사교계는 두 파로 갈려 다투었고 헨델이 결국 우위를 지켰다. (디바) 프리마돈나 프란체스카 쿠초니와 파우스티나 보르도니의 반목은 급기야 무대 위 몸싸움으로 번져 극장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헨델은 이 대립조차 흥행의 재료로 활용할 줄 알았다. (대본) 이 시기 오페라 줄리오 체사레의 성공 이면에는 매번 새 프리마돈나의 기교에 맞춰 아리아를 다시 써야 하는 실무적인 고단함이 있었다. (파산) 그러나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서서히 식었고 존 게이의 영어 대중오페라 거지 오페라가 그를 조롱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1728년 왕립음악아카데미는 파산했다. (좌절) 헨델은 사재를 들여 새 오페라단을 꾸렸으나 귀족 후원자들이 만든 경쟁 오페라단과의 싸움에서 다시 무너졌다. 1737년에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뇌졸중으로 추정되는 발작을 일으켜 오른손이 마비되었다. (온천) 그는 독일 아헨의 온천으로 요양을 떠났고 몇 달 만에 놀랍도록 회복해 다시 오르간 앞에 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오페라 사업가로서는 이미 재기가 어려운 상태였다.

줄리오 체사레 중 'V'adoro, pupille' (HWV 17)1724 (39세)

오페라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프리마돈나의 기교에 맞춰 새로 다듬어야 했던 실무적 고단함이 담긴 유혹의 아리아다.

  • 클레오파트라가 부르는 이 아리아는 하프와, 활 대신 손가락으로 현을 뜯는 주법(피치카토)의 현악이 어우러져 이국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낸다.
  • 유혹의 노래답게 선율은 서두르지 않고 한 음 한 음 길게 늘어지며 카운터테너나 메조소프라노의 음색 조절 능력이 그대로 드러난다.
  • 무대 위 등장 자체가 극적으로 연출되는 대목이라 연출가마다 해석이 크게 갈리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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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메시아, 새로운 길 · 1737–1742 (52–57세)

(전환) 오페라 사업의 잇단 실패 후 그는 영어 대본에 의한 오라토리오로 방향을 틀었다. 무대 장치나 의상 없이 합창과 독창만으로 이야기를 전하는 이 형식은 제작비가 훨씬 적게 들었다. (성서) 사울, 이집트의 이스라엘인 같은 구약 소재의 오라토리오들을 잇달아 내놓으며 영국 청중들의 종교적 정서를 파고들었다. (메시아) 1741년 더블린의 자선 공연 초청을 받은 그는 단 24일 만에 메시아 전곡을 작곡했다. 오랜 좌절과 건강 악화를 겪은 뒤였던 만큼 이 몰입은 신앙적 체험에 가까웠다고 전해진다. (할렐루야) 1742년 더블린 초연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듬해 런던 공연에서 할렐루야 합창이 울리자 조지 2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는 일화가 전해지며 이후 이 대목에서 청중이 기립하는 관행이 생겼다고 한다. 다만 이 일화의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신앙) 헨델은 독실했으나 교파에 얽매이지 않았고, 메시아의 대본을 쓴 찰스 제넨스와는 신학 해석을 두고 편지로 자주 다투었다.

메시아 (Messiah, HWV 56)1741 (56세)

오페라 사업의 파산과 발작을 겪은 뒤, 단 24일의 몰입 속에서 완성된 신앙적 회복의 기록이다.

  • 테너의 'Comfort ye'는 낮게 시작해 점차 확신에 차오르듯 음역을 넓혀가며 위로의 말을 전한다.
  • 'For unto us a child is born' 합창은 짧은 선율을 각 성부가 차례로 주고받는 모방 진행(푸가풍 짜임새)으로 쌓아올려 환희를 점층적으로 표현한다.
  • 할렐루야 합창의 트럼펫과 팀파니는 신의 권능을 상징하며, 이 대목에서 청중이 일어서는 관행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 소프라노 아리아 'I know that my Redeemer liveth'는 낮은 음에서 차례로 오르는 선율(상행 선율)로 부활에 대한 확신을 노래해 독창자들이 가장 아끼는 대목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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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자선과 오라토리오의 시대 · 1742–1751 (57–66세)

(파운들링) 1749년부터 런던의 파운들링 병원을 위해 메시아 자선 공연을 해마다 지휘했다.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는 이 병원에 그는 상당한 금액을 기부했고 죽을 때까지 이사로 남았다. (불꽃놀이) 1749년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의 종전을 기념해 왕실 불꽃놀이 음악을 작곡했다. 시연 도중 화약이 잘못 터져 무대에 불이 붙는 소동이 있었지만 음악 자체는 곧 대중의 애창곡이 되었다. (식탐) 그는 대식가로 유명했고 풍채가 좋았다. 한 일화에 따르면 식당에서 여러 사람 몫의 저녁을 혼자 주문한 뒤 일행이 늦는다고 하자 먼저 시작하겠다며 자기 몫부터 먹어치웠다고 한다. (제자) 그의 주변에 제자라 부를 만한 인물은 많지 않았지만, 젊은 작곡가들이 리허설을 참관하며 오라토리오 작법을 익혔다. 그는 성격이 급하고 억양이 강한 영어로 불같이 화를 내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연주자들의 생계는 세심히 챙겼다. (재산) 만년에 그는 상당한 재산을 모았고 유언장에서 여러 차례 기부처를 늘려나갔다. 파운들링 병원과 옛 친지, 하인들에게까지 세심하게 유산을 나누었다. (무자녀) 끝내 결혼하지 않았고 자녀도 남기지 않았다. 조카들과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혈육보다 음악 동료들이 그의 실질적인 가족에 가까웠다.

왕실 불꽃놀이 음악 (Music for the Royal Fireworks, HWV 351)1749 (64세)

종전과 자선 활동으로 다시 대중의 사랑을 회복한 노년의 헨델이 왕실의 공식 축제를 위해 쓴 작품이다.

  • 서곡의 화려한 관악 합주는 원래 실제 불꽃놀이와 함께 야외에서 연주되도록 설계되어 트럼펫과 호른, 오보에가 두드러진다.
  • '라 레주이상스(기쁨)' 악장의 경쾌한 리듬은 종전의 안도감과 축제 분위기를 그대로 담고 있다.
  • 초연 당시 무대에 실제로 불이 붙었던 소동을 떠올리며 들으면 관악의 웅장함이 더 실감 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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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 어둠 속의 노년 · 1751–1759 (66–74세)

(시력) 1751년 무렵부터 시력이 급격히 나빠져 백내장으로 진단받았다. 그는 존 테일러라는 안과의에게 수술을 받았으나 오히려 상태가 악화되어 실명에 이르렀다. (우연) 공교롭게도 존 테일러는 몇 해 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수술한 바로 그 인물이었고, 바흐 역시 이 수술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평생 만난 적 없는 두 거장이 결국 같은 돌팔이 의사의 손을 거쳐 시력을 잃은 것은 아이러니로 남는다. (연주) 실명 후에도 그는 오르간 협주곡을 즉흥으로 연주하며 오라토리오 공연을 이끌었다. 악보를 외워 건반을 짚었고 조수가 옆에서 넘겨주는 시늉을 하며 청중을 속였다는 증언도 있다. (죽음) 1759년 4월, 부활절 무렵 메시아 공연을 마친 직후 자리에 누웠고 며칠 뒤 런던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수난주간에 맞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안장) 그의 장례식에는 삼천여 명의 인파가 모였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국왕과 같은 반열의 예우였다.

오르간 협주곡 Op.7 No.1 (HWV 306)1740년대 (55세)

실명 이후에도 구술과 즉흥으로 다듬어졌다고 전해지는, 어둠 속 노년의 심경이 스며든 협주곡이다.

  • 오르간 독주와 관현악이 주고받는 대화가 즉흥곡처럼 자유롭게 흐른다.
  • 느린 악장의 단순하고 여백이 많은 선율은 시력을 잃은 노년의 심경을 투영한 것처럼 들린다.
  • 독주자가 반주 없이 자유롭게 기교를 펼치는 대목(카덴차)은 원래 헨델 자신의 즉흥연주를 위한 자리였다는 점에서 오늘날 연주자들이 재량껏 채워 넣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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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 노트 📚🔎

오라토리오

무대 장치나 의상 없이 합창과 독창, 관현악으로 성서나 극적 이야기를 전하는 대규모 성악곡이다. 오페라와 달리 연기 없이 연주회 형식으로 공연된다.

카운터테너

성인 남성이 가성을 사용해 여성 알토나 소프라노에 가까운 높은 음역을 내는 성부다. 바로크 오페라에서 거세 가수의 배역을 오늘날 대신 맡는 경우가 많다.

사라방드

원래 스페인에서 유래한 느리고 위엄 있는 3박자 춤곡이다. 둘째 박에 강세가 실려 무게감 있는 걸음걸이 같은 느낌을 준다.

오스티나토

같은 선율이나 리듬 음형을 곡 전체 혹은 한 대목 내내 집요하게 반복하는 기법이다. 반복 자체가 긴장이나 단호함을 쌓아올린다.

카덴차

협주곡 등에서 관현악 반주 없이 독주자가 자유롭게 기교를 펼치는 대목이다. 원래는 연주자의 즉흥연주를 위한 자리였다.

피치카토

활로 켜는 대신 손가락으로 현을 뜯어 소리 내는 현악기 주법이다. 통통 튀는 가볍고 이국적인 음색을 낸다.

상행 선율

낮은 음에서 높은 음으로 차례로 올라가는 선율의 흐름이다. 흔히 고조되는 감정이나 확신을 표현하는 데 쓰인다.

이 음악가를 좋아할 사람이 떠오르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