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onio Vivaldi
숨이 가쁜 사제, 악보 위에서는 누구보다 빨리 내달렸다.
한눈에 보기 🔭💭
곁의 사람들 ⏳🌊
- 가족조반니 바티스타 비발디이발사에서 바이올리니스트가 된 아버지로, 아들에게 첫 바이올린을 가르치고 훗날 오페라 사업의 동반자가 되었다.
- 스승조반니 레그렌치산마르코 대성당의 악장으로, 어린 그가 작곡을 배웠다고 전해지나 확실한 근거는 남아 있지 않다.
- 영향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그의 '레스트로 아르모니코'에 매료되어 여러 협주곡을 하프시코드와 오르간 독주곡으로 편곡하며 형식을 연구했다.
- 제자요한 게오르크 피센델베네치아로 유학 온 작센 궁정의 바이올리니스트로, 그의 애제자이자 평생의 벗이 되어 여러 협주곡을 헌정받았다.
- 우정안나 지로만토바에서 만나 노래를 가르친 소프라노로, 그의 오페라마다 주역을 맡았고 늘 곁을 지켰다.
- 후원카를 6세신성로마제국 황제로, 트리에스테에서 그를 만나 총애했으며 그가 만년에 빈으로 떠나게 된 계기를 마련했다.
I. 산마르코의 아들 · 1678–1703 (0–25세)
(출생) 1678년 3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몇 시간 만에 산파가 아이 목숨이 위태롭다고 판단해 정식 세례 절차를 기다리지 않고 집에서 급히 세례를 주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훗날 어머니 카밀라는 그날의 위기를 두고 아들을 하느님께 바치겠다고 다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가족) 아버지 조반니 바티스타 비발디는 원래 이발사였으나 바이올린 연주자로 전업해 산마르코 대성당 관현악단에서 일했다. 어머니 카밀라 칼리키오와의 사이에서 그는 장남이었고, 아래로 다섯 명의 동생이 더 태어났다. 아버지는 훗날 아들의 오페라 사업에서 회계와 필사를 돕는 동반자가 되었다. (병) 태어날 때부터 그를 평생 따라다닌 것은 '가슴이 좁아지는 병(스트레테차 디 페토)'이었다. 오늘날의 천식이나 협심증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병은 그를 자주 숨차게 했고, 걷기보다 마차를 타야 했으며, 나이가 들어서도 격렬한 활동을 견디지 못했다. (사사) 바이올린은 아버지에게서 배웠다. 아버지는 아들을 성당 연주에 데리고 다니며 실전 경험을 쌓게 했다. 일부 전기작가는 어린 시절 산마르코의 악장이었던 조반니 레그렌치에게 작곡을 배웠다고 전하지만, 레그렌치가 그가 열두 살이던 1690년에 세상을 떠난 만큼 확실한 근거는 없다. (사제) 1703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붉은 머리 때문에 훗날 '붉은 사제(일 프레테 로소)'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다. 그러나 서품 이듬해부터 지병이 심해져 미사를 끝까지 집전하지 못하고 제단을 떠나는 일이 잦아졌고, 결국 정기적인 미사 집전을 그만두었다. 이 일로 훗날까지 그를 향한 뒷말이 끊이지 않았다.
사제 서품 직후 펴낸 첫 출판작으로, 유행하던 춤곡과 변주 형식에 자신의 색깔을 입히기 시작한 흔적을 담고 있다.
- 12곡 중 마지막 곡은 당대 널리 쓰이던 '라 폴리아' 주제를 스무 번 넘게 변주한 곡으로, 두 대의 바이올린이 점점 빠르고 화려하게 서로를 뒤쫓는 대목이 압권이다.
- 변주가 거듭될수록 활을 짧게 끊어 튕기듯 연주하는 대목과 길게 이어 켜는 대목이 번갈아 나와, 연주자의 활 다루는 솜씨를 겨루는 자리로 유명하다.
- 두 바이올린과 통주저음(악보에 화음만 적어두고 연주자가 즉흥으로 채워 넣는 저음 반주)이 대화하듯 주고받는 소박한 편성에서, 후일 협주곡을 이끌 그의 리듬 감각이 이미 엿보인다.
II. 피에타의 마에스트로 · 1703–1717 (25–39세)
(임용) 1703년, 베네치아의 자선 고아원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의 바이올린 교사로 임용되었다. 이곳은 버려지거나 사생아로 태어난 소녀들을 거두어 기르며 음악을 가르치는 기관으로, 잘 훈련된 소녀들의 합주는 이미 도시의 명물이었다. (피에타) 소녀들은 가림막 뒤에서 연주해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 실력은 유럽 여행자들 사이에 소문이 자자했다. 그는 이 소녀 관현악단을 위해 협주곡과 종교음악을 쏟아내듯 작곡했고, 제자 중 몇몇은 뛰어난 독주자로 이름을 남겼다. (불안정) 그러나 그의 자리는 안정적이지 않았다. 이사회가 매년 표결로 재임용을 결정했는데, 1709년에는 표결에서 밀려 해고되었다가 1711년에야 복직했다. 1716년에는 협주곡 전체를 책임지는 마에스트로 데 콘체르티로 승진했지만, 명성과 별개로 그의 지위는 늘 이사회의 손에 달려 있었다. (속도) 그는 남들보다 빠르게 곡을 쓰는 것으로 유명했다. 필사가가 곡을 베끼는 시간보다 자신이 협주곡을 완성하는 시간이 더 짧다고 자랑하듯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 다작은 피에타 소녀들의 끊임없는 연주 수요와 직결되어 있었다. (바흐) 1711년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된 협주곡집 '화성과 창의에의 시도'(레스트로 아르모니코)는 알프스 너머까지 그의 이름을 알렸다. 당시 바이마르 궁정에서 오르간 주자로 일하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이 협주곡집에 깊이 매료되어 여러 곡을 하프시코드와 오르간을 위한 독주곡으로 편곡하며 그 리토르넬로 형식을 연구했다.
피에타의 소녀들을 위해 다작하던 시기의 성과가 국제적으로 인쇄되어 퍼진 첫 협주곡집으로, 바흐가 편곡하며 연구한 곡이기도 하다.
- 열 번째, 네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RV580)은 독주 성부 네 개가 계단을 오르듯 차례로 쌓여 들어오는 도입부가 독특하며, 훗날 바흐가 네 대의 하프시코드를 위한 협주곡(BWV 1065)으로 고쳐 쓸 만큼 구조가 인상적이다.
- 여섯 번째 협주곡(RV356)의 1악장은 짧고 단호한 주제로 시작해, 오늘날까지 바이올린 입문자들의 시험곡으로 널리 쓰인다.
- 합주가 후렴처럼 되풀이되고 그 사이사이 독주가 끼어드는 리토르넬로 형식이 뚜렷하게 들려, 협주곡이라는 장르의 틀이 여기서 다져지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피에타의 소녀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염두에 두고 쓴 종교음악으로,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노래하던 그들의 목소리를 오늘날에도 상상하게 한다.
- 합창으로 문을 여는 첫 곡은 밝은 오보에 선율과 현악의 힘찬 리듬이 어우러져 축제 같은 분위기를 만든다.
- '주 하느님'을 노래하는 '도미네 데우스'에서는 소프라노 독창과 오보에가 서로를 뒤쫓듯 선율을 주고받아 애틋하게 들린다.
- 여성과 소녀들만으로 이루어졌던 피에타 합창단을 염두에 두고 쓰인 만큼, 남성 저음이 아니라 높은 음역대가 두드러진다는 점을 떠올리며 들으면 좋다.
III. 인쇄된 이름 · 1711–1725 (33–47세)
(출판) 암스테르담의 출판업자 에티엔 로제를 통해 그의 협주곡집들이 잇달아 유럽 전역에 퍼졌다. 손으로 베낀 악보가 궁정과 교회를 오가던 시절, 인쇄된 악보는 그의 이름을 이탈리아 밖 낯선 도시의 연주자들에게까지 실어 날랐다. (형식) 그는 빠르고-느리고-빠른 세 악장의 협주곡 형식을 표준으로 굳혔고, 독주 악기가 기교를 뽐내는 대목과 합주가 반복되는 대목을 선명하게 대비시켰다. 이 명료한 구조는 이후 협주곡이라는 장르 자체의 틀이 되었다. (피센델) 1716년 무렵 작센의 궁정 바이올리니스트 요한 게오르크 피센델이 베네치아로 유학을 왔다. 그는 피센델을 제자이자 벗으로 아꼈고, 여러 협주곡을 그를 위해 써 악보 위에 이름을 적어 남겼다. 피센델이 이단 심문소의 의심을 받았을 때는 직접 나서서 그의 결백을 보증해주기도 했다. (사계) 1725년, 열두 곡으로 이루어진 협주곡집 '화성과 창의의 시도'(Op.8)를 펴냈다. 그 앞자리를 차지한 네 곡, 봄·여름·가을·겨울이 바로 오늘날 '사계'로 불리는 곡들이다. 각 곡 앞에는 새소리와 뇌우, 추수와 사냥을 묘사한 소네트가 붙어, 무엇을 그린 음악인지 듣는 이가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역설) 숨쉬기조차 버거운 지병을 평생 안고 살았던 그가, 정작 악보 위에서는 폭풍과 질주와 활력을 그려냈다는 사실은 그의 음악을 듣는 또 하나의 실마리가 된다.
숨쉬기조차 버거운 병을 평생 안고 산 그가 폭풍과 뇌우, 흥겨운 춤을 그려낸 아이러니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 '봄' 1악장 도입부는 함께 붙인 소네트에 따라 새소리를 묘사한 것으로, 바이올린이 짧고 빠르게 같은 음을 떨듯 반복하는 트릴 주법으로 지저귐을 흉내 낸다.
- '여름' 3악장은 소네트가 명시한 '뇌우'를 그린 대목으로, 현악 전체가 빠르게 오르내리며 몰아쳐 독주 바이올린의 기교가 가장 시험받는 순간으로 꼽힌다.
- '가을' 2악장은 술 취해 잠든 농부들의 느린 숨결을, 낮은 현들이 끊길 듯 이어지는 화음으로 그려낸다고 알려져 있다.
- '겨울' 2악장에서는 현이 손가락으로 뜯듯 연주하는 피치카토 주법으로 창밖의 빗방울 소리를 흉내 내는 동안, 독주 바이올린이 난롯가의 평온한 선율을 노래한다.
IV. 무대의 흥행사 · 1718–1737 (40–59세)
(전환) 1718년, 만토바를 다스리던 헤센다름슈타트 후작 필리포의 궁정악장으로 자리를 옮기며 본격적으로 오페라에 뛰어들었다.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쉰 편 안팎의 오페라를 쓰고, 상당수는 직접 극장을 빌려 무대에 올리는 흥행사 노릇까지 했다. (만남) 만토바에서 젊은 가수 안나 지로를 만났다. 그는 그녀를 베네치아로 데려와 노래를 가르쳤고, 1720년대 중반부터 그녀는 그의 오페라마다 주역을 맡는 프리마돈나가 되었다. (동행) 안나와 그녀의 언니 파올리나가 늘 그를 따라다니며 여행길을 함께했다. 파올리나는 지병에 시달리는 그를 간병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전해진다. 사제 신분으로 독신이었던 그가 젊은 여성과 늘 동행하는 모습은 자연스레 뒷말을 낳았다. (항변) 그는 후원자였던 페라라의 벤티볼리오 후작에게 보낸 편지에서 안나와의 관계는 순수한 우정이며 자신의 건강 때문에 그녀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거듭 해명했다. 자신의 결백을 굽히지 않고 방어하는 태도에서 자존심 강하고 물러설 줄 모르는 성격이 드러난다. (재정) 오페라 사업은 큰돈을 벌어들일 때도 있었지만 그만큼 위험도 컸다. 극장 임대료와 가수 섭외비, 경쟁 극장과의 다툼으로 그는 여러 차례 손해를 감수해야 했고, 화려한 명성과 달리 그의 살림은 늘 사업의 성패에 좌우되었다.
만토바에서 만난 안나 지로를 프리마돈나로 세워 성공시킨 오페라로, 흥행사로서의 그의 감각을 잘 보여준다.
- 마법사 알치나가 처음 등장하는 아리아는 빠르고 장식적인 음의 움직임으로 기교를 과시하는 콜로라투라 창법으로 쓰여, 그녀의 위험한 매혹을 드러낸다.
- 오를란도가 실연으로 광기에 빠지는 장면에서는 갑작스러운 조성 변화가 잇따라, 인물의 정신적 혼란을 음악으로 옮겨놓았다고 해석된다.
- 안나 지로의 목소리와 기량을 염두에 두고 쓰인 배역인 만큼, 그녀에게 맞춰졌을 화려한 대목들을 짐작하며 들어볼 수 있다.
V. 문 앞에서 거절당하다 · 1737–1740 (59–62세)
(추방) 1737년, 페라라의 교황 특사 루포 추기경은 그의 도시 입성을 금지했다. 명분은 그가 사제이면서 미사를 드리지 않는다는 것과 안나 지로와 함께 다닌다는 것이었다. 계약해둔 오페라 공연은 그가 현장에 갈 수 없게 되며 무산되었고, 이는 그에게 상당한 금전적 손실을 안겼다. (분노) 그는 벤티볼리오 후작에게 보낸 편지에서 억울함과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자신의 신앙과 평판을 걸고 안나와의 관계에 아무런 부정함이 없다고 항변했지만, 추기경의 결정은 뒤집히지 않았다. (황제) 앞서 1728년, 그는 트리에스테를 방문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6세를 알현했다. 황제는 그와 나눈 대화를 대단히 흡족해해, 몇 주 사이에 자신의 대신들과 나눈 것보다 많은 이야기를 그와 나누었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그는 협주곡집 '라 체트라'(Op.9)를 황제에게 헌정했다. (쇠퇴) 그러나 베네치아의 청중은 점차 새로운 취향의 오페라로 옮겨갔고, 한때 도시를 대표했던 그의 음악은 낡은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페라라 사건은 그런 흐름 속에서 그의 입지를 한층 더 흔들었다. (결심) 1740년, 그는 황제의 총애를 마지막 희망으로 삼아 빈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피에타에 남아 있던 자신의 협주곡 악보들을 헐값에 팔아넘겼고, 그 길로 베네치아를 다시 밟지 못했다.
트리에스테에서 만난 황제 카를 6세에게 바친 협주곡집으로, 궁정의 취향에 맞춘 절제된 우아함이 앞선 '사계'류와 대비된다.
- 황제에게 바친 곡답게 여러 선율이 독립적으로 얽히며 진행되는 대위법적 짜임새가 이전 협주곡들보다 한층 정교해졌다.
- 몇몇 곡에서 독주 바이올린이 두세 음을 한꺼번에 켜는 화음주법이 두드러져, 연주자의 왼손 기교를 가장 잘 보여주는 협주곡집으로 꼽힌다.
- '사계'처럼 자연을 묘사하기보다 궁정에 어울리는 절제된 우아함을 앞세운 점에서, 후원자의 취향에 맞춰 스스로를 조율한 흔적을 들을 수 있다.
VI. 빈의 마지막 숨 · 1740–1741 (62–63세)
(도착) 1740년 빈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가 기댈 것으로 믿었던 황제 카를 6세가 그해 10월 세상을 떠났고, 뒤이어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터지며 궁정은 상중에 극장 문을 닫았다. 새로운 후원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빈곤) 베네치아의 인맥과 수입원에서 멀리 떨어진 채, 그는 낯선 도시에서 궁핍에 시달렸다. 이미 악보 대부분을 팔아넘긴 뒤였기에 기댈 곳이 많지 않았다. (죽음) 1741년 7월 28일, 그는 빈에서 눈을 감았다. 사인은 '내부의 염증' 정도로만 기록되었는데, 평생 그를 괴롭힌 가슴 질환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장례는 소박하게 치러졌고, 그는 시립 병원 부속 묘지에 가난한 이들과 함께 묻혔다. (전설) 그의 장례식에서 소년 합창단원 한 명이 노래를 불렀는데, 그중에 어린 요제프 하이든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당시 하이든이 성 슈테판 대성당의 소년 성가대원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날 그가 실제로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재발견) 죽은 뒤 그의 이름은 거의 두 세기 동안 잊혔다. 그러다 1920~30년대, 토리노의 한 도서관에서 그의 방대한 육필 악보 뭉치가 발견되면서 재조명이 시작되었다. 오늘날 '사계'는 그를 몰랐던 사람조차 흥얼거릴 만큼 널리 사랑받는 곡이 되었다.
용어 노트 📚🔎
리토르넬로 형식
합주가 후렴처럼 되풀이되고 그 사이사이 독주가 끼어드는 협주곡의 기본 구조다. 비발디가 다듬어 이후 협주곡 장르의 표준이 되었다.
통주저음
악보에 화음만 표시해두고 연주자가 즉흥으로 반주를 채워 넣는 저음 파트다. 바로크 시대 실내악과 협주곡을 떠받치는 기초였다.
콜로라투라
빠르고 장식적인 음의 움직임으로 가수의 기교를 과시하는 창법이다. 오페라에서 강렬한 인물을 표현할 때 자주 쓰였다.
대위법
여러 선율이 각자 독립적으로 얽히며 함께 진행되는 작곡 기법이다. 복잡하고 정교한 짜임새를 만든다.
피치카토
활 대신 손가락으로 현을 뜯어 연주하는 주법이다. 빗방울이나 발걸음처럼 짧고 톡톡 끊어지는 소리를 낼 때 쓰인다.
트릴
인접한 두 음을 아주 빠르게 반복해 떨리는 듯한 소리를 내는 주법이다. 새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를 흉내 낼 때 즐겨 쓰였다.
소네트
14행으로 이루어진 짧은 시 형식이다. '사계'에서는 각 협주곡이 무엇을 그리는지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