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ann Sebastian Bach
"나는 근면해야 했다. 누구든 나만큼 근면하다면 나만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한눈에 보기 🔭💭
곁의 사람들 ⏳🌊
- 가족요한 암브로시우스 바흐아버지이자 아이제나흐의 시립 악사로, 어린 바흐에게 처음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 스승요한 크리스토프 바흐고아가 된 동생을 거두어 키우며 건반과 작곡의 첫걸음을 가르친 맏형이었다.
- 영향디트리히 북스테후데뤼벡까지 걸어가 그의 연주를 들은 경험이 젊은 바흐의 오르간 어법을 크게 뒤흔들었다.
- 가족마리아 바르바라 바흐사촌이자 첫 아내로 여러 자녀를 낳았으나, 남편이 여행 중이던 사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 우정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평생의 벗이자 당대 더 큰 명성을 누린 동료로, 아들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의 대부가 되어주었다.
- 가족안나 막달레나 바흐궁정 소프라노 출신의 두 번째 아내로, 남편의 악보를 필사하며 음악적 동반자로 함께했다.
I. 아이제나흐의 소년 · 1685–1695 (0–10세)
(가문) 바흐 집안은 튀링겐 지방 곳곳에서 오르가니스트와 시립 악사를 대대로 배출한 음악가 가문이었다. 요한 제바스티안이 태어날 무렵 그 지역에서 '바흐'라는 성은 이미 '악사'와 거의 같은 말로 통했으며, 이 오래된 가풍은 훗날 그 자신에게도 강한 직업적 자부심의 뿌리가 되었다. (부모) 1685년 3월, 신성로마제국(오늘날 독일) 튀링겐의 도시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요한 암브로시우스 바흐는 아이제나흐 시의 트럼펫과 현악을 맡은 시립 악사였고, 어머니 마리아 엘리자베트 래머히르트는 이웃 도시 에르푸르트의 모피 상인 집안 출신이었다. 여덟 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아버지에게서 처음 바이올린을 배웠다. (상실) 아홉 살이던 1694년 5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그해 겨울 재혼했지만 이듬해 2월 자신도 숨을 거두었다. 채 일 년이 되지 않아 부모를 모두 잃은 소년에게 아이제나흐의 라틴어 학교와 성가대는 유일하게 남은 안정된 일상이었다. 형제자매 중 몇몇도 이미 어릴 때 세상을 떠난 뒤였다. (이주) 고아가 된 그는 오르드루프의 오르가니스트로 일하던 맏형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의 집에 맡겨졌다. 열 살 소년은 형의 집 문지방을 넘으며 처음으로 오르간이라는 악기, 그리고 새로운 가족과 한 지붕 아래 살게 되었다.
II. 오르드루프와 뤼네부르크 · 1695–1703 (10–18세)
(형) 형 요한 크리스토프는 동생에게 건반과 작곡의 기초를 가르친 첫 스승이었다. 훗날 제자 포르켈이 전한 이야기로는, 형이 아끼며 보여주지 않던 유명 작곡가들의 악보 모음을 어린 동생이 몰래 꺼내 달빛 아래서 여섯 달에 걸쳐 손으로 베껴 썼다고 한다. 그 필사본을 들킨 뒤 형에게 빼앗겼다는 일화는 뒷날 다소 각색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악보에 대한 소년의 굶주림만은 뚜렷이 전해진다. (도보) 1700년, 열다섯의 나이에 뤼네부르크의 성 미하엘 학교 성가대 장학생으로 뽑혀 홀로 먼 길을 떠났다. 목소리가 아름다운 소년들을 뽑는 합창단에 들며 숙식과 학비를 해결했고, 학교의 방대한 악보 도서관을 마음껏 드나들 수 있었다. (귀명) 변성기를 지나며 노래 대신 오르간과 작곡에 몰두했다. 인근 함부르크까지 걸어가 노년의 오르가니스트 요한 아담 라이켄의 즉흥연주를 듣고, 뤼네부르크의 오르가니스트 게오르크 뵘에게서도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에 들은 북독일 오르간 악파의 화려한 즉흥과 대담한 화성은 훗날 그의 오르간 작품 전반에 짙게 배어들었다. (홀로서기) 1702년 학업을 마친 뒤 잠시 바이마르 궁정에서 하급 악사로 일했다가, 이듬해 아른슈타트의 새 교회에 새로 들여온 오르간을 맡을 오르가니스트로 초빙되었다. 열여덟, 부모도 형의 그늘도 없이 처음으로 제 몫의 급여를 받는 자리였다.
III. 아른슈타트와 뮐하우젠 · 1703–1708 (18–23세)
(첫직) 아른슈타트 새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부임해 매주 예배 반주와 학생 지도를 맡았다. 급여는 넉넉하지 않았지만 새로 지은 오르간을 마음껏 다룰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자유였다. 다만 성가대 학생들을 지도하는 일에는 별 흥미가 없어 곧잘 마찰을 빚었고, 이때부터 이미 회중보다 음악 자체를 앞세우는 성향을 드러냈다. (뤼벡) 1705년 가을, 4주의 휴가를 얻어 걸어서 400킬로미터 가까운 뤼벡까지 향했다. 그곳의 오르가니스트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의 저녁 음악회를 직접 듣기 위해서였다. 그의 연주에 사로잡혀 예정된 기간을 훌쩍 넘긴 넉 달 가까이 머물렀다. (충돌) 돌아온 뒤 교회 당국은 지나친 결근을 문책했고, 이어 그의 코랄 반주에 회중이 따라 부르지 못할 만큼 '낯설고 기이한 변주'가 섞여 있다며 나무랐다. 예배당에 허락 없이 '낯선 처녀'를 데려와 노래하게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는데, 그 처녀는 훗날 아내가 될 사촌 마리아 바르바라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혼인) 1707년 뮐하우젠의 디비블라지 교회로 자리를 옮겼고, 그해 10월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알던 사촌 사이였다. 화재로 폐허가 된 마을을 위한 시의회 취임 축하곡을 쓰는 등 의욕적으로 일했지만, 교회 재정과 신학 노선을 둘러싼 갈등에 실망해 이듬해 다시 자리를 옮기기로 결심했다.
아른슈타트 시절 다루던 새 오르간의 울림을 시험하듯, 젊은 오르가니스트의 대담한 즉흥이 악보로 옮겨진 곡이라 전해진다.
- 도입부의 하강하는 짧은 음형(모티프)이 천둥처럼 울리며 시작해, 첫 소절부터 청중을 사로잡는다.
- 토카타(자유롭게 손가락을 풀어내듯 연주하는 즉흥적 악곡) 부분은 오르간 페달로 낮은 음을 굴리듯 밟아 내는 대목이 유명하다.
- 이어지는 푸가(하나의 주제가 여러 성부에서 차례로 등장해 쌓이는 악곡)는 짧은 주제가 성부마다 겹겹이 쌓이며 웅장해진다.
- 영화·공연에서 '무서운 장면'의 상징음악처럼 흔히 쓰이지만, 정작 이 곡을 바흐가 직접 썼는지는 오늘날에도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거리다.
IV. 바이마르 · 1708–1717 (23–32세)
(승진) 1708년 바이마르 궁정의 오르가니스트로 부임했다. 안정된 급여와 뛰어난 오르간, 문예를 아끼는 공작의 후원 아래 다수의 오르간 걸작을 써냈다. 1714년에는 콘체르트마이스터로 승진해 매달 새 칸타타를 작곡하는 임무를 맡았다. (자녀) 바이마르에서 마리아 바르바라와의 사이에 여러 자녀가 태어났다. 맏딸 카타리나 도로테아, 훗날 뛰어난 오르가니스트가 되는 빌헬름 프리데만, 1713년에는 쌍둥이가 태어났으나 곧 세상을 떠났고, 1714년에는 훗날 아버지보다 더 유명해질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이 태어났다. 잦은 출산과 죽음을 거듭 겪으며 가정을 꾸려간 시기였다. (경연) 1717년 드레스덴에서 프랑스의 건반 명인 루이 마르샹과 즉흥연주 대결을 벌이기로 했으나, 마르샹은 대결 당일 도시를 떠나버렸다. 소문은 그의 명성을 한층 높였고, 동시에 그가 결코 만만한 경쟁자가 아님을 유럽 악단에 각인시켰다. (구금) 같은 해, 궁정악장 자리가 자신이 아닌 다른 이의 아들에게 돌아가자 크게 실망해 사직을 요구했다. 공작 빌헬름 에른스트는 그 무례함을 문제 삼아 그를 거의 한 달간 구금했다가, 불명예 제대라는 조건으로 풀어주었다. 자존심과 정당한 대우를 향한 고집이 평생 그를 따라다닌 성격임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V. 쾨텐 · 1717–1723 (32–38세)
(자유) 쾨텐의 레오폴트 공은 스스로 악기를 다루는 음악 애호가였고, 칼뱅파 궁정이라 교회음악의 부담이 거의 없었다. 공의 신뢰 아래 오로지 기악곡에 몰두할 수 있었던 이 시절을 그는 훗날 가장 행복했던 때로 회고했다. (상실) 1720년 여름, 공을 수행해 카를스바트 온천에 다녀오는 사이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쾨텐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이미 땅에 묻힌 뒤였다. 아무런 작별도 없이 아내를 잃은 충격은 훗날 그가 쓴 몇몇 건반곡의 어둡고 사색적인 분위기에 흔적을 남겼다는 해석이 있다. (재혼) 이듬해 궁정 소프라노 안나 막달레나 빌케와 재혼했다. 나팔수의 딸로 자신보다 열여섯 살 어렸던 그녀는 음악적 소양이 뛰어나 남편의 악보를 정성껏 필사했고, 그를 위해 쓰인 두 권의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소책자'는 부부가 함께 음악을 나눈 흔적으로 남아 있다. (걸작) 이 시기에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1권, 무반주 첼로 모음곡,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 등 오늘날 가장 사랑받는 기악 걸작 다수가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1721년 공이 음악에 무관심한 왕족과 결혼하며 궁정의 음악 지원이 줄자, 그는 다시 새 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쾨텐의 세속음악 황금기,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에게 헌정한 여섯 협주곡 중 하나로 궁정악단의 기량을 자랑하듯 화려하게 짜여 있다.
- 바이올린 셋, 비올라 셋, 첼로 셋이 각각 독립된 성부로 나뉘어 아홉 명이 대화하듯 주고받는 짜임이 이 곡의 핵심이다.
- 1악장은 같은 리듬을 여러 성부가 쫓고 쫓기듯 되풀이하는 모방(카논) 기법으로 시종 활기를 유지한다.
- 느린 2악장은 단 두 개의 화음만 악보에 적혀 있어, 연주자가 그 사이를 즉흥으로 채워 넣는 관습이 지금도 이어진다.
- 3악장 피날레는 빠른 템포로 성부들이 계단을 오르내리듯 주고받아, 실내악단이 한 몸처럼 움직이는 쾌감을 준다.
쾨텐에서 자녀 교육과 건반 연습을 위해 모든 장조와 단조로 전주곡과 푸가를 쌍으로 써낸 방대한 작업으로, 이후 건반음악의 교과서가 되었다.
- 첫 곡 다장조 전주곡은 화음을 한 음씩 펼쳐 흐르게 하는 분산화음(아르페지오)만으로 이루어져, 단순함 속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 스물네 개 조성을 모두 다루었다는 점 자체가 당시로서는 파격이었다. 건반 조율법이 아직 정착되지 않았던 시기, 모든 조를 쓸 수 있음을 증명하려는 의도가 담겼다.
- 각 전주곡-푸가 쌍은 성격이 뚜렷이 갈려, 애호가들 사이에서 좋아하는 조성을 두고 취향이 갈리곤 한다.
- 푸가마다 주제가 성부 사이를 옮겨 다니는 순서를 눈으로 좇아 들으면, 짜임이 마치 건축물처럼 정교하게 들린다.
반주 없이 첼로 홀로 연주하는 파격적인 형식으로, 쾨텐 궁정의 뛰어난 첼리스트를 염두에 두고 쓴 것으로 짐작된다.
- 서곡의 첫 소절은 낮은 음에서 시작해 물결치듯 오르내리는 선율 하나로 화성 전체를 암시하는데, 첼로 한 대로 다성 음악의 울림을 만들어내는 대목이다.
- 각 조곡은 알르망드, 쿠랑트, 사라반드 등 당대 춤곡의 순서를 그대로 따르는데, 사라반드 악장의 느리고 무거운 리듬이 애호가들 사이에서 감정의 절정으로 꼽힌다.
- 오랫동안 연습곡 취급을 받다가 20세기 첼리스트 파블로 카살스가 무대 레퍼토리로 되살려낸 사연은 지금도 회자된다.
- 반주 없이 화성과 선율을 동시에 들려주어야 하는 까닭에, 어느 음을 길게 끌고 어느 음을 짧게 끊는지 연주자마다 해석이 크게 갈린다.
VI. 라이프치히의 칸토어 · 1723–1739 (38–54세)
(칸토어) 1723년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의 칸토어로 부임했다. 시내 네 교회의 음악을 총괄하고 토마스 학교 학생들에게 음악은 물론 라틴어까지 가르쳐야 하는 자리였는데, 라틴어 수업은 보수를 나눠주고 다른 교사에게 넘기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시의회는 애초 그를 최우선으로 원하지 않았고, 텔레만 등 다른 후보가 고사한 뒤에야 그에게 차례가 돌아왔다는 사정도 훗날 알려졌다. (수난) 부임 첫 몇 해 동안 거의 매주 새 칸타타를 써내는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했다. 1724년 성 요한 수난곡을, 1727년에는 성 마태 수난곡을 초연했다.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소재에 자신의 신앙과 상실의 경험을 겹쳐 넣듯, 합창과 독창과 관현악을 입체적으로 엮어 예배음악을 하나의 거대한 서사로 끌어올렸다. (갈등) 급여는 고정 급료보다 결혼식과 장례식 사례금 비중이 커서, 어느 해 사망자가 적어 수입이 줄었다고 불평하는 편지를 남기기도 했다. 1730년대에는 학교 부총장 에르네스티와 학생 지도권을 둘러싸고 공개적으로 다투었고, 시의회에는 자신의 권한과 예산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여러 차례 올렸다. 권위에 굽히지 않는 완고함은 동료들 사이에서 존경과 피로를 동시에 낳았다. (자녀들) 두 아내 사이에 모두 스무 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절반 가까이가 어려서 세상을 떠났다. 살아남은 아들 가운데 빌헬름 프리데만과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그리고 뒤에 태어난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와 요한 크리스티안은 모두 저마다 이름난 음악가로 자랐다. 자신의 악보와 대위법 훈련을 직접 물려주면서도, 자녀들이 자신과는 다른 새로운 시대의 음악어법으로 나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토마스칸토어로서 해마다 써내야 했던 교회음악의 정점으로, 마태복음의 수난 이야기를 합창과 독창, 관현악으로 입체적으로 그려낸 대작이다.
- 개막 합창은 두 개의 합창단과 오케스트라가 서로 부르고 답하며 애통해하는 장면을 그리는데, 그 위로 소년 합창단이 코랄(회중이 함께 부르던 찬송가 선율)을 얹어 부르는 겹겹의 구조가 압권이다.
- 예수의 대사에는 현악기 반주가 늘 은은한 후광처럼 따라붙다가,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대목에서만 그 후광이 사라지는데, 가사에 맞춘 의도적 설계로 알려져 있다.
-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뒤 부르는 알토 아리아 '자비를 베푸소서'는 독주 바이올린의 흐느끼는 듯한 선율이 참회의 감정을 대신 노래한다.
- 마지막 합창 '우리는 눈물로 앉아'는 잔잔히 가라앉는 화성으로 곡 전체를 닫는데, 연주 시간이 세 시간에 달해 종교 예식이자 하나의 대서사로 경험된다.
VII. 말년 · 1739–1750 (54–65세)
(골드베르크) 1741년경, 불면에 시달리던 카이저링크 백작을 위해 제자 골드베르크가 밤마다 연주할 곡을 써 달라는 청을 받아 서른 개의 변주로 이루어진 대작을 완성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실 여부와 별개로, 이 곡은 평생 쌓아온 건반 기법과 대위법을 하나로 응축한 결실이었다. (포츠담) 1747년, 베를린 궁정에서 일하던 아들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을 통해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청을 받아 포츠담을 방문했다. 왕이 즉석에서 던진 까다로운 주제를 그 자리에서 즉흥으로 풀어낸 뒤, 라이프치히로 돌아와 이를 정교하게 다듬어 '음악의 헌정'이라는 이름으로 왕에게 바쳤다. 노년의 그가 여전히 유럽에서 가장 경외받는 즉흥연주자였음을 보여준 사건이다. (실명) 만년에는 시력이 급격히 나빠졌다. 1750년 영국인 안과의사 존 테일러에게 두 차례 백내장 수술을 받았으나 상태는 오히려 악화되어 완전히 시력을 잃었다. 그런 와중에도 하나의 주제로 가능한 모든 대위법적 변형을 시도하는 '푸가의 기법'을 붙들고 있었다. (죽음) 1750년 7월 28일, 수술 후유증으로 짐작되는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푸가의 기법'은 끝내 미완성으로 남았다. 아내 안나 막달레나는 이후 가난 속에 시의 구휼로 연명하다 1760년 숨을 거두었고, 그의 악보 상당수는 자녀들에게 흩어져 일부는 영영 사라졌다. 반세기 가까이 잊혔던 그의 음악은 1829년 멘델스존이 성 마태 수난곡을 다시 무대에 올리면서 비로소 오늘날의 자리를 되찾았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불면에 시달리던 카이저링크 백작을 위해 위촉되었다고 하나, 실제로는 건반음악의 집대성을 겨냥한 독립 출판물이었다.
- 처음과 끝에 똑같이 등장하는 느린 아리아(노래하듯 부르는 선율)는 서른 개의 변주를 감싸는 액자 역할을 하며, 마지막에 이 선율이 그대로 되돌아올 때 긴 여정이 닫히는 느낌을 준다.
- 변주는 세 곡마다 한 번씩 캐논(같은 선율을 시간차를 두고 뒤따라 부르는 기법)이 배치되어 있고, 그 시차 간격이 곡이 진행될수록 한 음씩 넓어지는 정교한 설계가 숨어 있다.
- 25번 변주는 유난히 반음계가 많고 어두운 화성으로 흘러 연주자들 사이에서 '검은 진주'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 30번 변주는 당대 유행하던 민요 선율 두 곡을 겹쳐 넣은 콰들리벳(여러 선율을 함께 짜 넣는 장난기 있는 기법)으로, 진지한 여정 끝에 웃음을 던지는 대목이다.
포츠담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이 즉석에서 던진 까다로운 주제를 즉흥으로 풀어낸 뒤, 라이프치히로 돌아와 정교한 대위법 모음으로 완성해 왕에게 헌정했다.
- 왕이 낸 주제(왕의 주제)는 반음계로 뒤틀려 있어 푸가로 다루기 몹시 까다로운데, 바흐는 이를 3성 리체르카레(옛 스타일을 되살린 엄격한 대위법 악곡)로 즉석에서 풀어낸 뒤 훗날 6성으로 확장했다.
- '게 카논'이라 불리는 대목은 악보를 거꾸로 읽어도 똑같은 음악이 되도록 짜여 있어, 연주자와 학자들이 지금도 그 퍼즐을 풀이하는 재미로 삼는다.
- 무한 상승 카논은 조성이 한 바퀴 돌 때마다 반음씩 높아지도록 설계되어, 끝없이 올라가는 듯한 착시를 음악으로 구현했다.
- 플루트가 포함된 트리오 소나타 악장은 학자적인 대위법 사이에서 가장 노래하듯 편안하게 들리는 대목으로 꼽힌다.
하나의 단순한 주제만으로 가능한 모든 대위법적 변형을 시험한 마지막 대작으로, 죽음으로 인해 미완성으로 남았다.
- 앞쪽의 단순 푸가들은 같은 주제를 정방향과 역방향(거꾸로 뒤집은 선율)으로 번갈아 들려주어, 하나의 씨앗이 어떻게 다른 모습으로 자라나는지 비교하며 듣는 재미가 있다.
- 곡이 진행될수록 주제가 점점 복잡한 옷을 입어, 후반부의 다중 푸가는 여러 주제가 동시에 얽히며 쌓이는 구조를 이룬다.
- 마지막 곡은 필사본에서 바흐 이름의 음이름(B-A-C-H, 독일식 음이름으로 시-라-도-시에 해당)을 주제로 등장시킨 뒤, 악보가 돌연 멈춘 채 끝난다. 아들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은 이 대목에 '작곡가가 여기서 세상을 떠났다'고 적어 넣었다.
- 어떤 악기로 연주하라는 지시가 악보에 없어, 오르간과 건반악기부터 현악 앙상블까지 다양한 편성으로 연주되며 저마다 다른 색채를 들려준다.
용어 노트 📚🔎
토카타
손가락을 풀 듯 자유롭고 화려하게 연주하는 즉흥적 성격의 건반·오르간 악곡. 흔히 푸가와 짝을 이루어 뒤에 붙는다.
푸가
하나의 주제가 여러 성부에 차례로 등장해 서로 쫓고 얽히며 쌓여가는 다성음악 형식. 바흐는 이를 극한까지 발전시킨 작곡가로 꼽힌다.
코랄
본디 루터파 교회에서 회중이 함께 부르던 찬송가 선율. 바흐는 이를 칸타타와 수난곡 곳곳에 편곡해 심었다.
카논
같은 선율을 다른 성부가 일정한 시차를 두고 그대로 뒤따라 부르는 엄격한 모방 기법.
리체르카레
16~17세기에 유행한, 옛 스타일을 따르는 엄격하고 학구적인 대위법 악곡.
아리아
성악에서는 관현악 반주를 곁들인 독창곡을, 건반음악에서는 노래하듯 유려한 선율의 악장을 가리킨다.
콰들리벳
서로 다른 여러 선율이나 노래를 짜 맞추어 함께 들려주는 장난기 있는 작곡 기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