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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menico Scarlatti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1685–1757)

"독자여, 딜레탕트든 전문가든, 이 곡들에서 심오한 학식을 기대하지 말고 예술과 더불어 재치 있게 노니는 유희를 기대하시라." — 『에세르치치 페르 그라비쳄발로』 서문에서

한눈에 보기 🔭💭

1. 뿌리이탈리아 나폴리 출생오르간 명가아버지 알레산드로2. 방랑피렌체 베네치아카펠라 줄리아 악장헨델과의 대결3. 독립아버지와 결별리스본 부임바르바라 사사4. 이베리아스페인 정착기타 캐스터네츠 모방555 소나타5. 상실아내 사망재혼도박 빚6. 말년파리넬리 우정마드리드 죽음호로비츠의 재발견스카를라티1685–1757나폴리 오페라 명가의 아들로 태어나 마드리드에…
삶의 여정 🧭🗺️
N스페인이탈리아나폴리1685–1701로마1702–1719리스본1719–1729세비야1729–1733마드리드1733–1757

곁의 사람들 ⏳🌊

  • 가족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
    당대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였던 아버지로, 아들의 재능을 아끼면서도 평생 통제하려 했다.
  • 후원
    피에트로 오토보니
    로마의 추기경으로 그의 실내 오페라와 칸타타를 후원했고, 헨델과의 유명한 건반 대결을 마련했다.
  • 경쟁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1709년경 로마에서 건반 대결을 벌인 상대로, 이후 그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성호를 그으며 경의를 표했다고 전해진다.
  • 후원
    마리아 바르바라
    리스본과 마드리드에서 그를 가르친 왕녀이자 훗날의 스페인 왕비로, 그의 소나타 대부분이 그녀를 위해 쓰였다.
  • 가족
    마리아 카테리나 젠틸리
    1728년 결혼한 아내로, 1742년 마드리드에서 세상을 떠났다.
  • 우정
    파리넬리
    마드리드 궁정의 카스트라토 가수로, 궁정에 매인 처지를 서로 이해하며 오랜 우정을 나눴다.

I. 나폴리의 아들 · 1685–1701 (0–16세)

(나폴리) 1685년 10월,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태어났다. 세례명까지 합치면 이름이 길게 이어졌으나 훗날에는 도메니코 스카를라티로만 불렸다. 나폴리는 유럽에서 손꼽히는 오페라의 도시였고, 그는 그 소란스러운 극장 문화 한복판에서 자랐다. (아버지) 아버지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는 당대 이탈리아 오페라를 대표하는 작곡가였다. 아들의 재능을 일찍 알아보았으나, 동시에 그 재능을 철저히 자신의 통제 아래 두려 했다. 아버지의 그림자는 도메니코가 서른을 넘길 때까지도 그를 떠나지 않았다. (형제) 어머니 안토니아 안찰로네는 열 명 가까운 자녀를 낳았고, 도메니코는 그 가운데 하나였다. 형 피에트로 필리포 역시 오르가니스트로 자랐으니, 스카를라티 집안은 대대로 건반과 성가대 사이에서 사는 음악 명가였다. (교육) 나폴리 왕실 예배당의 음악가들 밑에서, 그리고 가에타노 그레코로 추정되는 스승 아래에서 건반과 작곡을 익혔다. 성악 중심의 나폴리 악파 속에서 그는 목소리를 다루듯 손가락을 다루는 법을 배웠다. (등단) 1701년, 열여섯의 나이로 나폴리 왕실 예배당의 오르가니스트 겸 작곡가로 임명되었다. 아버지의 후광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의 실력은 이미 어린 나이에 궁정이 인정할 만한 것이었다.

II. 로마의 재사와 헨델 · 1702–1719 (17–34세)

(방랑) 1702년, 아버지를 따라 피렌체로 향했다. 나폴리에 아들을 묶어두고 싶지 않다며 알레산드로가 메디치 가문에 보낸 편지에는, 날개가 다 자랐으니 둥지를 떠나야 할 매 한 마리라는 표현이 남아 있다. 이후 몇 해 동안 로마와 베네치아를 오가며 자리를 구했다. (베네치아) 1705년 무렵 베네치아에 머물며 프란체스코 가스파리니에게서 배웠다고 전해진다. 아일랜드 출신 오르가니스트 토머스 로진그레이브가 이 도시에서 그의 연주를 듣고 압도되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로진그레이브는 훗날 런던에서 그의 이름을 알리는 데 힘쓴 인물이 된다. (대결) 1709년경 로마에서, 추기경 피에트로 오토보니의 저택에 마련된 자리에서 헨델과 건반 대결을 벌였다. 하프시코드에서는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으나 오르간에서는 헨델이 앞섰다는 평이 남았다. 이후 스카를라티는 누군가 헨델의 이름을 꺼낼 때마다 성호를 그으며 경의를 표했다고 전해진다. (궁정) 오토보니와, 로마에 망명해 있던 폴란드의 마리아 카시미라 왕비의 후원으로 실내 오페라와 칸타타를 썼다. 1713년에는 바티칸 산피에트로 대성당의 카펠라 줄리아 악장으로 임명되어 교회음악을 책임지는 위치에 올랐다. (결별) 1717년, 아버지로부터 법적으로 독립하는 문서를 받아냈다. 서른 넘은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공증까지 거쳐야 했다는 사실은, 두 사람 사이의 애정과 억압이 얼마나 뒤엉켜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스타바트 마테르 (10성부, a 10 voci)1715년경 (30세)

카펠라 줄리아 악장 시절 로마 바티칸을 위해 쓴 종교음악으로, 오페라 작곡가 아버지의 유려함이 엄격한 교회양식과 만나는 지점을 보여준다.

  • 열 성부의 목소리가 겹겹이 쌓여가는 도입부는, 십자가 곁에 서 있는 슬픔에 잠긴 성모를 그린 라틴어 가사의 무게를 소리로 구현한 것처럼 들린다.
  • 나폴리 오페라 작곡가의 아들다운 유려한 선율선이, 여러 성부가 각자 독립된 선율로 얽혀가는 짜임새(대위법)와 맞물리는 대목이 특히 인상적이다.
  • 낮은 성부들이 짧게 탄식을 주고받는 부분은 슬픔이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번져가는 듯 들린다.
  • 후대 페르골레지의 같은 제목 작품과 자주 비교되며, 어느 쪽이 더 절제되어 있는지를 두고 청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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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리스본의 스승 · 1719–1729 (34–44세)

(리스본) 1719년,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옮겨 국왕 주앙 5세의 왕실 예배당 악장으로 부임했다. 로마에서 쌓은 명성이 마침내 안정된 자리로 이어진 것이었으나, 이는 동시에 나폴리와 로마를 떠나 평생 이베리아 반도에 머무는 삶의 시작이기도 했다. (제자) 그의 주된 임무는 국왕의 딸 마리아 바르바라 공주와 아들 안토니오 왕자에게 하프시코드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마리아 바르바라는 뛰어난 재능을 지닌 학생이었고,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이후 평생에 걸친 동행으로 이어진다. (부고) 1725년, 나폴리에서 아버지 알레산드로가 세상을 떠났다. 통제와 존경이 뒤섞였던 관계였던 만큼 그 죽음이 남긴 감정은 단순하지 않았을 것이나, 기록은 침묵하고 있다. 다만 이 무렵부터 그의 음악은 오페라 작곡가 아버지의 화법에서 점차 멀어져 건반 특유의 언어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결혼) 1728년 5월, 로마를 방문한 길에 마리아 카테리나 젠틸리와 결혼했다. 마흔을 넘긴 나이의 결혼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자녀들이 태어났으나, 아버지처럼 음악을 업으로 삼은 자식은 남기지 못했다. (전환) 1729년, 마리아 바르바라가 스페인 왕위 계승자 페르난도 왕자와 혼인하며 마드리드 궁정으로 떠나게 되었다. 스카를라티는 제자를 따라 스페인으로 이주하기로 했다. 리스본에서의 십 년은 그를 이탈리아 오페라의 후계자에서 이베리아 건반 음악의 창시자로 바꾸어 놓은 시간이었다.

건반 소나타 K.1 라단조1738년경 출판 (53세)

커크패트릭 목록의 맨 앞자리에 놓인 곡으로, 마리아 바르바라를 가르치며 시작된 건반 음악 여정의 상징적인 첫 페이지다.

  • 도입부의 급박한 분산화음(화음을 한 음씩 펼쳐 흐르게 하는 아르페지오)은 이후 이어질 오백 곡이 넘는 소나타 전체의 서곡처럼 들린다.
  • 전반부와 후반부가 뚜렷이 나뉘는 짧은 두 도막 형식 안에서도 긴장과 이완이 분명하게 교차한다.
  • 오른손과 왼손이 거의 대등하게 빠른 음형을 주고받는 대목은, 이후 곡들에서 두드러질 손교차(양손이 건반 위에서 서로 자리를 바꾸는 주법)를 예고한다.
  • 목록의 첫머리에 놓인 곡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연주자들이 종종 리사이틀의 문을 여는 곡으로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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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스페인, 새로운 소리 · 1729–1738 (44–53세)

(이주) 1729년 이후 세비야를 거쳐 마드리드에 정착했다. 이탈리아와 포르투갈의 궁정 예법에 익숙했던 그에게 스페인의 공기, 거리의 기타 소리와 무용, 안달루시아 민속 선율은 낯설고도 강렬한 자극이었다. (발견) 거리에서 들려오는 기타의 스트로크와 캐스터네츠의 리듬, 무어인의 흔적이 남은 선율의 굴곡을 건반 위로 옮기기 시작했다. 손을 겹치듯 교차시키고, 일부러 어긋나게 부딪는 음을 섞고, 기타를 퉁기듯 화음을 훑어내리는 그의 소나타들은 이 무렵부터 형태를 갖추어 갔다. (직책) 마리아 바르바라가 왕비가 되기 전인 이 시기에도 그는 계속 그녀의 곁에서 음악을 담당했다. 궁정 음악가로서의 급여는 안정적이었으나 넉넉하지는 않았고, 스페인 왕실 특유의 더딘 지급 관행 속에서 살림을 꾸려야 했다. (출판) 1738년, 하프시코드 연습곡 서른 곡을 묶은 『에세르치치 페르 그라비쳄발로』를 런던에서 출판했다. 로진그레이브의 도움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포르투갈 국왕 주앙 5세에게 헌정되었다. 그해 그는 산티아고 기사 작위도 받았다. 평생 발표한 악보 가운데 생전에 인쇄된 것은 사실상 이 서른 곡이 전부였다.

건반 소나타 K.119 라장조1749년경 (64세)

스페인 거리의 무용과 타악기 소리를 건반으로 옮긴 대표작으로, 그가 발견한 새로운 소리의 세계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 반복되는 화음의 강한 타격은 캐스터네츠(스페인 무용에서 손에 쥐고 부딪는 타악기)의 소리를 흉내 낸 것처럼 들린다.
  • 중반부의 손교차 대목은 오늘날에도 건반 연주자들 사이에서 악명 높은 난이도로 꼽힌다.
  • 저음부의 굵은 화음 진행은 기타를 세게 퉁기는 스트로크 주법을 건반으로 옮겨놓은 듯하다.
  • 매우 빠르게 치닫는 마지막 대목의 속도감은 연주자마다 완급을 다르게 가져가, 해석이 크게 갈리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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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반 소나타 K.141 라단조1750년경 (65세)

기타의 트레몰로 주법을 건반으로 옮긴 곡으로, 이베리아의 거리에서 얻은 자극이 얼마나 직접적으로 손끝에 새겨졌는지를 보여준다.

  • 오른손이 같은 음을 촘촘히 두드리는 반복음(트레몰로) 주법은 기타의 트레몰로 연주를 그대로 건반에 옮겨온 것으로 널리 해석된다.
  • 빠른 템포에서 이 반복음을 손가락으로 고르게 유지하는 것은 건반 레퍼토리에서도 손꼽히는 난제로, 연주자의 기교를 가늠하는 시금석처럼 여겨진다.
  • 중간에 잠깐 나타나는 서정적인 선율은 격렬한 앞뒤 대목과 대비되어 더욱 도드라진다.
  • 호로비츠를 비롯한 20세기 거장들의 녹음을 비교해 들으면 속도와 다이내믹 처리의 차이가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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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상실과 재혼 · 1738–1746 (53–61세)

(상실) 1742년, 아내 마리아 카테리나가 마드리드에서 세상을 떠났다. 결혼 생활은 십사 년에 그쳤다. 자녀들을 남긴 채 아내를 잃은 그는, 이후 몇 해간 이렇다 할 새 작품 발표 없이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재혼) 그리 오래지 않아 스페인 여성 아나스타시아 막사르티 히메네스와 재혼했다. 두 번째 결혼에서도 자녀를 얻었다. 이방인으로 스페인에 뿌리내린 그에게 재혼은 단순한 위안을 넘어, 이 땅에 완전히 정착하겠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도박) 그는 도박에 깊이 빠져 있었다는 증언이 여럿 남아 있다. 카드놀이에서 진 빚을 감당하지 못해 곤경에 처한 그를, 옛 제자였던 왕녀 마리아 바르바라가 대신 갚아 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스승과 제자를 넘어선 신뢰가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도움이었다. (파리넬리) 1737년 마드리드 궁정에 도착한 카스트라토 파리넬리와 가깝게 지냈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국왕 펠리페 5세를 매일 밤 노래로 달래야 했던 파리넬리와, 왕녀를 가르치며 궁정에 매인 스카를라티는 서로의 처지를 알아보는 사이였다. 두 사람은 이후 오랫동안 마드리드 음악계를 함께 이끌었다. (음악) 아내를 잃은 시기를 전후로 쓴 소나타들 가운데는 단조 조성의 느리고 사색적인 곡들이 두드러진다. 화려한 손교차와 리듬의 활력 이면에, 이 무렵부터 그의 음악에는 이전에 없던 그늘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건반 소나타 K.87 나단조1750년경 (65세)

그의 소나타 가운데 드물게 느리고 사색적인 곡으로, 아내를 잃은 시기를 전후로 짙어진 그늘이 음악에 스며든 예로 자주 언급된다.

  • 느린 템포로 낮게 가라앉은 도입 선율은, 그의 소나타 가운데 드물게 노래하듯 슬픈 정서를 오래 붙들고 있다.
  • 오페라 아리아처럼 길게 이어지는 성악적 프레이즈가 두드러져,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나폴리 오페라의 언어가 건반 위에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 화성이 어두운 단조에서 잠시 밝아졌다가 다시 가라앉는 대목은 슬픔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 이어지는 느낌을 준다.
  • 오늘날 이 곡을 아내를 잃은 시기의 심경과 연결지어 듣는 이들이 많으나, 이는 확실한 근거가 있다기보다 후대의 해석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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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만년의 소나타와 죽음 · 1746–1757 (61–72세)

(즉위) 1746년 마리아 바르바라가 스페인 왕비가 되면서 그의 지위도 한층 굳건해졌다. 왕비는 그의 소나타를 직접 연주하며 아꼈고, 그가 남긴 오백 곡이 넘는 건반 소나타 대다수는 사실상 이 한 사람의 연주를 위해, 또는 그녀와의 오랜 우정 속에서 쓰인 것이었다. (다작) 말년의 그는 거의 매년 수십 곡씩 소나타를 써 내려갔다. 대개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짧은 한 악장짜리 곡들이었으나, 그 안에는 나폴리의 성악적 유려함과 스페인 거리의 리듬이 뒤섞여 있었다. 랄프 커크패트릭이 훗날 정리한 목록에는 오백쉰다섯 곡이 올라 있다. (건강) 만년의 건강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다만 궁정에 매여 오랜 세월을 보낸 노년의 그가 여행이나 큰 나들이 없이 마드리드에 머물렀다는 사실은 여러 서한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죽음) 1757년 7월, 마드리드에서 눈을 감았다. 일흔한 살이었다. 그가 묻힌 수도원은 훗날 헐렸고, 정확한 안장 위치는 오늘날까지 알려져 있지 않다. 나폴리에서 태어나 로마와 리스본을 거쳐 마드리드에 뼈를 묻기까지, 그는 평생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유산) 그의 소나타는 한동안 잊혔다가, 19세기 이후 하프시코드 연주가 반다 란도프스카와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등에 의해 다시 조명받았다. 손교차와 기타 모방 주법으로 가득한 그의 건반 언어는 오늘날에도 연주자들에게 가장 까다롭고 매력적인 도전으로 남아 있다.

건반 소나타 K.380 마장조 (코르테주)1754년경 (69세)

왕비가 된 마리아 바르바라의 궁정을 감도는 위엄과 우아함을 그린 곡으로, 그의 소나타 가운데 가장 널리 사랑받는다.

  • 널리 코르테주(행렬)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느리고 위엄 있는 걸음걸이를 연상시키는 리듬이 도입부터 이어진다.
  • 트럼펫의 팡파르를 흉내 낸 듯한 화음 진행은 궁정의 공식 행사, 이를테면 대관식이나 의전 행렬을 그린 것처럼 들린다.
  • 그의 소나타 가운데 가장 널리 연주되고 녹음된 곡으로, 하프시코드와 현대 피아노 연주를 나란히 비교해 들으면 울림의 성격이 크게 다르다.
  • 중간부의 잠깐 어두워지는 화성은 화려한 행렬 이면의 그늘을 슬쩍 비추는 대목으로 자주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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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반 소나타 K.466 바단조1756년경 (71세)

만년의 가장 깊은 내면을 드러내는 곡으로, 20세기 들어 호로비츠의 연주로 새롭게 조명되며 그의 재발견을 상징하게 되었다.

  • 탄식하듯 반복되는 짧은 동기(모티프)가 곡 전체를 지배하며, 그의 단조 소나타 가운데 가장 깊은 내면을 드러내는 곡으로 꼽힌다.
  • 호로비츠가 특히 아꼈던 곡으로, 그의 연주는 이 곡을 20세기 청중에게 새로 각인시킨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된다.
  • 반음씩 어긋나며 순간적으로 스치듯 부딪는 불협화음(아치아카투라)이 곳곳에 스며 있어, 그의 만년 화성어법이 얼마나 대담했는지를 보여준다.
  • 느린 템포를 얼마나 자유롭게 끌고 가는지가 연주자마다 크게 갈려, 같은 곡이라도 전혀 다른 인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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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 노트 📚🔎

하프시코드

건반을 누르면 현을 뜯어 소리를 내는 건반악기다. 스카를라티가 활동하던 시대 건반 음악의 중심 악기였다.

손교차

양손이 건반 위에서 서로 자리를 바꾸며 연주하는 주법이다. 스카를라티 소나타의 대표적인 기교로 꼽힌다.

아치아카투라

정식 화음 옆에 순간적으로 스치듯 부딪는 불협화음을 끼워 넣는 장식이다. 스카를라티 화성어법의 개성을 보여준다.

건반 소나타

스카를라티가 쓴 소나타는 후대의 여러 악장짜리 소나타와 달리, 대개 두 부분으로 나뉜 짧은 한 악장짜리 곡이다.

마에스트로 디 카펠라

교회나 궁정 예배당의 음악을 총괄하는 악장을 가리키는 이탈리아어 직함이다.

카펠라 줄리아

바티칸 산피에트로 대성당 소속의 성가대 겸 음악 조직으로, 스카를라티가 1713년부터 악장을 맡았다.

이 음악가를 좋아할 사람이 떠오르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