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ho
기타를 부수던 소리의 폭력과, 그 부서진 자리에서 오페라를 세우려던 야심이 한 밴드 안에 함께 있었다.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멤버와 동료들 ⏳🌊
- 멤버로저 돌트리
디투어스를 만든 리더이자 보컬로, 타운센드의 곡을 무대에서 몸과 목소리로 살려 냈다.
- 멤버존 엔트위슬
베이스를 리드 악기로 끌어올린 연주자로, 「보리스 더 스파이더」 같은 밴드의 블랙 유머 곡을 썼고 2002년 세상을 떠났다.
- 멤버피트 타운센드
기타와 작곡의 대부분을 맡아 《토미》와 《콰드로페니아》를 설계했다.
- 멤버키스 문
박자를 지키기보다 곡 전체를 휘저은 드러머로, 1978년 서른둘에 세상을 떠났다.
- 매니저키트 램버트
매니저이자 프로듀서로 밴드에 팝아트 이미지와 록 오페라라는 야심을 불어넣었고, 1981년 세상을 떠났다.
- 경쟁지미 헨드릭스
트랙 레코드의 동료이자 1967년 몬터레이에서 무대 순서를 두고 맞선 경쟁자였다.
I. 서런던의 네 청년 · 1944–1964
(결성) 1964년, 영국 런던에서 결성됐다. 무대는 런던 서부 애크턴과 셰퍼즈 부시, 치즈윅을 잇는 노동자 동네였다. 뿌리는 로저 돌트리가 몇 해 전부터 이끌던 동네 밴드 디투어스(The Detours)였다. (돌트리) 돌트리는 1944년 3월 해머스미스에서 태어났다. 학교를 일찍 그만두고 판금 공장에서 일하며 밴드를 꾸렸고, 처음에는 리드 기타를 쳤다. 공장 노동으로 단련된 그는 초창기 밴드의 실질적인 우두머리였다. (엔트위슬) 1944년 10월 치즈윅에서 태어난 존 엔트위슬은 피아노와 트럼펫, 프렌치호른을 배운 정식 음악 교육의 소유자였다. 1961년 무렵 베이스로 합류했다. 무대에서 미동도 없이 서서 손가락만 빠르게 놀리는 모습 때문에 훗날 '황소(The Ox)'라 불렸다. (타운센드) 1945년 5월 치즈윅에서 태어난 피트 타운센드는 공군 악단의 색소폰 주자 클리프와 가수 베티의 아들이었다. 엔트위슬의 학교 친구로 1962년 기타를 맡았다. 일링 미술대학에서 들은 구스타프 메츠거의 '자기 파괴 예술' 강의가 훗날 무대에서 기타를 부수는 행위의 뿌리가 됐다고 그는 회고했다. (문) 1964년 봄, 드러머가 떠난 자리에 웸블리 출신의 열일곱 살 키스 문이 들어왔다. 한 공연장에서 대신 쳐 보겠다고 나섰다가 드럼 페달이 부서질 만큼 두드려 그 자리에서 뽑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우연) 그해 밴드는 잠시 하이 넘버스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다가, 영화 조감독 출신인 키트 램버트와 크리스 스탬프를 매니저로 맞고 다시 더 후가 됐다. 작곡가 콘스턴트 램버트의 아들인 상류층 램버트와 이스트엔드 출신 스탬프는 정반대의 짝이었다. 가을, 해로의 레일웨이 호텔 공연에서 타운센드가 낮은 천장에 기타 목을 부딪쳐 부러뜨렸다. 객석에서 웃음이 터지자 그는 아예 기타를 박살 냈고, 우연은 곧 밴드의 의식이 됐다.
II. 나의 세대 · 1965–1967
(데뷔) 1965년 1월 미국인 프로듀서 셸 탤미와 낸 첫 싱글 「아이 캔트 익스플레인」이 영국 차트 8위에 올랐다. 타운센드는 킹크스를 본떠 쓴 곡이라고 숨기지 않았다. 탤미의 세션에는 훗날 레드 제플린을 만드는 지미 페이지가 세션 기타 연주자로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이 새 밴드는 납 풍선처럼 가라앉을 것이라고 농담한 것이 레드 제플린이라는 이름의 씨앗이 됐다고 페이지는 회고했다. (이미지) 램버트는 밴드를 팝아트로 포장했다. 영국 국기로 지은 재킷과 과녁 무늬 티셔츠, 마퀴 클럽 화요일 정기 공연 포스터의 '맥시멈 R&B'라는 문구가 그것이었다. 타운센드는 팔을 크게 돌려 줄을 내려치는 풍차 주법을, 돌트리는 마이크를 줄째 휘두르는 동작을 무대의 표식으로 삼았다. (세대) 1965년 가을 「마이 제너레이션」이 영국 2위에 오르며 밴드는 모드 세대의 대변자가 됐다. 그 무렵 멤버 사이의 다툼 끝에 돌트리가 잠시 밴드에서 밀려났다가 돌아왔고, 그는 자서전에서 그 뒤로 성질을 누르기로 다짐했다고 썼다. (계약) 램버트는 탤미와의 계약에서 벗어나려고 1966년 「서브스티튜트」를 다른 레이블로 냈고, 탤미는 소송을 걸었다. 합의 끝에 탤미는 이후 몇 해 동안 더 후 음반에서 로열티를 받게 됐다고 전해진다. 훗날 섹스 피스톨즈가 다시 부르는 이 곡은 그렇게 돈 문제와 함께 세상에 나왔다. 무대마다 부순 장비 값까지 겹쳐 밴드는 히트를 내고도 재정이 넉넉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몬터레이) 1967년 램버트와 스탬프는 트랙 레코드를 세우고 갓 런던에 온 지미 헨드릭스를 영입했다. 그해 6월 미국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에서 두 쪽은 무대 순서를 두고 맞섰고, 동전 던지기로 더 후가 먼저 올라 장비를 부쉈다. 뒤이어 헨드릭스는 기타에 불을 붙였다. 이 공연이 미국 진출의 문을 열었다. 연말의 《더 후 셀 아웃》은 곡 사이에 가짜 라디오 광고를 끼운 장난스러운 앨범이었다.
전후 노동계급 10대가 어른 세계를 향해 내뱉는 반항을 더듬는 말투로 담은 곡으로, 밴드를 단숨에 모드 세대의 대변자로 만들었다.
- 돌트리의 화법을 먼저 들어 보자. 절마다 단어 앞에서 일부러 말을 더듬는데, 약에 취한 모드 청년의 흉내라는 해석과 블루스 곡의 더듬는 창법을 본떴다는 설명이 함께 전해진다. 그 뒤를 나머지 멤버들이 짧은 합창으로 받아치는 주고받기(콜 앤드 리스폰스) 구조다.
- 절 사이에서 엔트위슬의 베이스가 앞으로 나와 짧은 솔로를 친다. 당시 팝 싱글에서 베이스가 리드를 맡는 일은 드물었다. 녹음 중 줄이 자꾸 끊어져 같은 베이스를 여러 대 사들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곡이 진행되면서 음높이의 기준(조)이 여러 차례 한 단계씩 올라간다. 같은 노래가 점점 높은 곳에서 되풀이되며 긴장이 쌓이는 것을 느껴 보자.
- 마지막 부분에서 기타가 앰프와 맞물려 길게 우는 소리(피드백)와 문의 드럼 난타가 뒤엉키며 무너지듯 끝난다. 무대 위 장비 파괴를 녹음으로 옮긴 것처럼 들린다.
III. 핀볼과 오페라 · 1968–1970
(바바) 1967년 무렵 타운센드는 인도의 영적 스승 메허 바바의 가르침에 깊이 빠졌다. 환각과 소란의 시대 한가운데서 그는 바바의 절제된 사상에서 의미를 찾았고, 이 관심이 다음 작품의 토대가 됐다. 램버트는 1966년의 9분짜리 미니 오페라 「어 퀵 원」 이후 줄곧 더 긴 이야기를 쓰라고 그를 부추겼다. (토미) 1969년 5월의 두 장짜리 앨범 《토미》는 어린 시절의 충격으로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된 소년이 핀볼 실력으로 우상이 되고, 깨어난 뒤 추종자들에게 버림받는 이야기였다. 램버트는 연출가처럼 곡 순서와 극의 흐름을 다듬었다. 영적 각성과 대중의 우상 숭배라는 주제는 바바에게서 얻은 질문을 록의 언어로 옮긴 것이었다. (무대) 앨범은 크게 팔렸고 밴드의 재정 사정도 크게 나아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토미》를 통째로 연주하는 무대는 1969년 8월 우드스톡에서 해 뜰 무렵 정점을 찍었고, 1970년 6월에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도 올랐다. (리즈) 오페라 밴드라는 꼬리표가 붙자 그들은 반대쪽을 증명했다. 1970년 2월 리즈 대학교 식당 강당 공연을 담은 《리브 앳 리즈》는 네 사람의 날것 소리를 거의 그대로 실었다. 짧고 굵게 끊어 치는 타운센드의 기타, 리드 악기처럼 움직이는 엔트위슬의 베이스, 빈틈없이 휘몰아치는 문의 드럼, 그 위에서 소리를 다투는 돌트리의 목소리가 한데 맞물렸다. 지금도 록 역사상 가장 뛰어난 라이브 음반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사고) 같은 해 1월, 문은 해트필드의 한 술집 앞에서 몰려든 사람들을 피해 차를 몰다 자신의 운전사 닐 볼런드를 치어 숨지게 했다. 검시 법정은 사고사로 판단했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가 평생 이 일을 떨쳐 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메허 바바에게서 얻은 영적 질문과 대중의 우상 숭배라는 주제를 두 장짜리 이야기로 엮어, 싱글 밴드를 록 오페라의 밴드로 바꾼 앨범이다.
- 첫 곡 「서곡(Overture)」은 앨범의 주요 선율을 미리 늘어놓는 오페라식 도입부다. 엔트위슬이 직접 분 프렌치호른 소리를 찾아 들어 보자.
- 대표곡 「핀볼 위저드」는 통기타로 시작한다. 타운센드가 화음의 가운데 음을 다른 음으로 걸어 둔 채 빠르게 긁는 소리(서스펜디드 코드)가 긴장을 만들고, 이어 전기기타의 굵은 화음이 터진다. 그는 핀볼 애호가였던 평론가 닉 콘을 설득하려고 이 곡을 썼다고 밝혔다.
- 스튜디오 녹음은 생각보다 가볍고 얇게 들린다. 같은 곡들을 우드스톡이나 리즈 공연 녹음과 비교해 들으면, 무대에서 얼마나 무겁고 거칠게 바뀌었는지 알 수 있다.
- 마지막 곡 후반의 반복되는 합창 대목은 우드스톡에서 막 해가 떠오르던 순간에 연주된 부분이다. 차분한 기도처럼 시작해 밴드 전체가 커지는 흐름을 따라가 보자.
오페라 밴드라는 꼬리표가 붙던 때, 네 사람이 무대에서 얼마나 거친 밴드인지 증명한 기록이다.
- 대표곡 「영 맨 블루스」에서는 곡 중간에 모두가 멈췄다가 한 음씩 끊어 치는 정지(브레이크) 대목이 반복된다. 침묵과 굉음이 번갈아 오는 순간에 귀를 기울여 보자.
- 타운센드는 깁슨 SG 스페셜 기타를 하이와트 앰프에 물려 굵고 찢어지는 음색(디스토션)을 냈다. 리듬 기타가 따로 없어 그가 화음과 솔로를 혼자 오간다.
- 엔트위슬의 베이스는 사실상 두 번째 리드 악기다. 기타가 솔로로 빠질 때 비는 자리를 베이스가 빠른 선율로 채우는 것을 들어 보자.
- 「마이 제너레이션」은 15분 가까운 즉흥 메들리로 늘어나며, 중간에 《토미》의 선율 조각이 섞여 나온다.
- 원래 LP는 해적판처럼 꾸민 재킷에, 지직거리는 잡음을 고치려 하지 말라는 취지의 문구까지 붙여 날것의 현장감을 내세웠다.
IV. 실패한 꿈과 두 개의 걸작 · 1971–1974
(라이프하우스) 《토미》 다음으로 타운센드는 더 큰 꿈을 꿨다. 음악이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미래 사회를 그린 영화·공연 복합 계획 「라이프하우스」였다. 1971년 초 런던 영 빅 극장에서 관객과 함께 곡을 만들어 가는 실험 공연까지 벌였지만, 구상은 동료들조차 따라가기 어려웠고 끝내 무너졌다. 타운센드는 이 실패로 깊이 지쳤다고 회고했다. (넥스트) 뉴욕에서 램버트와 시작한 녹음이 엎어지자 프로듀서 글린 존스가 남은 곡을 추려 한 장짜리 앨범으로 묶었다. 1971년 8월의 《후즈 넥스트》였다. 오르간 반복음과 신시사이저를 록 밴드의 굉음에 맞물린 이 앨범은 영국 1위에 올랐다. 실패한 계획의 파편이 밴드의 최고작이 된 셈이었다. (독립) 밴드는 1973년 런던 배터시에 자체 스튜디오 램포트를 지었다. 멤버들은 저마다 솔로 음반을 내기 시작했고, 엔트위슬이 1971년 가장 먼저였다. 돌트리가 회계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램버트·스탬프와의 관계는 금이 갔고, 결국 빌 커비실리가 새 매니저가 됐다. (콰드로페니아) 1973년 10월의 《콰드로페니아》는 1960년대 모드 소년 지미가 정체성을 찾아 브라이턴의 바다로 떠나는 이야기였다. 지미의 분열된 네 인격은 네 멤버를 하나씩 본뜬 네 개의 주제 선율로 표현됐다. 데뷔 무렵 자신들을 따르던 모드 관객에게 바치는 회고이자, 서른 문턱의 밴드가 자기 출신을 돌아본 작품이었다. (투어) 투어는 순탄치 않았다. 미리 녹음해 둔 신시사이저 테이프에 맞춰 연주해야 했는데 기계가 자주 어긋났다. 11월 샌프란시스코 카우 팰리스 공연에서는 문이 공연 전 삼킨 약 때문에 쓰러졌고, 객석의 열아홉 살 관객 스콧 핼핀이 무대에 올라 마지막 곡들의 드럼을 쳤다.
무너진 「라이프하우스」 계획에서 건져 낸 곡으로, 황폐한 10대의 풍경과 해방의 열망을 함께 그린다. 제목은 메허 바바와 반복 음악의 작곡가 테리 라일리에서 따왔다.
- 도입부의 끊임없는 반복음은 로리 오르간의 자동 반복 기능으로 만든 것이다. 같은 음형이 한참 이어지다 피아노와 문의 드럼이 들어오는 순간을 놓치지 말자.
- 보컬 화법이 바뀌는 대목을 들어 보자. 돌트리가 힘 있게 절을 부르다가, 중간 부분은 타운센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넘겨받는다.
- 마지막에는 데이브 아버스의 바이올린이 들어와 점점 빨라지며 아일랜드 춤곡(지그)처럼 치닫는다. 이 연주자를 부르자고 한 사람이 문이었다고 전해진다.
- 프로듀서 글린 존스의 녹음은 악기 하나하나가 또렷이 분리돼 들린다. 드럼과 오르간이 서로 덮지 않는 맑고 단단한 소리에 주목해 보자.
혁명의 열기에 휩쓸렸던 1960년대 말을 돌아보며, 권력을 쥔 얼굴이 바뀌어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냉소를 담은 곡이다.
- 곡 전체의 바닥에는 오르간 소리를 신시사이저(EMS VCS3)의 필터에 통과시켜 맥박처럼 출렁이게 만든 반복음이 깔려 있다.
- 앨범판은 8분 30초가 넘는다. 3분짜리 싱글이 기본이던 시절에 긴 기타 리프와 절, 연주 구간이 이어지는 길이 자체가 파격이었다.
- 후반부에 밴드가 모두 빠지고 신시사이저만 남는 긴 대목이 나온다. 그 끝에서 문의 드럼이 몰아치고 돌트리가 길게 비명을 지르는 순간은 록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가운데 하나다.
- 1978년 셰퍼턴에서 촬영한 문의 마지막 무대 영상도 이 곡이다. 스튜디오판과 비교해 그의 드럼이 얼마나 자유롭게 휘젓는지 들어 보자.
모드 소년 지미의 이야기로 밴드의 뿌리를 돌아본 두 번째 록 오페라로, 자체 스튜디오 램포트에서 만들었다.
- 네 멤버를 하나씩 본뜬 네 개의 주제 선율이 앨범 곳곳에서 되풀이된다. 첫 곡과 마지막 곡에서 같은 선율이 어떻게 다시 나오는지 비교해 들어 보자.
- 파도 소리와 빗소리, 기차 소리 같은 현장음이 곡 사이를 잇는다. 이야기의 무대인 브라이턴 바닷가를 소리로 그려 넣은 것이다.
- 엔트위슬은 금관 악기 파트를 여러 번 겹쳐 녹음(오버더빙)해 오케스트라처럼 두꺼운 소리를 만들었다. 「5시 15분」 같은 곡의 관악기 층을 찾아보자.
- 대표곡 「러브, 레인 오어 미」는 빗소리와 천둥으로 시작해 타운센드의 피아노가 이어진다. 마지막에 돌트리가 길게 끌어올리는 고음은 그의 목소리가 가장 높이 오른 순간으로 꼽힌다.
V. 서른 살의 록 밴드 · 1975–1978
(영화) 1975년 켄 러셀 감독의 영화 《토미》가 개봉했다. 돌트리가 주인공을 맡아 배우로 나섰고, 엘튼 존이 거대한 부츠를 신고 「핀볼 위저드」를 불렀다. 엘튼 존의 이 녹음은 싱글로도 나와 영국 차트에 올랐다. (고백) 같은 해 《더 후 바이 넘버스》에서 타운센드는 서른에 이른 록 스타의 회의와 자기 환멸을 정면으로 썼다. 가볍고 흥겨운 「스퀴즈 박스」가 히트했지만, 앨범 전체는 그의 가장 내밀한 고백록으로 평가된다. 반면 무대는 여전히 거대했다. 1976년 5월 런던 찰턴 축구장 공연은 120데시벨을 넘는 음량으로 기네스북에 가장 시끄러운 공연으로 올랐다. (펑크) 1977년 타운센드는 앨런 클라인과 로열티 문제로 열세 시간에 걸친 회의를 마친 날 밤, 런던의 한 클럽에서 섹스 피스톨즈의 스티브 존스와 폴 쿡을 만났다. 자신들을 낡은 세대로 여길 줄 알았던 젊은 펑크 연주자들이 오히려 더 후를 존경한다고 말했고, 그날 밤의 혼란과 자기 질문이 곡 「후 아 유」의 바탕이 됐다고 그는 회고했다. (쇠약) 문은 1970년대 중반 로스앤젤레스로 옮겨 살며 술에 더 깊이 빠졌다. 몸이 불었고 연주는 흔들렸다. 1978년 5월 영화 《키즈 아 올라이트》를 위해 셰퍼턴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공연이 관객 앞에 선 그의 마지막 무대가 됐다. (죽음) 1978년 8월 《후 아 유》가 나오고 3주 뒤인 9월 7일, 문은 런던 메이페어의 아파트에서 숨졌다. 서른두 살이었다. 술을 끊으려고 처방받은 약을 과다 복용한 것이었다. 전날 밤 그는 폴 매카트니가 연 버디 홀리 기념 행사에 다녀왔다. 앨범 표지에서 그가 앉은 의자 등받이에는 '가져가지 마시오'라는 글귀가 찍혀 있었다.
펑크 세대를 만난 밤의 혼란과 정체성의 질문을 담은 곡으로, 문이 남긴 마지막 앨범의 타이틀곡이다.
- 도입부에서 신시사이저의 반복음 위로 여러 겹의 합창이 제목을 되풀이한다. 질문을 던지는 목소리가 겹겹이 쌓이는 구성이다.
- 곡 중간에 갑자기 박자가 늦춰지고 통기타만 남는 대목이 나온다. 거친 록 곡 한가운데 놓인 이 조용한 다리(브리지)가 곡의 숨구멍이다.
- 엔트위슬의 베이스가 화음 아래에서 쉬지 않고 선율을 그린다. 왼쪽과 오른쪽 스피커를 번갈아 들으며 기타와 베이스가 어떻게 나뉘어 있는지 찾아보자.
- 앨범판은 6분이 넘고 싱글판은 짧게 잘렸다. 앨범판으로 들어야 후반의 긴 연주 구간이 온전히 들린다.
VI. 신시내티 이후 · 1979–1989
(존스) 남은 셋은 멈추지 않기로 했다. 1979년 페이시스 출신 케니 존스가 드럼을 맡았고 키보드 주자 존 '래빗' 번드릭이 함께했다. 같은 해 영화 《콰드로페니아》와 《키즈 아 올라이트》가 개봉하며 모드 문화가 새 세대에게 되살아났다. (참사) 1979년 12월 3일, 미국 신시내티 리버프런트 콜리시엄 공연 직전에 지정석 없는 입장권을 가진 관객들이 몇 개 열리지 않은 출입구로 한꺼번에 몰리면서 11명이 압사했다. 당국은 객석의 혼란을 우려해 공연이 끝날 때까지 밴드에게 알리지 않았다. 소식을 들은 멤버들은 무너졌고, 이튿날 버펄로 공연에서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멤버들은 훗날 이 일을 깊은 상처로 회고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별) 《페이스 댄시스》(1981)와 《잇츠 하드》(1982)는 새 드러머와 함께 새 소리를 더듬었지만, 타운센드는 더 이상 더 후를 위한 곡이 나오지 않는다고 느꼈다. 1982년 밴드는 고별 투어에 나섰다. 10월 뉴욕 셰이 스타디움 공연의 오프닝은 더 클래시가 맡았다. 펑크가 끌어내리려던 세대와 펑크가 한 무대에 선 장면이었다. 투어는 12월 토론토에서 끝났다. (재결합) 해산은 오래가지 않았다. 1985년 7월 런던 웸블리의 라이브 에이드에서 케니 존스와 다시 섰는데, 「마이 제너레이션」 도중 BBC 중계 신호가 끊기는 사고도 있었다. 1989년 결성 25주년 투어에서는 금관 악기와 코러스를 거느린 대편성으로 《토미》를 다시 올렸다. 씀씀이가 컸던 엔트위슬의 재정 사정도 재결합을 재촉한 이유로 꼽힌다. 1990년 밴드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VII. 둘이 남은 밴드 · 1990–2025
(부활) 1996년 런던 하이드 파크 자선 공연에서 《콰드로페니아》를 통째로 올리면서 더 후는 다시 정규 밴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럼은 링고 스타의 아들 잭 스타키가 맡았다. 어린 시절 그는 대부인 키스 문에게서 드럼 세트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선) 2000년부터 돌트리는 10대 암 환자를 돕는 자선 단체 틴에이지 캔서 트러스트의 로열 앨버트 홀 공연을 이끌었다. 이 무대는 해마다 동료 음악가들이 모이는 자리가 됐다. (상실) 2002년 6월 27일, 미국 투어 개막 전날 엔트위슬이 라스베이거스의 호텔 방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쉰일곱 살이었다. 검시 결과 코카인이 이미 앓던 심장 질환을 악화시킨 것으로 밝혀졌다. 남은 둘은 고심 끝에 베이스에 피노 팔라디노를 세우고 투어를 이어 갔다. (계승) 2006년 《엔드리스 와이어》는 24년 만의 새 스튜디오 앨범이었다. 밴드는 2010년 미국 슈퍼볼 하프타임 무대와 2012년 런던 올림픽 폐막식에 섰고, 2019년에는 앨범 《후》를 냈다. 뒤 세대의 존경도 이어졌다. 펄 잼은 2007년 영화 삽입곡으로 「러브, 레인 오어 미」를 다시 녹음했고, 에디 베더는 무대에서 더 후의 곡을 즐겨 불러 왔다. (고별) 2025년 여름, 두 사람은 《후즈 넥스트》 시절의 곡 제목을 딴 북미 고별 투어 「더 송 이즈 오버」에 나섰다. 1960년대 셰퍼즈 부시의 네 청년 가운데 둘이 남아, 60년 넘게 같은 이름을 지켜 온 것이었다.
덜 알려진 이야기
(스택) 록 무대의 상징이 된 앰프 탑, 이른바 마셜 스택은 더 후의 요구에서 나왔다고 전해진다. 1960년대 중반 타운센드와 엔트위슬은 런던의 악기상 짐 마셜에게 더 큰 소리를 요구했고, 마셜은 스피커 여덟 개를 넣은 거대한 상자를 만들었다. 너무 무거워 옮기기 어렵자 이를 네 개짜리 상자 둘로 나눠 쌓았다. 마셜 회사의 기록과 타운센드의 회고가 함께 전하는 이야기지만, 그 장비가 헨드릭스와 레드 제플린의 이미지로 더 널리 기억되면서 더 후의 몫은 흐릿해졌다. (영화) 램버트와 스탬프가 더 후를 찾아낸 것은 애초에 매니저가 되려던 길이 아니었다. 영화 조감독이던 두 사람은 무명 밴드가 성공해 가는 과정을 기록영화로 찍으려 했고, 1964년 레일웨이 호텔에서 찍은 흑백 필름이 그 흔적으로 남았다. 영화는 끝내 완성되지 않았고 매니지먼트가 본업이 됐다. 이 사연은 2014년 다큐멘터리 《램버트 앤드 스탬프》가 나오면서 비로소 널리 알려졌다. (헐) 《리브 앳 리즈》는 원래 다음 날 밤 헐 공연과 함께 녹음해 둘 중 하나를 고를 계획이었다. 그런데 헐 녹음의 초반 곡들에서 엔트위슬의 베이스가 기술적 문제로 빠져 버려 리즈 공연이 선택됐다. 헐 공연은 40년이 지난 2010년 기념판에서야 처음 공개됐다. 타운센드는 앞서 1969년 미국 투어 녹음 테이프의 상당수를 해적판 유출을 막으려고 태워 없앴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용어 노트 📚🔎
피드백
(말뜻) 영어 feedback 은 먹이를 주다(feed)와 되돌아(back)가 합쳐진 말로, 내보낸 것이 다시 돌아 들어온다는 뜻이다. (록에서) 앰프에서 나온 소리를 기타의 픽업이 다시 받아들이고, 그 소리가 또 앰프로 나가는 일이 빙빙 돌면서 길게 우는 소리다. 원래는 피하고 싶은 사고였지만 타운센드 같은 기타리스트는 기타를 앰프 쪽으로 기울여 일부러 이 소리를 불러내 연주에 썼다. 체육관이나 강당에서 마이크를 스피커 가까이 대면 귀가 아플 만큼 삐익 하고 울리는 소리, 그것이 바로 피드백이다. (다른 데서는) 일상에서는 숙제나 일에 대해 의견을 돌려준다는 뜻으로 더 자주 쓴다.
파워 코드
(록에서) 기타에서 바탕이 되는 음과 그보다 다섯 번째 위의 음, 이렇게 두 음만 눌러 치는 화음이다. 밝은 느낌인지 어두운 느낌인지를 정해 주는 가운데 음을 빼서 소리가 단단하고 굵으며, 소리를 찢어지게 왜곡해도 지저분하게 뭉개지지 않는다. 타운센드는 이 화음을 팔을 크게 돌려 내려치는 풍차 주법으로 연주했다. 요리로 치면 양념을 다 빼고 소금과 후추만으로 재료 맛을 세게 살리는 것과 비슷하다.
록 오페라
(말뜻) 오페라(opera)는 라틴어로 일이나 작품을 뜻하는 opus 의 복수형에서 온 말로, 노래와 연기와 무대가 한데 모인 큰 작품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록에서) 여러 곡을 이어 하나의 줄거리를 들려주는 록 음반이나 공연이다. 등장인물이 있고, 앞에서 나온 선율이 뒤에서 다시 나오며 이야기를 하나로 묶는다. 더 후의 《토미》와 《콰드로페니아》가 대표적이다. 노래 한 곡이 웹툰의 한 화라면, 록 오페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 봐야 이야기가 완성되는 연재 전체와 같다.
신시사이저
(말뜻) synthesizer 는 합성하다라는 뜻의 synthesize 에서 온 말로, 소리를 전기로 합쳐 만든다는 뜻이다. (록에서) 전기 신호로 소리를 만들고 다듬는 악기다. 소리의 밝기를 깎는 필터 같은 장치로 세상에 없던 음색을 빚어낸다. 《후즈 넥스트》에서 타운센드는 오르간 소리를 신시사이저에 통과시켜 맥박처럼 출렁이게 만들었다. 미술 시간에 물감 몇 가지를 섞어 수많은 색을 만들어 내는 것과 비슷하다. (다른 데서는) 화학이나 생물에서 합성(synthesis)은 여러 물질을 엮어 새 물질을 만드는 일을 가리킨다.
오버더빙
(말뜻) over 는 위에, dub 은 소리를 녹음해 입힌다는 뜻이어서, 이미 녹음된 것 위에 소리를 덧입힌다는 말이 된다. (록에서) 먼저 녹음한 연주 위에 다른 연주를 덧녹음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하면 한 사람이 여러 악기를 겹쳐 연주한 것처럼 만들 수 있다. 엔트위슬은 《콰드로페니아》에서 금관 악기를 여러 번 겹쳐 녹음해 오케스트라 같은 소리를 냈다. 그림 위에 투명 필름을 한 장씩 겹쳐 대고 그 위에 또 그려 나가는 것과 같다. (다른 데서는) 더빙은 영화에서 외국어 대사를 우리말 목소리로 바꿔 입히는 일을 가리킬 때가 많다.
모드
(말뜻) 현대주의자를 뜻하는 영어 modernist 를 줄인 말이다. (록에서) 1960년대 초 런던 노동계급 청년들 사이에서 생긴 문화다. 맞춤 정장과 스쿠터, 미국 소울과 R&B 음악, 밤새 춤추는 클럽이 그들의 표식이었고, 가죽 재킷과 오토바이를 즐긴 로커스와 맞섰다. 더 후는 모드가 가장 사랑한 밴드였고 《콰드로페니아》는 그 세계를 그린 작품이다. 학교에서 같은 브랜드의 운동화를 신고 같은 가수를 좋아하는 무리가 옷차림만 보고 서로를 알아보는 것과 비슷하다. (다른 데서는) 게임에서 모드(mod)는 수정을 뜻하는 modification 의 줄임말로, 사용자가 게임을 고쳐 만든 확장판을 가리킨다.
디스토션
(말뜻) 영어 distortion 은 비틀어 일그러뜨린다는 뜻이다. (록에서) 기타 신호를 일부러 앰프에 세게 밀어 넣어 소리를 찢어지고 지글거리게 만든 음색이다. 1960년대에는 앰프 볼륨을 끝까지 올려 이런 소리를 얻었고, 나중에는 발로 밟는 장치(페달)로도 만들었다. 확성기에 대고 너무 크게 외치면 목소리가 갈라져 나오는데, 그 갈라진 소리를 일부러 악기의 색깔로 쓰는 것이다. (다른 데서는) 사진이나 거울에서 모양이 일그러져 보이는 왜곡을 가리킬 때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