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ther Vandross
남의 노래 뒤에서 십 년을 보낸 목소리가, 한 세대의 사랑 노래가 어떤 소리여야 하는지를 정했다.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함께한 사람들 ⏳🌊
- 가족메리 아이다 밴드로스
간호사였던 어머니로, 남편과 네 자녀를 모두 먼저 떠나보내고 2008년까지 살며 아들의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남았다.
- 영향디온 워릭
열세 살의 그에게 가수의 꿈을 품게 한 우상으로, 훗날 그가 그녀의 앨범을 프로듀싱했다.
- 우정패티 라벨
소년 시절 그가 팬클럽 회장을 맡았던 가수로, 이후 평생의 친구가 됐다.
- 후원데이비드 보위
「영 아메리칸스」에 그를 불러 백보컬 편곡과 공동 작곡을 맡기고 투어 무대에 세웠다.
- 동료마커스 밀러
데뷔작부터 베이스와 작곡으로 함께하며 「파워 오브 러브/러브 파워」 등을 같이 쓴 음악적 동반자였다.
- 영향아레사 프랭클린
어린 시절의 우상이자, 1982년 그가 「점프 투 잇」을 프로듀싱해 다시 R&B 정상에 세운 가수다.
I. 로어이스트사이드의 소년 · 1951–1969
(출생) 1951년 4월, 미국 뉴욕시 맨해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아 루서 론조니 밴드로스 주니어가 됐고, 네 남매의 막내였다. 어머니 메리 아이다는 간호사였다. 아버지 루서 시니어는 가구에 천을 씌우는 일을 하면서 틈틈이 노래를 불렀다. 가족은 로어이스트사이드의 공공주택 단지에 살았다. (상실) 1959년, 그가 여덟 살 때 아버지가 당뇨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남은 가족은 브롱크스로 옮겼다. 아버지를 앗아 간 이 병은 훗날 그 자신의 몸에도 찾아왔다. 집 안에는 늘 노래가 있었다. 누나 퍼트리샤는 두왑 그룹 크레스츠의 초기 무렵 함께 노래한 적이 있었다. (우상) 세 살 무렵부터 피아노를 귀로 익혔다. 열세 살 무렵 브루클린 폭스 극장에서 디온 워릭의 무대를 보고 가수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그는 여러 차례 회고했다. 그가 사랑한 목소리는 워릭과 아레사 프랭클린, 다이애나 로스 같은 여성 가수들이었다. 패티 라벨 앤드 더 블루벨스의 팬클럽을 직접 꾸려 회장을 맡았을 정도였다. (화음) 브롱크스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할렘 아폴로 극장의 공연 워크숍에서 출발한 청년 그룹 리슨 마이 브라더에 들어갔다. 이 그룹은 1969년 방송을 시작한 어린이 프로그램 「세서미 스트리트」의 초기 회차에 출연했다. 무대 한가운데가 아니라 화음의 한 자리였지만, 그 경험은 훗날 그가 가장 잘하게 될 일, 곧 여러 목소리를 겹쳐 쌓는 일과 맞닿아 있었다.
II. 목소리를 빌려주던 시절 · 1969–1980
(중퇴) 1969년 고등학교를 마치고 미시간주의 웨스턴미시간대학교에 들어갔지만 한 학기 만에 그만두고 뉴욕으로 돌아왔다. 생계를 위한 일을 하면서 곡을 썼다. 그가 쓴 「에브리바디 리조이스(어 브랜드 뉴 데이)」는 1975년 브로드웨이 뮤지컬 「위즈」에 쓰였고, 1978년 영화판에서는 다이애나 로스와 마이클 잭슨이 출연한 장면을 장식했다. (보위) 전환점은 1974년이었다. 기타리스트 카를로스 알로마르와의 인연으로 필라델피아의 녹음실에 갔다가 데이비드 보위의 앨범 「영 아메리칸스」 작업에 합류했다. 그는 백보컬 편곡을 맡았고, 그가 써 둔 곡 「펑키 뮤직」은 보위와 함께 다듬어져 「패시네이션」이 됐다. 보위는 그를 투어 무대에 세웠고, 이후 그는 베트 미들러와도 함께 일하게 됐다고 알려져 있다. (세션) 이후 몇 년 동안 그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칼리 사이먼, 로버타 플랙, 도나 서머, 샤카 칸의 음반 뒤에서 노래하는 세션 가수로 일했다. 패스트푸드와 음료 광고의 짧은 노래(징글)도 숱하게 불러 업계에서 이름이 났다. 수입은 안정됐지만, 자기 이름이 앞에 걸린 음반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좌절) 1976년과 1977년, 자신이 이끄는 그룹 루서의 이름으로 두 장의 앨범을 냈으나 반응은 미미했고 계약도 끝났다. 그는 다시 남의 녹음실로 돌아가 시크의 「댄스, 댄스, 댄스」에 목소리를 보탰다. 1980년에는 이탈리아 제작진의 프로젝트 체인지의 「더 글로우 오브 러브」와 「서칭」에서 리드 보컬을 맡았다. 두 곡이 클럽에서 사랑받자 계속 함께하자는 제안이 왔지만, 그는 자기 이름의 음반을 택했다고 알려져 있다.
체인지라는 이름으로 나왔지만 리드 보컬은 그였다. 남의 프로젝트에서 부른 이 곡이 역설적으로 그의 이름을 업계에 각인시켰고, 솔로 계약으로 가는 다리가 됐다.
- 현악기가 길게 깔린 위로 그가 낮고 부드러운 음역에서 첫 소절을 꺼낸다. 숨을 섞어 힘을 빼고 부르는데도 음 하나하나가 또렷하다.
- 한 박마다 쿵 하고 울리는 디스코 드럼 위에 얹혔지만 템포는 느긋해, 춤곡이면서 발라드처럼 들린다. 디스코가 저물던 1980년 무렵의 매끈한 제작 방식이 그대로 담겼다.
- 후렴에서 여러 겹의 백보컬이 그의 목소리를 감싼다. 세션 가수로 쌓은 화음 감각과 리드 보컬리스트의 존재감이 한 곡 안에서 만나는 대목이다.
- 2001년 재닛 잭슨이 「올 포 유」에서 이 곡을 샘플링하면서 새 세대에게 다시 알려졌다.
III. 스스로 쥔 운전대 · 1980–1982
(조건) 그는 모아 둔 돈으로 데모 녹음을 직접 만들어 레이블을 찾아다녔다. 1981년 에픽 레코드와 계약하면서 끝까지 고집한 조건은 스스로 프로듀싱한다는 것이었다. 세션 가수로 보낸 십 년 동안 그는 남의 녹음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디서 어긋나는지를 곁에서 지켜봤다. 이제 그 결정을 제 손에 쥐고자 했다. (데뷔) 그해 나온 첫 앨범 「네버 투 머치」는 R&B 앨범 차트 정상에 올랐고, 타이틀곡도 R&B 싱글 1위를 차지했다. 베이시스트 마커스 밀러와 키보드 연주자 겸 편곡자 냇 애덜리 주니어가 핵심을 맡았다. 특히 밀러와의 인연은 이후 오래 이어지며 많은 곡을 함께 쓰는 동반자 관계가 됐다. (재해석) 같은 앨범에는 어린 시절의 우상 디온 워릭이 불렀던 버트 배커랙과 핼 데이비드의 곡 「어 하우스 이즈 낫 어 홈」이 실렸다. 그는 3분 남짓하던 원곡을 7분이 넘는 발라드로 늘려 다시 지었다. 귀에 익은 남의 노래를 해체해 자기 것으로 다시 짓는 이 방식은 이후 그의 음반마다 이어졌다. (프로듀서) 1982년에는 또 다른 우상 아레사 프랭클린의 앨범 「점프 투 잇」을 프로듀싱했다. 그가 함께 쓴 타이틀곡은 그녀에게 몇 해 만의 R&B 1위를 안겼다. 같은 해 그는 두 번째 앨범 「포에버, 포 올웨이스, 포 러브」를 냈고, 셰릴 린의 앨범을 프로듀싱하며 마빈 게이와 태미 테럴의 곡 「이프 디스 월드 워 마인」을 그녀와 듀엣으로 불렀다. 그는 이제 노래하는 사람이자 노래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십 년을 남의 뒤에서 노래한 사람이 처음으로 제 이름과 제 손으로 만든 곡이다. 스스로 프로듀싱한다는 고집이 옳았음을 증명한 R&B 1위곡.
- 곡이 열리자마자 마커스 밀러의 베이스가 쉬지 않고 오르내리며 곡 전체를 앞으로 민다. 밑에서 받치는 악기가 아니라 또 하나의 멜로디처럼 들린다.
- 그는 높은 음에서도 목을 조이지 않고 가볍게 튕기듯 부른다. 음을 꾸미는 장식을 아껴 말이 박자 위에 또박또박 얹힌다.
- 후렴의 백보컬은 촘촘한 화음으로 리드 보컬과 문답하듯 주고받는다. 이후 그의 음반마다 이어질 목소리 쌓기 방식이 이미 완성돼 있다.
- 끝없이 주어도 모자라지 않은 사랑을 경쾌하게 노래한다. 슬픔 없이 기쁨만으로 밀고 가는, 그의 노래 가운데 드문 결의 사랑 노래다.
소년 시절 우상 디온 워릭의 노래를 그는 거의 해체하다시피 다시 지었다. 남의 곡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그의 재해석이 처음으로 온전히 드러난 녹음이다.
- 3분 남짓한 원곡을 7분 넘게 늘였다. 처음 몇 분 동안 그는 박자를 느슨하게 풀어(루바토) 말하듯 노래하며 곡의 속도를 자기 호흡에 맞춘다.
- 중반 이후 리듬 섹션이 들어오면서 곡이 서서히 부푼다. 그는 한 음절을 여러 음으로 굽이치게 늘이는 창법(멜리스마)을 아껴 두었다가 절정에서 쏟아낸다.
- 사람이 떠난 빈집의 쓸쓸함이라는 원곡의 정서를, 그는 체념보다 간청에 가까운 쪽으로 끌고 간다.
- 1980년대 후반 한 시상식에서 원곡 가수 디온 워릭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 곡을 부른 영상이 널리 회자된다. 객석의 워릭이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함께 담겼다.
IV. 사랑 노래의 장인 · 1983–1987
(꿈) 1983년 그는 디온 워릭의 앨범 「하우 매니 타임스 캔 위 세이 굿바이」를 프로듀싱했다. 열세 살에 객석에서 올려다보던 가수의 녹음을 이제 그가 지휘했다. 같은 해 앨범 「비지 바디」에는 카펜터스의 「슈퍼스타」와 아레사 프랭클린의 「언틸 유 컴 백 투 미」를 이은 긴 메들리를 실었다. (전성) 1985년 「더 나이트 아이 펠 인 러브」, 1986년 「기브 미 더 리즌」으로 이어지는 시기에 그의 발라드는 흑인 라디오의 심야 형식인 콰이어트 스톰을 대표하는 소리가 됐다. 「스톱 투 러브」가 R&B 1위에 올랐고, 배우이자 탭 댄서 그레고리 하인스와 부른 「데어스 낫싱 베터 댄 러브」도 정상을 밟았다. 공연장도 점점 커졌다. (사고) 1986년 1월,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힐스에서 그가 몰던 차가 사고를 냈다. 동승했던 친구 래리 솔터스가 숨졌고 그 자신도 크게 다쳤다. 차량 과실치사 혐의를 받았으나 난폭 운전 혐의에 대해 다투지 않는 답변으로 형사 절차가 정리됐고, 유족과는 민사 합의를 했다. 그는 이 일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을 아꼈다. (체중) 그 무렵부터 그의 몸무게는 늘 기사의 화젯거리였다. 그는 수십 킬로그램을 감량했다가 다시 늘기를 여러 차례 되풀이했고, 이를 숨기지 않고 인터뷰에서 털어놓았다. 아버지를 앗아 간 당뇨와 고혈압도 그를 따라다녔다. 무대 위 목소리는 한결같이 매끈했지만, 몸과의 싸움은 평생 이어졌다.
카펜터스와 아레사 프랭클린, 전혀 다른 두 세계의 노래를 기다림이라는 하나의 정서로 이었다. 그의 메들리 재해석이 가장 멀리 간 예로 꼽힌다.
- 카렌 카펜터의 담담한 원곡과 달리, 그는 템포를 크게 늦추고 고요한 건반 위에서 한 소절씩 머뭇거리듯 시작한다.
- 곡이 「언틸 유 컴 백 투 미」로 넘어가는 이음매가 이 녹음의 핵심이다. 그 지점에서 리듬이 살아나고 목소리의 온도도 한 단계 올라간다.
- 백보컬이 그의 리드 뒤에서 길게 화음을 깔며 점점 두꺼워진다. 후반부의 즉흥 장식(애드리브)은 가스펠의 뿌리를 드러낸다.
- 두 곡 모두 떠난 사람을 기다리는 마음을 그리지만, 앞 곡은 체념에, 뒤 곡은 다짐에 가깝다. 그 정서의 변화를 한 사람의 목소리로 이어 붙였다.
V. 늦게 온 트로피 · 1988–1996
(무관) 그는 1980년대 내내 그래미 후보에 올랐지만 상을 받지 못했다. 1988년 「애니 러브」까지 앨범은 꾸준히 큰 판매고를 올렸으나 시상식에서는 번번이 빈손이었다. 그는 그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수상) 1989년 베스트 앨범에 새로 넣은 「히어 앤드 나우」는 R&B 1위, 팝 차트 6위까지 오르며 그의 가장 큰 팝 히트 가운데 하나가 됐다. 이 곡으로 1991년 첫 그래미(남성 R&B 보컬 부문)를 받았다. 이듬해에는 마커스 밀러와 함께 쓴 「파워 오브 러브/러브 파워」로 두 개의 그래미를 더했다. (듀엣) 1992년에는 재닛 잭슨과 영화 「모 머니」 사운드트랙의 「더 베스트 싱스 인 라이프 아 프리」를 불렀다. 재닛의 오랜 프로듀서 지미 잼과 테리 루이스가 만든 이 곡은 팝 차트 10위 안에 들었다. 1994년 리메이크 앨범 「송스」에서는 머라이어 캐리와 함께 라이어널 리치와 다이애나 로스의 「엔들리스 러브」를 불러 다시 한번 히트를 거뒀다. (무대) 공연은 그의 또 다른 작품이었다. 그는 백보컬 가수들의 의상과 동선, 조명까지 직접 챙겼고, 리사 피셔 같은 가수들이 오랫동안 그의 곁에서 노래했다. 화음 한 줄이 어긋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완벽주의자로 알려졌다. 1996년 앨범 「유어 시크릿 러브」의 타이틀곡으로 네 번째 그래미를 받았다.
십 년 가까이 빈손이던 그래미에서 마침내 그에게 첫 트로피를 안긴 곡이다. 남이 쓴 노래였지만 그의 목소리로 미국 결혼식의 단골 곡이 됐다.
- 부드러운 신시사이저와 전자 피아노가 깔린 느린 도입이 차분하게 문을 연다. 화려한 장치 없이 목소리를 위한 자리를 넓게 비워 둔 편곡이다.
- 낮은 음역에서 맹세하듯 담담하게 시작해, 후렴으로 갈수록 목소리에 무게를 싣는다. 크게 내지르지 않고도 곡이 점점 커지게 만드는 그의 방식이 잘 드러난다.
- 테리 스틸과 데이비드 엘리엇이 쓴 곡이지만, 그의 매끈한 음색과 정확한 발음 덕분에 그의 대표곡으로 기억된다.
- 사랑의 약속을 지금 이 자리에서 건네는 화법이라, 결혼식 축가로 오랫동안 불렸다.
재닛 잭슨과의 듀엣으로, 발라드의 왕이 1990년대 초의 젊은 댄스 사운드 안으로 들어간 곡이다. 그의 활동 폭을 넓힌 히트였다.
- 지미 잼과 테리 루이스 특유의 통통 튀는 리듬 위에, 힙합 리듬과 R&B를 섞은 1990년 전후의 스타일(뉴 잭 스윙)의 활기가 실렸다.
- 재닛 잭슨의 가볍고 숨이 섞인 목소리와 그의 둥글고 꽉 찬 음색이 주고받으며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 곡 중간에 벨 비브 디보와 랠프 트레스번트가 짧게 끼어들어 여럿이 모인 파티 같은 분위기를 더한다.
- 돈보다 사랑이 소중하다는 단순한 주제를 무겁지 않게, 친구끼리 주고받는 말투로 풀었다.
VI. 레이블을 떠나서 · 1997–2002
(이적) 1990년대 후반, 그는 열다섯 해 넘게 머문 에픽을 떠났다. 1998년 버진에서 낸 「아이 노」는 기대만큼 팔리지 않았다. 2001년에는 휘트니 휴스턴을 키워 낸 음반 제작자 클라이브 데이비스가 새로 세운 J 레코드와 손을 잡았다. 앨범 「루서 밴드로스」와 싱글 「테이크 유 아웃」으로 그는 다시 차트에 돌아왔다. (고독) 그는 인터뷰에서 오래 곁을 지킨 연인이 없다는 사실과 외로움을 여러 차례 이야기했다. 사랑 노래로 이름을 얻은 사람이 정작 자신의 사랑은 찾지 못했다는 어긋남을 스스로 입에 올리기도 했다. 그가 부른 사랑 노래들이 기쁨보다 갈망 쪽에 기울어 있다는 평이 이 고백과 함께 자주 거론됐다. (침묵) 성적 지향에 관한 질문에는 끝내 답하지 않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인 2017년, 오랜 친구 패티 라벨은 TV 인터뷰에서 그가 동성애자였으며 이를 세상에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본인이 직접 밝힌 적은 없다. (어머니) 가장 가까운 사람은 어머니였다. 형과 두 누나가 차례로 먼저 세상을 떠난 뒤 그는 어머니 메리 아이다를 극진히 챙겼고, 어머니는 아들의 무대와 시상식에 자주 함께했다. 그녀는 남편과 네 자녀를 모두 먼저 떠나보내고 2008년까지 살았다.
VII. 아버지와의 춤 · 2003–2005
(헌사) 마지막 앨범의 중심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그는 싱어송라이터 리처드 마크스와 함께 「댄스 위드 마이 파더」를 썼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어머니와 춤추고 자신을 안아 올리던 기억, 그리고 그 시간이 다시 오지 않는다는 그리움을 담은 곡이었다. 여덟 살의 상실이 마흔다섯 해 만에 노래가 됐다. (뇌졸중) 2003년 4월, 앨범 녹음을 거의 마친 무렵 그는 맨해튼 자택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져 한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다. 6월에 나온 앨범 「댄스 위드 마이 파더」는 빌보드 200 1위로 데뷔했다. 솔로 데뷔 22년 만에 처음 오른 앨범 차트 정상이었다. (그래미) 2004년 2월 그래미에서 이 앨범은 올해의 노래를 포함해 네 부문을 수상했다. 비욘세와 로버타 플랙·도니 해서웨이의 곡을 다시 부른 「더 클로저 아이 겟 투 유」도 듀엣 부문 상을 받았다. 재활 중이던 그는 영상으로만 인사를 전했고, 무대에서는 셀린 디옹이 리처드 마크스의 피아노에 맞춰 이 노래를 불렀다. (작별) 2005년 7월 1일, 뉴저지주 에디슨의 병원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쉰네 살이었다. 같은 해 나온 헌정 앨범 「소 어메이징」에는 비욘세와 스티비 원더, 셀린 디옹, 메리 제이 블라이지, 앨리샤 키스, 어셔, 아레사 프랭클린 등이 참여했다. 평생 받은 그래미는 여덟 개였다. 2024년에는 그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루서: 네버 투 머치」가 선댄스 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됐다.
여덟 살에 잃은 아버지를 마흔다섯 해 만에 노래로 불러냈다. 그가 쓰러진 뒤 세상에 나와 올해의 노래 그래미를 받은, 사실상의 마지막 인사다.
- 리처드 마크스의 피아노가 조용히 곡을 연다. 화려한 편곡 없이 건반과 현악이 목소리를 받쳐 준다.
- 평생 기교를 아끼지 않던 그가 이 곡에서는 장식을 거의 빼고 말하듯 부른다. 어린 날의 기억을 더듬는 화법이 그 절제와 맞물린다.
- 곡이 고조되는 대목에서도 크게 내지르지 않는다. 그리움이 목소리 안쪽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들린다.
- 2004년 그래미 시상식에서는 그가 나오지 못한 자리를 대신해 셀린 디옹이 리처드 마크스의 피아노에 맞춰 이 곡을 불렀다.
덜 알려진 이야기
데이비드 보위의 「패시네이션」 작곡 크레디트에는 그의 이름이 함께 올라 있다. 이 곡의 바탕이 된 그의 노래 「펑키 뮤직(이즈 어 파트 오브 미)」은 1976년 그룹 루서의 데뷔 앨범에 따로 실렸다. 보위 팬들 사이에서는 익숙한 사실이지만, 발라드 가수로서의 이미지가 워낙 강해 그의 일대기에서는 각주처럼 다뤄지곤 한다. 그룹 루서 시절의 두 앨범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다시 발매되지 않았다. 그가 훗날 이 음반들의 권리를 사들여 재발매를 막았다고 알려져 있으며, 준비가 덜 된 시기의 녹음을 다시 내놓고 싶지 않았던 것으로 풀이된다. 그래서 오랫동안 이 시기는 팬들에게도 들을 길이 거의 없는 공백으로 남았다. 그의 첫 TV 출연은 1969년 「세서미 스트리트」였다. 그가 속한 청년 그룹 리슨 마이 브라더가 프로그램 초기 회차에 출연했는데, 당시엔 무명 청년들의 짧은 무대였던 탓에 그가 유명해진 뒤에야 다시 주목받았다. 솔로 데뷔 전 그는 광고 노래로 상당한 수입을 올렸다. 정작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는 시청자는 드물었다. 광고 노래에는 가수 이름이 붙지 않는 업계 관행 때문이다.
용어 노트 📚🔎
세션 가수
(말뜻) 세션(session)은 정해진 시간 동안 모여서 하는 일을 뜻한다. 녹음실에 정해진 시간만큼 불려 와 노래하는 가수라는 뜻이 이름에 들어 있다. (팝에서) 자기 이름의 음반 대신 다른 가수의 녹음에서 백보컬이나 화음을 맡고, 곡이나 시간 단위로 보수를 받는 가수다. 이름이 앞에 나오지 않지만, 악보를 빨리 익히고 어떤 가수의 목소리와도 어울리게 부르는 실력이 필요하다. 학교 연극에서 주인공은 아니어도 모든 장면에 나와 무대를 채우는 합창단원을 떠올리면 된다. 루서 밴드로스는 솔로 데뷔 전 십 년 가까이 뉴욕에서 손꼽히는 세션 가수였다. (다른 데서는) 컴퓨터에서 세션은 접속해 있는 동안의 기간을, 회의에서는 한 차례의 회기를 뜻한다.
징글
(말뜻) 영어 jingle은 방울이나 동전이 딸랑거리는 소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짧고 귀에 맴도는 소리라는 느낌이 이름에 이미 들어 있다. (팝에서) 라디오나 TV 광고에 쓰이는 몇 초짜리 짧은 노래다. 상품 이름을 단번에 기억시키는 것이 목적이라 가락이 단순하고 같은 말이 반복된다. TV에서 몇 번 들은 광고 노래를 친구와 무심코 따라 부르게 되는 경험이 있다면, 그게 바로 징글의 힘이다. 짧은 시간에 정확하고 또렷하게 불러야 해서 실력 있는 세션 가수들이 주로 맡았다.
백보컬
(팝에서) 앞에서 주 선율을 부르는 리드 보컬 뒤에서 화음이나 추임새를 넣는 목소리다. 여러 사람이 서로 다른 높이의 음을 겹쳐 리드를 감싸면 소리가 훨씬 풍성해진다. 합창 대회에서 소프라노가 선율을 부를 때 알토와 테너가 아래에서 다른 음으로 받쳐 주는 것과 같다. 루서 밴드로스는 백보컬을 여러 겹 쌓아 올리는 편곡으로 이름났고, 보위의 「영 아메리칸스」에서도 이 일을 맡았다.
프로듀서
(말뜻) 라틴어 producere에서 온 말로, 앞으로(pro) 이끌어 낸다(ducere)는 뜻이다. 가수와 연주자가 가진 것을 끌어내 하나의 결과물로 만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팝에서) 음반 녹음 전체를 책임지는 사람이다. 어떤 곡을 고를지, 어떤 연주자와 악기를 쓸지, 가수가 어떤 느낌으로 부를지, 소리를 어떻게 다듬을지를 결정한다. 모둠 과제에서 누가 무엇을 맡을지 정하고 마지막까지 결과물을 다듬는 조장과 비슷하다. 루서 밴드로스가 데뷔 계약 때 스스로 프로듀싱하겠다고 고집한 것은 이 결정권을 자기 손에 두겠다는 뜻이었다. (다른 데서는) 영화와 방송에서 프로듀서는 돈과 일정, 사람을 꾸리는 제작 책임자를 가리켜, 현장 연출을 맡는 감독과 구분된다.
멜리스마
(말뜻) 그리스어 melisma는 노래, 가락이라는 뜻이다. (팝에서) 가사의 한 음절을 여러 음으로 굽이치게 늘여 부르는 창법이다. 흑인 교회의 가스펠에서 R&B로 이어졌고, 감정이 가장 높아지는 대목에서 자주 쓰인다. 친구 이름을 장난스럽게 부를 때 마지막 글자를 길게 끌며 음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것과 비슷하다. 지나치면 노래가 산만해지기 때문에, 루서 밴드로스처럼 아껴 두었다가 꼭 필요한 순간에 쓰는 가수가 높이 평가받는다.
메들리
(말뜻) 섞인 것이라는 뜻의 옛 프랑스어 medlee에서 왔다. 영어 meddle(참견하다)과 뿌리가 같다. (팝에서) 여러 곡을 이어 붙여 한 곡처럼 부르는 것이다. 곡과 곡 사이의 이음매를 얼마나 자연스럽게 만드느냐가 솜씨를 가른다. 이어달리기에서 바통을 넘기는 순간 속도가 떨어지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앞 곡의 분위기가 다음 곡으로 끊김 없이 넘어가야 한다. 루서 밴드로스의 「슈퍼스타 / 언틸 유 컴 백 투 미」가 대표적인 예다. (다른 데서는) 수영에서 메들리는 네 가지 영법을 차례로 이어 헤엄치는 혼영 종목을 가리킨다.
콰이어트 스톰
(말뜻) 고요한 폭풍이라는 뜻이다. 스모키 로빈슨의 1975년 앨범 「어 콰이어트 스톰」에서 이름을 따, 미국 워싱턴의 한 라디오 방송이 심야 프로그램 이름으로 쓰면서 장르를 가리키는 말이 됐다. (팝에서) 늦은 밤 라디오에서 흐르는 느리고 부드러운 R&B 발라드 계열을 말한다. 감정은 깊지만 소리는 낮고 매끈하며, 크게 내지르기보다 가까이서 속삭이듯 부른다. 시험공부를 하는 밤에 조용히 틀어 두는 잔잔한 음악 목록을 떠올리면 된다. 1980년대 루서 밴드로스의 발라드는 이 형식을 대표하는 소리로 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