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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Brown

제임스 브라운 (1933–2006)

'쇼 비즈니스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사나이'로 불린 그는 모든 악기를 북처럼 다뤄, 리듬 하나로 대중음악의 문법을 다시 썼다.

한눈에 보기 🔭💭

1. 뿌리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반웰 …오거스타의 가난열여섯 살 수감2. 출발바비 버드와 플레임스리틀 리처드의 영향플리즈 플리즈 플리즈3. 도약아폴로 실황 자비 녹음온 더 원의 발견콜드 스웨트와 펑크4. 발언1968 보스턴 공연블랙 앤드 프라우드J.B.'s 결성5. 굴곡장남 테디의 죽음디스코와 세금1988년 수감6. 유산힙합 샘플의 원천잭슨과 프린스아폴로의 마지막 조문브라운1933–2006가난과 감옥을 딛고 리듬 하나로 펑크를 열어젖…
무대의 여정 🧭🗺️
N미국영국반웰1933–1938오거스타1938–1949토코아1952–1955뉴욕1960년대오거스타1970년대–2006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함께한 사람들 ⏳🌊

  • 영향리틀 리처드

    메이컨의 선배로, 거친 외침과 지칠 줄 모르는 무대가 초기의 그를 빚었다.

  • 동료바비 버드

    가석방을 도운 친구이자 플레임스 시절부터 「섹스 머신」까지 곁에서 노래한 평생의 파트너였다.

  • 후원시드 네이선

    킹 레코드 사장으로 그와 자주 부딪쳤지만 그의 초기 히트를 거의 모두 세상에 내놓았다.

  • 동료피 위 엘리스

    「콜드 스웨트」를 함께 만든 색소폰 주자이자 편곡자로, 펑크의 문법을 다지는 데 손을 보탰다.

  • 동료프레드 웨슬리

    1970년대 J.B.'s를 이끈 트롬본 주자이자 편곡자로, 그 시기 사운드의 기둥이었다.

  • 제자마이클 잭슨

    어린 시절 그의 춤을 보며 자랐다고 말했고, 1983년 그의 무대에 올랐으며 2006년 추모식에서 그를 기렸다.

YouTube에서 6곡 이어 듣기 ↗

I. 숲속의 아이 · 1933–1949

(오두막) 1933년 5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반웰 근처 숲속의 판잣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 브라운은 소나무에서 송진을 받아 파는 노동자였고, 어머니 수지 벨링은 그가 네 살 무렵 집을 떠났다. 그는 자서전에 갓 태어났을 때 숨을 쉬지 않아 친척이 살려 냈다고 적었다. 아버지가 일을 나가면 숲속 오두막에 홀로 남는 날이 많았다. (오거스타) 대여섯 살 무렵 그는 강 건너 조지아주 오거스타의 친척 집으로 보내졌다. '허니'라 불린 아주머니가 꾸리던 그 집은 도박과 매춘, 밀주가 오가는 곳이었다. 그는 구두를 닦고 목화를 땄으며, 인근 군 기지의 병사들 앞에서 춤을 추어 동전을 받았다. 옷이 남루하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돌려보내진 일도 있었고, 정규 교육은 초등 과정에서 끝났다. (교회) 음악은 교회와 거리에서 배웠다. 흑인 교회의 설교자가 외침과 몸짓으로 회중을 들었다 놓는 모습, 순회 공연단의 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루이 조던의 경쾌한 블루스가 그의 교과서였다. 피아노와 하모니카, 드럼을 어깨너머로 익혔고, 동네 장기 자랑에서 노래로 상을 타기도 했다. (감옥) 가난은 범죄로 이어졌다. 1949년, 열여섯 살의 그는 자동차를 털다 붙잡혀 8년에서 16년에 이르는 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훗날 이 시절을 숨기지 않았고, 배고픔에 대한 기억이 평생 자신을 몰아붙였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말했다.

II. 토코아의 형제들 · 1949–1956

(소년원) 그는 조지아주 북부의 소년 교정 시설에서 형기를 살았다. 그곳에서 동료들과 가스펠 중창단을 꾸렸고, 교정 시설 야구팀이 바깥 팀과 겨루던 날 토코아의 청년 바비 버드를 만났다. 버드는 그의 노래 실력과 지기 싫어하는 성정을 함께 기억했다. (가석방) 1952년, 버드의 가족이 일자리와 거처를 보증해 준 덕에 그는 3년여 만에 가석방됐다. 가석방 조건 때문에 오거스타로 돌아갈 수 없었던 그에게 토코아는 두 번째 고향이 됐다. 그는 잡역부로 일하며 권투와 야구를 했고, 1953년 벨마 워런과 결혼해 이듬해 맏아들 테디를 얻었다. (플레임스) 버드의 가스펠 그룹에 합류한 그는 곧 무대의 중심이 됐다. 그룹은 세속 음악으로 방향을 틀어 '플레임스'가 됐고, 조지아주 메이컨에서 리틀 리처드를 관리하던 클린트 브랜틀리와 손을 잡았다. 그는 리틀 리처드의 거친 외침과 지칠 줄 모르는 무대에 깊이 매료됐고, 리처드가 전국 스타가 되며 비운 지역 공연을 대신 맡아 이름을 쌓았다. (데뷔) 1956년, 메이컨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녹음한 데모가 킹 레코드의 스카우트 랄프 배스의 귀에 들어갔다. 배스는 그룹을 자회사 페더럴과 계약시켰고, 그해 2월 신시내티에서 녹음한 「플리즈, 플리즈, 플리즈」는 R&B 차트 6위에 올랐다. 사장 시드 네이선은 한 단어만 되풀이하는 곡이라며 발매를 못마땅해했다고 전해진다. 교회에서 배운 절규가 처음으로 레코드에 새겨진 순간이었다.

♪플리즈, 플리즈, 플리즈 (Please, Please, Please)1956실황 James Brown · 1964 TAMI Show

교정 시설에서 나온 지 4년 만의 첫 녹음이다. 교회에서 익힌 절규를 그대로 R&B로 옮겨, 레이블 사장의 반대를 딛고 첫 히트가 됐다.

  • 제목의 한 단어를 거의 노래 전체처럼 되풀이하면서 매번 음높이와 거친 정도를 바꿔 짜내는 보컬에 귀를 기울여 보자. 같은 구절을 반복하며 열기를 끌어올리는 흑인 교회 설교자의 화법과 닮았다.
  • 플레임스가 뒤에서 부드러운 화음으로 받치고 그 위에서 그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외치는 짜임은, 앞소리와 뒷소리가 주고받는 교회의 콜 앤드 리스폰스를 그대로 옮겨 온 것이다.
  • 한 박을 셋으로 쪼개 느리게 흔드는 리듬(셋잇단 느낌)이 깔린 1950년대 R&B 발라드다. 10년 뒤 그의 펑크와 나란히 들으면 출발점이 얼마나 달랐는지 선명하게 들린다.
  • 무대에서 이 곡은 망토 연출의 자리였다. 지쳐 쓰러진 그에게 진행자가 망토를 덮어 데려가면 그가 망토를 떨치고 마이크로 돌아오는 장면이 수십 년간 되풀이됐고, 1964년 「T.A.M.I. 쇼」 영상에 그 전형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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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아폴로의 밤 · 1956–1963

(공백) 첫 히트 뒤 2년 가까이 후속곡들은 연달아 실패했다. 네이선은 계약 해지를 저울질했고, 원년 멤버들도 하나둘 떠났다. 그는 1958년 발라드 「트라이 미」로 R&B 차트 1위에 오르며 다시 일어섰고, 무대 표기는 '제임스 브라운과 페이머스 플레임스'로 굳어졌다. (규율) 그는 끝없는 순회로 이름을 키웠다. 1년에 300일 가까이 무대에 섰고, 뉴욕의 공연 기획사를 이끌던 벤 바트가 매니저를 맡으면서 '쇼 비즈니스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사나이'라는 홍보 문구가 따라붙었다. 밴드에는 가혹할 만큼 엄격했다. 박자를 놓치거나 구두를 닦지 않은 단원에게 벌금을 물렸고, 연주 중 손짓으로 벌금 액수를 알렸다는 이야기는 여러 단원의 증언으로 남아 있다. (아폴로) 그는 자신의 진짜 힘이 무대에 있다고 믿었다. 네이선은 이미 낸 곡들을 실황으로 다시 파는 건 손해라며 반대했지만, 그는 비용을 직접 대 1962년 10월 뉴욕 할렘의 아폴로 극장 공연을 녹음했다. 이듬해 나온 「라이브 앳 디 아폴로」는 빌보드 앨범 차트 2위에 오르고 1년 넘게 차트에 머물렀다. 흑인 라디오와 클럽에 머물던 그의 음악이 백인 청취자의 레코드장으로 들어간 계기였다. (성채) 돈이 들어오자 그는 뉴욕 퀸스의 세인트올번스에 성처럼 꾸민 저택을 샀다. 숲속 판잣집에서 자란 소년에게 그 집은 성공의 증표였지만, 정작 그는 대부분의 날을 길 위에서 보냈다.

♪라이브 앳 디 아폴로 (Live at the Apollo)1963

레이블의 반대에 맞서 자기 돈으로 녹음한 실황이다. 무대가 자신의 진짜 힘이라는 그의 믿음이 차트 2위라는 결과로 증명됐다.

  • 진행자 패츠 곤더가 그의 별명과 히트곡을 숨 가쁘게 외치며 소개하는 도입부에서, 쇼 전체가 하나의 의식처럼 짜여 있음을 느낄 수 있다.
  • 10분 가까이 이어지는 「로스트 섬원」에서 그는 목소리를 속삭임까지 낮췄다가 비명처럼 끌어올리며 객석의 함성을 조율한다. 관객의 비명이 악기처럼 녹음에 섞여 있는 것이 이 음반의 핵심이다.
  • 곡과 곡 사이에 쉬는 틈이 거의 없다. 여러 곡을 쉬지 않고 이어 붙이는 메들리 대목에서, 밴드가 그의 신호 하나로 일제히 방향을 바꾸는 긴장감이 들린다.
  • 객석 위쪽에도 마이크를 달아 현장의 반응을 크게 담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무대와 객석이 서로를 부추기는 열기가 스튜디오판과는 전혀 다른 질감으로 다가온다.

IV. 새로운 리듬 · 1964–1967

(독립) 1964년 그는 킹과의 계약이 남은 상태에서 머큐리 계열의 스매시 레이블로 녹음을 내기 시작했다. 법정 다툼 끝에 킹으로 돌아갔지만, 녹음과 제작의 결정권을 훨씬 넓게 쥐었다. 같은 해 캘리포니아에서 촬영된 공연 영화 「T.A.M.I. 쇼」에서 그가 펼친 춤과 망토 연출은 바로 다음 순서였던 롤링 스톤스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키스 리처즈는 훗날 그의 뒤에 나선 것이 실수였다고 회고했다. (첫 박) 1965년 「파파스 갓 어 브랜드 뉴 백」은 그의 음악이 방향을 튼 곡이었다. 그는 한 마디의 첫 박에 힘을 모으는 연주, 이른바 '온 더 원'을 밴드에 요구했고, 기타와 혼 섹션은 선율보다 리듬을 찍는 타악기처럼 쓰였다. 곡은 R&B 차트 1위, 팝 차트 8위에 올랐고 그에게 첫 그래미를 안겼다. (대비) 같은 해 그는 「아이 갓 유 (아이 필 굿)」의 환호를 내놓았고, 이듬해에는 현악이 깔린 발라드 「잇츠 어 맨스 맨스 맨스 월드」에서 남자들이 세운 세상이 여성 없이는 비어 있다는 고백을 무너지는 목소리로 토해 냈다. 무대 위의 그는 환희와 탄식을 한 저녁에 오갔다. (땀) 1967년 색소폰 주자이자 편곡자인 피 위 엘리스와 만든 「콜드 스웨트」는 화성을 거의 한 코드에 묶어 두고 모든 악기를 리듬의 톱니처럼 맞물렸다. 많은 비평가가 이 곡을 펑크의 출발점으로 꼽는다. 전용기를 타고 순회할 만큼 부를 쌓았지만, 그는 공연료를 현금으로 직접 챙기는 습관을 버리지 않았다. 가난의 기억은 그만큼 깊었다.

♪파파스 갓 어 브랜드 뉴 백 (Papa's Got a Brand New Bag)1965실황 James Brown

레이블과의 싸움 끝에 제작의 고삐를 쥔 그가 처음으로 리듬 중심의 새 방향을 선언한 곡이다. 첫 그래미를 안겼다.

  • 기타가 화음을 길게 울리지 않고 줄을 짧게 긁어 끊는 소리(치킨 스크래치)로 박자를 찍는다. 기타가 타악기처럼 쓰이는 첫 순간들 가운데 하나다.
  • 혼 섹션(트럼펫·색소폰 등 관악기 묶음)이 멜로디를 노래하는 대신 짧고 날카롭게 끊어 치며, 드럼과 함께 리듬의 마디마디를 못 박는다.
  • 한 마디의 첫 박에 밴드 전체가 무게를 싣는 '온 더 원'의 감각을 들어 보자. 매 마디가 시작될 때마다 몸이 아래로 툭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그것이다.
  • 발매판은 원래 녹음보다 테이프 속도를 빠르게 해 음이 살짝 높고 템포가 급하게 들린다. 약 7분 길이의 원래 테이크를 잘라 싱글로 만든 것으로, 훗날 공개된 전체판에서는 스튜디오에서 밴드에게 말을 건네는 그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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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츠 어 맨스 맨스 맨스 월드 (It's a Man's Man's Man's World)1966실황 James Brown · 1966 파리 올랭피아

리듬을 밀어붙이던 시기에 내놓은 발라드로, 환희의 무대 뒤에 숨은 탄식의 얼굴을 보여 준다.

  • 현악기가 무겁고 쓸쓸한 바닥을 깔고, 금관이 극적으로 부풀었다가 가라앉는다. 느리게 흔들리는 박자가 노래에 장송곡 같은 무게를 더한다.
  • 그는 거의 말하듯 낮게 시작해 후반으로 갈수록 목소리를 갈라뜨리고 울부짖음으로 몰아간다. 마지막 대목에서 말과 비명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이 정점이다.
  • 남자들이 이룬 것을 하나하나 늘어놓다가 결국 그 모든 것이 여성 없이는 의미가 없다고 무너지듯 털어놓는 화법이다. 자랑으로 시작해 고백으로 끝나는 구조에 귀 기울여 보자.
  • 공연에서는 이 곡을 길게 늘여 설교처럼 이어 가곤 했다. 1970년대 실황판들에서 밴드가 한 코드를 붙들고 버티는 사이 그가 즉흥으로 감정을 끌어올리는 모습을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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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 스웨트 (Cold Sweat)1967실황 James Brown · 1998 폴란드 TVP1

피 위 엘리스와 함께 화성을 걷어 내고 리듬만 남긴 곡이다. 많은 비평가가 펑크의 출발점으로 꼽는다.

  • 곡의 대부분이 거의 하나의 화음에 머문다. 선율과 코드 변화 대신 리듬이 곡을 끌고 가는데, 그런데도 지루하지 않은 이유가 각 악기의 맞물림에 있다.
  • 혼 섹션의 짧은 리프(반복되는 짧은 악구)는 피 위 엘리스가 마일스 데이비스의 「소 왓」에서 착안했다고 회고했다. 재즈의 감각이 R&B의 몸으로 들어온 대목이다.
  • 클라이드 스터블필드의 드럼은 정박 사이사이에 아주 작게 치는 장식음(고스트 노트)을 흩뿌려, 리듬이 한자리에서 끊임없이 꿈틀거리게 만든다.
  • 중반에 그가 드러머에게 차례를 넘기겠다고 외치면 다른 악기가 빠지고 드럼만 남는 브레이크가 나온다. 이어지는 메이시오 파커의 색소폰 솔로까지, 곡이 한 번 숨을 고르고 다시 달리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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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크게 말하라 · 1968–1975

(보스턴) 1968년 4월 4일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암살됐다. 이튿날로 잡혀 있던 그의 보스턴 가든 공연은 취소될 뻔했으나, 시 당국은 공연을 열고 텔레비전으로 생중계하기로 했다. 무대로 몰려든 관객을 그가 직접 타일러 돌려보낸 그날 밤, 보스턴은 폭동이 번진 다른 도시들보다 조용했다고 기록돼 있다. (자부심) 그해 여름 그는 베트남의 미군 부대를 위문했고, 8월에는 아이들의 합창을 앞세운 「세이 잇 라우드 — 아임 블랙 앤드 아임 프라우드」를 냈다. 흑인의 자긍심을 노래한 이 곡은 시대의 구호가 됐지만, 그는 이 곡으로 백인 청중 일부를 잃었다고 회고했다. 정치 행보는 한 방향이 아니었다. 1972년 닉슨 대통령 지지를 밝혔을 때는 공연장 앞에서 항의 시위를 맞았다. (단원) 1970년 3월, 급여에 불만을 품은 밴드가 공연을 거부하고 집단으로 떠났다. 그는 신시내티의 젊은 연주자들, 베이스의 부치 콜린스와 기타의 캣피시 콜린스 형제를 불러 'J.B.'s'를 꾸렸고, 곧바로 「섹스 머신」을 녹음했다. 이후 트롬본의 프레드 웨슬리와 색소폰의 메이시오 파커가 1970년대 사운드를 지탱했다. 같은 시기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이 그의 리듬에 록을 섞어 젊은 청중을 사로잡으며, 펑크는 두 갈래로 뻗어 나갔다. (상실) 1969년 첫 결혼이 끝났고 이듬해 그는 재혼했다. 1971년 폴리도르로 옮긴 뒤에도 히트는 이어졌지만, 1973년 맏아들 테디가 교통사고로 열아홉 살에 세상을 떠났다. 그해 말 나온 「더 페이백」은 배신과 응징을 낮고 차가운 그루브 위에서 되뇌는 앨범으로, 그의 1970년대를 대표하는 작품이 됐다.

♪세이 잇 라우드 — 아임 블랙 앤드 아임 프라우드 (Say It Loud – I'm Black and I'm Proud)1968노래 James Brown · 1968

킹 목사가 암살된 해, 그가 음악으로 내놓은 정치적 발언이다. 시대의 구호가 된 만큼 그에게 대가도 따랐다.

  • 그가 앞소리를 던지면 로스앤젤레스에서 모은 아이들의 합창이 힘차게 받는다. 교회의 콜 앤드 리스폰스가 시위 현장의 구호처럼 바뀌는 순간이다.
  • 노래라기보다 연설이나 설교에 가까운 화법으로, 리듬 위에 말을 얹는 방식은 훗날 랩의 먼 조상으로 자주 거론된다.
  • 베이스와 기타가 짧은 리프를 집요하게 되풀이하고 혼이 그 사이를 찌른다. 화려한 변화 없이 같은 그루브를 밀어붙여 구호의 힘을 키운다.
  • 흑인의 자긍심을 당당하게 외치는 정서가 핵심이며, R&B 차트 1위에 올랐다. 그는 이 곡 이후 백인 청중 일부가 등을 돌렸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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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 업 (아이 필 라이크 비잉 어) 섹스 머신 (Get Up (I Feel Like Being a) Sex Machine)1970실황 James Brown · 2004 Night of the Proms

밴드가 집단으로 떠난 직후, 신시내티의 젊은 연주자들로 새로 꾸린 J.B.'s의 첫 결과물이다. 위기가 새 사운드로 바뀌었다.

  • 당시 열여덟 살 남짓이던 부치 콜린스의 베이스가 낮은 음역에서 고무줄처럼 튀는 리프를 반복하며 곡의 뼈대를 만든다. 이전 밴드보다 젊고 탄력 있는 그루브가 확연히 들린다.
  • 오랜 동료 바비 버드가 그의 외침을 맞받아치며 응답 보컬을 맡는다. 두 사람이 짧게 주고받는 호흡이 곡 전체를 밀고 간다.
  • 곡 중간 그가 밴드에게 브리지(곡의 분위기를 바꾸는 중간 부분)로 넘어갈지 묻고 답하는 대목에서 곡이 뒤집힌다. 그가 직접 치는 짧은 건반 연주도 들어 있다.
  • 실황처럼 들리는 관객의 함성은 스튜디오 녹음 위에 덧입힌 것이다. 무대의 열기를 레코드에 옮기려 한 그의 연출 감각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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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키 드러머 (Funky Drummer)1970

발매 당시엔 중간 정도의 히트였지만, 훗날 힙합 시대에 가장 많이 다시 쓰인 드럼 소절을 품은 곡이 됐다.

  • 곡 후반, 다른 악기가 빠지고 클라이드 스터블필드의 드럼만 몇 마디 남는 브레이크가 나온다. 힙합에서 가장 많이 샘플링된 드럼 소절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바로 그 대목이다.
  • 하이햇(두 장의 금속 심벌을 겹친 것)을 잘게 쪼개 치고, 스네어에 아주 작은 장식음(고스트 노트)을 섞어 단순하면서도 쉼 없이 출렁이는 리듬을 만든다.
  • 정해진 노래보다 그가 즉석에서 밴드를 이끄는 잼(즉흥 합주)에 가깝다. 그의 짧은 지시에 따라 악기들이 들고 나는 흐름을 따라가 보자.
  • 스터블필드는 이 소절이 수많은 곡에 쓰이는 동안 사용료를 거의 받지 못했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밝혔다. 샘플링 시대의 빛과 그늘이 이 몇 마디에 함께 담겨 있다.

VI. 영광과 추락 · 1976–1991

(디스코) 1970년대 후반 디스코가 클럽을 차지하자 그의 차트 성적은 가라앉았다. 국세청은 밀린 세금을 요구했고, 그가 사들였던 라디오 방송국들도 경영난 끝에 넘어갔다. 1980년 영화 「블루스 브라더스」의 설교자 역은 젊은 관객에게 그를 다시 소개했다. (후배) 1983년 로스앤젤레스의 한 공연에서 그는 객석의 마이클 잭슨을 무대로 불러냈다. 어린 시절 텔레비전 속 그의 춤을 따라 하며 자랐다고 말해 온 잭슨은 그의 스텝을 재현해 보였고, 이어 프린스가 올라와 기타를 쳤다. 그의 리듬과 춤은 이미 다음 세대의 언어가 되어 있었다. (재기) 1985년 영화 「록키 4」에 실린 「리빙 인 아메리카」가 팝 차트 4위에 오르며 그는 오랜만에 큰 히트를 냈고, 이 곡으로 두 번째 그래미를 받았다. 1986년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 첫 헌액자가 됐다. 그 무렵 힙합 프로듀서들은 그의 옛 레코드에서 드럼 브레이크와 외침을 잘라 새 곡의 뼈대로 삼았지만, 그와 연주자들에게 돌아오는 몫은 적었다. (추락) 삶은 흔들렸다. 1984년 애드리엔 로드리게스와 결혼했지만 그는 아내를 폭행한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고, 약물 문제도 깊어졌다. 1988년 9월 오거스타의 자기 사무실 건물에서 산탄총을 들고 소동을 벌인 뒤, 조지아와 사우스캐롤라이나를 넘나드는 경찰 추격전 끝에 붙잡혀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2년여를 복역하고 1991년 2월 가석방됐다. 열여섯 살 이후 두 번째 수감이었다.

VII. 대부의 마지막 무대 · 1991–2006

(귀환) 출소 넉 달 뒤인 1991년 6월, 그는 로스앤젤레스 공연을 유료 TV로 중계하며 무대에 돌아왔다. 이듬해 그래미 평생공로상을 받았고, 1993년 오거스타는 시내 거리 하나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1996년 아내 애드리엔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60대와 70대에도 해마다 세계 순회를 이어 갔고, 밴드를 다그치는 엄격함도 여전했다. (신념) 그는 정부의 지원보다 흑인의 자립과 사업을 강조했고, 학교를 일찍 그만둔 자신을 예로 들며 젊은이들에게 교육을 당부하곤 했다. 2003년 케네디 센터 공로상을 받았고, 2005년 오거스타 중심가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소년 시절 구두를 닦던 거리에서 멀지 않은 자리였다. (작별) 2004년 그는 전립선암 수술을 받았다. 2006년 12월 폐렴으로 애틀랜타의 병원에 입원했고, 크리스마스 새벽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시신은 뉴욕 아폴로 극장 무대에 안치돼 수많은 조문객을 맞았고, 오거스타의 추모식에서는 마이클 잭슨이 그에게 작별을 고했다. (유언) 그는 재산의 대부분을 조지아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장학 기금에 남겼다. 유산 정리가 길어지며 그 뜻은 오랫동안 미뤄졌지만, 학교를 마치지 못한 소년이 마지막으로 남긴 계획은 교육이었다. 그의 드럼 소절과 외침은 오늘날에도 힙합과 R&B 곳곳에서 울린다.

덜 알려진 이야기

그의 상징이 된 망토 연출은 교회가 아니라 프로레슬링에서 왔다. 그는 1950년대 텔레비전에서 화려한 가운을 걸치고 입장하던 레슬러 고저스 조지의 쇼맨십에서 착안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쓰러진 그에게 망토를 덮어 주던 진행자 대니 레이는 수십 년간 그 역할을 맡았다. 무대가 신앙적 열기로 가득했기에 이 장면은 흔히 가스펠 의식으로만 이해되지만, 실은 텔레비전 시대의 대중오락에서 빌려 온 장치였다. 1968년 보스턴 공연이 성사된 과정도 흔히 전해지는 미담보다 복잡했다. 시 당국이 공연 취소를 검토하자 그는 표 환불로 생길 손실을 문제 삼았고, 시가 손실을 보전하기로 약속한 뒤에야 생중계가 이뤄졌다. 이 협상의 내막은 2008년 다큐멘터리 「제임스 브라운이 보스턴을 구한 밤」 등을 통해 뒤늦게 조명됐다. 그는 1960년대 말부터 사업으로 흑인의 경제적 자립을 실천하려 했다. 오거스타의 WRDW를 비롯해 라디오 방송국 여러 곳을 사들였고, 자기 이름을 건 소울 푸드 식당 체인도 열었다. 대부분 1970년대의 경영난과 세금 문제 속에 정리됐고, 음악적 업적에 가려 거의 기억되지 않는다. 대표작 「더 페이백」은 원래 영화 「헬 업 인 할렘」의 음악으로 만들어졌다. 제작진은 이를 쓰지 않았고, 그는 거절된 곡들을 그대로 앨범으로 냈다. 그 직전에는 같은 제작진의 영화 「블랙 시저」 음악을 맡기도 했다. 버려진 영화 음악이 그의 1970년대 최고작이 된 셈이다.

용어 노트 📚🔎

펑크 (funk)

(말뜻) 영어 funk 는 원래 땀 냄새나 퀴퀴한 냄새를 가리키던 속어였다. 그런데 흑인 재즈 음악가들 사이에서 funky 는 꾸밈없고 흙냄새 나는, 몸에 바로 와닿는 연주를 칭찬하는 말로 쓰이게 됐다. (팝에서) 1960년대 후반 제임스 브라운이 다듬은 음악 갈래로, 화려한 멜로디나 화음 변화보다 되풀이되는 리듬과 베이스, 짧게 끊어 치는 기타와 관악기가 중심이 된다. 모든 악기가 북처럼 박자를 나눠 맡는다. 반 친구들이 손뼉, 발 구르기, 책상 두드리기를 하나씩 맡아 함께 리듬을 만들면 아무도 멜로디를 부르지 않아도 저절로 몸이 들썩이는데, 펑크가 바로 그런 원리다. (다른 데서는) 우리말로는 똑같이 펑크라고 쓰지만, 1970년대 영국에서 나온 거칠고 빠른 록 음악 펑크(punk)와는 전혀 다른 말이다.

온 더 원 (on the one)

(말뜻) the one 은 한 마디를 하나, 둘, 셋, 넷으로 셀 때의 하나, 곧 첫째 박을 뜻한다. on the one 은 그 첫 박 위에 올라탄다는 말이다. (팝에서) 당시 R&B와 로큰롤은 둘째·넷째 박을 세게 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제임스 브라운은 밴드 전체가 첫 박에 힘을 모아 함께 떨어지도록 요구했다. 그러면 리듬이 한 바퀴 돌 때마다 무게중심이 분명해져, 춤추는 사람의 몸이 첫 박에 맞춰 툭 내려앉게 된다. 긴 줄넘기에서 줄이 땅에 닿는 순간 모두가 한꺼번에 발을 구르는 것과 비슷하다.

콜 앤드 리스폰스 (call and response)

(말뜻) call 은 부름, response 는 응답이다. 한 사람이 부르고 여럿이 받는다는 뜻 그대로다. (팝에서) 한 사람이 앞소리를 던지면 합창이나 관객, 악기가 짧게 받아치는 짜임이다. 흑인 교회에서 설교자의 외침에 회중이 화답하던 전통에서 나왔고, 제임스 브라운은 밴드와 관객, 아이들의 합창까지 응답자로 삼았다. 교실에서 선생님이 '하나, 둘, 셋!' 하고 외치면 반 전체가 정해진 말로 한목소리를 내는 것과 같은 원리다. 우리 민요에서 앞사람이 메기고 여럿이 받는 소리도 같은 짜임이다.

혼 섹션 (horn section)

(말뜻) horn 은 원래 짐승의 뿔을 뜻하는데, 옛날 뿔로 만든 피리에서 출발해 관악기를 두루 부르는 말이 됐다. section 은 한 무리, 한 부분이라는 뜻이다. (팝에서) 트럼펫·색소폰·트롬본 같은 관악기 연주자 몇 명을 한 묶음으로 짠 것을 말한다. 제임스 브라운의 혼 섹션은 긴 멜로디를 부르기보다 짧고 날카롭게 끊어 쳐서 드럼처럼 박자를 찍었다. 합창 대회에서 소프라노나 알토 파트가 여럿이 한 덩어리로 움직이듯, 혼 섹션도 여러 연주자가 한 몸처럼 같은 리듬을 친다.

브레이크 (break)

(말뜻) break 는 끊다, 잠깐 쉬다라는 뜻이다. (팝에서) 곡 중간에 다른 악기들이 잠시 멈추고 드럼이나 리듬 악기만 남는 대목을 가리킨다. 짧지만 리듬의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서, 훗날 힙합 디제이들은 이 부분만 두 장의 레코드로 번갈아 틀어 끝없이 이어 붙였고 사람들은 그 위에서 춤을 추었다. 브레이크댄스라는 이름도 여기서 나왔다. 반 전체가 노래하다 갑자기 멈추고 한 친구만 혼자 박수를 치는 몇 초를 떠올리면 된다. (다른 데서는) 자동차나 자전거에서는 속도를 줄이는 제동 장치를 브레이크라고 한다.

샘플링 (sampling)

(말뜻) sample 은 견본, 맛보기라는 뜻이다. (팝에서) 이미 녹음된 음악의 한 토막을 잘라 내 새 곡의 재료로 되풀이해 쓰는 제작 방식이다. 1980년대 이후 힙합 프로듀서들은 제임스 브라운 레코드의 드럼과 외침을 가장 즐겨 가져다 썼고, 그 과정에서 원곡자의 허락과 사용료 문제가 뒤따랐다. 잡지에서 사진을 오려 붙여 새 그림을 만드는 콜라주 숙제와 비슷한데, 그 사진을 찍은 사람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점까지 닮았다. (다른 데서는) 통계나 과학에서는 전체 가운데 일부를 골라 조사하는 표본 추출을 샘플링이라고 한다.

가스펠 (gospel)

(말뜻) gospel 은 옛 영어 godspel, 곧 좋은(god) 소식(spel)에서 온 말로, 기독교의 복음을 뜻한다. (팝에서) 미국 흑인 교회에서 자라난 찬양 음악이다. 손뼉과 외침, 설교자와 회중의 주고받기, 감정이 북받치는 대로 목소리를 터뜨리는 창법이 특징이며, 소울과 R&B 가수 상당수가 여기서 노래를 배웠다. 운동회 응원석에서 모두가 손뼉을 치며 한 사람의 선창을 따라 점점 목소리를 높여 가는 열기와 비슷하다. (다른 데서는)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를 가리키고, 영어에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진리라는 뜻으로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