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nette Coleman
코드의 울타리를 걷어 낸 자리에서, 그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우는 알토를 불었다.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함께한 사람들 ⏳🌊
- 영향찰리 파커
포트워스 시절 그의 녹음을 들으며 솔로를 익혔고, 이것이 비밥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었다.
- 가족제인 코르테즈
1954년 결혼한 시인으로 아들 데나르도의 어머니이며, 1964년 헤어진 뒤에도 각자 예술의 길을 걸었다.
- 동료돈 체리
로스앤젤레스에서 만난 트럼펫 연주자로, 「론리 우먼」과 「프리 재즈」의 테마를 그와 함께 불렀다.
- 동료찰리 헤이든
1957년 만난 베이시스트로, 코드에 매이지 않는 그의 음악에 가장 깊이 귀 기울인 평생의 음악 동지였다.
- 후원네수이 어티건
애틀랜틱 레코드에서 그를 계약해 「더 셰이프 오브 재즈 투 컴」과 「프리 재즈」를 제작했다.
- 우정존 콜트레인
그의 음악을 깊이 연구해 그의 곡으로 「디 아방가르드」를 녹음했고, 오넷은 1967년 콜트레인의 장례식에서 연주했다.
I. 포트워스의 소년 · 1930–1949 (0–19세)
(포트워스) 1930년 3월, 미국 텍사스주 포트워스에서 태어났다. 생일은 9일이었다. 아버지 랜돌프는 오넷이 일곱 살 무렵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 로자가 홀로 생계를 꾸리며 아이들을 키웠다. 손위 누나 트루벤자는 훗날 포트워스에서 블루스 가수이자 밴드 리더로 활동했다. 집은 철길 건너 가난한 흑인 동네에 있었고, 남부의 인종 분리는 학교와 극장과 버스를 모두 갈라놓았다. (색소폰) 열네 살 무렵 어머니가 모은 돈으로 알토 색소폰을 장만했다. 그는 거의 혼자 배웠다. 피아노 교본으로 음 이름을 익히다가, 색소폰은 악보에 적힌 음과 실제로 울리는 음이 다르다는 것을 몰라 한동안 음 이름을 잘못 알고 불었다고 회고했다. 훗날 그의 음악을 두고 '틀린 음'이라는 말이 오간 것을 생각하면, 정해진 규칙보다 귀를 먼저 믿은 출발이었다. (고등학교) I.M. 테럴 고등학교 밴드에서 행진곡을 연주하다 즉흥으로 가락을 바꿔 불어 밴드에서 쫓겨났다고 전해진다. 같은 학교와 동네에는 훗날 함께 녹음할 테너 색소포니스트 듀이 레드먼, 드러머 찰스 모펫, 알토 연주자 프린스 라샤가 있었다. 동네의 테너 연주자 레드 코너를 통해 비밥을 알게 됐고, 찰리 파커의 녹음을 들으며 그 솔로를 익혔다. 그러나 돈은 테너 색소폰을 들고 클럽과 댄스홀에서 리듬 앤드 블루스를 거칠게 불어 주는 일에서 나왔다. 열아홉 살이던 1949년, 그는 떠돌이 공연단에 들어가 고향을 떠났다.
II. 길 위에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 1949–1958 (19–28세)
(유랑) 1949년 그는 남부를 도는 순회 쇼단 사일러스 그린 프롬 뉴올리언스를 따라나섰다가 미시시피주 나체즈에서 일자리를 잃었다. 루이지애나주 배턴루지에서는 연주를 마친 뒤 남자들에게 끌려 나가 폭행당하고 테너 색소폰이 부서졌다고 그는 회고했다. 이후 뉴올리언스에 머물며 드러머 에드 블랙웰과 사귀었는데, 이 인연은 10년 뒤 그의 밴드로 이어졌다. (로스앤젤레스) 1950년 블루스 기타리스트 피 위 크레이턴의 밴드를 따라 로스앤젤레스로 갔다. 크레이턴이 그의 연주를 못마땅해해 무대에서 불지 말라며 돈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잠시 고향에 돌아갔다가 1953년 다시 로스앤젤레스에 자리 잡았다. 백화점 불럭스에서 엘리베이터를 운전하며 틈틈이 화성학 책을 읽었고, 잼 세션에서 그가 무대에 오르면 다른 연주자들이 자리를 뜨곤 했다고 회고했다. 긴 머리와 수염도 당시 재즈계에서는 낯선 모습이었다. (결혼) 1954년 시인 제인 코르테즈와 결혼했고, 1956년 아들 데나르도가 태어났다. 이 무렵 트럼펫 연주자 돈 체리, 드러머 빌리 히긴스, 베이시스트 찰리 헤이든을 차례로 만나 그의 곡을 함께 연습했다. 1958년 그는 컨템퍼러리 레코드의 레스터 쾨니그에게 곡을 팔러 갔다가 직접 녹음할 기회를 얻었다고 전해진다. 같은 해 피아니스트 폴 블레이의 밴드로 힐크레스트 클럽 무대에도 섰다. 첫 앨범의 한 곡에는 아내의 이름을 따 「제인(Jayne)」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엘리베이터를 운전하며 쓴 곡들이 처음 음반이 된 데뷔작이다. 아내에게 바친 「제인」이 실려 있어 로스앤젤레스 시절의 생활이 그대로 묻어난다.
- 그의 초기 음반 가운데 드물게 피아노(월터 노리스)가 있다. 피아노가 정해진 화음을 짚는 동안 알토가 그 화음 밖으로 미끄러져 나가는 긴장이 이후 그가 왜 피아노를 뺐는지 짐작하게 한다.
- 형식은 아직 비밥 관습을 따른다. 테마를 함께 연주하고 솔로를 돌린 뒤 테마로 돌아오는 짜임(헤드-솔로-헤드)이라 처음 듣는 이도 길을 잃지 않는다.
- 돈 체리의 코넷과 오넷의 알토가 테마를 한 음 한 음 함께 부르는데(유니즌), 두 소리가 완벽히 포개지지 않고 살짝 어긋나며 거친 결을 만든다.
- 「인비저블」「더 블레싱」처럼 짧고 노래하듯 꺾이는 테마에서 그가 이미 작곡가로서 독특한 선율 감각을 지녔음을 들을 수 있다.
- 1958년 2월과 3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컨템퍼러리 레코드의 레스터 쾨니그가 제작했다.
III. 다가올 재즈의 모양 · 1959–1961 (29–31세)
(애틀랜틱) 모던 재즈 쿼텟의 피아니스트 존 루이스가 그를 눈여겨보고 애틀랜틱 레코드의 네수이 어티건에게 소개했다. 1959년 5월 할리우드에서 돈 체리, 찰리 헤이든, 빌리 히긴스와 「더 셰이프 오브 재즈 투 컴」을 녹음했다. 피아노를 빼고, 미리 정한 코드 진행 대신 선율과 서로의 소리에 반응하며 나아가는 음악이었다. 여름에는 매사추세츠주 레녹스 재즈 학교에서 존 루이스, 건서 슐러 등과 함께 지냈다. (파이브스폿) 1959년 11월 뉴욕 쿠퍼스퀘어의 클럽 파이브 스폿에 데뷔했다. 두 주로 잡힌 출연은 두 달 넘게 이어졌다. 레너드 번스타인 같은 이들이 열광했고, 마일스 데이비스는 그가 속이 엉망인 사람 같다며 혹평했다. 존 콜트레인은 그를 찾아가 음악 이야기를 나누었고, 1960년 돈 체리와 헤이든, 블랙웰을 데리고 그의 곡들로 「디 아방가르드」를 녹음했다. 그가 불던 흰 플라스틱 알토는 처음엔 값이 싸서 산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프리재즈) 1960년 12월 21일, 그는 두 쿼텟을 한 스튜디오에 세워 40분 가까운 집단 즉흥 「프리 재즈」를 녹음했다. 에릭 돌피, 프레디 허버드, 스콧 라파로가 함께했고, 이 제목은 곧 한 시대의 이름이 되었다. 1961년에는 베이시스트 지미 개리슨과 「오넷 온 테너」를 녹음했는데, 개리슨은 얼마 뒤 콜트레인 쿼텟에 들어갔다. 찬사와 조롱이 엇갈리는 사이에도 클럽 출연료는 그의 기대만큼 오르지 않았다.
「더 셰이프 오브 재즈 투 컴」의 첫 곡이다. 백화점에서 일하던 시절 본 한 부유한 여성의 그림에서 떠올렸다고 그가 회고한 곡으로, 뉴욕 데뷔 직전의 결정적 녹음이다.
- 도입에서 찰리 헤이든이 두 줄을 함께 퉁기는 무거운 저음을 깔고, 빌리 히긴스는 심벌을 빠르고 잘게 두드린다. 드럼은 빠른 속도로, 관악은 느린 속도로 흘러 두 개의 시간이 겹쳐 있는 듯 들린다.
- 알토와 포켓 트럼펫이 단조의 테마를 함께 부르는데, 박자를 정확히 맞추기보다 서로 기대어 흐느끼듯 늘였다 줄이는 연주(루바토)에 가깝다.
- 오넷의 솔로는 음정을 미세하게 끌어올리고 떨어뜨리며 사람의 울음 같은 음색을 낸다. 화려한 속주보다 한 음의 표정에 귀를 기울이면 좋다.
- 피아노가 없어 코드가 강요되지 않으므로, 베이스가 화음의 바닥을 자유롭게 옮겨 다니며 솔로를 따라간다(인터플레이).
- 1959년 5월 할리우드의 라디오 레코더스에서 네수이 어티건이 제작했다. 이후 수많은 연주자가 다시 녹음한 그의 가장 유명한 곡이 되었다.
뉴욕을 뒤흔든 지 1년 만에 그는 쿼텟 두 개를 한꺼번에 세웠다. 음반 제목이 그대로 장르의 이름이 된 작품이다.
- 스테레오의 왼쪽에는 오넷, 돈 체리, 스콧 라파로, 빌리 히긴스가, 오른쪽에는 에릭 돌피(베이스 클라리넷), 프레디 허버드, 찰리 헤이든, 에드 블랙웰이 자리한다. 이어폰으로 들으면 두 밴드가 대화하는 모습이 또렷하다.
- 한 사람이 솔로를 하는 동안 나머지 일곱이 가만있지 않고 끼어들어 말을 건다(집단 즉흥). 솔로와 반주의 경계가 흐려지는 것이 핵심이다.
- 솔로와 솔로 사이에는 미리 써 둔 짧은 합주 구절이 팡파르처럼 끼어들어 다음 장면을 연다. 완전한 무질서가 아니라 느슨한 설계가 있다.
- 가장 긴 솔로는 오넷의 몫으로, 짧은 동기를 붙잡아 비틀고 늘리며 10분 가까이 끌고 간다. 두 베이스와 두 드럼이 그 아래에서 끊임없이 움직인다.
- 약 37분을 한 번에 녹음해 LP 앞뒷면에 나눠 담았다. 표지에는 잭슨 폴록의 그림 「화이트 라이트」가 실렸다.
IV. 물러섬과 다시 세운 트리오 · 1962–1971 (32–41세)
(출연료) 1962년 12월 그는 자비로 뉴욕 타운홀 공연을 열었다. 베이시스트 데이비드 아이젠존, 드러머 찰스 모펫과의 트리오에 현악사중주와 리듬 앤드 블루스 밴드까지 세웠지만 손해가 컸다고 전해진다. 그는 자기 음악의 대가가 클럽과 음반사가 가져가는 몫에 비해 터무니없다고 여겼고, 출연료를 크게 올려 부르다 일이 끊기자 무대에서 물러났다. 그사이 소니 롤린스는 돈 체리와 빌리 히긴스를 불러 새 밴드를 꾸렸다. (공백) 공백기 동안 그는 트럼펫과 바이올린을 독학했다. 관습적인 주법을 따르지 않은 그의 바이올린은 많은 이를 당황하게 했다. 1964년 제인 코르테즈와 헤어졌고, 이후 다시 결혼하지 않았다. 1965년 1월 빌리지 뱅가드에서 복귀했고, 그해 영화 「채퍼콰」의 음악을 녹음했으나 감독은 이를 쓰지 않았다. 유럽을 돌던 12월, 스톡홀름 골든 서클 공연이 블루노트에서 두 장의 음반으로 나왔다. (재기) 1966년 그는 열 살 아들 데나르도를 드럼에 앉혀 헤이든과 「디 엠티 폭스홀」을 녹음했다. 1967년 7월에는 존 콜트레인의 장례식에서 연주했고, 같은 해 재즈 작곡가로는 처음으로 구겐하임 펠로십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8년 콜트레인 쿼텟의 엘빈 존스와 지미 개리슨, 고향 친구 듀이 레드먼을 불러 「뉴욕 이즈 나우!」를 녹음했다. 소호 프린스 스트리트의 건물을 사들여 연주와 작업을 함께하는 공간 아티스츠 하우스로 꾸몄고, 1971년 컬럼비아에서 「사이언스 픽션」을 냈다.
무대에서 물러났던 그가 아이젠존, 모펫과 다시 세운 트리오의 정점이다. 공백기에 익힌 바이올린과 트럼펫도 이 실황에서 처음 넓게 알려졌다.
- 피아노도 트럼펫도 없는 트리오라 알토의 소리가 그대로 드러난다. 「페이시스 앤드 플레이시스」에서 그는 빠른 템포 위에서 짧은 동기를 끝없이 변형하며 긴 솔로를 이어 간다.
- 데이비드 아이젠존은 베이스를 활로 긋는 주법(아르코)으로 높은 음역까지 올라가, 반주라기보다 두 번째 선율처럼 움직인다.
- 찰스 모펫의 드럼은 밝고 탄력 있게 튀며, 일정한 박을 지키기보다 알토의 말에 대꾸하듯 리듬을 바꾼다.
- 둘째 권의 「스노플레이크스 앤드 선샤인」에서는 바이올린과 트럼펫을 분다. 정규 교육을 거치지 않은 거친 소리가 오히려 색채로 쓰인다.
- 1965년 12월 스톡홀름의 클럽 골든 서클 실황으로, 블루노트가 두 권으로 나누어 냈다.
V. 하늘과 조주카 · 1972–1989 (42–59세)
(하몰로딕스) 1972년 런던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런던 교향악단과 「스카이스 오브 아메리카」를 녹음했다. 영국 음악가 조합 규정 탓에 자기 쿼텟을 데려가지 못해 그 혼자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이 무렵부터 그는 선율과 화성과 리듬을 위계 없이 동등하게 다룬다는 생각을 하몰로딕스라 부르며 평생 설명하려 했다. 설명은 늘 시처럼 모호했지만, 어떤 소리도 다른 소리의 반주로 묶여서는 안 된다는 믿음만은 한결같았다. (조주카) 1973년 모로코 산골 마을 조주카를 찾아 그곳 악사들과 함께 연주했다. 대대로 이어진 의식 음악이 한 음을 둘러싸고 끝없이 돌아가는 모습에서 그는 자기 생각과 닮은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돌아온 뒤 전기 기타 둘과 전기 베이스, 드럼으로 이루어진 밴드 프라임 타임을 꾸렸다. 기타의 번 닉스와 찰스 엘러비, 베이스의 자말라딘 타쿠마, 드럼의 로널드 섀넌 잭슨과 데나르도가 이 밴드를 거쳐 갔다. 춤출 수 있는 리듬 위에서 모두가 동시에 선율을 뽑는 소리였다. (귀향) 1983년 9월 포트워스에 공연장 캐러밴 오브 드림스가 문을 열자 그는 개관 무대에 서서 포트워스 교향악단과 「스카이스 오브 아메리카」를 연주했다. 고향은 그날을 오넷 콜먼의 날로 정했다. 감독 셜리 클라크의 다큐멘터리 「오넷: 메이드 인 아메리카」가 이 귀향을 담았다. 1985년에는 기타리스트 팻 메시니와 「송 X」를, 1987년에는 옛 쿼텟과 프라임 타임을 한 음반에 나란히 담은 「인 올 랭귀지스」를 냈다.
하몰로딕스를 오케스트라로 옮긴 첫 대작이다. 쿼텟을 데려가지 못한 사정 때문에 오넷의 알토만이 런던 교향악단 사이를 오간다.
- 그는 여러 악기가 같은 선율을 각자의 음높이로 옮겨 부르게 했다. 그래서 화음이 위아래로 엇갈려 쌓이며, 익숙한 교향곡과는 다른 두꺼운 울림이 생긴다.
- 스무 개 남짓한 짧은 악장이 쉼 없이 이어지는 모음곡이다. 한 악장씩 끊어 듣기보다 흐름 전체를 따라가면 반복되는 주제가 들린다.
- 알토 솔로는 일부 대목에만 나오지만,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오는 그의 음색이 곡의 중심을 잡는다.
- 여기 담긴 주제 하나가 몇 년 뒤 「댄싱 인 유어 헤드」에서 전기 밴드의 곡으로 다시 태어난다.
- 1972년 런던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데이비드 미샴의 지휘로 녹음했다.
조주카에서 얻은 순환의 감각이 프라임 타임의 전기 사운드와 만난 첫 결과물이다. 1977년에 나왔다.
- 「테마 프롬 어 심퍼니」는 동요처럼 짧고 단순한 주제를 두 개의 변주에 걸쳐 25분 넘게 되풀이한다. 같은 주제가 매번 조금씩 다른 각도로 비틀린다.
- 두 대의 전기 기타가 서로 다른 리듬으로 얽히고, 베이스와 드럼은 몸을 들썩이게 하는 잘게 쪼갠 리듬(펑크 그루브)을 깐다. 춤곡과 즉흥이 한자리에 있다.
- 모두가 반주 없이 동시에 선율을 내는 하몰로딕스의 생각이 가장 쉽게 들리는 음반이다. 어느 악기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 마지막 곡 「미드나이트 선라이즈」는 1973년 조주카 마을에서 녹음한 것으로, 그곳 악사들의 피리와 북 사이로 평론가 로버트 파머의 클라리넷과 오넷의 알토가 섞인다.
VI. 소리의 문법 · 1990–2015 (60–85세)
(인정) 1991년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영화 「네이키드 런치」 음악에 작곡가 하워드 쇼어와 함께 참여했다. 1994년 맥아더 펠로십을 받았고, 하몰로딕 레이블을 세워 「톤 다이얼링」과 「사운드 뮤지엄」을 냈다. 오래 피아노를 쓰지 않던 그가 제리 앨런, 요아힘 퀸 같은 피아니스트와 마주 앉은 것도 이 시기였다.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고 맞춤 양복을 즐겨 입었으며, 찾아오는 젊은 연주자 누구와도 오래 음악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동료들은 회고했다. (퓰리처) 2005년 10월 독일 루트비히스하펜 공연 실황을 담은 「사운드 그래머」로 2007년 퓰리처 음악상을 받았다. 같은 해 그래미 평생공로상도 받았다. 두 대의 베이스와 아들 데나르도의 드럼으로 짠 이 무렵의 밴드는 1959년의 곡을 다시 꺼내 연주하면서도 낡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2009년에는 런던 사우스뱅크의 멜트다운 페스티벌 큐레이터를 맡았다. (작별) 말년의 그는 맨해튼에 살며 기력이 허락하는 만큼 연습을 이어 갔다. 2014년 6월 브루클린 프로스펙트 파크에서 열린 헌정 공연에 잠시 올라 알토를 불었는데, 이것이 사실상 마지막 공개 무대였다. 2015년 6월 11일 뉴욕 맨해튼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5세였다. 6월 27일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열린 장례식은 세 시간 가까운 연주회처럼 진행됐고, 동갑내기 혁신가 세실 테일러, 색소포니스트 패로아 샌더스 등이 그를 위해 연주했다.
일흔다섯의 그가 독일 무대에서 남긴 실황이다. 이 음반으로 2007년 퓰리처 음악상을 받았다.
- 베이스가 두 대다. 한 사람은 손가락으로 튕기고 다른 한 사람은 활로 그어, 저음역에 리듬과 선율이 함께 흐른다.
- 아들 데나르도의 드럼은 일정한 박을 고집하지 않고 밴드 전체를 밀고 당기며 흐름을 만든다.
- 1959년의 「턴어라운드」 같은 옛 곡이 새 편성으로 다시 연주된다. 반세기 가까운 시간을 건너 같은 선율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비교해 들을 만하다.
- 알토 외에 바이올린과 트럼펫도 짧게 등장한다. 노년의 알토는 젊은 날보다 음이 둥글고 여유롭게 들린다.
- 2005년 10월 독일 루트비히스하펜 공연 실황으로, 관객의 반응까지 그대로 담겼다.
덜 알려진 이야기
(크로이던) 1965년 8월 그는 런던 근교 크로이던에서 트리오 공연을 열었다. 당시 영국 음악가 조합은 미국 재즈 연주자의 공연을 엄격히 제한했지만 클래식 공연은 예외였다. 그래서 그는 관악 오중주를 위한 자작곡 「사운드 앤드 폼스 포 윈드 퀸텟」을 프로그램에 넣어 이 무대를 클래식 연주회로 꾸렸다. 실황은 「언 이브닝 위드 오넷 콜먼」으로 나왔지만, 그가 클래식 작곡가를 자처한 동기에 이런 행정 사정이 얽혀 있었다는 점은 음반 해설 바깥에서는 잘 언급되지 않는다. (플라스틱) 그가 1950~60년대에 불던 흰 알토는 영국 그래프턴 사의 아크릴 색소폰이었다. 처음에는 값이 싸서 샀다고 그는 회고했다. 같은 회사의 악기를 찰리 파커도 1953년 토론토 매시 홀 공연에서 빌려 불었다. 사진 속 흰 악기는 상징처럼 남았지만, 그것이 가난의 산물이었다는 사실은 신화에 가려지곤 한다. (데리다) 1997년 여름 파리에서 그는 철학자 자크 데리다와 긴 대담을 나눴고, 대담은 프랑스 잡지 「레 쟁로큅티블」에 실렸다. 데리다는 그의 공연 무대에 올라 글을 낭독했는데, 객석의 야유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재즈와 현대 사상이 직접 만난 드문 장면이지만 영어권 전기에서는 각주 정도로만 다뤄진다.
용어 노트 📚🔎
프리 재즈
(재즈에서) 정해진 코드 진행, 일정한 마디 수, 고정된 박자에 묶이지 않고 연주자들이 서로의 소리에 반응하며 음악을 만들어 가는 재즈다. 이름은 오넷 콜먼이 1960년에 낸 음반 「프리 재즈」에서 왔다. 정해진 규칙 없이 친구들끼리 놀면서 그때그때 규칙을 만들어 가는 놀이와 비슷하다. 다만 아무렇게나 노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잘 듣고 있어야 놀이가 무너지지 않는다. (다른 데서는) 일상에서 프리는 공짜라는 뜻으로도 쓰이지만, 프리 재즈의 프리는 돈과 상관없이 자유롭다는 뜻이다.
하몰로딕스
(말뜻) 오넷 콜먼이 직접 지어낸 말로, 화성(harmony), 움직임(movement), 선율(melody)을 합친 말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재즈에서) 선율과 화성과 리듬 가운데 어느 것도 다른 것보다 높지 않으며, 모든 악기가 반주자가 아니라 동등한 목소리로 연주해야 한다는 그의 음악 원리다. 그는 평생 이것을 설명하려 했지만 말이 시처럼 모호해 학자들도 해석이 엇갈린다. 모둠 발표에서 한 사람이 다 말하고 나머지는 고개만 끄덕이는 대신, 모두가 자기 생각을 동등하게 내놓으며 하나의 발표를 완성하는 것과 비슷하다.
코드 진행
(재즈에서) 코드는 여러 음을 동시에 울린 화음이고, 코드 진행은 곡이 흘러가는 동안 그 화음이 바뀌는 순서다. 전통적인 재즈 즉흥연주는 이 순서를 지도로 삼아 그 위에서 어울리는 음을 골라 연주한다. 노래방 반주가 정해진 순서로 흘러가고 그 위에 노래를 얹는 것과 비슷하다. 오넷 콜먼은 이 지도를 미리 정해 두지 않고, 선율이 가고 싶은 대로 화음이 따라오게 하려 했다. (다른 데서는) 코드는 컴퓨터에서 프로그램을 짜는 명령문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이지만, 철자도 뜻도 다른 말이다.
비밥
(말뜻) 빠르게 끊어지는 선율을 입으로 흉내 낸 소리에서 나온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재즈에서) 1940년대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 등이 만든 재즈로, 매우 빠른 템포와 복잡한 화음, 화려한 즉흥 솔로가 특징이다. 춤을 위한 음악이던 재즈를 귀 기울여 듣는 예술로 바꿨다. 오넷 콜먼은 청소년 시절 비밥을 익혔고, 그 규칙을 깊이 안 뒤에 넘어서려 했다. 운동에서 기본기를 완전히 익힌 선수가 그다음에 자기만의 기술을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집단 즉흥
(말뜻) 여럿(集團)이 함께 그 자리에서(卽) 즉석으로 지어내는(興) 연주라는 뜻이다. (재즈에서) 한 사람이 솔로를 하고 나머지는 반주를 맡는 대신, 여러 연주자가 동시에 즉흥으로 선율을 만들어 서로 주고받는 방식이다. 초기 뉴올리언스 재즈에도 있었지만, 「프리 재즈」는 이를 여덟 명 규모로 극단까지 밀고 나갔다. 여러 친구가 함께 이어 쓰는 릴레이 소설을 한 사람씩 차례로 쓰지 않고 모두가 동시에 한 장에 써 내려가는 모습을 떠올리면 된다.
리듬 앤드 블루스
(재즈에서) 1940~50년대 미국 흑인 사회에서 크게 유행한 대중음악으로, 강한 박자와 블루스 느낌의 선율, 춤추기 좋은 그루브가 특징이다. 색소폰이 큰 소리로 거칠게 우는 솔로가 인기였고, 오넷 콜먼도 젊은 시절 이 음악을 연주하며 생계를 꾸렸다. 학교 축제에서 모두가 따라 뛰는 신나는 노래처럼, 듣는 이의 몸을 먼저 움직이게 하는 음악이다. (다른 데서는) 오늘날 알앤비라고 줄여 부르는 음악은 이 이름을 이어받았지만, 소리는 훨씬 부드러운 팝 쪽으로 바뀌었다.
서드 스트림
(말뜻) 영어로 제3의 흐름이라는 뜻이다. 재즈와 클래식이라는 두 흐름이 만나 세 번째 흐름을 이룬다는 뜻으로 작곡가 건서 슐러가 붙인 이름이다. (재즈에서) 재즈의 즉흥과 리듬을 클래식의 작곡 기법, 오케스트라 편성과 합치려 한 1950~60년대의 움직임이다. 오넷 콜먼은 레녹스 재즈 학교에서 슐러와 만났고, 훗날 「스카이스 오브 아메리카」처럼 오케스트라 작품을 쓰며 이 생각을 자기 방식으로 이어 갔다. 김치와 치즈를 섞어 새로운 요리를 만드는 퓨전 요리처럼, 두 전통을 섞어 어느 쪽에도 없던 맛을 내려는 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