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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e Brubeck

데이브 브루벡 (1920–2012)

말 위에서 박자를 세던 목장의 소년은 다섯과 아홉으로 세는 음악으로 세상을 건넜다.

한눈에 보기 🔭💭

1. 뿌리미국 콩코드 출생이오니 목장 소년피아니스트 어머니2. 배움울프팩 혼성 밴드다리우스 미요 사사폴 데즈먼드 만남3. 쿼텟하와이 부상대학 순회 공연『타임』 표지4. 박자이스탄불의 9/8「타임 아웃」「테이크 파이브」5. 신념유진 라이트 지키기「리얼 앰배서더스」가톨릭 미사곡6. 말년모스크바 정상회담케네디센터 공로상2012년 노워크 영면브루벡1920–2012목장 소년에서 「테이크 파이브」의 피아니스트로…
무대의 여정 🧭🗺️
N미국콩코드1920–1932스톡턴1938–1942오클랜드1946–1960윌턴1960–2012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함께한 사람들 ⏳🌊

  • 가족엘리자베스 아이비 브루벡

    영국에서 피아노를 공부한 어머니로, 악보를 못 읽던 막내아들에게 처음 건반을 가르쳤다.

  • 가족이올라 브루벡

    70년을 함께한 아내이자 작사가로, 대학 순회를 개척하고 「리얼 앰배서더스」의 가사를 썼다.

  • 동료폴 데즈먼드

    1951년부터 16년간 쿼텟의 알토 색소폰 주자로, 「테이크 파이브」를 작곡했다.

  • 스승다리우스 미요

    밀스 칼리지에서 다조성과 대위법을 가르치며 재즈를 버리지 말라고 격려한 프랑스 작곡가다.

  • 영향듀크 엘링턴

    브루벡이 깊이 존경한 선배로, 그의 『타임』 표지를 축하하러 찾아왔고 브루벡은 「더 듀크」를 바쳤다.

  • 동료루이 암스트롱

    「리얼 앰배서더스」의 주역으로 재즈 외교의 모순을 노래했다.

YouTube에서 4곡 이어 듣기 ↗

I. 목장의 소년 · 1920–1942 (0–22세)

(콩코드) 1920년 12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콩코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피트 브루벡은 소를 치는 목장 관리인이자 로데오에도 나서던 카우보이였다. 어머니 엘리자베스 아이비 브루벡은 영국에 건너가 피아노를 공부한 연주자로, 집에서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세 아들 가운데 막내였고 두 형 헨리와 하워드도 음악의 길로 갔다. 특히 하워드는 훗날 작곡가가 되어 동생의 삶에 여러 번 다시 등장한다. (이오니) 열두 살 무렵 가족은 시에라네바다 기슭 이오니의 넓은 목장으로 옮겼다. 소년은 학교가 끝나면 말을 타고 소를 몰았다. 말 위에서 흥얼거리던 리듬이 훗날 박자 실험의 씨앗이 됐다고 그는 여러 차례 회고했다. 눈이 사시여서 악보를 잘 읽지 못했고, 어머니의 레슨에서는 귀로 익혀 연주하는 것으로 악보를 피해 갔다. (낙인) 평생 인종차별에 맞선 뿌리로 그가 스스로 꼽은 장면이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한 흑인 친구에게 셔츠를 열어 달라고 했고, 그 가슴에 가축처럼 찍힌 낙인을 보여 주며 이런 일은 다시 일어나선 안 된다고 말했다고 그는 회고했다. (대학) 1938년 스톡턴의 퍼시픽 칼리지에 수의학을 공부하러 들어갔으나, 동물학 교수가 네 마음은 잔디밭 건너 음악원에 가 있다며 전공을 바꾸라고 권했다고 한다. 음악과에서 악보를 못 읽는다는 사실이 드러나 퇴학 위기에 몰렸지만, 두 선율을 동시에 엮어 내는 대위법 감각을 알아본 교수들이 변호해 남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1942년 졸업했다고 전해진다. (이올라) 대학에서 연극과 방송을 공부하던 이올라 휘틀록을 만나 1942년 9월 결혼했다. 이올라는 이후 70년 동안 아내이자 작사가, 사실상의 매니저였다.

II. 전장과 스승 · 1942–1950 (22–30세)

(입대) 결혼 직후 육군에 입대했다. 1944년 유럽 전선에 보내져 패튼의 제3군 소속 소총수로 배치될 처지였는데, 적십자 위문 공연에서 피아노를 친 것이 한 대령의 눈에 띄어 전선 대신 밴드를 꾸리라는 명을 받았다고 그는 회고했다. 그렇게 만든 밴드 울프팩은 흑인 병사와 백인 병사가 함께 연주한, 당시 인종 분리가 엄격하던 미군에서 드문 혼성 밴드였다. 전쟁의 참상을 가까이에서 본 경험은 훗날 평화와 화해를 노래한 종교음악으로 이어졌다. (데즈먼드) 그보다 앞서 1944년, 캘리포니아의 군악대 오디션 자리에서 알토 색소폰 주자 폴 데즈먼드를 처음 만났다고 두 사람은 회고했다. 데즈먼드는 브루벡의 대담한 화성에 끌렸지만, 둘이 본격적으로 손을 잡은 것은 전쟁이 끝난 뒤였다. (미요) 제대 후 제대군인 학비 지원으로 오클랜드의 밀스 칼리지에서 프랑스 작곡가 다리우스 미요에게 배웠다. 여러 조를 한꺼번에 겹쳐 쓰는 다조성과 대위법의 대가였던 미요는 재즈를 버리지 말라고 그를 격려했다. 반면 로스앤젤레스에서 잠시 아널드 쇤베르크를 찾아갔을 때는 모든 음의 이유를 대라는 요구에 맞서다 한두 번 만에 그만뒀다고 그는 회고했다. (트리오) 미요 문하의 동료들과 8인조 옥텟을 꾸려 클래식 기법을 끌어들인 실험적 편곡을 시도했고, 1949년에는 비브라폰과 드럼의 칼 체이더, 베이스의 론 크로티와 트리오를 결성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신생 레이블 판타지가 이 트리오를 녹음했고 지역 라디오를 타고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아이가 태어나 가장이 된 그는 클럽과 라디오 출연을 오가며 빠듯하게 생계를 꾸렸다.

III. 쿼텟과 캠퍼스 · 1951–1957 (31–37세)

(부상) 1951년 하와이 공연 중 와이키키에서 파도에 뛰어들었다가 모래톱에 머리를 부딪혀 목을 크게 다쳤다. 한동안 마비를 걱정할 정도였고 트리오는 흩어졌다. 손가락의 섬세한 움직임이 예전 같지 않자 화음을 덩어리째 내리찍는 블록 코드 쪽으로 연주를 바꿨다고 그는 스스로 설명했다. 이 무거운 화음이 그의 상표가 됐다. (쿼텟) 회복한 그는 같은 해 폴 데즈먼드와 쿼텟을 결성했다. 마른 마티니 같은 소리를 내고 싶다던 데즈먼드의 가볍고 투명한 알토는 브루벡의 육중한 피아노와 정반대였기에 오히려 서로를 비췄다. 샌프란시스코의 클럽 블랙호크가 근거지였고, 평단은 이들을 서부 해안의 차분한 쿨 재즈 흐름으로 묶곤 했다. (캠퍼스) 새 청중을 연 것은 이올라였다. 이올라가 미국 각지의 대학에 편지를 보내 공연을 제안했고, 학생들이 콘서트홀의 청중이 됐다. 1953년 오벌린 대학 실황과 1954년 컬럼비아의 「재즈 고즈 투 칼리지」가 그 결실이다. (타임) 1954년 컬럼비아의 프로듀서 조지 아바키언이 그를 영입했고, 그해 11월 그는 루이 암스트롱에 이어 두 번째로 『타임』 표지에 오른 재즈 음악가가 됐다. 이른 아침 호텔 방문을 두드린 듀크 엘링턴이 그 잡지를 건네며 축하했을 때, 엘링턴이 먼저 실렸어야 했다는 생각에 부끄러웠다고 그는 회고했다. 경의를 담아 쓴 「더 듀크」와 「인 유어 오운 스위트 웨이」는 1950년대 중반 마일스 데이비스가 녹음해 재즈 스탠더드가 됐다. (판타지) 한편 그는 판타지의 지분 절반을 가진 줄 알았다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고 회고했고, 이 실망은 컬럼비아로 옮긴 배경의 하나가 됐다. 1956년 드러머 조 모렐로가 들어오며 쿼텟의 리듬이 한층 단단해졌다.

♪재즈 앳 오벌린 (Jazz at Oberlin)1953 (33세)

이올라의 편지가 연 대학 순회의 첫 결실이다. 부상 뒤 새로 찾은 블록 코드와 데즈먼드의 맑은 알토가 강당 청중 앞에서 처음 제대로 맞물렸다.

  • 「퍼디도」에서 데즈먼드는 여러 코러스(곡의 한 바퀴)에 걸쳐 짧은 동기를 조금씩 바꿔 가며 길게 이어 간다. 다른 곡의 선율을 슬쩍 끼워 넣는 인용이 그의 장기다.
  • 브루벡의 솔로는 한 음씩 짚는 선율에서 출발해 두 손으로 화음을 통째로 내리찍는 블록 코드로 점점 쌓여 오른다. 두 선율이 동시에 따로 움직이는 대위법의 짜임도 군데군데 드러난다.
  • 베이스의 론 크로티와 드럼의 로이드 데이비스는 소박하게 박을 지키는 편이다. 그 단순한 바닥 위에서 피아노와 알토의 대화가 더 또렷하게 들린다.
  • 1953년 3월 오하이오주 오벌린 대학의 피니 채플 실황이다. 강당의 울림과 청중의 반응이 함께 담겨, 클럽이 아니라 콘서트홀에서 듣는 재즈의 분위기가 그대로 남았다.

IV. 아홉과 다섯 · 1958–1960 (38–40세)

(라이트) 1958년 베이스 주자 유진 라이트가 합류하며 이른바 클래식 쿼텟이 완성됐다. 라이트는 흑인이었다. 1960년 남부 대학 순회에서 여러 학교가 백인 멤버만 무대에 세우라고 요구하자 브루벡은 거절했고, 25회 공연 가운데 23회가 취소됐다고 전해진다. 흑인 베이시스트를 화면 밖에 두려 한 텔레비전 출연도 거절했다. 손해는 컸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순방) 1958년 미 국무부의 문화 외교 순회로 폴란드에서 터키, 아프가니스탄, 인도, 이란, 이라크에 이르는 길을 돌았다. 이스탄불 거리에서 8분의 9박자로 연주하는 악사들을 듣고 받아 적었고, 각지에서 만난 리듬은 음반 「재즈 임프레션스 오브 유라시아」와 곡 「블루 론도 아 라 터크」로 이어졌다. (변박) 1959년 그는 스탠더드 없이 모두 자작곡으로, 그것도 흔한 네 박이 아닌 다섯 박과 아홉 박 같은 변박으로 음반을 만들겠다고 했다. 컬럼비아 경영진은 팔리지 않을 것이라며 주저했다고 전해진다. 프로듀서 테오 마세로와 뉴욕 30번가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타임 아웃」은 그해 12월 나와 오히려 크게 팔렸다. 데즈먼드가 모렐로의 다섯 박 드럼 패턴을 바탕으로 쓴 「테이크 파이브」는 1961년 싱글로 팝 차트에 올라, 재즈 싱글로는 드물게 대중의 귀에 박혔다. (윌턴) 1960년 가족은 캘리포니아를 떠나 코네티컷주 윌턴의 숲속 집에 정착했다. 뉴욕과 가까워 순회와 녹음이 쉬웠고, 그는 이 집에서 여생을 보냈다.

♪테이크 파이브 (Take Five)1959 (39세)실황 The Dave Brubeck Quartet · 1964 벨기에

팔리지 않으리라던 변박 음반에서 나온 뜻밖의 히트곡이다. 데즈먼드가 쓰고 모렐로의 드럼이 낳은 곡으로, 쿼텟 네 사람의 몫이 고르게 담겼다.

  • 곡 전체가 한 마디에 다섯 박(4분의 5박자)으로 흐른다. 브루벡은 셋과 둘로 나뉜 두 화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고집스럽게 되풀이하는 오스티나토로 바닥을 깐다.
  • 데즈먼드의 알토는 떨림(비브라토)이 거의 없는 가볍고 건조한 소리다. 솔로는 서두르지 않고 여백을 두어, 낯선 박자를 오히려 편안하게 들리게 한다.
  • 곡의 중심은 조 모렐로의 드럼 솔로다. 다섯 박의 틀을 지키면서도 박을 쪼개고 비틀어, 듣는 이가 박을 놓칠 듯 말 듯하게 만든다.
  • 형식은 같은 선율이 두 번 나오고 대비되는 가운데 부분(브리지)을 거쳐 돌아오는 짜임이다. 데즈먼드가 가져온 두 선율 조각 가운데 하나를 브리지로 쓰자고 브루벡이 제안했다고 전해진다.
  • 1959년 여름 뉴욕 컬럼비아 30번가 스튜디오에서 테오 마세로의 제작으로 녹음됐다. 1961년 싱글은 드럼 솔로 등을 줄여 짧게 편집한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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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론도 아 라 터크 (Blue Rondo à la Turk)1959 (39세)실황 The Dave Brubeck Quartet · 1959년경 방송

1958년 국무부 순회 때 이스탄불 거리에서 받아 적은 리듬이 미국 블루스와 한 곡 안에서 만난다. 「타임 아웃」의 첫 곡이다.

  • 첫 주제는 8분의 9박자를 둘·둘·둘·셋으로 묶어 빠르게 몰아친다. 마지막 셋에서 걸음이 살짝 늘어지는 듯한 출렁임이 이 곡의 표정이다.
  • 주제가 다른 부분 사이사이로 거듭 돌아오는 론도 형식으로 짜여, 곡 제목이 형식을 그대로 알려 준다.
  • 솔로에 들어가면 박자가 갑자기 네 박의 12마디 블루스(열두 마디를 한 바퀴로 도는 재즈의 기본 형식)로 바뀐다. 데즈먼드, 이어 브루벡이 느긋하게 몸을 푸는 대목이다.
  • 끝무렵에는 아홉 박의 주제와 네 박의 블루스가 몇 마디씩 번갈아 나오며 두 세계가 맞부딪친 뒤 다시 첫 주제로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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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진짜 대사들 · 1961–1967 (41–47세)

(대사들) 순회에서 돌아온 브루벡 부부는 재즈 외교의 모순을 뮤지컬로 쓰기 시작했다. 미국은 흑인 음악가를 자유의 상징으로 해외에 보내면서 국내에서는 그들을 차별했다. 이올라가 가사를 쓴 「리얼 앰배서더스」는 1961년 루이 암스트롱, 카먼 맥레이, 보컬 그룹 램버트·헨드릭스·로스와 함께 녹음됐고, 1962년 몬터레이 재즈 페스티벌에서 단 한 번 무대에 올랐다. 암스트롱이 녹음 중 한 곡을 부르다 눈물을 보였다고 브루벡 부부는 회고했다. (확장) 「타임 아웃」의 성공 뒤 쿼텟은 「타임 퍼더 아웃」(1961)의 일곱 박 「언스퀘어 댄스」, 「카운트다운」, 「타임 체인지스」로 박자 실험을 이어 갔고, 1964년 일본 순회는 「재즈 임프레션스 오브 재팬」을 남겼다. 쿼텟은 해마다 수많은 무대를 돌며 미국에서 가장 바쁘고 수입이 많은 재즈 그룹 가운데 하나가 됐다. (비평) 대중적 성공이 늘 환영받지는 않았다. 일부 평론가는 그의 피아노가 스윙하지 않는다고 혹평했고, 백인 대학생 청중의 우상일 뿐이라는 시선도 따라붙었다. 그는 이런 평가에 마음이 상했다고 인터뷰에서 털어놓으면서도 자신의 방식을 바꾸지 않았다. (해산) 1967년 12월 피츠버그 공연을 끝으로 클래식 쿼텟은 해산했다. 16년 동안 이어진 순회에 지쳤고, 여섯 아이가 자라는 집 가까이에서 작곡에 전념하고 싶다는 것이 그가 밝힌 이유였다. 무대 위의 피아니스트에서 악보 앞의 작곡가로 무게중심이 옮겨 가는 순간이었다.

♪언스퀘어 댄스 (Unsquare Dance)1961 (41세)실황 Dave Brubeck · LSO · 2001 PBS

「타임 아웃」의 성공에 힘입어 박자 실험을 이어 간 「타임 퍼더 아웃」의 곡이다. 데즈먼드 없이 셋이 일곱 박을 장난스럽게 갖고 논다.

  • 한 마디가 일곱 박(4분의 7박자)이다. 손뼉이 둘·둘·셋의 묶음을 짚어 주어, 듣는 이도 따라 치다 보면 일곱 박에 몸이 익는다.
  • 유진 라이트의 베이스는 일곱 박 패턴을 곡 내내 묵묵히 되풀이하고, 조 모렐로는 드럼 테두리(림)를 스틱으로 두드려 마른 나무 소리를 낸다.
  • 브루벡의 피아노는 시골 춤곡 같은 블루스풍 가락을 끼워 넣는다. 끝에서 미국 민요 「터키 인 더 스트로」를 인용하고, 이어 들리는 웃음소리는 모렐로의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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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 앰배서더스 (The Real Ambassadors)1961 (41세)

흑인 음악가를 자유의 대사로 보내면서 국내에선 차별하던 모순을 브루벡 부부가 풍자와 슬픔으로 쓴 작품이다. 이올라가 가사를, 루이 암스트롱이 주역을 맡았다.

  • 암스트롱은 거칠고 따뜻한 음색으로 가사를 노래하기보다 말하듯 건넨다. 재즈 대사로 세계를 돈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이야기하는 화법이다.
  • 「데이 세이 아이 룩 라이크 갓」은 느린 성가풍 반주 위에서 신과 인종에 관한 물음을 담담하게 던지는 노래로, 이 음반의 중심이다.
  • 램버트·헨드릭스·로스는 악기 솔로처럼 빠른 가락에 가사를 붙여 부르는 보컬리즈로 합창을 이끌고, 카먼 맥레이는 또렷한 발음으로 암스트롱의 목소리와 대비를 이룬다.
  • 1961년 9월 뉴욕에서 녹음됐다. 무대 공연은 1962년 몬터레이 재즈 페스티벌의 단 한 번뿐이었다.

VI. 작곡가의 길 · 1968–1988 (48–68세)

(오라토리오) 해산 직후 그는 예수의 가르침을 주제로 한 오라토리오 「라이트 인 더 와일더니스」(1968)를 발표했다. 이듬해의 칸타타 「게이츠 오브 저스티스」는 마틴 루서 킹 암살 뒤 흑인과 유대인 공동체의 연대를 노래했고, 1971년의 「트루스 이즈 폴른」은 켄트주립대 총격 사건의 희생자에게 바친 곡이다. 전장과 낙인의 기억이 그대로 악보가 됐다. (무대) 무대도 놓지 않았다. 1968년부터 바리톤 색소폰의 제리 멀리건과 함께 순회했고, 1970년대에는 직업 음악가가 된 아들 다리우스, 크리스, 댄 등과 「투 제너레이션스 오브 브루벡」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연주했다. (작별) 1976년 클래식 쿼텟은 결성 25주년 재결합 순회를 했다. 이듬해 5월 데즈먼드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데즈먼드의 마지막 공연은 그해 초 뉴욕에서 브루벡과 함께 선 무대였다고 전해진다. 브루벡은 이후 여러 무대에서 오랜 동료를 기리는 연주를 했다. (미사) 1980년 가톨릭 주간지의 위촉으로 미사곡 「투 호프! 어 셀러브레이션」을 썼다. 초연 뒤 한 신부가 주님의 기도가 빠졌다고 지적했지만 손대지 않으려 했는데, 꿈속에서 그 선율을 듣고 일어나 받아 적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그해 그는 가톨릭교회에 들어갔다. 그 전에는 어떤 교회에도 속한 적이 없었으니 개종이 아니라 합류였다고 그는 말했다. (외교) 1987년 샌프란시스코를 찾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미사에서 그의 곡 「어폰 디스 록」이 연주됐고, 1988년에는 모스크바의 레이건-고르바초프 정상회담 만찬에서 연주했다. 30년 전 국무부 순회로 시작된 음악 외교가 냉전의 끝자락에서 다시 이어진 셈이었다.

♪투 호프! 어 셀러브레이션 (To Hope! A Celebration)1980 (60세)실황 Dave Brubeck Quartet · RNO · 1997 모스크바

가톨릭교회에 들어가기 직전에 쓴 미사곡이다. 꿈에서 들었다는 주님의 기도가 더해졌고, 전장과 차별을 겪은 그가 희망을 주제로 삼았다.

  • 합창과 관현악, 재즈 쿼텟이 함께하는 편성이다. 전례 순서를 따르는 엄숙한 합창 사이로 피아노 쿼텟이 즉흥으로 끼어들며 성가와 재즈가 교대한다.
  • 합창 선율은 단순하고 부르기 쉬운 쪽에 가깝다. 교회 신자들이 함께 부를 수 있게 쓰려 했다는 작곡자의 의도가 그대로 들린다.
  • 브루벡 특유의 블록 코드와 변박 감각이 종교음악 안에서도 남아 있어, 곳곳에서 그의 쿼텟 시절 리듬이 비쳐 나오는 것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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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 마지막 코러스 · 1989–2012 (69–92세)

(순회) 1980년대 무렵부터 그는 알토 색소폰의 보비 밀리텔로(1982년 합류), 드럼의 랜디 존스(1978년 합류) 등과 쿼텟을 이어 가며 여든이 넘어서도 해마다 무대에 섰다. 손은 예전보다 느려졌지만 화음의 무게와 박자 감각은 그대로였다는 평이 많았다. 「테이크 파이브」는 거의 모든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영예) 1994년 국가예술훈장, 1996년 그래미 평생공로상을 받았고, 2009년에는 89번째 생일에 케네디센터 공로상을 받았다. 2000년 모교 퍼시픽 대학교에 그의 이름을 딴 브루벡 연구소가 세워졌고, 부부는 악보와 편지, 사진과 공연 기록을 모교에 맡겼다. 목장에서 악보를 못 읽던 소년이 퇴학을 면하고 졸업한 바로 그 학교였다. (가족) 2009년 그는 아들 마이클을 먼저 떠나보냈다. 이올라와의 결혼 생활은 그의 마지막 날까지 70년 동안 이어졌고, 그사이 이올라는 가사를 쓰고 일정을 짜며 그의 음악 인생 거의 모든 장면에 함께했다. (신념) 그는 마지막까지 재즈를 자유의 음악이라 불렀다. 인종의 벽을 허무는 일과 서로 다른 박자와 문화를 한 무대에 올리는 일을 그는 같은 일로 여겼고, 노년의 인터뷰에서도 남부 순회 취소를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영면) 2012년 12월 5일, 아흔두 번째 생일을 하루 앞두고 심장 진료를 받으러 가던 길에 코네티컷주 노워크의 병원에서 심부전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올라는 2014년 3월 그 뒤를 따랐다.

덜 알려진 이야기

(인세) 「테이크 파이브」는 흔히 브루벡의 곡으로 기억되지만 작곡자는 폴 데즈먼드다. 1977년 세상을 떠난 데즈먼드는 이 곡의 작곡자 인세를 미국 적십자에 남겼고, 적십자는 이후 수백만 달러를 받은 것으로 보도됐다. 곡의 얼굴이 브루벡 쿼텟이었던 탓에 작곡자와 그 유언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하워드) 1959년 레너드 번스타인과 뉴욕 필하모닉이 브루벡 쿼텟과 협연해 녹음한 「다이얼로그스 포 재즈 콤보 앤드 오케스트라」는 브루벡이 아니라 형 하워드 브루벡의 작품이다. 미요의 조수로 일했던 하워드는 동생의 경력 곳곳에 작곡가로 관여했지만, 음반 표지에 크게 찍힌 동생의 이름에 가려 그 몫이 자주 잊혔다. (울프팩) 전쟁 중 그가 이끈 혼성 밴드 울프팩은 미군이 공식적으로 인종 분리를 폐지하기 전인 1945년 무렵의 일이다. 이 이야기는 주로 노년의 구술 인터뷰와 다큐멘터리를 통해 알려졌기에, 남부 순회 취소에 앞서 그가 이미 전장에서 같은 원칙을 지켰다는 사실은 1960년의 일화보다 훨씬 덜 언급된다. (아카이브) 퍼시픽 대학교의 브루벡 컬렉션에는 이올라가 대학들에 보낸 편지, 순회 일정표, 계약서가 남아 있다. 이 자료들이 정리되면서 대학 순회와 여러 대형 작품의 기획에서 이올라가 맡은 몫이 재조명됐다. 공식 크레딧에는 대개 작사가로만 이름이 올랐기에 그 역할은 오랫동안 각주에 머물렀다.

용어 노트 📚🔎

블록 코드

(말뜻) 블록(block)은 덩어리, 벽돌이라는 뜻이다. 음을 낱개로 늘어놓지 않고 벽돌처럼 한 덩어리로 쌓아 친다는 말이다. (재즈에서) 선율의 한 음 한 음 아래에 화음을 꽉 채워 두 손으로 한꺼번에 내리치는 주법이다. 선율이 두꺼운 화음과 함께 움직여 소리가 웅장하고 무거워진다. 합창에서 소프라노 혼자 부르는 대신 알토·테너·베이스가 같은 리듬으로 화음을 붙여 한목소리로 외치는 장면과 비슷하다. 브루벡은 목을 다친 뒤 이 주법을 자신의 상표로 만들었다.

변박

(말뜻) 변(變)은 보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고 박(拍)은 박자다. 흔한 두 박, 세 박, 네 박의 틀을 벗어난 박자를 가리킨다. (재즈에서) 한 마디를 다섯 박, 일곱 박, 아홉 박처럼 홀수로, 그것도 고르지 않게 묶어 나누는 박자다. 「테이크 파이브」의 다섯 박은 셋과 둘로, 「블루 론도 아 라 터크」의 아홉 박은 둘·둘·둘·셋으로 묶여 출렁인다. 줄넘기를 하나·둘·셋·넷으로 뛰다가 갑자기 다섯까지 세고 넘어야 한다면 발이 꼬일 것 같은데, 그 어긋남을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들리게 만든 것이 브루벡 쿼텟이었다.

오스티나토

(말뜻) 이탈리아어로 고집스러운, 끈질긴이라는 뜻이다. 같은 음형을 고집스럽게 붙들고 놓지 않는다는 말이다. (재즈에서) 짧은 가락이나 화음 패턴을 곡 내내 같은 모양으로 되풀이하는 것이다. 그 위에서 다른 악기가 자유롭게 솔로를 펼친다. 응원석에서 쿵쿵짝 박수 리듬이 끝없이 이어지고 그 위로 응원가가 바뀌어 가는 것과 비슷하다. 「테이크 파이브」의 피아노 반주가 대표적인 예다.

론도

(말뜻) 프랑스어 롱도(rondeau)에서 왔고, 둥글게 돈다는 뜻의 말과 뿌리가 같다. 주제가 한 바퀴 돌아 다시 돌아온다는 뜻이 이름에 담겨 있다. (재즈에서) 본래 클래식 음악의 형식으로, 중심 주제 A가 다른 부분들 사이사이에 거듭 돌아오는 짜임(A-B-A-C-A…)이다. 브루벡은 이 형식을 재즈에 끌어와 「블루 론도 아 라 터크」를 만들었다. 노래의 절이 바뀔 때마다 같은 후렴이 다시 돌아오는 동요를 떠올리면 쉽다.

다조성

(말뜻) 많을 다(多)에 조성(調性), 곧 한 곡이 어떤 음을 중심으로 삼는가를 뜻하는 말이 붙었다. 여러 조를 동시에 쓴다는 뜻이다. (재즈에서) 두 개 이상의 조를 한꺼번에 겹쳐 연주하는 기법으로, 브루벡의 스승 다리우스 미요의 장기였다. 브루벡은 오른손과 왼손을 서로 다른 조로 움직이게 하는 식으로 이를 재즈 피아노에 들여왔다. 두 반이 같은 노래를 각자 다른 음높이로 동시에 부르는데 묘하게 어울리는 순간을 상상하면 비슷하다.

대위법

(말뜻) 영어 카운터포인트(counterpoint)는 라틴어로 음표 대 음표라는 뜻의 말에서 왔다. 한자 대위(對位)도 음과 음을 마주 세운다는 뜻이다. (재즈에서) 두 개 이상의 선율이 각자 독립적으로 움직이면서도 함께 어울리도록 엮는 작곡 기법이다. 브루벡은 대학과 미요에게서 이 기법을 익혀 피아노와 알토 색소폰이 동시에 다른 선율을 주고받는 연주를 즐겼다. 돌림노래에서 앞사람과 뒷사람이 서로 다른 부분을 부르는데도 하나의 노래로 들리는 것이 가장 쉬운 대위법이다.

쿨 재즈

(재즈에서) 1950년대에 비밥의 빠르고 뜨거운 연주에 견주어 차분하고 절제된 소리를 추구한 흐름이다. 미국 서부 해안의 음악가들이 많이 연주해 웨스트코스트 재즈라고도 불렸다. 폴 데즈먼드의 떨림 없는 가벼운 알토가 이 흐름의 대표적인 소리다. 시끌벅적한 응원전 대신 조용한 체스 대국처럼 긴장을 안으로 품는 음악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다른 데서는) 일상에서 쿨하다는 말은 미련 없이 시원시원하다, 멋지다는 뜻으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