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eman Hawkins
스윙의 정점에서 비밥의 문을 열어준 그 손끝에서, 테너 색소폰은 처음으로 재즈의 주인공이 되었다.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함께한 사람들 ⏳🌊
I. 세인트조지프의 소년 · 1904–1921 (0–17세)
(출생) 1904년 11월,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조지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윌리엄 호킨스는 철도회사에서 일했고, 어머니 코델리아 콜먼은 오르간과 피아노를 가르치는 음악 교사였다. (어머니) 어머니는 다섯 살 난 아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고, 일곱 살에는 첼로를 손에 쥐여주었다. 훗날 호킨스는 이 어린 시절의 화성 훈련이 자신의 귀를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형제) 형제자매에 관한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음악 교사였던 어머니 아래서 자란 만큼 집 안에는 늘 악기 소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색소폰) 아홉 살 무렵 색소폰을 처음 만졌다. 음이 높은 C-멜로디 색소폰을 불다가 점차 테너로 옮겨갔는데, 당시 테너 색소폰은 재즈에서 아직 독주 악기로 여겨지지 않던 시절이었다. (정규교육) 캔자스주 토피카의 워시번 학교에서 화성학과 작곡을 정식으로 배웠다. 동료 대부분이 귀와 거리에서 음악을 익히던 시절, 이런 이론 교육은 드문 경우였고 이는 훗날 그의 화음 감각이 유난히 앞서 있다는 평가로 이어졌다. (첫무대) 십대 시절 캔자스시티 인근 클럽에서 지역 밴드와 함께 무대에 섰다. 정규 음악교육과 실전 무대 경험이 겹치면서, 다른 사춘기 연주자들과는 다른 종류의 자신감을 일찍부터 쌓아갔다.
II. 맴 스미스와 뉴욕 · 1921–1923 (17–19세)
(만남) 1921년, 블루스 가수 맴 스미스의 밴드 재즈 하운즈에 테너 주자로 발탁됐다. 열여섯의 나이에 고향을 떠나 순회공연을 도는 프로 연주자가 된 것이다. (뉴욕) 맴 스미스와 함께 뉴욕에 입성했다. 할렘과 브로드웨이 극장가를 오가며 처음으로 대도시의 재즈 신을 눈으로 보았고, 이 경험은 뉴욕에 정착하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졌다. (초기스타일) 이 시기 그의 연주는 아직 투박했다. 음을 미끄러뜨리듯 슬랩 텅잉을 즐겨 쓰는 초기 스타일이었는데, 이는 당시 테너 색소폰이 곡의 배경을 채우는 리듬 악기로 여겨지던 관행과도 맞닿아 있었다. (생계) 순회 악단의 급여는 넉넉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는 삶이 시작됐고, 이는 그가 평생 개런티와 계약 조건에 유난히 예민했던 태도의 출발점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전환) 맴 스미스의 밴드를 나온 뒤 뉴욕의 여러 세션에서 이름을 알렸고, 곧 플레처 헨더슨 악단의 눈에 들었다. 아직 스무 살이 되지 않은 나이였다.
III. 플레처 헨더슨 악단의 시대 · 1923–1934 (19–30세)
(입단) 1923년, 플레처 헨더슨 악단에 합류했다. 이후 십 년 넘게 이 악단의 간판 솔로이스트로 자리 잡으며, 재즈사에서 테너 색소폰이라는 악기의 위상을 바꾸어놓았다. (변화) 1924년, 헨더슨 악단에 몇 달간 몸담았던 루이 암스트롱과 함께 연주했다. 암스트롱의 유연하고 노래하듯 흐르는 프레이징을 가까이서 접한 뒤, 그때까지의 슬랩 텅잉 위주 스타일을 버리고 음을 길게 끌며 리듬을 자유롭게 다루는 주법으로 바꿔갔다고 전해진다. (간판) 헨더슨 악단에서 그는 점차 최고 인기 솔로이스트가 됐다. 큼직하고 무게감 있는 음색, 화성을 파고드는 즉흥연주(애드리브)로 젊은 색소폰 주자들의 본보기가 됐다. (경제) 헨더슨 악단은 뉴욕 최고의 흑인 무용악단 중 하나였지만, 개런티는 백인 악단에 비해 낮았다. 그는 이 시절부터 돈 문제에 예민했고, 훗날 스스로 밴드를 이끌며 더 나은 몫을 챙기려는 태도로 이어졌다. (균열) 1934년, 급여와 대우를 둘러싼 갈등 끝에 헨더슨 악단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마침 영국의 밴드리더 잭 힐턴이 유럽 순회 제안을 건넸고, 대서양을 건너기로 했다.
헨더슨 악단 시절 절정의 기예를 보여준 솔로로, 암스트롱의 영향을 소화한 뒤 자신만의 어법을 완성해가는 모습을 들을 수 있다.
- 초반 앙상블 합주 뒤 등장하는 솔로에서, 이전의 슬랩 텅잉 대신 음을 매끄럽게 잇는 새로운 어법이 두드러진다.
- 리듬 섹션이 박자를 밀고 당기는 흔들리는 리듬감(스윙)을 타는 동안, 코드 진행 구석구석을 파고드는 즉흥연주를 펼친다.
- 32마디 형식 안에서 코러스마다 다른 방식으로 주제를 변형하는 점이 흥미롭다.
- 금관 섹션과 색소폰 섹션이 주고받는 편곡의 짜임새가 당시 헨더슨 악단의 세련된 사운드를 잘 보여준다.
IV. 유럽의 다섯 해 · 1934–1939 (30–35세)
(도항) 1934년, 유럽으로 건너가 잭 힐턴 악단과 함께 영국 무대에 섰다. 미국을 떠난 것은 급여 갈등 때문이었지만, 도착한 뒤에는 인종 분리가 덜한 공기 속에서 숨통이 트이는 것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파리) 이후 파리를 근거지로 삼아 프랑스, 스위스,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각지를 돌며 현지 악단과 연주했다. 프랑스어를 익혀 통역 없이 인터뷰에 응할 정도가 되면서, 미국 재즈 신에서 보기 드문 국제적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장고) 1937년 파리에서 베니 카터, 장고 라인하르트 등과 「올스타 잼 밴드」라는 이름으로 녹음했고, 스테판 그라펠리는 이 녹음에서 피아노를 맡았다. 처음에는 유럽 재즈에 회의적이었다는 회고도 있지만, 라인하르트의 화성 감각을 접한 뒤 진심으로 그를 인정했다고 전해진다. (전운) 1939년 유럽에 전쟁의 그림자가 짙어지자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오 년의 유럽 생활은 성숙한 국제적 안목을 남겼고, 뉴욕으로 돌아온 그는 이전과는 다른 무게를 지닌 연주자가 되어 있었다.
파리에서 만난 라인하르트와의 녹음으로, 미국 스윙과 유럽 재즈가 대등하게 만난 순간으로 꼽힌다.
- 네 대의 색소폰이 앞줄에 선 이례적인 편성 속에서 라인하르트의 기타가 리듬 섹션을 어떻게 받치는지 들어볼 만하다.
- 색소폰 주자들이 차례로 솔로를 이어가며 서로 다른 음색으로 대비를 이루는 점이 두드러진다.
- 짧은 만남이었던 만큼 즉흥적인 긴장감이 녹음 전체에 흐른다.
V. 바디 앤 소울 · 1939–1944 (35–40세)
(귀환) 1939년 뉴욕으로 돌아왔다. 유럽에서 쌓은 명성 덕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밴드를 꾸릴 수 있었고, 그해 10월 한 스튜디오에서 색소폰 하나로 재즈사에 남을 순간을 만들었다. (바디앤소울) 「바디 앤 소울」 녹음에서 그는 원곡의 멜로디를 거의 버리고 화성 위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즉흥연주를 펼쳤다. 유럽에서 쌓은 여유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이 한 곡의 대담함 속에 그대로 담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빅밴드) 자신의 빅밴드를 이끌며 활동했지만 대공황 이후 빅밴드 경제는 갈수록 힘들었다. 인건비를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편성을 줄여 소규모 콤보로 전환하는 시기를 겪었다. (성격) 동료들은 그를 무대 밖에서는 조용하고 예의 바른 사람으로 기억했다. 결혼과 가정생활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은데, 음악 이외의 사생활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격정적인 「호크」라는 무대의 얼굴과 책을 즐겨 읽고 말을 아끼는 사생활의 얼굴이 뚜렷이 갈렸다.
원곡의 멜로디를 거의 버리고 화성 위를 자유롭게 유영한 이 즉흥연주는 재즈사상 가장 유명한 색소폰 솔로 중 하나로 남았다.
- 첫 소절부터 원래 멜로디 대신 화음을 재해석한 새로운 선율을 얹는데, 그 대담함이 첫 감상에서부터 느껴진다.
- 두 번째 코러스로 넘어가며 음역을 넓히고 프레이즈를 점점 길게 늘여가는 흐름이 곡 전체의 절정을 만든다.
- 리듬 섹션은 절제된 스윙으로 뒷받침할 뿐, 솔로의 공간을 방해하지 않는다.
- 3분 남짓한 짧은 러닝타임 안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 호흡으로 이어지는 완결성이 두드러진다.
VI. 비밥에 다리를 놓다 · 1944–1948 (40–44세)
(세션) 1944년, 아직 무명에 가까웠던 젊은 연주자들을 스튜디오로 불러 녹음했다. 트럼펫의 디지 길레스피, 피아노의 클라이드 하트, 드럼의 맥스 로치가 참여한 이 세션은 훗날 최초의 비밥 레코딩으로 꼽힌다. (포용) 스윙 시대의 스타였던 그가 젊은 모더니스트들을 끌어안은 것은 이례적이었다. 많은 스윙 세대 연주자가 비밥을 낯설어하거나 거부하던 때, 그는 오히려 이들에게 스튜디오 시간과 녹음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레스터) 같은 시기 레스터 영과의 관계는 재즈사에서 유명한 이야기로 남았다. 부드럽고 가벼운 음색의 레스터 영과 무겁고 힘 있는 그의 음색은 자주 비교됐고, 두 사람이 한 무대에 서면 관객들은 이를 대결처럼 즐겼다. 실제로는 서로를 깊이 존중하는 사이였다고 전해진다. (솔로) 1948년에는 반주 없이 색소폰 하나로 「피카소」를 녹음했다. 당시 반주 없는 독주는 매우 드문 시도였고, 이는 그가 스윙의 아버지로만 남지 않고 끝없이 새로운 형식을 탐구했음을 보여준다.
흔히 최초의 비밥 레코딩으로 꼽히는 세션에서 나온 곡으로, 스윙의 거장이 젊은 모더니스트들에게 무대를 내어준 순간을 담고 있다.
- 디지 길레스피가 쓴 새로운 화성 진행 위에서, 스윙 세대인 그가 낯선 코드에 적응해가는 과정이 솔로에 드러난다.
- 클라이드 하트의 피아노와 맥스 로치의 드럼이 받치는 리듬 섹션에서 비밥 초기의 반주 방식을 들어볼 만하다.
- 주제 제시-솔로-주제 재현으로 이어지는 구성 안에서 세대가 다른 연주자들이 한 형식을 공유하는 점이 흥미롭다.
- 빠른 템포 속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정확한 프레이징이 두드러진다.
반주 없이 색소폰 홀로 녹음한 이 작품은 당시로서는 파격이었고, 훗날 무반주 독주 전통의 선구적 사례로 재조명됐다.
- 반주 없이도 저음과 고음을 오가며 스스로 리듬과 화음을 동시에 암시하는 연주 기법이 핵심이다.
- 정해진 코드 진행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형식을 늘이고 줄이는 구성이 이례적이다.
- 짧은 프레이즈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듯 이어지는데, 한 사람이 두 목소리로 대화하는 것처럼 들린다.
- 당대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후대 색소폰 주자들의 무반주 독주 시도에 참고점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VII. 마지막 코러스 · 1949–1969 (45–65세)
(순회) 1950년대에도 노먼 그랜츠가 기획한 재즈 앳 더 필하모닉 무대에 서며 활발히 연주했다. 나이가 들어도 연주의 힘은 크게 줄지 않아, 평론가들은 그의 1950년대 녹음 다수를 전성기 못지않다고 평가했다. (사운드오브재즈) 1957년, 텔레비전 프로그램 「사운드 오브 재즈」에 레스터 영과 함께 출연해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 뒤에 나란히 솔로를 얹었다. 두 사람 모두 이미 전성기를 지난 나이였지만, 그 짧은 순간은 스윙 시대 두 거인이 마지막으로 나란히 선 장면으로 기억된다. (쇠퇴) 1960년대 들어 건강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술이 늘고 식사를 거르는 날이 많아지면서 몸이 눈에 띄게 야위었고, 동료들은 무대 위에서도 예전의 활력을 찾기 어려워졌다고 회고했다. (마지막) 1969년 5월 19일,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예순넷의 나이였다. 그가 존재하지 않던 테너 색소폰의 자리를 만들어 놓았기에, 그 뒤를 이은 모든 테너 주자들이 그의 그림자 안에서 자기 소리를 찾아야 했다.
이미 전성기를 지난 두 거인, 그와 레스터 영이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 뒤에서 나란히 솔로를 얹은 이 장면은 스윙 시대의 마지막 인사로 기억된다.
- 굵고 힘 있는 음색과 레스터 영의 가늘고 부드러운 음색이 나란히 이어지며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 화려한 기교보다 절제된 음 하나하나에 감정을 싣는 연주로, 전성기를 지난 자리에서 오히려 더 깊은 울림을 낸다는 평가를 받는다.
- 텔레비전 생방송 녹화의 특성상 잔재주 없는 담백한 편성이 두 사람의 솔로에 집중하게 한다.
- 레스터 영이 솔로를 부는 동안 그와 빌리 홀리데이가 주고받은 눈빛이 이 녹음을 더 유명하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말년에도 여전히 정점의 연주력을 유지하고 있음을 증명한 앨범으로, 평론가들은 이를 후기 걸작으로 꼽는다.
- 젊은 연주자들과 나란히 녹음했음에도 솔로가 조금도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드러낸다.
- 12마디 블루스와 32마디 형식을 오가며 다양한 형식 안에서 화성적 상상력이 얼마나 유연한지 보여준다.
- 리듬 섹션과의 호흡에서 나이든 연주자 특유의 여유로운 스윙감이 느껴진다.
- 오랜 세월이 쌓인 음색의 무게감이 젊은 시절과는 다른 종류의 설득력을 만들어낸다.
덜 알려진 이야기
호킨스가 첫사랑처럼 매달렸던 악기는 색소폰이 아니라 첼로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어머니에게서 일곱 살에 첼로를 배운 그는 한동안 클래식 첼리스트를 꿈꾸었고, 색소폰은 오히려 나중에 손댄 악기였다. 이 이력은 그가 유독 화성에 밝았던 이유를 설명해주는 단서로, 전기 작가들 사이에서만 자주 언급된다. 1944년 뉴욕에서 열린 이른바 최초의 비밥 세션을 실질적으로 조직하고 스튜디오 시간을 마련한 것은 호킨스 자신이었다는 점도 덜 알려져 있다. 훗날 이 세션은 디지 길레스피 같은 젊은 연주자들의 이름으로 더 자주 회고되면서, 이미 스윙 시대의 스타였던 호킨스가 후원자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재즈사 서술에서 뒤로 밀려났다. 유럽에서 몇 해를 보내며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익힌 그는 통역 없이 현지 언론과 인터뷰를 했다고 전해진다. 무대 위에서는 「호크」라는 별명대로 사납고 힘 있는 음색을 뿜어냈지만, 무대 밖에서는 책을 즐기고 말을 아끼는 조용한 신사였다는 동료들의 증언이 여러 회고록에 남아 있다. 1948년의 무반주 독주 「피카소」는 발표 당시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반주 없는 즉흥연주라는 형식 자체가 지나치게 낯설었던 탓인데, 이 시도가 후대 색소폰 주자들의 무반주 독주 전통의 선례로 재조명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용어 노트 📚🔎
스윙
(재즈에서) 스윙은 박자의 뒷부분을 살짝 늦춰 밀고 당기듯 연주해 특유의 흔들리는 리듬감을 만들어내는 것을 말한다. 그물침대를 탈 때처럼 정확한 박자보다 조금 처졌다가 다시 따라붙는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다른 데서는) 스윙은 놀이터의 그네를 가리키기도 하고, 야구에서 방망이를 휘두르는 동작을 뜻하기도 한다.
비밥
(말뜻) 비밥이라는 이름은 드럼의 강한 액센트나 스캣 창법에서 나는 소리 「비-밥」을 흉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재즈에서) 1940년대에 등장한 빠르고 복잡한 화성과 리듬을 특징으로 하는 재즈 양식이다. 정해진 멜로디를 노래하듯 연주하던 스윙과 달리, 화음 하나하나를 촘촘히 분해해 새로운 선율을 만들어낸다. 같은 낱말 퍼즐을 훨씬 빠르고 복잡한 규칙으로 다시 푸는 것과 비슷하다.
코러스
(재즈에서) 코러스는 노래나 곡의 형식 전체를 한 번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하는 단위를 가리킨다. 즉흥연주자는 보통 같은 코러스를 여러 번 반복하며 매번 다른 즉흥연주를 얹는다. 돌림노래에서 같은 가락을 여러 번 도는 것과 비슷하게, 코러스마다 다른 색깔을 입히는 것이 재미다. (다른 데서는) 코러스는 합창단이나 노래에서 반복되는 부분(후렴)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텐션 노트
(말뜻) 텐션은 영어로 긴장을 뜻하는데, 화음에 원래 필요하지 않은 음을 더해 살짝 불안정한 긴장을 만든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재즈에서) 기본 화음 위에 9도, 11도, 13도 같은 음을 얹어 소리에 색다른 긴장과 색채를 더하는 것을 말한다. 케이크의 기본 크림 위에 새로운 토핑을 얹어 맛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헤드-솔로-헤드
(재즈에서) 곡의 주제 선율(헤드)을 먼저 연주하고, 그 화성 위에서 각 연주자가 순서대로 즉흥연주(솔로)를 펼친 뒤, 마지막에 다시 처음 주제로 돌아와 마무리하는 재즈의 기본 구성 방식이다. 이야기의 처음과 끝은 같지만 중간에 저마다 다른 모험을 떠나는 여행 같은 구조라고 생각하면 된다.
즉흥연주
(말뜻) 즉흥(即興)은 곧(即) 그 자리에서 흥(興)이 일어나 무언가를 한다는 뜻으로, 미리 짜지 않고 그 순간 떠오르는 대로 연주한다는 의미가 이미 이름에 담겨 있다. (재즈에서) 정해진 화성 진행이라는 큰 틀 안에서 연주자가 그 순간 떠오르는 선율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을 말한다. 국어 시간에 주어진 낱말들로 그 자리에서 이야기를 지어내는 즉석 말하기와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