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cil Taylor
그는 건반을 북처럼 두드렸고, 그 소리로 재즈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걸어갔다.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함께한 사람들 ⏳🌊
- 가족알메이다 테일러
다섯 살 무렵부터 피아노를 가르치고 예술 전반에 눈뜨게 한 어머니로, 아들이 10대 초반일 때 세상을 떠났다.
- 영향듀크 엘링턴
테일러가 평생 자기 음악의 원천으로 꼽은 작곡가이며, 첫 앨범에서 그의 「애주어」를 연주했다.
- 영향텔로니어스 몽크
각진 리듬과 의외의 침묵으로 테일러의 초기 어법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첫 앨범은 그의 「벰샤 스윙」으로 시작한다.
- 동료지미 라이언스
1961년부터 198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25년간 곁을 지킨 알토 색소폰 주자다.
- 동료앤드루 시릴
1964년부터 10여 년간 유닛의 드럼을 맡아 테일러의 덩어리 화음과 함께 호흡했다.
- 동료맥스 로치
1979년 이중주 무대에서 비밥과 프리 재즈가 만나는 역사적 대화를 함께 만들었다.
I. 퀸스의 소년 · 1929–1951 (0–22세)
(퀸스) 1929년 3월, 미국 뉴욕 퀸스의 롱아일랜드시티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세실 퍼시벌 테일러였고, 이웃한 코로나 지역의 흑인 중산층 동네에서 자랐다. 형제자매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아버지 퍼시 테일러는 요리사로 일하며 생계를 꾸렸다. 테일러는 훗날 아버지가 남부 흑인의 노동요와 블루스, 옛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그 이야기들이 자기 음악의 보이지 않는 뿌리가 되었다고 여겼다. (어머니) 피아노를 쥐여 준 사람은 어머니 알메이다였다. 어머니는 아들이 다섯 살 무렵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게 했다. 무용과 연극, 영화에도 데려가며 예술 전반에 눈뜨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테일러가 10대 초반일 때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평생 어머니를 자신의 첫 스승이자 가장 엄격한 후원자로 기억했다. 훗날 피아노와 춤과 시를 한 무대에 올리게 되는데, 그 씨앗이 어머니와 함께한 유년기에 뿌려졌다고 보는 평자가 많다. (스윙) 소년 테일러가 라디오와 극장에서 들은 것은 스윙 시대의 빅밴드였다. 듀크 엘링턴, 지미 런스퍼드, 칙 웹 악단의 소리에 사로잡혔고, 피아노와 함께 타악기도 공부했다. 건반을 북처럼 다루는 훗날의 주법을 떠올리면 의미심장한 이력이다. 고등학교를 마친 뒤에는 뉴욕 음악대학에서 정규 교육을 시작했다. 클래식 연습곡과 할렘의 빅밴드 사운드 사이에서, 그는 이미 두 세계를 함께 붙들고 있었다.
II. 음악원 밖의 학교 · 1951–1958 (22–29세)
(보스턴) 1951년 무렵 보스턴의 뉴잉글랜드 음악원에 들어가 편곡과 작곡을 공부했다. 그러나 유럽 고전음악만을 정전(正典)으로 삼는 교과 과정에 그는 깊이 실망했다. 흑인 음악이 강의실에서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분노했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회고했다. 그는 수업보다 보스턴의 클럽과 레코드에서 더 많이 배웠다. (귀감) 그가 귀를 기울인 곳은 분명했다. 듀크 엘링턴의 두텁고 색채감 있는 화성, 텔로니어스 몽크의 각진 리듬과 의외의 침묵, 버드 파월의 질주가 그것이었다. 초기에는 호레이스 실버의 묵직한 왼손에도 관심을 보였다. 데이브 브루벡과 레니 트리스타노, 그리고 바르토크와 스트라빈스키의 타악적 피아노 음악까지 함께 흡수했다. 재즈와 현대음악을 가르는 벽은 그에게 처음부터 의미가 없었다. (사이드맨) 1955년 무렵 뉴욕으로 돌아왔다. 트럼페터 핫 립스 페이지, 엘링턴 악단의 간판 색소폰 주자 조니 호지스의 소편성 밴드에서 잠시 사이드맨으로 일했다. 정통 스윙의 현장을 몸으로 겪은 짧은 수업이었다. (파이브스폿) 곧 자신의 4중주단을 꾸렸다. 소프라노 색소폰의 스티브 레이시, 베이스의 뷰얼 나이들링어, 드럼의 데니스 찰스가 멤버였다. 1956년 말 이스트빌리지의 작은 술집 파이브 스폿에서 장기 출연(레지던시)을 하며 이곳을 재즈 클럽으로 알리는 데 한몫했다. 같은 해 첫 앨범 「재즈 어드밴스」를 녹음했고, 1957년에는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 무대에 섰다. 1958년에는 존 콜트레인, 케니 도럼과 한 세션을 함께 녹음하기도 했다.
보스턴에서 흡수한 몽크와 엘링턴을 자기 언어로 바꾸기 시작한 첫 앨범이다. 파이브 스폿 시절 4중주단의 소리가 담겼다.
- 첫 곡은 텔로니어스 몽크의 「벰샤 스윙」이다. 몽크 특유의 각진 선율을 더 두텁고 거친 화음으로 밀어붙이며 스승 세대에 대한 존경과 이탈을 함께 드러낸다.
- 엘링턴의 「애주어」를 다룬 대목에서는 원곡의 은은한 색채를 여러 음을 한꺼번에 누르는 덩어리 화음(톤 클러스터)으로 다시 칠한다.
- 스티브 레이시의 소프라노 색소폰은 두 곡에만 참여한다. 그의 맑고 곧은 음색이 테일러의 빽빽한 피아노와 대비를 이룬다.
- 베이스와 드럼은 아직 전통적인 박(스윙)을 지킨다. 그 위에서 피아노만 홀로 박자를 앞당기고 비틀어, 훗날의 해방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들린다.
- 제작자는 트랜지션 레이블을 세운 톰 윌슨이다. 그는 훗날 밥 딜런의 음반을 제작한 인물이기도 하다.
III. 접시를 닦던 시절 · 1959–1967 (30–38세)
(궁핍) 평단의 관심은 커졌지만 일거리는 늘지 않았다. 클럽 주인들은 손님이 따라 흥얼거릴 수 없는 그의 음악을 꺼렸다. 테일러는 접시닦이, 요리 보조, 레코드 가게 점원, 배달 일로 생계를 이었다. 시인이자 평론가 A. B. 스펠먼은 1966년 책 「비밥 사업의 네 인생」에서 그를 네 주인공 가운데 하나로 다뤘다. 책에는 재능과 궁핍이 공존하던 그의 일상이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라이언스) 1961년 알토 색소폰 주자 지미 라이언스가 합류했다. 라이언스는 이후 25년 동안 그의 곁을 지킨 가장 오랜 동료가 되었다. 드러머 서니 머리는 일정한 박을 새기는 대신 심벌을 파도처럼 흩뿌리는 연주로 테일러의 음악에 새 호흡을 불어넣었다. 1962년 이 셋은 베이스 없이 덴마크 코펜하겐의 카페 몽마르트르에서 연주했다. 이때의 녹음은 정해진 코드와 박자에서 벗어난 즉흥(프리 재즈)의 이정표로 남았다. (길드) 1964년에는 트럼페터 빌 딕슨 등과 재즈 작곡가 길드를 결성했다. 클럽과 레이블에 휘둘리지 않고 음악가 스스로 공연과 수익을 관리하자는 시도였다. 길드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자립의 정신은 남았다. 같은 해 드러머 앤드루 시릴이 합류해 이후 10여 년간 리듬의 축이 되었다. (블루노트) 1966년 블루노트에서 「유닛 스트럭처스」와 「콩키스타도르!」를 녹음했다. 그는 자신의 밴드를 유닛이라 불렀다. 생계를 위해 타협하라는 압박이 클수록 그의 음악은 더 단단하고 더 복잡해졌다.
고국에서 일거리를 찾지 못하던 시절, 코펜하겐의 클럽에서 지미 라이언스, 서니 머리와 남긴 실황이다. 베이스가 없는 트리오다.
- 베이스가 빠졌기 때문에 박자의 바닥을 받쳐 주는 소리가 없다. 그래서 피아노 왼손이 베이스 역할과 타악기 역할을 함께 떠맡는다.
- 서니 머리는 일정한 박을 새기지 않는다. 심벌을 흩뿌리듯 울리는 펄스(맥박 같은 흐름)를 만들어, 음악이 걷는 대신 떠다니는 것처럼 들린다.
- 라이언스의 알토는 찰리 파커에게서 내려온 비밥 어법을 품고 있다. 그 노래하는 선율이 테일러의 폭발적인 화음과 짝을 이룬다.
- 스탠더드 「왓츠 뉴」가 함께 실려 있어, 익숙한 곡을 그가 어떻게 해체하고 다시 짜는지 비교해 들을 수 있다.
재즈 작곡가 길드의 실험을 거친 뒤 블루노트에서 녹음한 대편성 작품이다. 즉흥과 작곡이 하나로 맞물린 그의 구상이 가장 정교하게 구현됐다.
- 베이스가 두 대다. 헨리 그라임스와 앨런 실바의 베이스 두 대가 낮은 음역에 두 겹의 결을 만든다.
- 「엔터 이브닝」에서는 켄 매킨타이어가 오보에와 베이스클라리넷을 분다. 앨범에서 가장 고요하고 실내악적인 순간이다.
- 앤드루 시릴의 드럼은 박을 지키기보다 피아노의 덩어리 화음에 맞춰 함께 폭발하고 함께 가라앉는다. 리듬 섹션 전체가 한 몸처럼 호흡한다.
- 곡마다 짧은 작곡 대목과 즉흥 대목이 번갈아 나온다. 정해진 순서(헤드-솔로-헤드) 대신 여러 부분이 블록처럼 쌓이는 구조다.
- 녹음은 뉴저지의 반 겔더 스튜디오에서 했다. 테일러는 직접 쓴 시적인 에세이를 라이너 노트로 실었다.
IV. 강단과 독주 · 1968–1977 (39–48세)
(유럽) 1960년대 후반부터 그는 미국보다 유럽에서 더 큰 환대를 받았다. 파리, 베를린, 스칸디나비아의 페스티벌과 방송국이 그를 꾸준히 불렀다. 고국의 클럽에서 얻지 못한 존중과 보수를 바다 건너에서 찾은 셈이었다. (강단) 1970년부터 위스콘신 대학교 매디슨 캠퍼스, 앤티오크 칼리지, 글래스보로 주립대학에서 가르쳤다. 그는 흑인 음악의 역사를 미국 문화의 중심에 놓는 강의를 했다. 학생들에게 귀와 몸으로 음악을 익히라고 요구했다. 위스콘신에서는 평가가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이유로 학교와 마찰을 빚었고, 1년 남짓 만에 그곳을 떠났다. 이는 당시 기록으로 확인된다. (독주) 1973년 구겐하임 펠로십을 받았다. 이 무렵부터 홀로 무대에 서는 독주회가 그의 중심 활동이 되었다. 1973년 앤티오크에서 녹음한 「인덴트」, 같은 해 일본에서 녹음한 독주 앨범에 이어 1974년 스위스 몽트뢰에서 「사일런트 텅스」를 남겼다. 동료 없이 건반 하나로 오케스트라 같은 밀도를 만들어 내는 연주였다. 오랜 곤궁 끝에 얻은 작은 안정이 이처럼 긴 호흡의 독주곡을 가능하게 했다고 보는 평자들이 있다. (메리 루) 1977년 4월에는 카네기 홀에서 피아니스트 메리 루 윌리엄스와 두 대의 피아노로 협연했다. 윌리엄스가 재즈의 역사 전체를 한 무대에서 잇자고 제안한 자리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어법은 끝내 맞물리지 않았다. 이 공연은 실패했지만 의미 있는 시도로 회자된다.
강단과 유럽 순회로 얻은 작은 안정 속에서 완성한 독주의 정점이다. 스위스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 실황이다.
- 여러 악장으로 이어지는 한 편의 모음곡이다. 짧은 동기가 되풀이되며 조금씩 변형되어, 혼돈처럼 들리는 흐름 속에도 분명한 설계가 있다.
- 손바닥과 팔뚝으로 여러 음을 한꺼번에 누르는 덩어리 화음(톤 클러스터)이 북처럼 쓰인다. 피아노가 선율 악기이자 타악기로 동시에 들린다.
- 폭풍 같은 대목 사이사이에 서정적인 고요가 끼어든다. 그 대비가 한 시간 가까운 연주에 숨 쉴 자리를 만든다.
- 청중의 열광적인 반응에 앙코르를 두 번 했다. 그 앙코르들은 본 공연의 주제를 짧게 다시 불러낸다.
V. 춤과 시, 그리고 이별 · 1978–1988 (49–59세)
(백악관) 1978년 6월, 지미 카터 대통령이 백악관 잔디밭에서 연 재즈 축제에 초청받았다. 접시를 닦던 피아니스트가 20년 만에 대통령 앞에서 연주한 것이다. 연주를 마친 그에게 카터가 다가와 인사를 나눴다고 전해진다. (춤) 그는 피아노를 무용의 연장으로 여겼다. 1979년 발레 무용가 미하일 바리시니코프를 위한 음악을 맡았고, 자신의 공연에서도 연주 전에 무대를 천천히 걸으며 춤을 추었다. 시를 소리 내어 읊는 일도 잦았다. 1987년에는 자작시 낭송과 타악기로만 이뤄진 앨범 「치남파스」를 내놓았다. 그에게 소리와 몸과 말은 하나의 흐름이었다. (로치) 1979년 12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비밥 드러머 맥스 로치와 이중주를 했다. 세대와 어법이 다른 두 거장이 서로를 시험하듯 주고받은 이 무대는 「히스토릭 콘서츠」로 발매되었다. (라이언스) 1986년 5월, 25년을 함께한 지미 라이언스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라이언스의 노래하는 듯한 알토는 테일러의 폭풍 같은 피아노에 늘 선율의 닻을 내려 주던 소리였다. 그를 잃은 뒤 테일러는 고정된 유닛보다 매번 새 동료를 만나는 방식으로 옮겨 갔다. (베를린) 1988년 여름, 베를린의 독립 레이블 FMP가 한 달에 걸친 테일러 축제를 열었다. 에번 파커, 데릭 베일리, 토니 옥슬리 등 유럽 자유즉흥의 대가들과 날마다 다른 편성으로 연주했다. 그 기록은 CD 11장짜리 상자로 남았다.
비밥의 거장 드러머 맥스 로치와 나눈 이중주다. 세대와 어법이 다른 두 사람이 서로를 시험하며 공통의 언어를 찾아간다.
- 로치는 비밥 드럼의 명료한 박과 짜임새를 잃지 않는다. 테일러는 그 틀을 밀고 당긴다. 둘의 긴장이 대화의 동력이다.
- 피아노와 드럼 둘뿐이라 어느 한쪽도 숨을 곳이 없다. 한 사람이 던진 리듬 동기를 다른 사람이 받아 변형하는 주고받기(인터플레이)가 또렷하게 들린다.
- 로치가 북의 음높이와 음색을 바꿔 가며 선율처럼 연주하는 대목이 있다. 이때 드럼이 피아노와 같은 높이의 목소리로 들린다.
- 컬럼비아 대학교 강당에서 녹음한 실황이다. 긴 즉흥 한 판을 거의 편집 없이 담았다.
VI. 브루클린의 마지막 노래 · 1989–2018 (60–89세)
(트리오) 베를린에서 만난 영국 드러머 토니 옥슬리, 뉴욕의 베이시스트 윌리엄 파커와 필 트리오를 꾸렸다. 이 트리오는 1990년대 그의 대표 편성이 되었다. 라이언스를 잃은 뒤 찾은 새로운 대화 상대였다. (영예) 뒤늦은 공인이 이어졌다. 1990년 미국 국립예술기금의 재즈 마스터로 선정되었고, 1991년에는 맥아더 펠로십을 받았다. 2013년에는 일본 교토상 예술 부문을 수상했다. 한때 클럽들이 외면하던 음악이 이제 20세기 예술의 성취로 평가받았다. (일상) 그는 수십 년간 브루클린 포트그린의 오래된 연립주택에서 살았다.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동성애자였으나 그 꼬리표로 자신이 규정되는 데에는 거리를 두었다. 밤늦게까지 시를 쓰고 읽었다. 리허설은 길고 집요했으며, 공연 시작이 늦어지기로도 유명했다. 그는 늘 자신의 음악을 흑인 문화의 전통 속에 놓았다. 아방가르드라는 수식어보다 엘링턴과 몽크를 잇는 계보로 이해받기를 원했다. (마지막) 2016년 뉴욕 휘트니 미술관이 그의 삶과 작업을 조명하는 전시를 열었고, 그는 그곳 무대에 섰다. 사실상 마지막 공개 공연이 되었다. 2018년 4월 5일, 브루클린의 자택에서 89세로 세상을 떠났다.
일흔한 살의 테일러가 스위스 빌리자우 재즈 페스티벌에서 연 독주회다. 평생 다듬어 온 어법이 원숙하게 응축되어 있다.
- 젊은 날의 폭발력은 여전하다. 다만 고요한 대목이 더 길고 깊어져 서정과 격렬함의 균형이 달라진 것처럼 들린다.
- 건반의 맨 아래와 맨 위를 오가는 넓은 음역 사용이 두드러진다. 피아노 한 대가 여러 악기의 합주처럼 울린다.
- 같은 음형을 반복하며 조금씩 비트는 방식이 곳곳에 쓰인다. 이를 따라가면 긴 연주의 흐름을 붙잡기 쉽다.
- 독립 레이블 인타크트가 실황 그대로 발매했다. 공연장의 울림과 청중의 숨소리가 함께 담겨 있다.
덜 알려진 이야기
파이브 스폿은 1957년 텔로니어스 몽크와 존 콜트레인의 장기 공연으로 전설이 된 클럽이다. 그런데 이곳을 재즈 무대로 처음 알린 연주자 가운데 하나가 1956년 말 장기 출연한 테일러였다. 몽크와 콜트레인의 이야기가 워낙 유명해서 그보다 앞선 테일러의 시간은 대개 각주로만 남아 있다. 그의 첫 앨범 「재즈 어드밴스」를 제작한 톰 윌슨은 하버드 출신의 흑인 프로듀서였다. 윌슨은 작은 레이블 트랜지션을 세워 이 앨범을 냈다. 그는 몇 년 뒤 컬럼비아로 옮겨 밥 딜런의 「라이크 어 롤링 스톤」을 제작했다. 미국 대중음악사의 큰 전환점에 선 사람이 재즈의 가장 급진적인 피아니스트를 처음 녹음했다는 사실은 두 분야의 역사가 따로 쓰여 온 탓에 잘 이어지지 않는다. 테일러는 평생 시를 썼고, 1987년에는 피아노 없이 자작시 낭송과 타악기만으로 앨범 한 장을 냈다. 그는 공연 전에 무대 위를 천천히 걸으며 춤추는 일도 많았다. 평론은 주로 그의 건반을 다뤘다. 그래서 시인이자 몸으로 소리를 그리는 공연자로서의 면모는 2016년 휘트니 미술관 전시가 이를 조명하기 전까지 비교적 덜 알려져 있었다. 1970년대 초 대학 강단에 섰을 때 그는 흑인 음악을 미국 예술의 중심으로 가르치려 했다. 학생들에게는 악보보다 귀와 몸으로 익히라고 요구했다. 평가가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이유로 위스콘신 대학교와 마찰을 빚고 떠난 일은 당시 기록에 남아 있다. 이 일은 그를 깐깐한 괴짜로 그리는 일화로 소비되곤 했다. 그러나 정작 그 엄격함이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는 덜 이야기되어 왔다.
용어 노트 📚🔎
프리 재즈
(재즈에서) 정해진 코드 진행, 일정한 박자, 몇 마디로 된 형식 같은 약속을 내려놓고 연주자들이 그 자리에서 소리를 주고받으며 음악을 만들어 가는 재즈다.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 테일러와 오넷 콜먼 등이 이 흐름을 이끌었다. 규칙이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의 소리를 아주 예민하게 듣고 반응해야 한다. 정해진 대본 없이 친구들과 즉석에서 역할극을 이어 가는 것과 비슷하다. 아무렇게나 말하면 이야기가 무너지고, 상대의 말을 잘 받아야 이야기가 굴러간다. (다른 데서는) 프리(free)는 일상에서 공짜라는 뜻으로도 쓰이지만, 프리 재즈의 프리는 돈이 아니라 형식에서 자유롭다는 뜻이다.
톤 클러스터
(말뜻) 클러스터(cluster)는 포도송이처럼 한데 뭉친 덩어리를 뜻하는 영어다. 톤 클러스터는 음(tone)의 덩어리라는 말이다. (재즈에서) 바로 옆에 붙은 건반 여러 개를 손바닥이나 팔뚝으로 한꺼번에 눌러 내는 덩어리 화음이다. 보통의 화음이 도·미·솔처럼 사이를 띄워 쌓는다면, 클러스터는 도·레·미·파를 한 번에 눌러 묵직하고 거친 울림을 낸다. 테일러는 이 소리를 북처럼 써서 피아노를 타악기로 바꿨다. 손가락 하나로 건반을 누르는 대신 주먹으로 책상을 쿵 내리칠 때 여러 물건이 함께 울리는 것과 비슷하다.
사이드맨
(재즈에서) 밴드의 리더가 아니라, 리더의 이름을 내건 밴드에 고용되어 함께 연주하는 연주자를 말한다. 젊은 연주자는 보통 유명한 리더의 사이드맨으로 일하며 경험을 쌓고 이름을 알린다. 테일러도 자기 밴드를 꾸리기 전 조니 호지스 등의 밴드에서 잠시 사이드맨으로 일했다. 학교 축제 공연에서 주인공 옆에서 춤을 추는 백댄서와 비슷한데, 백댄서로 실력을 쌓다가 언젠가 무대 가운데에 서게 되는 것과 같다.
레지던시
(말뜻) 레지던시(residency)는 머무르다, 거주하다(reside)에서 온 말이다. 한곳에 머무른다는 뜻이다. (재즈에서) 한 밴드가 같은 클럽에서 몇 주나 몇 달씩 정기적으로 공연하는 장기 출연을 가리킨다. 손님들이 그 밴드를 보러 일부러 찾아오게 되고, 밴드는 매일 밤 연주하며 음악을 다듬는다. 테일러가 1956년 파이브 스폿에서 한 레지던시는 그 클럽이 재즈의 명소가 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방과 후 같은 학원에 매일 다니며 실력이 느는 것처럼, 같은 무대에서 매일 연주하면 밴드가 단단해진다. (다른 데서는) 의학에서 레지던시는 의대를 졸업한 의사가 병원에서 받는 전공의 수련 과정을 뜻한다.
리듬 섹션
(재즈에서) 밴드에서 박자와 화음의 바탕을 맡는 악기들의 묶음이다. 보통 피아노, 베이스, 드럼이 해당한다. 색소폰이나 트럼펫 같은 솔로 악기가 그 위에서 선율을 펼친다. 테일러의 음악에서는 리듬 섹션이 박을 지키기보다 솔로이스트와 함께 폭발하고 가라앉는 대화 상대가 되었다. 축구에서 공격수가 마음껏 뛰려면 수비수와 미드필더가 뒤를 받쳐 줘야 하는 것과 같다. (다른 데서는) 섹션(section)은 학교나 회사에서는 부서나 구역을 뜻한다.
인터플레이
(말뜻) 인터(inter)는 서로, 사이를 뜻하고 플레이(play)는 연주하다, 놀다를 뜻한다. 서로 주고받으며 연주한다는 말이다. (재즈에서) 연주자들이 서로의 소리를 듣고 그 자리에서 대답하듯 반응하며 음악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한 사람이 짧은 리듬을 던지면 다른 사람이 그것을 받아 바꾸어 되돌려 준다. 테일러와 맥스 로치의 이중주는 인터플레이를 가장 또렷하게 들을 수 있는 예다. 탁구에서 상대가 보낸 공의 속도와 회전에 맞춰 즉석에서 받아 치는 것과 비슷하다. (다른 데서는) 일상에서는 여러 요인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작용을 가리킬 때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