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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ert Ayler

앨버트 아일러 (1936–1970)

'트레인은 아버지, 파로아는 아들, 나는 성령이었다.' — 앨버트 아일러

한눈에 보기 🔭💭

1. 뿌리미국 클리블랜드 출생교회와 아버지리틀 버드2. 유럽군악대 테너스톡홀름 첫 녹음세실 테일러3. 뉴욕스피리추얼 유니티서니 머리·피콕ESP-디스크4. 형제도널드의 트럼펫벨스콜트레인의 추천5. 영성콜트레인 장례식뉴 그래스치유의 힘6. 최후마그 재단 공연이스트강, 34세후대의 영향아일러1936–1970찬송가의 단순한 가락과 절규를 한 몸에 담은 …
무대의 여정 🧭🗺️
N미국프랑스클리블랜드1936–1963오를레앙1959–1961스톡홀름1962코펜하겐1962–1963뉴욕1963–1970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함께한 사람들 ⏳🌊

  • 가족에드워드 아일러

    아버지로, 아들에게 처음 알토 색소폰을 가르치고 교회에서 함께 연주했다.

  • 가족도널드 아일러

    여섯 살 아래 동생으로, 1965년부터 트럼펫을 맡아 형제 밴드의 한 축이 되었다.

  • 동료세실 테일러

    1962년 코펜하겐에서 무대를 함께하며 아일러에게 자신의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주었다.

  • 동료서니 머리

    테일러 그룹에서 만나 「스피리추얼 유니티」의 박 없는 드럼으로 아일러의 소리를 받쳤다.

  • 후원버나드 스톨먼

    ESP-디스크를 세워 레이블의 첫 재즈 음반으로 「스피리추얼 유니티」를 녹음했다.

  • 우정존 콜트레인

    아일러를 아끼며 임펄스에 추천했고, 그의 장례식에서 아일러가 연주했다.

I. 클리블랜드의 소년 · 1936–1958 (0–22세)

(클리블랜드) 1936년 7월,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에드워드 아일러는 색소폰과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음악 애호가였고, 어머니 머틀은 아들들을 데리고 꼬박꼬박 교회에 나가는 신앙심 깊은 사람이었다. 1942년에는 여섯 살 아래 동생 도널드가 태어났다. 앨버트는 어려서 아버지에게 알토 색소폰을 배웠고, 부자가 나란히 교회에서 연주하곤 했다. (교회) 아일러 음악의 밑바닥에는 흑인 교회의 소리가 깔려 있었다. 회중이 함께 부르는 찬송과 영가, 설교자의 떨리는 목소리, 넓게 흔들리는 노래의 떨림은 훗날 그가 뉴욕 아방가르드의 한복판에서 불던 가락에도 그대로 남았다. 그의 주제 선율이 동요나 행진곡처럼 단순하게 들리는 것도 이 시절의 기억과 떼어 놓을 수 없다고 평론가들은 본다. (수련) 그는 클리블랜드의 베니 밀러 음악 아카데미에서 정식으로 공부했고, 10대에 찰리 파커를 닮은 알토 연주로 동네에서 '리틀 버드'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열여섯 살 무렵에는 블루스 하모니카 연주자 리틀 월터의 밴드를 따라 두 해 여름 순회공연을 다녔다고 본인이 회고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골프 실력도 남달랐다고 전해진다. 졸업 뒤 지역의 리듬 앤드 블루스 밴드에서 일했지만, 비밥을 익힌 젊은 알토 연주자가 클리블랜드에서 설 자리는 넓지 않았다. 1958년, 그는 육군에 입대했다.

II. 군악대에서 북유럽으로 · 1958–1963 (22–27세)

(군악대) 육군에서 그는 군악대에 배치됐고, 이 무렵 주 악기를 테너 색소폰으로 바꿨다. 날마다 행진곡을 불던 경험은 훗날 그의 음악 속 팡파르와 행진 리듬으로 되살아났다. 프랑스 오를레앙 일대에 주둔하는 동안 그는 틈나는 대로 파리의 클럽을 찾았고, 유럽의 민요와 군가, 프랑스 국가 같은 선율을 귀에 담았다고 전해진다. (방황) 1961년 제대한 뒤 로스앤젤레스와 클리블랜드에서 연주할 곳을 찾았으나, 이미 익숙한 화성의 틀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그의 소리를 받아 주는 무대는 드물었다. 1962년 그는 다시 대서양을 건너 스웨덴으로 갔다. 그해 10월 스톡홀름에서 현지 연주자들과 남긴 「섬싱 디퍼런트」가 그의 첫 녹음이다. 미국에서 얻지 못한 귀 기울여 주는 청중을 그는 북유럽에서 처음 만났다. (코펜하겐) 그해 말 덴마크 코펜하겐의 클럽 카페 몽마르트르에서 그는 세실 테일러를 만났다. 알토의 지미 라이언스, 드럼의 서니 머리와 함께 출연하던 테일러의 무대에 아일러가 함께 서게 되었고, 정해진 박자 없이 몰아치는 테일러의 음악은 그가 혼자 더듬어 오던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주었다. 1963년 1월 코펜하겐에서 녹음한 「마이 네임 이즈 앨버트 아일러」에는 「서머타임」 같은 스탠더드가 실렸는데, 익숙한 곡의 틀 안에서도 소리는 이미 낯설게 부풀어 있었다. 그해 그는 뉴욕으로 향했다.

♪마이 네임 이즈 앨버트 아일러 (My Name Is Albert Ayler)1963 (27세)

코펜하겐에서 세실 테일러를 만난 직후, 아직 스탠더드의 틀 안에서 자기 소리를 시험하던 시기의 기록이다. 익숙한 곡이라 오히려 그의 낯선 음색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 음반 첫머리에 아일러가 직접 영어로 자신을 소개하는 짧은 육성이 들어 있다. 음반 제목이 여기서 나왔다.
  • 「서머타임」에서 그는 거슈윈의 선율을 아주 느리게, 음마다 굵게 떨리는 비브라토(음높이를 일부러 흔들어 떨리게 하는 기법)로 불러 노래가 흐느낌처럼 들린다.
  • 피아노·베이스·드럼은 박자의 뒷부분을 살짝 끌어 밀고 당기는 전통적인 느낌(스윙)을 반듯하게 지킨다. 그 위에서 아일러만 화성의 틀 밖으로 튕겨 나가는 대비가 이 음반의 묘미다.
  • 베이스를 맡은 닐스-헤닝 외르스테드 페데르센은 당시 10대였다. 훗날 유럽을 대표하게 될 베이시스트의 초기 연주를 함께 들을 수 있다.

III. 영혼의 합일 · 1963–1964 (27–28세)

(궁핍) 뉴욕에 온 아일러에게 일거리는 거의 없었다. 클럽 주인들은 그의 소리를 소음으로 여겼고, 그는 클리블랜드의 부모 집을 오가며 생활을 꾸려야 했다. 그러나 맨해튼 다운타운의 로프트와 커피하우스에는 같은 길을 찾던 젊은 연주자들이 모여 있었다. 코펜하겐에서 만난 드러머 서니 머리, 그리고 빌 에번스와 「트리오 64」를 녹음한 베이시스트 게리 피콕이 그의 곁에 섰다. (트리오) 세 사람은 재즈의 오랜 약속을 내려놓았다. 머리는 일정한 박을 새기는 대신 심벌즈를 출렁이는 맥박(펄스)처럼 울렸고, 피콕은 반주를 넘어 세 번째 목소리로 노래했다. 아일러는 그 위에서 민요 같은 주제를 분 다음 곧 비명과 울음, 배음, 거대한 비브라토로 그것을 찢어 놓았다. 화성을 맞추는 대신 서로의 영혼이 맞아야 한다는 생각이 음반 제목에 그대로 담겼다. 그는 자신의 음악을 반항이 아니라 기도라고 여겼다. 이런 연주는 곧 프리 재즈라는 이름으로 묶였다. (ESP) 1964년 7월, 변호사 출신의 버나드 스톨먼이 막 세운 ESP-디스크가 이 트리오의 「스피리추얼 유니티」를 녹음했다. 레이블이 낸 첫 재즈 음반이었다. 예산은 적었고 연주자에게 돌아간 돈도 많지 않았으며, ESP의 인세를 두고는 이후 여러 연주자에게서 불만이 나왔다. 그러나 이 음반은 유럽까지 퍼지며 아일러의 이름을 알렸다. 같은 달 그는 마이클 스노의 실험 영화 음악 「뉴욕 아이 앤드 이어 컨트롤」에 오넷 콜먼의 오랜 동료 돈 체리 등과 참여했고, 가을에는 체리·피콕·머리와 함께 유럽 순회를 떠났다.

♪스피리추얼 유니티 (Spiritual Unity)1964 (28세)

뉴욕의 궁핍 속에서 서니 머리, 게리 피콕과 찾아낸 새로운 언어가 한 장에 담겼다. ESP-디스크의 첫 재즈 음반이자 프리 재즈의 고전으로 꼽힌다.

  • 「고스츠」의 주제는 동요나 민요처럼 단순한 가락이다. 아일러는 이 가락을 또렷이 분 다음, 음역을 크게 오르내리며 비명 같은 고음과 배음(한 음 속에 섞여 울리는 더 높은 음들)으로 그것을 해체한다.
  • 서니 머리의 드럼은 하나둘셋넷 박을 세는 대신 심벌즈를 끊임없이 흩뿌려 맥박처럼 흐르는 리듬(펄스)을 만든다. 템포가 없는데도 음악은 쉬지 않고 앞으로 흐른다.
  • 게리 피콕의 베이스는 반주가 아니라 대등한 목소리다. 「더 위저드」와 「스피리츠」에서는 세 사람이 동시에 말하고 서로 받아치는 대화로 들린다.
  • 「고스츠」는 첫 번째 변주와 두 번째 변주로 음반 앞뒤에 놓였다. 같은 주제가 두 번의 연주에서 얼마나 다르게 풀리는지 견주어 들어 볼 만하다.

IV. 형제의 행진 · 1965–1966 (29–30세)

(도널드) 1965년, 동생 도널드가 트럼펫을 들고 뉴욕으로 왔다. 형의 권유로 알토에서 트럼펫으로 바꾼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앨버트는 동생을 밴드의 한 축으로 세웠다. 형제가 나란히 서서 행진곡과 찬송가를 닮은 주제를 함께 불고 나면, 밴드 전체가 한꺼번에 소리를 터뜨리는 집단 즉흥연주로 넘어갔다. 어린 시절의 교회와 군악대가 형제의 합주에서 하나로 만났다. (벨스) 그해 5월 뉴욕 타운홀 공연을 담은 「벨스」는 한 면에만 소리를 새긴 독특한 LP로 나왔다. 9월 저드슨 홀에서 녹음한 「스피리츠 리조이스」에는 프랑스 국가를 닮은 선율이 섞여 들었다. 군 복무 시절 프랑스에서 들은 노래가 축제 같은 소란 속에 되살아난 셈이었다. 평단의 반응은 극단으로 갈렸고, 생계는 여전히 불안했다. (콜트레인) 이 무렵 존 콜트레인은 아일러를 각별히 아꼈다. 그의 공연을 찾아가 들었고, 형편이 어려운 그에게 돈을 보태 주었다고도 전해진다. 1965년 6월 콜트레인이 녹음한 「어센션」의 집단 즉흥에 아일러의 영향이 짙다는 것은 평론가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아일러는 훗날 콜트레인은 아버지, 파로아 샌더스는 아들, 자신은 성령이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콜트레인의 추천으로 아일러는 1966년 임펄스 레코드의 프로듀서 밥 틸과 계약했고, 처음으로 메이저 레이블의 선급금을 받았다. 그해 그는 이스트빌리지의 클럽 슬러그스에 자주 출연했고, 가을에는 바이올린 주자 미셸 삼송을 더한 편성으로 유럽을 순회했다.

♪벨스 (Bells)1965 (29세)

동생 도널드가 합류한 첫해, 타운홀 실황이다. 교회와 군악대의 기억이 형제의 행진 같은 합주로 터져 나온다.

  • 20분 가까운 단 한 곡이 LP 한 면에만 새겨졌고 뒷면은 비어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끊기지 않는 하나의 흐름으로 듣도록 만든 음반이다.
  • 도널드의 트럼펫, 찰스 타일러의 알토, 앨버트의 테너가 팡파르 같은 주제를 함께 부르다가, 여럿이 동시에 즉흥하는 집단 즉흥연주로 한꺼번에 흩어진다.
  • 흩어졌던 소리가 몇 차례 다시 행진곡 같은 주제로 모인다. 주제가 이정표처럼 돌아오는 순간을 따라가면 혼돈 속의 형식이 보인다.
  • 베이스 루이스 워럴과 드럼 서니 머리는 박을 고정하지 않고 관악기들의 소용돌이를 아래에서 떠받친다.

V. 애도와 균열 · 1967–1968 (31–32세)

(애도) 1967년 7월, 존 콜트레인이 마흔 살에 세상을 떠났다. 7월 21일 뉴욕 세인트피터스 루터 교회에서 열린 장례식에서 아일러의 그룹과 오넷 콜먼의 그룹이 연주했다. 아일러가 연주 도중 색소폰에서 입을 떼고 울부짖었다고 참석자들은 회고했다. 그해 나온 「그리니치빌리지의 앨버트 아일러」에는 생전의 콜트레인에게 바친 곡 「포 존 콜트레인」이 실려 있었는데, 이제 그 곡은 추모곡으로 들렸다. (도널드) 같은 해 동생 도널드는 정신적으로 크게 무너져 클리블랜드로 돌아갔다. 앨버트는 동생을 뉴욕으로 불러들인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여겨 오래 괴로워했다고 가족과 지인들은 회고했다. 형제가 함께 행진하던 밴드는 사실상 여기서 끝났다. 1967년 8월에 녹음한 「러브 크라이」는 곡을 짧게 다듬고 주제를 또렷이 앞세운 음반으로, 형제가 함께 남긴 마지막 스튜디오 녹음이 되었다. (전환) 이 무렵부터 가수이자 작사가인 메리 파크스(무대 이름 메리 마리아)가 그의 음악적 동반자로 곁에 섰다. 1968년 「뉴 그래스」에서 아일러는 리듬 앤드 블루스 연주자들과 손잡고 직접 노래까지 불렀다. 오랜 지지자들 다수는 상업적 타협이라며 등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더 많은 사람에게 닿는 음악을 원했고, 그것은 10대 시절 리틀 월터의 밴드와 클리블랜드의 R&B 무대로 돌아가는 길이기도 했다. 다만 기대만큼 음반이 팔리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니치빌리지의 앨버트 아일러 (Albert Ayler in Greenwich Village)1967 (31세)

1966년 말과 1967년 초의 실황을 묶은 임펄스 첫 음반이다. 생전의 콜트레인에게 바친 곡이 몇 달 뒤 그의 추모곡처럼 들리게 되었다.

  • 「포 존 콜트레인」에서 아일러는 오랜만에 알토 색소폰을 들었다. 테너보다 가늘고 높은 소리가 느린 찬송가 같은 비가를 이끈다.
  • 첼로와 두 대의 베이스가 겹쳐 활로 긋는 현악의 질감이 깔린다. 재즈 콤보라기보다 작은 실내악단처럼 들리는 순간이 많다.
  • 「트루스 이즈 마칭 인」은 제목 그대로 행진곡풍 주제로 시작해, 도널드의 트럼펫과 함께 축제 같은 소란으로 번진다.
  • 1966년 12월 빌리지 뱅가드 실황 때는 콜트레인이 객석에서 지켜보았다고 전해진다. 두 사람이 함께한 시간의 마지막 장면 가운데 하나다.
♪러브 크라이 (Love Cry)1967 (31세)

형제가 함께 남긴 마지막 스튜디오 녹음이다. 곡을 짧게 다듬고 주제를 앞세워, 더 많은 사람에게 닿으려는 전환의 시작을 보여 준다.

  • 대부분의 곡이 서너 분 안팎으로 짧다. 길게 풀어 가던 즉흥 대신 노래처럼 기억에 남는 주제가 중심에 선다.
  • 콜 콥스가 연주하는 하프시코드(건반을 누르면 줄을 뜯어 소리 내는 옛 건반악기)의 반짝이는 음색이 아일러의 굵은 테너와 묘하게 어울린다.
  • 드러머 밀퍼드 그레이브스는 여러 북의 리듬을 겹쳐 쌓아, 박자를 세지 않으면서도 춤추는 듯한 흐름을 만든다.
  • 「고스츠」와 「벨스」 같은 옛 주제를 짧게 다시 녹음했다. 1964~1965년의 연주와 견주면 그의 음악이 어디로 향하고 있었는지 들린다.

VI. 치유의 힘 · 1969–1970 (33–34세)

(계시) 1960년대 말, 아일러의 신앙은 점점 묵시적인 빛깔을 띠었다. 그는 환영을 보았다고 말했고, 아미리 바라카 등이 펴낸 잡지 「크리켓」에 하느님의 계시와 새 예루살렘을 이야기하는 글을 실었다.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세상의 끝과 구원을 자주 언급했다고 전해진다. 마틴 루서 킹이 암살되고 도시마다 인종 갈등이 들끓던 시대의 공기 속에서, 그는 음악이 세상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었다. (치유) 1969년 8월 녹음한 「뮤직 이즈 더 힐링 포스 오브 더 유니버스」에는 블루스 록 밴드 캔드 히트의 기타리스트 헨리 바이스틴과 피아니스트 바비 퓨가 참여했고, 아일러는 테너 색소폰 외에 백파이프까지 불었다. 메리 마리아가 가사를 쓰고 노래한 곡들도 실렸다. 같은 세션의 녹음은 그의 사후 「더 래스트 앨범」으로 나왔고, 이 세션이 그가 임펄스에 남긴 마지막 스튜디오 녹음이 되었다. 이후 그는 다시 고정 수입 없이 지내야 했다. (마그) 1970년 7월, 그는 프랑스 남부 생폴드방스의 마그 재단 미술관이 연 여름 공연에 초청받았다. 피아노 콜 콥스, 베이스 스티브 틴트와이스, 드럼 앨런 블레어먼, 그리고 메리 마리아와 함께한 이틀 밤의 무대에서 그는 초기의 거센 즉흥과 노래, 찬송풍 주제를 한데 엮었다. 미국에서 받지 못한 따뜻한 환대가 그곳에 있었다. 이 실황이 그의 마지막 공연 기록으로 남았다.

♪뮤직 이즈 더 힐링 포스 오브 더 유니버스 (Music Is the Healing Force of the Universe)1969 (33세)실황 Albert Ayler · 1970 Fondation Maeght

음악이 세상을 치유한다는 그의 마지막 믿음이 제목이 된 음반이다. 블루스 록, 노래, 백파이프까지 끌어안은 말년의 넓은 품이 드러난다.

  • 타이틀곡에서 메리 마리아는 노래와 낭송 사이의 화법으로, 청중을 향해 설교하듯 사랑과 치유의 메시지를 전한다.
  • 「머소닉 인본」에서 아일러는 색소폰 대신 백파이프를 분다. 쉬지 않고 울리는 낮은 지속음 위로 날카로운 가락이 이어지는 독특한 음색이다.
  • 「드러저리」는 헨리 바이스틴의 블루스 기타가 이끄는 느린 블루스다. 아일러가 10대에 리틀 월터의 밴드에서 배운 뿌리가 그대로 드러난다.
  • 노래 중심의 음반이지만, 테너 솔로가 나올 때면 초기와 다름없는 거대한 비브라토와 절규가 순간마다 터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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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 이스트강 · 1970 (34세)

(실종) 1970년 11월 5일, 아일러는 뉴욕에서 행방이 끊겼다. 11월 25일, 그의 시신이 브루클린 콩그레스 스트리트 부두 근처 이스트강에서 발견됐다. 서른네 살이었다. 사인은 익사였고, 당국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판단했다. (증언) 메리 파크스는 훗날 그가 죽기 전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다고 회고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그의 죽음에 다른 사연이 있다는 소문이 재즈계에 오래 떠돌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 몇 해 동안 그는 형제 밴드의 해체, 콜트레인의 죽음, 오랜 지지자들의 외면을 연달아 겪었고, 생전에 넉넉한 개런티를 받아 본 적은 드물었다. (유산) 그러나 그가 남긴 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거대한 비브라토, 동요처럼 단순한 주제와 그것을 찢는 절규, 박을 세지 않고 흐르는 리듬 위의 집단 즉흥은 페터 브뢰츠만 같은 유럽 프리 재즈 연주자들과 데이비드 머리 같은 후대의 테너 연주자들에게 깊은 흔적을 남겼다. 동생 도널드는 클리블랜드에서 지내다 2007년 세상을 떠났다. 교회에서 아버지와 함께 색소폰을 불던 소년은, 끝까지 음악을 기도이자 치유로 믿었던 연주자로 기억되고 있다.

덜 알려진 이야기

아일러가 10대에 리틀 월터의 밴드와 순회했다는 이야기는 거의 모든 전기에 실려 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은 주로 아일러 자신의 회고다. 블루스 하모니카의 거장과 프리 재즈의 선구자를 잇는 이 일화는 그의 말년 음악이 뜬금없는 변신이 아니라 뿌리로의 귀환이었음을 보여 주는 대목으로 자주 인용된다. 훗날 앰비언트 음악의 작곡가로 이름을 알린 해럴드 버드는 군 복무 시절 군악대에서 아일러와 함께 연주했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회고했다. 버드는 그때 이미 아일러의 소리가 누구와도 달랐다고 말했다. 고요한 피아노 음악으로 알려진 작곡가와 가장 시끄러운 색소폰 연주자가 같은 군악대에 있었다는 사실은 버드의 인터뷰를 읽은 사람들 사이에서만 오가는 이야기로 남았다. 아일러는 말년에 스코틀랜드 백파이프를 따로 익혀 녹음에 썼다. 쉬지 않고 울리는 지속음과 날카로운 가락은 그가 색소폰에서 추구하던 소리와 닮아 있었다. 그러나 이 녹음들이 실린 말년 음반들이 오랫동안 저평가되면서, 백파이프 연주자 아일러의 모습은 대중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2004년 미국의 레이블 레버넌트가 펴낸 상자 음반 「홀리 고스트」는 미발표 실황과 인터뷰, 콜트레인 장례식에서의 연주 녹음 등을 묶어 그래미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이듬해 스웨덴의 카스페르 콜린 감독은 아버지 에드워드와 동생 도널드의 증언을 담은 다큐멘터리 「마이 네임 이즈 앨버트 아일러」를 내놓았다. 오래 잠들어 있던 테이프와 가족의 목소리가 뒤늦게 세상에 나오면서, 신화 속 성령이 아닌 한 집안의 아들이자 형으로서의 아일러가 비로소 입체적으로 드러났다.

용어 노트 📚🔎

프리 재즈

(말뜻) 영어 free는 자유롭다는 뜻이다. 1960년 오넷 콜먼이 낸 음반 「프리 재즈」의 제목에서 이 이름이 널리 굳어졌다. (재즈에서) 정해진 코드 진행, 일정한 박자, 몇 마디 단위로 돌아오는 형식 같은 약속을 줄이거나 내려놓고, 연주자들이 그 자리에서 서로의 소리에 반응하며 음악을 만들어 가는 재즈다.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정한 규칙 대신 서로 듣는 일 자체가 규칙이 된다. 친구들끼리 줄거리를 미리 정하지 않고 한 문장씩 이어 가며 이야기를 만드는 놀이와 비슷하다. 앞사람의 말을 잘 들어야 이야기가 이어진다.

집단 즉흥연주

(말뜻) 즉흥(卽興)은 그 자리에서(卽) 흥(興)이 일어나는 대로 한다는 뜻이다. 집단 즉흥은 여럿이 한꺼번에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재즈에서) 보통 재즈에서는 한 사람씩 차례로 솔로를 하지만, 집단 즉흥연주에서는 여러 악기가 동시에 즉흥으로 소리를 낸다. 초기 뉴올리언스 재즈에도 있었고, 프리 재즈에서 다시 크게 살아났다. 아일러의 밴드는 주제를 함께 분 뒤 모두가 동시에 소리를 터뜨렸다. 큰 도화지 하나에 여러 친구가 동시에 그림을 그리면서, 옆 사람이 그린 것을 보고 이어 그리는 것과 비슷하다. (다른 데서는) 연극에서는 대본 없이 즉석에서 연기하는 즉흥극을 가리킬 때 쓴다.

비브라토

(말뜻) 이탈리아어 vibrare, 곧 떨다라는 말에서 왔다. (재즈에서) 한 음을 길게 낼 때 음높이를 일부러 조금씩 위아래로 흔들어 떨리게 하는 기법이다. 보통은 소리를 따뜻하게 만드는 양념처럼 살짝 쓰지만, 아일러는 아주 넓고 굵게 흔들어 그 자체가 울음이나 기도처럼 들리게 했다. 교회 성가대 가수의 떨리는 목소리에서 배웠다는 해석이 많다. 음악 시간에 아 하고 길게 소리를 내다가 목소리를 일부러 떨어 보면, 그게 바로 비브라토다.

배음

(말뜻) 배음(倍音)은 배(倍)가 되는 음이라는 뜻이다. 기본이 되는 음보다 두 배, 세 배 빠르게 떠는 더 높은 음들을 말한다. (재즈에서) 악기에서 한 음을 내면 사실 그 안에 더 높은 음들이 여럿 섞여 함께 울린다. 색소폰 연주자는 손가락은 그대로 두고 입 모양과 숨의 세기를 바꿔 이 높은 음들을 끌어낼 수 있다. 아일러는 이 기법으로 휘파람 같기도 하고 비명 같기도 한 고음을 냈다. 리코더를 너무 세게 불면 같은 운지인데 갑자기 삑 하고 높은 소리로 뒤집히는데, 그것이 배음이 튀어나온 것이다.

펄스

(말뜻) 영어 pulse는 맥박이라는 뜻이다. (재즈에서) 하나둘셋넷 하고 셀 수 있는 일정한 박자 대신, 맥박처럼 계속 흐르기는 하지만 박을 딱 잘라 세기 어려운 리듬의 흐름을 가리킨다. 서니 머리 같은 프리 재즈 드러머들은 심벌즈와 북을 끊임없이 흩뿌려 이런 흐름을 만들었다. 템포가 없는데도 음악이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을 준다. 소나기가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를 떠올리면 된다. 박자를 셀 수는 없지만 소리는 쉬지 않고 이어진다. (다른 데서는) 의학에서는 맥박, 물리학과 전자공학에서는 짧게 튀는 신호를 뜻한다.

영가

(말뜻) 영가(靈歌)는 영혼(靈)의 노래(歌)라는 뜻으로, 영어 spiritual을 옮긴 말이다. (재즈에서) 노예 시대 미국 흑인들이 성경 이야기와 고난, 해방의 소망을 담아 부른 종교적 민요다. 블루스·가스펠과 함께 재즈의 깊은 뿌리가 되었다. 아일러는 「스윙 로 스위트 스피리추얼」이라는 영가 음반을 녹음했고, 그의 단순한 주제 선율 다수가 영가와 찬송가를 닮았다. 한 사람이 먼저 노래를 메기면 여럿이 받아 부르는 방식이 많은데, 수련회 캠프파이어에서 한 명이 선창하면 모두가 따라 부르는 노래와 비슷하다.

리듬 앤드 블루스

(말뜻) 리듬(rhythm)과 블루스(blues)를 합친 이름으로, 흔히 R&B라고 줄여 부른다. 1940년대 말 미국 음악 잡지가 흑인 대중음악을 묶어 부르면서 퍼졌다. (재즈에서) 블루스에 강한 춤 리듬과 노래를 더한 흑인 대중음악으로, 로큰롤과 소울의 바탕이 되었다. 재즈 연주자 다수가 생계를 위해 R&B 밴드에서 일했고, 아일러도 10대와 20대 초반에 그랬다. 그가 1968년 「뉴 그래스」에서 이 음악으로 돌아간 것은 그래서 낯선 시도이자 귀향이기도 했다. 체육 시간 줄넘기 노래처럼 몸이 먼저 박자에 반응하는 음악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다른 데서는) 오늘날 R&B는 1990년대 이후의 부드러운 팝 장르를 가리키는 경우가 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