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gei Prokofiev
“내 삶의 가장 큰 미덕은, 혹은 결점이라 해도 좋지만, 언제나 독창적인 나만의 음악 언어를 찾는 것이었다.” — 자서전에서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곁의 사람들 ⏳🌊
- 가족마리야 프로코피예바
첫 피아노 선생이자, 혁명 뒤 러시아를 빠져나와 망명지까지 아들 곁을 지킨 어머니였다.
- 스승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음악원 입학시험에서 그를 주목했고 관현악법을 가르쳤으나, 젊은 제자는 그의 수업을 보수적이라 여겼다.
- 우정니콜라이 먀스콥스키
음악원에서 만난 열 살 위의 동료로, 195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장 믿을 만한 악보의 첫 독자였다.
- 후원세르게이 디아길레프
발레 뤼스의 흥행사로 「어릿광대」 「강철 걸음」 「탕아」를 무대에 올리며 그의 서방 활동을 이끌었다.
- 경쟁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디아길레프 곁과 파리 음악계에서 늘 비교된 동향의 선배로, 서로를 깎아내리면서도 왕래를 이어 갔다.
- 가족리나 프로코피예바
1923년 결혼해 두 아들을 낳은 첫 아내로, 1948년 체포되어 수용소에서 8년을 보냈다.
I. 초원의 외아들 · 1891–1904 (0–13세)
(출생) 1891년 4월, 러시아 제국(오늘날 우크라이나) 예카테리노슬라프현의 시골 마을 손초프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세르게이 알렉세예비치는 지주 손초프 가문의 영지를 관리하던 농학자였고, 어머니 마리야 그리고리예브나는 피아노를 즐겨 치던 교양 있는 여성이었다. 먼저 태어난 두 딸이 어려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는 사실상 외아들로 자랐다. (어머니) 첫 음악 선생은 어머니였다. 저녁마다 베토벤과 쇼팽을 치는 어머니 곁에서 그는 다섯 살 무렵 「인도 갤럽」이라는 짧은 피아노곡을 지었고, 어머니가 그것을 악보로 받아 적었다. 아버지는 수학과 외국어를 직접 가르쳤다. 아홉 살에는 오페라 「거인」을 써서 집안 사람들과 함께 무대에 올렸다. (글리에르) 1902년 모스크바에서 작곡가 세르게이 타네예프에게 작품을 보인 것이 계기가 되어, 젊은 작곡가 레인골트 글리에르가 1902년과 1903년 두 여름을 손초프카에 머물며 화성과 형식을 가르쳤다. 글리에르는 소년에게 짧은 곡을 꾸준히 쓰게 했고, 소년은 그것을 ‘작은 노래들’이라 부르며 수십 곡을 쌓아 갔다. (기질) 초원 한가운데의 영지는 외딴 곳이었지만, 그는 그곳에서 체스를 배우고 일기와 편지를 꼼꼼히 쓰는 습관을 들였다. 정확하고 체계적인 기질, 지기 싫어하는 성격은 이 무렵부터 어른들 눈에 띄었다. 1904년, 열세 살의 그는 어머니와 함께 페테르부르크로 떠났다.
II. 음악원의 반항아 · 1904–1914 (13–23세)
(입학) 1904년 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입학시험에 그는 오페라 넷, 소나타 둘, 교향곡 하나와 여러 피아노곡을 들고 나타났다. 심사위원석에는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있었고, 프로코피예프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이 소년에게 큰 흥미를 보였다. 그러나 이후 관현악법 수업에서 둘은 그리 가까워지지 않았다. (불화) 나이 많은 동급생들 사이에서 그는 남의 실수를 세어 표로 만드는 영악하고 오만한 학생이었다. 림스키코르사코프와 랴도프의 수업은 그의 귀에 보수적으로 들렸고, 교수들은 그의 거친 불협화음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오히려 피아노의 안나 예시포바, 지휘의 니콜라이 체레프닌에게서 실질적인 것을 배웠다. 열 살 위의 동료 니콜라이 먀스콥스키를 만난 것도 이곳이었다. 두 사람의 우정과 편지 왕래는 평생 이어졌다. (상실) 1910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며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다. 1913년 봄에는 음악원 친구 막시밀리안 슈미트호프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해 여름 파블롭스크에서 초연한 피아노 협주곡 2번을 그는 이 친구에게 바쳤다. 1악장의 길고 어두운 독주부(카덴차)는 청중을 당혹스럽게 했고, 야유하며 자리를 뜬 이들도 있었다. (졸업) 1914년 봄 피아노과 졸업 연주에서 그는 고전 협주곡 대신 자작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쳐서 최우수 졸업생에게 주는 안톤 루빈시테인 상을 받았다. 반항아는 그렇게 자기 음악으로 학교를 떠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음악원 친구 슈미트호프에게 바친 곡이다. 초연의 야유와 젊은 날의 상실이 함께 새겨져 있다.
- 1악장 첫머리에서 현악기의 조용한 반주 위로 피아노가 서늘하고 쓸쓸한 선율을 부른다. 친구를 잃은 해에 쓴 곡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들으면 그 담담함이 더 아프게 들린다.
- 1악장 후반의 카덴차(오케스트라가 멈추고 독주자 혼자 연주하는 부분)는 악장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할 만큼 길고, 점점 두꺼워지는 화음이 정점에서 금관의 재등장과 맞부딪친다. 피아니스트들 사이에서 손꼽히는 난코스다.
- 2악장 스케르초(빠르고 익살스러운 악장)는 2분 남짓 동안 피아노의 두 손이 같은 선율을 한 옥타브(8도) 간격으로 쉼 없이 달린다. 숨 쉴 틈이 거의 없는 이 무궁동(끝없이 이어지는 빠른 움직임)이 연주자의 체력을 시험한다.
- 오늘 듣는 악보는 1923년판이다. 원본 악보가 혁명기 페트로그라드의 화재로 사라져, 작곡가가 기억과 메모를 바탕으로 다시 썼다.
- 4악장에서는 거세게 내리치는 화음과 러시아 민요처럼 소박한 중간부 선율이 번갈아 나온다. 두 성격이 얼마나 대비되는지가 연주마다 비교하는 지점이다.
III. 하이든과 스키타이 · 1914–1918 (23–27세)
(디아길레프) 졸업 선물로 런던 여행을 떠난 그는 발레 뤼스의 흥행사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를 만났다. 디아길레프는 그에게 발레를 의뢰했지만 고대 스키타이를 다룬 「알라와 롤리」의 악보를 보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프로코피예프는 이 음악을 관현악곡 「스키타이 모음곡」으로 고쳐 1916년 페트로그라드에서 초연했는데, 원로 작곡가 글라주노프가 연주 도중 객석을 떠났다는 일화가 남았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 이미 파리를 뒤흔든 뒤였고, 디아길레프 곁에서 두 러시아인은 이때부터 늘 비교되는 사이가 되었다. (전쟁) 1차 세계대전 중 그는 과부의 외아들이라는 이유로 징집을 면했고, 음악원과 페트로그라드 음악계에 머물며 작곡을 이어 갔다. (하이든) 1916~17년 그는 피아노 없이 머릿속으로만 교향곡을 써 보기로 했다. 본보기로 삼은 이는 하이든이었다. 하이든이 오늘날 살아 있었다면 어떻게 썼을지를 상상하며 만든 교향곡 1번 「고전」은 18세기의 단정한 틀 안에 엉뚱한 조바꿈과 큰 도약을 숨겨 두었다. 옛 양식을 새롭게 되살린 이 곡은 훗날 ‘신고전주의’라 불릴 흐름을 앞서 보여 준 예로 꼽힌다. 같은 시기 바이올린 협주곡 1번과 피아노 소품집 「덧없는 환영」도 나왔다. (혁명) 1917년 두 차례 혁명이 일어나고 도시는 굶주림과 혼란에 빠졌다. 그는 당분간 이 나라에 자기 음악이 설 자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1918년 4월 「고전」 교향곡을 직접 지휘해 초연한 뒤, 교육인민위원 루나차르스키를 찾아가 출국을 청했다. 루나차르스키는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결국 허가를 내주었다.
혁명 직전, 하이든이 지금 살아 있다면 어떻게 썼을지를 상상하며 피아노 없이 쓴 교향곡이다. 혼란한 시대에 그가 찾은 단정한 피난처였다.
- 1악장 첫 화음 뒤 바이올린이 단숨에 높은 음으로 뛰어오르는 첫 주제는 오케스트라 입단 시험에 단골로 나오는 대목이다. 하이든풍의 단정함 속에서 갑자기 엉뚱한 조로 미끄러지는 순간을 찾아 들어 보자.
- 2악장 라르게토(조금 느리게)에서는 바이올린이 아주 높은 음역에서 여리게 선율을 부른다. 음정을 맞추기 까다롭기로 유명해, 이 대목의 투명함이 연주의 수준을 가른다.
- 3악장은 미뉴에트 대신 가보트(마디 중간에서 시작하는 옛 프랑스 춤곡)다. 1분 남짓한 짧은 곡인데, 프로코피예프는 이 선율을 훗날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에 다시 썼다.
- 4악장에 대해 작곡가는 단조 화음이 하나도 없을 만큼 즐겁게 쓰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플루트와 바이올린이 재빠르게 뛰어다니는 음형이 그 의도를 그대로 들려준다.
IV. 대양 건너편 · 1918–1923 (27–32세)
(여정) 1918년 5월 시베리아 횡단 열차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간 그는 일본에 두 달가량 머물며 도쿄와 요코하마에서 연주회를 열었고, 태평양을 건너 9월 뉴욕에 닿았다. 긴 여정 동안 그는 짧은 소설을 쓰며 시간을 보냈다. (냉대) 미국 신문은 그를 ‘강철 손가락’을 가진 볼셰비키 음악가처럼 소개했다. 청중은 그의 타건에 놀랐지만 작품에는 냉담했다. 같은 무렵 망명해 온 라흐마니노프가 연주자로 빠르게 자리 잡는 모습은 그에게 늘 비교의 대상이었다. 시카고 오페라가 의뢰한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은 극장장 캄파니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공연이 미뤄졌고, 그사이 그는 빚을 지며 버텼다. 1921년 12월 시카고 초연은 성공했지만, 이듬해 뉴욕 공연은 혹평을 받았다. (리나) 뉴욕에서 그는 마드리드 태생의 가수 지망생 카롤리나 코디나, 곧 리나를 만났다. 스페인 테너인 아버지와 러시아 제국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그녀는 러시아어를 했고, 그의 연주회를 보러 왔다가 인연을 맺었다. 두 사람은 몇 해 동안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거듭했다. (전환) 1921년 여름 프랑스 브르타뉴 해안에서 그는 여러 해 묵혀 둔 착상을 엮어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완성했다. 같은 해 디아길레프는 파리에서 그의 발레 「어릿광대」를 올렸다. 미국에서의 실패를 받아들인 그는 1922년 독일 바이에른의 산골 마을 에탈로 옮겨, 러시아를 빠져나온 어머니와 함께 살며 오페라 「불의 천사」에 매달렸다. 1923년 가을, 그곳에서 리나와 결혼했다.
미국에서 빚과 냉대 속에 버티던 시기, 브르타뉴 해안에서 묵은 착상들을 엮어 완성한 곡이다. 그의 협주곡 가운데 가장 사랑받는다.
- 1악장은 클라리넷 독주가 부르는 고요한 러시아풍 선율로 시작한다. 곧 현악기가 빨라지고 피아노가 뛰어드는 전환이 몇 초 사이에 일어나니, 그 순간의 대비를 놓치지 말자.
- 2악장은 주제와 다섯 개의 변주(같은 주제를 리듬·빠르기·분위기를 바꿔 되풀이하는 것)로 되어 있다. 처음 목관이 들려주는 느릿한 주제가 변주마다 어떻게 모습을 바꾸는지 따라가며 들어 보자.
- 3악장은 바순과 현악기의 피치카토(활 대신 손가락으로 현을 뜯는 연주)가 장난스럽게 주제를 꺼내며 시작한다. 중간에 나오는 넓고 서정적인 선율은 이 곡의 숨은 노래다.
- 1932년 작곡가가 직접 피아노를 치고 런던 교향악단과 녹음한 음반이 남아 있다. 작곡가 자신의 빠르고 건조한 해석은 오늘날의 화려한 연주와 비교해 듣기 좋은 기준점이다.
V. 파리의 십삼 년 · 1923–1936 (32–45세)
(가정) 결혼 직후 파리에 자리 잡은 부부에게 1924년 장남 스뱌토슬라프가, 1928년 차남 올레크가 태어났다. 1924년 말에는 그를 키우고 망명지까지 따라온 어머니가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같은 무렵 부부는 미국에서 시작된 신앙 운동 크리스천 사이언스에 깊이 빠져들었다. 병과 악은 정신이 만든 그림자라고 가르치는 이 신앙을 그는 평생 놓지 않았고, 일기에는 그 교리를 두고 스스로와 벌인 문답이 빼곡히 남았다. (경쟁) 파리 음악계의 중심에는 스트라빈스키가 있었다. 프로코피예프는 사적인 자리에서 그의 신고전주의를 옛 양식의 흉내라고 깎아내렸고, 스트라빈스키도 그의 음악을 높이 사지 않았다. 그래도 둘은 왕래를 끊지 않았다. 프로코피예프는 스스로 ‘강철과 쇠로 만든’ 음악이라 부른 교향곡 2번, 기계 시대를 그린 발레 「강철 걸음」, 디아길레프의 마지막 시즌을 장식한 「탕아」를 차례로 내놓았다. 1929년 디아길레프가 세상을 떠나며 그는 서방의 가장 큰 후원자를 잃었다. (생활) 연주 여행 수입은 넉넉한 편이어서 그는 자동차를 몰고 화려한 넥타이와 옷을 즐겼다. 그러나 작곡가로서는 파리에서 늘 둘째 자리라는 자의식을 떨치지 못했다. (귀향) 1927년 소련 순회 연주는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고, 1930년대 초부터 그는 모스크바와 파리를 오갔다. 1935년 볼쇼이 극장을 위해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을 썼지만, 극장은 춤추기 어렵다는 이유로 공연을 미뤘다. 1936년 1월 『프라우다』가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를 공격한 지 몇 달 뒤, 그는 가족을 데리고 모스크바로 영구 이주했다. 연구자들은 향수와 러시아 청중에 대한 갈망, 첫째 자리에 대한 욕심이 함께 작용했다고 본다.
귀국을 앞두고 볼쇼이 극장을 위해 썼지만 춤추기 어렵다는 이유로 미뤄졌고, 1938년 체코 브르노에서 처음 무대에 올랐다.
- 「기사들의 춤」(몬터규가와 캐퓰릿가)에서는 금관과 현악기가 긴 음과 짧은 음을 짝지어 무겁게 끊어 걷는 리듬(부점 리듬)을 되풀이한다. 두 가문의 위세와 오만이 그 발걸음에 담겨 있다.
- 같은 곡 가운데 부분에서는 플루트가 가냘프고 조심스러운 선율을 부른다. 줄리엣이 약혼자 파리스와 춤추는 장면으로, 앞뒤의 육중한 행진과 대조된다.
- 「소녀 줄리엣」에서는 현악기가 빠르게 뛰어다니다가 클라리넷과 플루트가 수줍은 선율을 꺼낸다. 이 선율은 극이 진행되며 점점 깊어지는 줄리엣의 주제가 된다.
- 「티볼트의 죽음」에서 로미오가 티볼트를 찌른 뒤 오케스트라 전체가 같은 화음을 거듭 내리친다. 발레 음악에서 손꼽히는 격렬한 장면이다.
- 1935년 원안은 로미오가 제때 도착해 두 연인이 살아남는 결말이었다. 비판을 받고 셰익스피어대로 비극으로 고쳤으며, 원안은 2000년대에 연구자들이 복원해 상연했다.
VI. 모스크바의 귀환 · 1936–1945 (45–54세)
(동화) 1936년 봄 그는 나탈리야 사츠가 이끌던 중앙아동극장의 의뢰로 「피터와 늑대」를 썼다. 해설 대본까지 직접 쓴 이 곡으로 그는 아이들에게 오케스트라의 악기를 하나씩 소개했다. 두 아들을 키우던 아버지에게 즐거운 일이었다. (공포) 1938년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시테인과 「알렉산드르 넵스키」를 만들었고, 이듬해 그 음악을 칸타타로 고쳤다. 같은 해 겨울 미국과 유럽 연주 여행에서 돌아온 뒤 여권은 회수되었고, 그는 다시는 국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1939년 오페라 「세묜 코트코」를 함께 준비하던 연출가 메이예르홀트가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다. 같은 해 그는 스탈린의 예순 살 생일을 기리는 칸타타 「건배」를 썼다. (미라) 1938년 휴양지 키슬로봇스크에서 만난 스물네 살 아래의 문학도 미라 멘델손과 사랑에 빠진 그는 1941년 봄 리나와 두 아들을 떠났다. 미라는 이후 오페라 「전쟁과 평화」의 대본을 함께 쓰며 그의 곁을 지켰다. (피란) 독소전이 터지자 그는 날치크, 트빌리시, 알마아타, 페름으로 옮겨 다니며 「전쟁과 평화」, 발레 「신데렐라」, 피아노 소나타 7번을 썼다. 1944년 여름에 쓴 교향곡 5번을 그는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기리는 교향곡이라 불렀다. 1945년 1월 모스크바 초연에서 그가 지휘봉을 들자 승전을 알리는 축포가 울렸다고 피아니스트 리흐테르가 회고했다. 그 직후 그는 실신해 넘어지며 머리를 다쳤고, 이후 고혈압과 두통으로 의사에게 하루 작업 시간을 제한받는 몸이 되었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해, 아동극장의 의뢰로 대본까지 직접 써서 아이들에게 오케스트라를 소개한 음악 동화다.
- 본 이야기에 앞서 해설자가 등장인물과 악기를 하나씩 짝지어 소개한다. 새는 플루트, 오리는 오보에, 고양이는 클라리넷, 할아버지는 바순, 늑대는 호른 셋, 피터는 현악 합주, 사냥꾼의 총소리는 팀파니와 큰북이다.
- 오리와 새가 말다툼하는 장면에서는 오보에의 뒤뚱거리는 선율과 플루트의 재잘대는 빠른 음형이 서로 말을 끊으며 주고받는다.
- 고양이가 살금살금 다가가는 대목에서 클라리넷은 낮은 음역에서 음을 짧게 끊어(스타카토) 연주한다. 발끝으로 걷는 고양이처럼 들린다.
- 마지막 행진에서 귀를 기울이면, 늑대에게 삼켜진 오리의 오보에 선율이 늑대의 배 속에서 들려온다. 작곡가가 남긴 작은 위로다.
전쟁의 한가운데서 작곡가가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기린다고 말한 교향곡이다. 초연 직후의 낙상으로 그는 건강을 크게 잃었다.
- 1악장 첫 주제는 플루트와 바순이 두 옥타브 떨어져 함께 부른다. 높은 소리와 낮은 소리가 한 선율을 나눠 맡아, 넓고 담담한 첫인상을 만든다.
- 1악장 끝부분(코다)에서는 오케스트라 전체에 큰북과 징처럼 생긴 탐탐까지 더해져 소리가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다. 전쟁의 무게처럼 들린다.
- 2악장 스케르초(빠르고 익살스러운 악장)에서는 바이올린이 짧은 음을 기계처럼 쉼 없이 반복하고, 그 위로 클라리넷이 장난스러운 선율을 얹는다.
- 3악장 아다지오(느리게)는 긴 선율이 차츰 짙어지다가 비극적인 정점에 이른다. 4악장의 밝은 질주와 이 악장의 어둠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함께 들어 보자.
- 1945년 1월 초연 때 작곡가가 지휘대에 오르자 승전 축포가 울렸다는 리흐테르의 회고가 전한다. 이 곡이 전쟁 말기 소련 청중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보여 주는 장면이다.
VII. 같은 날의 죽음 · 1945–1953 (54–62세)
(낙인) 1948년 2월 공산당 중앙위원회 결의는 그를 쇼스타코비치, 먀스콥스키, 하차투리안 등과 함께 ‘형식주의자’로 지목했다. 많은 작품이 연주 목록에서 사라졌고, 그는 공개 사과문을 써야 했다. 그해 발표한 오페라 「참된 인간의 이야기」도 비판을 받았다. (리나) 같은 달 리나가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20년형을 받고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보다 앞서 소련 법원은 1923년 독일에서 올린 결혼이 소련에 등록되지 않아 무효라고 판정했고, 프로코피예프는 1948년 1월 미라와 정식으로 혼인한 상태였다. 리나는 스탈린이 죽은 뒤인 1956년에야 풀려났다. 어머니를 잃은 채 청년기를 보낸 두 아들 가운데 스뱌토슬라프는 건축가가, 올레크는 화가가 되었다. (첼로) 수입이 끊기다시피 하자 젊은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가 작곡가 연맹 쪽에 그의 생계를 호소했다는 증언이 남아 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여름마다 니콜리나 고라의 별장에 머물며 그와 함께 첼로 소나타와 「교향적 협주곡」을 다듬었다. 1950년에는 평생의 벗 먀스콥스키가 세상을 떠났다. (최후) 1952년 10월 교향곡 7번 초연이 그가 공개석상에 선 마지막 자리였다. 1953년 3월 5일 저녁, 그는 모스크바의 아파트에서 뇌출혈로 숨졌다.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스탈린이 죽었다. 도시 전체가 스탈린의 장례에 묶여 꽃을 구할 수 없었고 관을 옮기는 일조차 어려웠다. 부고는 며칠 뒤에야 신문에 짧게 실렸다. 그는 노보데비치 묘지에 묻혔고, 미라는 196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유고를 정리했다.
비판과 병 속에서 쓴 마지막 교향곡으로, 1952년 10월 초연이 그가 공개석상에 선 마지막 자리가 되었다.
- 1악장 둘째 주제는 현악기와 목관이 길게 부르는 넓고 따뜻한 선율이다. 말년의 그가 품은 그리움처럼 들린다.
- 2악장은 왈츠다. 발레와 오페라에서 왈츠를 즐겨 쓰던 작곡가의 솜씨가 담겨 있으니, 3박자가 흔들리듯 이어지는 흐름을 따라가 보자.
- 4악장 끝에서 1악장의 서정적인 주제가 돌아온 뒤, 원래 결말에서는 실로폰과 글로켄슈필(쇠막대를 두드리는 작은 건반 타악기)이 시계 초침처럼 똑딱이다 조용히 사라진다.
- 스탈린상 심사를 의식한 주변의 권유로 작곡가는 빠르고 화려한 결말을 따로 붙였다. 그는 조용한 결말이 살아남기를 바란다고 로스트로포비치에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어느 결말을 택했는지가 지휘자마다 갈리는 지점이다.
덜 알려진 이야기
그는 음악가들 사이에서 손꼽히는 체스 실력자였다. 1914년 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동시 대국에서 훗날 세계 챔피언이 되는 카파블랑카를 이겼고, 1937년에는 바이올리니스트 다비트 오이스트라흐와 모스크바에서 공개 대국을 벌였다. 음악 전기에서는 대개 취미 정도로 짧게 지나가는 대목이지만, 수를 미리 계산하고 승부에 집요했던 성격은 작곡 습관과도 닮아 있었다. 그는 1907년부터 1933년까지 방대한 일기를 썼다. 모음을 빼고 자음만으로 단어를 적는 독특한 습관이 있어 자기 이름조차 줄여 썼다. 소련 시절에는 정돈된 공식 자서전만 알려졌고, 일기는 2002년에야 아들 스뱌토슬라프가 파리에서 펴냈다. 일기 속의 그는 자서전보다 훨씬 오만하고 유머러스하며 불안한 사람이다. 그가 1920년대부터 크리스천 사이언스를 믿었다는 사실도 오랫동안 가려져 있었다. 종교를 드러낼 수 없던 소련에서는 언급될 수 없었고, 일기와 편지가 공개된 뒤 사이먼 모리슨 같은 연구자들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병을 정신의 문제로 보던 이 신앙이 말년의 투병을 어떻게 견디게 했는지는 지금도 연구자들이 살피는 대목이다.
용어 노트 📚🔎
카덴차
(말뜻) 이탈리아어 cadenza 는 ‘떨어지다, 마무리되다’라는 뜻의 말에서 왔다. 곡이 마침에 이르기 직전, 오케스트라가 멈춘 자리에서 독주자가 홀로 기량을 펼치던 데서 이 이름이 붙었다. (음악에서) 협주곡에서 오케스트라가 쉬는 동안 독주자 혼자 연주하는 부분이다. 옛날에는 연주자가 즉흥으로 채웠지만, 프로코피예프처럼 작곡가가 직접 써 넣는 일이 많아졌다. 축구 경기에서 모두 멈춰 선 가운데 한 선수가 프리킥을 차는 순간처럼, 모든 눈과 귀가 한 사람에게 쏠리는 대목이다. (다른 데서는) 같은 뿌리의 영어 ‘케이던스’는 자전거 운동에서 1분에 페달을 몇 번 돌리는지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신고전주의
(말뜻) 새로운(新) 고전주의라는 뜻이다. 옛 고전을 새롭게 되살린다는 의미가 이름에 담겨 있다. (음악에서) 20세기 초 작곡가들이 바로크·고전 시대의 형식과 담백한 짜임을 다시 가져와, 현대의 화성과 리듬으로 새로 쓴 흐름이다. 스트라빈스키가 대표적이고, 프로코피예프의 「고전」 교향곡은 그보다 앞선 예로 꼽힌다. 옛날 동요를 요즘 악기와 리듬으로 새로 편곡한 노래를 떠올리면 된다. 가락은 익숙한데 어딘가 낯설고 새롭다. (다른 데서는) 미술과 건축에서는 18세기 후반 고대 그리스·로마 양식을 되살린 흐름을 가리킨다.
가보트
(말뜻) 프랑스 남동부 알프스 지방에 살던 ‘가보’ 사람들의 춤에서 이름이 왔다고 알려져 있다. (음악에서) 17~18세기 프랑스 궁정에서 유행한 춤곡이다. 보통 한 마디에 네 박이고, 마디의 첫 박이 아니라 중간에서 시작하는 것이 특징이다. 줄넘기에서 친구들이 돌리는 긴 줄에 박자 중간쯤 쏙 뛰어드는 것처럼, 가보트도 박자 한가운데서 춤을 시작한다.
스케르초
(말뜻) 이탈리아어로 ‘농담, 장난’이라는 뜻이다. (음악에서) 교향곡·소나타·협주곡에서 빠르고 경쾌하며 익살스러운 악장을 가리킨다. 베토벤 이후 느긋한 춤곡인 미뉴에트 자리를 대신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긴 수업 사이의 쉬는 시간처럼, 무거운 악장들 사이에서 숨을 돌리게 하면서도 장난기가 넘치는 부분이다.
피치카토
(말뜻) 이탈리아어 pizzicare(꼬집다, 뜯다)에서 왔다. 줄을 꼬집듯 뜯는 연주 방법이라는 뜻이 이름에 담겨 있다. (음악에서) 바이올린·첼로 같은 현악기를 활로 긋지 않고 손가락으로 줄을 뜯어 소리 내는 연주법이다. 소리가 짧고 톡톡 튀어서 장난스럽거나 조심스러운 분위기를 만들 때 자주 쓴다. 팽팽하게 당긴 고무줄을 손가락으로 튕길 때 나는 ‘퉁’ 소리를 떠올리면 된다.
변주곡
(말뜻) 바꾸어(變) 연주하는(奏) 곡이라는 뜻이다. (음악에서) 하나의 주제를 먼저 들려준 뒤 리듬·화음·빠르기·악기·분위기를 바꿔 여러 번 되풀이하는 형식이다. 바뀌어도 주제의 뼈대가 남아 있어서, 듣는 사람은 ‘아, 그 선율이구나’ 하고 알아챈다. 같은 노래를 학예회에서는 합창으로, 체육대회 응원가로는 빠르게, 자장가로는 느리게 불러도 같은 노래인 것과 비슷하다.
칸타타
(말뜻) 이탈리아어 cantare(노래하다)에서 온 말로, ‘노래로 부르는 곡’이라는 뜻이다. 악기로 ‘울리는 곡’이라는 뜻의 소나타와 짝을 이루는 이름이다. (음악에서) 합창·독창과 관현악이 함께하는 여러 곡을 하나로 엮은 성악곡이다. 바흐 시대에는 교회 예배용이 많았지만, 프로코피예프의 「알렉산드르 넵스키」처럼 영화 음악을 고쳐 만든 것도 있다. 학예회에서 반 전체가 이야기 하나를 따라 여러 노래를 이어 부르는 무대를 떠올리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