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annes Brahms
"자유롭지만 즐겁게(Frei aber froh)" — 그가 스스로 정해 교향곡 3번의 음형에 새겨 넣은 삶의 모토였다.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곁의 사람들 ⏳🌊
I. 함부르크의 소년 · 1833–1850 (0–17세)
(출생) 1833년 5월,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요한 야콥 브람스는 콘트라베이스와 호른을 다루며 극장과 무도회장을 떠돌던 악사였고, 어머니 요한나 헨리카 크리스티아네 닛센은 삯바느질로 생계를 보태던 여성으로 아버지보다 열일곱 살 많았다. 가족은 함부르크 항구 근처 가난한 뒷골목 게엥에피어텔에 세들어 살았다. (형제) 누나 엘리제와 남동생 프리츠가 있었다. 프리츠 역시 피아노를 배워 음악으로 생계를 꾸렸지만 끝내 형만큼 이름을 얻지 못했고, 평생 그 그늘 아래서 복잡한 감정을 품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아버지의 벌이는 일정치 않아 가족은 늘 궁핍했다. (스승) 열 살 무렵 교사 에두아르트 마르크젠에게서 피아노와 작곡을 배우기 시작했다. 마르크젠은 소년의 재능을 알아보고 수업료를 제대로 받지 않은 채 바흐와 베토벤의 엄격한 구조를 가르쳤다. 훗날 브람스는 평생 이 스승에 대한 존경을 거두지 않았고, 1881년 완성한 피아노 협주곡 2번을 그에게 헌정했다. (항구) 궁핍한 살림을 돕기 위해 소년은 함부르크 항구 인근 술집과 댄스홀에서 피아노를 쳤다고 전해진다. 후대 전기 작가들은 이를 극적으로 각색해 소년이 유곽에서 연주하며 고통받았다는 이야기로 퍼뜨렸으나, 그 구체적 정황은 뒷받침할 자료가 많지 않다. 다만 어린 나이에 생계 현장에서 음악을 다뤄야 했던 사정만은 분명하다.
II. 레메니, 요아힘, 슈만 부부 · 1853–1854 (20–21세)
(출발) 1853년, 헝가리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에데 레메니와 함께 연주 여행을 떠났다. 레메니에게서 집시 음악과 헝가리 민속 선율의 자유로운 리듬을 배웠고, 이 색채는 훗날 헝가리 춤곡집으로 결실을 맺는다. 가난한 함부르크를 벗어난 첫 장거리 여정이었다. (우정) 여행 중 하노버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을 만났다. 요아힘은 브람스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고 평생의 벗이자 음악적 동반자가 되었으며, 그의 소개로 뒤셀도르프의 로베르트 슈만을 찾아가게 된다. (선언) 1853년 가을, 슈만의 집에서 피아노를 연주한 브람스는 단번에 환대받았다. 슈만은 자신이 주필로 있던 음악 잡지에 "새로운 길"이라는 글을 실어 스무 살의 무명 청년을 베토벤을 잇는 천재로 선포했다. 거의 연주 경력이 없던 청년에게는 영광이자 짊어지기 버거운 짐이었다. (클라라) 그 집에서 슈만의 아내이자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을 처음 만났다. 열네 살 연상이던 클라라는 이후 브람스의 평생에 걸쳐 가장 깊은 음악적 동반자이자 신뢰의 대상이 된다. 이 만남이 그의 이후 모든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III. 슈만의 죽음과 클라라 · 1854–1859 (21–26세)
(붕괴) 1854년 2월, 로베르트 슈만이 라인강에 투신해 자살을 시도했다. 그는 곧 엔데니히의 정신병원에 수용되었고, 브람스는 모든 일정을 뒤로하고 뒤셀도르프로 달려가 클라라와 일곱 자녀를 돌보았다. 스승이자 은인의 붕괴를 곁에서 지켜보는 일은 스물한 살 청년에게 깊은 충격이었다. (헌신) 이후 2년 동안 브람스는 클라라의 집 가까이에 머물며 살림과 아이들을 챙기고 그녀를 정서적으로 지탱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에는 깊은 애정이 묻어나지만, 그 관계의 정확한 성격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1856년 슈만이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협주곡) 이 격변의 시간 동안 브람스는 애초 교향곡으로 구상했던 작품을 피아노 협주곡 1번으로 다시 빚어냈다. 어둡고 폭풍 같은 1악장은 슈만의 투신 소식을 들은 직후 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느린 2악장 스케치에는 전례문 한 구절을 적어 두어 애도의 뜻을 담았다. (냉대) 1859년 라이프치히에서 초연된 이 협주곡은 청중의 야유를 받으며 실패했다. 브람스는 크게 낙담했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이 쓰라린 경험은 그가 작품을 오래 다듬고 또 다듬는 신중한 습관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슈만의 투신과 죽음을 지켜본 격변의 시간 속에서 교향곡 구상을 다시 빚어낸 작품이다.
- 1악장 도입부의 팀파니 트레몰로(같은 음을 빠르게 떨듯 연주하는 주법)와 현악기의 격렬한 울림은 슈만의 투신 소식을 들은 직후 써 내려간 대목으로 알려져 있다.
- 느린 2악장 스케치에는 전례문 한 구절을 적어둔 것으로 전해진다 — 애도와 기도의 색채를 느끼며 들어볼 자리다.
- 3악장 피날레는 베토벤적 구조 안에서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쫓고 쫓기듯 주고받는 대화 — 독주자의 기교보다 교향악적 무게가 두드러진다.
- 초연 때 라이프치히 청중의 야유를 받았던 작품이지만 오늘날엔 정반대로 평가받는다는 점도 들을 때 떠올려볼 만하다.
IV. 아가테와 독신의 길 · 1857–1865 (24–32세)
(궁정) 1857년부터 1860년까지 소국 리페의 궁정 도시 데트몰트에서 합창 지휘와 피아노 교습을 맡아 안정된 급여를 받았다. 여름마다 궁정을 떠나 함부르크로 돌아가 여성 합창단을 지휘하며 지냈고, 이 시기에 세레나데와 실내악을 꾸준히 썼다. (아가테) 1858년 괴팅겐에서 성악가 아가테 폰 지볼트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이듬해 약혼했다. 그러나 결혼이 다가오자 브람스는 스스로 매여 사는 삶을 두려워해 파혼을 통보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흔적) 1864년에서 1865년 사이에 쓴 현악 6중주 2번의 첫머리에는 독일식 음이름으로 그녀의 이름 아가테를 그대로 새긴 선율이 등장한다. 음악으로나마 남긴 이별의 흔적이었다. 가정을 꾸리는 대신 평생 작곡과 우정, 그리고 클라라에 대한 헌신에 삶을 바쳤다. (상실) 1865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궁핍한 살림 속에서도 자신을 길러낸 어머니의 죽음은 깊은 슬픔을 남겼고, 그는 이미 슈만의 죽음 이후 구상해 두었던 레퀴엠 작업을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했다. 라틴어 전례 대신 직접 고른 독일어 성서 구절로 가사를 삼은 것도 이 무렵의 결심이었다.
아가테와의 이별 뒤, 그녀의 이름을 음으로 새겨 넣은 작별의 실내악이다.
- 1악장 초반 제2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주고받는 짧은 음형이 독일식 음이름으로 아(A)-게(G)-아(A)-하(H)-에(E), 곧 '아가테'라는 이름을 그대로 음에 새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브람스는 그 선율이 등장했다 사라지는 자리를 두고 그녀에게서 벗어났다는 뜻을 담았다고 지인에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 여섯 개 현악기(바이올린 2, 비올라 2, 첼로 2)가 두터운 화성을 쌓는 편성 — 실내악임에도 교향적인 울림이 난다.
- 3악장 변주곡은 담담한 주제가 점점 풍성해지는 과정 — 감정을 절제하면서도 깊어지는 브람스 특유의 어법을 들어볼 자리다.
V. 레퀴엠과 빈의 정착 · 1862–1872 (29–39세)
(완성) 1868년 브레멘 대성당에서 독일 레퀴엠이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죽은 이의 안식이 아니라 남은 사람의 위로를 노래한 이 곡으로 브람스는 비로소 국제적 명성을 얻었고, 궁핍했던 가계에도 실질적인 수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름) 1860년대 초부터 여러 해 동안 바덴바덴 근교 리히텐탈에 여름 거처를 두었다. 그곳은 클라라가 머물던 곳과 가까워 두 사람은 여름마다 가까이 지내며 서로의 작품을 의논했다. 많은 실내악과 가곡이 이 조용한 여름 한철에 쓰였다. (정착) 1862년 처음 빈을 찾은 뒤 점차 이 도시에 뿌리내려 1872년부터는 빈 음악우호협회의 연주회 감독을 맡았다. 하이든과 모차르트, 베토벤이 활동했던 도시에서 그는 과거의 거장들을 연구하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성격) 명성이 쌓여가는 동안에도 그는 무뚝뚝하고 직설적인 성격으로 유명했다. 겉으로는 인색하고 퉁명스러워 보였지만, 가난한 음악가들을 위해 조용히 지갑을 열고 출판사와 연주 기회를 주선하는 일을 거리끼지 않았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과 오래전 슈만의 죽음이 겹쳐 완성된, 남은 사람을 위로하는 레퀴엠이다.
- 라틴어 전례 대신 브람스가 직접 고른 독일어 성서 구절로 짜여 있다 — 죽은 이의 영혼을 비는 것이 아니라 남은 이를 위로하는 데 중심을 둔다.
- 1악장은 첼로와 비올라의 낮은 울림으로 시작해 바이올린 없이 어둡게 깔리는 음색 — 상실감이 묻어난다는 해석이 널리 받아들여진다.
- 2악장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는 장송 행진곡 리듬(느리고 무거운 걸음걸이 같은 박자)으로 시작해 점점 커지는 합창 — 가장 압도적인 대목으로 꼽힌다.
- 독주 소프라노가 등장하는 5악장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 추가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어미가 위로함 같이"라는 구절을 담고 있다.
- 7악장 마지막은 1악장의 선율이 돌아오며 조용히 맺는다 — 처음과 끝이 하나로 이어지는 구조를 느껴볼 것.
젊은 날 레메니와의 여행에서 얻은 색채가 명성을 얻은 뒤 비로소 세상에 나왔다.
- 5번은 가장 널리 알려진 선율 — 급격한 템포 변화(빨라졌다 느려졌다를 오가는 루바토)가 집시 악단의 연주 관행을 흉내 낸 것으로 전해진다.
- 원래 피아노 네손(연탄)을 위해 쓰였다 — 두 사람이 한 피아노에 나란히 앉아 호흡을 맞추는 모습을 상상하며 들으면 리듬이 주고받히는 재미가 더해진다.
- 멜로디 상당수가 브람스 자신의 창작이 아니라 당시 유행하던 헝가리·집시 선율을 채보한 것이어서, 후일 저작권을 둘러싼 다툼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 당김음(박자의 센박이 어긋나는 리듬)과 급작스러운 다이내믹 변화를 과장되게 끌어안고 들으면 원곡의 흥취가 산다.
VI. 베토벤의 그림자, 교향곡의 시대 · 1872–1885 (39–52세)
(그림자) 교향곡 1번은 스케치를 시작한 지 21년 만인 1876년에야 완성되었다. 브람스는 베토벤이라는 거인의 발자국 소리가 등 뒤에서 들리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고 전해지며, 그만큼 신중하고 오래 다듬어 세상에 내놓았다. 지휘자 한스 폰 뷜로는 이 곡을 "베토벤의 열 번째 교향곡"이라 불렀다. (진영) 당시 빈 음악계는 리하르트 바그너와 프란츠 리스트를 중심으로 한 신독일악파와, 베토벤의 형식을 이어받은 절대음악 진영으로 갈라져 있었다. 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는 브람스를 바그너에 맞서는 상징으로 내세웠지만, 정작 브람스 자신은 바그너의 악보를 즐겨 들여다보며 그 음악적 성취를 인정했다고 알려져 있다. (협주곡) 1878년에는 평생의 벗 요아힘을 위해 바이올린 협주곡을 썼다. 요아힘은 운지법과 카덴차를 비롯해 곡의 세부를 함께 다듬었고, 두 사람의 오랜 신뢰가 이 작품 곳곳에 배어 있다. (발굴) 이 무렵 무명에 가까운 체코 작곡가 안토닌 드보르자크의 재능을 알아보고 국가 장학금 심사위원으로서 그를 적극 지지했으며, 자신의 출판사에 그의 악보를 소개해 세상에 알렸다. 1885년 완성한 교향곡 4번 피날레에는 바흐 칸타타에서 가져온 저음 선율을 반복하며 변주를 쌓는 파사칼리아 기법을 써서, 옛 거장들에 대한 평생의 존경을 담았다.
베토벤의 그림자를 의식하며 21년에 걸쳐 완성한, 긴 침묵 끝의 첫 교향곡이다.
- 1악장 도입의 팀파니가 한 음을 집요하게 두드리는 동안 현은 반음계(한 음씩 촘촘히 오르내리는 음계)로 괴롭게 오르내린다 — 오랜 창작의 무게를 짊어진 서주로 흔히 묘사된다.
- 4악장 느린 도입부에서 호른이 부는 선율은 브람스가 클라라에게 생일 축하로 보낸 알펜호른(알프스 목동이 불던 긴 뿔피리) 가락을 인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곧이어 터지는 현의 찬가풍 주제는 베토벤 합창 교향곡의 환희의 송가와 닮았다는 지적이 당대부터 있었다 — 지휘자 한스 폰 뷜로가 이 곡을 "베토벤의 10번 교향곡"이라 부른 일화도 떠올려볼 만하다.
- 전체적으로 다장조로 밝게 마무리되는 결말은 오랜 어둠 끝의 해방처럼 들린다는 평이 많다.
평생의 벗 요아힘을 위해 쓰고 그의 조언으로 다듬어진, 신뢰가 쌓아올린 협주곡이다.
- 요아힘을 염두에 두고 쓰여 그의 조언과 손가락 배치(운지법)가 악보 곳곳에 반영되어 있다 — 독주자에게 악명 높게 어려운 곡으로 꼽힌다.
- 1악장 카덴차(오케스트라 없이 독주자가 자유롭게 기교를 펼치는 대목)는 요아힘이 직접 쓴 것이 오늘날까지 가장 널리 연주된다.
- 2악장은 오보에가 먼저 노래하듯 주제를 제시한 뒤 바이올린이 이를 받아 꾸며나가는 구성 — 관악기의 비중이 유독 큰 악장이다.
- 3악장은 헝가리풍의 활기찬 춤곡 리듬 — 레메니와의 젊은 날 여행에서 얻은 색채가 뒤늦게 되살아난 듯하다는 평이 있다.
VII. 말년과 죽음 · 1885–1897 (52–64세)
(은퇴) 1890년 무렵 브람스는 작곡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듬해 마이닝겐 궁정악단의 클라리넷 주자 리하르트 뮐펠트의 부드러운 연주에 매료되어 마음을 돌렸고, 클라리넷을 위한 실내악 몇 곡을 잇달아 썼다. (우정) 평생 가까이 지낸 요아힘, 그리고 여전히 편지를 주고받던 클라라와의 우정은 노년의 큰 위안이었다. 그는 여전히 거칠고 직설적인 말투로 주변을 놀라게 했지만, 가까운 이들은 그 안의 섬세함과 다정함을 잘 알고 있었다. (부고) 1896년 클라라 슈만이 세상을 떠났다. 소식을 듣고 급히 본으로 향했지만 기차를 잘못 갈아타는 바람에 장례식에 늦게 도착했다. 그는 그 무렵 구약성서의 죽음에 관한 구절에 곡을 붙인 가곡집을 쓰고 있었는데, 클라라의 죽음은 이 곡에 더욱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죽음) 클라라가 떠난 지 열한 달 뒤인 1897년 4월 3일, 브람스도 빈에서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를 앗아간 것과 같은 병이었다. 장례는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무덤 가까운 빈 중앙묘지에서 치러졌으며, 수천 명이 그를 배웅했다.
은퇴를 번복하게 만든 클라리넷 주자 뮐펠트의 음색에서 태어난, 말년의 따뜻한 작별이다.
- 클라리넷 주자 리하르트 뮐펠트의 부드러운 음색에 매료되어 은퇴를 번복하고 쓴 곡 — 클라리넷이 현악 4중주 사이를 따뜻하게 감싸듯 흐른다.
- 1악장 도입에서 클라리넷이 낮은 음역에서 조용히 등장하는 대목은 가을 저물녘 같은 분위기로 자주 묘사된다.
- 2악장 중간부는 클라리넷이 집시풍의 자유로운 선율(템포가 흔들리는 즉흥적 느낌의 루바토)을 펼치는 대목 — 연주자의 숨결이 가장 드러나는 자리로 꼽힌다.
- 4악장은 변주곡 형식으로 끝나며 1악장 도입 선율이 다시 떠오른다 —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돌아보는 듯한 마무리로 받아들여진다.
클라라의 죽음이 다가오던 무렵 죽음을 정면으로 노래한, 생애 마지막 가곡집이다.
- 클라라 슈만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써 내려간 것으로 전해지는 가곡집 — 죽음을 정면으로 다루는 구약성서 구절을 가사로 삼았다.
- 1곡 "짐승에게 임하는 일이 인생에게도 임하나니"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와 반주로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 4곡은 고린도전서의 사랑 구절에 곡을 붙여 앞의 세 곡과 다른 온기를 띤다 — 전곡 중 유일하게 장조로 밝게 맺는 대목이다.
- 브람스의 마지막 가곡집으로, 클라라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 사이에 놓인 다리처럼 들린다는 평이 있다.
덜 알려진 이야기
유곽 신화 — 젊은 브람스가 함부르크 항구의 술집에서 피아노를 치며 고통받았다는 이야기는 오랫동안 정설처럼 퍼졌지만, 1990년대 이후 음악학자 쿠르트 호프만 등은 당대 기록을 다시 살펴 그 구체적 정황을 뒷받침할 자료가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다만 이를 둘러싼 학계의 논쟁은 아직 이어지고 있다. 이 이야기는 브람스 자신이 말년에 들려준 다소 과장된 회고와, 후대 전기 작가 플로렌스 메이와 막스 칼베크의 극적인 각색이 겹쳐지며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편지의 소실 — 브람스와 클라라 슈만은 수십 년에 걸쳐 방대한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1887년 무렵 두 사람은 합의 아래 서로의 편지 상당수를 돌려받아 불태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결과 두 사람 관계의 가장 내밀한 대목은 영영 역사에서 지워졌고, 오늘날까지 그 성격을 둘러싼 추측만 무성하다. 조용한 후원 — 겉으로는 무뚝뚝하고 인색해 보였던 브람스는 오스트리아 국가 장학금 심사위원으로 일하며 무명이던 안토닌 드보르자크를 적극 지지했을 뿐 아니라, 형편이 어려운 젊은 음악가들에게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돈을 보내거나 출판사에 원고를 대신 들이미는 일을 여러 차례 했다고 동시대인들의 회고에 남아 있다. 이런 선행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하나둘 알려졌다.
용어 노트 📚🔎
교향곡
(말뜻) 교향곡(交響曲)은 함께 울린다는 뜻의 한자로 이루어진 말이다. 여러 악기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울린다는 뜻을 담고 있다. 서양 이름 심포니도 그리스어로 함께(syn) 소리 내다(phonia)라는 말에서 왔다. (음악에서) 오케스트라(관현악단)가 연주하는 큰 규모의 기악곡으로, 보통 네 개의 악장(장)으로 이루어진다. 학급 전체가 참여하는 합창 발표회를 떠올리면 된다 — 독창자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성부가 함께 커다란 구조를 쌓아 올리는 셈이다. (다른 데서는) 일상에서는 여러 요소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것을 비유해 "색채의 교향곡"처럼 쓰기도 한다.
협주곡
(말뜻) 협주곡(協奏曲)은 함께(協) 연주하는(奏) 곡이라는 뜻이다. 서양 이름 콘체르토의 라틴어 뿌리 concertare 에는 겨루다라는 뜻도 있어서, 독주자와 오케스트라가 겨루듯 주고받는 이 음악의 성격이 이름에 이미 들어 있다. (음악에서) 피아노나 바이올린 같은 독주 악기 한 대가 오케스트라와 대화하듯 주고받으며 연주하는 곡이다. 반 대항 피구에서 한 사람이 팀 전체를 상대하듯, 독주자가 화려한 기교로 오케스트라에 맞서는 장면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실내악
(음악에서) 교향곡처럼 큰 공연장을 채우는 대규모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두세 명에서 많아야 예닐곱 명이 각자 한 성부씩 맡아 연주하는 음악이다. 모둠별로 역할을 나눠 발표하는 조별 과제를 떠올려 보면, 지휘자 없이 서로 눈빛과 호흡으로 박자를 맞추는 긴장감을 상상할 수 있다. (다른 데서는) 큰 무대가 아니라 작은 방에서 이루어지는 모임을 비유해 쓰이기도 하지만 음악 용어로서의 뜻이 가장 널리 쓰인다.
레퀴엠
(말뜻) 레퀴엠은 라틴어로 "안식"을 뜻하는 단어에서 왔다. 전통 가톨릭 장례 미사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가사가 "영원한 안식을 그들에게 주소서"로 시작하기 때문에 이 말이 곡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음악에서) 원래는 죽은 이를 위한 미사에 쓰이는 전례 음악을 뜻하지만, 브람스의 경우처럼 작곡가가 자신만의 가사를 골라 세상을 떠난 이가 아니라 남겨진 사람을 위로하는 데 중심을 둔 곡도 넓은 의미에서 레퀴엠이라 부른다.
변주곡
(말뜻) 변주(變奏)는 "연주를 바꾼다"는 뜻이다. 하나의 주제를 바탕으로 리듬이나 화성, 분위기를 조금씩 바꾸어 가며 여러 번 반복하는 형식이다. (음악에서) 같은 멜로디를 밝게도, 어둡게도, 빠르게도, 느리게도 바꾸어 들려주는 형식이다. 같은 이야기를 매번 다른 말투로 다시 들려주는 놀이를 떠올리면 된다 — 줄거리(주제)는 같지만 표정이 계속 달라진다.
카덴차
(말뜻) 이탈리아어로 "떨어짐" 또는 "마침"을 뜻하는 말에서 왔으며, 원래 악구가 끝나기 직전의 대목을 가리켰다. (음악에서) 협주곡에서 오케스트라가 잠시 멈추고 독주자 혼자 자유롭게 기교를 뽐내는 대목이다. 체육대회에서 이어달리기 마지막 주자가 혼자 트랙을 질주하며 환호를 받는 순간과 비슷하다.
파사칼리아
(음악에서) 낮은 음에서 똑같이 반복되는 짧은 선율(저음 선율) 위에 여러 성부가 계속 다른 멜로디를 쌓아 올리는 변주곡의 한 종류다. 같은 박자로 발을 구르며 춤을 추는 동안 위에서는 계속 다른 몸짓이 펼쳐지는 춤을 상상하면 된다. (다른 데서는) 일상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전문 음악 용어다.
당김음
(말뜻) 박자의 센박(강하게 짚는 박)이 원래 자리가 아닌 여린박 쪽으로 당겨져 오는 것을 가리키는 순우리말이다. (음악에서) 규칙적으로 흘러가던 리듬의 흐름이 살짝 어긋나며 엇박을 타는 느낌을 준다. 박수를 치다가 한 박자씩 엇갈리게 쳐서 리듬이 통통 튀는 느낌을 내는 것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