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cques Offenbach
로시니가 '샹젤리제의 모차르트'라 부른 첼리스트. 웃음으로 한 시대를 비추었고, 마지막에는 진지한 오페라 한 편에 남은 생을 걸었다.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곁의 사람들 ⏳🌊
- 가족이자크 유다 에베르스트(오펜바흐)
쾰른 회당의 칸토르였던 아버지로, 아들에게 첫 악기를 쥐여 주고 파리로 데려갔다.
- 스승프로망탈 알레비
오페라 코미크 악단 시절 작곡을 가르쳤고, 그의 조카 뤼도비크 알레비는 훗날 오펜바흐의 단짝 대본가가 되었다.
- 가족에르미니 달캥
개종까지 하며 맞은 아내로, 다섯 자녀를 키우며 파산과 전쟁의 시기를 함께 견뎠다.
- 영향조아키노 로시니
오펜바흐를 '샹젤리제의 모차르트'라 불렀고, 오펜바흐는 『아름다운 엘렌』에서 그의 『기욤 텔』을 패러디했다.
- 우정오르탕스 슈나이더
부프 파리지앵에서 데뷔해 『아름다운 엘렌』과 『제롤스탱 대공비』의 주역을 맡은 그의 대표 프리마돈나였다.
- 경쟁리하르트 바그너
오펜바흐는 그의 '미래 음악'을 무대에서 놀렸고, 바그너는 보불전쟁 뒤 희극 대본 『항복』에서 오펜바흐를 조롱했다.
I. 쾰른의 소년 · 1819–1833 (0–14세)
(출생) 1819년 6월, 프로이센 왕국(오늘날 독일) 라인 지방의 쾰른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야코프 오펜바흐였고, 열 남매 가운데 일곱째였다. 아버지 이자크 유다 에베르스트는 프랑크푸르트 근처의 소도시 오펜바흐암마인 출신이었다. 떠돌이 악사 시절 '오펜바흐 사람'이라 불렸는데, 그 별명을 아예 성으로 삼았다. 그는 제본 일과 음악 교습으로 생계를 꾸렸다. 뒤에는 쾰른 유대교 회당의 칸토르(예배 때 기도를 노래로 이끄는 선창자)가 되었고, 기도 선율을 엮은 책을 펴내기도 했다. 어머니 마리아네에 관해서는 남은 기록이 적다. (첼로) 아버지는 여섯 살 아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아이는 아홉 살 무렵 첼로로 옮겨 갔고, 이 악기가 곧 평생의 목소리가 되었다. 쾰른의 첼리스트들에게 배우는 한편, 어린 나이부터 스스로 작은 곡을 지어 연주했다. 회당에서 날마다 듣던 선창의 가락과 집 안을 채운 아버지의 교습 소리가 그의 첫 음악 교실이었다. (트리오) 형 율리우스가 바이올린을, 누나 이자벨라가 피아노를 맡았다. 셋은 삼중주를 꾸려 쾰른의 무도장과 선술집에서 춤곡을 연주했고, 그 수입으로 살림을 보탰다. 춤추는 사람들의 발걸음에 박자를 맞추던 이 경험은 훗날 그의 무대를 끌고 가는 왈츠와 갈롭의 탄력으로 이어졌다. 1833년, 아버지는 두 아들의 재능을 키우기에 쾰른은 좁다고 판단했다. 그는 열네 살 야코프와 형 율리우스를 데리고 파리로 향했다. 음악가가 일할 극장과 살롱이 유럽에서 가장 많은 도시였다.
II. 파리의 첼리스트 · 1833–1849 (14–30세)
(입학) 파리 음악원 원장 케루비니는 외국인을 받지 않는다는 규정을 들어 처음에는 입학을 거절했다. 그러나 소년의 연주를 직접 듣고 나서 허락했다. 1833년 11월 첼로 반에 들어갔지만, 정해진 교과에 금세 싫증을 내고 1년 남짓 만에 학교를 떠났다. 이름도 프랑스식으로 자크라 고쳤다. 형제는 회당 성가대에서 노래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악단) 1835년 오페라 코미크 극장 오케스트라의 첼로 주자 자리를 얻었다. 급료는 적었고, 연주 중 장난을 치다 벌금을 물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 무렵 『유대 여인』의 작곡가 프로망탈 알레비에게 작곡을 배웠다. 독일 출신 작곡가 프리드리히 폰 플로토와도 가까워져, 둘이 함께 살롱용 이중주를 쓰고 연주했다. (독주) 1830년대 말 악단을 나와 살롱 독주자로 나섰다. 화려한 기교에 익살스러운 무대 매너를 곁들인 연주로 파리 사교계에 이름을 알렸다. 1844년 런던 순회에서는 멘델스존, 열세 살 소년 요제프 요아힘과 한 무대에 섰고 빅토리아 여왕 앞에서도 연주했다. 1847년 무렵 쓴 첼로 협주곡 『군대 협주곡』에는 이 시절 비르투오소의 자신감이 그대로 담겼다. (결혼) 그 사이 스페인 출신 망명자의 딸 에르미니 달캥과 사랑에 빠졌다. 그녀의 의붓아버지는 런던 순회를 주선한 영국인 공연 기획자 존 미첼이었다. 처가는 결혼 조건으로 안정된 벌이와 가톨릭 개종을 요구했다. 그는 개종한 뒤 1844년 8월 결혼했다. 1848년 혁명으로 파리의 연주회 시장이 얼어붙자 가족을 데리고 쾰른으로 피했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살롱을 휩쓸던 비르투오소 첼리스트 오펜바흐가 자기 손을 위해 쓴 대작이다. 오페레타 작곡가 이전의 그가 어떤 연주자였는지 들려준다.
- 관현악 도입부의 북소리와 나팔 신호 같은 리듬이 '군대'라는 별명을 설명해 준다. 짧고 튀는 점 리듬(긴 음과 짧은 음이 짝을 이룬 리듬)에 귀를 기울여 보자.
- 첼로가 아주 높은 음역까지 치솟는 대목에서는 엄지손가락을 줄 위에 얹어 짚는 주법(엄지 자세)이 쓰인다. 오펜바흐 자신이 명수였던 기교로, 지금도 첼리스트들에게 까다로운 곡으로 꼽힌다.
- 느린 악장에서 첼로는 사람 목소리처럼 길게 노래한다. 훗날 무대에서 꽃필 선율가의 면모가 이미 엿보인다.
- 악보가 여러 곳에 흩어져 전해지다가, 오펜바흐 연구자 장크리스토프 케크의 복원을 거쳐 2000년대 녹음으로 널리 알려졌다. 음반마다 길이와 구성이 다를 수 있으니 판본을 확인하며 비교해 보자.
III. 작은 극장 · 1850–1858 (31–39세)
(지휘) 1850년 테아트르 프랑세(코메디 프랑세즈)의 음악감독이 되어 연극의 막간 음악을 맡았다. 뮈세의 희곡 『촛대』에 붙인 '포르튀니오의 노래'가 크게 사랑받았다. 그러나 정작 오페라 코미크는 그의 무대 작품을 받아 주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그는 극장을 직접 차리기로 했다. (개관) 1855년 만국박람회로 파리가 붐비던 여름이었다. 그는 샹젤리제의 작은 목조 극장을 빌려 7월 5일 '부프 파리지앵'의 문을 열었다. 첫 흥행작 『두 장님』은 장님 행세를 하는 두 거지가 다리 위 구걸 자리를 놓고 다투는 단막극이었다. 박람회 관람객이 몰렸고, 겨울에는 파사주 슈아죌의 극장으로 옮겨 공연을 이어 갔다. (제약) 당국의 허가는 단막극에 노래하는 배우 서너 명까지로 묶여 있었다. 그는 이 틀을 웃음거리로 삼았다. 『크로크페르』(1857)에는 혀를 잘린 기사가 나와, 짖는 소리와 팻말로만 말을 했다. 1856년에는 신인 작곡가 공모전을 열었는데, 열여덟 살의 비제와 샤를 르코크가 공동 1등을 차지했다. 비제의 『미라클 박사』는 이듬해 이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화려한 무대와 출연료에 돈을 아끼지 않은 탓에 극장 장부는 늘 적자였다. (신화) 1858년 규제가 풀리자 첫 대형 작품 『지옥의 오르페』를 올렸다. 대본은 엑토르 크레미외와, 스승 알레비의 조카 뤼도비크 알레비가 썼다. 신들이 지루해하고 부부는 서로 질려 있는 그리스 신화였다. 극 중 오르페는 글루크의 아리아 '에우리디체를 잃었네'를 인용한다. 평론가 쥘 자냉이 신성모독이라 비난하자 오히려 관객이 몰렸다.
허가 규제가 풀리자마자 올린 첫 대형 작품이다. 작은 극장의 재치가 신화 전체를 뒤집는 풍자로 커졌다.
- 2막(개정판 4막) 지옥 연회의 '지옥의 갈롭'은 흔히 캉캉으로 불리는 바로 그 음악이다. 숨 돌릴 틈 없는 빠른 2박자 위로 심벌즈와 큰북이 몰아친다.
- 오늘날 연주회에서 자주 듣는 서곡은 오펜바흐가 아니라 1860년 빈 공연 때 카를 빈더가 극 중 선율을 엮어 만든 것이다. 첫 공연에는 짧은 전주만 있었다.
- 오르페가 글루크의 아리아 '에우리디체를 잃었네' 가락을 끌어오는 대목이 있다. 비극의 명곡이 이 집에서는 시큰둥한 부부싸움의 무기가 된다.
- 주피터가 파리로 변신해 에우리디스를 꾀는 이중창에서는 '즈즈즈' 하는 날갯소리를 목소리로 흉내 낸다.
- '여론'이라는 인물은 고대 비극의 합창단을 흉내 내며 체면만 따지는 사회를 대변한다. 신들이 들고일어나는 장면의 행진곡 풍 합창은 혁명가처럼 들린다.
IV. 샹젤리제의 모차르트 · 1859–1869 (40–50세)
(명성) 『지옥의 오르페』는 수백 회 이어졌고, 그는 단숨에 제2제정 파리의 얼굴이 되었다. 로시니는 그를 '샹젤리제의 모차르트'라 불렀다. 1860년 프랑스 국적을 얻었고, 이듬해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같은 해 풍자극 『레뷰의 카니발』에는 '미래의 음악가'라는 장면을 넣었다. 마침 파리에서 『탄호이저』 공연을 준비하던 바그너의 '미래 음악'을 놀리는 대목이었다. (전성) 1862년 극장 경영에서 물러난 그는 다른 극장들로 무대를 넓혔다. 1864년 『아름다운 엘렌』은 오르탕스 슈나이더를 당대 최고의 스타로 만들었다. 같은 해 빈 궁정오페라에 올린 진지한 오페라 『라인의 요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 속의 한 선율은 훗날 『호프만의 이야기』의 뱃노래로 다시 살아났다. 이어 『파리의 삶』(1866), 『제롤스탱 대공비』(1867), 『라 페리콜』(1868)이 나왔다. 1867년 만국박람회 때는 유럽 각국의 군주들이 『제롤스탱 대공비』를 보러 왔다. 전쟁놀이에 빠진 작은 나라를 비웃는 작품이었다. (가정) 부부는 네 딸과 아들 오귀스트를 두었다. 노르망디 바닷가 에트르타에 지은 별장 '빌라 오르페'는 여름마다 손님과 아이들로 북적였다. 그는 많이 벌고 더 많이 썼고, 빚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1860년대부터는 가수 쥘마 부파르와 오랜 연인 관계를 이어 갔다. (통풍) 같은 무렵 통풍이 시작되었다. 깡마른 몸에 한여름에도 모피 외투를 두르고 다니는 모습이 동시대인의 회고에 자주 등장한다. 통증 속에서도 그는 리허설장에 나와 배우들의 박자를 직접 다듬었다.
오르탕스 슈나이더를 위해 쓴 작품이다. 트로이 전쟁의 영웅들을 제2제정의 허영 많은 귀족처럼 그려 전성기를 열었다.
- 1막 엘렌의 '거룩한 사랑이여'는 사랑의 여신에게 바치는 진지한 기도처럼 시작한다. 그러나 선율의 굴곡에는 은근한 관능이 배어 있다. 엄숙함과 장난 사이의 줄타기가 이 작품의 맛이다.
- 왕들이 차례로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노랫말의 끝 음절을 되풀이하는 말장난이 이어진다. 메넬라오스의 '나는 왕비의 남편, 남편이라네'가 그 예로, 프랑스어 원어로 들으면 우스움이 살아난다.
- 3막의 '애국 삼중창'은 로시니 『기욤 텔』의 장엄한 삼중창을 비튼 패러디다. 원곡을 먼저 들어 두면 웃음이 두 배가 된다.
- 파리스가 사과를 건넨 심판 이야기를 들려주는 쿠플레(같은 가락에 가사만 바꿔 되풀이하는 노래)는 절이 거듭될수록 능청이 쌓인다.
1867년 만국박람회 때 유럽의 군주들이 객석을 채운 작품이다. 그들 앞에서 전쟁놀이와 권력의 변덕을 웃음거리로 삼았다.
- 대공비의 '아, 나는 군인이 좋아'는 경쾌한 행진 리듬에 실려 있다. 사열하듯 병사를 고르는 권력자의 변덕이 그 위에 그려진다.
- 붐 장군의 노래에는 총소리를 흉내 낸 '피프, 파프, 푸프'가 나온다. 의성어(소리를 흉내 낸 말)로 허세 가득한 군인의 초상을 그려 낸다.
- '그에게 전해 주오'에서 대공비는 신하를 시켜 병사에게 마음을 전한다. 이 노래는 이 작품에서 드물게 부드럽고 서정적인 순간이다. 슈나이더의 대표곡으로 꼽혔다.
- '아버지의 칼을 보라'는 대대로 물려온 칼을 높이 찬양한다. 그러나 이 칼은 극 중에서 연인과 장군 사이를 정신없이 옮겨 다닌다. 진지한 찬가의 형식과 우스운 상황의 어긋남을 들어 보자.
V. 전쟁과 파산 · 1870–1877 (51–58세)
(전쟁) 1870년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터지자 그는 양쪽 모두에게 의심받았다. 프랑스 신문은 쾰른 태생인 그를 적국 사람 취급했고, 독일 쪽에서는 조국을 버린 자로 보았다. 그는 에트르타를 거쳐 한동안 국외에 머물렀다. 바그너는 파리 시민을 조롱하는 희극 대본 『항복』을 쓰면서 오펜바흐도 웃음거리로 삼았다. 제정이 무너지자 그 제정을 비꼬던 그의 웃음도 한물갔다는 말이 돌았다. (가이테) 1873년 그는 대형 극장 테아트르 드 라 가이테의 경영을 맡았다. 이듬해 『지옥의 오르페』를 4막짜리 호화 무대로 다시 꾸며 크게 성공했다. 그러나 사르두의 연극 『증오』에 거액을 쏟았다가 실패했고, 1875년 끝내 파산했다. 그는 재산과 앞으로 들어올 수입의 일부를 채권자들에게 넘겨 빚을 갚아 나갔다. 같은 해 이 극장에서 초연된 『달나라 여행』은 쥘 베른의 소설에서 착상한 거대한 볼거리 무대였다. 살림이 기울던 와중에도 무대만큼은 사치스러웠다. (미국) 1876년 그는 미국 독립 100주년 박람회에 맞춘 순회 연주에 나섰다. 뉴욕과 필라델피아에서 자기 작품을 지휘해 빚 갚을 돈을 모았다. 돌아와서는 여행기 『한 음악가의 여행 노트』(1877)를 펴냈다. 광고와 호텔, 거대한 공연장에 놀라는 쉰일곱 살 유럽인의 눈이 유머 있게 담겨 있다. 미국은 그에게 돈과 함께, 아직 자신을 반기는 관객이 있다는 확인을 주었다.
VI. 호프만의 이야기 · 1878–1880 (59–61세)
(재기) 1879년 오페레타 『고적대장의 딸』이 크게 성공하면서 그는 다시 파리 무대의 중심에 섰다. 그러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웃음의 작곡가로만 기억되지 않을 진지한 오페라 한 편을 쓰고 싶었다. (유작) 소재는 쥘 바르비에와 미셸 카레가 1851년에 쓴 연극 『호프만의 이야기』였다. 독일 낭만주의 작가 E. T. A. 호프만을 주인공으로, 그가 사랑했던 세 여인의 이야기를 엮은 작품이다. 기계 인형 올랭피아, 노래하면 죽는 병을 앓는 안토니아, 베네치아의 유녀 줄리에타가 그 셋이다. 한 여인을 사랑할 때마다 악마 같은 적수가 나타나 사랑을 부순다. 1879년 5월 그는 자택에서 발췌 시연회를 열었다. 오페라 코미크의 카르발로와 빈 링 극장의 야우너가 와서 공연을 약속했다. 통풍과 심장 이상으로 몸이 무너져 가는 동안에도 그는 악보를 놓지 않았다. (죽음) 1880년 10월 5일, 리허설이 한창이던 때 파리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예순한 살이었다. 장례는 마들렌 성당에서 치렀고, 몽마르트르 묘지에 묻혔다. 미완의 악보는 에르네스트 기로가 다듬었다. 비제의 『카르멘』에 레치타티보(말하듯 노래하는 대목)를 붙였던 바로 그 작곡가다. 1881년 2월 10일 오페라 코미크 초연 때는 줄리에타의 막이 통째로 빠졌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무대를 끝내 보지 못했다. 아내 에르미니는 1887년에 남편을 따랐고, 아들 오귀스트도 아버지보다 몇 해 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웃음의 작곡가가 마지막 힘을 쏟은 진지한 오페라다. 그는 이 작품의 완성도, 초연도 보지 못했다.
- 베네치아 막의 '뱃노래'(바르카롤)는 배가 흔들리듯 느린 6박자 리듬 위에서 두 여성 목소리가 나란히 화음을 이루며 흐른다. 선율은 1864년 빈에서 실패한 『라인의 요정』에서 건져 온 것이다.
- 기계 인형 올랭피아의 노래 '정원의 새들'은 아주 높은 음으로 장식음을 굴리는 콜로라투라 아리아다. 노래 도중 태엽이 풀려 느려지면 누군가 다시 감아 주는 연출이 관습처럼 이어진다.
- 프롤로그에서 호프만은 난쟁이 클라인자크를 놀리는 익살 노래를 부르다가, 어느새 사랑했던 여인의 얼굴을 회상하는 몽상으로 빠져든다. 템포와 분위기가 바뀌는 순간을 놓치지 말자.
- 안토니아 막에서는 노래하면 죽는 병을 앓는 딸 앞에 죽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초상화에서 울려 나와 노래하라고 부추긴다. 세 목소리가 겹치는 삼중창이 이 오페라의 비극적 정점이다.
- 공연마다 막의 순서와 곡목이 다르다. 유명한 '빛나라, 다이아몬드'처럼 오펜바흐 사후에 덧붙여진 곡도 많다. 어느 판본을 쓰는지 확인하며 비교해 듣는 것이 애호가들 사이의 큰 즐거움이다.
덜 알려진 이야기
오늘날 『호프만의 이야기』 공연에서 가장 사랑받는 곡 가운데 몇은 오펜바흐가 이 오페라를 위해 쓴 것이 아니다. 베네치아 막의 '빛나라, 다이아몬드'와 칠중창은 1904년 몬테카를로 공연 때 덧붙여졌다. '빛나라, 다이아몬드'는 『달나라 여행』의 선율을 가져다 고친 곡이다. 미완성 유작이라 초연 때부터 공연마다 손질이 거듭되었다. 그 자료가 1887년 오페라 코미크 화재로 사라졌다고 여겨진 탓에, 덧붙인 곡들이 오래 원작처럼 통했다. 20세기 후반 흩어져 있던 자필 악보가 잇달아 발견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프리츠 외저, 마이클 케이와 장크리스토프 케크의 새 판본이 나왔다. 그제야 무엇이 오펜바흐의 것인지 가려지기 시작했다. 이 오페라에는 불길하다는 미신이 따라붙었다. 1881년 12월 빈 링 극장에서 『호프만의 이야기』 두 번째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 불이 났고,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참사는 유럽 극장의 방화 규정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오페라 쪽에서는 한동안 '저주받은 작품'이라는 꼬리표로 남았다. 무대의 명성에 가려졌지만 그는 평생 첼로 음악을 썼다. 학생용 첼로 이중주 교본은 지금도 연습실에서 쓰인다. 소품 '자클린의 눈물'은 그의 미출판 악보를 찾아낸 독일 첼리스트 베르너 토마스미푸네가 붙인 이름이다. 요절한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를 기려 지었다. 오펜바흐가 붙인 제목이 아니라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용어 노트 📚🔎
오페레타
(말뜻) 이탈리아어 오페라(opera)에 '작은'이라는 뜻의 꼬리 -etta 가 붙은 말로, '작은 오페라'라는 뜻이다. (음악에서) 노래와 대사, 춤이 섞인 가벼운 음악극이다. 줄거리는 대개 우스꽝스럽고 풍자가 많다. 노래 사이에 배우들이 그냥 말로 대사를 주고받는 점이 진지한 오페라와 다르다. 학교 축제에서 반 친구들이 노래 몇 곡을 넣어 꾸미는 코미디 연극과 비슷하다. 오펜바흐의 파리 무대가 이 장르를 유럽 전체에 퍼뜨렸다.
오페라 부프
(말뜻) 프랑스어 오페라 부프(opéra bouffe)의 '부프'는 '우스운'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부포(buffo)에서 왔다. 곧 '우스운 오페라'다. (음악에서) 오펜바흐가 『지옥의 오르페』나 『아름다운 엘렌』에 붙인 장르 이름이다. 신화나 역사 속 인물을 데려와 당시 사회를 비꼬는 익살극을 가리킨다. 위인전 속 영웅이 요즘 말투로 투덜대는 패러디 만화를 떠올리면 가깝다. 진지한 이야기를 일부러 엉뚱하게 비틀어 웃음을 만든다.
바르카롤(뱃노래)
(말뜻) 이탈리아어 바르카롤라(barcarola)에서 온 말이다. '배'를 뜻하는 바르카(barca)에서 나와, 뱃사공이 부르는 노래라는 뜻이 되었다. (음악에서) 베네치아 곤돌라 사공의 노래를 본뜬 곡이다. 한 마디를 여섯으로 나누는 느린 리듬(6/8박자)이 배가 물결에 흔들리는 느낌을 준다. 그네를 탈 때 앞으로 갔다 뒤로 왔다 하는 일정한 흔들림을 떠올리면 된다. 『호프만의 이야기』의 뱃노래가 가장 유명한 예다.
갈롭
(말뜻) 프랑스어 갈롭(galop)은 말이 네 발을 모아 가장 빠르게 달리는 걸음을 뜻한다. (음악에서) 19세기 무도회에서 유행한 아주 빠른 2박자 춤곡이다. 춤추는 사람들이 말이 달리듯 홀을 가로질러 뛰어다녔다. 체육 시간에 음악에 맞춰 신나게 뛰는 줄넘기처럼 한 박도 쉬지 않고 몰아친다. 『지옥의 오르페』의 '지옥의 갈롭'은 훗날 캉캉 춤의 음악으로 더 유명해졌다. (다른 데서는) 승마에서는 말이 가장 빨리 달리는 걸음 자체를 가리키고, 영어로는 갤럽(gallop)이라 한다.
쿠플레
(말뜻) 프랑스어 쿠플레(couplet)는 '짝, 한 쌍'을 뜻하는 쿠플(couple)에서 나온 말로, 원래 짝을 이룬 시구를 가리켰다. (음악에서) 같은 가락을 여러 번 되풀이하면서 가사만 바꿔 부르는 노래다. 오페레타에서는 절마다 농담이 하나씩 더해져, 끝 절에서 웃음이 터지도록 짜는 경우가 많다. 생일 축하 노래를 같은 가락으로 부르면서 2절, 3절 가사를 친구들이 바꿔 넣는 장난과 닮았다. (다른 데서는) 영어 시에서 커플릿(couplet)은 각운이 맞는 두 줄짜리 짝 시구를 말한다.
패러디
(말뜻) 그리스어 파로이디아(parōidia)에서 왔다. '곁에서, 비껴서'(para)와 '노래'(ōidē)가 합쳐져, 원래 노래 곁에서 비틀어 부르는 노래라는 뜻이다. (음악에서) 잘 알려진 곡의 선율이나 형식을 빌려 와 엉뚱한 상황에 붙여 웃음을 만드는 수법이다. 『아름다운 엘렌』의 애국 삼중창은 로시니 『기욤 텔』의 장엄한 삼중창을 비틀었다. 『지옥의 오르페』는 글루크 아리아를 부부싸움에 끌어왔다. 유명한 영화 장면을 친구들끼리 따라 하며 대사만 바꿔 보는 놀이와 같은 원리다. 원작을 알수록 더 웃기다. (다른 데서는) 광고나 예능 프로그램에서 유명한 작품을 흉내 내 웃기는 것도 패러디라고 부른다.
콜로라투라
(말뜻) 이탈리아어로 '색칠한 것'이라는 뜻이다. 선율에 화려한 색을 입히듯 장식한다는 데서 온 이름이다. (음악에서) 아주 높은 음역에서 빠르게 굴리는 음, 떨림, 뛰어오르는 음을 잔뜩 넣어 노래를 꾸미는 창법이다. 이런 노래를 잘 부르는 소프라노를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라고 한다. 같은 선을 그려도 형광펜과 반짝이 스티커로 공책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과 비슷하다. 『호프만의 이야기』의 올랭피아 노래는 이 창법으로 사람이 아닌 기계 인형의 정교함을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