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dřich Smetana
"1874년 10월 20일 아침 여섯 시, 나는 완전히 귀가 멀었다." — 자신의 일기에 남긴 기록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곁의 사람들 ⏳🌊
- 가족프란티셰크 스메타나
양조업자이자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버지로, 음악의 뿌리였지만 아들이 음악으로 생계를 꾸리는 것은 반대했다.
- 스승요제프 프록슈
프라하에서 화성학과 작곡의 기초를 가르친 스승이다.
- 영향프란츠 리스트
무명 시절 헌정받은 작품을 격려하고 출판을 도왔으며, 평생 그의 음악적 이상으로 남았다.
- 가족카테르지나 콜라르조바
첫 아내로 네 딸을 함께 낳았으나 결핵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 가족바르보라 페르디난도바
재혼한 두 번째 아내로 청각을 잃은 말년까지 곁을 지켰다.
- 우정안토닌 드보르자크
임시극장 오케스트라의 비올라 주자였던 후배 작곡가로, 스메타나는 그의 재능을 일찍 알아보고 격려했다.
I. 리토미슐의 소년 · 1824–1839 (0–15세)
(탄생) 1824년 3월, 오스트리아 제국 보헤미아(오늘날 체코)의 소도시 리토미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란티셰크 스메타나는 발트슈타인 백작 소유의 양조장을 관리하는 양조업자였고, 여가에는 바이올린을 켜는 아마추어 음악가이기도 했다. 어머니 바르보라는 많은 자녀를 건사하며 집안 살림을 꾸렸다. (재능) 어린 베드르지흐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일찍 익혔고, 여섯 살에 이미 공개 연주회 무대에 설 만큼 두각을 나타냈다. 아버지가 이끄는 가족 현악 사중주단에 끼어 연주하며 음악이 일상인 집안에서 자랐다. (갈등) 아버지는 음악을 취미로만 여겼고, 아들이 법률이나 사무직 같은 안정된 길을 걷기를 바랐다. 여러 학교를 전전하며 다른 과목 성적은 신통치 않았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만은 꺾이지 않았다.
II. 프라하에서의 수업 시대 · 1840–1848 (16–24세)
(입문) 1840년대 초 프라하로 나와 본격적으로 음악을 공부했다. 피아니스트이자 교육자 요제프 프록슈에게 사사하며 화성과 작곡의 기초를 다졌고, 프록슈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체계적으로 훈련시켰다. (헌정) 1848년 자신의 《여섯 개의 특성적 소품》 Op. 1을 프란츠 리스트에게 헌정하며 편지를 보냈다. 리스트는 무명의 젊은 작곡가를 격려하고 출판사를 연결해 주었으며, 이는 스메타나가 평생 리스트와 신독일악파의 음악 이념에 기울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혁명) 같은 해 프라하에서 일어난 혁명에 청년 스메타나도 가담해 바리케이드 근처에서 행진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합스부르크 제국 안에서 체코 민족의 목소리를 내는 일에 눈뜨기 시작한 때였다. (언어) 그는 독일어를 쓰는 집안에서 자라 체코어 구사가 서툴렀는데, 이 무렵부터 의식적으로 체코어를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훗날 체코 민족 오페라를 쓰게 될 작곡가로서는 아이러니한 출발이었다.
무명 시절 리스트에게 헌정한 작품으로, 그가 평생 품은 리스트식 음악 이념의 출발점이었다.
- 첫 곡은 힘찬 옥타브와 화려한 손가락 기교로 시작해, 리스트풍 피아노 비르투오소 양식을 어린 작곡가가 얼마나 빠르게 흡수했는지 보여준다.
- 느린 악장에서는 선율이 오른손과 왼손을 오가며 넓게 펼쳐지는데, 건반 전체를 울리게 하는 리스트 특유의 울림을 닮았다.
- 마지막 곡의 빠른 패시지는 연주자에게 손가락이 꼬이기 쉬운 대목으로 꼽히며, 지금도 피아노 전공생의 도전곡으로 종종 연주된다.
III. 결혼과 상실 · 1849–1856 (25–32세)
(결혼) 1849년 피아니스트 카테르지나 콜라르조바와 결혼했다.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고 둘 다 프록슈 문하에서 음악을 익혔다. 그보다 한 해 앞선 1848년에 이미 프라하에 자신의 음악학교를 열어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딸들) 부부는 네 딸을 두었는데 베드르지슈카, 가브리엘라, 조피에, 카테르지나였다. 맏딸 베드르지슈카는 각별히 총명하고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죽음) 1854년과 1855년 사이 둘째와 맏딸이 잇따라 세상을 떠났다. 네 살이던 베드르지슈카를 성홍열로 잃은 슬픔은 그를 오래도록 짓눌렀다. (삼중주) 딸을 잃은 해 겨울 피아노 삼중주 사단조 Op. 15를 썼다. 첫머리 바이올린의 비통한 선율은 그 슬픔을 음악으로 토해낸 것이었고, 이듬해 보헤미아로 스메타나를 찾아와 이 곡을 들은 리스트는 깊이 감동했다고 전해진다.
딸 베드르지슈카를 잃은 겨울에 쓴 곡으로, 슬픔을 음악으로 토해낸 가장 개인적인 작품이다.
- 1악장 첫머리, 반주 없이 홀로 울리는 바이올린의 탄식 같은 선율은 딸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들린다.
- 피아노와 현악기가 번갈아 주고받는 대목에서는 격렬하게 치솟았다 가라앉기를 반복하며, 감정의 동요를 그대로 음으로 그린 듯하다.
- 마지막 악장은 느린 슬픔에서 벗어나 밝은 빠르기로 마무리되어, 상실을 넘어서려는 의지로 흔히 해석된다.
IV. 예테보리의 망명 · 1856–1861 (32–37세)
(이주) 음악학교 경영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고 빚에 시달리던 그는 1856년 스웨덴 예테보리로 건너갔다. 그곳 합창협회의 지휘자이자 피아노 교사로 일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활동) 예테보리에서 지휘자로 명성을 쌓았고, 교향시 《리하르드 3세》, 《발렌슈타인의 진영》 같은 작품을 써서 리스트식 표제음악의 어법을 익혀 나갔다. 혹독한 북유럽 겨울과 타지 생활의 외로움 속에서도 작곡에 몰두했다. (사별) 1859년 결핵을 앓던 아내 카테르지나와 함께 스웨덴을 떠나 고향으로 향하던 길에, 그녀가 드레스덴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듬해 그는 바르보라 페르디난도바와 재혼했다.
V. 민족 오페라의 시대 · 1861–1874 (37–50세)
(귀향) 1861년 프라하로 완전히 돌아왔다. 체코 민족의식이 고조되던 시기, 체코어 오페라를 쓰는 일이 민족문화 건설의 상징적 과제로 떠올랐고 스메타나는 그 선두에 섰다. (팔려간신부) 1866년 초연한 희극 오페라 《팔려간 신부》는 처음에는 반응이 미지근했지만, 이후 여러 차례 개작을 거치며 체코인이 가장 사랑하는 오페라로 자리 잡았다. 시골 혼례와 민속춤을 소재로 한 이 작품에는 삶의 소박한 기쁨이 담겨 있었다. (지휘자) 같은 해 프라하 임시극장의 상임 지휘자로 임명되어 체코어 오페라를 무대에 올리는 데 앞장섰다. 1868년에는 체코 역사의 영웅을 그린 《달리보르》를 선보였다. (갈등) 리스트와 바그너의 음악어법을 받아들인 그의 작풍을 두고 보수적인 민족주의 평론가들은 그를 '지나치게 독일적'이라 비난했다. 체코 민족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면서도 평생 이런 모순된 비판에 시달렸다. (드보르자크) 임시극장 오케스트라에는 비올라 주자로 젊은 안토닌 드보르자크가 있었다. 스메타나는 이 과묵한 후배의 재능을 일찍 알아보고 격려했으며, 둘의 우정은 체코 음악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다리가 되었다.
시골 혼례를 소재로 한 희극 오페라로, 여러 차례 개작을 거쳐 체코인의 국민 오페라가 되었다.
- 서곡은 느린 서주 없이 곧바로 현악기들이 빠르게 뒤쫓듯 주고받는 푸가(돌림노래처럼 쌓아 올리는 짜임)로 시작해 시골 장터의 떠들썩함을 단숨에 펼쳐 보인다.
- 1막 끝의 춤곡 '폴카'와 2막의 '푸리안트'는 체코 민속 춤의 리듬을 그대로 가져온 대목으로, 엇박의 경쾌한 흥을 오케스트라가 그대로 재현한다.
- 서곡의 빠른 현악 패시지는 오케스트라 단원들 사이에서 손가락이 가장 바쁘게 움직이는 난곡으로 꼽힌다.
VI. 침묵 속의 조국 · 1874–1878 (50–54세)
(이명) 1874년 봄부터 귀에서 높은 음의 이명이 끊임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일기에는 그해 10월 20일 아침 여섯 시에 완전히 귀가 멀었다고 적었다. 쉰 살의 지휘자이자 작곡가에게 청력 상실은 생계와 경력 모두의 붕괴를 뜻했다. (사직) 결국 임시극장 지휘자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수입이 끊기고 건강마저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그는 작곡을 멈추지 않았다. (나의조국) 완전한 침묵 속에서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을 쓰기 시작했다. 보헤미아의 강과 전설, 숲과 들판을 그린 여섯 곡의 교향시로, 그중 〈블타바(몰다우)〉는 두 개의 샘에서 시작해 프라하를 지나 바다로 흘러가는 강의 여정을 그렸다. (사중주) 1876년에는 현악 사중주 1번 《나의 생애로부터》를 완성했다. 청년기의 희망과 춤, 첫사랑, 그리고 마지막 악장에서 돌연 높은 음으로 떠오르는 바이올린 소리로 자신을 덮친 이명을 직접 묘사했다.
완전히 귀가 먼 채로 써 내려간 연작의 한 곡으로, 조국의 강을 소리로 그린 그의 대표작이다.
- 도입부, 플루트와 클라리넷이 번갈아 그리는 잔물결 같은 선율은 두 개의 샘에서 시작되는 강의 발원을 묘사한다.
- 뒤이어 현악기 전체가 받아 연주하는 '블타바 주제'는 넓게 굽이치는 강의 흐름을 노래하며, 영화와 광고에도 자주 쓰일 만큼 널리 알려진 선율이다.
- 중간부의 사냥 호른 소리, 마을 혼례의 폴카, 달빛 아래 물의 요정들의 춤 등 장면마다 악기 편성과 분위기가 또렷이 바뀌는 대목을 따라가며 들으면 흥미롭다.
- 곡 말미, 강이 성 요한 급류를 지나 프라하 비셰흐라드 성 앞을 흐를 때 울리는 금관의 장엄한 주제는 그가 다른 곡에서 쓴 비셰흐라드 선율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며 쓴 자전적 사중주로, 마지막 악장에 이명 증세를 직접 그려 넣었다.
- 1악장 첫머리, 비올라가 낮은 음에서 어둡게 시작하는 주제는 작곡가 자신이 '장차 닥칠 운명에 대한 예감'이라 적었던 대목이다.
- 2악장은 경쾌한 춤곡 폴카로, 청년 시절 무도회에서 느꼈던 생의 기쁨을 회상한 것이라고 스메타나 스스로 밝혔다.
- 4악장 중간, 제1바이올린이 갑자기 아주 높은 음을 길게 끌며 멈추는 대목은 그가 실제로 귀에서 듣던 이명을 그대로 음으로 옮긴 것이라고 본인이 편지에서 설명했다.
- 이 고음 이후 음악이 다시 가라앉아 조용히 끝나는 결말은, 청력을 잃고 난 뒤의 체념을 그린 것으로 흔히 해석된다.
VII. 마지막 해들 · 1879–1884 (55–60세)
(리부셰) 체코 신화 속 프라하의 전설적 여왕을 그린 오페라 《리부셰》는 1872년에 완성해 두었다가, 1881년 프라하 국민극장 개관을 기념해 비로소 초연되었다. 완전히 귀가 먼 작곡가는 그 영광의 순간을 소리로는 들을 수 없었다. (쇠약) 1880년대에 접어들며 두통과 현기증, 기억력 감퇴 같은 증상이 심해졌다. 가족들은 그가 점점 말을 잃고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숲) 말년에는 딸 조피에의 가족이 사는 야브케니체 숲속 사냥터지기 관사에 머물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고요한 숲의 풍경은 《나의 조국》의 마지막 곡 〈블라니크〉에도 흔적을 남겼다. (죽음) 1884년 초 정신이 급격히 무너져 프라하의 정신병원 카테르진키에 입원했고, 그해 5월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장례에는 수많은 체코인이 모여 민족음악의 아버지를 배웅했다.
프라하 전설의 여왕을 그린 축제극으로, 국민극장 개관식에서 완전히 귀가 먼 채로 초연을 맞았다.
- 서곡은 축제적인 팡파르로 시작해 전설 속 여왕의 예언적 위엄을 표현하며, 이후 체코 국가 행사에서 의식적인 곡으로 자주 연주되어 왔다.
- 3막 마지막, 리부셰가 보헤미아의 미래를 예언하는 장면의 선율은 장엄하고 느린 걸음으로 전개되어, 오페라라기보다 장엄한 의식에 가깝게 들린다.
- 작곡가 스스로 이 작품을 '오페라'가 아니라 '축제극'이라 부르며 일상적인 공연이 아닌 국가적 경축일에만 올리기를 바랐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들으면 곡의 분위기가 더 선명해진다.
덜 알려진 이야기
그는 보헤미아 중류층 가정에서 흔했듯 어린 시절 집에서는 독일어를 주로 썼고, 체코어는 성인이 되어서야 의식적으로 다시 배웠다. 체코 민족 오페라의 상징이 된 작곡가가 정작 청년기에는 체코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를 국민적 영웅으로 떠받들던 후대의 서술에서는 잘 언급되지 않았다. 1874년부터 그를 괴롭힌 귀울림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특정 음높이의 소리로 들렸다고 한다. 그는 현악 사중주 1번의 악보 설명에 직접, 마지막 악장에서 제1바이올린이 길게 끄는 고음이 자신이 실제로 듣던 이명의 음높이를 그대로 옮긴 것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사적인 고백을 악보에 구체적으로 남긴 경우는 당시로서는 드물었다. 오늘날 체코인의 국민 오페라로 불리는 《팔려간 신부》는 1866년 초연 당시 흥행에 실패했다. 스메타나는 이후 몇 년에 걸쳐 작품을 여러 차례 개작했고, 막과 춤곡을 추가하며 지금의 형태를 완성해 나갔다. 동시에 그는 리스트와 바그너의 어법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일부 민족주의 평론가들에게 '독일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는데, 체코 민족음악의 아버지가 생전에는 오히려 민족주의 진영 안에서 이런 모순된 공격에 시달렸다는 사실은 그의 신화화된 이미지에 가려 덜 조명되곤 한다. 그의 마지막 해의 정신적, 신체적 쇠약의 원인을 두고 의학사가들 사이에서는 오랫동안 논의가 있어왔다. 카테르진키 정신병원의 진료 기록과 동시대 의사들의 소견을 근거로 매독 말기 증상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연구들이 있으며, 이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한참 뒤에야 학계에서 조심스럽게 다뤄지기 시작한 주제다. 체코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던 생전과 사후 한동안은 이런 논의 자체가 터부시되었다.
용어 노트 📚🔎
교향시
(말뜻) 교향시(交響詩)는 교향곡처럼 오케스트라가 연주하지만, 짧은 시 한 편처럼 하나의 이야기나 풍경을 그리는 곡이라는 뜻이다. (음악에서) 특정한 줄거리, 전설, 풍경, 인물을 음악만으로 묘사하려는 관현악곡이다. 리스트가 처음 이 형식을 만들었고,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처럼 강이나 전설을 그리는 데 즐겨 쓰였다. 마치 그림책 없이 내레이션만 듣고 장면을 상상하는 것과 비슷하다.
표제음악
(말뜻) 표제음악(標題音樂)은 제목이나 설명(표제)을 붙여 구체적인 내용을 전달하려는 음악이라는 뜻이다. 반대말은 제목에 아무 이야기도 담지 않는 절대음악이다. (음악에서) 작곡가가 곡에 붙인 제목이나 설명을 통해 특정 장면, 감정, 이야기를 떠올리도록 쓴 음악이다. 마치 만화책의 말풍선처럼, 음악 바깥에 붙은 설명이 곡을 듣는 방향을 알려준다.
푸리안트
(말뜻) 체코어로 '거만한 사람', '성급한 사람'을 뜻하는 말에서 왔다고 전해지며, 급하게 몰아치는 듯한 춤의 성격을 담고 있다. (음악에서) 체코 민속춤에서 비롯된 리듬으로, 2박자와 3박자가 번갈아 섞이며 강세가 예측하기 어렵게 바뀐다. 손뼉치기 놀이에서 박자를 자꾸 바꿔가며 상대를 헷갈리게 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서곡
(말뜻) 서곡(序曲)은 '순서상 앞에 놓인 곡'이라는 뜻으로, 본 작품이 시작되기 전에 연주하는 도입곡이다. (음악에서) 오페라나 극음악이 막을 올리기 전에 연주되어 관객의 집중을 모으고 앞으로 나올 주제들을 미리 들려주는 역할을 한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나오는 예고편과 비슷한 구실을 한다.
민족악파
(말뜻) 민족악파(民族樂派)는 민족의 고유한 음악 어법을 바탕으로 작곡하는 악파라는 뜻이다. (음악에서) 19세기 후반 유럽 각지에서 자기 나라의 민요, 춤, 전설을 작품에 담아 고유한 음악적 정체성을 세우려 한 흐름이다. 스메타나와 드보르자크가 체코 음악에서 이런 흐름을 이끌었다. 급식실에서 각자 고향 음식을 가져와 자랑하는 것처럼, 각 나라 작곡가들이 자기 나라의 음악색을 자랑스럽게 내세운 셈이다.
현악 사중주
(말뜻) 현악(絃樂)은 줄을 가진 악기, 사중주(四重奏)는 네 사람이 함께 연주한다는 뜻이다. (음악에서) 바이올린 두 대, 비올라 한 대, 첼로 한 대로 이루어진 실내악 편성, 또는 그 편성을 위해 쓰인 곡을 가리킨다. 네 사람이 한 팀을 이뤄 서로 대화하듯 주고받는 모습은 좁은 공간에서 네 명이 패스를 주고받는 것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