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on Bruckner
"사랑하는 하나님께(dem lieben Gott)" — 끝내 완성하지 못한 교향곡 9번을 두고 그가 남겼다고 전해지는 헌정의 말이었다.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곁의 사람들 ⏳🌊
I. 안스펠덴의 소년 · 1824–1837 (0–13세)
(출생) 1824년 9월, 오스트리아 안스펠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안톤 브루크너는 마을 학교 교사이자 교회 오르가니스트였고, 어머니 테레지아 헬름은 영지 관리인이자 여관 주인의 딸로 넉넉한 집안에서 자랐다. 열한 명의 아이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으나 그 가운데 다섯만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교육) 아버지의 작은 학교와 교회 오르간이 곧 그의 첫 교실이었다. 읽기와 쓰기를 배우기 전부터 오르간 건반 앞에 앉아 있었고, 아버지는 수업이 끝나면 아들에게 직접 화성과 건반을 가르쳤다. 가난한 시골 교사의 집안이었지만 음악만큼은 풍족하게 주어졌다. (재능) 인근 호르싱의 친척이자 교사였던 요한 바프티스트 바이스에게 추가로 오르간과 음악 이론을 배우며 재능을 키웠다. 어린 나이에도 교회 오르간 연주를 대신 맡을 만큼 실력이 빨랐다는 증언이 남아 있다. (상실) 1837년, 아버지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열세 살이었다. 홀로 남은 어머니는 가난 속에서 아들을 장크트플로리안 수도원의 소년 성가대로 보냈고, 이는 유년을 끝맺는 동시에 평생 그를 품을 장소와의 첫 인연이 되었다.
II. 장크트플로리안과 교사 시절 · 1837–1855 (13–31세)
(수도원) 장크트플로리안은 린츠 근교의 장엄한 바로크 수도원으로, 거대한 오르간과 성가대 전통을 자랑했다. 소년 브루크너는 이곳에서 합창과 오르간을 배우며 평생 간직할 신앙과 음악적 정체성을 함께 길렀다. (교사) 변성기를 지나 성가대를 떠난 뒤에는 가난한 집안의 재능 있는 소년이 흔히 걷던 길, 곧 교사의 길로 들어섰다. 1841년 빈트하크, 1843년 크론스토르프의 외딴 마을 학교 조교사로 부임했는데, 보수는 적었고 상급 교사의 모진 대우에 시달렸다는 기록이 있다. 밤이면 혼자 오르간과 작곡을 공부하며 버텼다. (복귀) 1845년 보조교사로 장크트플로리안에 돌아왔고, 1848년부터 수도원 오르가니스트를 맡아 1855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이 시기 빈의 대위법 권위자 지몬 제크터에게 편지를 주고받으며 혹독한 화성·대위법 수업을 시작했다. (불안) 이미 뛰어난 오르가니스트로 인정받고 있었음에도 스스로의 기량을 끝없이 의심했다. 이미 갖춘 능력을 두고도 거듭 시험을 자청해 증명받으려 한 태도는, 평생 그를 따라다닌 불안한 완벽주의의 첫 모습이었다.
III. 린츠의 오르가니스트 · 1855–1868 (31–44세)
(린츠) 1856년 린츠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되며 처음으로 안정된 자리를 얻었다. 오르간 앞에서 보인 즉흥연주 솜씨는 이미 지역에서 평판이 높았다. (수련) 제크터와의 통신 수업은 1861년까지 이어졌고, 그 뒤에는 린츠의 지휘자 오토 키츨러에게 관현악법과 형식을 배웠다. 수십 년을 교회 오르간에 바친 사람이 이제야 교향곡 작곡의 기초를 다진 것이었다. (바그너) 1863년 키츨러를 통해 바그너의 《탄호이저》를 접한 일은 그의 음악 인생을 바꾸었다. 이후 평생 바그너를 흠모했고, 그 화성어법을 자기 교향곡에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바로 이 무렵 첫 번째 교향곡의 밑그림이 그려졌다. (청혼) 린츠 시절부터 반복된 패턴이 있었다. 훨씬 젊은 여성에게 끌려 청혼했으나 거의 늘 거절당했다.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자녀도 없었는데, 동시대인들은 그의 순진함과 사교적 서투름을 그 이유로 짚었다. (위기) 1867년 과로와 불안이 겹쳐 신경쇠약으로 무너져 바트크로이첸의 요양소에 입원했다. 몇 달 뒤 회복했고, 그 직후 완성한 〈미사 3번 f단조〉에는 되찾은 신앙과 감사의 마음이 짙게 배어 있다.
신경쇠약에서 회복한 직후 완성한 곡으로, 거듭된 좌절 끝에 되찾은 신앙과 감사를 미사 형식에 담았다.
- 키리에는 어둡고 낮은 음에서 시작해 합창이 서서히 쌓여 오르는데, 신경쇠약에서 회복한 뒤의 참회와 안도가 함께 느껴진다.
- 크레도 중 '사람이 되셨다(Et incarnatus est)' 구절에서 갑자기 속도가 느려지고 독창이 속삭이듯 등장하는 대목은 많은 청자가 가장 경건하게 느끼는 순간이다.
- 글로리아는 금관의 화려한 울림으로 터져 나와 키리에의 어둠과 극적으로 대비된다.
- 이미 바그너풍의 반음계적 화성(인접한 반음들을 밀도 있게 쓰는 어법)이 교회음악 대위법 사이로 스며들어 있어, 훗날 교향곡 어법을 예고한다.
IV. 빈의 이방인 · 1868–1875 (44–51세)
(빈) 1867년 제크터가 세상을 떠나며 빈 음악원 화성·대위법 교수 자리가 비었고, 1868년 브루크너가 그 자리를 이어받아 수도로 이주했다. (적대) 당시 빈 음악계는 브람스를 옹호하는 평론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와 바그너 지지자들로 갈라져 있었다. 바그너 숭배자로 분류된 브루크너는 한슬리크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는데, 정작 그는 브람스의 기량도 존중했고 이런 진영 다툼에 깊이 관심이 없었다. (교향곡) 교향곡 2번에 이어 3번을 작곡하며 바그너에게 헌정하기로 결심했다. 1873년 바이로이트로 직접 찾아가 악보를 보여주며 허락을 구했고, 바그너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 만남은 그에게 평생 자랑으로 남았다. (빈곤) 교수 월급은 넉넉지 않았고 오랫동안 검소한 생활을 벗어나지 못했다. 쌓여가는 작품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재능과 경제적 처지를 끊임없이 의심했다는 기록이 여럿 전해진다.
바그너에게 직접 헌정을 허락받은 교향곡으로, 초연은 참담히 실패했지만 그가 평생 품은 존경을 증명한 작품이다.
- 도입부에서 트럼펫 주제가 바이올린의 떨리듯 반복되는 트레몰로(한 음을 빠르게 되풀이해 울리는 주법) 위로 조용히 떠오르는데, 브루크너가 여러 교향곡에서 즐겨 쓴 '새벽' 같은 시작이다.
- 1873년 초판에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발퀴레》를 직접 인용한 대목이 있었으나 개정 과정에서 지워졌다. 연주자들은 지금도 어느 판본이 더 설득력 있는지를 두고 비교한다.
- 스케르초의 투박한 춤곡 리듬은 엄숙한 바깥 악장들과 대조되어 유독 생동감 있게 다가온다.
- 종결부에서 코랄(회중이 함께 부르는 단순한 찬송 선율)풍의 금관과 질주하는 현악 음형이 번갈아 부딪히는 대목은 어느 개정판이 더 균형 잡혔는지를 둘러싼 논쟁의 핵심이다.
빈 초기의 불안한 나날 속에서도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받게 될 교향곡을 완성했다.
- 현악의 트레몰로 위로 떠오르는 첫 호른 신호는 브루크너 자신이 '중세 도시 위로 날이 밝는 소리'라 설명했다고 전해지며, 이 교향곡에 '로맨틱'이라는 별명을 안겼다.
- 브루크너가 직접 '사냥(Jagd)'이라 부른 스케르초는 사냥 나팔 신호와 달리는 듯한 리듬으로 누구나 쉽게 따라갈 수 있다.
- 종결부에서 도입부의 호른 주제가 승리에 찬 모습으로 돌아오는 대목은 교향곡 전체의 구조가 완결되는 쾌감을 준다.
- 느린 악장의 낮은 현이 만드는 장송곡 같은 발걸음은 일부 연구자들이 그의 이른 상실과 연결짓지만, 그의 직접적인 증언은 남아 있지 않다.
V. 교향곡의 투쟁 · 1875–1884 (51–60세)
(개정) 주변 제자들의 조언과 자신의 불안이 겹쳐 완성한 교향곡을 거듭 고쳐 쓰는 습관이 생겼다. 그 결과 여러 교향곡에 서로 다른 판본이 남았고, 오늘날까지 학자들 사이에서 '브루크너 문제'로 불리며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제자) 제자 페르디난트 뢰베와 프란츠 샬크는 연주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악보에 허락 없이 손을 대기도 했는데, 이는 후대에 어느 판본이 '진짜' 브루크너인지를 둘러싼 논쟁의 씨앗이 되었다. (실패) 1877년 빈에서 열린 교향곡 3번(바그너에게 헌정한 개정판) 초연은 참담했다. 연주가 끝나기도 전에 많은 관객이 자리를 떴고, 한슬리크는 지면에서 거침없이 조롱했다. 그날의 상처는 오래 남았다. (돌파) 1884년 라이프치히에서 아르투어 니키슈가 지휘한 교향곡 7번 초연이 마침내 분명한 성공을 거두었다. 소문은 빠르게 독일 전역과 국외로 퍼져 나갔다. (추모) 7번의 느린 악장은 병약해진 바그너를 염두에 두고 바그너 튜바 네 대를 위한 음향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었다. 작곡 중 바그너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그 충격 속에서 클라이맥스에 심벌즈 타격을 더했다고 전해지는데, 이 대목이 실제 브루크너의 손길인지는 지금도 연구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남아 있다.
라이프치히에서 니키슈의 지휘로 처음 분명한 성공을 거둔 교향곡이며, 느린 악장에는 바그너를 향한 추모가 깃들어 있다.
- 첼로가 2분 가까이 홀로 선율을 펼친 뒤에야 오케스트라 전체가 합류하는 도입부는, 브루크너가 꿈에서 이 주제를 들었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연주자들 사이에 자주 오간다.
- 느린 악장의 클라이맥스에 등장하는 심벌즈와 트라이앵글 타격은 바그너의 사망 소식을 들은 직후 더해졌다고 전해지는데, 실제 브루크너의 의도인지는 지휘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려 생략하는 경우도 있다.
- 바그너 튜바 네 대가 만드는 어둡고 둥근 음색이 느린 악장 전체를 감싸는데, 이 악기 자체가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점을 떠올리며 들으면 더 또렷하게 다가온다.
- 마지막 악장은 브루크너답지 않게 비교적 간결하게 주제를 정리해, 그의 교향곡을 처음 듣는 사람에게 흔히 추천되는 입문곡이다.
교향곡과 나란히 작곡된 종교적 대작으로, 그는 훗날 이 곡이 미완성 9번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을 대신할 수 있다고 직접 제안했다.
- 트럼펫과 현이 한꺼번에 터뜨리는 도입부의 C장조 팡파르는, 늘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듯한 교향곡의 시작들과 달리 거침없는 환희를 드러낸다.
- '주님, 내가 당신을 믿었습니다(In te, Domine, speravi)' 대목은 서로 다른 성부가 같은 가락을 뒤쫓는 촘촘한 푸가(돌림노래처럼 뒤따라 들어오되 음높이를 바꾸어 부르는 대위법 악곡)로 짜여, 그가 수십 년간 다져온 대위법 훈련을 보여준다.
- 브루크너는 생전에 미완성 교향곡 9번이 끝내 완성되지 못한다면 이 테데움을 대신 마지막 악장으로 연주해도 좋다고 직접 제안했으며, 이 제안은 훗날 실제 여러 연주에서 받아들여졌다.
- 곡 중간 소프라노 독창이 짧게 등장해 주위의 거대한 합창과 대비되는 고요한 순간을 만든다.
VI. 인정과 영광 · 1884–1891 (60–67세)
(명성) 7번의 성공을 기점으로 명성이 오스트리아와 독일 전역에 퍼졌고, 차츰 다른 나라에서도 그의 교향곡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존경) 젊은 구스타프 말러는 빈 대학에서 열린 브루크너의 강의를 청강하며 깊이 존경했고, 훗날 지휘자로서 그의 교향곡을 적극적으로 알렸다. 두 사람의 관계는 가까운 사교보다는 조용한 상호 존중에 가까웠다. (명예) 1891년 빈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시골 오르가니스트 출신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받아온 무시를 떠올리며 눈물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습성) 동시대인들은 그의 독특한 버릇을 여럿 기록했다. 창문이나 벽돌, 묵주 알을 끝없이 세는 강박적 습관, 지나친 시간 엄수, 하루도 거르지 않는 기도, 명성이 높아져도 변치 않은 소박한 태도가 그것이다. (쇠약) 말년으로 갈수록 심장과 신장이 나빠졌다는 증언이 남아 있고, 작곡 속도도 눈에 띄게 느려졌다.
거듭된 성공과 명예 속에서 완성한 가장 방대한 교향곡으로, 그의 야심과 신앙이 동시에 담겼다.
- 1악장의 낮은 현과 호른이 만드는 불길한 동기를 브루크너는 편지에서 '죽음의 시계(Totenuhr)'라 불렀다고 전해지는데, 스스로 자기 음악의 이미지를 직접 밝힌 드문 경우다.
- 스케르초는 브루크너 자신이 편지에서 주제를 '독일 사람 미헬'이라 부를 만큼 투박하고 힘찬 성격인데, 그 사이에 등장하는 하프를 쓴 트리오 부분은 뜻밖에 섬세하다.
- 느린 악장은 그의 가장 긴 아다지오로, 하프 두 대와 바그너 튜바가 함께 어우러져 유독 투명하고 빛나는 음색을 만든다.
- 마지막 악장에서 앞선 모든 악장의 주제가 한꺼번에 다시 등장해 거대하게 맺는 대목은 분석가들 사이에서 그의 가장 야심 찬 설계로 자주 언급된다.
VII. 아홉 번째 교향곡과 죽음 · 1891–1896 (67–72세)
(은퇴) 1894년 건강이 나빠지며 빈 대학 강의를 그만두었고, 이후로는 빈의 집에서 조용히 작업을 이어갔다. (마지막곡) 남은 힘을 모두 교향곡 9번에 쏟았다. 이 곡을 '사랑하는 하나님께(dem lieben Gott)' 바치겠다고 주치의에게 말했다고 전해지는데, 세 악장을 완성한 뒤 마지막 악장에 매달리다 끝내 마무리하지 못했다. (죽음) 1896년 10월 11일 빈에서 세상을 떠났다. 교향곡 9번의 마지막 악장은 스케치 더미로 남았다. (안식) 유언에 따라 어린 시절 그를 품어준 장크트플로리안 수도원, 자신이 수없이 연주했던 그 거대한 오르간 아래에 묻혔다. 고아가 되어 떠나온 자리로 돌아간 셈이었다. (유산) 말러를 비롯한 후배들의 노력으로 사후 명성은 오히려 더 커졌고, 여러 판본으로 남은 교향곡들은 지금도 학자와 연주자들 사이에서 끝나지 않은 논의의 대상이다.
말년의 쇠약한 몸으로 '사랑하는 하나님께' 바친 마지막 교향곡으로, 끝내 마지막 악장을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 호른이 트레몰로 위에서 조용히 제시하는 1악장의 도입부는 그의 교향곡 가운데 가장 서늘하다는 평을 듣는다.
- 스케르초의 거칠고 끊임없이 몰아치는 리듬은 이전의 스케르초들보다 한층 현대적이고 날카롭게 들려 첫 청자를 놀라게 한다.
- 그가 마지막으로 완성한 음악인 느린 악장에는 교향곡 7·8번과 미사곡의 선율 조각이 다시 등장하는데, 많은 이들이 의식적인 작별의 몸짓으로 듣는다.
- 마지막 악장은 스케치 더미로 끊겨 있어, 오늘날 연주는 아다지오로 마치거나 그의 제안대로 테데움을 이어 붙이거나 학자들이 복원한 종결부를 시도하는 등 저마다 다른 길을 선택한다.
덜 알려진 이야기
(계산) 브루크너는 창문이나 묵주 알, 심지어 별을 끝없이 세는 강박, 곧 수 세기 집착(numeromania)으로 유명했다. 제자 아우구스트 괼러리히 등 측근들의 회고에 이런 모습이 자주 나오는데, 위대한 교향곡 작가라는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전기에서 가볍게만 다뤄졌다. (두개골) 1888년 빈 중앙묘지로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유해를 이장할 때 브루크너가 그 자리에 있었고, 두 사람의 두개골을 직접 만지고 입을 맞췄다는 목격담이 동시대 신문과 참석자들의 기록에 남아 있다. 섬뜩하게 들리지만 당시에는 존경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이 오늘날 독자에게는 낯설게 느껴진다. (기록벽) 그는 작곡하면서 악보 여백에 그날의 날짜와 시각, 심지어 완성한 마디 수까지 꼼꼼히 적어 두는 버릇이 있었다. 이런 메모는 그의 불안한 성격을 보여주는 사료로 후대 학자들이 작품의 작곡 시기를 정밀하게 재구성하는 데 요긴하게 쓰였지만, 정작 당대에는 그저 괴짜의 습관으로 치부되어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용어 노트 📚🔎
교향곡
한자로는 交響曲, 교(交)는 서로 어울린다는 뜻이고 향(響)은 울림이니, '서로 어울려 울리는 곡'이라는 말이다. 영어 심포니(symphony)도 그리스어로 함께(syn)와 소리(phōnē)가 합쳐진 말이다. 음악에서는 보통 네 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관현악곡을 가리킨다. 학급마다 다른 노래를 부르다가 신호에 맞춰 한 번에 합쳐 부르는 조회 시간처럼, 교향곡의 각 악장도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결국 하나의 큰 흐름으로 묶인다.
스케르초
이탈리아어로 '장난, 익살'이라는 뜻이다. 음악에서는 보통 춤곡 미뉴에트를 대신해 자리잡은, 빠르고 장난스러운 악장을 가리킨다.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하는 술래잡기처럼 활기차고 예측하기 어려운 리듬의 변화가 특징이다.
아다지오
이탈리아어 '아다지오(ad agio)'는 '편안하게, 여유롭게'라는 뜻에서 왔다. 음악에서는 느린 악장, 또는 느리게 연주하라는 지시어를 가리킨다. 조용한 미술관을 천천히 걸으며 그림 하나하나에 오래 눈길을 두는 것과 비슷한 속도감이다.
대위법
한자로 對位法, 대(對)는 마주한다는 뜻이고 위(位)는 자리라는 뜻이니 '자리를 맞세우는 법'이다. 라틴어로는 '점에 대한 점(punctus contra punctum)'이라 불렀다. 음악에서는 서로 다른 독립된 가락을 동시에 쌓아 올리는 작곡 기법을 말한다. 여러 친구가 각자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도 서로의 말을 끊지 않고 전체적으로 뜻이 통하게 만드는 대화와 비슷하다. 일반 글에서는 '대위법적'이라는 말이 서로 대조되는 요소가 동시에 균형을 이루는 상황을 가리키는 비유로도 쓰인다.
바그너 튜바
작곡가 바그너가 자신의 음악에 필요한 소리를 위해 제작자에게 특별히 주문해 만든 악기라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음악에서는 호른과 튜바를 섞은 듯한 구조로, 어둡고 둥근 음색을 내는 금관악기를 가리킨다. 호른보다 몸집이 크고 목소리가 낮은 사촌 같은 악기로, 트롬본과 부드럽게 섞이는 소리를 낸다.
테데움
라틴어 찬가의 첫 구절 '테 데움 라우다무스(Te Deum laudamus)', 곧 '당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에서 따온 이름이다. 음악에서는 이 라틴어 찬가 가사에 합창과 관현악을 붙여 축하와 감사의 자리에서 연주하는 대규모 성가곡을 가리킨다. 학교가 큰 대회에서 우승한 뒤 전교생이 함께 부르는 응원가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코랄
독일어 코랄(Choral)은 라틴어 '칸투스 코랄리스(cantus choralis)', 곧 '회중이 함께 부르는 노래'에서 왔다. 음악에서는 교회에서 신도들이 다 함께 부르기 쉽도록 만든 단순한 찬송가 선율, 혹은 그 선율을 네 성부로 화성을 붙인 악곡을 가리킨다. 예배 시간에 모두가 익히 아는 가락을 함께 부르는 것과 같은, 쉽고 친숙한 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