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atles
1962년부터 1970년까지 여덟 해의 녹음 기간 동안, 리버풀의 네 청년은 대중음악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다시 정했다.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멤버와 동료들 ⏳🌊
- 멤버존 레넌
리듬 기타와 보컬로 밴드를 처음 만든 사람이며, 날카로운 재치와 유년의 상실을 곡에 담았다.
- 멤버폴 매카트니
베이스와 보컬, 피아노를 맡아 선율 감각과 스튜디오 기획으로 후기 비틀스의 방향을 이끌었다.
- 멤버조지 해리슨
리드 기타를 맡았고 시타르를 록에 들였으며, 후기에는 「섬싱」 같은 곡으로 작곡가로 섰다.
- 멤버링고 스타
1962년 합류한 드러머로, 곡에 맞춘 절제된 연주와 느긋한 유머로 네 사람의 균형을 잡았다.
- 프로듀서조지 마틴
팔로폰에서 그들을 받아들였고, 클래식 편곡과 녹음 기술로 그들의 상상을 소리로 옮겼다.
- 영향밥 딜런
1964년 뉴욕에서의 만남 이후 그의 고백적인 노랫말이 레넌의 곡 쓰기를 내면으로 돌려놓았다.
I. 리버풀의 소년들 · 1940–1960
(결성) 1960년, 영국 리버풀에서 결성됐다. 비틀스라는 이름을 굳힌 것은 그해 여름이었지만, 뿌리는 몇 해 전 존 레넌이 동네 친구들과 꾸린 스키플 그룹 쿼리멘에 있었다. 리버풀은 전쟁의 폭격 자국이 남은 노동계급의 항구였고, 대서양을 오가는 선원들이 미국 음반을 들여오는 창구이기도 했다. (존) 존 레넌은 1940년 10월 리버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앨프리드는 배를 타느라 집을 비웠고, 레넌은 어머니 줄리아와도 떨어져 이모 미미의 집에서 자랐다. 줄리아는 아들에게 밴조 코드를 가르쳐 준 사람이었으나 1958년 7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레넌은 훗날 이 상실을 여러 곡에 담았다. (폴) 폴 매카트니는 1942년 6월에 태어났다. 아버지 짐은 젊은 시절 재즈 밴드를 이끈 면화 판매원이었고, 조산사였던 어머니 메리는 1956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1957년 7월 울턴의 교회 축제에서 쿼리멘을 본 열다섯 살 매카트니가 기타를 조율하고 「트웬티 플라이트 록」을 쳐 보이자 레넌은 그를 밴드에 들였다. 어머니를 잃었다는 공통점이 둘을 이었다고 두 사람 모두 회고했다. (조지) 조지 해리슨은 1943년 2월 버스 운전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매카트니의 학교 후배였던 그는 1958년 초 버스 2층에서 기타곡 「론치」를 쳐 보이고 합류했다. 레넌의 미술학교 친구 스튜어트 서트클리프가 그림을 판 돈으로 베이스를 사서 들어왔고, 1960년 8월 함부르크행을 앞두고 드러머 피트 베스트가 가세했다.
II. 함부르크의 밤 · 1960–1962
(함부르크) 1960년 8월, 다섯 명은 서독(오늘날 독일) 함부르크의 유흥가 장크트파울리로 건너갔다. 클럽 주인은 밤마다 여러 시간씩 연주하게 했고, 그들은 영화관 뒤편의 창고 같은 방에서 잤다. 관객을 붙잡아 두려고 곡을 늘이고 몸을 흔들던 그 밤들이 무대의 체력과 레퍼토리를 길렀다. 첫 체류는 열일곱 살 해리슨이 미성년자로 추방되면서 끝났다. (아스트리트) 함부르크에서 그들은 사진가 아스트리트 키르히헤르와 그 친구들을 만났다. 그가 찍은 흑백 사진, 그리고 그 무리의 앞머리를 내린 머리 모양은 훗날 비틀스의 얼굴이 되었다. 서트클리프는 키르히헤르와 약혼하고 1961년 밴드를 떠나 그림으로 돌아갔고, 베이스는 매카트니가 넘겨받았다. 서트클리프는 1962년 4월 뇌출혈로 스물한 살에 세상을 떠났다. 레넌은 가장 가까운 친구를 잃었다. (캐번) 리버풀로 돌아온 밴드는 1961년부터 지하 클럽 캐번에서 점심과 저녁 무대를 거듭했다. 그해 11월 음반 가게를 운영하던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공연을 보러 왔고, 이듬해 1월 매니저가 되었다. 그는 가죽 재킷을 정장으로 바꾸게 하고 무대 인사와 곡 순서를 다듬었다. 데카 오디션에서는 떨어졌는데, 담당자가 기타 그룹은 한물갔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링고) 1962년 6월 EMI 산하 팔로폰의 프로듀서 조지 마틴이 그들을 시험했다. 8월 밴드는 베스트를 내보내고 로리 스톰 앤 더 허리케인스의 드러머 링고 스타를 들였다. 교체의 이유를 두고는 지금까지 설명이 엇갈린다. 1940년 7월 리버풀 딩글에서 태어난 스타는 어린 시절 오랜 병원 생활을 했다고 스스로 회고했고, 느긋한 유머로 곧 네 사람의 균형추가 되었다. 같은 달 레넌은 신시아 파월과 결혼했다.
함부르크와 캐번에서 수없이 불러 몸에 밴 곡이다. 밤무대에서 단련된 목청이 첫 앨범의 마지막 순간에 그대로 담겼다.
- 1963년 2월 11일 하루 녹음의 마지막 곡이었다. 감기로 목이 상한 레넌이 한 번밖에 못 부를 것을 안 마틴이 맨 끝에 배치했고, 첫 테이크가 그대로 실렸다 — 갈라지고 쉰 목소리의 질감을 들어 보라.
- 곡은 세 개의 화음만 되풀이하는 단순한 틀이다. 그 위에서 매카트니의 베이스와 베스트 후임 스타의 드럼이 쉬지 않고 밀어붙이는 힘이 곡을 끌고 간다.
- 마지막 절 직전, 세 사람이 '아' 소리를 한 사람씩 높이 쌓아 올리는 대목이 있다. 화음이 완성되는 순간 레넌의 외침이 터진다.
- 초기 스테레오 판은 악기와 목소리가 좌우로 갈라져 있다. 헤드폰 한쪽씩 들으면 사실상 라이브 그대로 녹음된 연주가 드러난다.
- 1963년 11월 왕실 버라이어티 공연에서 레넌이 보석 농담을 던진 직후 부른 곡이 이것이었다.
III. 비틀마니아 · 1962–1964
(데뷔) 1962년 10월 첫 싱글 「러브 미 두」가 영국 차트 17위에 올랐다. 두 번째 싱글 「플리즈 플리즈 미」는 마틴의 권유로 템포를 올려 다듬은 곡이었고, 1963년 초 여러 차트의 정상에 올랐다. 같은 이름의 첫 앨범은 1963년 2월 11일 하루 만에 녹음되었다. 레넌–매카트니라는 공동 작곡 명의는 둘이 일찍 맺은 약속이었고, 초기에는 실제로 마주 앉아 함께 쓰는 일이 많았다. (열광) 1963년 가을 런던 팰러디엄 텔레비전 출연을 계기로 신문들은 비틀마니아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11월 왕실 버라이어티 공연에서 레넌은 비싼 좌석의 관객에게 박수 대신 보석을 흔들어 달라는 농담을 던졌다. 노동계급 억양을 숨기지 않는 재치는 음악만큼 새로웠다. 그해 레넌과 매카트니는 롤링 스톤스에게 「아이 워너 비 유어 맨」을 건넸고, 스톤스는 이 곡으로 첫 톱20 히트를 얻었다. (미국) 1964년 2월 「아이 원트 투 홀드 유어 핸드」가 미국 차트 1위에 올랐고, 9일의 「에드 설리번 쇼」 출연은 약 7,300만 명이 본 것으로 집계되었다. 4월 첫 주에는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부터 5위까지가 모두 비틀스 곡이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척 베리, 모타운 음반을 따라 부르며 자란 청년들이 그 음악을 되돌려 미국에 판 셈이었다. (영화) 같은 해 리처드 레스터 감독의 영화 「하드 데이스 나이트」가 개봉했다. 해리슨이 연주한 리켄배커 12현 기타의 찰랑이는 소리는 미국 밴드 버즈의 사운드에도 영향을 주었다. 다만 엡스타인이 맺은 미국 머천다이징 계약에서 밴드 몫이 10퍼센트에 그친 일은 경험 없는 매니저의 대표적 실수로 꼽힌다.
미국 시장의 문을 연 곡이다. 레넌과 매카트니가 마주 앉아 피아노로 함께 쓴, 초기 공동 작곡의 전형이다.
- 비틀스가 처음으로 4트랙 녹음기로 녹음한 곡이다. 기본 연주 위에 손뼉 소리가 따로 덧입혀져 박자를 단단히 받친다.
- 도입부 기타는 박자를 비껴 들어오는 듯해서 처음 들으면 어디가 첫 박인지 헷갈린다. 그 짧은 긴장이 풀리며 노래가 시작된다.
- 레넌과 매카트니의 두 목소리가 서로 다른 음으로 나란히 흐르는 화음(하모니)을 따라가 보라. 높은 곳에서 함께 내지르는 순간들이 곡의 들뜬 기분을 만든다.
- 중간의 다른 가락(브리지)에서는 갑자기 조용해지고 해리슨의 기타가 부드럽게 깔린다. 그 끝에서 다시 몰아치는 대비가 이 곡의 설계다.
- 1964년 2월 「에드 설리번 쇼」 첫 출연의 마지막 곡이었고, 그보다 앞선 1월 29일에는 파리에서 독일 시장용 독일어 가사판도 녹음했다.
IV. 무대를 떠나 스튜디오로 · 1965–1966
(피로) 1965년 비틀스는 영화 「헬프!」를 찍고, 8월 뉴욕 셰이 스타디움에서 5만 5천여 명 앞에 섰다. 비명이 너무 커서 자신들의 연주도 들리지 않았다고 멤버들은 여러 번 말했다. 6월 대영제국 훈장(MBE) 수훈이 발표되자 이에 항의해 훈장을 반납한 퇴역 군인들도 있었다. 레넌은 훗날 「헬프!」가 정말로 도움을 청하던 노래였다고 털어놓았다. (딜런) 1964년 뉴욕에서 만난 밥 딜런은 레넌의 곡 쓰기를 내면으로 돌려놓았다. 레넌은 「유브 갓 투 하이드 유어 러브 어웨이」에서 스스로 딜런 시기라 부른 고백조를 시도했다. 매카트니는 현악 사중주 반주의 「예스터데이」를 홀로 불렀고, 그해 12월의 《러버 솔》에서 해리슨은 인도 악기 시타르를 「노르웨이의 숲」에 들였다. 연애와 춤에 머물던 노래는 기억과 불안, 관계의 미묘함으로 넓어졌다. (실험) 1966년 앨범 《리볼버》에서 마틴과 젊은 엔지니어 제프 에머릭은 마이크를 악기에 바짝 붙이고, 테이프를 거꾸로 돌리고, 목소리를 회전 스피커에 통과시켰다. 레넌과 해리슨은 이 무렵 LSD를 경험했고, 해리슨은 인도 철학과 라비 샹카르의 음악에 빠져 시타르를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해리슨의 「택스맨」은 고소득자에게 매기던 당시 영국의 초고율 세금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이었다. (종언) 그해 투어는 위험해졌다. 3월 런던 신문 인터뷰에서 레넌이 비틀스가 예수보다 인기 있다고 한 대목이 8월 미국에 퍼지자 남부 일부 방송국이 음반 불태우기를 벌였다. 7월 필리핀에서는 대통령 부인의 초청 행사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 출국했다. 8월 29일 샌프란시스코 캔들스틱 파크 공연을 끝으로 그들은 유료 콘서트를 다시 열지 않았다.
투어의 피로와 새로운 경험이 스튜디오 실험으로 흘러든 앨범이다. 무대에서 재현할 수 없는 소리를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만들었다.
- 영상으로 고른 마지막 곡 「투모로 네버 노스」는 거의 한 화음 위에 머문다. 스타의 독특한 반복 드럼 위로, 매카트니가 집에서 만든 테이프 고리를 되풀이 재생한 소리(테이프 루프)가 갈매기 울음처럼 오간다.
- 같은 곡 후반 레넌의 목소리는 해먼드 오르간용 회전 스피커(레슬리 스피커)를 통과시켜 멀리서 울려오는 듯 흔들린다. 레넌은 산꼭대기의 수도승처럼 들리길 원했다고 전해진다.
- 「엘리너 릭비」에는 비틀스 멤버가 악기를 연주하지 않는다. 현악 8중주를 에머릭이 마이크를 악기에 바짝 붙여 녹음해 거칠고 날 선 현 소리를 얻었다.
- 「아임 온리 슬리핑」의 기타 솔로는 해리슨이 거꾸로 재생될 것을 계산해 연주한 것이다. 소리가 빨려 들어가듯 시작하는 질감을 들어 보라.
- 이 앨범을 위해 EMI 기술자 켄 타운센드가 목소리를 자동으로 겹치는 장치(더블 트래킹)를 만들었다. 레넌의 목소리가 유난히 두툼하게 들리는 곡이 많은 이유다.
V. 페퍼 상사의 해 · 1967–1968
(유년) 투어를 멈춘 뒤 넉 달 가까이 녹음한 끝에, 1967년 2월 「스트로베리 필즈 포에버」와 「페니 레인」이 한 싱글의 양면으로 나왔다. 두 곡 모두 리버풀의 어린 시절 장소를 불러냈다. 레넌의 곡이 이모 집 근처 구세군 아동 보호시설 정원에 대한 몽롱한 기억이라면, 매카트니의 곡은 버스 정류장 주변 풍경을 밝은 색으로 그렸다. (페퍼) 1967년 6월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가 나왔다. 가상의 밴드가 공연한다는 틀은 매카트니의 제안이었고, 4트랙 녹음기의 트랙을 합치고 비워 가며 소리를 겹겹이 덧입혔다(오버더빙). 발매 사흘 뒤 지미 헨드릭스는 런던 공연을 그 타이틀곡으로 열었고, 객석의 매카트니와 해리슨이 이를 지켜보았다. 같은 무렵 EMI 스튜디오의 다른 방에서는 핑크 플로이드가 첫 앨범을 녹음하고 있었다. (상실) 8월 27일, 멤버들이 웨일스 뱅거에서 인도 수행자 마하리시 마헤시 요기의 강연을 듣던 사이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런던 자택에서 약물 과다 복용으로 숨졌다. 검시는 사고사로 결론지었다. 레넌은 훗날 그때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매니저 없이 만든 텔레비전 영화 「매지컬 미스터리 투어」는 그해 말 혹평을 받았다. (분열) 1968년 초 인도 리시케시 수행에서 그들은 수십 곡을 썼다. 돌아와서는 회사 애플을 세웠으나 경영은 금세 어지러워졌다. 레넌은 오노 요코와 함께 지내며 그를 녹음실에 데려왔다. 더블 앨범 《더 비틀스》(통칭 화이트 앨범) 녹음 중 스타는 자신만 겉돈다고 느껴 2주 가까이 밴드를 떠났다가 돌아왔고, 에머릭도 긴장된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그 사이 매카트니가 부모의 이혼을 앞둔 레넌의 아들 줄리언을 생각하며 쓴 「헤이 주드」가 애플의 첫 싱글로 나왔다.
어머니와 떨어져 자란 레넌의 유년 풍경이, 투어를 멈춘 밴드가 손에 넣은 무제한의 스튜디오 시간과 만난 곡이다.
- 첫머리의 플루트 같은 소리는 녹음 테이프를 재생하는 건반 악기(멜로트론)로 매카트니가 연주한 것이다.
- 레넌은 부드러운 밴드 버전과 금관·첼로가 들어간 무거운 버전을 하나로 이어 달라고 했다. 둘은 음높이와 빠르기가 달랐는데, 마틴과 에머릭이 테이프 속도를 조절해 맞췄다 — 약 1분 지점에서 소리가 갑자기 무겁고 탁해지는 이음매를 찾아보라.
- 스타의 드럼은 둔탁하게 눌린 소리로 녹음되었고, 거꾸로 재생한 심벌 소리가 곳곳에서 빨려 들어온다.
- 곡이 끝난 듯 소리가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오는 엔딩은 당시 싱글로는 드문 파격이었다. 되돌아온 부분에서는 해리슨이 연주한 인도 현악기 스와르만달과 뒤틀린 소리들이 어지럽게 섞인다.
매카트니가 부모의 이혼을 앞둔 어린 줄리언을 생각하며 쓴 곡으로 알려져 있다. 밴드 안의 긴장이 커지던 해에 나온, 위로의 화법을 지닌 노래다.
- 런던 트라이던트 스튜디오의 8트랙 녹음기로 녹음했다. 매카트니의 피아노와 목소리로만 시작해 절이 지날 때마다 기타, 탬버린, 드럼이 하나씩 더해지는 쌓아 올림을 따라가 보라.
- 길이가 7분 11초로, 당시 라디오용 싱글로는 이례적이었다. 후반 4분가량은 뜻 없는 음절을 되풀이하는 긴 마무리(코다)다.
- 그 코다에 36명의 오케스트라가 합류하고, 단원들은 손뼉과 합창까지 맡았다. 겹겹이 커지는 소리 위로 매카트니가 고음으로 즉흥적인 외침을 얹는다.
- 매카트니는 가사 한 줄을 임시로 적어 둔 것이라 바꾸려 했으나 레넌이 그대로 두라고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공연에서 그 대목에 이르면 레넌을 떠올린다고 말했다.
VI. 마지막 녹음 · 1969–1970
(겟백) 1969년 1월 매카트니는 기본으로 돌아가 라이브처럼 녹음하자고 제안했다. 런던 트위크넘 영화 촬영소의 춥고 이른 일정 속에서 해리슨은 1월 10일 그만두겠다며 나갔다가, 촬영 장소를 옮기는 등의 조건을 걸고 며칠 뒤 돌아왔다. 오르간 연주자 빌리 프레스턴이 합류하자 분위기가 풀렸고, 1월 30일 애플 사옥 옥상에서 마지막 공개 공연을 했다. (돈) 애플의 재정은 기울어 갔다. 레넌, 해리슨, 스타는 롤링 스톤스의 사업을 맡았던 앨런 클라인을 경영자로 원했고, 매카트니는 3월에 결혼한 린다 이스트먼의 집안 변호사들을 원했다. 같은 시기 레넌–매카트니 곡의 저작권을 관리하던 노던 송스가 ATV에 넘어갔다. 레넌은 3월 지브롤터에서 오노 요코와 결혼했고, 이 무렵 그의 노래는 점점 두 사람의 삶과 평화 운동을 향했다. (애비로드) 그럼에도 그해 여름 네 사람은 마틴에게 예전처럼 만들자고 청해 《애비 로드》를 녹음했다. 2면은 짧은 곡들을 끊지 않고 이은 메들리로 채웠다. 해리슨의 「섬싱」과 「히어 컴스 더 선」은 그가 레넌–매카트니에 견줄 작곡가가 되었음을 보여 주었다. 8월 20일은 네 사람이 함께 스튜디오에 있었던 마지막 날로 기록되어 있다. 9월 레넌은 멤버들에게 탈퇴를 통보했으나 사업상의 이유로 공표하지 않았다. (해체) 1970년 4월 매카트니는 첫 솔로 앨범에 딸린 문답 형식의 보도 자료에서 비틀스와 다시 작업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고, 신문들은 이를 해체 선언으로 받아들였다. 5월 필 스펙터가 1월 녹음을 정리한 《렛 잇 비》가 나왔는데, 매카트니는 「더 롱 앤 와인딩 로드」에 덧입힌 현악과 합창에 반대했다. 12월 31일 매카트니는 동업 관계 해소를 위해 런던 고등법원에 소송을 냈고, 법원은 1971년 3월 재산 관리인을 지정했다.
사업 분쟁 한가운데서 네 사람이 마지막으로 함께 녹음한 앨범이다. 다툼 대신 음악을 남기자는 마음이 들리는 듯한 마무리다.
- 영상으로 고른 첫 곡 「컴 투게더」는 매카트니의 미끄러지는 베이스 리프와 스타의 낮은 북(탐탐) 연타가 그루브를 만든다. 매 소절 사이 레넌의 속삭임과 손뼉 소리가 메아리처럼 지나간다.
- 해리슨은 갓 나온 전자 건반 악기 무그 신시사이저를 들여왔다. 「히어 컴스 더 선」 중반과 「비코즈」에서 그 매끄럽고 낯선 음색을 들을 수 있다.
- 2면은 미완성 곡 조각들을 끊지 않고 이어 붙인 약 16분의 메들리다. 곡과 곡 사이 이음매에서 분위기가 어떻게 바뀌는지 들어 보라.
- 「디 엔드」에는 스타의 비틀스 시절 유일한 드럼 솔로가 있고, 이어 매카트니, 해리슨, 레넌이 두 마디씩 돌아가며 기타 솔로를 세 바퀴 주고받는다.
- 그 뒤 침묵이 흐르고 23초짜리 짧은 곡 「허 머제스티」가 숨은 트랙으로 붙어 있다.
VII. 넷 이후 · 1970–2025
(솔로) 넷은 각자의 길을 갔다. 해리슨의 세 장짜리 《올 싱스 머스트 패스》는 비틀스 시절 쌓아 둔 곡을 한꺼번에 풀어냈고, 1971년 그가 연 방글라데시 구호 콘서트에는 스타도 함께했다. 레넌은 뉴욕으로 옮겨 정치적인 노래를 썼으며, 1974년 11월 엘튼 존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에 올라 함께 노래한 것이 그의 마지막 큰 무대가 되었다. 매카트니는 린다와 윙스를 꾸렸다. 동업 관계는 1974년 말 서류상으로 정리되었다. (상실) 1980년 12월 8일 레넌은 뉴욕 자택 앞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 마흔 살이었다. 1990년대 중반 남은 세 사람은 「앤솔러지」 작업에서 레넌이 남긴 카세트 데모에 연주를 입혀 「프리 애즈 어 버드」와 「리얼 러브」를 냈다. 해리슨은 2001년 11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복원) 2023년 11월, 비틀스의 마지막 곡으로 소개된 「나우 앤드 덴」이 나왔다. 피터 잭슨의 다큐멘터리 「겟 백」을 위해 개발된 기계 학습 기술이 레넌의 낡은 데모에서 피아노와 목소리를 분리해 냈고, 매카트니와 스타가 해리슨이 1995년 녹음해 둔 기타와 함께 곡을 완성했다. 이 곡은 2025년 그래미 최우수 록 퍼포먼스 상을 받았다. (유산) 그들이 영국에서 낸 정규 앨범은 열두 장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비틀스는 직접 곡을 쓰는 밴드, 스튜디오를 악기처럼 쓰는 녹음, 앨범을 한 편의 작품으로 듣는 습관을 대중음악의 기본값으로 만들었다. 함부르크 밤무대의 체력과 리버풀 소년들의 상실이 그 모든 실험의 바탕에 있었다.
덜 알려진 이야기
링고 스타가 레넌, 매카트니, 해리슨과 처음 함께 녹음한 것은 1962년이 아니라 1960년 10월 함부르크에서였다. 허리케인스의 가수 루 월터스가 작은 녹음 부스에서 레코드를 찍을 때 세 사람과 스타가 반주를 맡았다. 그때 만든 음반은 대부분 사라져, 마크 루이슨 같은 연구자의 세션 기록이 정리되기 전까지 전기의 각주에 머물렀다. 데카가 비틀스를 놓친 일은 유명하지만, 바로 그 데카의 딕 로를 롤링 스톤스로 이끈 사람이 해리슨이었다는 사실은 덜 알려졌다. 1963년 5월 리버풀의 음악 경연 심사석에서 해리슨이 런던의 스톤스를 보러 가 보라고 권했고, 데카는 곧 그들과 계약했다. 비틀스를 거절한 레이블이라는 이야기가 너무 유명해 이 연결은 자주 묻혔다. 밴드를 떠난 서트클리프는 함부르크 미술대학에서 조각가 에두아르도 파올로치에게 배웠고, 파올로치는 그를 가장 뛰어난 학생 가운데 하나로 평가했다. 다섯 번째 비틀이라는 별명에 가려졌지만, 그는 스스로 화가가 되기를 택한 사람이었다. 오늘날 순례지가 된 애비 로드 스튜디오의 원래 이름은 EMI 스튜디오였다. 앨범 《애비 로드》가 크게 성공한 뒤인 1970년에야 거리 이름을 따 공식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용어 노트 📚🔎
스키플
(록에서) 1950년대 영국 10대 사이에 크게 유행한 소박한 음악으로, 미국의 포크와 블루스를 통기타와 집안 살림으로 만든 악기로 연주했다. 빨래판을 손톱으로 긁어 박자를 내고, 찻상자에 빗자루 막대와 줄을 달아 베이스 소리를 냈다. 비싼 악기 없이도 누구나 밴드를 할 수 있어서, 레넌의 쿼리멘처럼 수많은 학생 밴드가 여기서 시작했다. 교실에서 필통과 책상을 두드리며 친구들과 노래 박자를 맞추던 일을 떠올리면 된다 — 그것도 작은 스키플 밴드다.
시타르
(말뜻) 페르시아어 세타르에서 온 이름으로, 세(se)는 셋, 타르(tar)는 줄이라는 뜻이다. 다만 오늘날의 시타르는 줄이 스무 개 가까이 된다. (록에서) 목이 긴 인도 고전음악의 현악기다. 손가락으로 튕기는 줄 아래에 저절로 따라 울리는 줄(공명줄)이 따로 있어서, 한 음을 치면 반짝이는 잔향이 길게 번진다. 해리슨이 「노르웨이의 숲」에서 록 음반에 처음 들였고, 뒤에 라비 샹카르에게 정식으로 배웠다. 피아노의 오른쪽 페달을 밟은 채 피아노에 대고 크게 소리치면 줄들이 따라 웅웅 울리는데, 공명줄이 바로 그런 원리다.
테이프 루프
(록에서) 녹음테이프 한 토막의 끝과 끝을 붙여 고리처럼 만든 것으로, 재생하면 같은 소리가 끝없이 되풀이된다. 「투모로 네버 노스」에서는 매카트니가 만든 여러 개의 고리를 녹음기 여러 대로 동시에 돌리고, 음량을 올렸다 내렸다 하며 섞어 낯선 소리 풍경을 만들었다. 게임 배경음악이 같은 구간을 계속 반복해서 들려주는 것과 비슷하다. (다른 데서는) 루프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에서 같은 명령을 정해진 만큼 되풀이하게 하는 반복문을 뜻한다.
오버더빙
(말뜻) 영어 over(위에)와 dub(소리를 입히다)가 합쳐진 말로, 이미 녹음된 소리 위에 새 소리를 덧입힌다는 뜻이다. (록에서) 먼저 기본 연주를 녹음해 두고, 나중에 노래나 다른 악기를 한 겹씩 더 녹음해 쌓는 방법이다. 비틀스는 트랙이 네 개뿐인 녹음기로 작업했기 때문에, 다 찬 트랙들을 하나로 합쳐 빈자리를 만들고 다시 쌓는 식으로 《서전트 페퍼》를 완성했다. 그림을 그릴 때 밑그림 위에 물감을 한 겹씩 덧칠해 가는 것과 같다. (다른 데서는) 더빙은 외국 영화나 만화의 목소리를 우리말 성우의 목소리로 바꿔 입히는 일을 가리키기도 한다.
더블 트래킹
(록에서) 같은 노래를 두 번 불러 겹쳐 녹음하면, 두 번이 미세하게 어긋나면서 목소리가 두툼하고 힘 있게 들린다. 이를 더블 트래킹이라 한다. 레넌이 같은 노래를 다시 부르는 일을 싫어하자, 1966년 EMI 기술자 켄 타운센드가 녹음기 두 대로 원래 목소리를 아주 조금 늦게 복사해 겹치는 자동 더블 트래킹(ADT)을 고안했다. 합창 시간에 친구와 둘이 같은 음을 부르면 혼자 부를 때보다 소리가 굵게 들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 둘의 박자가 완벽하게 똑같지 않아서 생기는 두께다.
멜로트론
(록에서) 건반마다 실제 악기 소리를 녹음한 테이프 띠가 붙어 있어서, 건반을 누르면 그 테이프가 재생되는 1960년대의 건반 악기다. 플루트나 현악기 소리를 사람 없이 낼 수 있었지만, 한 건반의 테이프는 8초 남짓이라 그 뒤엔 소리가 끊긴다. 「스트로베리 필즈 포에버」 첫머리의 플루트 같은 소리가 이것이다. 버튼을 누르면 미리 녹음된 소리가 나오는 장난감 사운드 패드를 떠올리면 된다 — 멜로트론은 오늘날 샘플러의 할아버지 격이다.
메들리
(말뜻) 섞음, 뒤섞인 싸움을 뜻하는 옛 프랑스어 medlee에서 온 말로, 여러 가지를 한데 섞은 것을 가리킨다. (록에서) 여러 곡을 쉬지 않고 이어 한 덩어리로 연주하는 형식이다. 《애비 로드》의 2면은 미처 완성하지 못한 짧은 곡들을 끊김 없이 이어 붙여 약 16분짜리 하나의 흐름으로 만들었다. 학예회에서 여러 동요를 중간에 멈추지 않고 이어 부르는 순서가 바로 메들리다. (다른 데서는) 수영에서는 한 선수나 한 팀이 네 가지 영법을 차례로 이어 헤엄치는 혼영을 영어로 메들리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