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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and

더 밴드 (1967–1999)

넷은 캐나다인, 하나는 아칸소 목화 농가의 아들이었다. 그들은 미국이 잊어 가던 옛 소리를 다시 불러냈다.

한눈에 보기 🔭💭

1. 뿌리미국 우드스톡 결성넷은 캐나다인호킨스의 호크스2. 딜런1966 야유 투어빅 핑크 지하실「더 웨이트」3. 정점갈색 앨범세 목소리『타임』 표지4. 균열작곡 저작권 갈등말리부 이주마지막 왈츠5. 상실마누엘 1986댄코 1999넷 모두 떠남6. 유산아메리카나 원형미드나이트 램블명예의 전당밴드1967–1999캐나다인 넷과 아칸소 사내 하나가 오래된 미국…
무대가 된 도시 🧭🗺️
N미국캐나다토론토1958–1965말리부1973–1976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멤버와 동료들 ⏳🌊

  • 멤버레번 헬름

    아칸소 출신 드러머이자 보컬로, 남부 억양의 목소리가 밴드의 정체성이었다.

  • 멤버로비 로버트슨

    기타리스트이자 주 작곡가로 밴드의 방향을 이끌었고, 저작권 문제로 레번과 오래 갈라섰다.

  • 멤버리처드 마누엘

    피아노와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를 맡았으나 1986년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 멤버릭 댄코

    높고 떨리는 목소리와 프렛리스 베이스로 밴드의 정서를 받쳤다.

  • 멤버가스 허드슨

    클래식 교육을 받은 건반·관악 주자로 밴드의 음악 선생이자 녹음 기술자였다.

  • 우정밥 딜런

    1965년 반주단으로 고용한 뒤 지하실 녹음과 투어, 마지막 왈츠까지 함께한 평생의 동반자였다.

YouTube에서 6곡 이어 듣기 ↗

I. 술집의 견습생들 · 1958–1965

(결성) 1967년, 미국 뉴욕주 우드스톡에서 결성됐다. 다만 다섯 사람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한 무대에 서 왔다. 넷은 캐나다 온타리오주 출신이고 한 사람만 미국 남부 아칸소주 사람이었다. 그들이 '더 밴드'라는 이름을 얻기까지는 10년 가까운 떠돌이 수업이 있었다. (아칸소) 드러머 레번 헬름은 1940년 아칸소주의 목화 농가에서 태어났다. 1958년 같은 아칸소 출신 로커빌리 가수 로니 호킨스를 따라 캐나다 토론토로 건너갔다. 호킨스는 고향보다 캐나다에서 더 대접받았고, 그의 반주단 호크스(The Hawks)는 토론토의 술집 거리를 근거지로 삼았다. (합류) 미국인 단원들이 하나둘 떠난 자리를 캐나다 소년들이 채웠다. 토론토에서 태어나 모호크족 어머니의 친척들 사이에서 여름을 보낸 로비 로버트슨이 열여섯 살에 기타를 들고 들어왔다. 담배 농장 지대에서 자란 릭 댄코가 베이스를, 스트랫퍼드 출신으로 레이 찰스를 우상으로 삼은 리처드 마누엘이 피아노와 노래를 맡았다. 마지막으로 교회 오르간과 클래식 교육을 받은 가스 허드슨이 들어왔다. 아들이 술집 악단에 들어가는 것을 걱정한 그의 부모를 안심시키려고, 나머지 단원들이 매주 그에게 음악 레슨비를 냈다고 전해진다. 허드슨은 오르간과 색소폰을 맡으며 실제로 밴드의 음악 선생 노릇을 했다. (독립) 호킨스는 엄격한 지휘관이었다. 술과 여자, 지각에 벌금을 매겼고 젊은 단원들은 점점 숨이 막혔다. 1964년 그들은 호킨스를 떠나 '레번 앤 더 호크스'로 독립했다. 블루스와 가스펠, 컨트리를 밤마다 몇 시간씩 연주하던 이 술집 시절이 훗날 그들 음악의 바탕이 됐다.

II. 야유와 지하실 · 1965–1968

(딜런) 1965년, 매니저 앨버트 그로스먼의 사무실에서 일하던 캐나다인 메리 마틴의 추천으로 밥 딜런이 그들을 찾았다. 딜런은 막 전기 기타를 들고 포크 무대를 등진 참이었고, 그 소리를 받쳐 줄 거친 악단이 필요했다. 호크스는 그해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북미와 호주, 유럽을 돌았다. (야유) 관객은 밤마다 야유를 퍼부었다. 1966년 5월 영국 맨체스터에서는 한 관객이 딜런을 향해 '유다'라고 외쳤다. 레번은 이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1965년 말 떠나 멕시코만의 석유 시추선에서 일했다. 남은 넷은 야유 속에서 오히려 더 세게 연주하는 법을 익혔다. (지하실) 1966년 7월 딜런이 오토바이 사고 뒤 우드스톡에 칩거하자 넷도 그 근처로 옮겼다. 웨스트소거티스의 분홍색 집, 일명 '빅 핑크'의 지하실에서 그들은 1967년 내내 딜런과 옛 민요와 새 노래를 녹음했다. 허드슨이 테이프를 돌린 이 녹음은 훗날 「베이스먼트 테이프」로 알려졌다. 큰 무대에서 쫓기듯 연주하던 이들이 처음으로 작은 방에서 서로의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연주하는 법을 배운 시간이었다. 그해 말 레번이 돌아왔다. (데뷔) 그로스먼의 주선으로 캐피톨과 계약한 그들은 프로듀서 존 사이먼과 함께 1968년 7월 「뮤직 프롬 빅 핑크」를 냈다. 이름은 동네 사람들이 그저 '그 밴드'라 부르던 데서 굳었다. 표지 그림은 딜런이 그렸고, 안쪽에는 멤버들이 부모·친척과 함께 찍은 사진을 실었다. 반항이 유행이던 시절에 윗세대를 끌어안은 이 앨범을 듣고 에릭 클랩턴은 크림을 그만둘 결심을 했다고 스스로 회고했다.

♪앨범 《뮤직 프롬 빅 핑크》 (Music from Big Pink)1968실황 「Chest Fever」 The Band · Wembley

딜런과 지하실에서 보낸 1년이 그대로 음반이 됐다. 시끄러운 투어 끝에 찾은 느리고 서로 귀 기울이는 합주가 사이키델릭 시대 한복판에 놓였다.

  • 이 카드의 영상 곡 「체스트 피버」의 도입에서 허드슨이 로리 오르간으로 바흐 풍의 장중한 즉흥을 펼친 뒤 무거운 반복 악절(리프)로 넘어간다. 라이브에서는 이 도입이 「더 제네틱 메서드」라는 독립된 즉흥곡으로 길어졌다.
  • 첫 곡 「티어스 오브 레이지」는 딜런과 마누엘이 함께 쓴 느린 곡이다. 마누엘의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앨범 전체의 무겁고 경건한 정서를 연다.
  • 마지막 곡 「아이 섀일 비 릴리스트」에서 마누엘은 목소리를 머리 쪽으로 띄워 내는 높은 소리(가성, 팔세토)로 노래한다. 그 위로 겹치는 댄코와 레번의 화음이 가스펠 성가대처럼 들린다.
  • 당시 유행하던 긴 기타 솔로와 화려한 음향 효과가 거의 없다. 기타·오르간·피아노가 서로 빈자리를 채우듯 주고받는 앙상블 자체를 들어 보면 이 앨범이 왜 동료 음악가들을 흔들었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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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웨이트 (The Weight)1968실황 The Band · Eric Clapton · 1994 명예의 전당

로버트슨이 쓴, 낯선 마을에서 부탁을 떠안는 나그네의 이야기다. 지하실 시절의 느긋한 합주와 세 목소리의 주고받기가 가장 잘 드러난 곡으로 밴드의 대표곡이 됐다.

  • 도입의 어쿠스틱 기타 몇 음 뒤로 피아노와 드럼이 들어오며 느리고 약간 흔들리는 걸음걸이 같은 박자를 만든다. 서두르지 않는 이 템포가 곡의 고단한 나그네 정서를 받친다.
  • 절은 대부분 레번이 남부 억양으로 부르고, 네 번째 절은 릭 댄코가 높고 떨리는 목소리로 이어받는다. 두 목소리의 결이 바뀌는 순간을 귀로 짚어 보자.
  • 후렴에서는 다른 목소리들이 엇갈리며 겹쳐 들어온다. 한 사람이 끝내기 전에 다음 사람이 끼어드는 이 방식은 남부 가스펠 성가대의 주고받기에서 온 것으로 평가된다.
  • 절이 끝날 때마다 레번이 박자 사이를 짧게 채우는 북 연타(드럼 필)를 넣는다. 크지 않지만 노래하듯 들리는 드럼이 레번 연주의 특징이다.
  • 영화 「마지막 왈츠」의 스테이플 싱어스 협연판에서는 메이비스 스테이플스와 아버지 팝스 스테이플스가 각각 한 절씩 맡아, 곡이 본래 가스펠에 얼마나 가까웠는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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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갈색 앨범 · 1969–1970

(풀하우스) 두 번째 앨범은 1969년 할리우드 언덕에 있는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저택의 풀하우스를 빌려 녹음했다. 스튜디오 대신 거실 같은 방에서 서로 마주 보고 연주했고, 존 사이먼이 다시 프로듀서와 관악기를 맡았다. 갈색 표지 때문에 '갈색 앨범'이라 불리는 「더 밴드」는 남북전쟁의 패자, 노동조합에 기대는 농부, 시골 축제 같은 미국의 옛 풍경을 노래했다. (목소리) 이 밴드의 핵심은 세 목소리였다. 남부 억양이 짙은 레번, 높고 떨리는 댄코, 상처 입은 듯 맑은 마누엘이 한 곡 안에서 차례로 또는 겹쳐 노래했다. 곡 대부분은 로버트슨이 썼지만 마누엘도 「위스퍼링 파인스」 등을 함께 썼다. 그러나 이 앨범 뒤로 마누엘의 작곡은 눈에 띄게 줄었다. (정상) 1969년 4월 샌프란시스코 윈터랜드에서 더 밴드로서 첫 공연을 했고, 8월에는 우드스톡 페스티벌에 서고 영국 와이트섬에서 딜런을 반주했다. 1970년 1월에는 시사 주간지 『타임』의 표지를 장식했다. 영국에서는 엘턴 존과 작사가 버니 토핀이 이들의 음악에 깊이 빠져 미국 서부를 그린 앨범 「텀블위드 커넥션」을 만들었고, 토핀은 이 앨범이 「뮤직 프롬 빅 핑크」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불안) 성공은 불안을 데려왔다. 1970년 우드스톡 플레이하우스 극장에서 녹음한 「스테이지 프라이트」에는 무대 공포와 명성의 압박, 흔들리는 마음이 담겼다. 같은 해 그레이트풀 데드, 재니스 조플린과 기차로 캐나다를 횡단한 '페스티벌 익스프레스'는 끝없는 술자리이기도 했다. 마누엘과 댄코의 음주와 약물은 이 무렵부터 깊어졌다.

♪앨범 《더 밴드》 (The Band)1969무대 「Up on Cripple Creek」 The Band · 1969 에드 설리번 쇼

할리우드의 풀하우스에서 녹음한 이른바 갈색 앨범이다. 다섯 사람이 가장 서로 가까웠던 시기의 소리로, 평단은 이를 밴드의 정점으로 꼽는다.

  • 이 카드의 영상 곡 「업 온 크리플 크리크」에서 허드슨은 전기 건반 클라비넷을 와우 페달에 물려, 개구리가 우는 듯한 꿀렁거리는 소리를 낸다. 레번이 느긋하게 노래하는 사이사이를 이 소리가 채운다.
  • 「랙 마마 랙」에서는 존 사이먼의 튜바가 베이스 노릇을 하고 댄코가 컨트리식 바이올린(피들)을 켠다. 록 밴드라기보다 시골 장터 악단처럼 들린다.
  • 큰 스튜디오가 아니라 작은 방에서 마주 보고 녹음해 소리가 건조하고 가깝다. 잔향이 거의 없어 악기 하나하나가 귀 바로 앞에서 울리는 듯하다.
  • 마지막 곡 「킹 하베스트」에서 마누엘은 흉작에 몰린 농부의 목소리로 노래한다. 앨범이 시골 축제의 흥에서 시작해 노동의 고단함으로 끝나는 흐름을 따라 들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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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이트 데이 드로브 올드 딕시 다운 (The Night They Drove Old Dixie Down)1969실황 The Band · 영화 《The Last Waltz》

캐나다인 로버트슨이 남부 출신 레번을 위해 쓴, 남북전쟁에서 진 남부 농부의 노래다. 로버트슨은 곡을 쓰기 전 레번의 고향 이야기를 듣고 자료를 찾아 공부했다고 회고했다.

  • 레번이 1인칭으로, 전쟁에 지고 가족을 잃은 남부 농부가 되어 노래한다. 누구를 탓하기보다 담담하게 지나간 일을 이야기하는 화법이다.
  • 절은 낮게 억눌러 부르다가 후렴에서 세 목소리가 한꺼번에 합쳐지며 터져 나온다. 이 대비가 곡의 슬픔을 키운다.
  • 드럼은 행진곡처럼 절제돼 있다. 화려한 연타 없이 박자를 묵묵히 짚는 레번의 연주에 귀를 기울여 보자.
  • 1971년 다른 가수의 커버가 크게 히트했는데, 그 판은 밝고 경쾌하다. 원곡의 느리고 무거운 걸음과 비교해 들으면 이 곡이 본래 품은 상실감이 더 또렷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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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지 프라이트 (Stage Fright)1970실황 The Band · 1976 The Last Waltz

갑작스러운 명성이 데려온 무대 공포를 노래한다. 성공의 정점에서 이미 흔들리기 시작한 밴드의 속내가 제목 그대로 드러난다.

  • 리드 보컬은 릭 댄코다. 높고 다급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무대에 오르기 전 불안한 사람의 심장처럼 들린다.
  • 앨범은 관객 없는 우드스톡 플레이하우스 극장 무대에서 녹음됐고, 젊은 토드 런드그렌이 녹음을 맡았다. 갈색 앨범보다 공간이 넓게 울리는 차이를 들어 보자.
  • 로버트슨의 기타 솔로는 짧고 날카롭게 끊어 친다. 길게 늘이지 않고 할 말만 하고 빠지는 그의 연주 방식이 잘 드러난다.
  • 허드슨의 오르간이 노래 뒤에서 화음을 길게 깔아 바탕을 만든다. 왼쪽과 오른쪽 채널에서 건반과 기타가 어떻게 자리를 나누는지 들어 보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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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말리부의 균열 · 1971–1975

(카니벌) 1971년 「카후츠」는 작곡의 짐이 거의 로버트슨 한 사람에게 몰린 앨범이었다. 그는 훗날 이 무렵 영감이 말라 가는 것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돌파구는 뉴올리언스의 작곡가 앨런 투생이 관악 편곡을 맡은 「라이프 이즈 어 카니벌」이었다. 투생은 그해 마지막 날 뉴욕 아카데미 오브 뮤직 공연의 관악 편곡도 맡았고, 이 공연은 이듬해 라이브 앨범 「록 오브 에이지스」로 나왔다. (정체) 새 노래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1973년 옛 로큰롤과 R&B를 다시 부른 「문독 마티네」를 냈고, 그해 7월 뉴욕주 왓킨스글렌 야외 공연에는 60만 명 안팎의 관객이 몰렸다. 1974년에는 딜런과 다시 손잡고 앨범 「플래닛 웨이브스」를 녹음한 뒤 북미 투어를 돌아 라이브 앨범 「비포 더 플러드」를 남겼다. (말리부) 같은 무렵 그들은 우드스톡을 떠나 캘리포니아 말리부로 옮겨 스튜디오 '샹그릴라'를 꾸렸다. 1975년 「노던 라이츠–서던 크로스」는 오랜만에 전곡이 신곡이었다. 허드슨은 신시사이저를 들여 소리의 폭을 넓혔고, 로버트슨은 18세기 중반 영국군에 고향을 빼앗긴 프랑스계 아카디아인의 이야기를 「아케이디언 드리프트우드」에 담았다. 미국 남부를 노래해 온 캐나다인들이 처음으로 제 고향의 역사를 정면으로 다룬 곡이었다. (저작권) 그러나 다섯의 관계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작곡 크레디트가 로버트슨에게 모이면서 수입의 차이가 벌어졌고, 레번은 이를 오래 원망했다. 로버트슨은 무절제한 생활에 지쳐 가는 동료들 대신 누군가는 일을 꾸려야 했다고 말했다. 같은 무대에 서면서도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밴드를 기억하기 시작했다.

♪라이프 이즈 어 카니벌 (Life Is a Carnival)1971

영감이 말라 가던 「카후츠」 시기에 앨런 투생의 관악 편곡이 새 숨을 불어넣었다. 삶을 정신없는 서커스에 빗댄, 밴드 최고의 펑크 리듬 곡이다.

  • 투생이 편곡한 트럼펫과 색소폰이 짧게 끊어 치며 박자 사이를 찌르는 엇박(싱코페이션)을 만든다. 뉴올리언스 관악단의 리듬이 그대로 옮겨 왔다.
  • 댄코는 손가락으로 음높이를 직접 정하는 프렛리스 베이스를 즐겨 썼다. 이 곡에서 베이스가 음과 음 사이를 미끄러지듯 오가는 탄력 있는 움직임에 귀를 기울여 보자.
  • 레번과 댄코가 절을 나눠 부르고 후렴에서 겹친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서로 튕겨 나가듯 주고받는다.
  • 라이브 앨범 「록 오브 에이지스」 판에서는 관악단이 더 크고 거칠게 울려, 스튜디오판보다 춤추는 느낌이 강하다.

V. 마지막 왈츠 · 1976–1978

(사고) 1976년 마누엘이 텍사스에서 보트 사고로 목을 다쳐 공연이 줄줄이 취소됐다. 열여섯 해를 길 위에서 보낸 로버트슨은 투어를 그만두자고 했다. 레번은 반대했지만 결국 고별 공연을 열기로 했다. (왈츠) 1976년 11월 25일 추수감사절, 샌프란시스코 윈터랜드에서 '마지막 왈츠'가 열렸다. 관객 5천여 명에게 칠면조 저녁이 차려졌고, 첫 스승 로니 호킨스를 비롯해 머디 워터스, 밴 모리슨, 조니 미첼, 에릭 클랩턴이 차례로 무대에 올랐다. 캐나다 동향인 닐 영은 이들의 반주로 고향 온타리오를 그리는 「헬플리스」를 불렀고, 마지막에는 밥 딜런이 올라 옛 반주단과 함께 섰다. 출발점의 호킨스와 전환점의 딜런이 한 무대에 선 셈이었다. (영화) 마틴 스코세이지가 이 공연을 35밀리 필름으로 찍었다. 스테이플 싱어스와 함께한 「더 웨이트」 등 몇 곡은 뒤에 촬영장에서 따로 찍어 넣었다. 1978년 개봉한 영화는 록 공연 영화의 고전으로 남았다. 레번은 훗날 회고록에서 이 공연이 사실상 로버트슨 한 사람의 뜻으로 밴드를 끝낸 것이라고 주장했고, 로버트슨은 모두가 동의한 결정이었다고 말했다. (마침표) 남은 계약을 채우려 1977년 「아일랜즈」를 냈고, 다섯 사람의 더 밴드는 거기서 멈췄다. 레번은 배우로 나서 1980년 영화 「광부의 딸」에서 컨트리 가수 로레타 린의 아버지를 연기했다. 길 위의 삶을 끝낸 이들은 처음으로 각자의 길을 찾아야 했다.

♪잇 메이크스 노 디퍼런스 (It Makes No Difference)1975실황 The Band · 1983 일본 공연

「노던 라이츠–서던 크로스」에 실린 이별의 노래로, 마지막 왈츠에서 가장 빛난 순간 중 하나로 꼽힌다. 끝나 가는 밴드의 무대에서 이 곡의 상실감은 다른 무게를 얻었다.

  • 릭 댄코가 리드 보컬을 맡아, 떠난 사람을 잊지 못하는 이에게 말을 건넨다. 고음에서 목소리가 갈라질 듯 떨리는 대목이 곡의 핵심이다.
  • 곡 중간 로버트슨의 기타 솔로는 음을 길게 끌며 울부짖듯 운다. 짧게 끊던 예전 연주와 달리 감정을 길게 늘어놓는다.
  • 엔딩에서 허드슨의 소프라노 색소폰이 길게 노래한다. 노래가 끝난 뒤에도 슬픔이 이어지는 듯한 마지막 1분을 놓치지 말자.
  • 영화 「마지막 왈츠」의 라이브 판은 스튜디오판보다 느리고 무겁다. 마지막 공연이라는 사실을 아는 댄코의 목소리가 더 지쳐 있는 것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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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넷이서, 그리고 셋이서 · 1983–1999

(재결합) 1983년 로버트슨을 뺀 네 사람이 다시 모였다. 큰 공연장 대신 클럽과 작은 극장을 돌았고, 대우도 예전 같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은 함께 연주할 때 가장 자기다웠다. (마누엘) 1986년 3월 4일, 플로리다주 윈터파크의 작은 클럽 공연을 마친 뒤 마누엘이 숙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마흔두 살이었다. 오랜 알코올 중독에서 한때 벗어났다가 다시 빠져든 뒤였다. 밴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를 잃은 남은 셋은 기타리스트 짐 와이더, 건반 주자 리처드 벨, 드러머 랜디 시어랜트를 더해 이름을 이어 갔다. (제리코) 1993년 「제리코」는 16년 만의 스튜디오 앨범이었다. 여기서 그들은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애틀랜틱 시티」를 불렀다. 쇠락한 도시에서 막다른 선택을 앞둔 남자의 이야기는 레번과 댄코의 거친 목소리를 거치며 남부 시골의 민요처럼 바뀌었다. 같은 해 레번은 회고록 『디스 휠스 온 파이어』에서 밴드의 곡은 다섯이 함께 만든 것인데 저작권은 로버트슨에게 돌아갔다고 주장했고, 로버트슨은 곡은 자신이 썼다고 반박했다. 1994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올랐지만 레번은 시상식에 나오지 않았다. (댄코) 「하이 온 더 호그」(1996)와 「주빌레이션」(1998)이 이어졌다. 1998년 레번은 후두암 진단을 받았다. 1999년 12월 10일, 릭 댄코가 우드스톡 근처 집에서 잠든 채 심부전으로 세상을 떠났다. 쉰여섯 살이었고, 오랜 술과 약물이 그의 몸을 지치게 한 뒤였다. 남은 이들은 더 이상 더 밴드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다.

VII. 헛간의 불빛 · 2000–2025

(램블) 레번은 방사선 치료 뒤 목소리를 되찾았다. 2004년부터 우드스톡 자택의 헛간 스튜디오에서 '미드나이트 램블'이라는 공연을 열었다. 병원비를 갚으려고 시작한 작은 공연은 동료 음악가들이 앞다퉈 찾아오는 명소가 됐고, 2007년 앨범 「더트 파머」로 이듬해 그래미상을 받았다. 1920년대 남부 아칸소의 농가에서 듣던 노래들로 돌아간 음반이었다. 그는 2012년 4월 19일 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로버트슨이 마지막 날들의 병상을 찾았다. (로버트슨) 로버트슨은 솔로 음반과 스코세이지 영화 음악으로 경력을 이어 갔다. 2016년 회고록 『테스티모니』를 냈고, 2019년에는 그의 시선으로 밴드를 돌아본 다큐멘터리 「원스 웨어 브라더스」가 나왔다. 마지막 작업은 원주민 오세이지족의 비극을 다룬 스코세이지의 「플라워 킬링 문」 음악이었다. 모호크 혈통인 그에게는 뿌리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2023년 8월 여든 살로 세상을 떠났다. (허드슨) 가장 맏이였던 가스 허드슨이 2025년 1월 우드스톡 인근에서 여든일곱 살로 세상을 떠나면서 다섯 원년 멤버가 모두 떠났다. 그는 마지막까지 말수 적은 장인으로 기억됐다. (유산) 더 밴드는 히트곡이 많은 밴드가 아니었다. 그러나 블루스와 컨트리, 가스펠, 민요를 하나의 옷감으로 엮은 그들의 소리는 훗날 '아메리카나'라 불리는 음악의 원형이 됐다. 2008년 그래미 평생공로상을 받았다.

덜 알려진 이야기

딜런을 만나기 직전, 호크스는 전혀 다른 길을 갈 뻔했다. 레번의 회고록에 따르면 1965년 그들은 아칸소주 헬레나에서 블루스 하모니카의 거장 소니 보이 윌리엄슨과 합주했고, 그의 반주단이 되기로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나 윌리엄슨은 그해 5월 세상을 떠났다. 몇 달 뒤 딜런과의 만남이 너무 커서 이 일화는 각주에만 남았다. 「더 웨이트」 첫머리에 나오는 지명 나사렛은 성경의 도시가 아니다. 로버트슨은 마틴 기타 공장이 있는 펜실베이니아주의 작은 도시 이름을 기타 울림구멍 속 상표에서 보고 따왔다고 밝혔다. 곡의 성경적 분위기 때문에 이 출처는 오랫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 빅 핑크 지하실 녹음은 공식 발매보다 6년 앞서 1969년 「그레이트 화이트 원더」라는 무허가 음반으로 퍼졌고, 록 역사상 가장 이른 부틀렉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1975년 공식 앨범에는 지하실 시절 이후 녹음된 밴드의 곡과 덧녹음도 섞여 들어갔다는 사실이 후대 연구자들에 의해 확인됐다. 우드스톡 페스티벌에서 더 밴드는 일요일 밤 무대에 섰지만, 1970년의 기록 영화와 음반에는 그들의 연주가 빠졌다. 법적 문제와 밴드 쪽의 거부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공연은 50주년이던 2019년에야 기념 박스 세트로 정식 공개됐다.

용어 노트 📚🔎

로커빌리

(말뜻) 로큰롤(rock)과 힐빌리(hillbilly)를 합친 말이다. 힐빌리는 원래 미국 남부 산골 사람을 낮춰 부르던 말로, 그들이 즐기던 컨트리 음악을 가리키기도 했다. (록에서) 1950년대 미국 남부에서 흑인의 리듬앤드블루스와 백인의 컨트리가 섞여 나온 빠르고 들뜬 로큰롤이다. 튕기는 베이스와 메아리 낀 목소리가 특징이고, 초기 엘비스 프레슬리와 로니 호킨스가 대표적이다. 급식의 두 반찬을 한 그릇에 비볐더니 둘 다와 다른 새 맛이 난 것과 비슷하다.

반주단(백밴드)

(록에서) 이름난 가수 뒤에서 연주를 맡는 악단이다. 무대의 주인공은 가수지만, 노래의 박자와 분위기는 대부분 반주단이 만든다. 학예회에서 노래하는 친구 뒤로 리코더 합주부가 반주를 넣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 더 밴드는 호킨스와 딜런의 반주단으로 십 년 가까이 일한 뒤에야 자기 이름으로 섰다.

클라비넷

(말뜻) 건반악기 클라비코드(clavichord)에서 따온 이름이다. 앞부분 clavis 는 라틴어로 열쇠라는 뜻인데, 건반 하나하나를 소리를 여는 열쇠로 본 데서 왔다. (록에서) 독일 호너사가 만든 전기 건반악기다. 건반을 누르면 안쪽의 작은 고무 망치가 줄을 때리고, 그 진동을 전기로 키워 짧고 톡 쏘는 소리를 낸다. 고무줄을 팽팽히 당겨 손가락으로 튕겼을 때 나는 소리를 떠올리면 비슷하다.

와우 페달

(말뜻) 밟으면 소리가 '와-우' 하고 들린다고 해서 붙은 의성어 이름이다. (록에서) 발로 앞뒤를 밟아 소리의 높은 쪽과 낮은 쪽 중 어디를 강조할지 바꾸는 장치다. 주로 기타에 쓰지만 허드슨은 클라비넷에 물려 썼다. 입을 오므렸다가 크게 벌리며 같은 소리를 내면 목소리 색이 '우'에서 '와'로 바뀌는 것과 같은 원리다.

프렛리스 베이스

(말뜻) 프렛(fret)은 기타 목 위에 박힌 가는 금속 막대이고, 뒤에 붙은 -less 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프렛이 없는 베이스라는 말이다. (록에서) 보통 베이스는 프렛이 음의 칸을 나눠 주지만, 프렛리스 베이스는 바이올린처럼 손가락 위치만으로 음높이를 정한다. 그래서 음과 음 사이를 미끄러지듯 이을 수 있고 소리가 노래하듯 부드럽다. 계단을 한 칸씩 오르는 것과 미끄럼틀로 미끄러지는 것의 차이와 같다. (다른 데서는) 영어에서 fret 은 동사로 안달하다라는 뜻으로도 쓰이지만, 악기 쪽 말과는 뿌리가 다른 별개의 단어다.

부틀렉

(말뜻) bootleg 는 장화의 목 부분을 뜻한다. 미국 금주법 시대에 술병을 장화 목에 숨겨 몰래 팔던 데서 밀매품이라는 뜻이 생겼다. (록에서) 가수나 음반사의 허락 없이 몰래 만들어 퍼뜨린 음반이다. 공연을 객석에서 몰래 녹음하거나, 발매되지 않은 녹음을 빼돌린 것이 많다. 친구가 수업 시간을 몰래 녹음해 반 전체에 돌린 파일을 떠올리면 된다. 딜런과 더 밴드의 지하실 녹음은 가장 이른 록 부틀렉 가운데 하나다. (다른 데서는) 금주법 시대 이야기에서는 밀주, 즉 몰래 빚어 판 술을 가리킨다.

아메리카나

(말뜻) 아메리카(America)에 무엇에 관한 것들이라는 뜻의 -ana 를 붙인 말로, 원래 미국의 문화와 생활을 보여 주는 물건이나 기록의 모음을 뜻했다. (록에서) 컨트리, 블루스, 포크, 가스펠, 초기 로큰롤처럼 미국 음악의 뿌리를 한데 섞은 갈래의 이름이다. 1990년대부터 널리 쓰였는데, 평론가들은 더 밴드를 이 음악의 원형으로 꼽는다. 할머니와 이모, 고모의 요리법을 모아 한 권의 가족 요리책을 만든 것과 비슷하다. (다른 데서는) 골동품 시장에서는 오래된 미국 생활용품이나 수집품을 가리키는 말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