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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en

퀸 (1970–)

네 사람이 저마다 히트곡을 써낸 드문 밴드였다. 오페라와 하드 록을 한 무대에 올렸고, 경기장을 거대한 합창단으로 바꿔 놓았다.

한눈에 보기 🔭💭

1. 뿌리영국 런던 결성탄자니아 잔지바르 출생 머큐리레드 스페셜2. 도약트라이던트 계약퀸 II킬러 퀸3. 정점보헤미안 랩소디위 윌 록 유뮌헨과 신시사이저4. 무대상파울루 13만 관객라이브 에이드넵워스 마지막 공연5. 작별인듀엔도쇼 머스트 고 온1991년 머큐리 사망6. 유산웸블리 추모 공연애덤 램버트한국 990만 관객퀸1970–오페라와 하드 록을 잇고 경기장을 합창단으로 …
무대가 된 도시 🧭🗺️
N영국Tanzania스위스인도독일잔지바르(탄자니아)1946–1964판치가니(인도)1954–1963런던1964–현재뮌헨1979–1985몽트뢰1978–1995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멤버와 동료들 ⏳🌊

  • 멤버프레디 머큐리

    보컬과 피아노를 맡아 「보헤미안 랩소디」를 썼고, 무대 위 퀸의 얼굴이었다. 1991년 세상을 떠났다.

  • 멤버브라이언 메이

    아버지와 함께 만든 기타 레드 스페셜로 퀸의 소리를 빚은 기타리스트이며, 「위 윌 록 유」를 썼다.

  • 멤버로저 테일러

    드럼과 화음의 맨 위 가성을 맡았고, 「라디오 가가」를 썼다.

  • 멤버존 디콘

    베이스를 맡아 「어나더 원 바이츠 더 더스트」를 썼고, 1997년 공적 활동에서 물러났다.

  • 프로듀서로이 토머스 베이커

    초기 앨범 네 장과 1978년 「재즈」를 함께 만들며 겹겹이 쌓은 합창 사운드를 다듬었다.

  • 우정데이비드 보위

    1981년 몽트뢰에서 퀸과 즉흥 연주를 하다 「언더 프레셔」를 함께 만들었다.

YouTube에서 7곡 이어 듣기 ↗

I. 네 갈래의 뿌리 · 1946–1971

(결성) 1970년, 영국 런던에서 결성됐다. 이름은 보컬리스트 프레디 머큐리가 지었다. 그는 1946년 9월, 당시 영국 보호령이던 잔지바르(오늘날 탄자니아)에서 파로크 불사라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보미와 어머니 제르는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파르시 집안이었다. 아들은 인도 판치가니의 기숙학교에서 피아노를 배웠다. 1964년 잔지바르 혁명을 피해 가족이 런던 서쪽 펠섬으로 이주했고, 그는 일링 예술대학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했다. (기타)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는 1947년 런던 근교 햄프턴에서 태어났다. 10대 시절 전자 기술자였던 아버지 해럴드와 함께 낡은 벽난로 선반 나무를 깎아 기타를 직접 만들었다. 이 '레드 스페셜'이 그의 평생 악기가 됐다. 메이는 임페리얼 칼리지에서 물리학과 천문학을 공부했다. 1968년에는 보컬 겸 베이시스트 팀 스태펠과 밴드 스마일을 꾸렸고, 드러머로 콘월에서 자란 치의학도 로저 테일러를 맞아들였다. (합류) 스태펠의 예술대학 친구였던 불사라는 스마일의 열성 팬이었다. 1970년 스태펠이 밴드를 떠나자 그가 들어왔다. 그는 밴드 이름을 퀸으로 바꾸고 자기 성을 머큐리로 고쳤다. 디자인 전공을 살려 멤버들의 별자리를 엮은 문장(紋章) 모양의 로고도 직접 그렸다. 베이시스트 자리는 여러 사람이 거쳐 갔다. 1971년 레스터 출신의 전자공학도 존 디콘이 들어오면서 비로소 네 사람이 갖춰졌다. 말수가 적고 꼼꼼한 디콘은 연주뿐 아니라 앰프와 장비를 손보는 일까지 맡았다.

II. 한밤의 스튜디오 · 1971–1974

(트라이던트) 퀸은 공연보다 녹음에 먼저 공을 들였다. 1972년 런던 소호의 트라이던트 스튜디오를 운영하던 노먼 셰필드와 배리 셰필드 형제와 계약을 맺었다. 조건은 다른 음악가들이 쓰지 않는 한밤의 빈 시간에만 녹음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만난 프로듀서 로이 토머스 베이커와 함께, 이미 녹음한 소리 위에 목소리와 기타를 한 겹씩 덧입히는(오버더빙) 퀸 특유의 작법을 다듬었다. 1973년 EMI를 통해 나온 첫 앨범 「퀸」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흑백) 이듬해 나온 「퀸 II」는 앨범의 두 면을 하얀 면과 검은 면으로 나눴다. 메이의 곡이 주로 실린 하얀 면은 서정적이었다. 머큐리가 채운 검은 면은 동화와 환상의 세계를 오페라처럼 펼쳤다. 사진가 믹 록이 찍은 네 멤버의 얼굴 사진은 훗날 「보헤미안 랩소디」 영상의 첫 장면으로 되살아났다. 데이비드 보위의 영상이 준비되지 않아 BBC 「톱 오브 더 팝스」에 빈자리가 생겼고, 퀸이 대신 출연했다. 덕분에 싱글 「세븐 시스 오브 라이」가 처음으로 차트에 올랐다. (돈) 같은 해 퀸은 모트 더 후플의 미국 투어에 서포트 밴드로 나섰다. 그러나 메이가 병으로 입원하는 바람에 중도에 돌아와야 했다. 11월에 나온 「시어 하트 어택」의 수록곡 「킬러 퀸」이 영국 차트 2위에 오르면서 밴드는 이름을 알렸다. 그래도 멤버들의 주머니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앨범 《퀸 II》 (Queen II)1974실황 「Seven Seas of Rhye」 Queen · 1986 부다페스트

트라이던트의 한밤 녹음 시절, 목소리와 기타를 수없이 겹쳐 쌓던 실험이 가장 짙게 남은 앨범이다. 하얀 면과 검은 면의 대비는 메이와 머큐리라는 두 작곡가의 기질 차이를 그대로 보여 준다.

  • 이 카드의 영상으로 고른 곡은 첫 히트곡 「세븐 시스 오브 라이」다. 머큐리의 피아노가 화음을 한 음씩 빠르게 흩뿌리는 연주(아르페지오)로 문을 여는 도입부부터 들어 보자.
  • 검은 면의 「더 마치 오브 더 블랙 퀸」은 짧은 곡 여러 개를 이어 붙인 듯 박자와 분위기가 계속 바뀐다. 평론가들은 「보헤미안 랩소디」의 여러 단 구성이 이 곡에서 먼저 시험됐다고 본다.
  • 같은 목소리를 여러 번 녹음해 겹친 합창(오버더빙)이 좌우로 넓게 펼쳐진다. 헤드폰으로 들으면 왼쪽과 오른쪽 채널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 층이 주고받는 것이 들린다.
  • 메이는 기타 여러 줄을 겹쳐 녹음해 현악 합주처럼 들리게 했다. 속지에 적힌 '이번에도 아무도 신시사이저를 연주하지 않았다'는 문구는 이 소리가 모두 기타라는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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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 퀸 (Killer Queen)1974무대 Queen · 1974 Top of the Pops

세련된 상류층 여인을 그린 인물화 같은 곡이다. 하드 록 밴드라는 꼬리표를 벗고 처음 영국 차트 상위권에 올라, 돈 없이 버티던 밴드에 이름을 안겼다.

  • 도입부에서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머큐리의 피아노가 카바레처럼 가볍게 출발한다. 속지에는 음색이 짤랑거리도록 손본 피아노(징글 피아노)도 따로 표기돼 있다.
  • 메이의 기타 솔로는 한 줄의 선율이 아니라 여러 기타가 차례로 이어받는 구조다. 메이는 같은 음을 기타 여러 대가 시차를 두고 울려 종소리처럼 퍼지게 했다고 설명했다. 솔로 중반 좌우 채널을 오가는 음을 따라가 보자.
  • 후렴의 화음은 머큐리, 메이, 테일러의 목소리를 여러 번 겹친 것이다. 맨 위 층은 테일러의 높은 가성(팔세토)이 맡는다.
  • 머큐리의 보컬은 인물을 소개하듯 능청스럽고 연극적인 어조다. 그는 이 곡이 평소의 퀸과 달리 멋 부린 노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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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오페라의 밤 · 1975–1976

(독립) 1975년 밴드는 변호사 짐 비치의 도움을 받아 트라이던트와의 계약을 정리했다. 새 매니저로는 엘턴 존의 매니저였던 존 리드를 맞았다. 계약을 끊는 데 큰돈이 들었으므로 다음 앨범은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머큐리는 옛 경영진을 향한 분노를 「데스 온 투 레그스」에 쏟아부었다. 노먼 셰필드가 이 곡이 자신을 겨냥했다고 여겨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고 전해진다. (오페라) 그해 11월 「어 나이트 앳 더 오페라」가 나왔다. 웨일스의 록필드를 비롯해 여러 스튜디오를 오가며 만든, 당시로서는 손꼽히게 제작비가 많이 든 앨범이었다. 네 사람이 모두 곡을 썼다는 점이 이 밴드의 체질을 보여 줬다. 디콘은 첫 히트곡이 된 「유어 마이 베스트 프렌드」를 썼다. 천문학도 메이는 상대성 이론에 기댄 시간 여행 이야기 「'39」를 썼고, 테일러는 자동차를 향한 애정을 노래로 만들었다. 6분 가까운 「보헤미안 랩소디」는 라디오에 맞지 않는다는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친구인 디제이 케니 에버렛이 방송에서 거듭 틀었고, 곡은 영국 차트 1위에 9주간 머물렀다. (우정) 머큐리는 1970년 무렵 만난 메리 오스틴과 오래 함께 살았다. 연인 관계가 끝난 뒤에도 그는 오스틴을 가장 가까운 친구라고 불렀다. 같은 앨범의 「러브 오브 마이 라이프」는 머큐리의 대표적인 사랑 노래로 꼽힌다. 1976년 9월 런던 하이드 파크 무료 공연에는 15만 명이 넘는 관객이 모였다. 연말에 나온 「어 데이 앳 더 레이시스」는 밴드가 처음으로 직접 프로듀싱한 앨범이었다.

♪보헤미안 랩소디 (Bohemian Rhapsody)1975실황 Queen · 1985 Live Aid 웸블리

트라이던트를 떠나 모든 것을 건 앨범의 한가운데에서, 머큐리가 오래 품어 온 여러 곡의 조각을 하나로 이었다. 라디오에 맞지 않는다는 반대를 넘어 9주 동안 영국 1위를 지켰다.

  • 곡은 반주 없는 합창(아카펠라) 도입, 피아노 발라드, 기타 솔로, 오페라, 하드 록, 조용한 끝맺음 순으로 이어진다. 후렴 없이 6분 가까이 흐르는 구성 자체가 당시 싱글의 상식을 깼다.
  • 발라드 끝의 기타 솔로는 메이가 레드 스페셜을 복스 AC30 앰프(기타 소리를 키우는 증폭기)에 연결해 낸 소리다. 메이는 노래하듯 흐르는 선율을 미리 작곡하듯 짰다고 말했다.
  • 오페라 부분은 세 사람의 목소리를 겹치고 또 겹쳐 만들었다. 테이프를 너무 많이 돌린 탓에 테이프가 닳아 비쳐 보일 정도였다고 베이커와 메이는 회고했다. 꼭대기에서 터지는 테일러의 가장 높은 가성을 찾아 들어 보자.
  • 하드 록 부분에 이르러서야 디콘의 베이스와 테일러의 드럼이 처음으로 묵직하게 밀고 나온다. 마지막에 울리는 커다란 징 소리가 곡을 닫는다.
  • 오페라 부분은 무대에서 재현할 수 없었다. 그래서 라이브에서는 이 대목에 녹음을 틀어 놓고 멤버들이 잠시 무대를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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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경기장의 합창 · 1977–1982

(합창) 1977년 무렵 퀸의 공연장은 관객이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 부르는 거대한 합창장이 되어 있었다. 메이는 관객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곡을 쓰자고 마음먹었고, 그렇게 발 구르기와 손뼉만으로 박자를 세운 「위 윌 록 유」가 나왔다. 머큐리는 같은 앨범 「뉴스 오브 더 월드」에 「위 아 더 챔피언스」를 실었다. 수만 명이 함께 부르도록 설계한 경기장 규모의 록(스타디움 록)이 이 두 곡으로 완성됐다. 이 앨범을 녹음하던 런던 웨섹스 스튜디오에서 퀸은 옆방의 섹스 피스톨즈와 마주쳤다. 시드 비셔스가 머큐리를 도발하자 머큐리가 태연하게 그의 이름을 비틀어 부르며 넘겼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뮌헨) 1978년부터 멤버들은 세금 문제로 한동안 영국 밖에서 작업했다. 그해 「재즈」를 녹음한 스위스 몽트뢰의 마운틴 스튜디오는 이듬해 밴드가 사들였다. 1979년부터는 독일 뮌헨의 뮤직랜드 스튜디오에서 프로듀서 맥(라인홀트 마크)과 함께 일했다. 초기 앨범 속지에 신시사이저를 쓰지 않았다고 적어 두었던 밴드가, 「더 게임」에서 처음으로 전자 회로로 소리를 합성하는 건반 악기(신시사이저)를 받아들였다. 디콘이 쓴 「어나더 원 바이츠 더 더스트」는 미국 차트 1위에 올랐다. 머큐리는 뮌헨의 클럽 문화에 깊이 빠져들었고, 그 춤추는 리듬은 이후 퀸의 음악에도 스며들었다. (남미) 1981년 남미 투어에서 퀸은 브라질 상파울루 모룸비 경기장에 하룻밤 13만 명 남짓을 불러 모았다. 같은 해 몽트뢰에 들른 데이비드 보위와 즉흥 연주를 하다가 「언더 프레셔」를 만들었다. 이듬해 나온 「핫 스페이스」는 베이스와 드럼의 끈적한 리듬을 앞세운 흑인 음악(펑크, funk)과 디스코 쪽으로 기울었고, 미국에서 판매가 부진했다. 멤버들은 훗날 머큐리의 개인 매니저 폴 프렌터가 이 방향을 부추겼다고 회고했다.

♪위 윌 록 유 (We Will Rock You)1977실황 Queen · 1985 Live Aid 웸블리

관객을 노래의 일부로 만들겠다는 메이의 생각이 그대로 형태가 된 곡이다. 퀸이 스타디움 록의 문법을 세운 순간이며, 이후 세계 곳곳 경기장의 응원가가 됐다.

  • 드럼 세트도 베이스도 없다. 멤버들이 웨섹스 스튜디오의 나무 바닥을 구르고 손뼉 친 소리를 여러 번 겹쳐 녹음했다. 메이는 서로 맞물리지 않도록 길이를 다르게 잡은 짧은 메아리(딜레이)를 걸어 수많은 사람이 함께 내는 소리처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 머큐리의 보컬은 노래라기보다 낭독에 가깝다. 세 절에 걸쳐 한 사람의 소년기, 청년기, 노년기를 훑는 이야기를 박자 위에 또박또박 얹는다.
  • 기타는 곡이 거의 끝날 무렵에야 처음 들어온다. 앞의 2분 동안 쌓인 긴장을 메이의 솔로가 한꺼번에 터뜨리고, 곡은 그대로 끝나 버린다.
  • 라이브에서는 템포를 빠르게 바꾼 록 버전으로 공연의 문을 열기도 했다. 1979년 라이브 앨범 「라이브 킬러스」에서 두 버전을 비교해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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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나더 원 바이츠 더 더스트 (Another One Bites the Dust)1980실황 Queen

뮌헨에서 신시사이저와 새 프로듀서를 받아들이던 시기의 곡이다. 디콘이 펑크(funk)에 대한 애정을 쏟아부어 퀸에게 가장 많이 팔린 싱글을 안겼다.

  • 곡의 주인공은 디콘이 쓴 베이스의 짧은 반복 악구(리프)다. 시크의 「굿 타임스」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평이 많다. 디콘은 베이스뿐 아니라 리듬 기타와 피아노도 직접 연주했다.
  • 테일러의 드럼은 울림을 최대한 줄여 건조하고 단단하게 녹음됐다. 같은 박자가 기계처럼 정확히 되풀이되며 춤추게 만드는 흐름(그루브)을 만든다.
  • 중간 부분에서는 피아노와 심벌 소리를 거꾸로 재생한 효과음, 메이가 만든 기묘한 기타 잡음이 좌우 채널을 오간다. 기타 솔로가 들어설 자리를 효과음이 채운다.
  • 공연장을 찾은 마이클 잭슨이 이 곡을 꼭 싱글로 내라고 권했다는 일화가 멤버들의 회고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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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웸블리의 20분 · 1983–1986

(휴식) 1983년 멤버들은 처음으로 긴 휴식을 가졌다. 메이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에디 밴 헤일런 등과 함께 「스타 플리트 프로젝트」를 녹음했다. 머큐리는 뮌헨에서 첫 솔로 앨범 「미스터 배드 가이」를 만들었다. 1984년 다시 모인 퀸은 「더 웍스」로 초기의 록 사운드를 되찾았다. 테일러가 쓴 「라디오 가가」에는 라디오의 시대가 저물고 화면이 음악을 대신하는 데 대한 아쉬움이 담겼다. 디콘의 「아이 원트 투 브레이크 프리」 뮤직비디오에서 멤버들은 영국 드라마 「코로네이션 스트리트」를 패러디해 여장을 했다. 이 영국식 농담은 미국에서 통하지 않았고, MTV는 영상을 방영하지 않았다. (라이브 에이드) 1985년 7월 13일, 밥 겔도프가 아프리카 기근 구호를 위해 연 라이브 에이드에서 퀸은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 무대에 20분 남짓 올랐다. 히트곡을 촘촘히 엮은 세트였다. 머큐리는 7만여 관객과 목소리를 주고받으며 경기장 전체를 지휘했다. 이 공연은 그날의 가장 빛난 순서로 널리 꼽혔다. 무엇보다 지쳐 있던 밴드에 다시 함께 나아갈 이유를 주었다. (마지막 투어) 이듬해 퀸은 영화 「하이랜더」의 음악을 겸한 앨범 「어 카인드 오브 매직」을 내고 매직 투어에 나섰다. 7월에는 당시 공산권이던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경기장에서 공연했다. 8월 9일 영국 넵워스 공원 공연이 머큐리가 퀸과 함께 선 마지막 무대가 됐다. 그때는 아무도 그것이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라디오 가가 (Radio Ga Ga)1984실황 Queen · 1985 Live Aid 웸블리

휴식을 마치고 다시 모인 밴드가 내놓은 곡으로, 라디오 시대에 바치는 작별 인사 같은 노래다. 이듬해 라이브 에이드에서 7만 관객의 손뼉과 만나 완성됐다.

  • 테일러가 신시사이저로 쓴 곡이다. 도입부의 통통 튀는 전자음과 반듯한 전자 박자가 1980년대 특유의 질감을 만든다.
  • 후렴에서 두 번씩 치는 손뼉은 뮤직비디오 촬영장에서 엑스트라 관객에게 먼저 시켜 본 동작이다. 라이브 에이드 영상에서 경기장 전체가 같은 순간 머리 위로 손뼉 치는 장면을 찾아보자.
  • 머큐리는 절을 낮게 속삭이듯 시작해 후렴에서 크게 열어젖힌다. 오랜 친구인 라디오에게 다정하게 말을 거는 듯한 어조다.
  • 메이의 기타는 대부분 뒤로 물러나 있다. 기타가 이끌던 퀸이 건반과 전자음 중심으로 옮겨 간 흐름이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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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끝까지 노래하다 · 1987–1991

(진단) 1987년 무렵 머큐리는 HIV 감염 진단을 받았다. 그는 이 사실을 세상에 끝까지 알리지 않았다. 런던 켄싱턴의 저택 가든 로지에서 연인 짐 허턴, 그리고 오랜 친구들과 조용히 지냈다. 1988년에는 스페인의 오페라 가수 몬세라트 카바예와 함께 앨범 「바르셀로나」를 냈다. 어린 시절부터 오페라를 사랑했던 그가 오래 품어 온 꿈을 이룬 작업이었다. (공동) 1989년 「더 미러클」부터 퀸은 모든 곡의 작곡자를 개별 멤버가 아닌 퀸으로 표기했다. 누구의 곡을 싱글로 낼지를 두고 오래 이어진 신경전을 끝내려는 결정이었다. 테일러도 이 결정을 반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멤버들이 머큐리에게서 직접 병에 대해 전해 들은 것은 이 무렵으로 알려져 있다. 그 뒤로 네 사람은 남은 시간을 붙잡으려는 듯 녹음에 매달렸다. (작별) 1991년 2월에 나온 「인듀엔도」는 대부분 몽트뢰에서 녹음됐다. 몸이 쇠약해진 머큐리는 상태가 좋은 날이면 스튜디오에 나와 할 수 있는 만큼 노래했다. 메이는 마지막 곡 「더 쇼 머스트 고 온」을 그의 목소리를 염두에 두고 마무리했다. 5월에 찍은 「디즈 아 더 데이즈 오브 아워 라이브스」 영상이 머큐리의 마지막 촬영이 됐다. 11월 23일 그는 공식 성명으로 에이즈 감염 사실을 밝혔다. 이튿날인 24일, 가든 로지에서 에이즈 합병증인 기관지 폐렴으로 숨졌다. 향년 마흔다섯이었다. 집과 재산의 상당 부분은 메리 오스틴에게 남겨졌다.

♪더 쇼 머스트 고 온 (The Show Must Go On)1991공식 MV — Queen

머큐리가 마지막 힘을 쏟아부은 「인듀엔도」의 끝 곡이다. 무대 뒤에서 아픔을 감추고 끝까지 공연을 이어 가는 사람의 결심을 담았다.

  • 되풀이되는 화음 진행은 테일러와 디콘이 연주하던 것에서 출발했다. 메이가 머큐리와 함께 선율과 가사를 완성했다.
  • 메이는 음이 너무 높아 머큐리가 부를 수 있을지 걱정했다. 그러나 머큐리가 보드카를 들이켜고 몇 번 만에 불러냈다고 회고했다. 마지막 후렴으로 갈수록 치솟는 음역을 따라가 보자.
  • 곡 중반에 조를 바꾸는 대목(전조)이 있다. 곡이 한 단계 올라서면서 긴장이 한층 높아진다.
  • 키보드가 만드는 넓고 장중한 울림 위에, 메이 특유의 노래하는 듯한 기타 솔로가 짧고 묵직하게 얹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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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 남은 사람들 · 1992–2026

(추모) 1992년 4월 20일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프레디 머큐리 추모 공연이 열렸다. 메탈리카의 제임스 헷필드가 메이, 테일러, 디콘의 연주에 맞춰 「스톤 콜드 크레이지」를 불렀다. 메탈리카는 바로 전해에 이 곡의 커버로 그래미상을 받은 터였다. 건즈 앤 로지스의 액슬 로즈는 엘턴 존과 「보헤미안 랩소디」를 나눠 불렀고, 기타리스트 슬래시도 무대에 섰다. U2는 미국 새크라멘토의 공연장에서 위성 중계로 함께했다. 수익은 에이즈 퇴치를 위해 세운 머큐리 피닉스 트러스트로 들어갔다. (유작) 1995년에 나온 「메이드 인 헤븐」은 머큐리가 몽트뢰에서 남긴 마지막 목소리에 남은 멤버들이 연주를 입혀 완성한 앨범이었다. 1997년 메이, 테일러와 셋이서 녹음한 「노원 벗 유」를 끝으로 디콘은 공적 활동에서 물러났다. 메이와 테일러는 2004년부터 폴 로저스와, 2011년부터는 미국 가수 애덤 램버트와 함께 퀸의 이름으로 투어를 이어 왔다. 2002년 런던에서 막을 올린 뮤지컬 「위 윌 록 유」는 12년 동안 무대에 올랐다. 퀸은 2001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재발견) 2018년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새로운 세대에게 퀸을 알렸다. 한국에서도 990만 명이 넘는 관객이 들었고, 관객이 함께 노래하는 상영회가 곳곳에서 이어졌다. 그 열기 속에서 2020년 1월 퀸과 애덤 램버트는 서울 고척스카이돔 무대에 섰다. 메이는 2007년, 밴드 활동 때문에 30여 년 미뤄 두었던 천체물리학 박사 학위를 마쳤다.

덜 알려진 이야기

디콘은 1972년 무렵 버려진 회로 기판을 주워 작은 앰프를 만들었다. 멤버들은 이 앰프를 '디시 앰프'라고 불렀다. 메이는 여기에 레드 스페셜을 연결해 클라리넷과 트롬본 같은 관악기 소리를 기타로 흉내 냈다. 「어 나이트 앳 더 오페라」의 「굿 컴퍼니」에서는 1920년대 재즈 밴드의 편성 전체를 기타 하나로 재현했다. 속지에 짧게 이름이 실린 것 말고는 거의 조명받지 못했지만, 신시사이저를 쓰지 않았다는 선언 뒤에는 이 손바닥만 한 장치가 있었다. 머큐리는 생전 인터뷰에서 잔지바르와 인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이나 파르시 집안의 뿌리를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다. 영국 언론도 그를 런던의 화려한 록 스타로만 그렸다. 그의 출신은 사후에 전기들이 나오면서 비로소 자세히 알려졌다. 판치가니 기숙학교 시절 그가 친구들과 헥틱스라는 밴드를 꾸려 피아노를 쳤다는 사실도 그렇게 알려진 대목이다. 그의 장례는 파르시 사제들이 조로아스터교 의식으로 집전했다. 1976년 12월 1일, 런던 템스 텔레비전의 저녁 프로그램 「투데이」에는 원래 퀸이 출연할 예정이었다. 머큐리의 치과 진료 일정으로 출연이 취소되자 같은 EMI 소속의 신인 섹스 피스톨즈가 대신 나갔다. 그날 진행자 빌 그런디와 나눈 거친 대담은 영국 전역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펑크 폭발의 상징이 된 이 사건의 출발점에 퀸이 있었다는 사실은, 두 밴드가 정반대의 상징으로 기억되면서 각주로만 남았다.

용어 노트 📚🔎

오버더빙

(말뜻) 위에(over)와 녹음을 덧입히다(dub)를 합친 말로, 이미 녹음된 소리 위에 새 소리를 덧입힌다는 뜻이다. (록에서) 먼저 녹음해 둔 연주를 들으면서 그 위에 다른 악기나 목소리를 한 겹씩 더 녹음하는 방법이다. 퀸은 세 사람의 목소리를 수십 번 겹쳐 마치 수백 명이 부르는 합창처럼 들리게 했다. 휴대폰으로 노래를 녹음한 뒤 그 녹음을 틀어 놓고 화음을 한 번 더 불러 겹쳐 본 적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오버더빙이다.

가성(팔세토)

(말뜻) 가성(假聲)은 거짓(假) 목소리(聲)라는 뜻이다. 이탈리아어 팔세토도 가짜를 뜻하는 falso에서 왔다. (록에서) 평소 말하는 목소리보다 훨씬 높은 음을, 성대를 얇게 써서 가볍게 내는 소리다. 퀸에서는 테일러가 화음의 맨 꼭대기를 가성으로 맡아 합창을 반짝이게 했다. 남학생이 높은 목소리를 흉내 내다가 목소리가 휙 뒤집히듯 가볍게 바뀌는 순간이 있는데, 그 소리가 가성이다.

신시사이저

(말뜻) 합성하다라는 뜻의 영어 synthesize에서 온 말로, 소리를 전기로 합성해 만드는 악기라는 뜻이다. (록에서) 건반을 누르면 전자 회로가 소리의 파동을 만들어 피아노에는 없는 온갖 소리를 낸다. 퀸은 초기 앨범 속지에 신시사이저를 쓰지 않았다고 일부러 적었다. 메이가 겹겹이 쌓은 기타 소리를 사람들이 신시사이저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퀸은 1980년 「더 게임」에서야 처음 신시사이저를 썼다. 게임 속 효과음 만들기 기능에서 소리 모양을 이리저리 바꿔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 보는 것과 비슷하다.

앰프

(말뜻) 증폭기를 뜻하는 앰플리파이어(amplifier)의 줄임말이다. 크다, 넓다는 뜻의 라틴어 amplus에서 왔다. (록에서) 전기 기타의 줄 떨림은 아주 작은 전기 신호에 불과하다. 앰프는 이 신호를 크게 키워 스피커로 내보낸다. 앰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맑은 소리부터 거칠게 찢어지는 소리까지 음색이 크게 달라진다. 메이는 복스 AC30 여러 대를 함께 썼고, 디콘은 버려진 부품으로 작은 앰프를 직접 만들기도 했다. 운동장 조회 때 교장 선생님의 목소리를 크게 키워 주는 확성기도 같은 원리다.

스타디움 록

(말뜻) 스타디움은 고대 그리스의 경주 거리 단위 스타디온에서 온 말로, 오늘날에는 큰 경기장을 뜻한다. (록에서) 수만 명이 들어가는 경기장에서 공연하는 록, 또는 그런 규모를 염두에 두고 만든 음악을 말한다. 맨 뒷자리 관객도 함께할 수 있도록 단순하고 힘찬 후렴, 손뼉과 발 구르기를 넣는 경우가 많다. 「위 윌 록 유」가 대표적인 예다. 체육대회에서 반 전체가 한목소리로 응원가를 부르면 혼자 부를 때와는 전혀 다른 힘이 나는데, 바로 그 힘을 노리는 음악이다.

펑크(funk)

(록에서) 1960~70년대 미국 흑인 음악에서 나온 장르로, 선율보다 베이스와 드럼이 만드는 끈적하고 반복적인 리듬을 앞세운다. 모든 악기가 박자를 잘게 쪼개 서로 맞물리며 몸을 저절로 움직이게 만든다. 우리말 표기가 같은 펑크(punk)와는 전혀 다른 음악이다. 긴 줄넘기에서 친구들이 돌리는 줄의 박자에 맞춰 몸이 저절로 들썩이는 느낌이 펑크의 리듬과 닮았다. (다른 데서는) 영어 일상 표현에서 funk는 기운이 빠져 우울한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전조

(말뜻) 전조(轉調)는 조(調)를 바꾼다(轉)는 뜻이다. (록에서) 곡의 중심이 되는 음, 말하자면 노래가 돌아가 쉬는 집 같은 음을 다른 높이로 옮기는 것이다. 같은 선율이라도 한 단계 올려 부르면 듣는 사람은 훨씬 고조된 느낌을 받는다. 노래방에서 마지막 후렴을 앞두고 키를 한 칸 올리면 분위기가 확 달아오르는데, 그것이 바로 전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