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y Holly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텍사스의 청년은 스스로 곡을 쓰고 편곡해 기타 둘·베이스·드럼으로 연주하는 록 밴드의 기본형을 남기고 스물두 살에 떠났다.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멤버와 동료들 ⏳🌊
- 우정밥 몽고메리
중학교 시절 2인조 '버디 앤드 밥'의 단짝으로, 데카가 홀리만 원하자 물러나 훗날 내슈빌의 작곡가가 됐다.
- 영향엘비스 프레슬리
1955년 러벅 공연으로 홀리를 컨트리에서 로커빌리로 돌려세운 동시대 스타였다.
- 프로듀서노먼 페티
클로비스 스튜디오의 주인으로 크리케츠의 소리를 함께 만들었으나 돈 문제로 1958년 결별했다.
- 멤버제리 앨리슨
크리케츠의 드러머이자 공동 작곡자로, 「페기 수」의 쉼 없는 드럼을 쳤다.
- 가족마리아 엘레나 홀리
1958년 결혼한 아내로, 「트루 러브 웨이스」를 바친 사람이라고 전해진다.
- 우정웨일런 제닝스
홀리가 첫 싱글을 제작해 준 후배로, 마지막 순회에서 베이스를 쳤고 비행기 자리를 리처드슨에게 양보했다.
I. 러벅의 막내 · 1936–1954
(출생) 1936년 9월, 미국 텍사스주 러벅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찰스 하딘 홀리(Charles Hardin Holley)였다. 아버지 로런스 오델 홀리는 요리사·재단사·목수 일을 번갈아 하며 가족을 부양했고, 어머니 엘라 폴린 드레이크 홀리는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쳤다. 위로 형 래리와 트래비스, 누나 퍼트리샤가 있었고, 그는 넷째이자 막내였다. '버디'는 어머니가 붙여 준 애칭이었다. (가족) 집안에는 늘 음악이 있었다. 다섯 살 때 형들과 지역 노래자랑에 나가 상금 5달러를 받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잠시 배웠다가, 형 트래비스에게서 기타 코드를 익히면서 기타에 정착했다. 가족은 러벅의 태버내클 침례교회에 다녔고, 찬송가의 화음은 그의 귀에 오래 남았다. (라디오) 서부 텍사스의 평평한 들판에서 소년이 들을 수 있던 음악은 대부분 라디오에서 왔다. 낮에는 행크 윌리엄스의 컨트리와 빌 먼로의 블루그래스를, 밤에는 멀리 루이지애나와 멕시코 국경 방송국에서 흘러나오는 흑인 대중음악(리듬 앤 블루스)을 들었다. 백인 컨트리와 흑인 리듬 앤 블루스를 한 귀로 듣던 이 습관이 훗날 그의 음악의 바탕이 됐다. (단짝) 중학교에서 만난 밥 몽고메리와 2인조 '버디 앤드 밥'을 꾸려, 스스로 '웨스턴 앤드 밥'이라 부른 컨트리 화음을 불렀다. 1953년 무렵부터는 러벅 지역 방송국 KDAV의 일요일 프로그램에 고정으로 출연했다. 친구들은 그를 수줍지만 음악에서만큼은 고집을 꺾지 않는 소년으로 기억했다.
II. 엘비스가 지나간 자리 · 1955–1956
(엘비스) 고등학교를 졸업한 1955년, 엘비스 프레슬리가 러벅에 여러 차례 공연하러 왔다. 버디 앤드 밥은 그 공연의 앞 무대를 맡았고, 홀리는 엘비스의 리듬감에 크게 흔들렸다. 그 뒤 그의 연주는 느긋한 컨트리에서, 컨트리 기타에 리듬 앤 블루스의 들뜬 박자를 얹은 초기 록(로커빌리) 쪽으로 빠르게 기울었다. (발탁) 같은 해 10월 빌 헤일리의 러벅 공연 앞 무대에 섰을 때, 내슈빌의 에이전트 에디 크랜들이 그를 눈여겨봤다. 이 인연으로 1956년 초 데카 레코드와 계약했는데, 데카는 2인조가 아니라 홀리 혼자만을 원했다. 몽고메리는 친구의 길을 막지 않고 물러났고, 훗날 내슈빌에서 작곡가·프로듀서로 자리를 잡았다. 계약서에 성이 'Holly'로 잘못 적혔고, 그는 이 철자를 그대로 예명으로 썼다. (내슈빌) 1956년 내슈빌의 오언 브래들리 스튜디오에서 세 차례 녹음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숙련된 세션 연주자들은 그의 거칠고 들뜬 리듬을 매끈한 컨트리 반주로 다듬었고, 첫 싱글 「블루 데이스, 블랙 나이츠」는 팔리지 않았다. 이때 이미 「댓일 비 더 데이」를 녹음했지만 데카는 그 곡에 기대를 걸지 않았다. (해지) 1957년 1월 데카는 계약을 갱신하지 않았다. 계약에는 데카에서 녹음한 곡을 일정 기간 다른 곳에서 다시 녹음하지 못한다는 조항이 붙어 있었다. 스무 살의 홀리는 스튜디오의 결정권이 연주자에게 없으면 자기 소리를 낼 수 없다는 것을 이때 배웠다. 이 교훈이 이듬해부터의 작업 방식을 정했다.
III. 클로비스의 귀뚜라미들 · 1957
(클로비스) 돌파구는 텍사스와 맞닿은 뉴멕시코주 클로비스에 있었다. 노먼 페티가 운영하던 작은 스튜디오는 시간이 아니라 곡 단위로 돈을 받아, 젊은 연주자들이 밤새 같은 곡을 다듬을 수 있었다. 같은 서부 텍사스 출신의 로이 오비슨도 데뷔 무렵 이 스튜디오에서 「우비 두비」를 녹음한 적이 있었다. (크리케츠) 1957년 2월 25일, 홀리는 드러머 제리 앨리슨, 베이스의 래리 웰본 등과 「댓일 비 더 데이」를 다시 녹음했다. 제목은 영화 「수색자」에서 존 웨인이 되풀이하던 말버릇에서 따왔다고 전해진다. 데카 계약 조항을 피하려고 음반은 밴드 이름 '크리케츠(귀뚜라미들)'로 냈다. 곧 베이스에 조 B. 몰딘, 리듬 기타에 니키 설리번이 자리 잡으며 리드 기타·리듬 기타·베이스·드럼의 4인조가 갖춰졌다. (역설) 공교롭게도 이 녹음을 사들인 곳은 데카의 자회사 브런즈윅이었다. 코럴 레코드의 밥 티엘이 곡을 밀었고, 같은 멤버의 녹음을 크리케츠 이름으로는 브런즈윅에서, 홀리 개인 이름으로는 코럴에서 내는 이중 체제가 생겼다. 「댓일 비 더 데이」는 그해 9월 미국 차트 1위, 11월 영국 차트 1위에 올랐다. (페티) 페티는 프로듀서이자 매니저였고, 곡의 저작권을 맡아 관리하는 음악 출판업도 겸했다. 그는 여러 곡의 작곡자 명단에 자기 이름을 올렸다. 당시 업계에서 드물지 않은 관행이었지만, 한 사람에게 겹친 이 역할들은 훗날 돈 문제의 씨앗이 됐다. 그래도 페티의 울림 방(에코 체임버)과 끈기 있는 실험은 크리케츠 소리의 절반을 이뤘다.
데카에서 빛을 못 본 곡을 클로비스에서 다시 녹음한 이 곡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같은 곡의 두 녹음이 실패와 성공을 가른 차이를 보여 준다.
- 도입부에서 홀리가 펜더 스트래토캐스터로 두 음을 동시에 짚어 미끄러져 내려오는 짧은 악구(더블 스톱)를 들어 보라. 이 몇 초가 곡 전체의 들뜬 기분을 정한다.
- 곡이 절(벌스)이 아니라 후렴으로 시작한다는 점에 주목하라. 제목이 든 후렴을 맨 앞에 내세워 한 번만 들어도 기억에 남게 했다.
- 홀리는 음절 끝을 살짝 뒤집어 올리는 딸꾹질 같은 창법(히컵)을 쓴다. 뒤에서 겹치는 남녀 코러스는 니키 설리번 등 러벅 친구들이 불렀다.
- 1956년 내슈빌 녹음판과 비교해 들어 보면, 내슈빌판은 템포가 느리고 반주가 굳어 있어 같은 곡이 전혀 다르게 들린다.
「페기 수」의 B면으로 나온 이 곡에는 드럼 없이도 리듬을 만들어 내던 클로비스의 실험정신이 담겼다. 막 시작된 사랑의 설렘을 속삭이듯 들려준다.
- 드럼처럼 들리는 탁탁 소리는 제리 앨리슨이 손바닥으로 자기 무릎을 친 소리다. 드럼 세트 없이 이렇게 가볍게 박자를 잡았다.
- 종소리처럼 맑은 건반은 페티의 아내 바이올렛 페티가 연주한 첼레스타(작은 쇠막대를 망치로 때려 소리 내는 건반악기)로, 간주 솔로까지 맡는다.
- 홀리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거의 말하듯 가깝게 부른다. 서서 연주하는 큰 현악기 베이스(콘트라베이스)가 바닥을 조용히 받친다.
- 2분 남짓한 곡이 끝날 때까지 음량이 거의 커지지 않는다. 록이 꼭 크게 울려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예로 자주 거론된다.
IV. 정점의 한 해 · 1957–1958
(정상) 1957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가 정점이었다. 「페기 수」, 「오, 보이!」, 「메이비 베이비」가 잇따라 차트에 올랐다. 「페기 수」는 원래 다른 여자 이름을 달고 있었으나, 앨리슨의 여자 친구 페기 수 제런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1957년 12월과 이듬해 1월에는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했는데, 두 번째 출연 때 진행자와 곡 선택을 두고 부딪히고도 원래 계획대로 「오, 보이!」를 크게 연주했다고 멤버들은 회고했다. (투어) 순회공연은 길고 고됐다. 1957년 8월 뉴욕 할렘의 아폴로 극장에 섰고, 가을에는 척 베리, 패츠 도미노, 에벌리 브러더스 등 여러 가수가 버스 한 대로 도시를 도는 합동 순회공연(패키지 투어)에 합류했다. 남부 몇몇 도시에서는 인종 분리법 때문에 흑인 가수들이 무대에 서지 못해 백인 출연자만 공연하는 일도 있었다. 버스에서 흑인 음악가들과 함께 보낸 시간은 그의 귀를 더 넓혔다. (안경) 이 무렵 그는 가는 테 안경을 굵은 검은 뿔테로 바꿨다. 그 전에는 무대에서 안경을 벗곤 했다고 전해진다. 뿔테를 숨기지 않은 그는 평범한 생김새의 청년도 록 스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변화) 1957년 말 니키 설리번이 지쳤다며 떠나 크리케츠는 3인조가 됐다. 1958년 초 호주를, 3월에는 영국을 돌았다. 영국에서 그가 든 펜더 스트래토캐스터와 단출한 편성은 그 나라 청년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무대 밖에서는 멤버들과 댈러스에서 오토바이를 사서 몰고 다니는 스물한 살이었다.
친구의 연인 이름을 제목으로 단 이 곡은 정점의 시작이었다.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는 단순한 고백을 리듬의 힘으로 끌고 간다.
-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굴러가는 드럼은 제리 앨리슨이 양손을 일정한 순서로 번갈아 치는 기본 연타(패러디들)를 탐탐에서 이어 간 것이다. 이 연타가 곡의 엔진이다.
- 홀리의 리듬 기타는 줄을 위에서 아래로만 빠르게 긋는 주법(다운스트로크)으로 벽처럼 소리를 채운다.
- 제목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홀리는 낮은 음에서 뒤집힌 높은 소리로 넘어가는 등 음색을 바꾼다. 매번 어떻게 다른지 비교하며 들어 보라.
- 간주 솔로에서 기타 소리가 갑자기 커지고 날카로워진다. 홀리가 연주하는 동안 니키 설리번이 기타의 픽업 선택 스위치(어느 쪽 소리 받개로 소리를 낼지 고르는 스위치)를 대신 젖혔다고 전해진다.
홀리 생전에 크리케츠 이름으로 나온 유일한 앨범으로, 클로비스 시절의 밴드 소리를 한 장에 담았다. 순회로 단련된 4인조의 패기가 그대로 들린다.
- 영상은 수록곡 「오, 보이!」로 골랐다. 홀리의 목소리가 가장 거칠게 뛰는 곡으로, 짧고 굵은 기타 솔로를 들어 보라.
- 「오, 보이!」 등 여러 곡의 남성 코러스는 크리케츠가 아니라 보컬 그룹 피크스가 나중에 따로 녹음해 덧입힌 것이다(오버더빙).
- 「낫 페이드 어웨이」에서 앨리슨은 드럼 대신 판지 상자를 두드렸다. 세 번 치고 두 번 치는 식으로 끊어지는 이 박자는 보 디들리가 즐겨 쓰던 리듬(보 디들리 비트)이다.
- 수록곡 「유브 갓 러브」는 같은 서부 텍사스 출신 로이 오비슨이 공동으로 쓴 곡이다.
홀리 개인 이름으로 코럴에서 낸 곡으로, 정점의 들뜬 기운이 2분이 안 되는 시간에 압축돼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숨 돌릴 틈 없이 쏟아내는 말투다.
- 반주 없이 목소리만으로 첫 단어를 음절 단위로 끊어 길게 끌다가 박자 속으로 뛰어드는 도입부가 곡의 표지다.
- 피아노가 박마다 화음을 내리찍으며 리듬을 이끈다. 기타보다 피아노가 앞에 나서는 드문 홀리 곡이다.
- 곡 길이는 2분이 채 되지 않는다. 절과 후렴이 쉼 없이 이어져 순식간에 끝나 버린 듯한 느낌을 준다.
- 음절 끝이 튀어 오르는 히컵 창법이 특히 두드러지는 곡이니, 각 행의 끝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라.
V. 뉴욕의 새 출발 · 1958
(결혼) 1958년 6월, 뉴욕의 음악 출판사 피어-서던에서 접수 담당으로 일하던 푸에르토리코 출신 마리아 엘레나 산티아고를 만났다. 두 사람은 두 달 뒤인 8월 15일 러벅에서 결혼했고, 곧 뉴욕 그리니치빌리지의 아파트로 옮겼다. 홀리는 클로비스와 러벅에 묶인 생활을 벗어나 뉴욕 음악계 한복판에서 일하고 싶어 했다. (결별) 가을 순회가 끝난 뒤 그는 페티와 갈라서기로 했다. 앨리슨과 몰딘은 고민 끝에 페티 곁에 남았고, '크리케츠'라는 이름도 그쪽에 남았다. 홀리는 페티가 음반이 팔릴 때마다 돌아와야 할 몫(로열티)을 제대로 정산하지 않는다고 의심했고, 페티는 회계가 정리될 때까지 돈을 묶어 두었다. 결별 직후 그의 손에는 현금이 거의 없었다고 전해진다. (현악) 10월 21일, 뉴욕의 피시언 템플에서 편곡자 딕 제이컵스가 이끈 오케스트라와 「트루 러브 웨이스」를 비롯한 네 곡을 녹음했다. 현악과 함께한 첫 녹음이자 생애 마지막 정식 스튜디오 녹음이었다. 기타를 내려놓고 현악 위에서 노래하는 그의 모습은 로커빌리 가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신호였다. (계획) 그는 자기 레이블과 출판사를 세워 다른 가수를 제작하겠다는 계획을 품었다. 9월에는 클로비스에서 러벅의 디제이 웨일런 제닝스의 첫 싱글을 직접 제작했다. 연말에는 아파트에서 테이프 녹음기를 틀어 놓고 기타 하나로 새 곡들을 녹음했는데, 이른바 '아파트 테이프'다. 결혼 이후의 곡들이 더 느리고 내밀해졌다는 것이 평론의 대체적인 평가다.
결혼 두 달 뒤인 1958년 10월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발라드로, 아내 마리아 엘레나에게 바친 곡이라고 전해진다. 그의 사후인 1960년에야 발표됐다.
- 딕 제이컵스가 편곡한 현악의 긴 음 위로 홀리가 마이크에 바짝 다가가 낮고 부드럽게 부른다. 히컵 창법을 거의 쓰지 않는다는 점이 이전 곡들과 다르다.
- 중간의 테너 색소폰 솔로는 뉴욕 세션 연주자 부미 리치먼의 연주다. 숨소리가 섞인 부드러운 음색에 귀 기울여 보라.
- 오케스트라와 한 공간에서 동시에 연주하며 녹음했고, 이 세션은 몇 시간 만에 네 곡을 끝냈다. 노래와 반주가 같은 숨으로 움직이는 느낌이 그 덕분이다.
VI. 겨울 무도회 · 1959
(순회) 묶인 돈과 새 살림 때문에 그는 내키지 않던 순회공연에 나섰다. 1959년 1월 23일 밀워키에서 시작한 '윈터 댄스 파티'였다. 반주는 기타의 토미 올섭, 베이스의 웨일런 제닝스, 드럼의 칼 번치가 맡았고, 리치 밸런스, 빅 바퍼(J. P. 리처드슨), 디온 앤드 더 벨몬츠가 함께했다. (추위) 일정은 중서부 지도 위를 지그재그로 오갔고, 버스는 난방이 자주 고장 났다. 영하의 날씨에 번치가 발에 동상을 입어 입원하자 남은 연주자들이 돌아가며 드럼을 쳤다. 1월 31일 미네소타주 덜루스 공연의 객석에는 열일곱 살의 로버트 지머먼, 훗날의 밥 딜런이 있었다. 딜런은 2017년 노벨 문학상 강연에서 그날 무대 위의 홀리와 눈이 마주쳤다고 회상했다. (추락) 2월 2일 아이오와주 클리어레이크의 서프 볼룸 공연 뒤, 홀리는 다음 공연지로 갈 경비행기를 빌렸다. 독감에 걸린 리처드슨에게 제닝스가 자리를 내줬고, 밸런스는 올섭과의 동전 던지기로 자리를 얻었다고 전해진다. 3일 새벽 1시 무렵 이륙한 비행기는 몇 분 만에 눈 덮인 옥수수밭에 떨어졌다. 홀리, 밸런스, 리처드슨, 스물한 살의 조종사 로저 피터슨이 모두 숨졌다. 미국 민간항공위원회는 계기 비행 경험이 부족한 조종사가 악천후 속에서 방향 감각을 잃은 것을 주된 원인으로 봤다. (장례) 2월 7일 러벅의 태버내클 침례교회에서 장례가 치러졌고, 그는 러벅 시립 묘지에 묻혔다. 스물두 살이었다. 제닝스는 그날 밤 버스와 비행기를 두고 홀리와 주고받은 짓궂은 농담을 평생 마음의 짐으로 안고 살았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같은 10월 세션의 곡으로, 사고 직전에 발매돼 그의 죽음 뒤 영국 1위에 올랐다. 떠난 연인에게 체념하듯 가볍게 작별을 고하는 화법이 사후에 다른 무게를 얻었다.
- 도입부부터 현악기들이 활 대신 손가락으로 줄을 튕기는 주법(피치카토)으로 통통 튀는 반주를 만든다. 이 소리가 곡 전체의 가벼운 걸음걸이를 정한다.
- 곡은 폴 앵카가 홀리를 위해 썼다. 이별 노래인데도 홀리는 상처 입은 목소리 대신 어깨를 으쓱하는 듯한 경쾌한 어조로 부른다.
- 편곡에서 현악은 화려하게 덮지 않고 리듬 악기처럼 쓰였다. 기타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로큰롤 가수가 팝 편곡으로 넘어가던 순간을 보여 준다.
VII. 남은 노래들 · 1959–1986
(사후) 죽음 직전에 나온 「잇 더즌트 매터 애니모어」는 그가 떠난 뒤 영국 차트 1위에 올랐다. 현악기 줄을 손가락으로 튕기는 주법(피치카토)으로 통통 튀는 이 노래는 사후에 전혀 다른 무게로 들렸다. 코럴은 아파트 테이프에 반주와 코러스를 덧입혀(오버더빙) 잇달아 냈고, 그의 노래는 미국보다 영국에서 더 오래 살아남았다. (리버풀) 1958년 리버풀의 쿼리멘, 곧 존 레넌·폴 매카트니·조지 해리슨이 처음으로 돈을 내고 녹음한 곡이 「댓일 비 더 데이」였다. 크리케츠처럼 곤충 이름을 비튼 밴드 이름 '비틀스'에도 그 흔적이 있고, 비틀스는 1964년 그의 「워즈 오브 러브」를 녹음했다. 레넌과 매카트니는 자기 곡을 직접 써도 된다는 것을 홀리에게서 배웠다고 말했다. 롤링 스톤스가 미국에서 낸 첫 싱글도 그의 「낫 페이드 어웨이」였다. (흔적) 엘턴 존은 어린 시절 홀리를 따라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고 회고했고,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무대에 오르기 전 홀리의 노래를 들으며 마음을 다잡는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1년 돈 매클린의 「아메리칸 파이」는 추락한 날을 한 세대가 잃어버린 순수의 상징으로 노래했다. (헌정) 1986년 그는 록앤롤 명예의 전당의 첫 헌액자 가운데 한 명이 됐다. 활동 기간은 2년 남짓이었지만, 그가 남긴 것은 곡의 수보다 방식이었다. 스스로 쓰고, 스스로 편곡하고, 스튜디오에서 실험하는 록 음악가라는 방식이 그에게서 비롯됐다는 데 평론은 대체로 뜻을 같이한다.
덜 알려진 이야기
(안경) 사고 현장에서 찾지 못했던 뿔테 안경은 1959년 봄 눈이 녹으며 발견돼 아이오와주 세로고도 카운티 보안관 사무실의 봉투에 담겼다. 봉투는 20년 넘게 잊혔다가 1980년 법원 건물에서 다시 나왔고, 유족에게 돌아가 지금은 러벅의 버디 홀리 센터에 전시돼 있다. (제작자) 웨일런 제닝스를 음악계로 이끈 사람이 홀리였다는 사실은 추락 일화에 가려 덜 알려졌다. 1958년 9월 그는 제닝스의 첫 싱글 「졸레 블롱」을 제작하며 뉴욕의 흑인 색소폰 연주자 킹 커티스를 클로비스로 불렀고, 커티스는 홀리의 「레미니싱」에도 연주했다. 제작자로서 그가 어디로 가려 했는지 보여 주는 드문 기록이다. (덧칠) 흔히 듣는 아파트 테이프는 대부분 그가 들어 본 적 없는 소리다. 1959년 코럴은 편곡자 잭 핸슨에게 반주와 코러스를 덧입히게 했고, 1960년대에는 페티가 밴드 파이어볼스를 데려와 다시 반주를 입혔다. 기타와 목소리만 담긴 원래 녹음은 훗날 전집이 나오면서야 비교적 온전히 들을 수 있게 됐다. (판권) 홀리 곡들의 출판권 상당 부분은 1970년대 중반 폴 매카트니의 회사 MPL로 넘어갔다. 매카트니는 1976년부터 영국에서 홀리의 생일 무렵 '버디 홀리 주간'을 열었다. 소년 시절의 우상을 기리는 일이 음악 사업의 장부 위에서도 이어진 셈이다.
용어 노트 📚🔎
로커빌리
(말뜻) 록(rock)과, 미국 남부 시골 음악을 낮잡아 부르던 말 힐빌리(hillbilly)를 합친 말이다. 시골의 컨트리 음악에 록의 박자를 얹었다는 뜻이 이름에 그대로 들어 있다. (록에서) 1950년대 중반 미국 남부에서 생긴 초기 록 음악의 한 갈래로, 컨트리의 기타 연주와 흑인 리듬 앤 블루스의 들뜬 박자가 섞였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초기 녹음과 버디 홀리의 데뷔 시절이 대표적이다. 할머니 댁의 익숙한 반찬에 요즘 유행하는 매운 소스를 곁들였더니 전혀 새로운 맛이 나는 것과 비슷하다.
리듬 앤 블루스
(말뜻) 리듬(rhythm)과 블루스(blues)를 합친 말이다. 1940년대 말 미국 음반 업계가 흑인 음악을 가리키던 차별적인 이름을 대신해 쓰기 시작했다. (록에서) 블루스에 춤추기 좋은 강한 박자를 더한 흑인 대중음악으로, 로큰롤의 가장 중요한 뿌리다. 버디 홀리는 밤마다 먼 방송국에서 흘러나오는 이 음악을 들으며 자랐다. 같은 노래라도 손뼉을 크게 치며 부르면 갑자기 몸이 들썩이게 되는데, 그 들썩임을 음악의 중심에 놓은 것이 리듬 앤 블루스다. (다른 데서는) 오늘날 R&B라고 하면 1990년대 이후의 매끈한 흑인 팝·소울 음악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패키지 투어
(록에서) 여러 가수가 한 무리로 묶여 같은 버스를 타고 도시를 돌며, 공연 하나에서 각자 몇 곡씩 부르는 순회공연이다. 1950년대 미국에서 흔했고, 버디 홀리의 마지막 순회인 윈터 댄스 파티도 이런 방식이었다. 학교 축제에서 반마다 몇 분씩 장기 자랑을 이어 무대 하나를 채우는 것과 비슷한데, 그걸 매일 밤 다른 도시에서 되풀이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다른 데서는) 여행업에서는 항공권·숙소·관광을 한데 묶어 파는 단체 여행 상품을 말한다.
음악 출판
(말뜻) 녹음 기술이 없던 시절에는 곡을 악보로 인쇄해 파는 것이 곡으로 돈을 버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곡의 권리를 다루는 사업에 '출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록에서) 곡의 저작권을 맡아 관리하며, 음반·방송·공연에서 곡이 쓰일 때마다 사용료를 걷어 작곡자와 나누는 사업이다. 녹음된 소리가 아니라 멜로디와 가사라는 곡 자체에 대한 권리라는 점이 중요하다. 내가 그린 그림을 다른 반이 티셔츠에 쓸 때마다 대신 허락을 내주고 사용료를 받아다 주는 대리인을 떠올리면 된다. (다른 데서는) 보통 출판이라고 하면 책이나 잡지를 펴내는 일을 뜻한다.
로열티
(말뜻) 영어 royalty는 원래 왕족·왕권을 뜻했다. 옛날 왕이 광산이나 땅을 쓰게 해 주고 받던 사용료에서, 남의 권리를 쓴 대가로 내는 돈이라는 뜻이 생겼다. (록에서) 음반이 한 장 팔리거나 곡이 방송될 때마다 작곡자와 가수에게 돌아가는 몫이다. 계약서에 몇 퍼센트로 정해지고, 누가 얼마를 받는지 정산하는 문제로 다툼이 자주 생긴다. 친구들이 내가 만든 게임 맵을 한 번 쓸 때마다 내게 포인트가 쌓이는 규칙과 비슷한데, 그 포인트를 중간에서 누가 관리하느냐가 늘 문제가 된다. (다른 데서는) 프랜차이즈 업계에서는 가맹점이 본사의 상표와 방식을 쓰는 대가로 내는 돈을 말한다.
오버더빙
(말뜻) 영어 over(위에)와 dub(소리를 덧녹음하다)를 합친 말로, 이미 녹음된 소리 위에 덧입힌다는 뜻이다. (록에서) 먼저 녹음한 연주를 틀어 놓고 들으면서 새 소리를 따로 녹음해 겹치는 방법이다. 크리케츠의 노래에 다른 보컬 그룹의 코러스를 나중에 덧입힌 것, 홀리가 죽은 뒤 아파트 테이프에 반주를 입힌 것이 모두 오버더빙이다. 연필로 다 그린 그림 위에 투명 필름을 대고 색을 덧칠하는 것과 비슷하다 — 원래 그림은 그대로인데 보이는 모습은 달라진다.
피치카토
(말뜻) 이탈리아어 pizzicare(꼬집다, 튕기다)에서 나온 말로, '꼬집듯 튕긴'이라는 뜻이다. (록에서) 바이올린 같은 현악기를 활로 긋지 않고 손가락으로 줄을 튕겨, 짧고 톡톡 끊어지는 소리를 내는 주법이다. 원래 클래식 음악의 용어지만 「잇 더즌트 매터 애니모어」처럼 팝과 록의 현악 편곡에서도 쓰인다. 필통 위에 고무줄을 걸고 손가락으로 튕길 때 나는 통통 소리를 떠올리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