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y and the Family Stone
흑인과 백인, 남자와 여자가 한 무대에 서서 가스펠과 록과 소울을 하나의 리듬으로 엮은 밴드.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함께한 사람들 ⏳🌊
- 가족알파 스튜어트
슬라이의 어머니로, 다섯 남매를 교회 음악 속에서 길렀고 그중 넷이 무대에 섰다.
- 후원톰 도나휴
샌프란시스코의 DJ이자 오텀 레코드 설립자로, 젊은 슬라이에게 프로듀서 자리를 맡겼다.
- 동료데이비드 카프랄릭
에픽 레코드에서 밴드와 계약하고 매니저로 전성기를 함께했다.
- 동료신시아 로빈슨
트럼펫과 외침으로 밴드의 소리를 연 멤버로, 결성 이전부터 슬라이와 함께했다.
- 동료래리 그레이엄
슬랩 주법으로 펑크 베이스의 어휘를 새로 쓴 베이시스트로, 훗날 프린스와 가까이 지냈다.
- 영향프린스
혼성 밴드 구성과 장르를 넘나드는 사운드를 이어받은 후배로, 래리 그레이엄과 함께 무대에 섰다.
I. 밸리호의 스튜어트 가 · 1943–1966
(결성) 1966년 말,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서 두 밴드가 하나로 합쳐졌다. 그 중심에 선 실베스터 스튜어트, 훗날의 슬라이 스톤은 1943년 3월 미국 텍사스주 덴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K. C. 스튜어트와 어머니 알파는 오순절 계열 흑인 교단인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교회 신자였고, 가족은 그가 어릴 때 캘리포니아주 밸리호로 옮겨 자리를 잡았다. (교회) 로레타, 실베스터, 프레디, 로즈, 바에타 다섯 남매는 교회에서 노래를 배웠다. 1956년 남매 가운데 넷은 스튜어트 포라는 이름으로 지역 가스펠 음반을 냈다. 슬라이는 어려서부터 건반과 기타, 베이스와 드럼을 두루 익혔다. (두왑) 고교 시절 그는 인종이 섞인 친구들과 두왑 그룹 바이스케인스에서 노래했고, 밸리호 주니어 칼리지에서 음악 이론을 공부했다. 그는 훗날 이 시기의 이론 수업이 곡을 짜는 바탕이 됐다고 돌아봤다. (라디오) 1960년대 중반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흑인 음악 방송 KSOL과 KDIA에서 DJ로 일하며 비틀스와 밥 딜런을 소울 음악과 나란히 틀었다. 같은 무렵 DJ 톰 도나휴가 세운 오텀 레코드의 프로듀서로 보비 프리먼의 「컴 온 앤 스윔」(1964)을 쓰고 만들었고, 백인 록 밴드 보 브러멀스의 음반도 제작했다. 방송 부스와 녹음실에서 그는 장르의 경계보다 귀에 붙는 소리를 먼저 따지는 법을 익혔다. 슬라이 스톤이라는 이름도 이 시기에 굳었다.
II. 하나가 된 가족 · 1966–1968
(합병) 슬라이는 트럼펫 연주자 신시아 로빈슨과 함께 슬라이 앤 더 스토너스를, 동생 프레디는 드러머 그레그 에리코와 함께 프레디 앤 더 스톤 솔스를 이끌고 있었다. 색소폰 연주자 제리 마티니의 제안으로 두 밴드가 합쳤고, 베이시스트 래리 그레이엄이 가세했다. 얼마 뒤 누이 로즈가 건반과 보컬로, 막내 바에타가 코러스 그룹 리틀 시스터로 합류했다. (혼성) 흑인과 백인, 남성과 여성이 한 무대에 나란히 선 구성은 당시 미국 팝에서 드물었다. 리드 보컬은 주로 슬라이가 맡았지만 프레디, 로즈, 그레이엄, 로빈슨이 소절을 나눠 불렀고, 작곡과 편곡, 프로듀싱은 슬라이가 쥐었다. 로빈슨은 주요 팝 밴드에서 트럼펫을 맡은 보기 드문 여성 연주자였다. (계약) 레드우드시티의 클럽 윈체스터 캐시드럴에서 밤늦도록 이어지던 공연이 에픽 레코드의 데이비드 카프랄릭의 눈에 띄었고, 1967년 계약이 성사됐다. 카프랄릭은 이후 매니저로 밴드와 함께했다. 데뷔 앨범 「어 홀 뉴 싱」(1967)은 동료 음악가들의 호평을 받았지만 판매는 저조했다. (전환) 레이블은 더 단순하고 대중적인 곡을 원했다. 슬라이는 그 요구를 일종의 공식처럼 받아들여 「댄스 투 더 뮤직」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1968년 초 이 곡은 빌보드 팝 차트 8위에 올랐다. 가스펠의 주고받기, 록의 일그러진 기타, 소울의 혼 섹션이 한 곡에 겹친 이 소리는 사이키델릭 소울의 출발점으로 꼽히며, 모타운의 프로듀서들도 여기에 귀를 기울였다.
데뷔 앨범의 부진 뒤 레이블의 요구에 답해 만든 곡으로, 밴드의 첫 히트이자 사이키델릭 소울의 출발점이 됐다.
- 첫머리에서 슬라이가 청중에게 직접 말을 거는 듯한 외침과 신시아 로빈슨의 날카로운 외침이 곡을 연다. 노래라기보다 파티의 초대장처럼 들린다.
- 중반 쉬어 가는 대목(브레이크)에서 드럼, 베이스, 오르간, 기타, 혼이 하나씩 차례로 들어온다. 악기마다 이름을 불러 무대에 세우듯 소리가 쌓여 간다.
- 래리 그레이엄의 아주 낮은 목소리가 베이스처럼 바닥을 깔고, 그 위로 프레디·로즈·슬라이의 목소리가 엇갈리며 주고받는다(콜 앤드 리스폰스). 교회 성가대의 주고받기를 댄스곡으로 옮긴 셈이다.
- 일그러진 기타 소리(퍼즈)와 손뼉 같은 가스펠 리듬이 한 곡 안에 나란히 놓인다. 록과 교회 음악이 이렇게 한 몸이 된 것이 이 곡의 새로움이었다.
III. 모두의 노래 · 1968–1969
(메시지) 「라이프」(1968)를 거쳐 1969년 5월 「스탠드!」가 나왔다. 슬라이는 춤곡의 활력 위에 평등과 자존의 메시지를 얹었고, 인종 차별의 언어를 정면으로 겨눈 곡도 실었다. 앞서 나온 싱글 「에브리데이 피플」은 1969년 2월 빌보드 1위에 올라 4주를 지켰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사는 법을 혼성 밴드가 노래한다는 사실 자체가 메시지였다. (슬랩) 래리 그레이엄의 베이스는 밴드 사운드의 축이었다. 그는 피아노를 치던 어머니 델 그레이엄과 클럽에서 연주하던 시절, 드러머가 없는 빈자리를 메우려 엄지로 줄을 내리치고 손가락으로 튕겨 올리는 주법을 익혔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 슬랩 주법은 이후 펑크 베이스의 기본 어휘가 됐다. (우드스톡) 1969년 8월 17일 새벽, 밴드는 우드스톡 페스티벌 무대에 올랐다. 새벽 3시가 넘은 시각, 지쳐 있던 수십만 관객이 「아이 원트 투 테이크 유 하이어」에 맞춰 일어나 외침으로 응답했고, 이 장면은 이듬해 공개된 기록영화 「우드스톡」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해 여름에는 「핫 펀 인 더 서머타임」이 2위에 올랐다. (영향) 이 시기 템테이션스는 프로듀서 노먼 휫필드의 손을 거쳐 사이키델릭 소울로 방향을 틀었고, 잭슨 파이브의 초기 히트에도 패밀리 스톤 식의 보컬 주고받기와 리듬이 배어 있다는 평이 많다. 마이클 잭슨이 소년 시절 들은 소리 가운데 하나가 이것이었다. 커티스 메이필드와 마일스 데이비스, 그리고 훗날의 프린스까지 이 사운드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흡수했다.
혼성 밴드가 평등과 관용을 노래해 1969년 초 4주간 1위에 오른 곡으로, 밴드의 이상이 가장 단순한 형태로 담겼다.
- 베이스가 거의 한 음만 되짚으며 곡 전체를 받친다는 점이 자주 언급된다. 화려함을 덜어 낸 바닥 덕분에 메시지가 또렷이 들린다.
- 슬라이와 로즈가 소절을 나눠 부르는 짜임에 귀 기울여 볼 것. 남녀의 목소리가 번갈아 나오는 구성 자체가 곡의 주제와 겹친다.
- 가사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받아들이자는 이야기를 동요처럼 쉬운 화법으로 전한다. 설교 대신 놀이처럼 말하는 것이 이 곡의 힘이다.
- 통통 튀듯 가볍게 굴러가는 리듬과 짧은 혼 장식이 곡을 3분 안팎에 깔끔하게 끝낸다. 라디오용 팝의 경제성이 돋보인다.
「스탠드!」 싱글의 B면으로 나왔다가 우드스톡의 새벽 무대로 밴드의 상징이 된 곡이다.
- 래리 그레이엄의 굵고 거칠게 울리는 베이스와 프레디의 짧게 끊어 치는 기타 리프가 맞물리며 곡을 밀어붙인다.
- 멤버들이 돌아가며 짧게 외치듯 부르고, 모두가 한목소리로 받는다. 한 사람의 리드 보컬이 아니라 밴드 전체가 노래하는 구조다.
- 1969년 8월 우드스톡 새벽 무대에서 슬라이는 관객에게 함께 외치자고 청했고, 수십만 명이 응답했다. 기록영화 「우드스톡」에 담긴 이 장면은 록 페스티벌 역사의 명연으로 꼽힌다.
- 스튜디오 녹음보다 라이브에서 템포가 더 빨라지고 길게 늘어난다. 두 버전을 나란히 들어 보면 이 밴드가 무대에서 얼마나 달아올랐는지 알 수 있다.
IV. 폭동의 녹음실 · 1970–1971
(땡큐) 1970년 2월 「땡큐 (팔레틴미 비 마이스 엘프 어게인)」가 1위에 올랐다. 그러나 곡의 결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앞선 히트곡들을 되짚으며 성공 뒤의 피로를 비추는 듯한 이 곡은 밴드가 전환점에 섰음을 알렸다. (이주) 같은 해 슬라이는 로스앤젤레스 벨에어로 거처를 옮겼다. 코카인과 PCP 같은 약물에 깊이 빠졌다는 사실은 그 자신도 회고록에서 인정했다. 공연에 늦거나 아예 나타나지 않는 일이 잦아지면서 공연 기획자와 관객의 신뢰가 흔들렸다. 1970년 7월 시카고 그랜트 공원 무료 공연은 시작 전 관객과 경찰의 충돌로 번졌다. 매니저 데이비드 카프랄릭은 블랙 팬서 당이 슬라이에게 자신을 흑인 매니저로 바꾸라고 권했다고 주장했다. (라이엇) 1971년 11월 나온 「데어즈 어 라이엇 고잉 온」은 슬라이가 집과 녹음실에서 거의 혼자 쌓아 올린 앨범이었다. 그는 초기 드럼 머신인 마에스트로 리듬 킹으로 박자를 짜고, 같은 테이프 위에 녹음을 거듭 덧입혔다. 빌리 프레스턴과 보비 워맥 등이 일부 연주에 참여했다. 흐릿하고 가라앉은 소리는 1960년대의 낙관이 끝난 뒤의 공기와 맞물렸고, 앨범은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싱글 「패밀리 어페어」는 싱글 차트 1위에 올랐다. (유산) 비평가들은 이 앨범을 펑크를 내면으로 돌린 작품으로 평가하며, 디안젤로의 「부두」(2000)처럼 후대의 앨범들이 그 질감을 되짚었다고 본다. 그사이 1971년 드러머 그레그 에리코가 밴드를 떠났다.
1970년 2월 1위에 오른 곡으로, 정점의 순간에 이미 어두워진 결을 품어 「라이엇」으로 가는 다리가 됐다.
- 래리 그레이엄의 슬랩 베이스가 녹음에서 전면에 나선 대표 사례로 꼽힌다. 엄지로 내리치는 둔탁한 음과 손가락으로 튕겨 올리는 날카로운 음이 번갈아 나온다.
- 느리고 묵직한 템포에 같은 리프가 끝없이 되풀이된다. 화음 진행보다 반복되는 리듬이 곡을 이끄는, 펑크의 원형 같은 짜임이다.
- 가사는 앞선 히트곡 제목들을 하나씩 불러내며 지나온 길을 돌아본다. 감사의 말 같지만 피로와 거리감이 함께 묻어나는 화법이다.
- 제목은 소리 나는 대로 비틀어 쓴 철자다. 「데어즈 어 라이엇 고잉 온」에는 이 곡을 더 느리고 어둡게 다시 녹음한 버전이 실려 있어 비교해 듣기 좋다.
슬라이가 거의 혼자 쌓아 올린 「데어즈 어 라이엇 고잉 온」의 싱글로, 흐트러져 가던 밴드와 가족의 이야기가 겹쳐 들린다.
- 곡을 받치는 것은 드러머가 아니라 초기 드럼 머신 마에스트로 리듬 킹의 가볍게 똑딱이는 박자다. 1위에 오른 팝 싱글 가운데 드럼 머신을 쓴 이른 사례로 꼽힌다.
- 빌리 프레스턴이 연주한 전기 피아노 선율이 곡에 따뜻하고 둥근 색을 입힌다.
- 슬라이의 보컬은 노래라기보다 낮게 중얼거리는 쪽에 가깝고, 로즈의 맑은 코러스가 그와 대비를 이룬다. 힘을 뺀 목소리가 오히려 더 가깝게 들린다.
- 같은 테이프 위에 녹음을 거듭 덧입힌(오버더빙) 탓에 소리가 흐릿하고 먹먹하다. 이 질감이 가족이라는 끈의 따뜻함과 무게를 함께 담은 가사의 정서와 맞물린다.
V. 흩어지는 가족 · 1972–1975
(이별) 1972년 래리 그레이엄이 밴드를 떠났다. 그는 곧 그레이엄 센트럴 스테이션을 결성해 슬랩 베이스를 앞세운 펑크를 이어 갔다. 빈자리는 베이시스트 러스티 앨런과 드러머 앤디 뉴마크가 메웠고, 색소폰 연주자 팻 리조가 합류했다. (프레시) 1973년 6월 나온 「프레시」는 「라이엇」의 어둠에서 한 걸음 걸어 나온 앨범이었다. 리듬은 더 단단하고 간결해졌고, 「이프 유 원트 미 투 스테이」는 팝 차트 12위에 올랐다. 로즈가 노래한 「케 세라 세라」 커버는 가스펠 집안의 찬송처럼 울렸다. 마일스 데이비스가 이 앨범을 자기 밴드 멤버들에게 거듭 들려줬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무대) 1974년 6월 슬라이는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 무대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2만 명 넘는 관객이 그 장면을 지켜봤다. 사생활마저 공연이 되던 시기였다. 같은 해 나온 「스몰 토크」는 차분한 정서를 담았지만 반응은 미지근했다. (끝) 1975년 1월 뉴욕 라디오 시티 뮤직홀 공연은 객석이 크게 빈 채 치러졌고, 이 공연을 끝으로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은 사실상 해산했다. 혈연과 우정으로 묶였던 밴드는 이름 그대로의 가족으로 끝까지 남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이 남긴 리듬은 이미 소울과 록, 재즈의 연주자들에게 넘어가 있었다.
새 리듬 섹션과 함께 만든 「프레시」의 대표곡으로, 그레이엄과 에리코가 떠난 뒤에도 슬라이의 감각이 살아 있음을 보여 줬다.
- 러스티 앨런의 베이스가 반주에 머물지 않고 멜로디처럼 노래하며 곡을 이끈다. 베이스 라인만 따라 들어도 곡의 흐름이 잡힌다.
- 슬라이의 보컬은 낮은 음역의 중얼거림에서 시작해 후반으로 갈수록 갈라지는 높은 소리로 치솟는다. 감정이 한 곡 안에서 서서히 끓어오른다.
- 앤디 뉴마크의 드럼은 꼭 필요한 음만 치는 간결한 연주다. 빈틈이 많은 편곡이 오히려 긴장을 만든다.
- 가사는 관계 안에서도 자기다움을 지키겠다는 담담한 화법을 취한다. 「라이엇」의 어둠과 달리 한결 맑아진 목소리로 들린다.
VI. 남은 노래들 · 1975–2025
(솔로) 슬라이는 「하이 온 유」(1975)를 시작으로 솔로와 밴드 이름을 오가며 음반을 냈다. 1979년 워너 브라더스로 옮겨 「백 온 더 라이트 트랙」을 냈고, 조지 클린턴의 펑커델릭과 작업을 함께한 뒤 「에인트 벗 더 원 웨이」를 끝으로 이 이름의 정규 작업은 끊겼다. 1983년 6월 그는 플로리다에서 코카인 소지 혐의로 체포됐다. (멤버) 멤버들은 각자의 길을 갔다. 래리 그레이엄은 「원 인 어 밀리언 유」(1980)로 솔로 히트를 냈고, 훗날 프린스와 가까워져 함께 무대에 섰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 신자로서 프린스가 같은 신앙을 갖는 데 영향을 준 것으로 널리 보도됐다. 프레디는 밸리호에서 목사가 됐고, 신시아 로빈슨과 제리 마티니는 패밀리 스톤이라는 이름으로 옛 노래를 연주했으며, 바에타도 패밀리 스톤이라는 이름의 밴드를 이끌었다. 로빈슨은 2015년 세상을 떠났다. (귀환) 1993년 밴드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2006년 그래미 시상식 헌정 무대에 오랜만에 모습을 보인 슬라이는 노래 도중 무대를 떠났다. 그는 로열티를 둘러싼 법정 다툼을 오래 벌였고, 2015년 로스앤젤레스 배심원단은 그의 손을 들어 줬다. (만년) 2023년 그는 회고록 「땡큐 (팔레틴미 비 마이스 엘프 어게인)」를 냈고, 2019년 무렵부터 약물을 끊었다고 썼다. 2025년 2월 퀘스트러브가 연출한 다큐멘터리 「슬라이 리브스!」가 공개됐고, 같은 해 6월 9일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덜 알려진 이야기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이라는 이름의 가족은 홍보 문구가 아니었다. 1956년 스튜어트 남매 가운데 넷이 스튜어트 포라는 이름으로 지역 가스펠 음반을 냈는데, 슬라이는 그때 열세 살이었다. 이 음반은 큰 레이블이 아니라 교회 주변의 작은 유통망에서 나와 전기에서 각주처럼만 언급되지만, 밴드의 주고받는 보컬이 어디서 왔는지를 보여 주는 1차 자료다. 펑크의 개척자로 기억되는 슬라이의 첫 경력은 뜻밖에도 백인 록 쪽에 걸쳐 있었다. 오텀 레코드 시절 그는 영국 밴드처럼 보이던 보 브러멀스의 음반을 제작했고, 그레이스 슬릭이 몸담았던 샌프란시스코 밴드 그레이트 소사이어티의 초기 녹음도 맡았다. 훗날의 명성이 너무 커서 가려졌을 뿐, 그가 록과 소울을 섞은 것은 즉흥적 발상이 아니라 몇 해 동안 양쪽 녹음실을 오간 경험에서 나왔다. 「데어즈 어 라이엇 고잉 온」의 음반 뒷면에는 앨범과 같은 제목의 곡이 올라 있지만, 재생 시간은 0분 0초로 표기돼 있고 실제로는 소리가 없다. 슬라이는 훗날 폭동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폭동이라는 제목을 걸고도 정작 그 노래는 비워 둔 셈이어서, 이 앨범을 분노의 기록으로만 읽는 통념과 결이 다른 대목으로 꼽힌다.
용어 노트 📚🔎
펑크 (Funk)
(말뜻) 영어 funk 는 원래 땀이나 몸에서 나는 진한 냄새를 가리키던 속어였다. 거기서 나온 funky 가 꾸미지 않은, 몸으로 느끼는 음악을 칭찬하는 말로 바뀌었다. (팝에서) 1960년대 후반 미국 흑인 음악에서 나온 장르로, 멜로디보다 리듬을 앞세운다. 베이스와 드럼, 짧게 끊어 치는 기타가 같은 무늬를 계속 되풀이하며 몸을 움직이게 만든다. 줄넘기를 할 때 줄이 바닥을 치는 소리가 일정하게 반복돼야 계속 뛸 수 있듯, 펑크도 반복되는 리듬이 곡의 심장이다. (다른 데서는) 영어에서 in a funk 라고 하면 기분이 가라앉은 우울한 상태를 뜻한다. 철자가 같은 펑크 록의 펑크(punk)와는 다른 말이다.
슬랩 베이스
(말뜻) 슬랩(slap)은 영어로 손바닥으로 찰싹 때린다는 뜻이다. (팝에서) 전기 베이스의 줄을 엄지로 내리쳐 둔탁하게 울리고, 다른 손가락으로 줄을 걸어 튕겨 올려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주법이다. 래리 그레이엄이 드러머 없이 연주하던 시절 큰북과 작은북의 역할을 베이스로 대신하려다 익혔다고 밝혀, 이 주법을 널리 퍼뜨린 사람으로 꼽힌다. 고무줄을 손가락으로 당겼다 놓으면 탁 하고 튀는 소리가 나는데, 슬랩의 튕기는 소리가 꼭 그런 원리다.
사이키델릭 소울
(말뜻) 사이키델릭(psychedelic)은 그리스어로 마음(psyche)과 드러나다(delos)를 합친 말로, 마음 깊은 곳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팝에서) 1960년대 후반 소울 음악에 록의 일그러진 기타, 긴 연주, 실험적인 녹음 효과를 섞은 흐름을 말한다.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이 길을 열었고, 템테이션스 같은 모타운 그룹도 뒤따랐다. 늘 먹던 떡볶이에 치즈와 크림을 넣어 전혀 새로운 맛을 낸 것처럼, 익숙한 소울에 낯선 재료를 섞은 음악이다. (다른 데서는) 미술과 패션에서는 강렬한 원색과 소용돌이 무늬처럼 어지러울 만큼 화려한 스타일을 가리킨다.
콜 앤드 리스폰스
(말뜻) 영어로 부름(call)과 응답(response)이라는 뜻이다. (팝에서) 한 사람이 한 소절을 부르면 다른 사람이나 무리가 받아서 응답하는 노래 방식이다. 흑인 교회에서 목사와 신도가 말을 주고받던 전통에서 내려와 가스펠, 소울, 펑크로 이어졌다. 운동회에서 응원단장이 선창하면 반 전체가 구호로 받아치는 것과 같은 짜임이다.
드럼 머신
(팝에서) 사람이 드럼을 치는 대신 전자 장치가 미리 정해진 박자를 자동으로 연주하는 기계다. 슬라이는 「데어즈 어 라이엇 고잉 온」에서 마에스트로 리듬 킹이라는 초기 드럼 머신을 써서, 히트 앨범에 이 기계를 쓴 이른 사례를 남겼다. 오늘날의 힙합과 전자 음악에서는 거의 빠지지 않는 도구가 됐다. 리듬 게임에서 화면의 박자가 사람의 손과 상관없이 정확히 흘러가는 것처럼, 드럼 머신도 지치거나 흔들리지 않고 같은 박자를 이어 간다.
오버더빙
(말뜻) 영어 over(위에)와 dub(녹음을 입히다)를 합친 말로, 이미 있는 녹음 위에 새 소리를 덧입힌다는 뜻이다. (팝에서) 먼저 녹음한 반주를 들으면서 노래나 다른 악기를 따로 녹음해 겹치는 방법이다. 한 사람이 여러 악기를 차례로 녹음해 혼자서 밴드 소리를 만들 수도 있다. 슬라이는 「라이엇」을 만들며 같은 테이프에 녹음을 거듭 덧입혀, 소리가 흐릿하고 먹먹해지는 독특한 질감을 남겼다. 미술 시간에 수채화를 칠하고 마르면 그 위에 다시 색을 덧칠하는 것과 비슷한데, 너무 여러 번 덧칠하면 종이가 닳듯 테이프도 소리가 뭉개진다. (다른 데서는) 영화에서 더빙은 외국어 대사를 다른 언어 목소리로 바꿔 입히는 일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