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y Charles
'나는 음악을 몸 안에 품고 태어났다.' — 자서전에서 레이 찰스는 음악을 갈비뼈나 심장처럼 몸의 일부라고 말했다.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함께한 사람들 ⏳🌊
- 가족아리사 로빈슨
눈먼 아들에게 스스로 서는 법을 가르친 어머니로, 그가 열네 살 때 세상을 떠났다.
- 스승와일리 피트먼
그린빌의 카페 주인으로, 세 살 소년을 피아노 앞에 앉히고 부기우기를 처음 가르쳤다.
- 우정퀸시 존스
시애틀에서 만난 후배로, 그에게 편곡을 배웠고 평생 형제 같은 친구이자 협업자로 남았다.
- 후원아흐메트 어테건
애틀랜틱 레코드의 공동 창업자로, 그가 흉내를 버리고 자기 소리를 찾도록 시간을 내주었다.
- 동료마지 헨드릭스
레이렛츠의 리드 보컬로, 「힛 더 로드 잭」 등에서 그와 노래를 주고받은 무대 위 파트너였다.
- 우정아레사 프랭클린
1971년 필모어 웨스트에서 그를 무대로 불러 함께 노래한, 소울의 다음 세대를 연 가수였다.
I. 그린빌의 소년 · 1930–1945
(출생) 1930년 9월, 미국 조지아주 올버니에서 레이 찰스 로빈슨이 태어났다. 어머니 아리사 로빈슨은 십대의 어린 나이였고, 막일을 하던 아버지 베일리 로빈슨은 가정에 거의 머물지 않았다. 갓난아이였던 그는 어머니를 따라 플로리다주 북부의 작은 마을 그린빌로 옮겨 가 그곳에서 자랐다. 아버지의 아내 메리 제인 로빈슨도 그를 아들처럼 돌봤다. (피아노) 동네 카페 '레드 윙'의 주인 와일리 피트먼이 세 살 무렵의 소년을 피아노 의자에 앉혔다. 피트먼은 부기우기를 쳤고, 아이가 건반을 마음껏 두드리게 내버려 두며 손놀림을 가르쳤다. 카페의 주크박스에서 흘러나오던 블루스와 마을 교회의 찬송이 그의 첫 교실이었다. (상실) 다섯 살 무렵 남동생 조지가 빨래통에 빠져 숨졌다. 그는 동생을 건져 내려 했으나 힘이 모자랐다. 그 무렵부터 시력이 흐려지기 시작해 일곱 살에는 거의 완전히 잃었다. 원인은 녹내장으로 추정되며, 가난한 흑인 가정에게 제때의 진단과 치료는 먼 이야기였다. (자립) 어머니는 눈먼 아들을 감싸기만 하지 않았다. 장작 패기와 바닥 닦기를 스스로 하게 했고, 1937년 세인트오거스틴의 플로리다 농아·맹인학교에 보냈다. 인종에 따라 나뉜 그 학교의 흑인 구역에서 그는 점자로 악보 읽는 법을 배우고 쇼팽과 바흐를 쳤으며, 머릿속으로 편곡을 짜는 습관을 들였다. (고아) 아버지는 그가 열 살 무렵 세상을 떠났고, 1945년 열네 살에는 어머니마저 잃었다. 그는 훗날 자서전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생애 가장 깊은 슬픔으로 꼽았다. 그해 그는 학교를 떠나 스스로 생계를 꾸리기로 했다.
II. 지도의 반대편 · 1945–1952
(떠돌이) 그는 잭슨빌로 가 지인의 집에 머물며 흑인 극장과 클럽의 밴드에서 피아노를 쳤다. 이어 올랜도와 탬파를 떠돌았는데, 일거리가 끊기면 며칠씩 굶었다고 자서전에 적었다. 남부의 작은 무대는 그에게 생계였지 미래는 아니었다. (시애틀) 1948년, 열일곱 살의 그는 플로리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대도시를 골라 시애틀로 떠났다. 그곳에서 트리오를 꾸려 클럽에 섰고, 당시 그가 노래하던 방식은 냇 킹 콜과 찰스 브라운을 빼닮은 부드러운 흉내였다. 손님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들려주는 일에 그는 능숙했다. (퀸시) 시애틀에서 그는 세 살 아래의 트럼펫 소년 퀸시 존스를 만났다. 그는 퀸시에게 편곡의 기초를 가르쳤고, 두 사람은 평생 형제처럼 지냈다. 수십 년 뒤 퀸시가 거장 프로듀서가 된 뒤에도 그를 스승으로 불렀다. (헤로인) 그는 이 무렵 헤로인에 손을 댔다고 자서전에서 스스로 밝혔다. 그 습관은 이후 17년 가까이 그의 삶과 경력을 따라다녔다. (이름) 1949년 로스앤젤레스의 작은 레이블 다운 비트에서 녹음한 「Confession Blues」가 R&B 차트에 올랐다. 권투 챔피언 슈거 레이 로빈슨과 혼동되지 않도록 그는 성을 빼고 레이 찰스라는 이름을 썼다. 1950년 로스앤젤레스로 옮긴 그는 블루스 가수 로웰 풀슨의 순회 밴드에서 피아노와 음악 감독을 맡으며 길 위의 일을 익혔다.
III. 교회와 밤의 무대 사이 · 1952–1959
(애틀랜틱) 1952년 애틀랜틱 레코드의 아흐메트 어테건이 2,500달러에 그의 계약을 사들였다. 어테건과 제리 웩슬러는 그에게 흉내를 버리고 자기 소리를 찾을 시간을 주었다. 어테건이 필명으로 써 준 「Mess Around」가 그 첫걸음이었다. (뉴올리언스) 1953년 그는 뉴올리언스에서 기타 슬림의 「The Things That I Used to Do」 녹음에 편곡과 피아노로 참여했고, 곡은 큰 히트가 됐다. 남의 곡을 성공시키며 그는 자기 밴드를 직접 이끌 자신감을 얻었다. (교회) 1954년 11월 애틀랜타의 라디오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아이 갓 어 우먼」은 가스펠 찬양의 곡조에 세속의 사랑 이야기를 얹은 노래였다. 교회의 열기를 밤의 클럽으로 옮겨 온 이 결합은 훗날 소울이라 불리게 된다. 블루스 가수 빅 빌 브룬지는 영가와 블루스를 섞는 것은 옳지 않다며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가정) 1955년 그는 가스펠 가수 출신의 델라 비 하워드와 결혼해 세 아들을 두었다. 그는 생전 열두 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알려져 있다. (레이렛츠) 여성 보컬 그룹 레이렛츠의 리드 마지 헨드릭스는 그의 무대 파트너이자 연인이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Night Time Is the Right Time」은 그 긴장을 그대로 담았다. 1958년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 무대로 재즈 청중의 인정도 얻었다. 그해 말 공연 시간이 남아 즉흥으로 이어 간 연주가 이듬해 「왓드 아이 세이」가 됐다.
가스펠 찬양의 곡조에 세속의 사랑을 얹어, 교회와 클럽 사이의 벽을 처음으로 무너뜨린 곡이다.
- 곡의 뼈대는 가스펠 곡 「It Must Be Jesus」에서 왔다. 찬양대가 회중을 이끄는 듯한 들뜬 박자감이 사랑 노래 위에 그대로 살아 있는 점을 들어 보자.
- 일곱 명 남짓의 작은 밴드가 내는 혼 섹션(트럼펫·색소폰 묶음)이 짧고 굵게 끊어 치며 노래 사이를 받친다. 그가 직접 짠 편곡이다.
- 밴드가 일제히 멈추고 목소리만 남는 순간(스톱 타임)이 여러 번 나온다. 그 빈자리에서 터져 나오는 외침이 설교자의 절정처럼 들린다.
- 냇 킹 콜을 흉내 내던 부드러운 목소리는 사라지고, 목을 긁는 듯한 거친 음색이 처음으로 전면에 나온다.
공연 시간이 남아 즉흥으로 이어 간 연주가 녹음실에서 완성돼, 그의 첫 팝 톱10이 됐다.
- 도입에서 전자 피아노(우를리처)가 낮은 음역에서 반복하는 리프가 곡 전체의 엔진이다. 당시 R&B에서 보기 드물던 이 악기의 찰랑이는 음색에 귀를 기울여 보자.
- 드럼은 라틴 음악에서 가져온 듯한 엇갈린 리듬을 섞어 친다. 단순한 12마디 블루스 틀 위에서 그루브가 계속 앞으로 밀려 나간다.
- 곡은 싱글 두 면으로 나뉘었다. 1부 끝에서 밴드가 멈추면 끝나는 듯하다가, 2부에서 레이렛츠가 그의 외침에 신음 섞인 소리로 답하는 주고받기(콜 앤 리스폰스)가 폭발한다.
- 이 주고받기가 너무 관능적이라는 이유로 일부 방송국이 방송을 거부했다. 그 논란 자체가 곡의 전설이 됐다.
IV. 천재의 계약 · 1959–1964
(협상) 1959년 그는 애틀랜틱을 떠나 ABC-파라마운트와 계약했다. 높은 로열티에 더해, 일정 기간이 지나면 녹음 원본(마스터)의 소유권을 그에게 돌려준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당시 흑인 음악가로서는 전례가 드문 조건이었고, 그는 이를 평생의 자산으로 삼았다. (조지아) 1960년 미국 각지의 지명을 담은 앨범 「The Genius Hits the Road」에서 랠프 번스가 현악으로 편곡한 「조지아 온 마이 마인드」가 빌보드 1위에 올랐다. 고향 조지아를 떠난 지 서른 해 만에 부른 그 노래는 그의 이름을 대중음악 전체에 새겼다. (거부) 1961년 3월 조지아주 오거스타 공연을 앞두고, 흑인 객석이 따로 분리된다는 사실을 학생들의 편지로 알게 된 그는 무대를 취소했다. 공연 기획자는 계약 위반으로 소송을 걸었고 그는 배상금을 물었다. 그해 퍼시 메이필드가 쓴 「힛 더 로드 잭」을 마지 헨드릭스와 주고받으며 다시 1위에 올랐다. (컨트리) 1962년 그는 백인 음악으로 여겨지던 컨트리를 부르겠다고 나섰다. 경영진은 흑인 청중을 잃을까 우려했지만, 프로듀서 시드 펠러가 곡을 고르고 마티 페이치가 현악을, 제럴드 윌슨이 빅밴드를 편곡한 「Modern Sounds in Country and Western Music」은 앨범 차트 1위를 14주 지켰다. 「아이 캔트 스톱 러빙 유」가 그 중심이었다. (소유) 그는 자기 레이블 탱저린을 세우고, 1964년 로스앤젤레스에 RPM 스튜디오 사옥을 지었다. 같은 무렵 모타운의 열두 살 스티비 원더가 그에게 바치는 앨범 「Tribute to Uncle Ray」를 냈다. 그는 이미 다음 세대가 우러러보는 이름이었다.
어린 시절 떠난 고향 주의 이름을 담은 노래로 첫 빌보드 1위에 올랐고, 훗날 조지아의 주가가 됐다.
- 피아노 도입이 끝나면 랠프 번스가 편곡한 현악과 합창이 넓게 깔린다. R&B 가수가 이런 고급스러운 현악 반주를 입은 것 자체가 당시엔 새로웠다.
- 첫 소절은 거의 속삭이듯 낮고 절제돼 있다. 곡이 진행될수록 목소리가 갈라지며 높아지는 흐름을 따라가 보자.
- 한 음절을 여러 음으로 굽이치게 늘이는 창법(멜리스마)이 곡 끝으로 갈수록 잦아진다. 그리움이 억눌렀다가 새어 나오는 것처럼 들린다.
- 1979년 조지아주 의회 의사당에서 이 노래를 부른 무대는, 분리 객석을 거부했던 그와 주의 화해로 회자된다.
무대 위 파트너이자 연인이던 마지 헨드릭스와 벌이는 말다툼 같은 주고받기가 곡의 전부다.
- 낮은 음이 한 계단씩 내려가는 네 음짜리 베이스 진행이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된다. 단순하지만 한 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 뼈대다.
- 곡은 집을 나가라는 여자와 버티는 남자의 대화로 짜여 있다. 마지 헨드릭스의 날카롭고 단호한 목소리와 그의 능청스러운 항변이 정면으로 부딪친다.
- 레이렛츠의 짧은 합창이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압박하는 구조라, 2분 남짓한 길이에도 긴장이 쉬지 않는다.
- 작곡가 퍼시 메이필드는 블루스 가수였다. 원래 쓸쓸한 블루스였을 이야기가 그의 손에서 유머러스한 소동극으로 바뀐 점을 느껴 보자.
컨트리 가수 돈 깁슨의 곡을 현악과 합창으로 감싸, 흑인 가수가 컨트리를 부른다는 우려를 1위로 뒤집었다.
- 곡은 합창단의 노래로 시작한다. 합창이 한 줄을 부르면 그가 받아 노래하는, 교회식 주고받기가 컨트리 발라드 위에 옮겨져 있다.
- 마티 페이치가 편곡한 현악이 넓고 부드럽게 흐른다. 컨트리의 소박한 원곡이 할리우드 영화음악 같은 화려한 옷을 입었다.
- 그의 목소리는 끝까지 서두르지 않는다. 같은 고백을 되풀이할 때마다 음색이 조금씩 거칠어지며 감정의 깊이를 더한다.
- 곡 끝에서 합창과 그가 함께 사라지듯 잦아드는 마무리가 길게 이어진다.
V. 사슬을 끊다 · 1964–1979
(체포) 1964년 10월 그는 보스턴 공항에서 헤로인 소지로 체포됐다. 1958년 필라델피아, 1961년 인디애나폴리스에 이은 세 번째였고, 이번에는 실형을 피하기 어려웠다. 그는 자서전에서 자식들 앞에서 떳떳하고 싶었다고 그때를 돌아봤다. (치료) 1965년 그는 순회를 한 해 멈추고 로스앤젤레스 인근 린우드의 세인트프랜시스 병원에 들어가 정신과 의사 프레더릭 해커의 치료를 받았다. 금단 증상을 약물 없이 견뎌 냈고, 이후 다시는 헤로인을 쓰지 않았다. 법원은 그에게 보호관찰을 선고했다. (귀환) 같은 시기 컨트리 가수 벅 오언스의 곡을 부른 「크라잉 타임」이 1965년 말 나와 그래미 두 개를 받았다. 이별의 노래는 그의 지친 목소리와 맞물려 더 무겁게 들렸다. 매니저 조 애덤스가 살림을 엄격히 관리하며 그의 조직은 단단해졌다. (신념) 그는 마틴 루서 킹의 민권 운동을 후원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몸으로 행진에 서기는 어려워 돈과 공연으로 힘을 보탰다고 말했다. 1972년 앨범 「A Message from the People」에서 흑인 국가로 불리던 찬가와 「아메리카 더 뷰티풀」을 나란히 실어, 비판과 애정을 함께 품은 나라를 노래했다. (동료) 1971년 샌프란시스코 필모어 웨스트에서 아레사 프랭클린이 객석의 그를 무대로 불러 「Spirit in the Dark」를 함께 불렀다. 1973년 그는 ABC를 떠나 크로스오버 레코드를 세웠다. 1977년 델라 비와 이혼했고, 이듬해 데이비드 리츠와 자서전 「브라더 레이」를 냈다. 1979년 조지아주 의회는 「조지아 온 마이 마인드」를 주가로 지정했고, 그는 의사당에서 그 노래를 불렀다.
헤로인을 끊고 치료를 받던 무렵 나온 이별 노래로, 그래미 두 개를 안기며 그의 귀환을 알렸다.
- 벅 오언스의 컨트리 원곡에 현악과 레이렛츠의 합창을 더했다. 컨트리의 담백한 가락이 그의 손에서 소울 발라드가 된 과정을 들어 보자.
- 그의 목소리는 이 무렵 더 낮고 쉰 듯하다. 지친 음색이 곡의 체념 어린 정서와 맞물린다.
- 레이렛츠가 뒤에서 길게 끄는 화음이 한숨처럼 깔리며 그의 독백 같은 노래를 받친다.
- 곡이 크게 고조되지 않고 담담하게 끝난다. 절제가 오히려 슬픔을 키우는 짜임새다.
민권 운동을 후원하던 그가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앨범에 실어, 애국 찬가를 흑인 교회의 노래로 다시 불렀다.
- 그는 이 노래를 흔히 부르는 첫 절이 아니라 다른 절로 시작한다. 낯익은 찬가가 처음부터 다르게 들리는 이유다.
- 노래 사이사이에 설교자처럼 말하듯 덧붙이는 대목이 있다. 가스펠 예배에서 목사가 회중을 북돋는 화법이 그대로 옮겨져 있다.
- 피아노와 합창이 점점 쌓이며 곡 후반에 크게 부풀어 오른다. 행진곡풍의 원곡이 교회 찬양의 절정 구조로 바뀌었다.
- 이후 수십 년간 스포츠 경기와 국가 행사에서 그가 이 노래를 부른 무대가 여러 차례 회자됐다.
VI. 끝나지 않는 순회 · 1980–2004
(재발견) 1980년 영화 「블루스 브라더스」에 악기점 주인으로 출연해 젊은 관객에게 다시 알려졌다. 이듬해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공연해, 국제 사회의 문화 보이콧을 어겼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컨트리) 1980년대 컬럼비아에서 그는 컨트리 앨범을 이어 냈다. 1984년 듀엣 앨범 「Friendship」에서 윌리 넬슨과 부른 「세븐 스패니시 에인절스」가 컨트리 차트 1위에 올랐다. 1985년에는 「We Are the World」에 마이클 잭슨, 스티비 원더, 다이애나 로스 등과 함께 목소리를 보탰다. (명예) 1986년 그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첫 헌액자로 이름을 올렸고, 케네디 센터 공로상을 받았다. 같은 해 빌리 조엘은 그를 위해 쓴 「Baby Grand」를 그와 함께 녹음했다. 1990년 퀸시 존스의 「I'll Be Good to You」로 그래미를 받았고, 1991년 탄산음료 광고로 새로운 세대에게도 익숙한 얼굴이 됐다. (작별) 일흔이 넘어서도 그는 해마다 순회를 다녔다. 2003년 고관절 수술을 받으며 처음으로 일정을 취소했고, 간 질환이 깊어졌다. 2004년 4월 RPM 스튜디오가 로스앤젤레스 사적으로 지정되는 자리에 나온 것이 마지막 공개 행사였다. 그해 6월 10일 비벌리힐스 자택에서 일흔셋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산) 그해 8월 나온 듀엣 앨범 「Genius Loves Company」는 노라 존스, 엘튼 존 등과 함께한 녹음으로, 이듬해 올해의 앨범을 포함한 그래미 여덟 개를 받았다. 제이미 폭스가 그를 연기한 영화 「레이」도 같은 해 개봉했다. 그는 재산의 대부분을 청각 장애 연구와 교육을 돕는 레이 찰스 재단에 남겼다.
컨트리를 향한 그의 오랜 애정이 윌리 넬슨과의 듀엣으로 결실을 맺어 컨트리 차트 1위에 올랐다.
- 쫓기는 연인의 비극을 이야기하는 서부 발라드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눠 맡으며 한 편의 짧은 영화처럼 전개된다.
- 윌리 넬슨의 가늘고 건조한 목소리와 그의 굵고 쉰 목소리가 번갈아 나온다. 음색이 정반대라 각자의 소절이 또렷이 갈린다.
- 후렴에서 두 목소리가 겹칠 때 어울림이 가장 아름답다. 서로 다른 전통의 두 가수가 한 화음에 묶이는 순간이다.
- 1960년대의 화려한 현악 컨트리와 달리, 소박한 컨트리 밴드 반주 위에서 그의 목소리가 더 날것으로 들린다.
덜 알려진 이야기
널리 퍼진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1961년 오거스타 공연 취소 뒤 조지아주가 그를 추방했고, 훗날 주가 공식 사과했다는 것이다. 영화 「레이」도 이 줄거리를 극적으로 그렸다. 그러나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은 공연 기획자가 계약 위반으로 소송을 걸어 그가 배상금을 물었다는 사실이며, 주 차원의 출입 금지 조치는 확인되지 않는다. 1979년 의회의 결의는 노래를 주가로 지정한 것이었다. 극적 서사가 사실보다 오래 기억된 경우다. 그는 점자 악보를 배웠지만, 큰 편성의 편곡은 대개 피아노 없이 머릿속에서 완성해 파트마다 음을 불러 주고 사보가가 받아 적게 했다. 또 1950년대에는 일부 녹음과 공연에서 알토 색소폰을 직접 불기도 했다. 피아노와 목소리의 명성에 가려 잘 언급되지 않는 대목이다. 1965년 치료를 받던 시기에 그는 체스를 배웠고, 말을 손으로 구분할 수 있게 만든 특수 체스판으로 평생 즐겼다. 순회 중에도 체스판을 챙겨 다녔다고 전해진다. 무대 밖의 사소한 취미로 여겨져 전기의 각주에 머물렀지만, 중독을 끊어 낸 시기에 얻은 습관이라는 점에서 그의 회복을 보여 주는 한 조각이기도 하다.
용어 노트 📚🔎
리듬 앤 블루스(R&B)
(말뜻) 리듬(rhythm)과 블루스(blues)를 합친 말이다. 1949년 미국 음악 잡지 빌보드가 흑인 음악 차트의 이름을 인종을 낙인찍던 옛 이름 대신 이 말로 바꾸면서 널리 쓰였다. 당시 빌보드 기자였던 제리 웩슬러가 이 이름을 제안했다고 알려져 있다. (팝에서) 1940~50년대 미국 흑인 음악가들이 블루스에 강한 박자감과 춤추기 좋은 리듬을 더해 만든 대중음악이다. 레이 찰스는 여기에 교회 음악의 열기를 섞어 새 길을 열었다. 줄넘기를 할 때 박자가 몸에 붙으면 생각하지 않아도 발이 저절로 뛰는 것처럼, R&B는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게 만드는 음악이다.
가스펠
(말뜻) 영어 gospel 은 옛 영어 godspel 에서 왔는데, 좋은(god) 소식(spel)이라는 뜻이다. 기독교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가리키는 '복음(福音)'과 같은 말이다. (팝에서) 미국 흑인 교회에서 부르던 찬양 음악을 말한다. 노래하는 사람이 감정을 한껏 끌어올리고, 회중이 손뼉을 치고 소리로 답하며 함께 열기를 만든다. 학교 체육대회에서 응원단장이 선창하면 반 전체가 따라 외치며 분위기가 점점 뜨거워지는 것과 비슷하다. 레이 찰스는 이 가스펠의 곡조와 창법을 사랑 노래에 그대로 가져왔다.
소울
(말뜻) 영어 soul 은 영혼, 마음 깊은 곳이라는 뜻이다. 겉꾸밈 없이 마음속 감정을 그대로 쏟아 내는 음악이라는 뜻이 이름에 담겨 있다. (팝에서) 1950년대 후반부터 가스펠의 뜨거운 창법과 R&B의 리듬이 합쳐져 생긴 음악이다. 레이 찰스, 샘 쿡, 아레사 프랭클린 같은 가수들이 이 길을 열었다. 교회에서 부르던 찬양의 목소리로 사랑과 이별을 노래한다고 생각하면 쉽다. 친구에게 진심으로 사과할 때 말투가 저절로 떨리는 것처럼, 소울은 목소리의 떨림과 거칠음까지 감정의 일부로 쓴다. (다른 데서는) '소울 푸드'처럼 미국 흑인 공동체의 음식과 생활 문화 전반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콜 앤 리스폰스
(말뜻) 부르기(call)와 대답하기(response)를 합친 말이다. 한 사람이 부르면 다른 사람들이 받아 답하는 방식을 그대로 이름으로 삼았다. (팝에서) 리드 가수가 한 소절을 부르면 코러스나 악기가 그에 답하듯 이어 받는 노래 짜임새다. 아프리카 음악과 흑인 교회 예배에서 이어져 온 전통이다. 교실에서 선생님이 '알겠지?' 하고 물으면 반 전체가 '네!' 하고 대답하는 장면을 떠올리면 된다. 「왓드 아이 세이」에서 레이 찰스의 외침에 레이렛츠가 답하는 대목이 대표적인 예다.
마스터(원판권)
(말뜻) 영어 master 에는 주인이라는 뜻과 함께 모든 복사본의 바탕이 되는 원본이라는 뜻이 있다. 음반 업계에서는 후자의 뜻으로 쓴다. (팝에서) 녹음실에서 만든 최초의 원본 녹음을 마스터라고 하고, 이것을 가진 사람이 음반을 찍거나 방송·광고에 쓰도록 허락하고 돈을 받는다. 대개 음반사가 가졌기 때문에, 1959년 레이 찰스가 일정 기간 뒤 자기 마스터를 돌려받기로 한 계약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반 친구들이 내 그림을 복사해 쓸 수는 있어도 원본 그림을 가진 사람만 그것을 전시회에 낼지 정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다른 데서는) 마스터는 대학원의 석사 학위나, 어떤 분야를 완전히 익힌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도 흔히 쓴다.
크로스오버
(말뜻) 영어 cross over 는 건너가다, 넘어가다라는 뜻이다. (팝에서) 한 장르나 한 청중층에서 인기를 얻은 음악가나 곡이 다른 장르, 다른 청중에게까지 성공을 넓히는 일을 말한다. 흑인 음악 차트에서 백인 청중이 듣는 팝 차트로, 또는 R&B에서 컨트리로 넘어가는 것이 그 예다. 축구부에서 이름난 친구가 농구 대회에서도 우승하는 것처럼, 원래 무대를 넘어서 다른 무대에서도 인정받는 것이다. 레이 찰스는 자기 레이블 이름을 아예 크로스오버로 지었다. (다른 데서는) 농구에서는 공을 한 손에서 다른 손으로 빠르게 옮기며 수비를 따돌리는 드리블 기술을 가리킨다.
부기우기
(팝에서) 1920~40년대 미국 흑인 피아니스트들이 즐겨 친 블루스 피아노 스타일이다. 왼손이 낮은 음역에서 빠르게 굴러가는 반복 음형을 쉬지 않고 치고, 오른손은 그 위에서 짧은 가락을 자유롭게 얹는다. 왼손은 기차 바퀴처럼 일정하게 굴러가야 하므로, 한 손으로는 일정하게 공을 튀기면서 다른 손으로 다른 동작을 하는 것처럼 두 손이 서로 다른 일을 동시에 해야 한다. 레이 찰스가 세 살 무렵 그린빌의 카페에서 처음 배운 피아노가 이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