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na Simone
「예술가의 의무는, 내가 보기에, 시대를 비추는 것이다.」 — 니나 시몬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함께한 사람들 ⏳🌊
- 가족메리 케이트 웨이먼
감리교 목회자였던 어머니로, 딸에게 교회 음악을 처음 들려줬지만 세속 음악의 길은 끝내 반기지 않았다.
- 스승뮤리얼 마자노비치
트라이언에서 바흐와 클래식을 가르친 첫 스승으로, 평생의 대위법적 연주의 뿌리를 놓았다.
- 영향빌리 홀리데이
그의 녹음으로 「아이 러브스 유, 포기」를 익혔고, 이 곡이 니나 시몬의 첫 히트가 됐다.
- 가족앤드루 스트라우드
남편이자 매니저로 1960년대 전성기의 경력을 관리했지만, 결혼 생활은 폭력과 통제로 얼룩졌다.
- 우정로레인 핸스베리
그를 민권운동과 흑인 사상의 세계로 이끈 극작가로, 「투 비 영, 기프티드 앤드 블랙」은 그에게 바친 노래다.
- 우정미리엄 마케바
남아프리카 출신 가수이자 벗으로, 1974년 그가 라이베리아에 정착하도록 권했다.
I. 트라이언의 유니스 · 1933–1950
(출생) 1933년 2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작은 마을 트라이언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유니스 캐슬린 웨이먼이었다. 아버지 존 디바인 웨이먼은 이발과 세탁, 잡일로 생계를 꾸렸고, 어머니 메리 케이트 웨이먼은 감리교 목회자였다. 여덟 남매 가운데 여섯째였고, 대공황 끝자락의 집안은 넉넉하지 않았다. (교회) 세 살 무렵부터 피아노 앞에 앉았고, 곧 어머니의 교회에서 찬송을 반주했다. 귀로 들은 곡을 곧바로 쳐 내는 아이였다. 어머니가 가사 일을 하던 집의 백인 여주인이 재능을 알아보고 레슨비를 댔다. (바흐) 스승은 영국 출신 피아니스트 뮤리얼 마자노비치였다. 아이는 그를 미즈 마지라 불렀고, 그에게서 바흐와 쇼팽, 베토벤을 배웠다. 그중 바흐는 평생의 기둥이 됐다. 훗날 대중가요를 칠 때도 그의 두 손은 서로 다른 선율을 엮어 짜는 바흐의 방식(대위법)으로 움직였다. 마을 사람들은 기금을 모아 소녀의 공부를 도왔다. (연주회) 열두 살 무렵의 첫 독주회에서, 맨 앞줄에 앉아 있던 부모가 백인 관객에게 자리를 내주라는 요구를 받고 뒤로 밀려났다. 소녀는 부모가 제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연주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가 자서전에서 되짚은 이 장면은 무대 위에서 차별에 맞선 첫 기억으로 남았다. (꿈) 1950년 애슈빌의 앨런 여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을 때 그의 목표는 하나였다. 미국 최초의 흑인 여성 클래식 콘서트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었다.
II. 애틀랜틱시티의 가명 · 1950–1960
(커티스) 1950년 여름 뉴욕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피아니스트 칼 프리드버그에게 배우며 필라델피아의 커티스 음악원 입학을 준비했다. 가족도 필라델피아로 옮겼다. 그러나 1951년 커티스는 그를 받지 않았다. 그는 평생 그 이유를 인종 차별로 믿었고, 이 거절은 오래 아문 적 없는 상처가 됐다. (가명) 피아노를 가르치고 가수들의 반주를 하며 지내던 그는 1954년 애틀랜틱시티의 한 바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주인은 노래도 하라고 했다. 교회의 딸이 술집에서 노래한다는 사실을 어머니에게 숨기려고 그는 이름을 바꿨다. 스페인어로 어린 소녀를 뜻하는 애칭에서 니나를, 프랑스 배우 시몬 시뇨레에게서 시몬을 따왔다. 바흐풍 즉흥과 오래 불려 온 재즈 스탠더드, 가스펠이 뒤섞인 연주, 낮고 굵은 여성 음역(콘트랄토)의 목소리가 입소문을 탔다. (계약) 1957년 베들레헴 레코드와 계약해 하루 남짓 만에 첫 앨범 「리틀 걸 블루」를 녹음했다. 거기 실린 「아이 러브스 유, 포기」가 1959년 빌보드 싱글 차트 18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녹음 권리를 3천 달러에 넘겨 버려 이후의 로열티를 거의 받지 못했다. 훗날 그는 이 계약으로 백만 달러 넘게 잃었다고 말했고, 음악 산업에 대한 깊은 불신이 여기서 시작됐다. (뉴욕) 콜픽스 레코드로 옮긴 그는 1959년 뉴욕 타운홀, 1960년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 무대에 섰다. 1958년 돈 로스와 결혼했으나 1년 만에 헤어졌다. 그는 자기 음악을 재즈라 부르는 것을 끝내 싫어했다. 그가 원한 이름은 흑인 클래식 음악이었다.
거쉰의 오페라 「포기와 베스」의 곡으로, 그는 빌리 홀리데이의 녹음으로 이 노래를 익혔다. 3천 달러에 권리를 넘긴 바로 그 데뷔 앨범에서 나온 첫 히트였다.
- 도입부 피아노는 클래식 독주처럼 화음을 흩어 치며(아르페지오) 시작한다. 재즈 클럽 가수보다 리사이틀 피아니스트에 가까운 첫인상이다.
- 목소리는 낮은 음역에 머물며 거의 속삭이듯 절제된다. 감정을 터뜨리지 않고 눌러 담는 방식이 오히려 간절하게 들린다.
- 베이스와 드럼은 브러시로 쓸듯 아주 조용히 받친다. 피아노·베이스·드럼 셋뿐인 단출한 편성이 목소리와 피아노 사이의 대화를 또렷하게 한다.
- 노래하는 동안에도 피아노는 반주에 그치지 않고 목소리 사이사이에 짧은 응답 선율을 끼워 넣는다.
III. 분노의 노래 · 1961–1965
(결혼) 1961년 뉴욕 경찰 형사 앤드루 스트라우드와 결혼했다. 스트라우드는 경찰을 그만두고 매니저가 되어 투어와 계약, 돈을 손에 쥐었다. 1962년 딸이 태어났고, 가족은 뉴욕 근교 마운트버넌에 살았다. 그러나 결혼은 처음부터 폭력과 통제를 품고 있었다. 그의 일기와 훗날 공개된 기록에는 남편의 구타와, 쉴 틈 없는 일정에 짓눌린 마음이 남아 있다. (각성) 이 무렵 극작가 로레인 핸스베리를 통해 흑인 지식인들의 세계에 들어섰다. 랭스턴 휴스, 제임스 볼드윈과도 가까웠다. 그는 핸스베리와 남자나 옷 이야기는 한 적이 없고 늘 혁명을 이야기했다고 회고했다. 피아노 앞의 연주자는 시대를 말하는 예술가로 바뀌어 갔다. (분노) 1963년 6월 미시시피에서 민권운동가 메드거 에버스가 살해되고, 9월 앨라배마 버밍엄의 교회 폭탄 테러로 흑인 소녀 넷이 숨졌다. 그는 처음엔 총을 만들려 했다고 회고했다. 남편이 그에게는 음악이 있다고 말렸고, 그는 한 시간 남짓 만에 첫 프로테스트 송 「미시시피 갓댐」을 썼다. 1964년 카네기홀 실황으로 나온 이 곡을 남부 일부 방송국은 틀지 않았고, 음반 한 상자가 모두 부러진 채 반송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셀마) 1965년 3월 셀마-몽고메리 행진의 마지막 밤, 그는 행진 참가자들 앞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같은 해 필립스 레코드에서 낸 「아이 풋 어 스펠 온 유」에는 「필링 굿」이, 「파스텔 블루스」에는 흑인 영가를 10분 넘게 늘린 「시너맨」이 실렸다. 대가도 있었다. 정치적인 노래를 고집할수록 클럽과 방송의 문은 좁아졌다.
에버스 암살과 버밍엄 교회 테러에 대한 분노로 한 시간 남짓 만에 쓴 첫 프로테스트 송. 카네기홀 실황 앨범 「니나 시몬 인 콘서트」에 실렸다.
- 빠르고 경쾌한 브로드웨이 뮤지컬풍 템포로 달린다. 밝은 피아노와 분노에 찬 내용이 부딪치는 아이러니가 곡의 핵심이다.
- 곡 앞머리에서 그가 이 노래를 소개하자 객석에서 웃음이 터진다. 노래가 진행될수록 그 웃음이 긴장으로 바뀌는 공기가 녹음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 중간중간 노래를 멈추듯 말을 섞고 밴드에게 직접 지시를 던진다. 노래와 연설의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들이다.
- 후반으로 갈수록 목소리가 날카로워지고 박자를 몰아붙인다. 점잖은 가락을 유지하던 가수가 감정을 숨기지 않게 되는 변화를 따라가 보자.
영국 뮤지컬 「더 로어 오브 더 그리스페인트」의 곡을 필립스 시절 다시 부른 것이다. 분노의 노래를 쓰던 같은 해, 해방감과 자기 긍정의 노래로 다른 얼굴을 보여 줬다.
- 첫 대목은 반주 없이 목소리 하나로 시작한다. 숨소리까지 들리는 맨목소리가 곡 전체의 무게를 정한다.
- 목소리만 흐르던 정적을 깨고 금관 악기와 현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온다. 할 무니가 편곡한 이 빅밴드의 일격이 곡의 가장 유명한 순간이다.
- 느린 템포 위에서 그는 박자보다 조금 늦게 들어가며 여유를 부린다. 서두르지 않는 걸음이 당당함으로 들린다.
- 끝부분에서는 가사 없는 소리로 즉흥적인 장식을 덧붙이고, 금관이 짧게 끊어 치며 맞받는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교회에서 듣던 흑인 영가를 10분이 넘는 대곡으로 키웠다. 교회와 클럽, 클래식 훈련이 한 곡 안에서 만난다.
- 빠른 피아노가 짧은 음형을 쉬지 않고 되풀이하며 곡을 끌고 간다. 이 반복이 기도문처럼 쌓이며 긴장을 만든다.
- 중반에 악기들이 빠지고 박수 소리만 남는 구간이 있다. 교회 예배에서 회중이 손뼉으로 박자를 잡던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 박수 구간 위로 그가 외치듯 부르는 대목에서 목소리는 노래라기보다 설교자의 부르짖음에 가까워진다.
- 끝으로 갈수록 템포와 음량이 몰아치듯 올라간다. 10분이 짧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 점층적인 짜임 때문이다. 훗날 여러 영화에 쓰이며 새 세대에게 알려졌다.
IV. 젊고 재능 있고 흑인인 · 1965–1970
(상실) 1965년 1월 핸스베리가 서른넷의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앨범 「와일드 이스 더 윈드」에 실린 자작곡 「포 위민」은 피부색과 출신이 다른 네 흑인 여성의 목소리를 빌려 노예제가 남긴 상처를 그렸다. 흑인 여성을 고정관념에 가둔다는 반발도 샀고, 일부 방송은 이 곡을 꺼렸다. (추모) 1967년 RCA로 옮겼다. 1968년 4월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암살되고 사흘 뒤, 뉴욕 웨스트버리 무대에서 베이시스트 진 테일러가 급히 쓴 추모곡 「와이? (더 킹 오브 러브 이스 데드)」를 불렀다. 이 실황은 앨범 「너프 세드!」에 실렸다. (영국) 같은 해 뮤지컬 「헤어」의 두 곡을 엮은 「에인트 갓 노, 아이 갓 라이프」가 영국 차트 2위에 올랐고, 1969년 비지스의 「투 러브 섬바디」를 다시 부른 싱글도 영국 5위에 올랐다. 그는 남의 팝송을 자기 언어로 다시 짓는 데 능했다. 미국에서 좁아진 자리를 유럽이 넓혀 주기 시작했다. (헌사) 1969년 핸스베리 사후 그의 글을 엮어 무대에 올린 연극의 제목을 빌려, 키보디스트 웰던 어빈과 함께 「투 비 영, 기프티드 앤드 블랙」을 썼다. 흑인 아이들에게 자긍심을 건네는 이 노래는 민권 단체 인종평등회의가 흑인 미국의 국가라 부를 만큼 사랑받았다. 1970년 도니 해서웨이가, 1972년 아레사 프랭클린이 이 곡을 녹음했고, 아레사는 아예 앨범 제목으로 삼았다. (소진) 무대 밖의 그는 지쳐 있었다. 쉼 없는 공연과 남편과의 갈등, 운동의 지도자들이 하나씩 쓰러지는 현실이 그를 짓눌렀다. 비폭력보다 급진적인 노선에 기울었고, 공연 중 관객과 언쟁하는 일도 잦아졌다.
핸스베리를 잃은 이듬해 직접 쓴 곡으로, 네 흑인 여성의 목소리로 노예제의 유산을 그렸다. 당시 일부 방송에서 꺼린 곡이기도 하다.
- 낮은 음역의 짧은 반주 음형이 곡 내내 거의 변하지 않고 되풀이된다. 고정된 반주 위에서 인물만 바뀌는 구조다.
- 각 절마다 다른 여성이 1인칭으로 자기 사연을 말한다. 인물이 바뀔 때마다 목소리의 색과 힘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들어 보자.
- 앞의 절들은 담담하게 이어지다가 마지막 인물에서 목소리가 거칠고 단단해진다. 곡의 끝은 외침에 가깝게 터진다.
- 화려한 기교 없이 낭독하듯 노래하는 화법이 이야기의 무게를 그대로 전한다.
세상을 떠난 벗 핸스베리에게 바친 노래다. 도니 해서웨이와 아레사 프랭클린이 잇따라 녹음하며 한 시대의 찬가가 됐다.
- 찬송가처럼 느린 템포와 가스펠풍 피아노 화음이 바탕을 이룬다. 행진곡이 아니라 축복하듯 건네는 노래다.
- 1970년 실황 앨범 「블랙 골드」에서는 노래 앞에 핸스베리를 기리는 그의 소개가 붙어 있다. 이 버전으로 들으면 곡의 사연이 더 또렷해진다.
- 목소리는 분노가 아니라 다정한 단호함을 띤다. 같은 시기의 저항곡들과 비교해 들으면 그 차이가 선명하다.
- 도니 해서웨이와 아레사 프랭클린의 녹음을 이어 들으면, 한 노래가 세 사람의 가스펠 언어로 어떻게 달리 피어나는지 알 수 있다.
V. 떠도는 세월 · 1970–1986
(망명) 1970년 그는 결혼반지를 남겨 둔 채 홀로 미국을 떠났다. 카리브해의 바베이도스로 건너가 지냈고, 그곳 총리 에럴 배로와 가까운 사이였다고 전해진다. 1972년 스트라우드와 이혼하면서 매니저도 잃었다. 돈 관리를 남에게 맡겨 온 그는 계약과 세금의 실타래를 혼자 감당해야 했다. 베트남 전쟁에 항의하는 뜻으로 몇 해 소득세를 내지 않은 일은 미국 국세청과의 오랜 분쟁이 됐다. (아프리카) 1974년 남아프리카 출신 가수이자 오랜 벗 미리엄 마케바의 권유로 서아프리카 라이베리아의 몬로비아에 자리를 잡았다. 딸도 한동안 그곳에서 함께 지냈다. 그는 이 시절을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 가운데 하나로 회고했다. 아프리카는 그가 오래 그리던 뿌리의 땅이었다. (볼티모어) 1978년 프로듀서 크리드 테일러의 CTI 레이블에서 「볼티모어」를 냈다. 레게풍 리듬과 현악을 얹은 이 앨범을 그는 선곡과 편곡에 자기 뜻이 반영되지 않았다며 탐탁지 않아 했지만, 비평가들은 세월에 단단해진 목소리를 높이 샀다. 같은 해 미국에 잠시 돌아왔다가 세금 문제로 체포된 일도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곤궁) 이후 스위스를 거쳐 1980년대에는 파리에 머물며 작은 클럽에서 연주했다. 한때 카네기홀을 채웠던 연주자는 생계를 걱정했고, 기분의 기복 탓에 무대가 어그러지는 날도 있었다. 그래도 피아노 앞에서의 태도는 같았다. 관객이 떠들면 연주를 멈추고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VI. 돌아온 노래 · 1987–2003
(재조명) 1987년 영국에서 샤넬 향수 광고에 1958년 녹음 「마이 베이비 저스트 케어스 포 미」가 쓰이면서, 재발매 싱글이 영국 차트 5위에 올랐다. 서른 해 전 녹음이 새 세대를 만났지만, 베들레헴 시절 권리를 넘긴 탓에 그에게 돌아온 몫은 크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도 이 일로 큰 무대에 다시 설 길이 열렸다. (진단) 1980년대 말 그는 양극성 장애 진단을 받았다. 전기 작가들과 측근의 증언에 따르면 이후 약을 먹으며 감정의 기복을 다스리려 애썼다. 젊은 날부터 이어진 격한 분노와 깊은 우울의 일부가 이 병과 맞물려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떠난 뒤에야 널리 알려졌다. (정착) 1991년 자서전 「아이 풋 어 스펠 온 유」를 펴냈고, 1993년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 「어 싱글 우먼」을 냈다. 같은 해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 근처 바닷가 마을 카리르루에에 정착했다. 1995년에는 이웃과의 다툼 끝에 공기총을 쏜 일로 집행유예 판결을 받기도 했다. 말년에는 유방암과 싸웠다. (작별) 2003년 4월 21일, 카리르루에의 집에서 일흔 살로 세상을 떠났다. 그 며칠 전 커티스 음악원은 그에게 명예 학위를 수여했다. 반세기 전 그를 받지 않았던 학교였다. 유해는 그의 뜻에 따라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 뿌려졌다. (유산) 2015년 다큐멘터리 「왓 해펀드, 미스 시몬?」이 그의 일기와 증언으로 삶을 다시 비췄고, 가수가 된 딸 리사 시몬이 제작에 참여했다. 같은 해 헌정 앨범 「니나 리비지티드」에서 로린 힐은 「필링 굿」을 비롯한 여러 곡을 불렀다. 2018년 그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데뷔 앨범의 가벼운 스윙 넘버가 1987년 향수 광고로 영국 차트 5위에 올랐다. 떠돌던 그를 다시 큰 무대로 불러낸 곡이다.
- 1930년 영화에 쓰인 오래된 스탠더드를 가볍게 튀는 스윙 리듬으로 바꿨다. 베이스가 한 박씩 걸어가듯 받치는 것이 경쾌함의 뼈대다.
- 가운데 피아노 솔로가 이 녹음의 핵심이다. 두 손이 서로 다른 선율을 엮어 짜는 바흐풍 대위법이 재즈 리듬 위에서 펼쳐진다.
- 노래는 힘을 빼고 장난스럽게 흘러간다. 뒤의 무거운 곡들과 비교하면 젊은 날의 여유가 느껴진다.
- 1987년 재발매 때 영국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아드만이 점토 고양이들이 클럽에서 노래하는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화제가 됐다.
덜 알려진 이야기
커티스 음악원 불합격은 그의 생애를 설명하는 상징적 장면이 됐지만, 사정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학교 측과 일부 전기 작가는 그해 피아노 지원자가 많았고 합격자는 극소수였다는 점을 들어 왔다. 그는 끝까지 인종 차별을 확신했고, 어느 쪽이 옳았는지는 지금도 단정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학교가 그의 생애 마지막 무렵 명예 학위로 이 상처에 답했다는 사실이다. 그를 재즈 가수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의 녹음 곳곳에는 바흐가 숨어 있다. 데뷔 앨범의 「러브 미 오어 리브 미」나 「마이 베이비 저스트 케어스 포 미」의 피아노 솔로에서 그는 스윙 리듬 위에 바흐풍 푸가와 대위법을 끼워 넣었다. 클래식 피아니스트의 꿈이 좌절된 뒤에도 그 훈련은 사라지지 않았고, 전문 연주자들 사이에서는 그의 피아노가 노래만큼이나 중요하게 거론된다. 트라이언의 생가는 오랫동안 방치되어 헐릴 위기에 놓였다. 2017년 미술가 애덤 펜들턴, 라시드 존슨, 엘런 갤러거, 줄리 머레투가 함께 이 작은 집을 사들였고, 이듬해 미국 역사보존 국가신탁이 이곳을 국가적 보물로 지정했다. 음반과 무대가 아닌 방식으로 그의 유산을 지킨 이 일은 음악 팬들 사이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용어 노트 📚🔎
대위법
(말뜻) 대위법(對位法)은 음을 마주(對) 세워 자리(位)를 짜는 법이라는 뜻이다. 서양 이름 카운터포인트의 라틴어 뿌리는 점 대 점, 곧 음표 대 음표라는 말이다. (팝에서) 두 개 이상의 선율이 각자 독립적으로 움직이면서도 함께 울릴 때 잘 어울리도록 짜는 작곡 기법이다. 바흐가 이 기법의 대가였고, 니나 시몬은 재즈와 팝을 칠 때도 왼손과 오른손이 서로 다른 선율을 노래하게 했다. 돌림노래를 떠올리면 쉽다. 여러 사람이 같은 가락을 시간차를 두고 부르는데도 소리가 엉키지 않고 어울리는 것, 그것이 대위법의 가장 단순한 형태다.
콘트랄토
(말뜻) 이탈리아어에서 왔으며, 알토보다 더 아래(콘트라)에 있는 소리라는 뜻을 품고 있다. (팝에서) 여성 목소리 가운데 가장 낮은 음역, 또는 그런 목소리를 지닌 가수를 말한다. 낮고 굵으며 어둡게 울리는 것이 특징이고, 니나 시몬의 목소리가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합창 시간에 여학생들이 소프라노와 알토로 나뉠 때, 알토 쪽에서도 맨 아래 음을 편하게 내는 친구가 있다면 그 목소리가 콘트랄토에 가깝다.
스탠더드
(팝에서) 수십 년 동안 수많은 가수와 연주자가 되풀이해 부르고 연주해 온 고전 곡을 말한다. 주로 1920~50년대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영화 음악에서 나온 곡이 많고, 재즈 음악가들은 이 곡들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바꿔 연주하며 실력을 보여 준다. 학교 축제에서 반마다 같은 노래를 골랐는데 어떤 반은 발라드로, 어떤 반은 댄스곡으로 바꿔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원곡이 같아도 누가 부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노래가 된다. (다른 데서는) 일상에서는 표준이나 기준이라는 뜻으로 쓴다. 표준 사이즈, 글로벌 스탠더드처럼.
로열티
(말뜻) 영어 로열티(royalty)는 왕(royal)과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옛날 왕의 땅에서 광물을 캐면 왕에게 사용료를 바쳤는데, 그 사용료를 가리키던 말이 지금의 뜻으로 이어졌다. (팝에서) 노래나 음반이 팔리거나 방송·광고에 쓰일 때마다 그 권리를 가진 사람에게 돌아가는 몫이다. 니나 시몬은 데뷔 음반의 권리를 한 번에 3천 달러를 받고 넘겨 버려, 그 음반이 훗날 크게 팔려도 몫을 거의 받지 못했다. 내가 만든 보드게임 규칙을 친구들이 쓸 때마다 사탕 하나씩 받기로 했는데, 처음에 사탕 한 봉지를 받고 권리를 아예 넘겨 버린 셈이다. 게임이 전교에 유행해도 더 받을 것이 없다. (다른 데서는) 한국어로 똑같이 적는 고객 충성도라는 뜻의 로열티(loyalty)는 철자도 뜻도 다른 말이다. 브랜드 로열티가 그쪽이다.
프로테스트 송
(말뜻) 프로테스트(protest)는 항의한다는 뜻이다. 그대로 항의의 노래라는 말이다. (팝에서) 전쟁, 인종 차별, 불평등 같은 사회 문제에 맞서 목소리를 내는 노래를 말한다. 1960년대 미국 민권운동과 반전운동 시기에 많이 만들어졌고, 니나 시몬의 「미시시피 갓댐」이 대표적이다. 이런 노래는 시위 현장에서 함께 부르며 사람들을 묶어 주는 역할도 했다. 학교에서 불공평한 규칙이 생겼을 때 친구들이 함께 구호를 만들고 같이 외치면 한 사람이 말할 때보다 훨씬 힘이 생기는 것처럼, 노래는 여러 사람의 마음을 하나의 목소리로 모은다.
흑인 영가
(말뜻) 영가(靈歌)는 영혼(靈)의 노래(歌), 곧 신앙의 노래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스피리추얼(spiritual)이라고 한다. (팝에서) 노예로 끌려온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성경 이야기에 자신들의 고통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담아 부르던 종교 노래다. 한 사람이 선창하면 여럿이 받아 부르는 방식이 많고, 손뼉과 발 구름으로 박자를 잡는다. 훗날 가스펠, 블루스, 소울로 이어지는 흑인 음악의 큰 뿌리가 됐다. 체육대회에서 응원단장이 한 줄을 외치면 반 전체가 받아 외치는 응원이 메기고 받는 영가의 방식과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