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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ll Withers

빌 위더스 (1938–2020)

공장 작업복 차림으로 서른두 살에 데뷔해, 꾸밈없는 노래 몇 곡으로 세상을 위로하고 스스로 무대를 떠난 사람.

한눈에 보기 🔭💭

1. 뿌리미국 웨스트버지니아 슬랩포크…광부 아버지·말더듬할머니의 교회2. 우회해군 9년 복무747 화장실 조립공에이번트와 계약3. 데뷔작업복 앨범 표지에인트 노 선샤인마이클 잭슨 커버4. 정점린 온 미 1위스틸 빌·개드슨카네기홀 실황5. 불화컬럼비아 간섭러블리 데이저스트 더 투 오브 어스6. 떠남1985년 은퇴2015 로큰롤 명예의 전당2020년 LA에서 별세위더스1938–2020탄광촌 출신 늦깎이 가수, 담백한 노래로 위로…
무대의 여정 🧭🗺️
N미국베클리1941–1955로스앤젤레스1967–2020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함께한 사람들 ⏳🌊

  • 가족매티 갤러웨이 위더스

    가정부로 일하며 이혼 뒤 막내아들을 베클리에서 키운 어머니다.

  • 후원클래런스 에이번트

    공장 노동자였던 그의 데모를 듣고 서식스 레코드와 계약시킨 음반 사업가로, 평생의 지지자였다.

  • 동료부커 T. 존스

    데뷔 앨범을 프로듀싱하고 현악을 편곡했다.

  • 동료제임스 개드슨

    「스틸 빌」을 함께 만든 드러머로, 「유즈 미」의 그루브를 빚었다.

  • 영향마이클 잭슨

    열세 살에 「에인트 노 선샤인」을 커버해 그의 노래를 또 다른 세대에게 전했다.

  • 동료그로버 워싱턴 주니어

    「저스트 더 투 오브 어스」를 함께 만들어 그에게 두 번째 그래미를 안긴 재즈 색소포니스트다.

YouTube에서 6곡 이어 듣기 ↗

I. 슬랩포크의 소년 · 1938–1955

(탄광촌) 1938년 7월 4일,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 슬랩포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윌리엄 해리슨 위더스 주니어였다. 슬랩포크는 탄광 회사가 세운 작은 마을이었고, 아버지 윌리엄 위더스는 광부였으며 어머니 매티 갤러웨이 위더스는 가정부로 일했다. 그는 여섯 남매의 막내였다. (이별) 세 살 무렵 부모가 이혼했고, 그는 어머니를 따라 인근 도시 베클리로 옮겨 어머니 쪽 집안 사람들 사이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그가 열세 살 때 세상을 떠났다.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고, 흑인 아이가 탄광 바깥의 미래를 그리기 어려운 시대였다. (말더듬) 어린 시절 그는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사람들 앞에서 입을 여는 일이 두려웠다고 훗날 여러 인터뷰에서 담담히 털어놓았다. 말수가 적고 관찰하는 쪽에 가까웠던 성격은 뒷날 군더더기 없는 그의 노랫말과도 닮아 있다. (할머니) 그를 돌본 할머니는 신앙심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할머니가 다니던 교회에서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부르던 노래를 들으며 자랐다. 훗날 그는 그 기억을 「그랜드마스 핸즈」로 옮겼다. (공동체) 탄광촌 사람들은 가난했지만 서로 기대어 살았다. 누군가 어려우면 이웃이 먹을 것을 나눴다고 그는 회고했고, 이 기억이 「린 온 미」의 뿌리가 됐다고 말했다. (입대) 열일곱 살, 그는 탄광 대신 해군을 택했다. 마을을 떠나는 거의 유일한 길이었다.

II. 해군과 공장 · 1955–1970

(해군) 그는 해군에서 9년을 복무하며 항공기 정비를 배웠다. 이 시기에 말더듬도 다스리게 됐다. 문제는 혀가 아니라 듣는 사람의 반응에 대한 두려움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취지로 그는 회고했다. (노래) 해군 시절 그는 노래를 짓기 시작했다. 한 클럽에서 루 롤스의 공연을 보고, 가수가 하룻밤에 받는 돈이 자기의 한 달 벌이보다 많다는 데 놀라 음악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로스앤젤레스) 1965년 제대한 그는 1967년 로스앤젤레스로 옮겼다. 항공기 부품 회사들에서 조립공으로 일했고, 보잉 747 기내 화장실을 만드는 일을 했다고 훗날 웃으며 말했다. 월급을 아껴 데모 테이프를 녹음했고, 그것을 들고 음반사 문을 두드렸다. (서식스) 1970년, 흑인 음악계의 대부로 불리게 될 사업가 클래런스 에이번트가 그 테이프를 들었다. 에이번트는 막 세운 서식스 레코드와 그를 계약시켰다. 그때 그는 서른둘을 앞두고 있었다. 젊은 스타들이 차트를 채우던 시절에 이는 몹시 늦은 출발이었다. (작업복) 계약을 하고도 그는 공장을 곧바로 그만두지 않았다. 음악 산업은 변덕스러운 곳이고 공장 일은 확실하다는 것이 그의 계산이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이 신중함과 현실 감각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III. 작업복의 데뷔 · 1970–1971

(부커 T.) 에이번트는 데뷔 앨범의 프로듀싱을 멤피스 소울의 핵심 인물 부커 T. 존스에게 맡겼다. 녹음실에는 부커 T. 앤 더 MG's의 베이시스트 도널드 덕 던과 드러머 알 잭슨 주니어, 그리고 기타의 스티븐 스틸스 같은 세션 연주자들이 모였다. 녹음 경험이 거의 없는 공장 노동자가 이름난 연주자들 앞에 선 셈이었다. (표지) 1971년 5월 발매된 「저스트 애즈 아이 앰」의 표지에서 그는 도시락통을 든 작업복 차림으로 서 있다. 연출이 아니라 실제 그의 생활이었다. (B사이드) 첫 싱글의 앞면은 「하렘」이었다. 그러나 라디오 DJ들은 판을 뒤집어 B사이드의 「에인트 노 선샤인」을 틀기 시작했고, 이 곡은 빌보드 핫 100 3위까지 올랐다. 그는 알코올 중독으로 무너지는 연인을 그린 영화 「술과 장미의 나날」을 보다가 곡을 구상했다고 말했다. 이 곡으로 그는 1972년 그래미 최우수 R&B 곡상을 받았다. (빈자리) 곡 한가운데에서 그는 같은 한 마디를 스물여섯 번 되풀이한다. 본래 가사를 채우려던 자리였지만, 함께한 연주자들이 그대로 두자고 권했다고 그는 회고했다. 미완성처럼 남은 그 자리가 곡의 가장 유명한 순간이 됐다. (마이클) 이 곡은 곧 다른 목소리로도 퍼졌다. 열세 살의 마이클 잭슨이 1972년 솔로 앨범 「갓 투 비 데어」에서 커버했고, 영국에서는 싱글로 나와 톱 10에 올랐다. 서른셋의 쓸쓸한 고백이 소년의 목소리로 다시 불린 것이다.

♪에인트 노 선샤인 (Ain't No Sunshine)1971실황 Bill Withers · 1972 Old Grey Whistle Test

공장에 다니던 서른두 살 신인의 B사이드 곡이 DJ들 손에 뒤집혀 히트가 됐다. 미완성처럼 남긴 빈자리가 이 곡의 상징이 됐다.

  • 전체 길이가 2분 남짓으로 무척 짧다. 후렴을 크게 부풀리지 않고 끝나 버려, 떠난 사람의 빈자리처럼 여운이 남는다.
  • 어두운 느낌을 주는 음계(단조)의 어쿠스틱 기타 위로 부커 T. 존스가 편곡한 현악이 낮게 깔린다. 소울 음반치고 놀랄 만큼 소박한 편성이다.
  • 곡 가운데에서 같은 한 마디를 스물여섯 번 되풀이하는 대목이 나온다. 숨을 몰아쉬듯 이어지는 반복이 점점 감정을 쌓아 올리는 것처럼 들린다.
  • 알 잭슨 주니어의 드럼과 도널드 덕 던의 베이스는 일부러 많이 치지 않는다. 비워 둔 공간이 그의 담담한 목소리를 더 또렷하게 만든다.
  • 1972년 영국 BBC 「올드 그레이 휘슬 테스트」에 출연해 기타 하나로 부른 영상이 지금도 널리 회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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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마스 핸즈 (Grandma's Hands)1971실황 Bill Withers · 1974 BBC In Concert

교회에서 손뼉 치며 노래하던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데뷔 앨범에 그대로 옮긴 곡이다.

  • 입을 다문 채 흥얼거리는 소리(허밍)로 시작한다. 마치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꺼내는 듯한 도입이다.
  • 할머니의 손이 한 일들을 하나씩 떠올려 늘어놓는 화법이다.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고 장면만 보여 주는데, 그 절제가 오히려 뭉클하다.
  • 기타 리듬이 짧게 끊기며 반복되는데, 교회 손뼉 장단처럼 들린다.
  • 1996년 블랙스트리트의 「노 디기티」가 이 곡의 도입부를 샘플링해 새 세대에게 다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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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기대어 서는 노래 · 1972–1974

(밴드) 두 번째 앨범에서 그는 제작의 주도권을 쥐었다. 로스앤젤레스의 펑크 밴드 와츠 103번가 리듬 밴드 출신인 드러머 제임스 개드슨, 베이시스트 멜빈 던랩, 기타리스트 버노스 블랙먼, 건반의 레이 잭슨과 함께 앨범을 공동 제작했다. 1972년 「스틸 빌」이 그 결과였다. (위로) 「린 온 미」는 그가 새로 산 우리처 전자 피아노 앞에서 탄생했다. 아이들이 피아노를 배울 때처럼 손가락을 건반 위로 차례로 오르내리다 선율이 나왔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 위에 슬랩포크 이웃들의 기억을 얹었다. 곡은 1972년 7월 빌보드 핫 100 1위에 올라 3주를 지켰다. (그루브) 같은 앨범의 「유즈 미」는 2위까지 올랐다. 개드슨의 드럼과 끊어 치는 건반이 만든 그루브 위에서, 그는 능청과 고집이 섞인 목소리로 사랑을 노래했다. 다정한 위로와 짓궂은 솔직함이 한 앨범에 나란히 있었다. (카네기) 1972년 10월 그는 뉴욕 카네기홀 무대에 섰다. 이듬해 나온 실황 앨범 「라이브 앳 카네기홀」에는 노래 사이사이 고향과 할머니, 해군 시절을 이야기하는 그의 목소리가 그대로 담겼다. 이 음반은 지금도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서식스) 1974년 서식스에서의 마지막 앨범 「+저스트먼츠」가 나왔다. 그러나 서식스는 경영난을 겪다 이듬해 문을 닫았고, 그는 새 둥지를 찾아야 했다.

♪린 온 미 (Lean on Me)1972실황 Bill Withers·Stevie Wonder·John Legend

새로 산 전자 피아노 위의 손가락 연습과 탄광촌 이웃들의 기억이 만나 빌보드 1위 곡이 됐다.

  • 피아노 선율이 계단을 오르내리듯 이웃한 음을 차례로 밟는다. 피아노 초보의 손가락 연습에서 나왔다는 그의 설명대로,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는 단순함이 힘이다.
  • 교회 음악(가스펠)의 기운이 짙다. 손뼉과 합창이 더해지며 한 사람의 노래가 여럿의 노래로 넓어진다.
  • 후반부에 같은 말을 거듭하며 곡이 점점 달아오른다. 손뼉 소리가 빨라지면서 기도회의 끝자락처럼 들뜬 분위기가 된다.
  • 그의 목소리는 끝까지 힘을 주지 않는다. 낮고 따뜻한 음역(바리톤)으로 말하듯 부르기 때문에 설교가 아니라 이웃의 약속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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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즈 미 (Use Me)1972실황 Bill Withers · 1972 Old Grey Whistle Test

「린 온 미」와 같은 앨범에 실린 곡으로, 다정한 위로 옆에 놓인 능청스러운 솔직함을 보여 준다.

  • 제임스 개드슨의 드럼이 곡의 뼈대다. 단단하면서도 느슨하게 흔들리는 박자 감각이 몸을 저절로 움직이게 하는 리듬감(그루브)을 만든다.
  • 줄을 때려 소리를 내는 전자 건반(클라비넷)이 짧게 끊어 치는 리듬을 반복한다. 1970년대 펑크 음악 특유의 끈적한 질감이 여기서 나온다.
  • 남들이 뭐라 하든 이 관계가 좋다는 고백을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풀어낸다. 같은 말을 조금씩 비틀어 부르는 대목에서 그의 유머가 드러난다.
  • 카네기홀 실황판에서는 곡이 훨씬 길게 늘어나고, 밴드와 주고받는 즉흥 연주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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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컬럼비아와의 불화 · 1975–1985

(이적) 1975년 그는 거대 음반사 컬럼비아와 계약했다. 「메이킹 뮤직」(1975), 「네이키드 앤 웜」(1976), 「메너저리」(1977), 「바웃 러브」(1978)가 이어졌다. 작은 독립 레이블에서 누리던 자율은 큰 회사에서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가정) 1976년 그는 마르시아와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다. 이후 그는 가정을 삶의 중심에 두었다고 전해진다. (갈등) 컬럼비아의 A&R 담당자들은 곡 선택과 음악 방향에 자주 간섭했다. 그는 흑인 가수에게 정해진 틀을 강요받는다고 느꼈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회고했다. 그 와중에도 「메너저리」의 「러블리 데이」는 빛났다. 작곡가 스킵 스카버러와 함께 쓴 이 곡은 영국에서 톱 10에 올랐고 오래도록 사랑받았다. (협업) 그의 가장 큰 히트는 오히려 다른 사람의 앨범에서 나왔다. 재즈 색소포니스트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의 1980년 앨범 「와인라이트」에 객원으로 부른 「저스트 더 투 오브 어스」가 1981년 빌보드 핫 100 2위에 올랐다. 랄프 맥도널드, 윌리엄 솔터와 함께 쓴 이 곡으로 그는 1982년 두 번째 그래미 최우수 R&B 곡상을 받았다. 같은 해 무렵 재즈 펑크 그룹 크루세이더스의 「소울 섀도스」에도 목소리를 보탰다. 곡의 코드 진행은 훗날 하나의 공식처럼 널리 쓰이게 된다. (마지막) 1985년 「워칭 유 워칭 미」를 끝으로 그는 더 이상 정규 앨범을 내지 않았다.

♪러블리 데이 (Lovely Day)1977노래 Bill Withers · 1977 원곡 음원

레이블과의 마찰 속에서 나온 곡이지만, 그의 노래 가운데 가장 맑고 밝은 아침의 노래다.

  • 후반부에서 그는 한 음을 18초 남짓 끊지 않고 이어 부른다. 미국 차트 히트곡에서 가장 길게 끈 음 가운데 하나로 자주 꼽힌다.
  • 통통 튀는 베이스와 부드러운 현악이 함께 움직이며, 잠에서 깨어 기분이 차츰 좋아지는 과정을 소리로 그린다.
  • 힘든 하루라도 곁의 한 사람 덕분에 괜찮아진다는 단순한 이야기를 과장 없이 전한다.
  • 1988년 영국에서 리믹스 판이 다시 히트하며 원곡이 나온 지 10년 만에 새 세대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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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트 더 투 오브 어스 (Just the Two of Us)1980공식 MV — Bill Withers

자기 이름의 앨범이 아니라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의 앨범에 객원으로 부른 곡이 그의 커리어 후반 가장 큰 히트가 됐다.

  •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의 소프라노 색소폰이 매끈하게 문을 연다. 재즈와 R&B가 섞인 부드러운 도시의 밤 분위기다.
  • 화음이 미끄러지듯 내려앉는 독특한 코드 진행이 곡 전체를 감싼다. 이 진행은 곡 이름을 따 불릴 만큼 유명해졌고, 일본 대중음악 등에서 수없이 응용됐다.
  • 그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담담하게 부른다. 오래 함께한 연인끼리 나누는 대화처럼 들린다.
  • 타악기 연주자이기도 한 공동 작곡가 랄프 맥도널드의 퍼커션이 뒤에서 은근히 리듬을 받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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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떠난 사람의 노래 · 1985–2020

(은퇴) 마흔일곱 살, 그는 스스로 음반 산업을 떠났다. 남이 정한 방식으로 녹음하느니 만들지 않는 편을 택했다고 그는 말했다. 이후 그는 로스앤젤레스의 집에서 가족과 지냈고, 복귀 요청에도 끝내 응하지 않았다. (커버) 무대를 떠난 뒤에도 노래는 계속 불렸다. 1987년 그룹 클럽 누보의 「린 온 미」 커버가 빌보드 1위에 오르면서, 그는 1988년 작곡가로서 세 번째 그래미를 받았다. 1996년 블랙스트리트의 「노 디기티」는 「그랜드마스 핸즈」를 샘플링했다. 그는 자기 곡의 출판권 수입으로 넉넉히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내 마르시아가 그의 음악 출판 사업을 맡아 관리했다. (다큐) 2009년 다큐멘터리 「스틸 빌」은 은퇴 뒤의 그를 담았다. 화면 속 그는 지난 영광에 매달리지 않는 사람이었고, 말더듬는 아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헌액) 2005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올랐고, 2015년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헌액사는 스티비 원더가 맡았다. 무대에 오른 그는 특유의 건조한 유머로 소감을 전했다. (작별) 2020년 3월 30일,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심장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81세였다. 코로나19 대유행이 막 시작돼 사람들이 서로 떨어져 지내던 때였고, 세계 곳곳에서 「린 온 미」가 다시 불리고 있었다.

덜 알려진 이야기

1974년 그는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 킨샤사에서 열린 음악 축제 자이르 74 무대에 제임스 브라운, B.B. 킹 등과 함께 섰다. 무하마드 알리와 조지 포먼의 세기의 대결에 맞춰 열린 축제였는데, 경기 일정이 미뤄지고 권투의 그늘에 가려 공연 자체는 오래 잊혔다. 기타 하나로 「호프 쉬일 비 해피어」를 부르는 그의 모습은 1996년 다큐멘터리 「웬 위 워 킹스」와 2008년 「소울 파워」가 나온 뒤에야 널리 알려졌다. 「라이브 앳 카네기홀」에는 스튜디오 앨범에 실리지 않은 반전(反戰) 노래 「아이 캔트 라이트 레프트핸디드」가 담겨 있다. 베트남 전쟁에서 오른팔을 잃은 병사의 목소리로 부르는 곡으로, 그는 노래 앞에 긴 이야기를 붙였다. 9년을 해군에서 보낸 사람의 노래였지만 싱글로 나오지 않았기에 히트곡 목록에서는 늘 빠진다. 컬럼비아 시절 한 A&R 담당자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인 더 게토」를 불러 보라고 권했다는 일화를 그는 여러 차례 회고했다. 그에게 이것은 흑인 가수라면 빈민가 노래가 어울릴 것이라는 고정관념의 상징이었다. 은퇴를 단순한 변덕이 아니라 이런 경험이 쌓인 결과로 보게 해 주는 대목이다.

용어 노트 📚🔎

B사이드

(팝에서) 예전 싱글 레코드는 판 한 장에 앞면(A면)과 뒷면(B면)에 곡이 하나씩 실렸다. 음반사가 밀고 싶은 곡을 A면에, 덤처럼 함께 넣는 곡을 B면에 실었는데, 그 뒷면 곡을 B사이드라고 한다. 급식에서 반찬으로 나온 메뉴가 주요리보다 더 인기를 끄는 경우처럼, 가끔은 B사이드가 라디오에서 더 사랑받아 히트곡이 되기도 한다. 「에인트 노 선샤인」이 바로 그랬다.

세션 연주자

(팝에서) 밴드의 정식 멤버가 아니라, 녹음이나 공연 때마다 고용돼 연주하는 전문 연주자다. 실력이 뛰어나 여러 가수의 음반에 두루 참여한다. 학교 연극에서 반에 피아노 칠 사람이 없어 다른 반의 잘 치는 친구에게 반주를 부탁하는 것과 비슷하다. 위더스의 데뷔 앨범에는 이름난 세션 연주자들이 모였다. (다른 데서는) 컴퓨터나 인터넷에서 세션은 한 번 접속해 있는 동안의 시간을 가리킨다.

A&R

(말뜻) 영어 Artists and Repertoire의 머리글자다. 아티스트(가수)와 레퍼토리(부를 곡의 목록)를 뜻한다. (팝에서) 음반사에서 새 가수를 찾아내고, 어떤 곡을 녹음할지, 누구와 작업할지를 정하는 일을 맡은 사람이나 부서다. 운동부의 스카우트와 감독을 합친 역할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좋은 A&R은 가수의 장점을 살려 주지만, 지나치게 간섭하면 가수와 부딪힌다. 위더스가 컬럼비아에서 겪은 갈등이 그런 경우였다.

커버

(팝에서) 다른 가수가 먼저 발표한 노래를 새로 녹음하거나 부르는 것이다. 원곡의 멜로디는 그대로 두고 자기 목소리와 편곡으로 다시 해석한다. 노래방에서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내 식대로 부르는 것과 같다. 마이클 잭슨과 클럽 누보가 위더스의 곡을 커버했고, 원곡을 쓴 위더스에게도 작곡가로서 수입과 상이 돌아갔다. (다른 데서는) 일상에서 커버는 책의 표지나 물건을 덮는 덮개를 뜻한다.

그루브

(말뜻) 영어 groove는 원래 레코드판에 파인 가느다란 홈을 뜻한다. 바늘이 그 홈을 따라 미끄러지듯, 리듬에 몸이 착 붙어 흘러가는 느낌을 가리키게 됐다. (팝에서) 드럼과 베이스 같은 리듬 악기가 만들어 내는, 몸이 저절로 움직이게 되는 박자감이다. 박자가 정확한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살짝 밀고 당기는 맛이 있어야 한다. 줄넘기를 할 때 친구들이 돌리는 줄의 박자에 몸이 자연스레 맞춰지는 그 느낌과 비슷하다. 「유즈 미」의 드럼이 좋은 예다.

코드 진행

(팝에서) 코드는 여러 음을 동시에 울린 화음이고, 코드 진행은 노래가 흐르는 동안 그 화음이 어떤 순서로 바뀌어 가는지를 말한다. 같은 멜로디라도 아래에 깔린 코드 진행이 달라지면 노래의 분위기가 확 바뀐다. 요리로 치면 같은 재료라도 양념을 넣는 순서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것과 같다. 「저스트 더 투 오브 어스」의 코드 진행은 너무 유명해져서 곡 이름으로 불리고, 다른 많은 노래에 쓰였다.

샘플링

(말뜻) 샘플(sample)은 견본, 즉 전체에서 떼어 낸 작은 조각이라는 뜻이다. (팝에서) 이미 녹음된 다른 곡의 일부분을 잘라 와 새 곡의 재료로 쓰는 방법이다. 힙합과 R&B에서 특히 많이 쓰이며, 원곡의 권리자에게 허락을 받고 대가를 치러야 한다. 미술 시간에 잡지 사진을 오려 붙여 새 그림을 만드는 콜라주와 비슷하다. 블랙스트리트의 「노 디기티」는 「그랜드마스 핸즈」의 도입부를 샘플링했다. (다른 데서는) 통계나 과학에서 샘플링은 전체 가운데 일부를 뽑아 조사하는 표본 추출을 뜻한다.

출판권

(팝에서) 음악에는 두 가지 권리가 따로 있다. 하나는 특정 녹음 자체에 대한 권리이고, 다른 하나는 노래 그 자체, 즉 멜로디와 가사에 대한 권리다. 뒤의 것을 관리하는 일을 음악 출판(퍼블리싱)이라 하고, 그 권리를 출판권이라 한다. 누가 그 노래를 다시 부르거나, 광고에 쓰거나, 샘플링할 때마다 출판권을 가진 쪽에 돈이 들어온다. 요리사가 만든 한 접시 요리가 녹음이라면, 그 요리의 레시피가 노래이고, 레시피를 쓸 때마다 사용료를 받는 권리가 출판권인 셈이다. (다른 데서는) 일상에서 출판은 책이나 잡지를 인쇄해 펴내는 일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