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o Yong-pil
「돌아와요 부산항에」에서 「그래도 돼」까지, 반세기 넘게 무대를 떠나지 않은 한 목소리.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곁의 사람들 ⏳🌊
- 가족조경구
아버지로, 아들이 음악을 하는 것을 반대했고 그 갈등 끝에 아들은 고교 시절 집을 나왔다.
- 후원황선우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작사·작곡가로, 한 번 묻힌 곡을 그에게 다시 녹음하게 해 출세작을 만들어 주었다.
- 프로듀서김희갑
아내인 작사가 양인자와 함께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 겨울의 찻집」을 만들어 8집의 변화를 이끈 작곡가다.
- 가족안진현
1994년 결혼한 아내로 2003년 세상을 떠났고, 그는 아내의 유산을 심장병 어린이 치료에 기부했다.
- 후원신대철
시나위의 기타리스트로, 2013년 그의 초기 31곡 권리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해 권리를 되찾는 계기를 만들었다.
- 우정이선희
1980년대부터 함께 활동해 온 후배 가수로, 2018년 평양 공연 「봄이 온다」의 무대에 그와 함께 섰다.
I. 송산의 막내 · 1950–1967
(출생) 1950년 3월, 대한민국 경기도 화성군 송산면(오늘날 화성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조경구, 어머니는 김남숙이다. 아버지가 마흔아홉, 어머니가 마흔 무렵에 얻은 늦둥이였다. 7남매 가운데 막내아들로 알려져 있지만, 형제 순서는 기록마다 조금씩 다르다. (서울) 송산국민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 경동중학교와 경동고등학교를 다녔다. 시골에서 자란 소년이 큰 도시에 홀로 놓인 경험은 훗날 그가 직접 쓴 노래에 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시절의 일상을 자세히 전하는 1차 기록은 많지 않다. (기타) 기타를 처음 잡게 된 경위도 분명하지 않다. 어린 시절 레이 찰스의 음악을 듣고 마음이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출처가 확인되지 않은 대목이다. 확실한 것은 그가 노래보다 기타 연주로 음악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반대) 아버지는 아들이 음악을 하는 것을 반대했다. 고등학교 3학년 무렵 부자의 갈등은 깊어졌고, 그는 결국 집을 나왔다. 당시 대중음악은 아직 떳떳한 직업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많은 집안이 자식의 이런 선택을 일탈로 보았다. (시대) 1960년대 후반 한국 대중음악은 라디오와 LP 음반, 그리고 미군 기지의 클럽 무대가 떠받치고 있었다. 미국 최신 음악을 날마다 연주해야 하는 미군 클럽은 실력 있는 연주자들이 배우고 자라는 학교였다. 집을 나온 열여덟 살 청년이 들어선 곳도 그 무대였다.
II. 미8군의 기타리스트 · 1968–1974
(애트킨스) 1968년 그는 컨트리 음악을 연주하는 그룹 애트킨스에서 기타를 맡아 미8군 무대에 섰다. 이어 흑인 음악을 주로 연주하던 화이브 핑거스에서 활동했다. 미군 관객 앞에서 컨트리와 흑인 음악을 오간 이 시기에 그는 장르를 가리지 않는 귀를 갖게 되었다. (마이크) 노래를 시작한 것은 우연에 가까웠다. 밴드에서 베이스와 보컬을 맡던 동료가 군에 입대하자 기타리스트였던 그가 대신 마이크를 잡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연주자의 눈으로 노래를 보는 습관은 이후 밴드와 함께하는 그의 음악 방식으로 이어졌다. (김트리오) 1971년에는 김대환, 최이철 등과 함께 김트리오로 활동하며 록 음악을 본격적으로 했다. 1972년에는 그룹 25시에서도 활동했다. 무대를 옮겨 다니는 연주 생활은 고단했고 수입도 일정하지 않았다. (첫녹음) 이 무렵 작곡가 황선우의 권유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처음 녹음했다. 1970년 다른 가수가 「돌아와요 충무항에」라는 제목으로 불렀다가 묻힌 곡이었다. 제목과 가사 일부를 고쳐 다시 냈지만, 녹음 상태가 나빠 방송을 타지 못하고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복무) 1973년 그는 방위병으로 소집되어 해안경비병으로 복무했다. 제대한 뒤인 1974년 자신의 밴드 조용필과 그림자를 결성했다. 남의 밴드에서 기타를 치던 청년이 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내건 순간이었다.
III. 부산항과 공백 · 1975–1979
(재녹음) 1976년 그는 킹레코드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다시 냈다. 트로트 가락에 당시 유행하던 고고 리듬을 얹은 새 편곡이었다. 노래는 부산에서 먼저 인기를 얻은 뒤 전국으로 퍼졌다. 몇 해 전 제대로 알려지지 못하고 사라졌던 곡이 이번에는 그의 이름을 알린 출세작이 되었다. (귀향) 이 노래는 떠난 사람이 고향 항구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마침 재일동포의 모국 방문이 이어지던 시기와 맞물려, 바다 건너 가족을 둔 사람들의 사연과 함께 불렸다고 알려져 있다. 일본에도 이 곡이 알려지면서 훗날 그의 일본 활동의 바탕이 되었다. (공백) 그러나 정점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름이 막 알려지기 시작한 가수에게 갑자기 긴 공백이 찾아왔다. (판소리) 무대에 설 수 없던 이 시기에 그는 판소리에 깊이 빠져 혼자 소리를 익혔다고 전해진다. 거칠게 갈라지면서도 멀리 뻗어 나가는 그의 창법이 이때 만들어졌다는 것이 정설처럼 이야기된다. 미군 클럽에서 익힌 서양 음악과 우리 소리가 한 목소리 안에서 만난 것이다. (해금) 1978년부터 1979년 사이에 활동 금지가 풀렸다. 1979년 그는 지구레코드와 전속 계약을 맺고 밴드 위대한 탄생을 만들었다. 밴드 이름에는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가 담겨 있었다.
한 번 묻혔던 곡을 다시 녹음해 출세작으로 만든 노래다. 곧이어 찾아온 활동 금지 직전의 정점이기도 했다.
- 트로트 가락에 1970년대에 유행한 빠르고 경쾌한 춤곡 리듬(고고 리듬)을 얹은 편곡이 핵심이다. 슬픈 노래인데도 발이 먼저 반응하게 만드는 이 엇갈림이 당시 이 곡을 새롭게 들리게 했다.
- 곡의 짜임은 두 절(벌스)을 되풀이하는 단순한 구조다. 끝부분에서 음이 높아지며 감정이 정점에 이른다.
- 노래는 떠난 사람이 고향 항구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화자의 하소연이다. 재일동포의 모국 방문이 이어지던 시기에 그 사연과 겹쳐 불렸다고 알려져 있다.
- 지금 흔히 듣는 녹음은 1980년 1집에 다시 실린 판본인 경우가 많다. 1976년 판본과 함께 들으면 판소리 공부 뒤에 달라진 목소리의 거친 결을 비교해 볼 수 있다.
IV. 위대한 탄생 · 1980–1985
(백만) 1980년에 나온 정규 1집 「창밖의 여자」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음반 한 장이 100만 장 넘게 팔린 기록으로 소개된다. 이 음반에는 애절한 발라드인 타이틀곡과 함께 신시사이저 소리를 앞세운 「단발머리」, 민요 「한오백년」, 그리고 새로 녹음한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함께 실렸다. 록, 민요, 트로트, 발라드가 한 장에 담긴 이 구성이 이후 그의 음악을 규정하는 특징이 되었다. (컬러) 같은 해 12월 한국에서 컬러TV 방송이 시작되었다. 가요 순위 프로그램이 안방의 중심이 되던 때, 무대 위 밴드와 함께 노래하는 그의 모습은 새 매체와 잘 어울렸다. 1980년에는 한국 가수로는 처음으로 미국 뉴욕 카네기홀 무대에 섰다. (실험) 1981년 3집의 타이틀곡 「고추잠자리」는 짐작하기 어렵게 바뀌는 전개로 가요계를 놀라게 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는 KBS 가요대상에서 1981년(이정희와 공동), 1982년, 1983년, 1985년(정수라와 공동) 대상을 받았다. 1983년에는 일본 NHK홀에서 외국 가수로는 처음으로 공연했다. 젊은 여성 팬들이 그를 부르는 함성 때문에 오빠부대라는 말이 생겼다고 알려져 있다. (전환) 1985년 7집의 「여행을 떠나요」는 밝은 록으로 널리 사랑받았다. 같은 해 11월에 나온 8집에는 그가 직접 쓴 곡이 한 곡도 없었다. 작사가 양인자와 작곡가 김희갑 부부가 만든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 겨울의 찻집」과 정풍송이 쓴 「허공」이 이 음반에 실렸다. 남의 곡으로 자신을 새롭게 해 보려는 선택이었다.
첫 밀리언셀러로 소개되는 1집에서 「창밖의 여자」와 짝을 이룬 경쾌한 곡이다. 같은 음반에 민요와 트로트가 함께 실려 그의 폭넓은 음악을 보여 준다.
- 도입부에 들리는 통통 튀는 전자음은 전기 회로로 소리를 만드는 악기(신시사이저)의 소리다. 한국 가요에서 신시사이저를 앞세운 이른 사례로 자주 이야기된다.
- 후렴의 높은 대목에서는 목소리를 뒤집어 가볍게 띄우는 창법(가성)처럼 들린다. 거칠고 굵은 발라드 창법과 정반대여서 한 가수의 두 얼굴을 보여 준다.
- 디스코 느낌이 나는 일정한 박자(8비트)가 곡 전체를 끌고 간다. 1980년 무렵 밴드 위대한 탄생이 녹음한 아날로그 사운드다.
- 노래는 첫사랑 소녀를 떠올리는 청년의 들뜬 그리움을 담았다. 2018년 평양 공연에서도 이 곡을 불렀다.
3집 타이틀곡으로, 성공한 공식을 되풀이하지 않고 실험을 택한 곡이다. 짐작하기 어려운 전개로 당시 가요계를 놀라게 했다는 평을 받는다.
- 동요처럼 단순한 가락과 록 밴드의 단단한 연주가 맞물린다. 곡이 진행되면서 분위기가 몇 번씩 바뀌어, 당시 장르를 하나로 정하기 어렵다는 평을 받았다.
- 노래는 어린 시절의 한가로운 오후와 엄마를 그리는 마음을 아이의 눈높이로 담았다. 시골에서 자란 그의 유년과 겹쳐 듣는 사람이 많다.
- 기타와 건반이 주고받는 짧은 반복 구절(리프)이 곡의 뼈대를 이룬다. 기타리스트로 시작한 그의 밴드 감각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 공연에서는 관객이 다 함께 따라 부르는(떼창) 곡으로 자리 잡았다.
자작곡이 한 곡도 없던 8집에서 양인자 작사, 김희갑 작곡으로 태어난 대곡이다. 남의 곡으로 자신을 새롭게 하려 한 시도가 가장 크게 성공한 사례다.
- 6분 가까운 길이에 노래 사이사이 말하듯 읊조리는 긴 독백 구간이 들어 있다. 대중가요로는 드문 형식이다.
- 독백에서 노래로 넘어가는 순간 목소리의 힘이 크게 달라진다. 낮게 읊조리다가 판소리에서 다진 거친 고음으로 터져 나오는 대비가 이 곡에서 가장 유명한 순간이다.
- 노래는 높은 곳을 향해 홀로 걸어가는 존재를 빌려 고독과 야망, 삶에 대한 성찰을 이야기한다. 화자가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거는 방식이다.
- 그는 1999년 탄자니아 정부의 초청으로 킬리만자로 일대를 방문했다고 보도되었다.
V. 바다 건너, 그리고 꿈 · 1986–2003
(일본) 1986년 일본에서 낸 음반 「추억의 미아」가 100만 장 넘게 팔렸다고 소개된다. 그는 1987년부터 1990년까지 NHK 홍백가합전에 출연했다. 일본에서 공식 집계된 음반 판매량은 600만 장이 넘는다고 소개되며, 오늘날 한류의 먼 선례로 평가된다. (사양) 국내에서는 1980년대 후반 방송사 시상식의 상을 더 받지 않겠다고 밝혔다고 알려져 있다. 상을 받는 일보다 더 나은 음악을 하겠다는 뜻이었다고 전해진다. 1988년에는 한중 수교 이전에 한국 가수로는 처음으로 중국에서 공연했다. (꿈) 1991년 13집에 실린 「꿈」은 그가 직접 쓴 곡이다. 꿈을 안고 도시로 올라온 젊은이의 외로움과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담았다. 이 곡은 그가 가요 차트에서 1위를 한 마지막 곡으로 기록된다. 송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소년의 기억이 이 노래에 겹쳐 읽히는 이유다. (공연)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 댄스와 랩이 방송을 차지하자, 그는 TV 순위 경쟁에서 물러나 공연장에 집중했다. 1993년 부산 공연에는 많은 관객이 몰렸다고 전해진다. (이별) 1994년 그는 재미교포 사업가 안진현과 결혼했다. 2003년 초 아내가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는 아내의 유산을 심장병 어린이 치료에 기부했다. 같은 해 18집 「Over The Rainbow」가 나왔다. 이 음반은 이후 10년 동안 그의 마지막 정규 앨범으로 남았다.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온 그의 삶과 겹쳐 읽히는 자작곡이다. 그가 가요 차트 1위에 오른 마지막 곡으로 기록된다.
- 노래는 꿈을 안고 큰 도시로 온 젊은이가 화려한 거리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담았다. 한 사람의 독백처럼 담담하게 전해진다.
- 신시사이저와 드럼 소리가 잘 다듬어진 1990년대 초의 매끈한 프로덕션이다. 1980년대의 거친 밴드 녹음과 비교하면 시대의 변화가 들린다.
- 앞부분은 낮고 차분하게 시작하다가 후렴에서 목소리가 활짝 열린다. 절제와 분출을 오가는 그의 발라드 창법을 잘 보여 주는 곡이다.
- 음악 전문가 설문에서 「단발머리」, 「바운스」와 함께 그의 최고의 노래로 꼽혔다.
VI. 평양, 그리고 헬로 · 2004–2018
(평양) 2005년 8월 23일 그는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단독 공연을 했다. 남쪽 가수가 북녘 관객 앞에서 자기 이름으로 연 이 무대는 SBS를 통해 방송되었다. 2009년에는 장학재단을 세웠고, 이후 꾸준히 기부를 이어 왔다. (헬로) 2013년 4월 10년 만의 정규 19집 「Hello」가 나왔다. 그는 자신을 모르는 작곡가의 곡을 찾으려고 해외로 눈을 돌렸고, 열 곡 가운데 여섯 곡이 미국과 영국 등지의 작곡가에게서 왔다. 공동 프로듀서로 박용찬(MGR)과 박병준이 참여했고, 타이틀곡 「Hello」에는 래퍼 버벌진트가 함께했다. (바운스) 앨범보다 먼저 공개한 「바운스」는 음원 사이트 1위를 휩쓸었다. 이어 빌보드 K-Pop 차트 1위에 올랐고, 앨범은 가온 앨범 차트 1위로 데뷔했다. 음반 가게가 아니라 스트리밍과 유튜브에서 노래가 퍼지는 시대에, 예순셋의 가수가 젊은 세대에게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바운스」는 그해 한국갤럽 올해의 노래로 뽑혔다. (저작권) 같은 해 시나위의 기타리스트 신대철이 오래된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1986년 계약에 따라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고추잠자리」 등 31곡의 복제권과 배포권이 음반사에 넘어가 있었던 것이다. 2013년 10월 지구레코드가 이 권리를 그에게 돌려준다는 공증 서류를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냈고, 이 사실은 2014년 2월 알려졌다. (봄) 2018년 4월 1일 그는 평양 동평양대극장에서 열린 남북 평화 협력 기원 공연 「봄이 온다」에 섰다. 이선희, 윤도현 등과 함께한 이 무대에서 그는 「그 겨울의 찻집」, 「단발머리」, 「여행을 떠나요」를 불렀다. 그해는 그의 데뷔 50주년이었다.
10년 만의 19집에서 먼저 공개된 곡이다. 예순셋의 가수를 스트리밍 세대가 처음 만나게 한 곡이기도 하다.
- 처음부터 통통 튀는 리듬의 경쾌한 팝 록이다. 짧은 반복 구절(훅)이 앞부분에 일찍 나와 처음 듣는 사람도 금세 따라 흥얼거리게 된다.
- 가사는 설레는 소년의 마음을 담았다고 소개된다. 설레는 마음을 고백하는 소년의 말투가 예순 넘은 목소리에 실려 묘한 생기를 낸다.
- 해외 작곡가의 곡을 고르고 다듬은 2010년대식 깔끔한 녹음이다. 그는 오래 해 온 창법 대신 힘을 뺀 가볍고 밝은 발성을 택했다.
- 앨범보다 먼저 공개되자 음원 사이트 1위를 휩쓸고 빌보드 K-Pop 차트 1위에 올랐다. 그해 한국갤럽 올해의 노래로도 뽑혔다.
VII. 스무 번째 노래 · 2019–2026
(스물) 2024년 10월 22일 11년 만의 정규 20집 「20」이 나왔다. 「그래도 돼」, 「찰나」, 「Timing」, 「세렝게티처럼」, 「왜」, 「Feeling Of You」, 「라」 일곱 곡이 실렸다. 그는 앨범으로는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말하면서도, 좋은 곡이 생기면 계속 만들겠다고 덧붙였다. (패자) 타이틀곡 「그래도 돼」에 대해 그는 TV로 스포츠 경기를 보다 카메라가 승자에게만 향하는 것을 보고 진 사람의 마음을 떠올리며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이긴 사람은 카메라에 잡히지만 진 사람은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는 것이다. 활동 금지로 무대에서 물러나 있던 시절을 겪은 가수가 일흔넷에 내놓은 위로의 노래였다. (공연) 같은 해 11월 공연에서 그는 두 시간 동안 스물아홉 곡을 직접 불렀다고 보도되었다. 2025년 9월 6일에는 광복 80주년 KBS 대기획 「조용필, 이 순간을 영원히」 무대에 섰다. 1968년 미군 클럽에서 시작한 무대가 다시 한번 전국에 방송되었다. (이름) 그는 가왕이나 국민가수 같은 별칭이 민망하다며 그냥 조용필로 불리기를 바란다고 밝혀 왔다. 언론 노출을 꺼리고, 음악 말고는 취미가 없다고 말해 온 사람이다. (현재) 2026년 현재 그는 위대한 탄생과 함께 여전히 무대에 서고 있다. 그의 경력은 LP와 카세트, 컬러TV와 CD, 스트리밍으로 이어진 한국 대중음악 매체의 역사를 거의 그대로 지나왔다.
11년 만의 20집 첫 곡이자 타이틀곡이다. 그는 경기에서 진 사람의 마음을 떠올리며 만든 노래라고 설명했다.
- 강하게 울리는 전기 기타가 앞에 선 모던 록 편곡이다. 맑게 뻗는 보컬과 어우러져 가장 고조되는 대목(하이라이트)에서 감정이 크게 풀린다는 평을 받았다.
- 노래는 무언가를 이루지 못한 사람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응원가다. 화자는 가르치려 하지 않고 곁에 서서 다독이는 태도를 취한다.
- 일흔넷의 목소리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높은 음까지 뻗는 발성이 화제가 되었다. 다만 예전의 거친 결 대신 한결 맑은 음색을 택한 점이 눈에 띈다.
- 발매 뒤 공연에서 그는 두 시간 동안 스물아홉 곡을 직접 불렀다고 보도되었다. 이 곡은 그 무대에서 새 시대의 대표곡 자리를 이어받았다.
덜 알려진 이야기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처음부터 그의 노래가 아니었다. 1970년 김해일이 「돌아와요 충무항에」라는 제목으로 불렀는데, 음반이 알려지지 못했고 가수도 이듬해 세상을 떠나 곡은 잊혔다. 작곡가 황선우는 제목과 가사 일부를 바꿔 조용필에게 녹음하게 했지만 이 판본도 녹음 상태가 나빠 방송을 타지 못하고 사라졌다. 1977년 선데이서울 기사가 이 경위를 전한다. 세 번째 시도인 1976년 판이 대히트하면서 앞선 실패담은 성공담 뒤로 가려졌다. 그의 대표곡 31곡에 대한 음반 복제권과 배포권은 1986년 계약 이후 27년 동안 음반사에 있었다. 그는 공연과 방송에서 자기 노래를 부를 수는 있었지만, 그 노래를 음반으로 다시 내면 수익은 음반사로 돌아갔다. 그러다 2013년 신대철의 문제 제기와 온라인 청원이 이어졌고, 그해 10월 음반사가 권리를 돌려주기로 했다. 가요계 계약 관행의 문제로 오래 묻혀 있던 일이 「바운스」 열풍과 함께 세상에 드러났다. 판소리를 익히다 피를 토했다는 일화는 그의 창법을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그는 2013년 SBS 방송에서 직접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다. 공백기에 판소리를 공부했다는 큰 줄기는 남았지만, 극적인 장면은 후대에 덧붙은 신화였던 셈이다. 그는 1999년 탄자니아 정부의 초청으로 킬리만자로와 세렝게티를 방문했다고 보도되었다. 한국 노래 한 곡이 먼 나라의 산 이름을 한국인들에게 각인시킨 이 일은 그의 연보에서 작은 각주로만 남아 있다.
용어 노트 📚🔎
미8군 무대
(말뜻) 미8군은 한국에 머무는 미국 육군 제8군을 말한다. 그 기지 안의 클럽에서 열리던 공연을 통틀어 미8군 무대라고 불렀다. (한국 대중음악에서) 1950~70년대 미군 기지 클럽에서는 한국 연주자들이 오디션을 거쳐 미국 최신 팝, 컨트리, 소울을 날마다 연주했다. 음반 산업이 작던 시절, 이곳은 실력 있는 음악인을 길러 낸 학교였고 조용필, 신중현, 패티 김 등이 이 무대를 거쳤다. 영어 시험을 매일 원어민 앞에서 치르는 것과 비슷했다. 잘하지 못하면 다음 날 무대에 설 수 없었다.
해금
(말뜻) 해금(解禁)은 금지(禁)를 푼다(解)는 뜻이다. (한국 대중음악에서) 1970~80년대에는 정부와 방송사가 노래나 가수의 활동을 막는 일이 잦았고, 그 금지가 풀리는 것을 해금이라 했다. 조용필은 1977년 활동이 금지되었다가 1978~79년에 해금되어 무대로 돌아왔다. 체육 시간에 반칙으로 경기에서 빠졌다가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다시 들어가는 것과 비슷하다. 다만 해금은 한 사람이 아니라 나라의 제도가 결정했다. (다른 데서는) 국악에서 해금은 두 줄을 활로 켜는 전통 현악기 이름이다. 한자가 달라(奚琴) 전혀 다른 말이다.
판소리
(말뜻) 판은 사람들이 모여 벌이는 자리, 소리는 노래를 뜻한다. 사람들이 모인 마당에서 부르는 긴 노래라는 뜻이다. (한국 대중음악에서) 한 명의 소리꾼이 북 반주에 맞춰 긴 이야기를 노래와 말로 풀어내는 우리 전통 성악이다. 거칠게 갈라지면서도 멀리 뻗는 목소리를 높이 친다. 조용필은 공백기에 판소리를 익혀 록과 발라드에 그 소리를 녹였다고 전해진다. 교과서 한 권 분량의 이야기를 혼자서 몇 시간 동안 노래로 들려주는 낭독회를 떠올리면 된다.
밀리언셀러
(말뜻) 영어 million(백만)과 seller(팔리는 것)를 합친 말로, 100만 장 넘게 팔린 음반이나 책을 가리킨다. (한국 대중음악에서) 한국에서는 LP와 카세트테이프 시절 음반 한 장이 100만 장을 넘기는 일이 아주 드물었다. 조용필의 1집 「창밖의 여자」가 국내 첫 사례로 소개된다. 1990년대 CD 시절에는 여러 가수가 이 기록을 넘겼지만, 스트리밍이 퍼진 뒤로는 실물 음반 판매로 이 숫자에 닿기가 다시 어려워졌다. 학교 전교생이 모두 같은 책을 한 권씩 사는 일이 전국 수백 개 학교에서 동시에 일어난 셈이다. (다른 데서는) 출판계에서는 100만 부 넘게 팔린 책을 같은 말로 부른다.
엔카
(말뜻) 엔카(演歌)는 원래 연설(演說)하듯 부르는 노래(歌)라는 뜻으로, 일본 메이지 시대에 정치 주장을 노래로 퍼뜨리던 데서 생긴 이름이다. (한국 대중음악에서) 오늘날에는 꺾는 창법과 애절한 정서를 지닌 일본의 대중가요 장르를 가리킨다. 한국의 트로트와 뿌리를 일부 공유한다. 조용필은 1980년대 일본에서 「추억의 미아」 같은 곡으로 크게 성공해 엔카의 황제라는 별칭을 얻었다. 할머니가 즐겨 부르시는 트로트를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말과 감성으로 부르는 노래라고 생각하면 가깝다.
복제권과 배포권
(한국 대중음악에서) 저작권은 하나의 권리가 아니라 여러 권리의 묶음이다. 복제권은 노래를 음반이나 파일로 찍어 낼 권리이고, 배포권은 그렇게 만든 것을 팔거나 나눠 줄 권리다. 조용필은 1986년 계약으로 31곡의 이 두 권리를 음반사에 넘겼다. 그래서 공연과 방송에서 노래를 부를 수는 있었지만, 그 노래를 음반으로 새로 내면 수익은 음반사가 가져갔다. 내가 쓴 소설을 학교 축제에서 낭독할 수는 있지만, 책으로 인쇄해 팔 권리는 다른 사람에게 있는 상황과 같다.
선공개곡
(말뜻) 먼저(先) 공개하는 곡이라는 뜻이다. (한국 대중음악에서) 앨범 전체가 나오기 전에 한두 곡을 미리 내놓아 관심을 모으는 방식이다. 스트리밍 시대에 특히 흔해졌다. 2013년 조용필의 「바운스」가 19집보다 먼저 공개되어 음원 사이트 1위를 휩쓸면서 앨범 발매에 대한 기대를 키웠다. 영화 개봉 전에 예고편을 먼저 보여 주는 것과 같지만, 선공개곡은 예고편이 아니라 완성된 곡 그 자체다.
음원 차트
(말뜻) 음원(音源)은 소리(音)의 근원(源)이라는 뜻으로, 디지털 파일 형태의 노래를 말한다. 차트는 순위표다. (한국 대중음악에서) 멜론, 지니 같은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듣고 내려받았는지로 매기는 실시간 순위다. 2000년대 이후 음반 판매량과 방송 순위를 대신해 인기의 기준이 되었다. 예순세 살의 조용필이 이 차트 1위에 오른 일은 세대를 넘은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게임 랭킹 화면에서 매시간 순위가 바뀌듯, 음원 차트도 듣는 사람이 많을수록 실시간으로 위로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