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rah Vaughan
사람들은 그녀의 목소리를 또 하나의 악기라 불렀다.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함께한 사람들 ⏳🌊
- 가족아다 본
교회 성가대에서 함께 노래하며 음악을 가르친 어머니였다.
- 후원얼 하인스
자신의 빅 밴드에 불러들여 뉴욕 무대에 세운 밴드리더였다.
- 우정빌리 엑스타인
아폴로 극장 무대를 보고 그녀를 추천한 평생의 친구였다.
- 동료디지 길레스피
하인스와 엑스타인 악단에서 함께 비밥을 실험한 동료였다.
- 가족조지 트레드웰
첫 남편이자 초기 경력을 관리한 매니저였다.
- 후원노먼 그랜츠
파블로 레코드에서 후반기 경력을 되살린 프로듀서였다.
I. 뉴어크의 교회 소녀 · 1924–1942 (0–18세)
(출생) 사라 본은 1924년 3월, 미국 뉴저지주 뉴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아스버리 본은 목수였고 틈틈이 기타와 피아노를 쳤으며, 어머니 아다 본은 세탁소에서 일하며 마운트 시온 침례교회 성가대에서 노래했다. 외동으로 자란 사라는 부모가 일하는 동안 교회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교회) 일곱 살 무렵부터 교회 피아노와 오르간을 쳤고, 성가대에서 노래하며 음악의 첫 문법을 익혔다. 뉴어크 아츠 고등학교에 다니며 피아노를 더 공부했지만 집안 형편은 넉넉하지 않아 음악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을지는 불확실했다. 교회에서 배운 발성과 화성 감각은 훗날 그녀가 넓은 음역과 깊은 비브라토를 구사하는 바탕이 되었다. (아폴로) 1942년 가을, 친구의 권유로 뉴욕 할렘의 아폴로 극장 아마추어의 밤에 참가해 「바디 앤드 소울」을 불러 우승했다. 그 무대를 지켜본 가수 겸 밴드리더 빌리 엑스타인의 추천으로, 당시 피아니스트이자 밴드리더였던 얼 하인스가 그녀를 자신의 빅 밴드에 불러들였다. 교회 소녀가 하루아침에 뉴욕 무대의 전문 음악가로 들어선 순간이었다.
II. 비밥의 요람 · 1943–1945 (19–21세)
(하인스악단) 1943년, 사라 본은 얼 하인스 빅 밴드에 두 번째 피아니스트 겸 보컬로 입단했다. 이 악단에는 트럼펫의 디지 길레스피와 색소폰의 찰리 파커가 있었고, 이들은 무대가 끝난 뒤 뒷방에서 기존 스윙과는 다른 빠르고 복잡한 즉흥연주(비밥)를 실험하고 있었다. 사라는 그 연습의 한켠에서 새로운 화성과 리듬을 귀로 받아들였다. (엑스타인악단) 1944년, 빌리 엑스타인이 독립해 자신의 빅 밴드를 꾸리면서 길레스피, 파커와 함께 사라 본도 합류했다. 엑스타인 악단은 흑인 음악가들이 주도한 초기 비밥의 산실로 꼽히며, 사라는 디지 길레스피의 트럼펫과 나란히 노래하며 자신의 음역과 즉흥 감각을 다듬었다. 동료들은 그녀의 목소리가 색소폰처럼 유연하다고 평했다고 전해진다. (첫녹음) 1944년 12월 말, 사라 본은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건 녹음을 했다. 이듬해 5월에는 디지 길레스피와 찰리 파커가 참여한 소규모 콤보 녹음에서 「러버 맨」을 불렀는데, 이는 그녀가 비밥 연주자들과 나란히 서서 남긴 초기 기록 중 하나였다. 교회 소녀가 비밥의 중심에 서기까지 채 3년이 걸리지 않았다.
디지 길레스피, 찰리 파커와 함께한 1945년 콤보 녹음으로, 비밥 연주자들 사이에서 보컬로 나선 그녀의 초기 기록이다.
- 느린 템포의 발라드에서 사라 본이 길게 늘어지는 음을 어떻게 비브라토로 채우는지 들어보면, 이미 오페라 가수에 가까운 발성이 드러난다.
- 1958년 스웨덴 실황에서는 피아노·베이스·드럼 트리오만 반주해, 관악기 없이 보컬이 곡의 선율을 홀로 이끄는 모습을 들을 수 있다.
- 리듬 섹션이 느린 스윙을 유지하는 동안 보컬이 박자의 뒷부분을 끌어 당기는 방식을 눈여겨들을 만하다.
III. 홀로서는 목소리 · 1946–1953 (22–29세)
(매니저) 1946년, 사라 본은 트럼펫 연주자 조지 트레드웰과 결혼했다. 트레드웰은 그녀의 매니저를 맡아 무대 의상과 레퍼토리를 다듬고 클럽과 극장 공연을 조직했으며, 이 무렵부터 '사시'라는 애칭과 '디바인 원'이라는 별명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텐덜리) 1947년에 녹음한 「텐덜리 (Tenderly)」는 원래 왈츠풍으로 쓰인 곡이었으나, 그녀가 느린 스윙으로 다시 해석해 자신의 대표곡으로 만들었다. 넓은 음역과 깊은 비브라토, 오페라 가수에 가까운 발성이 대중에게 각인된 순간이었다. (컬럼비아) 1949년부터 컬럼비아 레코드와 계약해 상업적인 팝 발라드를 다수 녹음했다. 레이블은 그녀의 재즈적 기량보다 대중적인 호소력을 앞세웠고, 사라 본은 이 시기 내내 자신이 원하는 음악과 회사가 원하는 음악 사이에서 타협해야 했다고 훗날 회고했다.
왈츠로 쓰인 곡을 느린 스윙 발라드로 다시 세워, 이후 그녀의 대표곡이자 수많은 재즈 보컬의 표준곡(스탠더드)으로 자리잡았다.
- 곡 도입부에서 피아노가 원곡의 3박자 느낌을 걷어내고 4박자 스윙으로 바꾸는 과정을 들으면, 편곡이 곡의 성격을 완전히 바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사라 본이 한 음절을 길게 끌며 음높이를 미묘하게 흔드는 대목에서, 그녀 특유의 깊은 비브라토를 확인할 수 있다.
- 가사를 다루는 화법이 담담하면서도 음 하나하나에 무게를 두는 쪽이어서, 단순한 멜로디에도 깊이가 생긴다.
- 녹음은 비교적 적은 편성으로 이뤄져, 보컬의 호흡과 표현이 반주에 가려지지 않고 또렷하게 들린다.
IV. 머큐리와 클리포드 브라운 · 1954–1958 (30–34세)
(이중계약) 1954년, 사라 본은 머큐리 레코드와 독특한 계약을 맺었다. 머큐리 본사에서는 대중적인 팝 싱글을, 자회사 엠아시에서는 순수 재즈 앨범을 녹음하는 이중 체제였다. 이는 그녀가 상업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게 한 드문 기회였다. (클리포드브라운) 같은 해 엠아시에서 녹음한 앨범 「사라 본」에는 트럼펫의 클리포드 브라운이 참여했다. 브라운의 트럼펫은 그녀의 목소리 옆에서 독립된 선율(오블리가토)을 엮어 냈고, 두 사람의 주고받음은 훗날 그녀의 가장 뛰어난 재즈 녹음으로 꼽혔다. (이혼) 1958년, 조지 트레드웰과 결혼 생활을 끝냈다. 매니저로서 그의 역할이 커질수록 수익 배분을 둘러싼 갈등도 깊어졌다고 전해지며, 사라 본은 이후 자신의 재정과 경력을 스스로 더 챙기게 되었다.
트럼펫의 클리포드 브라운과 함께한 이 앨범은, 상업과 예술을 동시에 좇을 수 있었던 머큐리·엠아시 이중 계약의 가장 빛나는 결실로 꼽힌다.
- 「러비 오브 버드랜드」에서 클리포드 브라운의 트럼펫이 보컬 선율 옆에 독립된 가락(오블리가토)을 엮어 넣는 대목이 특히 유명하다.
- 브라운의 솔로는 중간 코러스에서 점차 음을 높여 가며 절정에 이르는데, 그 흐름이 사라 본의 다음 가사 진입을 자연스럽게 밀어 준다.
- 드럼의 로이 헤인즈가 가볍게 스윙을 유지하는 동안, 베이스는 보컬과 트럼펫 사이를 오가며 화성의 뼈대를 잡아 준다.
- 32마디 틀(AABA 형식)을 헤드-솔로-헤드로 충실히 따르면서도, 솔로 구간마다 편곡자가 미묘하게 배경을 바꿔 단조롭지 않게 짰다.
V. 대중과 공백 · 1958–1970 (34–46세)
(재혼) 1958년 말, 사라 본은 클라이드 애트킨스와 재혼했다. 1961년에는 딸 데브라 로이스(파리스) 본을 입양해 길렀다. 애트킨스는 음악 경력이 없는 인물이었고 두 사람의 결혼은 1963년 끝났다. (브로큰하티드) 1959년, 단순한 멜로디의 팝 발라드 「브로큰하티드 멜로디」가 그녀의 노래로는 드물게 대중 차트에서 크게 성공했다. 비평가들은 곡 자체보다 그녀의 프레이징과 음색이 성공을 이끌었다고 평했다. (공백) 1960년대에는 룰렛을 거쳐 다시 머큐리로 돌아갔지만 음반 시장의 흐름에서 점차 밀려났다. 록과 소울이 대중음악을 장악하면서 그녀와 같은 재즈 보컬리스트의 녹음 기회는 줄었고, 1967년부터 몇 해 동안은 신보 녹음이 거의 끊겼다. 사라 본은 이 시기 라이브 공연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단순한 팝 발라드였지만 그녀의 음색과 프레이징이 더해져 경력에서 가장 많이 팔린 싱글이 되었다.
- 곡 자체는 소박한 멜로디지만, 사라 본이 특정 구절에서 음을 살짝 미끄러뜨리듯 처리하는 방식이 평범한 팝송을 다르게 들리게 한다.
- 반주는 당시 유행하던 팝 편곡에 가까워, 그녀의 다른 재즈 녹음과 비교하면 리듬 섹션의 즉흥 여지가 크지 않다.
- 후렴에서 목소리를 살짝 눌러 허스키하게 내는 대목은, 이후 그녀의 저음 매력이 더 두드러지는 후기 스타일을 예고한다.
VI. 다시 노래하다 · 1971–1982 (47–58세)
(그랜츠) 1971년 메인스트림 레이블에서 녹음을 재개했고, 1970년대 후반에는 프로듀서 노먼 그랜츠가 1973년에 세운 파블로 레코드와 계약하며 경력의 활력을 되찾았다. 그랜츠는 오래전부터 그녀의 재즈적 기량을 높이 평가했다고 전해진다. (거쉰) 1982년, 조지 거쉰의 노래들을 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하고 녹음한 「거쉰 라이브!」로 이듬해 그래미 최우수 여성 재즈 보컬 퍼포먼스상을 받았다. 50대에 들어선 그녀의 목소리는 더 깊어진 저음과 노련한 프레이징으로 새로운 평가를 받았다. (투어) 이 시기 사라 본은 유럽과 일본을 포함해 세계 각지를 돌며 교향악단과 협연하는 콘서트를 열었다. 평생 담배를 즐겨 피웠던 그녀는 무대 위에서도 특유의 허스키한 저음을 자랑으로 여겼다고 전해진다.
조지 거쉰의 노래를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이 앨범으로 그래미 최우수 여성 재즈 보컬 퍼포먼스상을 받으며, 쉰대 중반에도 여전히 성장하는 목소리를 증명했다.
- 오케스트라 편성 속에서도 사라 본의 목소리가 현악 섹션에 묻히지 않고 또렷하게 떠오르는 균형은, 라이브 녹음의 음향 처리가 신경 쓰였음을 보여준다.
- 느린 발라드에서 한 호흡에 긴 구절을 이어 부르는 대목은, 수십 년의 경력이 쌓은 호흡 조절을 드러낸다.
- 저음 쪽이 더 두꺼워진 음색은 20대 시절의 맑은 소리와 비교해 들으면, 세월이 그녀의 목소리에 어떤 변화를 남겼는지 느낄 수 있다.
VII. 마지막 무대 · 1982–1990 (58–66세)
(활동) 1980년대에도 사라 본은 꾸준히 녹음하고 투어를 이어갔다. 1982년 파블로에서 낸 앨범 「크레이지 앤드 믹스트 업」은 오랜 세월 다져진 목소리로 스탠더드를 새롭게 들려준 후기 걸작으로 꼽힌다. (투병) 1989년 폐암 진단을 받았다. 평생 즐긴 담배가 원인으로 꼽혔고, 투병 중에도 일부 공연 일정을 지키려 했다고 전해진다. (죽음) 1990년 4월 3일,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인근 히든힐스의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예순여섯이었다. 교회 성가대에서 시작해 비밥의 요람을 지나 세계 오케스트라 무대에 오르기까지, 그녀의 목소리는 반세기 가까이 재즈 보컬이 닿을 수 있는 음역과 표현의 폭을 넓혔다.
파블로에서 낸 스튜디오 앨범으로, 오랜 세월 다져진 목소리로 스탠더드를 다시 들려준 후기 걸작으로 평가된다.
- 소규모 쿼텟 편성이어서 피아노와 보컬이 주고받는 대목(인터플레이)이 또렷하게 들린다.
- 「어텀 리브스」에서 사라 본은 가사를 부르지 않고 스캣(뜻 없는 음절로 즉흥해 부르는 창법)만으로 빠른 템포를 내달린다.
- 리듬 섹션은 느슨한 스윙을 유지하며 보컬의 박자 밀고 당기기에 유연하게 맞춘다.
- 스튜디오 녹음 특유의 정제된 소리와, 수십 년 경력이 쌓은 노련한 호흡이 함께 들리는 앨범으로 평가된다.
덜 알려진 이야기
(피아니스트로 입단) 흔히 사라 본은 처음부터 가수로 소개되지만, 1943년 얼 하인스 악단에 들어갈 때 그녀의 공식적인 역할은 두 번째 피아니스트였다. 하인스와 함께 건반을 치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악단의 여성 가수 자리를 이어받은 것이었다. 전기 작가들은 피아니스트 직함이 그녀를 가수 노조가 아닌 연주자 노조(미국 음악가 연맹) 소속으로 고용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설명한다. (자동차광) 전기 작가 레슬리 거스를 비롯해 함께 일한 동료들의 회고에 따르면, 사라 본은 화려한 컨버터블을 몰고 직접 공연장을 오가는 것을 즐겼다. 당시 많은 순회 가수들이 매니저나 운전기사에게 의존했던 것과 달리, 그녀는 운전과 자동차 자체를 좋아해 틈만 나면 장거리를 직접 달렸다고 전해진다. 음악과 무관한 이 취향은 공연 비평이나 음반 해설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스튜디오의 피아노) 유명해진 뒤에도 그녀는 녹음 세션에서 종종 피아노 앞에 앉아 편곡자와 함께 화성을 짚어 보곤 했다고 세션 참가자들이 전한다. 다만 이런 순간은 발매된 음반에 남지 않고 세션 비망록에만 흔적을 남겨, 가수로서의 명성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았다.
용어 노트 📚🔎
비밥
비밥이라는 이름은 연주자들이 곡을 끝맺을 때 흔히 넣던 짧고 꺾이는 두 음을 입으로 흉내 낸 소리에서 왔다고 알려져 있다. 1940년대 뉴욕의 젊은 연주자들이 기존 빅 밴드의 춤곡 재즈에 맞서 만든, 빠른 템포와 복잡한 화성 위에서 벌이는 즉흥연주 중심의 음악이다. 반 친구들이 다 같이 쉬운 동요를 부를 때 몇몇이 일부러 빠르고 가사도 어려운 돌림노래를 만들어 겨루듯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빅 밴드
보통 열 명이 넘는 연주자가 트럼펫, 트롬본, 색소폰 같은 관악기 섹션과 피아노·베이스·드럼의 리듬 섹션으로 나뉘어, 미리 짜인 편곡을 함께 연주하는 큰 편성의 악단이다. 학교 오케스트라처럼 여러 섹션이 각자 맡은 파트를 맞춰 연주하지만, 중간에 한 사람이 튀어나와 즉흥연주를 하는 순간이 따로 있다는 점이 다르다.
스탠더드
여러 세대의 연주자들이 반복해서 연주하고 녹음해 오면서 사실상 공통의 레퍼토리가 된, 널리 알려진 곡을 가리킨다. 학교 축제 때마다 늘 불리는 단골 노래들처럼, 재즈 연주자들 사이에서도 누구나 아는 곡들이 있다. 음악 밖에서는 기준이나 표준이라는 뜻으로 쓰인다(예: 안전 스탠더드).
인터플레이
연주자들이 서로의 소리에 실시간으로 반응하며 멜로디나 리듬을 주고받는 것을 말한다. 친구와 대화할 때 상대의 말에 바로 다음 말을 이어가듯, 연주자들도 서로의 프레이즈에 답하듯 연주한다. 스포츠나 연극에서도 선수나 배우들 사이의 호흡을 인터플레이라 부른다.
오블리가토
이탈리아어로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에서 왔으며, 반드시 연주해야 하는 독립된 선율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가수나 솔로 악기의 주된 선율 옆에서 다른 악기가 독립된 대선율을 꾸준히 엮어 넣는 것을 말한다. 합창에서 주 멜로디를 부르는 친구 옆에서 다른 친구가 전혀 다른 가락으로 화음을 쌓아가는 것과 비슷하다.
비브라토
한 음을 길게 끌 때 음높이를 아주 작게 떨듯이 흔들어 소리에 깊이와 감정을 더하는 발성·연주 기법이다. 손전등 불빛을 가만히 비추는 대신 아주 살짝 흔들어 반짝이게 만드는 것처럼, 음을 살짝 흔들어 표정을 더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