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na Simone
‘예술가의 의무는, 내가 보기에는, 자기 시대를 비추는 것이다.’ — 니나 시몬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함께한 사람들 ⏳🌊
- 가족메리 케이트 웨이먼
감리교 목사였던 어머니로, 딸이 처음 반주를 한 무대가 어머니의 예배였다.
- 스승뮤리엘 마자노비치
영국 출신 피아노 교사로, 어린 유니스에게 바흐를 가르쳐 평생의 연주 뼈대를 세워 주었다.
- 영향빌리 홀리데이
평론가들이 늘 견주던 선배로, 그녀는 홀리데이의 노래인 「아이 러브스 유, 포기」와 「이상한 열매」를 자기 방식으로 다시 불렀다.
- 가족앤드루 스트라우드
형사 출신의 두 번째 남편이자 매니저로, 1960년대 그녀의 경력을 키웠으나 1970년 이혼했다.
- 우정로레인 핸즈베리
그녀를 민권 운동으로 이끈 극작가 친구로, 그 유고 희곡 제목이 「영, 기프티드 앤드 블랙」이 됐다.
- 우정미리엄 마케바
남아프리카 출신 가수로, 1974년 그녀를 라이베리아로 이끌었다.
I. 트라이언의 신동 · 1933–1950 (0–17세)
(트라이언) 1933년 2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트라이언에서 유니스 캐슬린 웨이먼(Eunice Kathleen Waymon)이 태어났다. 여덟 남매 가운데 여섯째였다. 아버지 존 디바인 웨이먼은 이발과 잡역 같은 여러 일을 하며 가족을 부양했고, 어머니 메리 케이트 웨이먼은 감리교 목사였다. 대공황기의 살림은 넉넉하지 않았다. (교회) 세 살 무렵부터 피아노를 귀로 익혀 쳤고, 곧 어머니가 설교하는 예배에서 반주를 맡았다. 손뼉과 흑인 영가(스피리추얼), 회중이 받아 부르는 소리가 그녀가 처음 익힌 음악의 문법이었다. 어머니는 세속 음악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그녀는 회고했다. (스승) 어머니가 가사 일을 하던 집의 백인 부인이 아이의 재능을 알아보고 레슨비를 대 주었고, 영국 출신 피아노 교사 뮤리엘 마자노비치가 그녀를 맡았다. 마자노비치는 바흐를 가르쳤다. 여러 가락이 동시에 맞물려 흐르는 바흐의 짜임(대위법)은 평생 그녀 피아노의 뼈대가 됐다. 마을 사람들은 기금을 모아 그녀의 학업을 도왔다. (연주회) 열두 살 무렵 마을 연주회에서, 맨 앞줄에 앉았던 부모가 백인 관객에게 자리를 내주라는 요구에 뒤로 밀려나자 그녀는 부모가 제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연주하지 않겠다고 버텼다고 자서전에서 회고했다. 그녀는 이 일을 인종 분리의 모욕을 처음 몸으로 겪은 순간으로 기억했다. (졸업) 1950년, 애슈빌의 앨런 여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미국 최초의 흑인 여성 클래식 콘서트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 그녀와 마을이 함께 품은 꿈이었다.
II. 닫힌 문, 새 이름 · 1950–1957 (17–24세)
(줄리아드) 1950년 여름, 후원금으로 뉴욕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공부하며 필라델피아 커티스 음악원의 입학 오디션을 준비했다. 가족도 그녀의 진학을 바라보고 필라델피아로 이사했다. (커티스) 1951년 오디션에서 떨어졌다. 그녀는 흑인이라서 거절당했다고 믿었고, 이 상처를 평생 되풀이해 말했다. 이후에도 개인 교습을 받으며 클래식의 꿈을 놓지 않았지만, 생계를 위해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가수들의 반주를 했다. (애틀랜틱시티) 1954년,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의 미드타운 바 앤 그릴에서 밤마다 피아노를 치는 일을 얻었다. 술집에서 연주한다는 사실을 목사인 어머니가 알까 봐 무대 이름을 지었다고 그녀는 회고했다. 남자친구가 부르던 스페인어 애칭 니냐(꼬마 아가씨)에서 니나를, 프랑스 배우 시몬 시뇨레에게서 시몬을 따왔다. 주인이 노래도 해야 한다고 요구하자 그녀는 그때 처음 손님 앞에서 노래하기 시작했다. (혼합) 그녀의 무대는 바흐식 대위법과 가스펠, 블루스, 브로드웨이 노래를 한 곡 안에서 이어 붙이는 메들리였다. 클래식으로 닦은 손과 교회에서 배운 목소리가 술집에서 비로소 만난 셈이었다. 낮고 굵은 음색, 단어를 한 자씩 곱씹듯 떼어 내는 화법이 입소문을 탔고, 무대는 필라델피아와 뉴욕의 클럽으로 넓어졌다. (이중성) 그녀는 자신이 원한 무대는 카네기홀이었지 술집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오래 품었다. 그 불만은 역설적으로 그녀의 연주를 엄격하게 만들었다. 시끄러운 손님 앞에서도 그녀는 리사이틀처럼 연주했고, 집중하지 않는 관객을 견디지 못했다.
III. 리틀 걸 블루 · 1957–1962 (24–29세)
(베들레헴) 1957년 베들레헴 레코드와 계약해 그해 12월 첫 앨범 「리틀 걸 블루」를 녹음했다. 베이스 지미 본드, 드럼 앨버트 '투티' 히스와의 피아노 트리오였다. 듀크 엘링턴의 「무드 인디고」, 태드 대머런과 카운트 베이시의 「굿 베이트」 같은 재즈 레퍼토리가 들어 있었지만, 연주의 바탕에는 여전히 바흐가 있었다. (포기) 1959년 앨범에 실린 거슈윈의 「아이 러브스 유, 포기」가 빌보드 팝 차트 18위에 오르며 이름이 알려졌다. 빌리 홀리데이의 녹음으로 익힌 노래였다고 전해진다. 평론가들은 그녀를 홀리데이와 견주곤 했지만, 그녀는 재즈 가수라는 꼬리표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자신의 음악을 흑인의 클래식 음악이라 부르기를 원했다. (계약) 그러나 그녀는 녹음 권리를 3천 달러에 통째로 넘기는 조건에 서명했고, 이 음반에서 나온 인세를 거의 받지 못했다. 그녀는 그 손해가 백만 달러를 넘는다고 말했다. 권리를 빼앗겼다는 감각은 이후 음반사, 매니저와의 관계에 짙게 남았다. (콜픽스) 1959년 콜픽스로 옮겨 뉴욕 타운홀 공연 실황을 냈고, 1960년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 무대에 섰다. 클럽 연주자에서 콘서트홀의 연주자로 옮겨 가는 시기였다. (결혼) 1958년 돈 로스와의 짧은 결혼은 이듬해 끝났다. 1961년 뉴욕 경찰 형사 앤드루 스트라우드와 결혼했고, 그는 경찰을 그만두고 그녀의 매니저가 됐다. 1962년 딸 리사가 태어났으며, 리사는 훗날 리사 시몬이라는 이름으로 가수와 배우의 길을 걸었다. 스트라우드는 그녀의 경력을 체계적으로 키웠지만 쉼 없는 공연 일정을 밀어붙였고, 그녀는 일기에 그의 폭력을 적어 남겼다.
술집 피아니스트가 처음 남긴 트리오 앨범으로, 바흐로 다진 손과 교회에서 익힌 목소리가 한 장에 담겼다. 권리를 3천 달러에 넘긴 바로 그 음반이다.
- 타이틀곡에서 피아노는 크리스마스 캐럴 「굿 킹 웬체슬라스」의 가락을 깔고 그 위에 로저스와 하트의 노래를 얹는다. 두 가락이 동시에 흐르는 짜임(대위법)이 그녀 음악의 출발점을 보여 준다.
- 「러브 미 오어 리브 미」의 피아노 간주에서는 두 손이 바흐의 푸가처럼 같은 가락을 서로 쫓아간다. 클래식 훈련이 가장 또렷하게 드러나는 대목으로 자주 꼽힌다.
- 지미 본드의 베이스와 투티 히스의 브러시 드럼은 앞에 나서지 않고 가볍게 박을 받쳐, 피아노와 목소리가 공간을 넓게 쓰게 한다.
- 「마이 베이비 저스트 케어스 포 미」는 왼손이 낮은 음과 화음을 번갈아 짚는 경쾌한 반주 위로 담담하게 흘러간다. 30년 뒤 영국에서 다시 히트한 바로 그 녹음이다.
- 앨범은 하루 남짓한 세션에서 녹음됐다고 그녀는 회고했다.
IV. 미시시피 갓댐 · 1963–1968 (30–35세)
(각성) 1963년 6월 미시시피에서 민권 운동가 메드가 에버스가 살해되고, 9월 앨라배마주 버밍햄의 16번가 침례교회 폭탄 테러로 흑인 소녀 넷이 숨졌다. 그녀는 처음엔 손수 총을 만들려 했으나 남편이 너에겐 음악이 있다고 말렸고, 그 자리에서 한 시간 남짓 만에 「미시시피 갓댐」을 썼다고 회고했다. (우정) 극작가 로레인 핸즈베리는 그녀를 정치로 이끈 친구였다. 제임스 볼드윈, 랭스턴 휴즈와도 가까웠고, 뉴욕 근교 마운트버넌의 집 근처에는 맬컴 엑스의 가족이 살았다. 1965년 3월에는 셀마–몽고메리 행진의 마지막 밤 집회에서 노래했다. (필립스) 1964년 필립스로 옮겨 카네기홀 실황 「인 콘서트」에 「미시시피 갓댐」을 실었다. 남부 일부 지역에서는 방송을 타지 못했고, 한 배급사는 음반 상자를 쪼개 되돌려 보냈다고 전해진다. 1965년 「파스텔 블루스」에는 빌리 홀리데이가 남긴 린치 고발의 노래 「이상한 열매」와 10분 넘는 「시너맨」을 실었고, 이듬해에는 네 흑인 여성의 삶을 차례로 그린 「포 우먼」을 내놓았다. (대가) 사명감은 대가를 불렀다. 일부 클럽과 방송이 그녀를 꺼리면서 공연 기회가 줄었다. 1965년에는 핸즈베리가 서른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노래가 흑인 청중에게 힘을 주는 데 쓰여야 한다고 믿었고, 사랑 노래만 부르기를 거부했다. (추모) 1967년 RCA로 옮겼다. 1968년 4월 마틴 루서 킹이 암살되고 사흘 뒤, 웨스트베리 뮤직페어 무대에서 베이시스트 진 테일러가 급히 쓴 추모곡을 불렀다. 노래 중간에 그녀는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건넸고, 그 공연은 「너프 세드!」에 실렸다.
에버스 암살과 버밍햄 테러에 대한 분노로 쓴 「미시시피 갓댐」을 카네기홀 무대에서 처음 음반으로 남긴 실황이다.
- 그녀는 이 곡을 뮤지컬 노래(쇼 튠)라고 소개하는데, 실제로 빠르고 경쾌한 브로드웨이풍 리듬이다. 밝은 반주와 분노한 내용 사이의 어긋남이 곡의 힘이다.
- 곡 초반 터지던 관객의 웃음이 진행될수록 잦아드는 과정이 녹음에 그대로 남아 있다.
- 노래라기보다 말에 가까운 대목이 많다. 남부의 백인 사회와, 천천히 가라고 권하는 이들에게 정면으로 따져 묻는 화법이다.
- 감정이 끓어올라도 템포는 흐트러지지 않는다. 피아노의 짧고 단단한 화음이 노래를 냉정하게 붙잡아 둔다.
민권 운동 한가운데서 낸 앨범으로, 교회의 영가를 늘인 「시너맨」과 빌리 홀리데이가 남긴 고발의 노래 「이상한 열매」가 함께 실렸다.
- 「시너맨」은 어린 시절 교회에서 듣던 영가를 10분 넘게 늘인 곡이다. 짧은 음형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피아노(오스티나토)가 곡 전체를 밀고 간다.
- 중반에 악기가 거의 빠지고 손뼉만 남는 대목에서 긴장이 정점에 이르고, 거기서부터 다시 소리가 쌓여 올라간다.
- 루디 스티븐슨의 기타, 리슬 앳킨슨의 베이스, 바비 해밀턴의 드럼이 점점 빨라지는 그녀를 바짝 따라붙는다. 외치고 받아 주는 교회식 주고받기(콜 앤드 리스폰스)의 호흡이 살아 있다.
- 「이상한 열매」는 반주를 최소로 줄이고 단어를 하나씩 천천히 떼어 놓는다. 빌리 홀리데이의 녹음과 나란히 들으면 같은 고발이 얼마나 다른 온도로 전해지는지 알 수 있다.
킹 목사 암살 사흘 뒤 웨스트베리 무대에서 바친 추모곡이 담긴 실황이다. 슬픔이 공연을 어떻게 바꿔 놓는지가 고스란히 기록됐다.
- 「와이? (더 킹 오브 러브 이즈 데드)」는 베이시스트 진 테일러가 암살 직후 쓴 곡으로, 충분한 연습 없이 무대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 노래 도중 그녀는 연주를 늦추고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건네며 슬픔과 분노를 털어놓는다. 음반에는 그 말이 길게 실렸다.
- 느린 템포와 가스펠풍 화음이 장례 예배를 떠올리게 한다.
- 같은 앨범의 「에인트 갓 노, 아이 갓 라이프」는 뮤지컬 「헤어」의 두 곡을 이어 붙인 것으로, 영국 차트 상위권에 올랐다.
V. 떠남 · 1969–1992 (36–59세)
(찬가) 1969년 링컨센터 필하모닉홀 공연을 담은 「블랙 골드」에서 핸즈베리의 유고 희곡 제목을 딴 「영, 기프티드 앤드 블랙」을 불렀다. 흑인 아이들에게 자긍심을 건네려는 노래였고, 곧 민권 운동의 찬가가 됐다. 그러나 운동의 지도자들이 하나둘 쓰러지면서 그녀의 분노와 피로도 깊어졌다. (이혼) 1970년 스트라우드와 이혼하면서 매니저도 잃었고, 돈과 일정을 관리해 줄 사람 없이 남겨졌다. 베트남전에 항의해 세금 일부를 내지 않은 일이 얽혀 있었다는 것이 전기 작가들의 설명이며, 그녀는 미국을 떠났다. (유랑) 바베이도스를 거쳐 1974년 친구 미리엄 마케바의 권유로 라이베리아 몬로비아에 머물렀다. 그녀는 그곳 시절을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로 회고했다. 1972년에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이후 스위스와 네덜란드를 거쳐 파리에 자리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볼티모어) 1978년 크리드 테일러의 CTI에서 「볼티모어」를 냈다. 그녀는 곡 선택과 편곡에 관여하지 못했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고 전해진다. 파리의 작은 클럽에서 적은 개런티로 노래하던 시절도 있었다. 1980년대 말 양극성 장애 진단을 받고 약을 먹기 시작했다고 전기 작가들은 전한다. 오랜 감정의 기복에 그제야 이름이 붙은 셈이었다. (재기) 1987년 영국에서 샤넬 향수 광고에 「마이 베이비 저스트 케어스 포 미」가 쓰이며 싱글 차트 5위에 올랐다. 서른 해 전의 녹음이 새 관객을 데려왔다. 1991년에는 자서전 『아이 풋 어 스펠 온 유』를 펴내 자신의 삶을 직접 정리했다.
세상을 떠난 친구 핸즈베리의 희곡 제목을 딴 「영, 기프티드 앤드 블랙」이 처음 음반으로 남은 링컨센터 실황이다.
- 「영, 기프티드 앤드 블랙」은 그녀가 곡을 쓰고 웰던 어바인이 가사를 붙였다. 흑인 아이들에게 말을 거는 다정하면서도 단호한 화법이 곡의 중심이다.
- 「블랙 이즈 더 컬러 오브 마이 트루 러브스 헤어」에서는 긴 이야기로 곡을 소개한 뒤 기타 반주만으로 조용히 부른다. 대규모 무대에서 오히려 가장 작은 소리를 택한 순간이다.
- 관객과 주고받는 말과 웃음이 많이 남아 있어, 그녀가 공연을 하나의 대화로 이끌었음을 들을 수 있다.
- 앨범은 그래미 여성 R&B 보컬 부문 후보에 올랐다.
미국을 떠나 유랑하던 시절 크리드 테일러의 CTI에서 낸 앨범이다. 그녀는 이 음반의 제작 방식에 불만을 털어놓았지만, 그 시기의 고독한 목소리가 담겼다.
- 랜디 뉴먼이 쓴 타이틀곡을 느긋하게 출렁이는 레게 리듬에 실었다. 쇠락한 도시를 바라보는 노래를 그녀는 감정을 누른 채 담담하게 부른다.
- 편곡은 데이비드 매슈스가 맡았다. 매끈한 현악과 리듬 위에서 그녀의 굵은 음색이 이질적으로 도드라진다.
- 녹음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했다. 그녀는 노래만 했을 뿐 곡 선택과 믹싱에는 관여하지 못했다고 불평했다고 전해진다.
VI. 카리르루에의 마지막 날들 · 1993–2003 (60–70세)
(정착) 1993년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 근처의 해안 마을 카리르루에에 집을 얻었다. 같은 해 엘렉트라에서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 「어 싱글 우먼」을 냈다. 목소리는 낮아지고 거칠어졌지만, 한 음 한 음에 실린 무게는 오히려 더해졌다. (무대) 말년에도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공연했다. 무대에서 관객에게 조용히 하라고 요구하거나 곡 사이에 길게 말을 건네는 일이 잦았고,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끼면 쉽게 노여워했다. 전기 작가들은 이 까다로움을 클래식 연주자로서 기대했던 인정을 끝내 얻지 못했다는 오랜 상처와 이어서 읽는다. (투병) 그녀는 유방암을 앓았다. 2003년 4월, 커티스 음악원은 그녀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했다. 52년 전 그녀를 떨어뜨린 학교였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4월 21일, 그녀는 카리르루에의 집에서 일흔 살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그녀의 뜻에 따라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 뿌려졌다. (유산) 세상을 떠난 뒤 그녀의 노래들은 힙합의 샘플링과 영화, 광고를 통해 새 세대에 닿았다. 2018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재즈 가수로도 팝 가수로도 묶이기를 거부했던 그녀는, 결국 어느 한 갈래로도 다 담기지 않는 이름으로 남았다.
카리르루에에 정착한 해에 낸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이다. 낮아진 목소리가 홀로 남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 타이틀곡은 로드 매큐언의 노래로, 혼자 사는 여성이 스스로에게 말하듯 담담하게 부른다.
- 현악이 넓게 깔리고 피아노는 말을 아낀다. 젊은 날보다 낮아진 음역이 오히려 노래에 무게를 더한다.
- 미셸 르그랑의 「파파, 캔 유 히어 미?」는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부르는 노래로, 그녀 자신의 사연과 겹쳐 들린다.
덜 알려진 이야기
그녀는 평생 커티스 음악원이 인종 때문에 자신을 떨어뜨렸다고 말했고, 이 이야기는 그녀의 전설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장면이 됐다. 그런데 전기 작가 네이딘 코호다스의 『프린세스 누아르』(2010) 등 후대의 서술은, 당시 커티스의 피아노 과정이 극소수만 뽑는 경쟁이었고 다른 흑인 학생도 이미 재학 중이었다는 점을 함께 짚는다. 거절이 인종 때문이었는지는 기록으로 확증되지도 반증되지도 않는다. 분명한 것은 그녀가 그렇게 믿었고, 그 믿음이 평생의 분노와 완벽주의를 움직인 동력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미묘한 결은 극적인 일화에 가려 대중적 서술에서 자주 빠진다. 그녀가 태어난 트라이언의 작은 판잣집은 오래 방치돼 철거 위기에 놓였다. 2017년 미술가 애덤 펜들턴, 라시드 존슨, 엘런 갤러거, 줄리 머레투 네 사람이 함께 집을 사들였고, 이듬해 미국 역사보존 신탁은 이 집을 국가적 보물로 지정했다. 음악계가 아니라 미술계가 그녀의 출발점을 지켰다는 사실은 그녀가 음악 바깥의 흑인 예술가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보여 준다. 1987년 영국에서 「마이 베이비 저스트 케어스 포 미」가 다시 크게 히트했을 때에도, 그녀는 이 녹음의 권리를 1957년에 이미 넘긴 터라 그 성공으로 얻은 몫이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그녀의 말년 재기는 옛 녹음의 인세가 아니라 그 히트가 다시 불러 모은 공연 무대 위에서 이루어졌다.
용어 노트 📚🔎
대위법
(말뜻) 대위(對位)는 음과 음이 서로 마주 놓인(對) 자리(位)라는 뜻이다. 서양 이름 카운터포인트는 라틴어로 음표 맞은편의 음표라는 말에서 왔다. (재즈에서) 두 개 이상의 가락을 동시에 따로 움직이게 하면서도 서로 어울리도록 짜는 작곡·연주 기법이다. 바흐가 이 분야의 대가였고, 니나 시몬은 팝과 재즈 노래의 반주 안에 이 기법을 들여와 자기만의 소리를 만들었다. 돌림노래를 할 때 두 모둠이 서로 다른 구절을 동시에 부르는데도 소리가 엉키지 않고 어울리는 것 — 대위법이 바로 그런 짜임을 의도해서 만드는 일이다.
오스티나토
(말뜻) 이탈리아어로 고집스러운, 끈질긴이라는 뜻이다. 같은 음형을 고집스럽게 되풀이한다는 데서 이름이 붙었다. (재즈에서) 짧은 가락이나 리듬 한 덩어리를 곡 내내, 또는 한 부분 내내 계속 되풀이하는 것이다. 그 반복이 바닥처럼 깔리면 그 위에서 노래와 다른 악기가 마음껏 움직일 수 있다. 「시너맨」의 피아노가 대표적이다. 줄넘기할 때 하나 둘, 하나 둘 하는 일정한 구령이 계속되는 동안 그 위에서 친구들이 다양한 동작을 바꿔 가며 뛰는 것과 비슷하다.
블루스
(말뜻) 영어 blue에는 파랗다는 뜻 말고도 우울하다는 뜻이 있다. 우울한 기분을 가리키던 말 the blues가 음악 이름이 됐다. (재즈에서) 19세기 말 미국 남부 흑인 사회에서 생겨난 음악으로, 흔히 12마디를 한 바퀴로 같은 틀을 되풀이하며, 음을 살짝 낮게 굽혀 부르는 슬픈 빛깔의 음(블루 노트)을 쓴다. 재즈와 로큰롤 모두 블루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같은 운율의 틀에 매번 다른 가사를 넣어 부르는 랩 배틀처럼, 블루스도 정해진 틀 위에 그날그날의 사연을 얹는다. (다른 데서는) 일상 영어에서는 음악과 상관없이 그냥 울적한 기분을 뜻하기도 한다.
영가(스피리추얼)
(말뜻) 영가(靈歌)는 영혼(靈)의 노래(歌)라는 뜻이다. 영어 spiritual도 영적인, 정신의라는 말이다. (재즈에서) 노예 시대 미국 흑인들이 부르던 종교 노래로, 성경 이야기에 고난과 해방의 소망을 담았다. 가스펠과 블루스, 재즈의 중요한 뿌리이며, 니나 시몬의 「시너맨」도 어린 시절 교회에서 듣던 영가에서 나왔다. 운동회에서 여러 반이 한목소리로 응원가를 부르며 힘을 얻듯, 영가는 함께 부르며 견디는 노래였다.
콜 앤드 리스폰스
(말뜻) 영어로 부름(call)과 대답(response)이라는 뜻이다. (재즈에서) 한 사람이나 한 악기가 가락을 던지면 다른 사람들이나 악기가 그것을 받아 대답하는 형식이다. 아프리카 음악과 흑인 교회 예배에서 비롯했고, 재즈에서는 솔로와 밴드, 가수와 관객이 주고받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응원단장이 구호를 외치면 관중석 전체가 받아서 외치는 것 — 그것이 바로 콜 앤드 리스폰스다.
쇼 튠
(말뜻) 영어로 공연(show)의 곡(tune)이라는 뜻으로,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쓰인 노래를 가리킨다. (재즈에서) 뮤지컬을 위해 만들어진 노래로, 재즈 음악가들이 즉흥연주의 재료로 즐겨 가져다 썼다. 거슈윈의 「아이 러브스 유, 포기」도 오페라 「포기와 베스」에서 나온 곡이다. 니나 시몬은 「미시시피 갓댐」을 아직 쓰이지 않은 쇼의 노래라고 비꼬듯 소개하며, 경쾌한 뮤지컬풍 리듬에 분노를 실었다. 학예회 연극에서 부르는 밝은 노래에 갑자기 아주 진지한 이야기를 담아 부른다고 생각하면, 그 어긋남이 주는 충격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