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a Fitzgerald
작사가 아이라 거슈윈은 자신이 쓴 노래가 얼마나 좋은지 그녀가 부르기 전까지 미처 몰랐다고 말했다.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함께한 사람들 ⏳🌊
- 가족템퍼런스 피츠제럴드
어린 엘라를 홀로 키우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숨졌다.
- 후원칙 웹
그녀를 밴드에 들이고 세상에 알린 첫 은인이었다.
- 가족레이 브라운
1947년 결혼해 아들을 입양했고 이혼 후에도 음악적 인연을 이어갔다.
- 후원노먼 그란츠
매니저이자 프로듀서로 버브 레이블과 송북 시리즈를 함께 만들었다.
- 동료루이 암스트롱
세 장의 듀엣 앨범으로 재즈사에 남을 조합을 이뤘다.
- 우정마릴린 먼로
로스앤젤레스 모캄보 클럽 출연을 도우며 우정을 나눴다는 일화로 전해진다.
I. 뉴포트뉴스에서 용커스로 · 1917–1932 (0–15세)
(뉴포트뉴스) 1917년 4월, 미국 버지니아주 뉴포트뉴스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템퍼런스 윌리엄스와 아버지 윌리엄 피츠제럴드는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았고, 딸이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졌다. (용커스) 어머니는 조지프 다실바라는 남자와 함께 뉴욕주 용커스로 옮겨가 정착했다. 1923년에는 이복동생 프랜시스가 태어나 두 자매는 한집에서 자랐다. (재능) 학교 성적은 좋은 편이었고 달리기도 잘했다고 전해진다.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를 불렀고, 이웃 아이들과 함께 코니 보스웰 같은 라디오 가수의 창법을 흉내 내며 놀았다. 춤도 즐겨 췄는데, 훗날 그녀 스스로도 노래보다 춤에 먼저 마음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II. 할렘의 거리 · 1932–1934 (15–17세)
(상실) 1932년, 어머니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열다섯 살이었다. (곤궁) 어머니를 잃은 뒤 이모 집으로 옮겨 살았지만 형편은 넉넉지 않았다. 학교를 그만두고 거리에서 심부름이나 망보기 같은 일로 용돈을 벌었다고 전해지며, 한동안 뉴욕주의 소녀 보호시설에서 지내기도 했다. (그늘) 이 시기의 상실과 불안정을 그녀는 오랫동안 공개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전기 작가들은 이때 겪은 궁핍과 외로움이 훗날 그녀가 무대 위에서만큼은 완벽을 추구하며 스스로를 지키려 했던 성격의 뿌리라고 짚는다.
III. 아폴로와 칙 웹 · 1934–1942 (17–25세)
(아폴로) 1934년 11월, 뉴욕 할렘의 아폴로 극장 아마추어 나이트 무대에 섰다. 본래 춤을 선보일 생각이었으나 막상 순서가 오자 마음을 바꿔 노래를 불렀고, 그날 밤 우승을 차지했다. (칙웹) 이 무대를 계기로 드러머 겸 밴드리더 칙 웹의 눈에 들어 그의 악단에 합류했다. 웹은 처음엔 그녀를 들이는 데 주저했다고 전해지지만, 노래를 들은 뒤 생각을 바꿨고 이후 그녀를 딸처럼 아꼈다. (히트) 1938년, 동요 가락을 바탕으로 편곡자 반 알렉산더와 함께 만든 「에이-티스킷, 에이-태스킷」이 크게 히트했다. 공동 작곡 크레딧 덕분에 스물한 살 나이에 드물게 인세 수입이 생겼다. (승계) 1939년 칙 웹이 지병으로 서른네 살에 세상을 떠났다. 악단은 그녀의 이름을 걸고 재편되어 「엘라 피츠제럴드와 그녀의 유명 악단」으로 활동을 이어갔고, 그녀는 스물두 살에 밴드리더라는 무거운 책임을 떠안게 되었다.
칙 웹 악단 시절 그녀를 스타로 만든 첫 히트곡이자 공동 작곡가로서 첫 인세 수입을 안겨준 곡이다.
- 밴드의 리프와 그녀의 목소리가 주고받는 부르고 답하기(콜 앤 리스폰스) 구조가 곡 전체를 이끈다.
- 동요 가락을 바탕으로 만들어 멜로디가 단순하고 반복적이라 귀에 쉽게 붙는다.
- 칙 웹의 드럼이 경쾌한 스윙 리듬을 받쳐 준다.
- 발음이 또렷하고 앳되게 들려 스물한 살 신인의 풋풋함이 살아 있다.
IV. 비밥과 스캣 · 1942–1949 (25–32세)
(해산) 1942년 무렵 대형 악단을 유지하는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지며 밴드는 해체됐다. 그녀는 이후 독립된 가수로 활동을 이어갔다. (비밥) 디지 길레스피, 찰리 파커 등 새로운 세대가 연주하던 빠르고 복잡한 화성과 리듬을 접하며 목소리로 악기 소리를 흉내 내는 스캣 창법을 정교하게 다듬어 갔다. 이들과 함께 무대에 서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결혼) 1941년 첫 결혼(베니 코니게이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무효가 되었다. 1947년에는 베이시스트 레이 브라운과 재혼했고, 1949년 아들 레이 브라운 주니어를 입양했다. 두 사람은 1953년 이혼했지만 음악적 협력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완성) 1945년 녹음한 「플라잉 홈」 같은 곡에서 그녀의 스캣은 색소폰의 빠른 음형을 그대로 목소리로 그려내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았다.
밴드 해체 뒤 비밥 세대와 어울리며 다듬은 스캣 창법이 절정에 이른 녹음이다.
- 라이오넬 햄프턴 악단의 유명한 연주곡을 성대로 재현하듯, 관악기가 낼 법한 빠른 음형을 목소리로 그대로 그려낸다.
- 스캣 구간에서 음정이 계단식으로 치솟았다 내려오며 절정을 만든다.
- 빠른 템포에서도 발음이 흐트러지지 않아 악기 같은 정확도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V. 노먼 그란츠와 송북의 시대 · 1953–1959 (36–42세)
(그란츠) 1950년대 초, 「재즈 앳 더 필하모닉」이라는 순회 공연을 이끌던 프로듀서 노먼 그란츠가 그녀의 매니저가 되었다. 그란츠는 인종이 분리된 공연장에서는 연주를 거부하는 원칙을 지켰고, 이는 그녀의 투어 조건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버브) 1955년을 전후해 데카와의 오랜 계약을 정리하고, 그란츠가 그녀를 위해 새로 세운 버브 레코드로 옮겼다. 이곳에서 콜 포터, 로저스와 하트, 조지 거슈윈, 어빙 벌린 같은 미국 대중가요 작곡가들의 노래를 정리해 부르는 송북 시리즈를 시작했다. (엘링턴) 1957년에는 오랜 지기인 듀크 엘링턴의 악단과 함께 그의 곡들을 녹음했다. 엘링턴과 그의 오랜 협력자 빌리 스트레이혼이 직접 편곡을 맡은 이례적인 협업이었다. (암스트롱) 1956년에는 루이 암스트롱과 첫 듀엣 앨범 「엘라 앤드 루이」를 냈고, 이듬해 「엘라 앤드 루이 어게인」이 이어졌다. 걸걸한 저음의 암스트롱과 맑은 음색의 그녀가 주고받는 노래는 이후 재즈 보컬 듀엣의 기준이 되었다. (모캄보) 1955년, 배우 마릴린 먼로가 로스앤젤레스의 모캄보 클럽 주인에게 그녀를 무대에 세워 달라 요청하고 매일 밤 앞줄에 앉겠다고 약속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공연을 계기로 더 넓은 관객층 앞에 설 기회가 열렸다.
버브 레이블에서 시작한 송북 시리즈의 첫 성과로, 미국 대중가요 표준곡을 정리해 부르는 시대를 열었다.
- 버디 브레그먼이 편곡한 빅밴드와 현악 편성이 노래마다 다른 색을 입힌다.
- 가사를 쓴 작곡가의 의도를 살리려 발음(딕션)을 특히 또렷하게 다듬었다고 전해진다.
- 발라드와 빠른 곡을 번갈아 배치해 앨범 전체가 하나의 무대처럼 흐른다.
루이 암스트롱과의 듀엣 앨범으로, 두 대가가 나이와 경력을 넘어 서로에게 자리를 내주는 관계를 들려준다.
-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가 받쳐 주는 편성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는 여백이 많다.
- 암스트롱의 걸걸한 저음과 피츠제럴드의 맑은 음색이 대조를 이루며 구절을 주고받는다(트레이딩).
- 템포는 대체로 느긋해 두 베테랑이 서두르지 않고 노래를 나누는 인상을 준다.
오랜 지기 듀크 엘링턴과 직접 협업한 앨범으로, 커버를 넘어선 작곡가와 해석자의 만남이었다.
- 엘링턴과 빌리 스트레이혼이 직접 편곡해, 악단 특유의 화성 색채 위에서 노래한다.
- 엘링턴을 위해 새로 쓴 조곡 형식의 트랙이 포함돼 단순한 커버 이상의 협업으로 평가받는다.
- 스캣 즉흥이 악단의 관악 화음과 겹치듯 어우러진다.
VI. 세계의 목소리 · 1960–1978 (43–61세)
(베를린) 1960년 서베를린 실황 공연에서 「맥 더 나이프」를 부르다 가사를 잊고 그 자리에서 새 가사를 지어 불렀다. 이 순간이 담긴 음반은 그해 그래미 최우수 여성 보컬 앨범상을 받았다. (그래미) 그녀는 1958년 이미 그래미상을 받아, 이 상을 받은 최초의 흑인 여성 연주자 가운데 한 명으로 기록됐다. (투어) 유럽과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지를 도는 순회공연을 이어가며 재즈의 퍼스트레이디라는 별칭을 얻었다. 어느 도시에서든 공연장을 가득 채우는 흥행력을 보였다. (성격) 무대 위에서는 자신감이 넘쳤지만 실제로는 무대공포증을 오래 겪었고 인터뷰를 즐기지 않는 편이었다고 동료들은 전한다. 그녀에게 노래는 스스로를 드러내는 가장 편안한 언어였다.
가사를 잊고 즉흥으로 채운 실황이 그해 그래미 최우수 여성 보컬 앨범상을 안긴, 그녀 순발력의 상징 같은 녹음이다.
- 실황 중 가사를 잊고 그 자리에서 새 가사를 지어 부른 대목이 이 음반의 상징이 됐다.
- 즉흥 대목에서 루이 암스트롱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장난스러운 구절이 들어가 동료에 대한 애정 어린 헌사로 읽힌다.
- 실황 특유의 밴드와의 순발력 있는 호흡과 관객의 환호가 그대로 담겼다.
VII. 마지막 노래들 · 1979–1996 (62–79세)
(건강) 1970년대 후반부터 당뇨와 심장질환으로 건강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1986년에는 심장 수술을 받았다. (은퇴) 1991년 뉴욕 카네기홀 공연을 끝으로 무대에서 물러났다. 1993년에는 당뇨 합병증으로 두 다리를 무릎 아래로 절단했다. (영면) 1996년 6월 15일, 로스앤젤레스 비벌리힐스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일흔아홉 살이었다. (유산) 1979년 케네디센터 명예상, 1987년 국가예술훈장, 1992년 대통령 자유훈장을 받았다. 그녀의 발음과 스캣, 송북 해석은 이후 세대 보컬리스트들에게 하나의 표준으로 남았다.
덜 알려진 이야기
1932년 어머니를 잃은 뒤 그녀가 한동안 뉴욕주 허드슨에 있던 소녀 보호시설(뉴욕주 소녀 훈련학교)에서 지냈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 전기 작가들의 연구가 이뤄지기 전까지, 이 시기는 그녀의 삶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 아마추어 나이트에 오르기 전, 그녀는 원래 춤을 출 생각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바로 앞 순서로 무대에 오른 에드워즈 자매의 춤이 너무 뛰어나 보이자 겁을 먹고, 즉석에서 노래로 바꿔 불렀다는 이야기가 여러 회고에 남아 있다. 재즈사에서 가장 유명한 우연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1955년 텍사스 휴스턴 공연 도중, 노먼 그란츠와 디지 길레스피, 일리노이 재킷 등이 대기실에서 주사위 놀이를 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는 일이 있었다. 그란츠는 벌금을 물고 이들을 빼냈고, 훗날 인터뷰에서 이 사건을 인종차별적 단속의 사례로 여러 차례 언급했다.
용어 노트 📚🔎
스캣
(재즈에서) 가사 대신 의미 없는 음절로 목소리를 악기처럼 쓰는 즉흥 창법이다. 노래하는 사람이 색소폰이나 트럼펫 주자처럼 빠른 음형을 즉석에서 지어 부른다. 흥얼거림으로 랩을 즉흥으로 짓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비밥
(재즈에서) 1940년대 등장한 빠르고 복잡한 화성과 리듬의 재즈 양식으로, 스윙 시대의 편안한 춤곡과 달리 듣고 감상하는 데 집중하는 음악이었다. 축구에서 기본기를 넘어 화려한 개인기를 겨루는 경기처럼, 연주자 개인의 즉흥 실력을 한껏 드러내는 양식이라 생각하면 된다.
송북
(말뜻) 노래(song)와 책(book)을 합친 말 그대로, 한 작곡가의 노래들을 모아 놓은 책 또는 음반을 뜻한다. (재즈에서) 한 명의 작곡가나 작사가의 대표곡들을 골라 한 가수가 앨범 한 장 또는 여러 장으로 정리해 부르는 기획을 가리킨다. 마치 한 작가의 단편소설을 모은 선집을 읽듯, 그 작곡가의 세계를 한 번에 훑어볼 수 있다.
콜 앤 리스폰스(부르고 답하기)
(재즈에서) 한쪽이 짧은 음형을 던지면 다른 쪽이 이를 받아 답하는 방식으로 곡이 진행되는 구조다. 교회 예배에서 목사의 말에 신도들이 화답하는 것이나, 학교에서 선생님의 구호를 학생들이 따라 외치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다른 데서는) 교육학에서도 학생의 참여를 끌어내는 수업 기법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아마추어 나이트
(재즈에서) 정식 무대에 서 본 적 없는 신인들이 나와 노래나 춤을 겨루던 행사로, 관객의 반응이 곧 심사 기준이었다. 학교 장기자랑에서 박수 소리로 우승자를 가리는 것과 비슷했다.
트레이딩(주고받기)
(재즈에서) 두 연주자나 노래하는 사람이 짧은 구간씩 번갈아 가며 즉흥을 주고받는 방식이다. 랩 배틀에서 한 소절씩 주고받는 것이나, 친구와 대화하듯 서로의 말을 이어받는 느낌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