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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ph Haydn

요제프 하이든 (1732–1809)

"나는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었다. 나를 혼란에 빠뜨리거나 괴롭힐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나는 독창적일 수밖에 없었다."

한눈에 보기 🔭💭

1. 뿌리오스트리아 로라우 출생목수의 아들합창단에서 쫓겨나다2. 정착모르친 궁정마리아 안나 결혼에스테르하지 입성3. 고립작별 교향곡모차르트와 우정폴첼리와 인연4. 런던살로몬의 초청서프라이즈 교향곡헨델의 메시아5. 정점천지창조사계황제 찬가6. 말년나폴레옹 포위황제 4중주 연주1809년 별세하이든1732–1809궁정의 고용인으로 시작해 유럽이 우러르는 '교…
삶의 여정 🧭🗺️
N영국헝가리오스트리아로라우1732하인부르크1738–17401740–1809에스테르하자1761–1790런던1791–1795

곁의 사람들 ⏳🌊

  • 가족
    마티아스 하이든
    아마추어 하프 연주자였던 아버지로, 저녁마다 부르던 민요가 하이든 음악의 첫 뿌리가 되었다.
  • 스승
    니콜라 포르포라
    하인으로 부리며 험하게 대했지만 작곡과 이탈리아 성악 기법을 가르쳐 준 인물이다.
  • 가족
    마리아 안나 켈러
    1760년 결혼한 아내로, 음악에 무관심했고 부부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 후원
    니콜라우스 에스테르하지
    약 30년간 하이든을 고용한 후원자로, 세상과 격리된 환경이 오히려 독창적인 작곡으로 이어지게 했다.
  • 우정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서로를 깊이 존경한 벗으로, 모차르트는 현악4중주를 하이든에게 헌정했고 그의 이른 죽음을 하이든은 오래 슬퍼했다.
  • 영향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1791년 런던에서 들은 「메시아」 연주가 「천지창조」와 「사계」를 쓰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I. 로라우의 소년 · 1732–1740 (0–8세)

(출생) 1732년 3월 31일, 오스트리아 빈 동쪽 국경 마을 로라우에서 태어났다. 세례는 이튿날인 4월 1일에 받았다. 아버지 마티아스 하이든은 마차 바퀴를 만드는 수레바퀴공이었고, 어머니 마리아 콜러는 인근 영주 하라흐 백작 저택의 요리사였다. 열두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으나 그중 여럿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음악) 아버지는 정식 교육을 받은 적 없는 아마추어 하프 연주자였고, 어머니와 함께 저녁마다 민요를 불렀다. 악보를 읽을 줄 몰랐지만 귀로 익힌 노래로 집안을 채웠고, 어린 요제프는 그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훗날 그는 자신의 음악적 감수성의 뿌리를 이 소박한 가정의 노래에서 찾았다고 말했다. (이별) 여섯 살 되던 해, 재능을 알아본 친척 요한 마티아스 프랑크가 이웃 마을 하인부르크로 데려가 정식으로 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생활은 고되었다. 프랑크의 집에서 그는 종종 배를 곯았고 매를 맞기도 했다고 훗날 회고했지만, 악보 읽는 법과 여러 악기 다루는 법을 그곳에서 처음 익혔다. (형제) 동생 미하엘 하이든도 훗날 잘츠부르크에서 이름을 알린 작곡가가 되었고, 또 다른 동생 요한 에반겔리스트는 성악가로 형의 악단에서 노래하게 된다. 가난한 시골 장인의 집에서 세 형제가 나란히 음악을 업으로 삼게 된 것은 드문 일이었다.

II. 성 슈테판과 거리의 시절 · 1740–1759 (8–27세)

(발탁) 1740년, 빈 성 슈테판 대성당의 궁정악장 게오르크 폰 로이터가 하인부르크에 들러 노래 잘하는 소년을 물색하다가 여덟 살의 하이든을 소년합창단에 뽑았다. 빈으로 옮겨 간 그는 이후 약 9년을 이곳에서 노래하며 지냈다. (독학) 합창단에서는 성악과 초보적인 악기 교육만 이루어졌을 뿐, 작곡 이론은 거의 가르치지 않았다. 하이든은 요한 요제프 푹스의 대위법 교본과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의 건반 소나타집을 스스로 구해 밤늦도록 연구하며 작곡을 독학했다. 정식 스승 없이 악보와 씨름한 이 시기의 습관은 평생 그의 작업 방식으로 남았다. (추방) 변성기가 와 목소리가 갈라지자 로이터는 더 이상 그를 쓸모없다고 여겼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동료 소년의 땋은 머리를 가위로 잘라 장난친 일이 빌미가 되어 매를 맞고 쫓겨났다고 한다. 1749년 무렵, 열일곱의 하이든은 잘 곳도 돈도 없이 빈 거리에 내던져졌다. (궁핍) 몇 해 동안 그는 다락방을 전전하며 바이올린과 건반을 가르치고 세레나데 연주로 푼돈을 벌었다. 이탈리아 작곡가 니콜라 포르포라의 하인 겸 반주자로 들어가 구두를 닦고 옷 시중을 드는 대가로 작곡과 이탈리아 성악 기법을 배웠다. 포르포라는 그를 험하게 대했지만, 하이든은 이 굴욕을 견디며 유럽 상류층 음악계의 어법을 몸에 익혔다. 이 무렵 툰 백작부인과 퓌른베르크 남작 같은 후원자를 만나며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III. 결혼과 첫 악장직 · 1759–1766 (27–34세)

(모르친) 1759년, 보헤미아의 귀족 카를 폰 모르친 백작의 궁정악장으로 첫 정식 직책을 얻었다. 여기서 작은 규모의 악단을 위해 첫 교향곡을 썼다. 안정된 일자리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관현악을 마음껏 실험할 수 있었다. (결혼) 이듬해인 1760년, 가발 제조업자의 딸 마리아 안나 켈러와 결혼했다. 본래 그가 마음에 두었던 사람은 그녀의 여동생 테레제였으나, 테레제가 수녀원에 들어가면서 대신 언니와 맺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결혼 생활은 애초부터 삐걱거렸다. 아내는 남편의 음악에 관심이 없었고, 훗날 그의 악보를 파이 받침 종이로 썼다는 일화까지 남을 만큼 서로 어긋났다. 둘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고용) 모르친 백작의 재정이 어려워져 악단이 해체되자, 1761년 헝가리의 대영주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부악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늙은 수석악장 그레고어 베르너 밑에서 교회음악을 보조하며 실력을 쌓았고, 베르너가 죽은 1766년 마침내 정식 궁정악장 자리에 올랐다. 가난한 수레바퀴공의 아들이 유럽에서 손꼽히는 귀족 가문의 음악 책임자가 되기까지, 채 서른네 해가 걸리지 않았다.

교향곡 1번 라장조 (Hob.I:1)1759 (27세)

모르친 백작의 작은 악단을 위해 쓴 첫 교향곡으로, 궁정악장으로서 내디딘 첫걸음이었다.

  • 1악장 도입부는 조용한 소리에서 점점 커지는(크레셴도) 오케스트라 효과로 시작해, 당대 만하임 악단에서 유행하던 기법을 젊은 하이든이 흡수했음을 보여준다.
  • 2악장은 관악기 없이 현악기만으로 연주되는 소박한 노래풍 악장으로, 초기 작품 특유의 절제된 편성을 들을 수 있다.
  • 3악장 마지막 부분의 호른 신호는 사냥음악의 분위기를 빌려온 것으로, 당시 귀족 사교계의 취향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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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에스테르하자의 고립과 창조 · 1766–1790 (34–58세)

(고립) 니콜라우스 에스테르하지 공은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후원자였다. 그는 헝가리 초원 한가운데 에스테르하자라는 대저택을 새로 지어 악단을 옮겼고, 빈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하이든은 사실상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았다. 훗날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었다. 나를 혼란에 빠뜨리거나 괴롭힐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나는 독창적일 수밖에 없었다." 30년 가까운 이 고립의 시간 동안 교향곡과 현악4중주, 오페라를 실험적으로 써 나가며 자신만의 어법을 완성했다. (작별) 1772년, 악단원들이 오랫동안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데 지쳐 있음을 알게 된 하이든은 교향곡 45번의 마지막 악장에서 연주자들이 촛불을 끄고 한 사람씩 무대를 떠나도록 악보를 짰다. 마지막까지 남은 두 대의 바이올린이 조용히 곡을 맺을 때, 공은 그 뜻을 알아채고 다음 날 악단에게 휴가를 주었다. (모차르트) 1780년대 초 빈에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만났다. 나이 차이에도 두 사람은 서로의 재능을 깊이 존중했고 함께 실내악을 연주하기도 했다. 모차르트는 현악4중주 여섯 곡을 하이든에게 헌정했고,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당신 아들은 내가 아는 가장 위대한 작곡가"라 말했다. 같은 시기 빈에서는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의 개혁 오페라가 화제였는데, 하이든도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했다. (연인) 이 시기 악단의 이탈리아인 성악가 루이지 폴첼리의 아내 루이지아 폴첼리와 오랜 편지를 주고받으며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녀의 아들 알로이스 안톤이 자신의 친자일지 모른다고 여겼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불행한 결혼 생활 속에서 그는 이런 인연들로 위안을 찾았다.

교향곡 45번 '고별' (Hob.I:45)1772 (40세)

가족과 떨어져 지내던 악단원들의 처지를 대변해 쓴 곡으로, 마지막 악장에서 연주자들이 실제로 하나둘 퇴장한다.

  • 마지막 악장 아다지오(느리게)에서 연주자들이 각자 파트를 마치면 촛불을 끄고 무대를 떠나도록 악보에 지시되어 있어, 편성이 실제로 점점 줄어드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 끝까지 남는 두 대의 바이올린이 조용히 주고받는 이중주는 하이든 자신과 악장의 마지막 인사로 해석된다.
  • F샤프단조라는 당시로서는 드문 조성 선택은 어둡고 불안한 색채를 띠어, 이른바 슈투름 운트 드랑(질풍노도) 경향과 함께 자주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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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악4중주 Op.33 (Hob.III:37-42)1781 (49세)

"완전히 새롭고 특별한 방식으로" 썼다고 스스로 밝힌 연작으로, 모차르트가 하이든에게 현악4중주를 헌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 미뉴에트 대신 붙인 스케르초(미뉴에트보다 빠르고 장난스러운 3박자 악장)에서 하이든 특유의 유머 감각을 들을 수 있다.
  • 네 악기가 대등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짜임새는 이전 세대의 현악4중주보다 훨씬 정교해졌다.
  • 5번 '농담' 4중주 마지막 악장은 거짓 종지(가짜로 곡이 끝난 듯한 대목)를 여러 번 넣어, 연주회장에서 청중이 곡이 끝난 줄 알고 박수를 치게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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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런던의 자유 · 1791–1795 (59–63세)

(자유) 1790년 니콜라우스 공이 죽고 뒤를 이은 안톤 공은 음악에 관심이 없어 악단을 해체했다. 대신 하이든에게는 명목상의 급여만 남겨 사실상 자유를 주었다. 오랜 세월 궁정에 매여 있던 그는 처음으로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런던) 흥행사 요한 페터 잘로몬의 초청으로 1791년과 1794년 두 차례 런던을 방문했다. 그의 새 교향곡들은 청중을 열광시켰고, 옥스퍼드 대학은 그에게 명예 음악박사 학위를 주었다. 궁정에 매인 하인 취급을 받던 빈 시절과 달리, 런던에서 그는 처음으로 대중과 시장이 예술가를 떠받드는 경험을 했다. 과부 레베카 슈뢰터와도 가까이 지내며 애틋한 편지를 주고받았다. (헨델) 1791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린 헨델 기념 연주회에서 수백 명이 함께 부른 「메시아」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 압도적인 합창의 힘을 잊지 못했고, 이 경험이 훗날 대작 오라토리오를 쓰게 될 씨앗이 되었다. (상실과 사제) 런던 체류 사이 빈에 머물던 1792년, 젊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성격이 부딪쳐 관계는 매끄럽지 않았지만 하이든은 그의 재능을 인정했다. 이듬해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런던에서 전해 듣고 깊이 슬퍼했다. 그는 모차르트를 런던으로 데려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 적이 있었기에, 그 죽음을 더욱 아프게 받아들였다.

교향곡 94번 '놀람' (Hob.I:94)1791 (59세)

런던 청중 앞에서 크게 성공을 거둔 곡으로, 궁정의 그늘을 벗어나 처음으로 대중과 직접 만난 자유의 산물이었다.

  • 2악장 주제와 변주에서 조용한 선율이 흐르다 느닷없이 터지는 매우 큰 화음(포르티시모)은 '놀람'이라는 별명의 유래로, 초연 당시 졸던 청중을 놀라게 하려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이 갑작스러운 화음 이후 원래의 조용한 주제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이어지는 대목에서 하이든 특유의 짓궂은 유머를 느낄 수 있다.
  • 4악장의 활기찬 주제는 민속춤 리듬을 빌려와 런던 청중의 귀에 친숙하게 다가가도록 설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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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천지창조와 사계 · 1795–1803 (63–71세)

(귀환) 1795년 완전히 빈으로 돌아왔다. 새 에스테르하지 공 니콜라우스 2세가 소규모로 악단을 되살려 그를 다시 불렀지만, 이번에는 매년 여름 미사곡 한 곡을 쓰는 정도의 가벼운 의무만 맡았다. 예순을 넘긴 그는 이제 유럽에서 가장 존경받는 작곡가였다. (창조) 런던에서 들은 헨델의 합창에 자극받아, 남작 고트프리트 판 스비텐이 마련한 대본으로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를 썼다. 1798년 초연에서 혼돈을 그린 도입부와 "빛이 있으라"는 가사에 맞춘 폭발적인 화음은 청중을 압도했다. 이어 1801년에는 사계절 농촌의 삶을 그린 「사계」를 완성했다. 두 작품 모두 신이 만든 자연에 대한 경건한 감탄을 담고 있었으며, 이는 그가 평생 지녔던 소박하고 흔들림 없는 신앙과 맞닿아 있었다. (찬가) 1797년에는 프란츠 황제를 위한 노래 "신이여 프란츠 황제를 지켜주소서"를 작곡했다. 이 선율은 훗날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국가로 쓰이게 되며, 그 자신도 현악4중주 Op.76-3의 2악장 주제로 다시 사용했다. 검소하게 자란 그였지만 이 무렵에는 상당한 재산을 모았고, 빈 교외에 집을 사들여 정원을 가꾸며 여생을 준비했다.

오라토리오 「천지창조」 (Hob.XXI:2)1798 (66세)

런던에서 들은 헨델 「메시아」의 감동이 씨앗이 되어 완성한 대작으로, 신앙과 자연에 대한 경탄을 담았다.

  • 서주 '혼돈의 표현'은 조성이 뚜렷하지 않고 불협화음이 뒤섞여, 아직 질서가 없는 태초의 상태를 그린다.
  • 합창이 "빛이 있으라"는 가사에 이어 갑작스러운 다장조 총주로 터져 나오는 순간은 오라토리오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으로 꼽힌다.
  • 3부에서 오케스트라가 사자의 포효, 호랑이의 움직임, 벌레의 꿈틀거림을 악기 소리로 흉내 내는 대목은 자연 묘사 음악의 대표적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 아담과 이브의 이중창은 목가적이고 다정한 선율로, 오라토리오의 장엄함과 대비되는 인간적인 순간을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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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토리오 「사계」 (Hob.XXI:3)1801 (69세)

판 스비텐 남작의 대본으로 농촌의 사계절을 그린 만년의 대작으로, 소박한 삶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다.

  • '봄' 도입부는 겨울에서 벗어나는 자연을 묘사하며 점차 밝아지는 관현악 색채로 계절의 전환을 들려준다.
  • '여름'의 폭풍우 장면은 관악기와 팀파니(북)를 동원한 격렬한 총주로 천둥과 번개를 묘사한다.
  • '가을'의 사냥 합창은 호른의 신호 선율을 빌려와 야외의 활기를 그린다.
  • '겨울' 끝부분 노인의 독백은 인생의 마지막을 조용히 돌아보는 정서를 담아, 하이든 자신의 노년과 겹쳐 듣는 이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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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 마지막 나날 · 1803–1809 (71–77세)

(쇠약) 1803년 무렵부터 기억력과 체력이 눈에 띄게 나빠져 더 이상 새로운 곡을 완성하지 못했다. 코 폴립 제거 수술과 반복된 부종으로 오랫동안 고생했고, 방문객들에게 자신이 이제 낡은 악기가 되었다고 자조하듯 말하곤 했다. (포위) 1809년 봄,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빈을 포위하고 포격했다. 포탄이 근처에 떨어져 집이 흔들릴 때도 그는 가족과 하인들을 안심시키며 "하이든이 있는 한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 말했다고 전해진다. 프랑스군 장교 한 사람은 그의 집 앞에 경의를 표하는 보초를 세웠고, 「천지창조」의 아리아를 직접 불러 그를 위로했다는 이야기도 남아 있다. (마지막 선율) 죽기 며칠 전, 그는 병상에서 몸을 일으켜 피아노로 자신이 쓴 황제 찬가를 세 번 연주했다. 늘 온화하고 규칙적이던 그의 마지막 습관이었다. 1809년 5월 31일, 일흔일곱의 나이로 빈에서 눈을 감았다. (사후) 훈스투름 묘지에 묻혔으나, 골상학에 심취한 두 사람이 얼마 지나지 않아 무덤에서 두개골을 훔쳐 갔다. 몸통과 두개골이 다시 하나로 합쳐져 아이젠슈타트의 가족 묘소에 온전히 안장된 것은 그가 죽은 지 145년이 지난 1954년의 일이었다. 평생 소박한 신앙과 성실한 노동을 지켰던 이 작곡가는, 죽어서도 기이한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야 비로소 편히 쉴 수 있었다.

현악4중주 Op.76-3 '황제' (Hob.III:77)1797 (65세)

자신이 만든 황제 찬가를 주제로 삼은 곡으로, 하이든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에도 이 선율을 피아노로 연주했다.

  • 2악장은 황제 찬가 선율을 주제로 삼아 네 악기가 차례로 그 선율을 넘겨받는 변주곡 형식(하나의 주제를 여러 방식으로 바꾸어 반복하는 형식)으로, 매번 다른 악기가 노래하듯 주제를 들려준다.
  • 이 2악장 주제는 훗날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국가로 쓰이게 되어, 듣는 이에 따라 익숙한 선율로 다가온다.
  • 1악장은 활기찬 리듬과 대비되는 서정적인 선율이 교차해, 만년 하이든의 원숙한 균형 감각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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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 노트 📚🔎

교향곡

여러 악장으로 이루어진 관현악을 위한 대규모 기악곡. 하이든은 이 형식을 다듬어 이후 작곡가들의 표준으로 만들었다.

현악4중주

바이올린 두 대, 비올라, 첼로로 이루어진 실내악 편성과 그 곡. 하이든은 이 편성의 틀을 사실상 확립해 '현악4중주의 아버지'로 불린다.

궁정악장

귀족 궁정에서 음악 전반을 책임지는 최고 직책. 작곡, 지휘, 단원 관리를 모두 맡았다.

오라토리오

무대 연출 없이 독창·합창·관현악으로 성서나 종교적 주제를 노래하는 대규모 성악곡. 헨델의 전통을 이어받은 형식이다.

소나타 형식

하나의 주제를 제시하고 전개한 뒤 다시 정리하는 악장 구성 방식. 고전주의 기악곡의 기본 틀이 되었다.

변주곡 형식

하나의 주제를 여러 방식으로 바꾸어 반복하는 작곡 기법. 각 변주마다 선율, 화성, 리듬을 다르게 꾸민다.

크레셴도

조용한 소리에서 점점 커지는 오케스트라 효과. 18세기 만하임 악단에서 유행해 하이든 초기 교향곡에도 쓰였다.

스케르초

미뉴에트보다 빠르고 장난스러운 느낌의 3박자 악장. 하이든이 현악4중주에 처음 즐겨 쓰기 시작했다.

이 음악가를 좋아할 사람이 떠오르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