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lix Mendelssohn
"말은 모호하고 쉽게 오해받지만, 음악은 언제나 정확히 같은 것을 말해준다" — 1842년 마르크 앙드레 수쉐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곁의 사람들 ⏳🌊
- 가족아브라함 멘델스존
은행가 아버지로, 아들의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보고 지지했다.
- 가족파니 멘델스존
가장 가까운 음악적 동반자였던 누나로, 뛰어난 재능에도 시대의 제약으로 아마추어로 머물렀다.
- 스승카를 프리드리히 첼터
보수적이지만 확고한 작곡 스승으로 고전적 균형감을 심어주었다.
- 영향요한 볼프강 폰 괴테
소년 시절 그를 '제2의 모차르트'라 부르며 아꼈던 노년의 대문호.
- 우정로베르트 슈만
라이프치히에서 가까워진 동료로, 슈베르트의 잊혀진 교향곡 원고를 그에게 보내 초연으로 이어지게 했다.
- 가족세실 잔르노
1837년 결혼한 아내로, 다섯 자녀를 함께 두었다.
I. 함부르크에서 베를린으로 · 1809–1816 (0–7세)
(탄생) 1809년 2월, 독일 함부르크의 유대인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모제스 멘델스존은 계몽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유대인 철학자로 이름이 높았고, 아버지 아브라함은 그 후광 속에서 "한때는 유명한 아버지의 아들이었고 이제는 유명한 아들의 아버지가 되었다"고 스스로 말할 만큼 아들의 재능을 일찍부터 알아보았다. 어머니 레아는 피아노와 여러 외국어에 능통한 여성으로, 자녀 교육에 엄격하고 체계적이었다. 멘델스존은 태어난 지 두 해 만에 나폴레옹 점령을 피해 가족과 함께 베를린으로 옮겨갔고, 그곳이 실질적인 고향이 되었다. (누나) 위로 네 살 많은 누나 파니는 동생과 나란히 피아노를 배우며 자랐고,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서로의 가장 가까운 음악적 동반자였다. 파니는 동생 못지않은, 어떤 평가로는 오히려 더 뛰어난 작곡 재능을 지녔지만 여성이 음악을 직업으로 갖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시대와 집안의 관습 속에서 아마추어로 머물러야 했다. 아버지는 훗날 파니에게 "음악은 네 동생에게는 직업이 될 수 있지만 너에게는 장식일 뿐이다"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 불균등한 대우는 두 사람의 우애를 깨뜨리지 않았지만, 멘델스존의 삶 전체에 그늘처럼 따라다녔다. (개종) 1816년, 집안은 루터파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성에 바르톨디를 덧붙였다. 반유대주의가 여전한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한 실용적 선택이었지만, 멘델스존은 평생 유대인 혈통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이는 훗날 그의 명성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II. 신동의 시절 · 1816–1829 (7–20세)
(스승) 카를 프리드리히 첼터에게 작곡을 배웠다. 첼터는 보수적인 성향의 음악가로 화려한 기교보다 형식의 완결성을 중시했고, 이 가르침은 멘델스존이 평생 지킨 고전적 균형감의 뿌리가 되었다. 1821년 첼터는 열두 살의 제자를 바이마르로 데려가 노년의 괴테와 만나게 했다. 괴테는 소년의 즉흥연주에 감탄하며 그를 "제2의 모차르트"라 불렀고, 이후로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애정을 이어갔다. (다작) 십대 초반부터 교향곡과 현악사중주를 잇달아 작곡했다. 1825년, 열여섯 살에 완성한 현악 8중주는 어린 나이의 습작이라 보기 힘든 완성도로 지금도 그의 초기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듬해에는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읽고 받은 인상을 관현악으로 옮긴 서곡을 열일곱 살에 써냈다. 베를린 집 정원에서 여름밤 산책을 마친 뒤 곧바로 악상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가정음악회) 멘델스존 집안은 일요일마다 자택에서 음악회를 열었고, 여기서 그의 신작이 초연되곤 했다. 부유한 은행가 집안의 응접실은 그에게 실험과 실패가 허락되는 안전한 무대였다. 이는 가난 속에서 작품을 팔아 생계를 이어야 했던 슈베르트와는 전혀 다른 출발선이었다. (부활) 1829년, 스무 살의 멘델스존은 베를린 싱아카데미에서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지휘했다. 바흐가 세상을 떠난 뒤 거의 잊혀 있던 이 곡을 무대에 되살린 이 공연은 오늘날 바흐 재발견의 상징적 사건으로 꼽힌다.
열여섯 살, 가정음악회에서 초연된 이 곡은 부유한 집안이 마련해 준 무대에서 탄생한 조숙한 걸작이었다.
- 마지막 4악장은 여덟 개 현악기가 모두 빠른 푸가(돌림노래처럼 주제를 차례로 쌓아 올리는 기법)로 얽혀 드는 대목으로, 열여섯 살이 썼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치밀하다.
- 3악장 스케르초는 파니가 괴테의 「파우스트」 발푸르기스 밤 장면과 연결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현이 가볍게 떨리듯 연주하는(트레몰로) 대목이 요정들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 여덟 성부가 마치 작은 오케스트라처럼 울리도록 쓰였다는 점이 연주자들 사이에서 늘 화제가 된다 — 실내악인데도 교향곡 같은 두께를 낸다.
- 1악장 첫머리에서 제1바이올린이 그리는 위로 솟아오르는(상행) 선율은 이 곡 전체의 활력을 처음부터 선언한다.
베를린 집 정원에서의 여름밤 산책 뒤 열일곱 살에 써낸 곡으로, 셰익스피어를 향한 소년의 상상력이 그대로 관현악이 되었다.
- 맨 앞 목관이 조용히 내려놓는 화음은 요정의 숲으로 들어서는 문처럼 들린다.
- 이어지는 현악의 빠르고 가벼운 패시지는 요정들이 사뿐사뿐 뛰어다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널리 해석된다.
- 중간에 갑자기 튀어나오는 낮고 거친 음(당나귀 울음을 흉내낸 대목)은 셰익스피어 원작에서 인간이 당나귀 머리로 변하는 보텀의 장면을 가리킨다.
- 열일곱 살이 이만한 규모의 관현악을 능숙하게 다뤘다는 점은 지금도 연주자와 지휘자들 사이에서 놀라움의 대상이다.
III. 여행과 형성 · 1829–1833 (20–24세)
(여정)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을 본떠, 청년기의 견문을 넓히기 위한 긴 유럽 여행을 떠났다. 1829년에는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돌았고, 헤브리디스 제도의 핑갈의 동굴을 방문한 경험은 그대로 악상이 되어 파니에게 보낸 편지 속에 첫 선율로 적혔다. (런던) 영국 청중은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이후 평생 열 차례 가까이 영국을 오가며 지휘하고 연주했고, 훗날 빅토리아 여왕도 그의 음악을 아꼈다. 이 인기는 그가 독일어권을 넘어 유럽 전체에서 이름을 얻는 발판이 되었다. (로마) 1830년부터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로마에서 엑토르 베를리오즈와 만났다. 두 사람은 서로를 존중했지만 음악적으로는 물과 기름 같았다. 베를리오즈는 멘델스존의 절제된 고전적 균형을 감탄하면서도 다소 답답하게 여겼고, 멘델스존은 베를리오즈의 과감한 관현악 어법에 놀라면서도 절제를 잃은 것으로 느꼈다. 이 여행에서 받은 이탈리아의 빛과 활기는 훗날 교향곡으로 옮겨졌다. (부유함) 은행가 아버지의 재력은 이 모든 여행을 가능하게 한 바탕이었다. 멘델스존은 생계를 걱정할 필요 없이 여행하고 작곡할 수 있었던, 이 시대 작곡가로서는 드문 처지였다.
스코틀랜드 여정에서 받은 인상이 파니에게 보낸 편지 속 악상 그대로 관현악곡이 되었다.
- 도입부 첼로와 비올라가 그리는 낮게 일렁이는 선율은 핑갈의 동굴 앞바다의 파도를 그대로 옮긴 듯하다 — 멘델스존이 파니에게 보낸 편지에 이 주제를 스케치로 남겼다.
- 중반의 점점 커지는(크레셴도) 관현악은 잔잔하던 바다가 폭풍으로 바뀌는 순간을 그린다.
- 클라리넷과 목관이 주고받는 짧은 응답 구절은 동굴 벽에 부딪치는 물소리의 메아리처럼 들린다.
- 제목의 '핑갈의 동굴'은 스코틀랜드 서해안의 실제 현무암 동굴로, 곡을 듣기 전 사진으로 그 풍경을 먼저 보면 도입부의 인상이 훨씬 선명해진다.
로마와 나폴리에서 받은 빛과 활기를 담았지만, 그는 끝내 이 곡에 만족하지 못해 생전에 출판을 허락하지 않았다.
- 1악장 도입부, 현이 튀어오르듯 연주하는 경쾌한 첫 주제는 이탈리아의 햇살을 음악으로 옮긴 듯한 인상을 준다.
- 마지막 4악장은 살타렐로라는 이탈리아 춤곡 리듬을 빌려와 처음부터 끝까지 숨 가쁘게 몰아친다.
- 멘델스존은 이 곡을 발표한 뒤에도 계속 고쳐 썼고 끝내 만족하지 못해 생전에 출판을 허락하지 않았다 — 오늘날 연주되는 판본은 그가 '아직 미완성'이라 여겼던 형태다.
- 빠른 템포 속에서도 각 성부의 선율선이 또렷이 들리는 점이 지휘자들 사이에서 이 곡의 숨은 어려움으로 꼽힌다.
IV. 라이프치히의 정착 · 1833–1840 (24–31세)
(상실) 1833년부터 뒤셀도르프에서 음악감독으로 일하다가, 1835년 아버지 아브라함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보고 지지해 준 사람을 잃은 슬픔은 컸다. 같은 해 그는 라이프치히 게방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부임했다. (결혼) 1837년 프랑크푸르트의 프랑스계 개신교 목사 딸 세실 잔르노와 결혼했다. 둘 사이에는 카를, 마리, 파울, 펠릭스, 릴리 다섯 자녀가 태어났다. 동시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평온하고 다정했으며, 멘델스존은 바쁜 지휘와 작곡 활동 속에서도 가정에 충실한 아버지였다고 전해진다. (슈만) 라이프치히에서 로베르트 슈만과 가까워졌다. 1839년, 슈만이 빈에서 찾아낸 슈베르트의 대교향곡 원고를 보내오자 멘델스존은 이를 게방트하우스에서 초연해 세상에 알렸다.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십여 년이 지난 작곡가의 묻혀 있던 걸작을 무대에 세운 것이다. (개혁자) 지휘대에서 그는 고전적 명곡과 당대 신작을 함께 프로그램에 올리는 방식을 정착시켰고, 이는 오늘날 정기 연주회 관행의 원형이 되었다.
V. 결실의 시기 · 1841–1846 (32–37세)
(음악원) 1843년 라이프치히 음악원을 설립했다. 슈만을 비롯한 여러 동료를 교수로 초빙했으며, 실기와 이론을 아우르는 체계적인 교육과정을 갖춘 이 학교는 이후 독일 각지에서 세워진 음악원들의 본보기가 되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독일 음악교육 전통의 중심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협주곡) 1844년 바이올린 협주곡 마단조를 완성했다. 독주자 페르디난트 다비트와 여러 해에 걸쳐 편지를 주고받으며 운지법과 화려한 대목의 배치까지 세세히 상의했고, 그 결과 독주자의 기교와 오케스트라의 서정성이 매끄럽게 맞물리는 곡이 되었다. 이 곡은 오늘날까지 바이올린 협주곡의 표준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오라토리오) 1846년 영국 버밍엄 음악제에서 오라토리오 「엘리야」를 초연했다. 헨델의 오라토리오 전통을 이으면서도 낭만주의 시대의 극적인 관현악법을 결합한 이 작품은 초연 당시 청중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고, 그는 이 성공으로 영국에서 더욱 확고한 명성을 얻었다. (과로) 라이프치히와 베를린, 런던을 오가며 지휘와 작곡, 음악원 운영을 동시에 떠맡는 생활은 몸을 갈아 넣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프로이센 왕실이 맡긴 직책은 관료적인 갈등과 실망만 안겨주었고, 잦은 여행과 끊이지 않는 마감은 건강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주변 사람들은 이 시기 그가 점점 지쳐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전한다.
독주자 페르디난트 다비트와 여러 해에 걸쳐 다듬은 곡으로, 라이프치히에서의 안정된 삶이 낳은 원숙한 걸작이다.
- 보통의 협주곡과 달리 오케스트라의 긴 서주 없이 독주 바이올린이 곡이 시작되자마자 곧바로 주제를 노래하듯 연주한다.
- 1악장의 카덴차(독주자가 오케스트라 없이 혼자 화려하게 연주하는 대목)를 멘델스존이 즉흥이 아니라 악보에 직접 적어 놓았다는 점이 이 곡을 특별하게 만든다.
- 1악장과 2악장 사이, 바순이 낮은 음을 길게 붙잡아 끊김 없이 다음 악장으로 이어주는 대목은 연주자들이 가장 신경 쓰는 순간 가운데 하나다.
- 느린 2악장의 노래하듯 흐르는 선율은 베토벤의 영웅적인 협주곡과 대비되는, 멘델스존다운 다정하고 서정적인 어법을 잘 보여준다.
헨델의 전통을 이어 쓴 대작으로, 영국 청중을 향한 그의 사랑과 명성이 정점에 이른 순간을 보여준다.
-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달라 기도하는 장면의 극적인 관현악은 구약 열왕기의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무대에 옮긴다.
- 합창 '그 후 너희 빛이 솟아나리라'는 어둠 끝에 오는 구원을 노래하며 오라토리오 전체의 정점을 이룬다.
- 폭풍우 장면의 관현악은 헨델의 오라토리오 전통을 잇는 동시에, 낭만주의 시대다운 색채감 있는 관현악법을 보여준다.
- 베이스(또는 바리톤) 독창이 맡는 엘리야 역은 예언자의 분노와 절망, 확신을 모두 담아내야 하는 성악가들의 시험대로 꼽힌다.
VI. 상실과 죽음 · 1847 (38세)
(비보) 1847년 5월, 평생 가장 가까운 음악적 동반자였던 누나 파니가 갑작스러운 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소식을 전해 들은 멘델스존은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고 전해진다. 어린 시절부터 서로의 작품을 가장 먼저 들려주고 평가해주던 존재를 잃은 상실감은 그를 근본에서부터 흔들었다. (현악사중주) 그해 여름, 파니를 애도하며 현악4중주 6번 바단조를 써 내려갔다. 평소의 단정하고 균형 잡힌 어법과는 전혀 다르게, 격렬하게 떨리는 현의 울림과 어두운 화성이 곡 전체를 뒤덮는다.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개인적이고 격정적인 곡으로 남았다. (죽음) 누나를 잃은 뒤 몇 달 사이 건강이 급격히 무너졌다. 여러 차례 뇌졸중을 겪은 끝에, 1847년 11월 4일 라이프치히에서 서른여덟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 행렬에는 수많은 시민이 뒤따랐고, 슈만은 깊은 슬픔에 잠겨 그를 추모하는 글을 남겼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음악은 한동안 유례없는 사랑을 받았지만 이후 세기 중반에는 뜻밖의 방식으로 그늘에 놓이기도 했다.
누나 파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격렬하고 개인적인 곡이다.
- 1악장 내내 현이 빠르게 떨듯 반복하는(트레몰로) 대목은 평소 멘델스존답지 않은 격렬함과 불안을 그대로 드러낸다.
- 이 곡은 파니가 세상을 떠난 지 몇 주 만에 쓰였고, 멘델스존 자신도 이를 누나를 위한 진혼곡으로 여겼다고 전해진다.
- 느린 악장의 어둡고 무거운 선율은 그의 다른 실내악과 뚜렷이 대비되어, 연주자들 사이에서 그의 '가장 개인적인' 곡으로 불린다.
- 마지막 악장까지 긴장이 풀리지 않고 몰아치는 점이 이 곡을 그의 작품 중 가장 격렬한 현악사중주로 만든다.
덜 알려진 이야기
1829년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되살린 공연은 흔히 '완전한 복원'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다르다. 멘델스존은 원곡의 상당 부분을 잘라내고 몇몇 아리아를 빼거나 순서를 바꾸었으며, 당시 청중의 취향에 맞춰 편곡했다. 그가 되살린 것은 바흐 그대로가 아니라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맞게 다시 다듬은 바흐였다. 그의 사후 명성은 예상 밖의 방식으로 흔들렸다. 1850년 리하르트 바그너는 처음에는 가명으로 「음악에서의 유대주의」라는 글을 발표해 멘델스존을 겨냥한 반유대주의적 비판을 폈다. 이 글은 훗날 나치 독일에서 멘델스존의 음악이 공개 연주와 방송에서 배제되는 데 이용되었고, 그가 살아있을 때 누렸던 위상에 비해 20세기 중반 한동안 상대적으로 덜 연주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는 뛰어난 수채화가이기도 했다. 여행을 다닐 때마다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며 풍경을 세밀하게 그렸고,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남긴 수채화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음악가로서의 명성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면모다. 그는 지휘봉을 앞세워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방식을 체계적으로 정착시킨 초기 지휘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이전까지는 지휘자가 바이올린을 들고 연주에 참여하거나 손짓만으로 지시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게방트하우스에서 그가 보여준 지휘 방식은 이후 근대적 지휘 관행의 본보기가 되었다.
용어 노트 📚🔎
서곡
서곡(序曲)은 순서(序)상 맨 앞에 놓인 곡(曲)이라는 뜻이다. 원래는 오페라나 연극 공연 시작 전에 연주하는 독립적인 관현악곡이었으나, 멘델스존의 시대에는 특정한 극을 위해서가 아니라 독립된 연주회용 작품으로도 많이 작곡되었다. 학예회 발표 전에 트는 짧은 배경음악처럼, 본 공연이 시작되기 전 관객의 마음을 준비시키는 역할을 한다. 영어 오버추어(overture)는 음악 밖에서 '제안, 시도'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 협상을 시작하려는 첫 신호를 '평화의 오버추어'라 부르는 식이다.
오라토리오
오라토리오는 이탈리아어로 기도실을 뜻하는 오라토리오(oratorio)에서 왔다. 종교적 기도 모임에서 성경 이야기를 노래로 들려주던 관습에서 이름이 붙었다. 성경이나 종교적 내용을 다루는 대규모 성악곡으로, 오페라처럼 독창·합창·관현악이 모두 쓰이지만 무대 연기나 의상, 배경 장치 없이 콘서트 형식으로 연주된다는 점이 다르다. 반 전체가 무대의상 없이 마이크 앞에 서서 부르는 학예회 합창 발표를 떠올리면 비슷하다 — 이야기는 있지만 연기는 없는 음악이다.
카덴차
카덴차(cadenza)는 이탈리아어로 '떨어짐, 마침'을 뜻하는 말에서 왔으며, 원래 음악이 잠시 멈추는 지점을 가리켰다. 협주곡에서 오케스트라가 잠시 멈추고 독주자 혼자 화려한 기교를 마음껏 펼치는 대목이다. 원래는 즉흥연주로 채워졌지만, 멘델스존은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이 부분을 직접 악보에 적어 놓아 연주자가 즉흥으로 채우지 않도록 했다. 계주에서 마지막 선수가 혼자 트랙을 도는 구간처럼, 다른 주자들은 잠시 멈추고 지켜보는 순간이다.
트레몰로
트레몰로(tremolo)는 이탈리아어로 '떨림'을 뜻하는 말에서 왔다. 한 음을 아주 빠르게 반복해서 떨리는 듯한 소리를 내는 연주법이다. 현악기라면 활을 짧고 빠르게 왔다갔다 움직여 연주한다. 무섭거나 불안한 장면에서 많이 쓰이는데, 손이 떨릴 정도로 긴장했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협주곡
협주곡(協奏曲)은 함께(協) 연주하는(奏) 곡이라는 뜻이다. 영어 이름 콘체르토의 라틴어 뿌리에는 겨루다라는 뜻도 있어서, 독주자와 오케스트라가 주고받으며 경쟁하듯 연주하는 성격이 이름에 담겨 있다. 한 명(또는 소수)의 독주자와 오케스트라가 번갈아 주고받으며 연주하는 곡이다. 독주자가 화려한 기량을 뽐내면 오케스트라가 받아서 답하는 식으로 진행되는데, 이는 반 대표 한 명과 나머지 반 전체가 번갈아 노래를 주고받는 것과 비슷하다.
살타렐로
살타렐로(saltarello)는 이탈리아어로 '뛰다'를 뜻하는 살타레(saltare)에서 온 말로, 뛰듯이 통통 튀는 춤곡이라는 뜻이다. 이탈리아 나폴리 지역에서 유래한 매우 빠르고 활기찬 춤곡으로, 3박자 계열의 리듬이 통통 튀듯 반복된다. 운동회에서 달리기 출발 신호처럼 급하고 힘찬 리듬이 계속 몰아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