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éla Bartók
축음기를 메고 마을을 돌며 받아 적은 농민의 노래로, 가장 오래된 것에서 가장 새로운 음악을 길어 올린 사람.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곁의 사람들 ⏳🌊
- 가족파울라 보이트
남편을 일찍 잃고 교사 일로 두 아이를 키운 어머니이자 첫 피아노 스승으로, 아들은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 헝가리를 떠나지 않았다.
- 우정에르뇌 도흐나니
포조니 김나지움의 선배로, 바르토크는 그를 따라 부다페스트 음악원에 진학했고 1919년 음악 위원회에서도 함께 일했다.
- 영향리하르트 슈트라우스
1902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듣고 막혀 있던 작곡을 다시 시작했을 만큼 젊은 바르토크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 우정코다이 졸탄
1905년 만나 함께 마을을 돌며 민요를 채록한 평생의 동지로, 헝가리 음악의 새 길을 둘이 함께 열었다.
- 가족디타 파스토리
두 번째 아내이자 피아니스트로,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를 함께 초연했고 마지막 피아노 협주곡을 선물로 받았다.
- 후원세르게이 쿠세비츠키
1943년 병상의 바르토크에게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을 위촉해 망명지에서 마지막 창작의 불을 다시 지폈다.
I. 국경 지대의 소년 · 1881–1899 (0–18세)
(출생) 1881년 3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오늘날 루마니아)의 너지센트미클로시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루마니아 서부 도시 산니콜라우마레다. 아버지 벨라는 그곳 농업학교 교장으로, 첼로를 켜고 작은 춤곡을 쓰기도 한 아마추어 음악가였다. 어머니 파울라 보이트는 피아노를 가르치는 초등학교 교사였고, 네 살 아래 누이 엘자가 있었다. 갓난아기 때 천연두 예방접종을 맞은 뒤 온몸에 발진이 번져, 다섯 살 무렵까지 낯선 사람 앞에 잘 나서지 못했다. 그의 수줍고 닫힌 성격을 이 시절과 잇는 전기 작가가 많다. (상실) 1888년 아버지가 서른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교사 일로 두 아이를 키우며 일자리를 따라 나지쇨뢰시(오늘날 우크라이나 비노흐라디우)와 베스테르체(오늘날 루마니아 비스트리차)를 옮겨 다녔다. 소년은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아홉 살 무렵부터 짧은 곡을 지었다. 1892년에는 처음으로 청중 앞에서 연주하며 자작곡 「도나우강의 흐름」을 선보였다. (포조니) 1894년 가족은 마침내 포조니(오늘날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에 자리를 잡았다. 빈과 가까워 음악 생활이 활발한 이 도시에서, 그는 헝가리 오페라의 기틀을 세운 페렌츠 에르켈의 아들 라슬로 에르켈에게 피아노와 화성을 배웠다. 이 무렵의 습작은 브람스의 짙은 그늘 아래 있었다. 김나지움에는 네 살 위의 에르뇌 도흐나니가 있었는데, 그는 이미 촉망받는 피아니스트였다. (선택) 1899년 그는 빈 음악원의 입학 허가를 받았지만, 도흐나니를 따라 부다페스트 음악원을 택했다. 독일어권 음악의 중심 대신 헝가리의 수도를 고른 이 결정이 이후 그의 삶을 헝가리 음악의 한복판으로 이끌었다.
II. 부다페스트와 민요의 발견 · 1899–1909 (18–28세)
(음악원) 음악원에서 그는 리스트의 제자 이슈트반 토만에게 피아노를, 한스 쾨슬러에게 작곡을 배웠다. 토만을 통해 리스트의 피아노 전통을 이어받았고, 리스트의 소나타를 연주해 피아니스트로 일찍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작곡은 한동안 막혀 있었고, 1900년에는 큰 병을 앓기도 했다. 그를 다시 일으킨 것은 1902년 부다페스트에서 들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였다. 그는 슈트라우스의 「영웅의 생애」를 피아노용으로 옮겨 1903년 빈에서 연주할 만큼 깊이 빠졌다. (민족) 당시 헝가리에는 합스부르크 지배에 맞선 민족주의가 끓어올랐다. 그는 헝가리 전통 옷을 입고 다녔고, 어머니에게 집에서도 독일어 대신 헝가리어를 쓰자고 편지했다. 1903년 1848년 혁명 지도자를 그린 교향시 「코슈트」에서는 오스트리아 국가를 일그러뜨려 인용했다. (발견) 1904년 여름 머물던 시골 농장에서, 그는 트란실바니아 출신 하녀 리디 도샤가 부르는 노래를 받아 적었다. 당시 '헝가리 음악'으로 통하던 것은 도시 집시 악단의 화려한 연주였지만, 농민의 노래는 그와 전혀 달랐다. 1905년 코다이 졸탄을 만나 함께 마을을 돌며 축음기로 노래를 녹음했고, 1906년 둘이 「헝가리 민요 20곡」을 펴냈다. 1907년 트란실바니아의 세클러 마을에서는 반음이 없는 옛 5음 음계 선율을 찾아냈다. 같은 해 코다이가 파리에서 가져온 드뷔시의 악보에서 비슷한 음계를 보고, 가장 오래된 민요와 가장 새로운 음악이 통한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해 그는 토만의 뒤를 이어 모교의 피아노 교수가 되었다. (게예르) 1907년 그는 열아홉 살 바이올리니스트 슈테피 게예르를 사랑했다. 그녀에게 보낸 긴 편지에서 신은 없다는 생각을 거리낌 없이 밝혔다. 그녀를 위해 바이올린 협주곡을 썼지만, 이듬해 그녀가 관계를 끝냈다.
슈테피 게예르를 향한 사랑이 그대로 담긴 곡이다. 그녀가 관계를 끝낸 뒤 악보는 그녀의 서랍 속에 반세기 동안 잠들어 있었다.
- 1악장은 독주 바이올린 혼자 레–파♯–라–도♯으로 한 음씩 계단처럼 오르는(상행) 선율로 시작한다. 바르토크가 편지에서 게예르의 '주제'라고 부른 바로 그 음형이다.
- 바르토크는 1악장을 '이상화된 슈테피', 2악장을 '쾌활한 슈테피'의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같은 주제가 두 악장에서 얼마나 다른 얼굴로 바뀌는지 비교해 들어 보자.
- 1악장에서는 독주 바이올린 뒤로 다른 바이올린들이 하나씩 같은 선율을 따라 들어오며 실처럼 엮인다. 독주와 오케스트라가 겨루기보다 함께 노래하는 드문 협주곡이다.
- 2악장은 춤추듯 활기차지만 사랑의 주제가 비틀리고 익살스럽게 변해 나타난다. 젊은 날의 쓰라림을 웃음으로 감추는 것처럼 들린다.
III. 닫힌 성 · 1909–1918 (28–37세)
(결혼) 1909년 가을, 그는 열여섯 살 제자 마르타 지글러와 결혼했고 이듬해 아들 벨라가 태어났다. 마르타는 남편의 악보를 깨끗이 옮겨 적고 민요 채록 원고를 정리하며 작업을 도왔다. 결혼 직전 완성한 「현악 4중주 1번」의 첫 악장에는 게예르를 위한 주제가 다시 흐르는데, 그는 이 악장을 '장송곡'이라고 불렀다. (성) 1911년 벨라 벌라주의 대본으로 단막 오페라 「푸른 수염 영주의 성」을 써 아내에게 바쳤다. 새 아내 유디트가 남편의 성에 있는 일곱 개의 문을 하나씩 열며 그의 비밀에 다가갈수록 둘 사이가 멀어지는 이야기다. 같은 해 피아노를 타악기처럼 두드리는 「알레그로 바르바로」도 썼다. 그러나 오페라는 경연에서 무대에 올릴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고, 코다이와 세운 신헝가리음악협회도 곧 흐지부지되었다. (은둔) 낙담한 그는 공개 연주회에서 거의 물러나 민요 연구에 몰두했다. 헝가리를 넘어 슬로바키아와 루마니아 마을까지 채록 범위를 넓혔고, 1913년에는 알제리 비스크라까지 가서 아랍 농민의 음악을 기록했다. 1916년에는 교리보다 자유로운 사유를 중시하는 유니테리언 교회에 들어갔다. (전쟁) 제1차 세계대전으로 채집 여행이 막히자, 그는 모아 둔 선율로 「루마니아 민속 춤곡」(1915) 같은 피아노곡을 지었고 「현악 4중주 2번」(1915–17)을 완성했다. 1917년 발레 「나무로 깎은 왕자」가 성공하자, 이듬해 5월 「푸른 수염 영주의 성」도 마침내 부다페스트 오페라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쓴 지 7년 만이었다.
막 결혼한 바르토크가 아내에게 바친 오페라지만, 이야기는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끝내 열 수 없는 마음의 방에 관한 것이다. 쓴 지 7년 만에야 무대에 올랐다.
- 막이 오르기 전 음유시인이 말로 하는 서막이 있다. '이 성은 어디에 있는가? 바깥인가, 안인가?'라고 묻는데, 성이 곧 사람의 마음이라는 뜻을 처음부터 밝혀 둔다.
- 첫머리 낮은 현악기의 어둡고 느린 5음 음계 선율이 성의 어둠이다. 다섯 번째 문이 열리면 오르간까지 더한 오케스트라 전체가 눈부신 다장조로 터지고, 유디트가 높은 도 음을 외친다. 이 장면은 소프라노의 기량을 가늠하는 대목으로 꼽힌다.
- 여섯 번째 '눈물의 호수' 문에서는 하프와 목관이 물결처럼 흐르는 화음을 낸다. 고요하지만 가장 서늘한 장면이다.
- 대사는 헝가리어의 말 억양과 민요의 박자를 따른다. 성악가가 화려하게 뽑아내는 대신 말하듯 노래하는 부분에 귀 기울이면 바르토크가 민요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들린다.
전쟁으로 채집 여행이 막힌 해, 트란실바니아 마을에서 받아 적은 바이올린과 피리 가락을 여섯 개의 짧은 피아노곡으로 옮겼다. 바르토크의 곡 가운데 가장 널리 사랑받는다.
- 여섯 곡은 각각 막대기 춤, 허리띠 춤, 제자리 춤, 부쿰 지방의 춤, 루마니아 폴카, 빠른 춤이다. 모두 1~2분 남짓이라 첫 바르토크로 듣기 좋다.
- 세 번째 '제자리 춤'은 원래 농민의 피리로 불던 가락이다. 높은 음역에서 낯선 동양풍 음정으로 맴도는 선율이 신비롭게 들린다.
- 원곡은 피아노곡이지만 바르토크가 직접 만든 소규모 오케스트라판과, 바이올리니스트 졸탄 세켈리가 만든 바이올린판이 더 자주 연주된다. 같은 곡을 세 가지로 비교해 보자.
- 마지막 두 곡은 쉼 없이 이어지며 점점 빨라진다. 마을 잔치의 춤이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처럼 들린다.
IV. 혁명과 재혼 · 1918–1926 (37–45세)
(혁명) 1918년 제국이 무너지고 1919년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이 들어서자, 그는 코다이·도흐나니와 함께 음악 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몇 달 뒤 공화국이 무너지고 호르티 정권이 들어서자 셋은 정치적 공격을 받았다. 루마니아와 슬로바키아 민요까지 연구했다는 사실도 '애국심이 없다'는 비난의 근거가 되었다. 그는 빈이나 베를린으로 옮기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1920년 트리아농 조약으로 고향 너지센트미클로시는 루마니아 땅이 되었다. (관리) 이 혼란 속에서 그는 메녜르트 렌젤의 대본으로 판토마임(대사 없이 몸짓으로 펼치는 극) 「중국의 이상한 관리」를 썼다. 도시 뒷골목의 범죄와 욕망을 다룬 이야기로, 그가 깊이 연구했던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처럼 원시적 리듬이 극단까지 밀어붙여졌다. (재혼) 1923년 그는 마르타와 이혼하고 곧 열아홉 살 제자 피아니스트 디타 파스토리와 재혼했다. 이듬해 아들 페테르가 태어났다. 같은 해 부다와 페스트 통합 50주년을 기념한 「무용 모음곡」에서는 헝가리·루마니아·아랍 선율의 색채를 한데 엮었다. 1922년 파리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옐리 다라니와 「바이올린 소나타 1번」을 연주한 자리에는 라벨과 스트라빈스키가 있었다고 전한다. 라벨은 2년 뒤 다라니를 위해 「치간」을 썼다. (피아노) 1926년 그는 「피아노 소나타」, 「야외에서」,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잇달아 썼다. 이 무렵 바흐와 스카를라티 등 바로크 건반 음악을 편집하고 연주회에 올렸는데, 그 대위법(여러 선율을 겹쳐 짜는 기법)이 타악기 같은 피아노 쓰기와 만났다. 「야외에서」의 '밤의 음악'은 풀벌레 소리를 흉내 낸 새 어법의 시작이었다. 그해 11월 독일 쾰른에서 「중국의 이상한 관리」가 초연되자 소동이 일었고, 시장 콘라트 아데나워가 재공연을 금지했다.
혁명과 반혁명, 국경 상실이 이어지던 해들에 쓴 가장 격렬한 작품이다. 쾰른 초연 뒤 곧바로 공연이 금지될 만큼 충격을 주었다.
- 첫머리는 대도시 거리의 소음이다. 현악기가 빠르게 들끓고 금관이 경적처럼 울리는 혼돈 속에서 막이 오른다.
- 악당들에게 붙잡힌 소녀가 창가에서 행인을 유인하는 장면이 세 번 나오는데, 매번 클라리넷이 유혹하듯 휘어지는 독주를 맡는다. 세 번의 클라리넷 독주가 점점 어떻게 달라지는지 들어 보자.
- 중국인 관리가 등장할 때 트롬본이 음을 미끄러지듯 끌어올리는(글리산도) 소리가 그의 기괴한 존재감을 알린다.
- 후반 추격 장면은 하나의 주제를 여러 악기가 차례로 쫓아가는 푸가풍으로 짜여 숨 막히게 몰아친다. 연주회용 모음곡은 이 추격 장면에서 끝나고, 전곡판은 끝부분에 가사 없는 합창이 들어간다.
V. 어두워지는 유럽 · 1926–1940 (45–59세)
(명성) 1927–28년 첫 미국 순회와 1929년 소련 순회로 그의 이름은 국제적으로 알려졌다. 「현악 4중주 3번」(1927)과 「4번」(1928)에서는 줄을 세게 퉁겨 지판에 부딪치게 하는 이른바 '바르토크 피치카토' 같은 새 소리를 실험했다. 1934년에는 음악원 교수직을 내려놓고 과학 아카데미에서 헝가리 민요 전집 편찬에 매달렸다. 가르치는 일보다 연구를 원했던 그에게는 바라던 자리였다. (교본) 집에서는 쉬운 곡부터 어려운 곡까지 153곡으로 된 피아노 교본 「미크로코스모스」(1926–39)를 썼다. 처음 두 권은 피아노를 배우던 아들 페테르에게 바쳤다. 페테르의 회고에 따르면 아버지는 곤충을 채집하고 자연을 관찰하는 꼼꼼한 수집가였다. (바젤) 스위스 지휘자 파울 자허는 든든한 후원자였다. 그의 위촉으로 1936년 「현, 타악기,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을, 1939년 자허의 산장에서 「디베르티멘토」를 썼다. 1937년의 「두 대의 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소나타」는 이듬해 바젤에서 디타와 둘이 초연했다. (저항) 나치의 그늘이 짙어지자 그는 분명하게 맞섰다.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으로 빈의 출판사가 나치 영향 아래 들어가자 런던의 부지 앤드 호크스로 옮겼고, 독일·이탈리아 방송국에 자기 작품을 내보내지 말라고 요구했다. 같은 해 헝가리의 첫 반유대법에 반대하는 성명에 코다이와 함께 서명했다. (어머니) 그는 어머니가 살아 있는 동안은 헝가리를 떠날 수 없다고 했다. 1939년 12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 직전 완성한 「현악 4중주 6번」은 모든 악장이 '슬프게(메스토)'라 적힌 선율로 시작하고, 마지막 악장은 그 슬픔에 잠긴 채 끝난다. 1940년 10월 부다페스트 고별 연주회를 마친 그는 디타와 함께 리스본을 거쳐 미국으로 떠났다.
후원자 파울 자허의 위촉으로 쓴 곡으로, 유럽이 어두워지던 시기 바르토크의 기법이 가장 치밀하게 다듬어진 작품이다.
- 1악장은 약음기를 단 비올라가 아주 여리게 반음씩 꿈틀대는 주제로 시작하는 푸가다. 주제가 성부를 옮겨 다니며 점점 커져 '라'에서 가장 먼 '미♭'에서 정점에 이른 뒤 다시 거꾸로 접혀 돌아온다.
- 이 정점이 곡 전체를 황금비로 나눈 자리에 놓였다는 헝가리 음악학자 에르뇌 렌드바이의 분석이 유명하지만, 바르토크가 일부러 계산했는지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
- 오케스트라는 두 무리의 현악기를 좌우에 나눠 앉힌다. 2악장과 4악장에서 왼쪽과 오른쪽이 서로 주고받는 소리를 귀로 따라가 보자.
- 3악장은 바르토크의 '밤의 음악'이다. 실로폰이 한 음을 점점 빠르게 두드리다 다시 느려지고, 팀파니가 음높이를 미끄러뜨리며, 첼레스타가 차갑게 반짝인다. 영화 「샤이닝」에 쓰여 더 유명해졌다.
VI. 망명 · 1940–1945 (59–64세)
(뉴욕) 1940년 10월 말 뉴욕에 도착했다. 컬럼비아 대학은 명예박사 학위를 주고, 하버드 대학이 소장한 세르비아·크로아티아 민요 녹음을 악보로 옮기는 연구직을 마련했다. 그러나 임시직이라 수입은 넉넉지 않았고, 연주 요청도 기대에 못 미쳤다. 도시의 소음과 낯선 언어도 그를 지치게 했다. 아들 페테르는 1942년 뒤늦게 건너와 미 해군에 들어갔고, 맏아들 벨라는 헝가리에 남았다. (병) 1942년부터 원인 모를 열이 이어지고 몸무게가 줄었다. 병은 백혈병이었고, 미국 작곡가·작가·출판인 협회(ASCAP)가 치료비를 댔다. (위촉) 1943년 5월 지휘자 세르게이 쿠세비츠키가 병실로 찾아와 관현악곡을 위촉했다. 뒤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시게티와 지휘자 프리츠 라이너가 힘을 썼지만, 자선을 받지 않으려는 그의 성정을 알기에 이를 알리지 않았다. 그해 늦여름 요양지 사라낙 레이크에서 쓴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은 1944년 12월 보스턴에서 초연되어 큰 호평을 받았다. 같은 해 예후디 메뉴인의 위촉으로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도 썼다. (끝) 1945년 그는 디타의 생일 선물로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썼다. 고요한 느린 악장은 베토벤 후기 현악 4중주의 '감사의 노래'를 떠올리게 한다는 평이 많다. 9월 26일 뉴욕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 마지막 17마디의 관현악 편성이 남아 있었고 헝가리 출신의 벗 티보르 세를리가 마무리했다. 유해는 뉴욕 근교에 묻혔다가 1988년 부다페스트로 옮겨졌다. (가족) 디타는 1946년 헝가리로 돌아가 남편의 곡을 연주하다 1982년 세상을 떠났다. 맏아들 벨라(1910–1994)는 헝가리에서 기술자로 일하며 아버지의 기록을 지켰고, 페테르(1924–2020)는 미국에서 녹음 기사가 되어 아버지의 작품을 음반으로 내고 악보의 오류를 바로잡는 데 평생을 바쳤다.
병과 가난, 망명지의 고독 속에서 동료들이 마련해 준 위촉으로 쓴 곡이다. 바르토크는 이 곡의 흐름을 '무거운 시작과 죽음의 노래에서 삶의 긍정으로'라고 설명했다.
- 2악장 '짝들의 놀이'는 작은북으로 시작해 바순, 오보에, 클라리넷, 플루트, 약음기 단 트럼펫이 두 대씩 짝을 지어 나온다. 짝마다 두 악기 사이의 음 간격이 달라 색깔이 바뀌는 것을 들어 보자.
- 3악장 '엘레지아'는 바르토크 자신이 '음울한 죽음의 노래'라고 부른 악장으로, 물결 같은 하프와 목관의 '밤의 음악'이 흐른다.
- 4악장 '중단된 간주곡'에서는 비올라가 고향을 그리는 듯한 따뜻한 헝가리풍 선율을 부르다가, 갑자기 경박한 행진곡이 끼어든다. 트롬본이 비웃듯 음을 미끄러뜨리고 목관이 깔깔대는 소리가 이어진다.
- 5악장은 호른의 부름에 이어 현악기가 쉬지 않고 질주한다. 바르토크는 초연 뒤 끝부분을 더 길게 고쳐 썼고, 오늘날은 대개 이 긴 결말로 연주된다.
죽음을 앞둔 바르토크가 아내 디타의 생일 선물로 쓴 곡으로, 마지막 17마디를 남기고 붓을 놓았다. 앞선 두 협주곡의 격렬함 대신 맑고 따뜻한 빛이 감돈다.
- 1악장은 현악기가 바스락거리듯 깔리는 위로 피아노가 두 손 같은 음(옥타브)으로 헝가리 민요풍 선율을 노래하며 시작한다.
- 2악장은 '경건하게'라는 지시가 붙은 느린 악장이다. 현악기의 찬송가 같은 화음에 피아노가 조용히 답하는데, 베토벤 「현악 4중주 15번」의 '감사의 노래'와 자주 비교된다.
- 2악장 가운데 부분에는 새소리가 흩뿌려진다. 바르토크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요양하며 받아 적은 새소리를 옮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 3악장은 빠르고 활기찬 춤에 이어 주제를 여러 성부가 차례로 쫓아가는 푸가풍 부분이 나온다. 마지막 17마디는 친구 티보르 세를리가 관현악으로 완성했다.
덜 알려진 이야기
1940년 10월, 망명 직전 작성한 유언장에서 바르토크는 헝가리에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이름을 딴 거리나 광장이 남아 있는 한 자기 이름을 딴 거리·광장·공공건물을 만들지 말라고 적었다. 당시 부다페스트에는 실제로 두 독재자의 이름을 붙인 광장이 있었다. 전쟁이 끝나며 그 이름들이 사라져 조건은 효력을 잃었고, 오늘날 헝가리 곳곳에 그의 이름이 붙은 탓에 오히려 잊히기 쉬운 문장이 되었다. 슈테피 게예르는 바르토크에게서 받은 바이올린 협주곡 악보를 평생 공개하지 않았다. 바르토크는 첫 악장만 「두 개의 초상」의 첫 곡으로 다시 써서 발표했을 뿐이다. 협주곡 전체는 게예르가 1956년 세상을 떠나기 전 악보를 파울 자허에게 맡긴 뒤에야 1958년 바젤에서 초연되었다. 그래서 지금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은 오랫동안 번호 없이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만 불렸다.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4악장에 끼어드는 경박한 행진 선율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의 주제를 비꼰 것이라는 이야기가 지휘자 안탈 도라티와 아들 페테르의 증언으로 전한다. 1942년 미국에서 이 교향곡이 라디오로 거듭 방송되던 무렵이었다. 다만 그 선율은 레하르의 오페레타 「유쾌한 미망인」 속 노래와도 닮아 있어 풍자의 과녁이 무엇이었는지는 해석이 갈리고, 작곡가 자신의 해설에는 이런 언급이 없어 오랫동안 일화로만 떠돌았다.
용어 노트 📚🔎
5음 음계
(말뜻) 5음 음계(五音音階)는 다섯(五) 개의 음(音)으로 이루어진 계단(階)이라는 뜻이다. 서양 이름 펜타토닉의 펜타(penta)도 그리스어로 다섯이다. (음악에서) 한 옥타브 안에서 다섯 음만 쓰는 음계다. 피아노의 검은 건반만 차례로 눌러 보면 바로 이 소리가 난다. 서로 부딪치는 반음 간격이 없어서 소박하고 아득하게 들린다. 「아리랑」 같은 우리 민요도 대부분 5음 음계로 되어 있으니, 리코더로 민요를 불어 본 적이 있다면 이미 이 음계를 써 본 셈이다. 바르토크는 헝가리의 가장 오래된 민요에서 이 음계를 찾아내고, 그것이 드뷔시 같은 새 음악과도 통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트리톤
(말뜻) 트리톤(tritone)은 '온음 셋'이라는 뜻이다. 우리말로는 삼전음(三全音)이라고 하는데, 온음(全音) 세(三) 개만큼 벌어진 음정이라는 말이다. (음악에서) 도와 파♯처럼 온음 세 개 거리로 떨어진 두 음 사이를 가리킨다. 한 옥타브를 정확히 반으로 가르는 거리라, 시계 판으로 치면 12시와 6시처럼 정반대 자리에 있다. 함께 울리면 불안하고 어딘가로 풀려 나가고 싶은 느낌이 들어서, 옛날에는 '음악 속의 악마'라고 부르며 피하기도 했다. 바르토크는 「푸른 수염 영주의 성」의 어둠(파♯)과 빛(도), 「현, 타악기,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 첫 악장의 출발점(라)과 정점(미♭)을 이 거리에 두었다. (다른 데서는) 트리톤은 그리스 신화에서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 이름이고, 천문학에서는 해왕성의 가장 큰 위성 이름이다.
푸가
(말뜻) 푸가(fuga)는 라틴어와 이탈리아어로 '도망'이라는 뜻이다. 한 성부가 주제를 내놓으면 다른 성부가 뒤쫓아 가는 모양에서 나온 이름이다. (음악에서) 짧은 주제 하나를 여러 성부(목소리나 악기의 줄기)가 차례로 이어받으며 겹쳐 쌓아 가는 음악이다. 돌림노래에서 뒷사람이 같은 가락을 한 박 늦게 따라 부르는 것과 비슷한데, 푸가는 따라 부르는 쪽이 음높이를 옮겨 부른다. 바흐가 이 형식의 정점으로 꼽히며, 바르토크는 「현, 타악기,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 첫 악장을 푸가로 지었다. (다른 데서는) 정신의학에서 '해리성 둔주(fugue)'는 자기도 모르게 집을 떠나 떠돌며 그동안의 기억을 잃는 상태를 가리킨다.
현악 4중주
(말뜻) 4중주(四重奏)는 네(四) 사람이 겹쳐(重) 연주한다(奏)는 뜻이다. (음악에서) 바이올린 둘, 비올라 하나, 첼로 하나가 함께 연주하는 편성과, 그 편성을 위해 쓴 곡을 함께 가리킨다. 지휘자가 없어서 네 사람이 서로의 숨소리와 눈빛으로 박자와 셈여림을 맞춰야 한다. 모둠 과제에서 네 명이 각자 맡은 부분을 하면서도 서로의 말을 들어 가며 하나의 발표를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하이든이 틀을 세우고 베토벤이 깊이를 더한 장르로, 바르토크의 현악 4중주 6곡은 그 뒤를 잇는 20세기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첼레스타
(말뜻) 첼레스타(celesta)는 프랑스어 céleste, 곧 '하늘의'라는 말에서 왔다. 소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 맑다는 뜻으로 붙은 이름이다. (음악에서) 겉모습은 작은 피아노 같지만, 건반을 누르면 안에서 작은 망치가 쇠막대를 때려 종소리 같은 맑은 소리를 낸다. 1886년 파리에서 발명됐고,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중 '사탕 요정의 춤'으로 널리 알려졌다. 오르골이나 장난감 실로폰 소리를 떠올리면 가깝다. 바르토크는 이 악기를 곡 제목에까지 넣어, 현악기와 타악기 사이에서 차갑게 반짝이는 빛깔로 썼다.
협주곡
(말뜻) 협주곡(協奏曲)은 함께(協) 연주하는(奏) 곡이라는 뜻이다. 서양 이름 콘체르토의 라틴어 뿌리 concertare 에는 겨루다라는 뜻도 있어서, 독주자와 오케스트라가 겨루듯 주고받는 이 음악의 성격이 이름에 이미 들어 있다. (음악에서) 보통은 피아노나 바이올린 같은 독주 악기 하나와 오케스트라가 함께 연주하는 곡이다. 그런데 바르토크의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에는 따로 나서는 독주자가 없고, 오케스트라 안의 여러 악기가 번갈아 주인공이 되어 솜씨를 뽐낸다. 반 전체가 하는 장기자랑에서 한 사람씩, 또는 둘씩 짝지어 돌아가며 앞에 나와 실력을 보여 주는 것과 비슷하다.
밤의 음악
(음악에서) 바르토크 특유의 느리고 신비로운 음악을 가리키는 말이다. 1926년 피아노 모음곡 「야외에서」의 한 곡 제목 '밤의 음악'에서 이름이 왔다. 풀벌레 울음, 개구리 소리, 새소리처럼 밤 풍경 속 작은 소리를 악기로 흉내 내 여기저기 흩뿌리고, 그 사이로 쓸쓸한 선율이 천천히 흐른다. 캠핑장에서 불을 끄고 누웠을 때 사방에서 들려오던 풀벌레 소리와 그 속의 고요함을 떠올리면 가깝다. 「현, 타악기,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 3악장,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3악장, 「피아노 협주곡 3번」 2악장에서 이런 음악을 들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