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diohead
기타 록의 정점에 오른 순간, 스스로 그 자리를 부수고 다시 지은 밴드였다.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멤버와 동료들 ⏳🌊
- 멤버톰 요크
보컬이자 주 작곡가로, 어릴 적 눈 수술의 흔적과 불안을 노래에 담아 왔다.
- 멤버조니 그린우드
기타와 건반을 맡았고, 후일 폴 토마스 앤더슨 영화의 음악감독으로도 이름을 알렸다.
- 멤버콜린 그린우드
조니의 형이자 베이시스트로, 밴드에 먼저 합류해 동생을 끌어들였다.
- 멤버에드 오브라이언
기타를 맡은 옥스퍼드 토박이로, 밴드의 사운드에 두터운 결을 더했다.
- 멤버필 셀웨이
가장 나이 많은 드러머로, 원래 영어 교사로 훈련받은 이력이 있다.
- 프로듀서나이젤 갓리치
《더 벤즈》부터 사실상 여섯 번째 멤버로 불릴 만큼 깊이 관여했다.
I. 애빙던 스쿨의 소년들 · 1967–1991
1985년, 영국 잉글랜드 옥스퍼드셔의 사립 남학교 애빙던 스쿨에서 다섯 소년이 밴드를 결성했다. 학교 시간표에서 유일하게 음악실을 마음대로 쓸 수 있던 요일이 금요일이어서, 밴드는 스스로를 '온 어 프라이데이'라고 불렀다. (요크) 보컬과 기타를 맡은 톰 요크는 1968년 10월 잉글랜드 노샘프턴셔 웰링버러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왼쪽 눈꺼풀이 마비돼 있어 어린 시절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고, 그 눈은 평생 남들과 다르게 움직였다. 화학 설비를 파는 아버지를 따라 가족이 여러 번 이사한 끝에 옥스퍼드셔에 정착했고, 낯선 학교를 자주 옮겨 다니며 놀림을 받은 경험은 그를 말수 적고 방어적인 아이로 만들었다. (형제) 기타와 건반을 맡은 조니 그린우드는 1971년생, 베이스를 맡은 콜린 그린우드는 1969년생으로 친형제였다. 아버지는 영국 육군에서 폭발물 처리 전문가로 복무했고, 콜린이 먼저 밴드에 합류한 뒤 아직 십 대인 동생을 하모니카 주자로 끌어들인 것이 시작이었다. 기타를 맡은 에드 오브라이언은 1968년생으로 옥스퍼드 토박이였고, 드럼의 필 셀웨이는 1967년생으로 멤버 중 가장 나이가 많아 자연스레 맏형 노릇을 했다. (재회) 졸업 후 요크는 엑서터 대학에서 영문학과 순수미술을 공부하며 다른 밴드들을 전전했고, 나머지 멤버들도 각자 대학으로 흩어졌다. 방학마다 옥스퍼드로 돌아와 연습을 이어가던 그들은 1991년 모두 학업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뭉쳤다. 이름을 '온 어 프라이데이'에서 바꾸기로 하고, 좋아하던 밴드 토킹 헤즈의 노래 「Radio Head」에서 새 이름 라디오헤드를 따왔다.
II. 크립의 시대 · 1991–1994
(계약) 1991년 말, 라디오헤드는 EMI 산하 팔로폰 레이블과 여섯 장짜리 앨범 계약을 맺었다. 갓 대학을 나온 청년들에게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지만 선급금은 크지 않았고, 밴드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소박하게 생활했다. 1993년 발매된 데뷔 앨범 《파블로 허니》는 짧은 시간에 녹음됐고, 방향을 뚜렷이 잡지 못한 그런지와 브릿팝 사이의 앨범으로 평가받았다. (소외) 앨범에 실린 「크립」은 요크가 엑서터 시절 짝사랑하던 학생을 보며 느낀 초라함과 소외감을 적은 노래였다. 조니 그린우드는 이 곡이 지루하다고 여겨 후렴 직전 기타를 거칠게 내리찍어 노래를 망가뜨리려 했는데, 오히려 그 거친 화음이 곡을 완성시켰다. 자기혐오와 부적응을 담담히 고백하는 정서는 이후 수많은 청춘의 자화상으로 남았다. (역주행) 「크립」은 영국에서 처음엔 지나치게 우울하다는 이유로 BBC 라디오 1의 전파를 타지 못하고 조용히 묻혔다. 그런데 이스라엘 라디오에서 먼저 반응이 오고, 이어 미국 얼터너티브 라디오에서 크게 히트하자 영국 언론도 뒤늦게 곡을 재발견했다. 밴드는 갑작스러운 성공이 반가우면서도, 자신들이 크립 한 곡짜리 밴드로 낙인찍힐까 봐 불안해했다. (투어) 히트곡을 앞세운 미국 투어는 이름값에 비해 고단했다. 매일 밤 같은 노래로 환호받는 경험은 밴드에게 성취감과 동시에 소모감을 안겼고, 요크는 인터뷰에서 낯선 도시들을 전전하는 삶이 자신을 갉아먹는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이 시기의 피로와 방향 상실은 다음 앨범에서 훨씬 단단한 곡으로 벼려진다.
짝사랑 속의 초라함을 그린 노래가, 조니 그린우드의 즉흥적인 파괴 충동 덕에 밴드의 첫 얼굴이 됐다.
- 후렴 직전 조니 그린우드가 기타로 내리찍는 굵은 화음(파워 코드)은 원래 곡을 망치려는 의도에서 나왔지만, 오히려 노래에 폭발하는 순간을 만들어 줬다.
- 1절은 조용한 코드 진행으로 감정을 억누른 채 시작하다가, 후렴에서 갑자기 거칠게 왜곡된 기타 음색(디스토션)이 끼어드는 대비가 곡의 뼈대다.
- 톰 요크는 낮게 읊조리듯 부르다가 후렴 끝에서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갈라지듯 내지르는데, 이 감정의 낙차가 곡의 정서를 그대로 전달한다.
- 곡 후반부에서 같은 구절을 여러 번 되뇌는 부분은 목소리를 여러 겹 쌓아 녹음해(오버더빙) 두께를 더했다.
III. 벤즈 · 1994–1996
(위기) 《파블로 허니》의 흥행이 기대에 못 미치자 EMI 안팎에서는 라디오헤드가 반짝 성공에 그칠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밴드는 오히려 이를 자극제로 삼아 프로듀서 존 레키와 함께 두 번째 앨범 작업에 들어갔고, 녹음실 견습생으로 참여했던 엔지니어 나이젤 갓리치가 점차 소리를 다듬는 데 깊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성장) 1995년 나온 《더 벤즈》에서 밴드는 단순한 얼터너티브 록에서 벗어나 훨씬 섬세한 편곡을 선보였다. 「Fake Plastic Trees」는 런던 커네리 워프의 인공 조경에서 제목을 얻은 곡이었고, 「Street Spirit」는 죽음과 무력감을 다뤘다. 매일 반복되던 소비와 성공의 굴레 속에서 느낀 공허가 고스란히 곡에 배어났다. (스타이프) 이 무렵 라디오헤드는 R.E.M.의 투어에 오프닝으로 합류했다. 보컬 마이클 스타이프는 무명에 가까웠던 이 영국 밴드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넸고, 큰 무대에서 냉소나 허세 없이 노래하는 법을 곁에서 보여 준 선배였다. 요크는 훗날 이 시기의 우정이 자신에게 음악을 계속할 용기를 줬다고 회고했다. (소진) 성공은 찾아왔지만 대가도 있었다. 요크는 과도한 무대와 인터뷰로 지친 모습을 자주 보였고, 밴드 전체가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지쳐 갔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 피로는 다음 앨범에서 기술 문명에 대한 불안이라는 더 큰 주제로 승화된다.
런던 커네리 워프의 인공 조경에서 제목을 얻었고, 녹음을 마친 요크가 울음을 터뜨린 곡이다.
- 어쿠스틱 기타를 음 하나씩 끊어 치는 주법(아르페지오)으로 잔잔하게 시작해, 후반부로 갈수록 밴드 전체가 서서히 밀도를 높여가는 구조를 취한다.
- 톰 요크는 이 곡을 단 한 번의 테이크로 녹음했다고 전해지는데, 마지막 절에서 목소리가 살짝 갈라지는 순간까지 그대로 담겨 있다.
- 현악 편곡이 뒤에서 은은하게 깔리며 감정을 밀어 올리지만 전면에 나서지는 않는다 — 그 절제된 배치에 귀 기울여 볼 만하다.
- 라이브에서는 스튜디오 버전보다 기타 톤을 더 거칠게 바꿔 연주하는 경우가 많아, 원곡의 여림과는 다른 긴장감을 준다.
IV. OK 컴퓨터, 정점 · 1996–1998
(은둔) 1996년, 밴드는 바스 인근의 오래된 저택 세인트 캐서린스 코트를 빌려 녹음에 들어갔다. 호텔 방이나 스튜디오 부스가 아니라 낡은 계단과 벽난로가 있는 저택에서 지내며 녹음한 경험은 앨범 전체에 스며든 고립감과 무관하지 않았다. 나이젤 갓리치가 이때 처음으로 정식 프로듀서 역할을 맡았다. (불안) 1997년 발표된 《OK 컴퓨터》는 컴퓨터, 자동화, 비행기, 자본주의가 사람을 어떻게 소외시키는지를 그린 앨범이었다. 요크 자신이 비행공포증과 첨단 기술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안고 있었고, 그 개인적 두려움이 시대 전체의 초상으로 확장됐다. 「Fitter Happier」에서는 기계 음성이 자기계발서 같은 문장을 읊조리며 사람이 스스로를 상품처럼 관리하는 풍경을 냉소적으로 그렸다. (구성) 「Paranoid Android」는 6분이 넘는 곡으로, 서로 다른 세 곡 조각을 이어 붙인 파격적인 구성을 취했다. 라디오에 걸기엔 너무 길고 복잡했지만 오히려 그 낯섦이 밴드를 얼터너티브 록의 범주 밖으로 밀어냈다. 평단은 이 앨범을 즉시 시대의 걸작으로 꼽았고,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했다. (붕괴) 성공은 곧바로 감당하기 힘든 투어 일정으로 이어졌다. 요크는 매일 밤 낯선 얼굴들 앞에서 자신을 소진시키는 느낌에 시달렸고, 이 시기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Meeting People Is Easy」는 화려한 무대 뒤편의 탈진과 환멸을 가감 없이 보여 준다. 투어가 끝날 무렵 요크는 다시는 이런 방식으로 음악을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6분이 넘는 파격적 구성으로, 밴드를 얼터너티브 록의 경계 밖으로 밀어낸 곡이다.
- 서로 다른 세 곡을 이어붙인 구성으로, 절–후렴 없이 도입부와 격정적 구간, 잔잔한 마무리가 순서대로 이어진다.
- 중반부에서 조니 그린우드의 기타 솔로는 짧고 날카롭게 끊어 치며 갑자기 튀어나오듯 배치돼 있다.
- 격정적인 구간에서는 톰 요크가 평소보다 거칠고 격앙된 어조로 소리치듯 노래해, 앞뒤의 차분한 구간과 강한 대비를 이룬다.
- 제목과 달리 후반부는 성가대처럼 겹쳐 부르는 화음으로 잔잔하게 가라앉는데, 이 낙차가 곡 전체의 감정선을 결정짓는다.
V. 기타를 내려놓다 · 1999–2001
(거부) 투어 후유증에 시달리던 요크는 기타로 곡을 쓰는 일 자체에 넌더리를 냈다. 그는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기타 록 밴드의 보컬이라는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했고, 한동안 새 곡을 거의 쓰지 못하는 창작 슬럼프에 빠졌다. 밴드 해체설이 진지하게 논의될 만큼 위태로운 시기였다. (전자음향) 슬럼프를 뚫어 준 것은 워프 레코드 소속 에이펙스 트윈, 오토에크레 같은 전자음악가들과 앨리스 콜트레인, 찰스 밍거스 같은 재즈 음악가들이었다. 밴드는 기타 대신 신시사이저와 샘플러를 붙잡았고, 곡을 미리 완성해 오는 대신 스튜디오에서 즉흥적으로 소리를 쌓아 올리는 방식을 택했다. 이 시기 요크는 록 음악 자체에 실망했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밝혔다. (모험) 2000년 나온 《Kid A》는 뚜렷한 싱글도 익숙한 후렴구도 없는 앨범이었다. 「Everything in Its Right Place」는 요크의 목소리를 잘게 잘라 붙여 원래 가사를 알아듣기 힘들게 만들었고, 「Idioteque」는 옛 전자음악 샘플 위에 종말론적인 정서를 얹었다. 언론은 상업적 자살이라고 예견했지만 앨범은 평단과 대중 모두에게서 큰 반향을 얻었다. (쌍둥이) 이듬해 나온 《Amnesiac》은 같은 세션에서 나온 곡들을 모은 자매 앨범이었다. 두 앨범을 통해 밴드는 얼터너티브 록의 스타에서 장르를 넘나드는 실험적 밴드로 완전히 자리를 옮겼다. 팬들 사이의 반응은 갈렸지만, 이 도박은 이후 밴드가 어떤 음악을 하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근거가 됐다.
기타를 완전히 내려놓고 전자음향으로 넘어간 밴드의 선언 같은 곡이었다.
- 오래된 전자음악 샘플 위에 반복되는 짧은 리듬 조각(루프)이 곡 전체를 떠받치는데, 기타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 톰 요크는 노래하기보다 다급하게 읊조리는 화법으로 위기감을 전달하며, 후반부로 갈수록 그 조급함이 짙어지는 느낌을 준다.
- 곡의 리듬은 사람이 직접 친 드럼이 아니라 미리 만들어 둔 전자 신호(신시사이저와 샘플러)로 짜여 있어, 이전 앨범들과 완전히 다른 질감을 낸다.
- 긴장감을 유지한 채 갑자기 끊어지듯 끝나는 마무리는 라이브에서 종종 길게 늘여 연주된다.
VI. 인 레인보우즈와 독립 · 2002–2011
(분노) 2003년 《Hail to the Thief》는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과 논란 많았던 2000년 미국 대선을 겨냥한 제목을 달았다. 요크는 오랫동안 정치색을 드러내는 데 조심스러웠지만, 이 앨범에서는 전쟁과 감시 사회에 대한 분노를 이전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결별) 이 앨범을 끝으로 EMI와의 계약이 끝나자 밴드는 새 레이블과 계약하는 대신 독자 노선을 택했다. 오랜 세월 로열티 정산과 앨범 소유권을 둘러싸고 대형 레이블에 쌓인 불신이 이 결정의 바탕이었다. (실험) 2007년 《In Rainbows》는 자체 웹사이트를 통해 구매자가 원하는 만큼 값을 매겨 내려받는 방식으로 공개됐다. 음반 산업 전체가 이 실험을 주시했고, 결과적으로 밴드는 기존 유통망 없이도 상당한 수익을 올렸다. 이후 정식 음반사 XL레코딩스를 통한 실물 발매도 이어졌다. (리듬) 2011년 《The King of Limbs》는 이전보다 짧고 리듬 중심적인 곡들로 채워졌다. 밴드는 이 무렵 각자 다른 지역에 흩어져 살면서도 온라인으로 소재를 주고받으며 곡을 만드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었다. 스무 해 넘게 이어진 협업은 이제 물리적으로 한자리에 모이지 않아도 굴러갈 만큼 단단했다.
레이블 없이 세상에 내놓은 앨범 안에서, 밴드 스스로 가장 아꼈다는 곡이다.
- 곡 초반 하이햇(작은 심벌)을 가볍게 두드리는 리듬 위로 톰 요크가 가성(팔세토)으로 부드럽게 노래를 시작한다.
- 중반부에서 현악 편곡이 서서히 밀려들어오며 곡의 온도를 높이는데, 기타보다 오히려 이 현악 소리가 곡의 중심 색깔을 결정한다.
- 여러 목소리를 겹쳐 쌓은 화음(코러스)이 후반부를 가득 채우며,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노래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 라이브에서는 스튜디오 버전보다 리듬 섹션을 한층 두껍게 쌓아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VII. 상실과 현재 · 2012–2026
(참사) 2012년 6월, 토론토 공연을 앞두고 무대 지붕 구조물이 무너져 드럼 테크니션 스콧 존슨이 목숨을 잃고 다른 스태프들이 다쳤다. 밴드는 즉시 공연을 취소하고 오랫동안 이 사고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이후 몇 해 동안 관련 소송과 조사가 이어졌다. (이별) 2015년 8월, 요크와 판화가 레이철 오언은 23년을 함께한 끝에 결별을 발표했다. 이 이별은 곧바로 다음 앨범에 짙게 배어들었다. (애가) 2016년 《A Moon Shaped Pool》에 실린 「Daydreaming」과 「True Love Waits」는 각각 이별과 상실을 다뤘다. 「True Love Waits」는 1995년부터 라이브에서만 연주되던 미완성곡으로, 이십 년 만에 정식으로 녹음됐고, 그해 12월 오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를 향한 애도로 다시 읽혔다. 조니 그린우드는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음악가로도 명성을 쌓아 가고 있었다. (현재) 2019년 밴드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이후 정규 앨범 활동은 뜸해졌지만 해체를 선언한 적은 없으며, 요크와 조니 그린우드는 드러머 톰 스키너와 함께 곁가지 프로젝트 더 스마일을 2021년 공개해 새 앨범들을 냈다. 라디오헤드라는 이름은 잠정적으로 멈춰 있을 뿐, 완전히 끝난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이십여 년의 관계가 끝난 자리에서 나온, 상실을 에둘러 말하는 노래였다.
- 피아노 화음이 잔잔히 반복되는 위로 현악과 전자음이 서서히 겹쳐지며, 뚜렷한 후렴 없이 곡 전체가 하나의 흐름처럼 이어진다.
- 톰 요크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하게 시작해 점점 여려지는데, 상실을 직접 말하기보다 에둘러 암시하는 어조에 가깝다.
- 곡 끝부분에는 요크의 목소리를 거꾸로 재생한 짧은 구간이 숨어 있어, 자세히 들으면 사람의 말소리가 뒤집힌 듯한 낯선 질감이 느껴진다.
- 뮤직비디오와 함께 만들어진 곡이라, 도입부의 정적인 분위기가 영상 속 느린 이동 장면과 맞물려 설계됐다고 전해진다.
덜 알려진 이야기
필 셀웨이는 대학에서 영어와 역사를 공부했고, 밴드가 음반 계약을 맺기 전까지 영어 교사와 교정 편집자, 순회 뮤지컬의 반주 밴드 드러머로 일했다. 이런 이력은 그가 무대 위에서 유독 차분하고 절제된 인상을 주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다. 톰 요크는 밴드가 성공하기 전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고 알려져 있다. 환자들을 가까이서 지켜본 이 경험이 이후 그의 노래에 자주 등장하는 불안과 정신적 위기의 이미지에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전기 작가들은 추측한다. 「Fitter Happier」에서 흘러나오는 기계 음성은 특별히 제작된 목소리가 아니라, 당시 매킨토시 컴퓨터에 기본으로 내장돼 있던 음성 합성 프로그램의 목소리를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었다. 앨범에서 가장 섬뜩하다고 꼽히는 순간이 사실은 평범한 사무용 소프트웨어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레이철 오언은 이십 년 넘게 요크의 동반자였지만 공개 석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많은 팬들은 그가 2016년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통해서야 비로소 그의 존재를 알게 됐는데, 이는 밴드 전체가 사생활 공개를 극도로 꺼려 온 태도와 맞닿아 있다.
용어 노트 📚🔎
디스토션
(록에서) 기타나 앰프에 일부러 강한 신호를 넣어 소리를 찢어지게 만드는 음색이다. 원래는 고장 난 소리처럼 들렸지만 록 음악가들은 이 거친 질감을 표현 수단으로 받아들였다. 목이 다 쉴 만큼 크게 소리 질러 노래하는 것과 비슷한 거친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다른 데서는) 사진이나 렌즈에서 상이 일그러지는 현상도 디스토션이라고 부른다.
팔세토
(말뜻) 이탈리아어로 '가짜의'라는 뜻인 falso에서 왔다. 남성이 원래 음역보다 훨씬 높은 소리를 낼 때 가슴이 아니라 머리 쪽 공간을 울려 내는 창법이라, 진짜 목소리가 아니라는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록에서) 톰 요크처럼 높은 음을 가늘고 여린 소리로 뽑아내는 창법을 가리킨다. 합창 시간에 평소보다 훨씬 높은 음을 낼 때 목이 아니라 머리 쪽에서 울리는 느낌이 나는 것과 비슷하다.
변박
(말뜻) 한자로 변할 변(變), 박자 박(拍) — 박자가 도중에 바뀐다는 뜻이다. (록에서) 노래 한 곡 안에서 한 마디를 이루는 박자 단위가 바뀌거나, 4박자처럼 익숙한 단위 대신 5박·7박 같은 낯선 단위를 쓰는 것을 말한다. 발맞춰 걷다가 갑자기 세 걸음마다 다르게 스텝을 바꿔야 하는 춤을 배우는 것과 비슷해서,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어색하게 느껴진다.
신시사이저
(말뜻) 영어로 합성하다라는 뜻의 synthesize에서 왔다 — 전기 신호를 합쳐서 소리를 만들어 낸다는 뜻이다. (록에서) 건반처럼 생겼지만 실제 악기 소리를 녹음한 게 아니라 전자 회로나 컴퓨터로 파형을 직접 만들어 내는 악기다. 물감을 직접 칠하는 대신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색과 질감을 처음부터 만들어 그리는 것에 가깝다.
루프
(말뜻) 영어로 고리를 뜻한다. (록에서) 짧은 연주나 소리 조각을 녹음해 똑같이 반복시키는 기법이다. 돌림노래에서 같은 가락을 계속 되풀이해 부르는 것처럼, 리듬이나 소리 한 토막을 기계로 끊임없이 되풀이해 곡의 바탕을 깐다. (다른 데서는) 프로그래밍에서도 루프는 같은 명령을 반복해서 실행하는 구조를 가리킨다.
오버더빙
(록에서) 이미 녹음된 연주 위에 새로운 연주나 목소리를 겹쳐 녹음하는 방법이다. 처음 부른 노래를 지우지 않고 그 위에 화음을 하나씩 덧입혀 나가는 것으로, 그림을 그린 뒤 마르기를 기다려 다른 색을 덧칠하는 것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