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il Young
'「하트 오브 골드」는 나를 길 한가운데에 데려다 놓았다. 그 길은 곧 지루해졌고, 그래서 나는 도랑 쪽으로 향했다.' — 1977년 선집 《디케이드》 라이너 노트에서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멤버와 동료들 ⏳🌊
- 가족스콧 영
스포츠 기자이자 소설가였던 아버지로, 2005년 그의 죽음은 《프레리 윈드》의 정서에 깊이 스며들었다.
- 우정스티븐 스틸스
버펄로 스프링필드와 CSNY에서 반세기 넘게 협력과 경쟁을 오가며 함께한 동료다.
- 멤버대니 휘튼
크레이지 호스 초기의 기타리스트이자 화음 보컬로, 1972년 그의 죽음은 도랑 3부작의 출발점이 되었다.
- 프로듀서데이비드 브리그스
1968년부터 199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꾸밈없는 실황 녹음을 고집하도록 그를 북돋운 프로듀서다.
- 가족페기 영
1978년 결혼해 브리지 스쿨을 함께 세웠고 「하베스트 문」의 영감이 된 아내로, 2019년 세상을 떠났다.
- 우정에디 베더
펄 잼의 보컬로, 1995년 명예의 전당에서 그를 소개했고 《미러 볼》을 함께 만들었다.
I. 오멤의 소년 · 1945–1965
(출생) 1945년 11월,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스콧 영은 스포츠 기자이자 소설가였고, 어머니 에드나 래글런드는 래시라는 별명으로 불린 활달하고 직설적인 사람이었다. 위로 형 밥이 있었다. 가족은 곧 토론토 북동쪽의 작은 마을 오멤으로 옮겨 갔고, 그는 그곳의 강과 들판 사이에서 유년을 보냈다. 훗날 여러 노래에 나오는 북쪽 시골의 풍경은 이때의 기억에서 왔다. (소아마비) 1951년 온타리오를 휩쓴 소아마비 유행 때 그도 병에 걸렸다. 목숨은 건졌지만 몸 한쪽에 약한 흔적이 남았다고 그는 자서전에서 밝혔다. 회복을 돕기 위해 가족은 한동안 미국 플로리다에서 겨울을 나기도 했다. (이혼) 1960년 무렵 부모가 갈라섰다. 그는 어머니를 따라 매니토바주 위니펙으로 갔고, 어머니는 학업보다 기타에 매달리는 아들을 끝까지 편들었다. 우쿨렐레로 시작한 그는 곧 전기 기타로 옮겨 갔다. (스콰이어스) 1963년 위니펙에서 결성한 연주곡 밴드 더 스콰이어스는 영국 섀도스풍의 기타 연주로 지역에서 이름을 얻었다. 1965년 온타리오주 포트윌리엄(오늘날 선더베이) 공연 중 그는 미국에서 온 스티븐 스틸스를 만났다. 이 무렵 포크로 기울어 토론토 요크빌의 커피하우스 무대에 섰고, 캐나다 포크 무대에서 조니 미첼과도 알게 되었다. (마이나 버즈) 이 무렵 그는 훗날 펑크(funk) 스타가 되는 릭 제임스가 노래하던 토론토 밴드 마이나 버즈에 기타리스트로 들어가 모타운과 계약까지 맺었다. 그러나 앨범은 끝내 나오지 못했고, 스무 살의 그는 캐나다 바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II. 선셋 대로의 영구차 · 1966–1969
(영구차) 1966년 초, 그는 마이나 버즈의 베이시스트 브루스 파머와 함께 1953년식 폰티액 영구차를 몰고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향했다. 취업 비자도 없었다. 선셋 대로에서 길이 막혀 있을 때, 반대편 차에 있던 스틸스와 리치 퓨레이가 캐나다 번호판의 영구차를 알아보고 차를 돌렸다는 이야기는 당사자들이 여러 차례 증언한 장면이다. (버펄로) 그렇게 결성된 버펄로 스프링필드에서 스틸스와 영은 기타와 작곡을 나눠 맡았고, 퓨레이가 노래, 파머가 베이스, 듀이 마틴이 드럼을 맡았다. 밴드의 대표 히트곡 「포 왓 잇츠 워스」는 스틸스의 곡이었지만, 영은 거친 「미스터 솔」과 오케스트라를 겹겹이 쌓은 「익스펙팅 투 플라이」로 남다른 색을 보였다. 영은 탈퇴와 복귀를 거듭했고 밴드는 1968년 흩어졌다. (독립) 1968년 그는 매니저 엘리엇 로버츠와 손잡고 리프라이즈와 솔로 계약을 맺었다. 로버츠는 201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반세기 동안 그의 곁을 지켰다. 그러나 첫 솔로 앨범은 공들인 덧녹음에 생기가 묻혀 그 자신도 만족하지 못했다. (크레이지 호스) 돌파구는 로스앤젤레스의 밴드 더 로케츠에서 왔다. 그는 기타리스트 대니 휘튼, 베이시스트 빌리 탈봇, 드러머 랄프 몰리나를 크레이지 호스라는 이름으로 데려왔고, 프로듀서 데이비드 브리그스와 함께 거의 실황처럼 녹음했다. 1969년 《에브리바디 노즈 디스 이즈 노웨어》에 실린 대표곡 셋은 고열로 앓아누운 날 하루에 썼다고 그는 회고했다. 10분 가까이 이어지는 즉흥 합주(잼)는 이후 그의 전기 기타 음악의 원형이 되었다. (CSNY) 같은 해 그는 크로스비, 스틸스 & 내시에 합류해 우드스톡 무대에 섰다. 이때부터 그는 평생 두 집 살림을 했다 — 다듬어진 화음의 그룹과, 거칠게 밀어붙이는 크레이지 호스.
크레이지 호스와 처음 만든 앨범으로, 첫 솔로작의 매끈함을 버리고 실황 같은 거친 합주를 택한 결단이 담겼다. 이후 반세기 동안 이어질 그의 전기 기타 음악이 여기서 시작됐다.
- 이 카드의 영상인 대표곡 「시나몬 걸」의 첫 리프는 가장 굵은 줄과 가장 가는 줄을 모두 D음으로 낮춘 조율(더블 드롭 D 튜닝)에서 나온다. 낮은 줄들이 한꺼번에 울려 짧은 리프도 묵직하게 들린다.
- 「시나몬 걸」 간주의 기타 독주는 거의 한 음만 되풀이해 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빠른 손놀림 대신 리듬과 음색으로 밀어붙이는 그의 방식이 이미 완성돼 있으니, 음의 개수가 아니라 톤의 거칠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 이 시기부터 그는 검게 칠한 1953년식 깁슨 레스 폴, 별명 올드 블랙을 작은 펜더 디럭스 앰프에 물려 썼다. 작은 앰프를 크게 틀어 얻은 걸걸한 소리가 이 앨범 기타 톤의 바탕이다.
- 「다운 바이 더 리버」와 「카우걸 인 더 샌드」는 9~10분에 이르는 긴 즉흥 합주(잼)다. 탈봇의 베이스와 몰리나의 드럼이 단순한 박자를 고집스럽게 지키는 동안, 두 대의 기타가 그 위에서 엉키며 길을 찾아간다.
- 대니 휘튼의 높은 화음 보컬은 「시나몬 걸」 후렴에서 영의 목소리 위에 겹쳐진다. 영은 훗날 휘튼을 가장 잘 맞았던 기타 짝이자 화음 짝으로 회고했다.
III. 황금 열풍 이후 · 1970–1972
(오하이오) 1970년 5월, 오하이오주 켄트 주립대에서 주 방위군의 발포로 학생 네 명이 숨졌다. 잡지에 실린 사진을 본 영은 곧바로 「오하이오」를 썼고, CSNY는 며칠 만에 녹음해 몇 주 안에 싱글로 냈다. 대통령의 이름을 직접 겨눈 이 곡은 일부 방송국에서 외면당했지만 그 시대를 기록한 저항가로 남았다. 같은 해 그룹의 《데자뷰》도 크게 성공했다. (골드 러시) 1970년 9월의 《애프터 더 골드 러시》는 상당 부분 토팡가 캐니언 자택 지하에서 녹음됐다. 십대의 닐스 로프그렌이 피아노를 맡았다. 높고 떨리는 목소리와 소박한 피아노, 묵시록적 풍경을 그린 표제곡은 그를 시대를 대표하는 싱어송라이터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목장) 1970년 그는 캘리포니아주 라혼다 산중의 목장을 사들여 브로큰 애로라 이름 붙였다. 목장 관리인이던 노인과 나눈 대화에서 「올드 맨」이 나왔다고 그는 설명했다. 배우 캐리 스노드그레스와 이곳에서 살았고, 1972년 아들이 태어났다. (허리) 1971년 목장 일을 하다 허리를 다쳐 오래 서 있을 수 없게 되자, 그는 어쿠스틱 기타를 들고 앉아서 노래했다. 이 제약이 오히려 새 소리를 낳았다. 내슈빌의 세션 연주자들, 그리고 벤 키스의 페달 스틸 기타와 함께 녹음한 《하베스트》는 1972년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 되었고, 「하트 오브 골드」는 그의 처음이자 유일한 미국 1위 싱글이 되었다. (불편) 그러나 그는 이 성공을 편안히 여기지 않았다. 대중이 기대하는 부드러운 포크 가수의 얼굴은 그가 원하는 전부가 아니었고, 곧 닥친 상실이 그를 정반대 방향으로 밀어냈다.
켄트 주립대 총격 사건 직후 쓰여 몇 주 만에 세상에 나온 곡으로, 그가 시대의 사건에 즉각 응답하는 작곡가였음을 보여 준다.
- 도입부는 영의 일렉트릭 기타가 홀로 어둡게 깔아 가는 짧은 음형으로 시작한다. 장식 없이 끊어 치는 이 소리가 곡 전체의 긴장된 분위기를 정한다.
- 1970년 5월 로스앤젤레스의 스튜디오에서 네 사람이 밴드와 함께 거의 실황처럼 몇 번 만에 녹음했다. 매끈함보다 그날의 날 선 감정이 그대로 남아 있다.
- 드럼은 행진처럼 같은 박자를 고집스럽게 되풀이한다. 화려한 변화 없이 반복되는 리듬이 곡을 장송 행렬처럼 들리게 한다.
- 곡 끝부분, 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대목(페이드아웃)에서 데이비드 크로스비가 울부짖듯 내지르는 즉흥 목소리가 들린다. 녹음을 마친 뒤 그가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화법은 개인의 슬픔보다 공동체의 분노에 가깝다. 듣는 사람 모두를 향해 이 일을 외면하지 말라고 다그치는 어조다.
허리를 다쳐 앉아서 연주하던 시기, 내슈빌에서 녹음한 소박한 소리가 그에게 유일한 미국 1위를 안겼다. 그리고 바로 이 성공이 그를 도랑으로 향하게 했다.
- 첫머리는 어쿠스틱 기타와, 목에 거는 거치대(하모니카 랙)로 부는 하모니카다. 한 사람이 기타와 하모니카를 동시에 연주하는 포크 가수의 전통적인 모습이 소리에 그대로 담겼다.
- 드러머 케니 버트리와 베이시스트 팀 드러먼드는 일부러 힘을 뺀다. 내슈빌 세션 연주자다운 절제가 노래를 앞에 세운다.
- 벤 키스의 페달 스틸 기타가 음과 음 사이를 미끄러지듯 이으며 컨트리의 정서를 더한다. 후렴 사이사이의 짧은 응답 소리를 따라가 보자.
- 후렴의 화음은 같은 시기 내슈빌에 머물던 린다 론스태트와 제임스 테일러가 불렀다. 영의 높은 목소리 뒤에 두 사람의 목소리가 얇게 겹친다.
- 형식은 절과 후렴이 단순히 오가는 3분 남짓의 노래다. 마지막을 하모니카로 닫으며,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화자의 고백을 꾸밈없이 마무리한다.
IV. 도랑 속으로 · 1972–1979
(상실) 크레이지 호스의 대니 휘튼은 헤로인 중독으로 연주가 무너져 있었다. 1972년 11월 투어 리허설에서 함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영은 그에게 비행기표와 여비를 쥐여 로스앤젤레스로 돌려보냈고, 휘튼은 그날 밤 약물과 술의 과용으로 숨졌다. 영은 오랫동안 그 일에 대한 죄책감을 털어놓았다. 이듬해 6월에는 로드 크루였던 브루스 베리도 약물 과용으로 세상을 떠났다. (3부작) 이 상실 위에서 훗날 도랑 3부작이라 불리는 앨범들이 나왔다. 날카롭고 지친 실황 앨범 《타임 페이즈 어웨이》(1973), 체념과 냉소가 서린 《온 더 비치》(1974), 그리고 두 친구를 위한 밤샘 추도식 같은 《투나이츠 더 나이트》(1975)다. 당시 판매와 평단은 차가웠지만, 지금은 그의 가장 정직한 작품들로 꼽힌다. (재건) 1975년 그는 리듬 기타리스트 프랭크 삼페드로를 맞아 크레이지 호스를 다시 세웠다. 《주마》의 「코르테스 더 킬러」에서 느리고 긴 기타 독주가 밴드의 새 시대를 열었다. 1978년에는 페기 모턴과 결혼했다. (펑크) 1970년대 말 펑크 세대가 선배들을 공룡이라 부를 때 그는 오히려 그 에너지를 반겼다. 1979년 《러스트 네버 슬립스》의 마지막 곡 「헤이 헤이, 마이 마이」에서 섹스 피스톨즈의 조니 로튼을 이름으로 불러냈고, 앨범 제목은 디보 멤버들이 건넨 광고 문구에서 따왔다. 한 면은 어쿠스틱, 한 면은 굉음으로 짠 이 앨범과 실황 《라이브 러스트》로 그는 세대의 단절을 건너뛴 드문 선배가 되었다. (교훈) 그가 휘튼과 베리의 죽음에서 얻은 것은 꾸밈에 대한 불신이었다. 이후 그는 완벽한 소리보다 그 순간의 진심이 담긴 녹음을 택하는 일이 잦았다.
대니 휘튼과 브루스 베리를 잃은 뒤 1973년에 녹음했으나 너무 어둡다는 이유로 2년간 묵혔던 앨범이다. 도랑 3부작의 심장이라 불린다.
- 이 카드의 영상인 대표곡 표제곡 「투나이츠 더 나이트」는 앨범의 처음과 끝에 두 번 실렸다. 같은 노래가 액자처럼 앨범을 감싸 하룻밤의 추도식 같은 구조를 만든다.
- 1973년 여름 로스앤젤레스의 리허설 공간에서 밤마다 술을 마시며 실황으로 녹음했다고 영과 브리그스가 회고했다. 음정이 흔들리고 박자가 늘어지는 대목도 지우지 않고 그대로 남겼다.
- 표제곡에서는 영 자신의 피아노가 낮은 음을 무겁게 내리치고, 벤 키스의 페달 스틸 기타가 그 위에서 흐느끼듯 미끄러진다.
- 「컴 온 베이비 렛츠 고 다운타운」은 1970년 뉴욕 필모어 이스트 실황으로, 대니 휘튼이 리드 보컬을 맡았다. 세상을 떠난 친구의 목소리를 앨범 한가운데 놓은 셈이다.
- 영의 보컬은 일부러 갈라지고 취한 듯 흐트러져 있다. 노래를 잘 부르는 것보다 그날 밤의 상태를 정직하게 남기는 쪽을 택한 화법이다.
펑크의 등장 앞에서 그가 내놓은 응답으로, 조니 로튼의 이름을 불러내며 록이 살아남는 법을 물었다. 15년 뒤 이 곡은 커트 코베인의 마지막 글과 얽히게 된다.
- 《러스트 네버 슬립스》는 어쿠스틱판 「마이 마이, 헤이 헤이 (아웃 오브 더 블루)」로 열리고 이 일렉트릭판으로 닫힌다. 같은 노래를 속삭임과 굉음으로 나란히 들어 보면 앨범의 설계가 보인다.
- 첫 화음부터 올드 블랙 레스 폴의 소리가 찢어질 듯 일그러져(디스토션) 터져 나온다. 화음을 길게 울리게 둔 채 다음 화음으로 넘어가 소리가 거대한 벽처럼 쌓인다.
- 크레이지 호스의 리듬은 느리고 무겁다. 탈봇과 몰리나는 단순한 박자를 한 걸음씩 꾹꾹 밟아, 기타의 굉음이 마음껏 퍼질 바닥을 깔아 준다.
- 기본 연주는 1978년 투어 실황에서 가져와 관객 소리를 지우고 다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튜디오 녹음과 실황의 경계에 선 소리다.
- 1978년 투어에서는 사람 키보다 큰 가짜 앰프를 무대에 세우고 이 곡을 연주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그의 공연에서 가장 자주 불린 곡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V. 장르의 방랑 · 1980–1989
(가족) 1980년대 초 그는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늘리려 활동 방식을 바꾼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트랜스) 1982년 그는 데이비드 게펜의 새 레이블로 옮겼다. 첫 작품 《트랜스》는 목소리를 기계음으로 바꾸는 장치(보코더)와 신시사이저로 채워져 팬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이어 1950년대풍 로커빌리 앨범 《에브리바디스 로킹》(1983), 정통 컨트리 앨범 《올드 웨이스》(1985)가 나왔다. (계약) 1983년 게펜 레코드는 그가 자신다운 음악이 아닌 음반을 낸다며 소송을 걸었다. 음악가가 자기 음악답지 않다는 이유로 소송을 당한 드문 사례였다. 소송은 결국 거둬졌고 게펜은 훗날 그에게 사과했다. (연대) 1985년 그는 윌리 넬슨, 존 멜렌캠프와 함께 가족농을 돕는 공연 팜 에이드를 시작했다. 1986년에는 페기와 함께 언어·신체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위한 브리지 스쿨을 세웠다. 해마다 열린 후원 공연에는 첫해의 브루스 스프링스틴을 비롯해 훗날 펄 잼까지 많은 음악가가 어쿠스틱 무대로 참여했다. (복귀) 1988년 리프라이즈로 돌아온 그는 1989년 《프리덤》을 냈다. 「로킹 인 더 프리 월드」는 노숙과 마약이 뒤엉킨 미국 도시의 풍경을 후렴의 들뜬 함성과 맞세운 반어의 노래였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그해, 이 곡은 제목만 따로 떨어져 해방의 찬가처럼 불리기도 했다. 장르를 떠돌던 10년의 끝에서 그는 다시 자기 목소리를 찾았다.
장르를 떠돈 1980년대 끝에 다시 찾은 목소리로, 들뜬 후렴과 어두운 절을 맞세운 반어의 노래다. 훗날 펄 잼과 함께 무대에서 자주 연주했다.
- 《프리덤》은 이 곡의 어쿠스틱 실황판으로 열리고 일렉트릭판으로 닫힌다. 10년 전 《러스트 네버 슬립스》의 짝 구조를 되풀이한 설계다.
- 리프는 세 개의 화음만으로 되어 있다. 누구나 따라 칠 수 있을 만큼 단순한 화음 진행이 오히려 곡을 함성처럼 힘 있게 만든다.
- 1989년 미국 텔레비전 프로그램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무대가 유명하다. 베이시스트 찰리 드레이턴, 드러머 스티브 조던과 함께 몸을 던지듯 연주해 그의 재기를 알린 장면으로 꼽힌다.
- 화법은 반어다. 절에서는 노숙과 마약이 뒤엉킨 도시의 풍경을 담담하게 보고하고, 후렴에서는 그와 어울리지 않게 들뜬 함성을 터뜨린다. 그 어긋남이 곡의 요점이다.
VI. 그런지의 대부 · 1990–2004
(굉음) 1990년 크레이지 호스와 만든 《래기드 글로리》는 일부러 찢어지게 일그러뜨린 기타 음색(디스토션)과, 앰프 소리가 기타로 되먹임되어 울부짖는 소리(피드백)로 가득했다. 이듬해 투어에 그는 소닉 유스를 오프닝으로 세웠고, 그 실황은 《웰드》와 피드백만 엮은 《아크》로 남았다. 시애틀의 젊은 밴드들이 그를 공공연히 존경했고, 언론은 그를 거칠고 지저분한 기타 록(그런지)의 대부라 불렀다. (하베스트 문) 굉음의 투어 뒤 그는 청각 과민 증상을 겪었다고 밝히며 조용한 음악으로 돌아섰다. 1992년 《하베스트 문》에서는 20년 전 《하베스트》의 연주자들을 다시 불러 모았고, 오래 함께한 아내 페기에게 바치는 노래를 표제곡으로 삼았다. (코베인) 1994년 4월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 세상을 떠나며 남긴 글에는 「헤이 헤이, 마이 마이」의 한 구절이 들어 있었다. 영은 그 전부터 코베인에게 연락하려 애썼다고 밝혔고, 그해 앨범 《슬립스 위드 에인절스》의 표제곡은 이 죽음에서 나왔다. 그는 이 일에 대해 오랫동안 말을 아꼈다. (펄 잼) 1995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 그를 소개한 이는 펄 잼의 에디 베더였다. 같은 해 그는 펄 잼을 백밴드 삼아 《미러 볼》을 녹음했고 함께 유럽 무대를 돌았다. 세대를 건넌 이 협업은 그가 젊은 음악가들에게 단지 옛 영웅이 아니라 현재의 동료였음을 보여 주었다. (실험) 짐 자머시의 영화 「데드 맨」(1995)의 음악은 화면을 보며 전기 기타 하나로 즉흥 연주해 완성했다. 1999년에는 CSNY 재결합 앨범 《루킹 포워드》를 내고 이듬해 재결합 투어에 나섰으며, 2003년에는 가상의 작은 마을 사람들을 그린 록 오페라 《그린데일》을 내놓았다.
굉음의 투어 뒤 조용한 음악으로 돌아선 그가 오래 함께한 아내 페기에게 바친 노래다. 20년 전 《하베스트》의 연주자들이 다시 모였다.
- 드럼은 막대 대신 솔처럼 생긴 채(브러시)로 쓸듯이 연주된다. 여기에 실제로 빗자루로 바닥을 쓰는 소리를 타악기로 녹음해 넣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어쿠스틱 기타의 짧은 선율 패턴이 곡 내내 반복되며 노래의 주제처럼 돌아온다. 도입부에서 그 패턴을 기억해 두면 곡의 흐름을 따라가기 쉽다.
- 벤 키스의 페달 스틸 기타가 음 사이를 부드럽게 미끄러지며 달빛 같은 배경을 깐다. 20년 전 「하트 오브 골드」의 소리와 비교해 들어 보자.
- 화법은 오래 함께한 사람에게 다시 춤을 청하는 다정한 속삭임이다. 젊은 날의 고백보다 세월을 견딘 애정의 온도가 느껴진다.
VII. 기록하는 사람 · 2005–2026
(동맥류) 2005년 봄 그는 뇌동맥류 진단을 받았다고 스스로 공개했다. 수술을 앞두고 내슈빌에서 《프레리 윈드》를 녹음했고, 그해 6월 아버지 스콧 영이 세상을 떠났다. 앨범은 아버지와 고향 캐나다, 흘러가는 시간을 돌아보는 노래로 채워졌다. 조너선 데미 감독은 내슈빌 라이먼 강당의 공연을 영화 「하트 오브 골드」로 담았다. (반전) 2006년에는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리빙 위드 워》를 몇 주 만에 녹음해 내놓았다. 시사에 즉각 응답하던 「오하이오」의 방식이 36년 만에 되살아난 셈이었다. (아카이브) 2009년부터 그는 미발표 녹음과 실황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아카이브 시리즈를 펴냈고, 수십 년간 묵혀 둔 앨범들을 하나씩 세상에 내놓았다. 2012년에는 자서전 『웨이징 헤비 피스』를 냈다. 압축 음원이 소리를 망친다는 오랜 불만은 고음질 휴대용 플레이어 포노의 개발로 이어졌다. (가족) 2014년 페기와의 결혼 생활이 끝났고, 2018년 배우 대릴 해나와 결혼했다. 페기는 2019년 세상을 떠났다. (원칙) 2020년 그는 미국 시민권을 얻어 캐나다와 이중 국적이 되었다. 2022년에는 코로나19 백신에 관한 잘못된 정보가 퍼지는 데 항의해 스포티파이에서 자신의 음악을 내렸다가 2024년 되돌렸다. 음질이든 정치든, 옳다고 믿는 쪽에 서는 고집은 젊은 날과 다르지 않았다. (현재) 2018년 삼페드로의 자리를 닐스 로프그렌이 이어받은 크레이지 호스와 녹음을 계속했고, 2025년에는 새 밴드 크롬 하츠와 《토킹 투 더 트리스》를 냈다. 여든의 나이에도 그는 여전히 다음 녹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덜 알려진 이야기
그는 한때 모타운 소속 음악가였다. 1966년 마이나 버즈는 모타운에서 녹음까지 마쳤지만, 릭 제임스가 미국 해군에서 무단 이탈한 사실이 드러나 체포되면서 발매가 무산됐다. 흑인 음악의 본산과 훗날의 포크 록 거장이 잠시 한 지붕 아래 있었다는 이 대목은, 녹음이 서랍에 묻혀 있다가 수십 년 뒤에야 일부가 공개되면서 비로소 널리 확인되었다. 1975년 그는 연애와 이별을 담은 어쿠스틱 앨범 《홈그로운》을 완성해 두고 있었다. 그러나 친구들과 함께 듣던 자리에서 묵혀 두었던 《투나이츠 더 나이트》를 이어 틀었고, 결국 더 어두운 쪽을 발매하기로 했다고 회고했다. 《홈그로운》은 너무 개인적이라는 이유로 45년 동안 창고에 머물다 2020년에야 나왔다. 오랫동안 이 앨범은 수집가들 사이의 전설로만 존재했다. 그는 모형 기차의 열렬한 애호가로, 1990년대에는 미국의 모형 기차 회사 라이오넬의 공동 소유주가 되었다. 손이 불편한 사람도 쉽게 조작할 수 있는 기차 제어 장치를 직접 고안해 그의 이름으로 된 미국 특허가 여럿 남아 있다. 음악 기사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지만, 그가 기술과 장치에 쏟은 집요함은 훗날 포노 개발로 이어졌다. 그는 영화감독이기도 했다. 버나드 셰이키라는 가명으로 「저니 스루 더 패스트」(1973), 공연 영화 「러스트 네버 슬립스」(1979), 디보와 함께 출연한 기이한 코미디 「휴먼 하이웨이」(1982) 등을 연출했다. 가명 뒤에 숨은 탓에 이 작업들은 그의 음악 경력에 가려져 왔다.
용어 노트 📚🔎
디스토션
(말뜻) distortion 은 비틀다라는 뜻의 라틴어 distorquere 에서 왔다. 원래 모양을 비틀어 일그러뜨린다는 뜻이다. (록에서) 기타 소리를 앰프나 장치로 일부러 찢어지고 거칠게 일그러뜨린 음색을 말한다. 닐 영은 작은 앰프를 크게 틀어 이런 소리를 얻었고, 「헤이 헤이, 마이 마이」의 첫 화음이 대표적인 예다. 휴대폰 스피커로 음악을 최대 볼륨으로 틀면 소리가 지직거리며 깨지는데, 그 깨진 소리를 일부러 멋지게 다듬은 것이 디스토션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다른 데서는) 사진이나 지도에서 모양이 일그러지는 것, 또는 사실을 비틀어 전하는 왜곡을 가리킬 때도 쓴다.
피드백
(록에서) 앰프에서 나온 소리를 기타의 소리 받는 장치(픽업)가 다시 받아들이고, 그 소리가 또 앰프로 나가며 고리가 생겨 끝없이 커지는 울부짖는 소리다. 원래는 사고처럼 생기는 소음이지만, 닐 영은 《아크》라는 앨범을 거의 피드백만으로 만들 만큼 이 소리를 악기처럼 다뤘다. 강당에서 마이크를 스피커 가까이 대면 삐— 하고 귀를 찌르는 소리가 나는데, 바로 그것이 피드백이다. (다른 데서는) 일상에서는 누군가의 일이나 의견에 대해 평가와 조언을 되돌려 주는 것을 피드백이라고 한다.
드롭 D 튜닝
(말뜻) drop 은 떨어뜨린다는 뜻이다. 기타 줄 하나의 음을 D음으로 떨어뜨린다는 이름이다. (록에서) 기타에서 가장 굵은 6번 줄을 보통의 E음에서 한 음 낮춰 D음으로 맞추는 조율 방식이다. 닐 영의 「시나몬 걸」은 가장 가는 1번 줄까지 D로 낮춘 더블 드롭 D 를 써서, 낮은 줄들이 함께 울리는 묵직한 소리를 냈다. 고무줄을 느슨하게 풀어 튕기면 더 낮게 퉁 하고 울리는 것처럼, 줄을 느슨하게 해서 더 낮고 굵은 소리를 얻는 것이다.
페달 스틸 기타
(말뜻) steel 은 쇠라는 뜻으로, 왼손에 쥔 쇠막대로 줄을 눌러 연주한다는 데서 이름이 왔다. (록에서) 탁자처럼 다리 위에 눕혀 놓은 기타로, 쇠막대를 줄 위에서 미끄러뜨리고 발 페달과 무릎 레버로 음높이를 바꾼다. 음과 음 사이를 끊지 않고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소리가 나서 컨트리 음악의 상징처럼 쓰인다. 닐 영의 「하트 오브 골드」와 「하베스트 문」에서 벤 키스가 연주했다. 미끄럼틀을 탈 때 계단처럼 툭툭 내려가지 않고 스르륵 미끄러지듯, 음이 이어져 움직인다.
보코더
(말뜻) 목소리(voice)와 부호로 바꾸는 장치(coder)를 합친 말이다. 원래는 전화로 목소리를 압축해 보내기 위해 만든 기술이었다. (록에서) 사람의 목소리를 분석해 신시사이저 소리에 입혀, 기계가 말하는 듯한 목소리로 바꾸는 장치다. 닐 영은 1982년 《트랜스》에서 이 장치를 대거 써서 팬들을 놀라게 했다. 영화나 게임 속 로봇이 말하는 목소리, 또는 휴대폰 앱의 로봇 음성 필터를 떠올리면 된다.
잼
(록에서) 연주자들이 미리 정한 악보 없이 그 자리에서 서로의 소리를 들으며 즉흥으로 길게 합주하는 것이다. 닐 영과 크레이지 호스는 「다운 바이 더 리버」처럼 10분 가까이 이어지는 잼으로 유명하다. 친구들과 정해진 규칙 없이 공을 주고받으며 노는데, 서로 눈빛만으로 다음 패스를 알아채는 순간이 있다 — 잼이 잘될 때가 꼭 그렇다. (다른 데서는) 빵에 발라 먹는 과일 잼, 또는 차가 꽉 막힌 교통 체증(traffic jam)을 가리킬 때도 같은 단어를 쓴다.
그런지
(말뜻) grunge 는 미국 속어로 때, 지저분한 것이라는 뜻이다. 다듬지 않은 거친 소리와 차림새를 가리키는 데서 이름이 붙었다. (록에서) 1990년대 초 미국 시애틀을 중심으로 퍼진 록으로, 일그러진 기타 소리와 무겁고 거친 연주, 어둡고 솔직한 노래가 특징이다. 너바나와 펄 잼이 대표적이다. 닐 영은 이들보다 먼저 거친 기타 소리를 밀어붙였기 때문에 그런지의 대부라 불렸다. 다림질하지 않은 체크무늬 셔츠를 대충 걸친 것처럼, 꾸미지 않은 것을 오히려 멋으로 삼은 음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