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Star
멤피스의 작은 스튜디오에서 만든 세 장의 앨범은 당대 레코드 가게에 거의 닿지 못했고, 이십 년 뒤 기타 밴드들의 교과서가 되었다.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멤버와 동료들 ⏳🌊
- 멤버앨릭스 칠턴
박스 톱스의 십대 스타 출신 보컬·기타로, 벨이 떠난 뒤 밴드를 이끌었고 2010년 세상을 떠났다.
- 멤버크리스 벨
밴드를 만든 기타·보컬로 첫 앨범의 소리를 설계했으나 1972년 떠났고 1978년 스물일곱에 사고로 숨졌다.
- 멤버앤디 험멀
베이스를 맡아 두 장의 앨범을 함께했고, 1974년 떠나 엔지니어로 살다 2010년 세상을 떠났다.
- 멤버조디 스티븐스
원년 드러머로 끝까지 남았고, 아던 스튜디오에서 일하며 밴드의 유산을 지켰다.
- 프로듀서존 프라이
아던 스튜디오와 아던 레코드를 세워 밴드에게 녹음 공간과 첫 계약을 내준 엔지니어다.
- 영향폴 웨스터버그
리플레이스먼츠의 리더로 1987년 칠턴의 이름을 제목으로 단 곡을 냈고 칠턴을 같은 앨범 녹음에 불렀다.
I. 멤피스의 소년들 · 1966–1971
(멤피스) 1971년,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결성됐다. 블루스와 소울, 로커빌리의 도시에서 자랐지만 네 멤버의 귀는 대서양 건너 비틀스와 킹크스, 그리고 서부의 버즈가 쌓던 맑은 기타와 화음에 가 있었다. 이 엇갈림이 밴드의 출발점이었다. (앨릭스) 앨릭스 칠턴은 1950년 12월 멤피스에서 재즈 음악가 아버지와 미술을 사랑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67년, 열여섯 살에 소울 팝 그룹 박스 톱스의 보컬로 「더 레터」를 불러 전미 1위에 올랐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거칠고 걸걸한 목소리는 프로듀서 댄 펜이 주문한 연출이었고, 곡과 녹음 방식은 대부분 어른들이 정했다. 쉼 없는 순회공연에 비해 손에 쥔 돈은 적었다고 칠턴은 훗날 회고했다. 1970년 그룹이 흩어졌을 때 그는 스무 살도 안 된 나이에 이미 지나간 스타가 되어 있었다. (크리스) 크리스 벨은 1951년 1월 멤피스의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비틀스에 빠져 기타를 잡았고, 소리를 겹겹이 쌓아 흠 없이 다듬는 일에 집착했다. 엔지니어 존 프라이가 세운 아던 스튜디오는 밤 시간을 젊은 음악가들에게 내주었는데, 벨은 그곳에 드나들며 녹음 기술을 몸으로 익혔다. (친구들) 벨 곁에는 베이스의 앤디 험멀과 드럼의 조디 스티븐스가 있었다. 험멀은 공학을 공부하던 침착하고 냉소적인 학생이었고, 막내 스티븐스는 온화하고 성실했다. 셋은 아이스워터, 록 시티 같은 이름의 밴드로 함께 연주하며 영국풍 기타 팝을 익혔다. 아직 그들에게 없는 것은 노래로 한 시대를 겪어 본 목소리였다.
II. 넘버 원 레코드 · 1971–1972
(합류) 박스 톱스 이후 칠턴은 뉴욕에서 홀로 포크 가수로 서 보려다 멤피스로 돌아왔다. 벨은 그에게 자기 밴드에 들어오라고 권했고, 1971년 칠턴이 합류하면서 네 사람이 모였다. 이름은 스튜디오 근처에 있던 식료품 체인 빅 스타의 간판에서 따왔다. 거창한 이름을 농담처럼 붙인 셈이었다. (역할) 벨과 칠턴이 기타와 노래, 작곡을 나눠 맡았고 험멀이 베이스, 스티븐스가 드럼을 맡았다. 두 사람은 레넌과 매카트니처럼 곡을 공동 명의로 내기로 했다. 실제로는 각자 쓴 곡이 많았지만, 벨의 꼼꼼한 편곡과 칠턴의 가볍고 날렵한 선율 감각이 맞물리며 하나의 소리가 되었다. 험멀도 곡을 보탰다. (아던) 녹음은 아던에서 프라이의 손으로 이뤄졌다. 벨은 기타와 목소리를 여러 번 덧입혀(오버더빙) 영국 밴드에 뒤지지 않는 광택을 원했다. 프라이는 막 세운 아던 레코드의 첫 본격 작품으로 이 앨범을 내기로 했고, 같은 멤피스의 소울 명가 스택스에 배급(디스트리뷰션)을 맡겼다. (실패) 1972년 《#1 레코드》가 나왔다. 음악 잡지들은 앞다퉈 호평했지만 앨범은 정작 레코드 가게에 닿지 않았다. 스택스의 유통망은 흑인 소울 음반에 맞춰져 있었고, 백인 기타 밴드를 팔아 본 경험이 없었다. 판매는 1만 장에 한참 못 미쳤다고 전해진다. 1위가 되겠다는 반쯤 농담 섞인 제목은 그대로 아이러니가 됐다. 훗날 평론가들은 이 앨범을 짧고 선명한 선율과 굵은 기타를 결합한 음악(파워 팝)의 원형으로 꼽게 된다.
벨의 완벽주의와 칠턴의 선율 감각이 가장 고르게 맞물린 앨범이자, 배급 실패로 가게에 닿지 못한 데뷔작이다.
- 이 카드의 영상 「디 발라드 오브 엘 구도」에서는 칠턴이 절을 담담하게 부르다가 후렴에서 여러 겹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솟는다. 화음이 언제 쌓이기 시작하는지 귀를 기울이면 벨이 설계한 덧입히기(오버더빙)의 층이 들린다.
- 첫 곡 「필」은 벨이 앞에 선 곡이다. 굵게 겹친 기타와 높은 목소리가 영국풍 기타 팝을 멤피스 스튜디오에서 얼마나 정교하게 재현하려 했는지 보여 준다.
- 「인 더 스트리트」는 밴드가 할 일 없이 거리를 맴도는 십대의 심심함을 그린 곡이다. 훗날 다른 밴드의 리메이크로 미국 시트콤 주제가가 되었으니, 원곡의 더 건조한 기타 톤과 비교해 들어 볼 만하다.
- 베이스의 험멀이 쓴 「디 인디아 송」은 앨범 안에서 결이 다른 몽환적인 소품이다. 넷이 고르게 기여하던 짧은 시기의 흔적이다.
박스 톱스의 걸걸한 목소리를 벗어던진 칠턴이 처음으로 자기 목소리를 찾은 곡으로 꼽힌다.
- 드럼 없이 어쿠스틱 기타 두 대와 목소리가 거의 전부다. 한 대는 화음을 부드럽게 긁고, 다른 한 대는 화음을 한 음씩 풀어 연주(아르페지오)하며 서로를 감싼다.
- 칠턴의 목소리는 「더 레터」의 거친 소리와 정반대로 가늘고 조심스럽다. 같은 사람이 불렀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들으면 그가 이 밴드에서 무엇을 되찾으려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 화법은 열세 살 소년이 좋아하는 아이에게 수줍게 건네는 고백이다. 부모의 눈을 의식하는 망설임과 롤링 스톤스 노래에 기대는 십대다운 허세가 함께 들어 있다.
- 길이가 짧고 큰 절정이 없는 곡이다. 극적인 전개 대신 끝까지 같은 온도를 지키는 절제가 이 곡이 오래 사랑받는 이유로 자주 꼽힌다.
III. 떠난 사람 · 1972–1973
(낙담) 실패의 타격은 벨에게 가장 깊었다. 그는 이 앨범을 사실상 자기 작품으로 여겼는데, 몇 안 되는 관심마저 이미 이름이 알려진 칠턴에게 쏠렸다. 벨은 오래 우울증에 시달렸고, 이 무렵 술과 약물에 기대는 일도 늘었다고 전기 작가들은 쓴다. 자신이 만든 밴드에서 조연이 되어 간다는 감각이 그를 괴롭혔다. (탈퇴) 1972년 말 벨은 밴드를 떠났다. 그 과정에서 험멀과 몸싸움을 벌였고, 격분한 벨이 녹음 테이프를 망가뜨리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진위와 세부는 증언마다 엇갈린다. 분명한 것은 밴드의 소리를 설계하던 사람이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공백) 남은 셋도 한동안 흩어졌다. 칠턴은 다시 혼자 노래할 길을 저울질했고, 스티븐스와 험멀은 학업으로 돌아갔다. 첫 앨범이 묻힌 채 밴드는 이름만 남을 처지였다. (대회) 전환점은 뜻밖의 자리에서 왔다. 1973년 5월 아던 측이 멤피스에 전국의 록 평론가들을 불러 모으는 대회를 열었고, 셋이 다시 무대에 섰다. 연주는 거칠었지만 평론가들은 열광했다. 이 자리에서 생긴 지지자들이 이후 수십 년 동안 지면에서 밴드를 거듭 불러냈다. 셋은 두 번째 앨범을 만들기로 했다. (전환) 벨이 없는 빅 스타는 다른 밴드가 되어야 했다. 겹겹이 쌓은 광택 대신 셋이 한 방에서 함께 내는 날것의 소리가 그들 앞에 남은 선택지였다.
IV. 라디오 시티 · 1973–1974
(리더) 칠턴이 사실상 밴드를 이끌었다. 그는 박스 톱스 시절 남이 정해 준 소리를 불렀던 기억을 지우듯, 이번에는 즉흥과 흔들림을 그대로 남기고 싶어 했다. 기타는 더 날카롭고 비뚤어졌고, 곡의 짜임은 느슨해졌다. 프라이는 다시 엔지니어를 맡아 셋의 연주를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담았다. (흔적) 벨은 떠났지만 그림자는 남았다. 「백 오브 어 카」와 「오 마이 솔」 같은 곡의 초안에 벨이 손을 보탰다고 전해지나, 앨범에는 그의 이름이 오르지 않았다. 스티븐스의 드럼과 험멀의 베이스는 첫 앨범보다 훨씬 앞으로 나와 밴드의 뼈대가 됐다. (배급) 1974년 《라디오 시티》가 나왔다. 평단은 다시 호평했고 「셉템버 걸스」는 일부 라디오에서 전파를 탔다. 그러나 이번에도 가게에는 앨범이 없었다. 스택스는 1972년 거대 음반사 컬럼비아와 배급 계약을 맺었는데, 양측 관계가 틀어지면서 컬럼비아가 스택스 계열 음반의 유통을 사실상 막아 버렸다. 수천 장이 창고에 묶였다고 전해진다. 스택스는 이듬해 파산했다. (험멀) 두 번의 헛걸음 끝에 험멀은 1974년 말 밴드를 떠나 학업을 마쳤다. 그는 기계공학을 전공해 텍사스의 방위산업체에서 엔지니어로 오래 일했고, 음악보다 안정된 삶을 골랐다. 두 해 사이 원년 멤버 넷 가운데 둘이 떠난 셈이었다. 칠턴과 스티븐스만 남은 밴드에는 더 이상 팔려야 한다는 기대도 남아 있지 않았다.
벨이 떠난 뒤 셋이 만든 가장 밝은 곡으로, 라디오에서 흘렀지만 가게에는 앨범이 없던 시절의 대표곡이다.
- 도입부의 기타는 쇳소리처럼 맑고 찰랑거리는 음색(징글리 톤)이다. 1960년대 버즈의 기타를 떠올리게 하는 이 소리가 이후 수많은 기타 팝 밴드의 기준이 되었다.
- 칠턴은 높은 음역에서 노래하고, 같은 선율을 한 번 더 녹음해 겹친 목소리(더블링)가 후렴을 두텁게 만든다. 왼쪽과 오른쪽 귀에 조금씩 다르게 들리는 목소리의 결을 찾아보자.
- 스티븐스의 드럼은 서두르지 않고 곡을 앞으로 밀고, 험멀의 베이스는 단순히 뿌리음만 짚지 않고 노래하듯 선율을 그린다. 2절에서 베이스만 따라가 보면 곡의 활기가 어디서 오는지 들린다.
- 밝고 경쾌한 소리와 달리 노래의 정서는 엇갈린 사랑에 대한 상심이다. 이 대비가 빅 스타 노래의 전형으로 평가된다.
- 1986년 뱅글스의 리메이크와 견줘 들으면, 원곡의 녹음이 얼마나 건조하고 가볍게 남겨졌는지 선명해진다.
칠턴이 리더가 된 트리오의 생생하고 비뚤어진 소리를 담은 앨범으로, 많은 평론가가 빅 스타의 최고작으로 꼽는다.
- 첫 곡 「오 마이 솔」은 5분이 넘는 길이에 느슨하게 출렁이는 리듬을 깔고 시작한다. 첫 앨범의 단정한 팝과 전혀 다른 출발을 알리는 곡이다.
- 이 카드의 영상 「백 오브 어 카」는 굵은 기타와 겹친 화음이 맞부딪치는 곡이다. 벨이 초안에 손을 보탰다고 전해지는 곡이라, 첫 앨범의 질감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대목으로 들어 볼 만하다.
- 앨범 전체가 덧입히기를 줄이고 셋이 함께 연주한 느낌을 살렸다. 기타 솔로가 박자를 살짝 밀고 당기는 곳들이 흠이 아니라 의도된 흔들림처럼 들린다.
- 「아임 인 러브 위드 어 걸」 같은 짧은 어쿠스틱 소품은 「서틴」의 계보를 잇는다. 거친 곡들 사이에 놓인 이 조용한 곡들이 앨범의 호흡을 만든다.
V. 세 번째 앨범 · 1974–1978
(디킨슨) 1974년 가을, 칠턴과 스티븐스는 프로듀서 짐 디킨슨과 아던에서 세 번째 앨범을 녹음했다. 디킨슨은 연주자를 다그치기보다 내버려 두는 사람이었고, 칠턴이 원하는 대로 곡이 흐트러지게 놓아두었다. 칼 마시가 현악을 편곡했고, 칠턴의 당시 연인 레사 올드리지가 노래를 함께 만들고 「팜 파탈」에서 목소리를 보탰다. (어둠) 당시 칠턴은 술과 약물에 깊이 빠져 있었다고 그 자신과 동료들이 훗날 증언했다. 곡들은 느리고 불안했으며, 어떤 곡은 끝까지 형체를 갖추지 않았다. 「홀로코스트」의 절망과 「캥거루」의 무너질 듯한 사운드는 그 시기 그의 상태를 숨기지 않았다. 레이블들은 상업성이 없다며 받아 주지 않았고, 녹음은 4년 가까이 서랍 속에 있었다. 1978년에야 작은 레이블에서 《서드》로 나왔고, 판본에 따라 《시스터 러버스》라는 이름이 붙기도 했다. (벨) 그사이 벨은 유럽으로 건너가 홀로 녹음을 이어 갔다. 우울과 씨름하던 그는 기독교 신앙에 깊이 기댔고, 그 시기에 쓴 「아이 엠 더 코스모스」에는 외로움과 구원에 대한 갈망이 함께 담겼다. 1978년 이 곡이 작은 레이블에서 싱글로 나왔다. 그해 12월 27일, 벨은 멤피스에서 차를 몰다 전신주와 부딪혀 스물일곱 살에 세상을 떠났다. (뉴욕) 칠턴은 1977년 뉴욕으로 옮겨 갔다. 라몬스와 텔레비전이 휩쓸던 맨해튼 클럽가에서 그는 다듬지 않은 연주로 무대에 섰고, 거칠고 헐렁한 소리를 일부러 택했다. 빅 스타라는 이름은 그 무렵 거의 잊혀 있었다.
녹음 당시 칠턴의 어두운 상태가 가장 숨김없이 드러난 곡으로, 《서드》의 정서를 압축한다.
- 느린 피아노가 곡을 이끌고, 칠턴의 목소리는 힘을 뺀 채 거의 읊조리듯 흐른다. 박스 톱스와 「셉템버 걸스」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들으면 그 거리감이 섬뜩하다.
- 뒤편에서 길게 끌리며 울리는 기타 소리와 넓은 울림(리버브)이 방 안의 텅 빈 공간처럼 들린다. 디킨슨은 이런 소리를 다듬지 않고 그대로 남겼다.
- 화법은 누군가를 향해 위로 대신 차갑게 체념을 건네는 말이다. 듣는 이를 붙잡지 않는 무표정함이 곡의 핵심이다.
- 1980년대 영국 레이블 4AD의 프로젝트 디스 모털 코일이 이 곡을 리메이크했다. 그 판본의 몽환적인 처리와 비교하면 원곡의 메마름이 더 뚜렷해진다.
1974년에 녹음되고 4년을 묵은 뒤에야 나온 앨범으로, 실패와 고립이 어떻게 소리가 되는지를 보여 준다.
- 「캥거루」는 어쿠스틱 기타 위로 일그러진 소음과 불규칙한 소리가 끼어들며 곡의 형태가 무너질 듯 흔들린다. 노래 뒤에서 무엇이 갑자기 등장하는지 끝까지 따라가 보자.
- 이 카드의 영상 「생큐 프렌즈」는 합창단 같은 코러스와 현악이 화려하게 부풀어 오르는 곡이다. 감사의 말이 지나치게 화려한 탓에 오히려 비꼼처럼 들린다는 해석이 평단에 널리 퍼져 있다.
- 칼 마시의 현악 편곡이 「스트로크 잇 노엘」과 「테이크 케어」에서 곡의 표정을 바꾼다. 기타 밴드의 앨범에서 바이올린과 첼로가 노래를 받쳐 주는 순간들을 찾아 들어 보자.
- 벨벳 언더그라운드 곡 「팜 파탈」의 리메이크에는 올드리지의 목소리가 섞여 든다. 칠턴이 좋아하던 뉴욕 음악에 대한 존경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 곡 순서가 판본마다 다르다. 칠턴이 최종 순서를 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어느 판으로 듣는지에 따라 앨범의 첫인상이 달라진다.
VI. 늦게 온 이름 · 1979–1992
(크램프스) 칠턴은 멤피스로 돌아가 1979년 무렵 펑크 밴드 크램프스의 녹음을 프로듀스했다. 그의 솔로 앨범 《라이크 플라이스 온 셔벗》은 엉성함을 일부러 남긴 녹음이었다. 매끈한 팝을 만들던 손으로 정반대의 소리를 고른 것은, 실패한 완벽주의에 대한 그 나름의 답처럼 보였다. (뉴올리언스) 1980년대 초 그는 뉴올리언스로 거처를 옮겼다. 식당 주방에서 접시를 닦고 나무를 다듬는 일로 생계를 꾸렸고, 이 무렵 술을 끊었다고 밝혔다. 이후 그는 오래된 R&B와 재즈 스탠더드를 즐겨 부르며 작은 클럽에서 소박하게 연주했다. 그는 이 도시에서 남은 생을 보냈다. (후계) 그사이 빅 스타의 레코드는 소수의 손에서 손으로 건너갔다. 1980년대 R.E.M.의 피터 벅과 마이크 밀스는 빅 스타를 거듭 영향으로 꼽았고, 뱅글스는 1986년 「셉템버 걸스」를 리메이크했다. 1987년 미니애폴리스의 리플레이스먼츠는 칠턴의 이름을 그대로 제목으로 단 곡을 발표했고, 칠턴은 같은 앨범의 「캔트 하들리 웨이트」 녹음에 기타로 참여했다. 영국의 틴에이지 팬클럽과 프라이멀 스크림도 그 계보를 이었다. (재발매) 1992년 라이코디스크가 《서드》와 벨의 유작 앨범 《아이 엠 더 코스모스》를 다시 냈다. 판매가 없어 남지 못했던 밴드는, 그 음반을 산 소수가 음악가가 되면서 뒤늦게 이름을 얻었다. 칠턴 자신은 이 숭배에 시큰둥한 태도를 자주 보였다.
VII. 재결합과 작별 · 1993–2010
(재결합) 1993년 4월, 미주리 대학교 학생 방송국의 주선으로 미주리주 컬럼비아에서 빅 스타가 다시 무대에 섰다. 칠턴과 스티븐스에 시애틀 밴드 포지스의 존 아우어와 켄 스트링펠로가 합류했다. 두 사람은 빅 스타를 듣고 자란 세대였다. 험멀은 참여하지 않았다. 공연은 음반으로 나왔고, 밴드는 이후 띄엄띄엄 순회공연을 이어 갔다. (신작) 2005년 넷은 아던에서 《인 스페이스》를 녹음했다. 칠턴은 옛 소리를 재현하는 데 관심이 없었고, 앨범은 장난스럽고 산만하다는 평과 반갑다는 평이 엇갈렸다. 그해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덮쳤을 때 칠턴은 집에 남아 있다가 헬기로 구조됐다. (작별) 2010년 3월 17일, 칠턴은 뉴올리언스에서 심장 이상으로 쓰러져 쉰아홉 살에 세상을 떠났다. 며칠 뒤 텍사스 오스틴의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 축제에서 예정됐던 빅 스타 공연은 동료 음악가들이 함께한 추모 무대가 되었다. 넉 달 뒤인 7월 19일, 험멀도 암으로 쉰아홉 살에 숨졌다. 원년 네 명 가운데 스티븐스만 남았고, 밴드는 그것으로 끝났다. (유산) 스티븐스는 오랫동안 아던 스튜디오에서 일하며 밴드의 기록을 지켰다. 그는 이후 크리스 스테이미, R.E.M.의 마이크 밀스 등과 함께 《서드》를 현악과 함께 무대에서 재현하는 공연에 참여했다. 2012년 다큐멘터리 「빅 스타: 낫싱 캔 허트 미」가 나오며 이야기는 다시 한 세대에게 전해졌다.
덜 알려진 이야기
《라디오 시티》의 표지는 멤피스의 사진가 윌리엄 이글스턴이 찍은 붉은 천장 사진이다. 이 사진은 훗날 컬러 사진을 예술로 끌어올린 작품으로 미술관에 걸리게 되지만, 당시에는 동네 지인의 사진을 빌려 쓴 정도로 여겨졌다. 이글스턴은 칠턴 집안과 가까웠고, 《서드》 녹음 때는 스튜디오에 들러 「네이처 보이」에서 피아노를 치기도 했다. 미술사와 록의 역사가 따로 기록되면서 두 이야기가 한 사람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오래 각주에 머물렀다. 우리가 아는 《서드》라는 앨범은 엄밀히 말해 존재하지 않는다. 칠턴은 1974년 녹음을 끝내고도 곡 순서를 확정하지 않았고, 1978년 첫 발매 이후 판본마다 곡의 순서와 수록곡이 달랐다. 그래서 평론가와 팬들은 지금도 어느 순서가 본래 의도에 가까운지 의견이 갈린다. 미완성으로 남은 사정이 오히려 이 앨범을 듣는 사람마다 다르게 완성하는 작품으로 만들었다. 밴드의 곡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이 들은 것은 아마 「인 더 스트리트」일 것이다. 1990년대 말 미국 시트콤 「댓 세븐티스 쇼」가 이 곡을 다른 밴드의 리메이크로 주제가로 썼기 때문이다. 수백만 시청자가 매주 이 노래를 들었지만, 그것이 1972년 거의 팔리지 않은 앨범의 곡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당대에 실패한 음악이 원작자 이름 없이 대중의 귀에 닿은 드문 사례다.
용어 노트 📚🔎
파워 팝
(말뜻) 힘(power)이 실린 팝이라는 뜻이다. 짧고 귀에 붙는 팝의 선율에 록의 힘찬 기타와 드럼을 더했다는 의미가 이름에 그대로 들어 있다. (록에서) 3분 안팎의 짧은 곡, 외우기 쉬운 선율, 맑게 겹친 화음, 시원하게 울리는 기타가 특징인 록의 한 갈래다. 1960년대 비틀스와 버즈에서 출발해 1970년대 빅 스타가 그 원형을 세웠다고 평가된다. 급식 메뉴로 치면 모두가 좋아하는 달콤한 반찬에 매콤한 양념을 살짝 더한 것과 비슷하다 — 누구나 먹기 쉽지만 심심하지는 않다.
오버더빙
(말뜻) 영어 over(위에)와 dub(소리를 입히다)가 합쳐진 말로, 이미 녹음한 소리 위에 새 소리를 덧입힌다는 뜻이다. (록에서) 먼저 녹음한 연주를 들으면서 기타, 목소리, 화음 등을 한 겹씩 더 녹음해 쌓는 방법이다. 한 사람이 여러 번 노래해 합창처럼 만들 수도 있다. 미술 시간에 수채화를 한 번 칠하고 마른 뒤 다른 색을 덧칠해 깊이를 만드는 것과 같다. 크리스 벨은 이 방법으로 빅 스타 첫 앨범의 광택을 만들었다. (다른 데서는)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 외국어 대사를 우리말로 입히는 더빙도 같은 뿌리의 말이다.
배급(디스트리뷰션)
(말뜻) 배급(配給)은 나누어(配) 준다(給)는 뜻이다. 영어 distribution도 여러 곳으로 나누어 퍼뜨린다는 뜻이다. (록에서) 레코드 회사가 만든 음반을 전국의 레코드 가게까지 실어 나르고 진열되게 하는 일이다. 아무리 좋은 음반도 배급이 막히면 사람들이 살 수 없다. 학교 급식으로 치면 아무리 맛있는 반찬을 만들어도 배식 차가 교실에 오지 않으면 아무도 못 먹는 것과 같다. 빅 스타의 첫 두 앨범이 바로 이 배급 문제로 팔리지 못했다. (다른 데서는) 전쟁이나 재난 때 식량과 물자를 나눠 주는 일을 가리키기도 하고, 영화계에서는 극장에 영화를 거는 일을 말한다.
보컬 하모니
(말뜻) 하모니는 그리스어 harmonia에서 왔는데, 이음새나 맞춤이라는 뜻이었다. 서로 다른 소리를 잘 맞춰 잇는다는 생각이 이름에 담겨 있다. (록에서) 주 선율을 부르는 목소리 위아래로 다른 음높이의 목소리를 함께 불러 소리를 두텁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다. 빅 스타의 후렴은 이런 화음이 한꺼번에 솟아오르는 순간으로 유명하다. 음악 시간에 반 친구들이 소프라노와 알토로 나뉘어 합창할 때, 서로 다른 음을 부르는데도 한 노래로 들리는 바로 그 느낌이다. (다른 데서는) 일상에서는 여러 사람이나 요소가 잘 어울린다는 뜻으로도 쓴다.
녹음 엔지니어
(록에서) 스튜디오에서 마이크를 어디에 둘지 정하고, 녹음기와 콘솔을 다뤄 연주를 소리로 기록하는 사람이다. 같은 연주라도 엔지니어의 손에 따라 소리가 따뜻하게도, 차갑게도 담긴다. 학교 방송부에서 마이크 위치와 볼륨을 조절해 방송 소리를 깨끗하게 만드는 친구가 있다면, 그 친구가 바로 작은 엔지니어다. 존 프라이는 아던 스튜디오의 엔지니어로 빅 스타의 소리를 기록했다. (다른 데서는) 엔지니어는 보통 공학자, 즉 기계나 건물, 컴퓨터 같은 것을 설계하고 만드는 사람을 가리킨다. 베이스의 앤디 험멀은 밴드를 떠난 뒤 이 뜻의 엔지니어가 되었다.
컬트
(말뜻) 라틴어 cultus에서 온 말로, 원래 신을 섬기는 일, 곧 숭배를 뜻했다. (록에서)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소수의 팬들이 아주 열렬하게 아끼고 떠받드는 음악가나 음반을 컬트 밴드, 컬트 앨범이라고 부른다. 빅 스타는 당대엔 거의 팔리지 않았지만, 그 음반을 들은 사람들이 음악가가 되어 이름을 퍼뜨린 대표적인 컬트 밴드다. 반에서 몇 명만 아는 게임인데 그 몇 명이 너무 좋아해서 계속 이야기하다 보니 몇 년 뒤엔 모두가 알게 된 경우와 비슷하다. (다른 데서는) 일상이나 뉴스에서는 사이비 종교 집단을 가리키는 부정적인 뜻으로 자주 쓰이니, 음악 이야기에서와 구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