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Kwang-seok
방송에서도, 사인을 해 줄 때도 늘 '행복하세요'로 인사를 맺었다. 소극장의 작은 무대에서 노래 한 곡 한 곡을 말을 건네듯 부른 가객이었다.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곁의 사람들 ⏳🌊
- 가족김수영
아버지로, 교원노조 활동 때문에 교단에서 밀려난 뒤 여러 생업을 전전하며 다섯 남매를 길렀다.
- 스승김민기
노래패 시절 그를 「노래를 찾는 사람들」로 이끌었고, 자신이 세운 학전 소극장을 그의 1000회 공연 무대로 내주었다.
- 후원김창완
산울림의 리더로, 동물원의 데모 테이프를 듣고 정식 음반을 제안해 그가 세상에 나오는 길을 열었다.
- 우정김창기
동물원의 동료로 「거리에서」와 「그날들」을 썼으며, 그의 가까운 음악적 동반자였다.
- 우정박학기
동료 가수 가운데 그와 가장 가까웠던 친구로 알려져 있다.
- 영향윤도현
그와 교유한 음악계 후배로 알려져 있다.
I. 대구에서 창신동으로 · 1963–1981
(출생) 1963년 12월, 대한민국 대구 대봉동에서 태어났다. 실제 생일은 12월 12일이지만 호적에는 1964년 1월 22일로 올라, 오랫동안 1964년생으로 알려졌다. (아버지) 아버지 김수영은 대구사범학교를 나온 국민학교 교사였고 6·25 전쟁에 참전했다. 1960년 교원노조 결성에 참여했다가 얼마 뒤 교단에서 밀려났고, 그 뒤로 건설업과 외판, 보석 장사를 전전했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 형편은 그의 성장기 내내 이어졌다. (남매) 어머니는 이달지다. 위로 형과 누나들이 있었고, 그는 막내로 알려져 있다. 부모는 훗날 국립대전현충원에 함께 묻혔다. (이주)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이 서울로 올라왔다. 다섯 살 무렵 중구 장충동에 살았고, 1970년대 초 종로구 창신동으로 옮겼다. 봉제 공장과 좁은 골목이 얽힌 동네였다. 창신초등학교, 경희중학교, 대광고등학교를 다녔다. (시대) 그가 중학생이던 1970년대 중반, 통기타를 들고 청년 문화를 이끌던 가수들이 대마초 파동과 금지곡 조치로 방송에서 줄줄이 사라졌다. 노래가 검열을 받는 일이 당연하던 시대였다. 소년 시절 그가 어떻게 음악에 빠져들었는지는 남은 기록이 많지 않다. 다만 기타와 하모니카를 함께 다루는 그의 연주법은 이 시기 통기타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II. 노래패의 청년 · 1982–1987
(입학) 1982년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들어갔다.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곳은 여러 대학 학생이 모인 노래 동아리 '연합메아리'였다. 1980년대 초 대학가에서는 노래가 곧 시대에 대한 발언이었고, 동아리에서 그는 노래를 혼자 즐기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나누는 일로 배웠다. (김민기) 이 무렵 「아침 이슬」의 김민기를 만났다. 김민기가 제작한 동요 뮤지컬 음반 「개똥벌레 이야기」에 참여했는데, 이 음반이 사전심의에서 떨어지자 김민기는 노래패 '새벽'을 꾸리고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을 기획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1984년 이 음반에 참여했다. 김민기와 그의 인연은 훗날 학전 소극장 무대로 이어졌다. (방위) 1985년 1월부터 7월까지 방위병으로 복무하고 이병으로 소집 해제됐다. 큰형 김광동이 세상을 떠난 일로 짧게 복무하는 방위병 대상이 됐다고 전해진다. 집안의 맏이를 잃은 상실은 막내였던 그에게 일찍 찾아온 슬픔이었다. (노찾사) 「노래를 찾는 사람들」은 1987년 6월 항쟁을 지나며 대학가 밖으로 퍼져 나갔고, 1989년 2집의 「광야에서」는 한 시대의 노래가 됐다. 그는 이 노래패 출신이라는 뿌리를 평생 숨기지 않았다. 몇 해 뒤 「광야에서」를 자기 목소리로 다시 녹음한 것도 그 뿌리를 보여 준다. (시대) 같은 시기 대중가요 쪽에서는 이문세가 작곡가 이영훈과 함께 발라드의 시대를 열고 있었다. 1987년에는 유재하가 앨범 한 장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노래운동의 집단 합창과 방송 가요의 개인적 서정 사이, 그 경계에 그의 자리가 생겨나고 있었다.
III. 동물원 시절 · 1987–1988
(테이프) 그는 대학 시절의 친구들과 함께 자작곡을 녹음한 테이프를 만들었다. 산울림의 김창완이 이 테이프를 듣고 정식 음반으로 내자고 제안했다. 테이프에 담긴 곡들이 추려져 1988년 그룹 '동물원'의 첫 음반이 됐다. 김창완이 공개적으로 지지해 준 것이 그룹이 이름을 알리는 데 힘이 됐다. (거리에서) 첫 음반의 머리곡 「거리에서」는 김창기가 쓰고 그가 불렀다. 리더도 스타도 따로 없이 여럿이 돌아가며 노래하는 아마추어 그룹이었다. 박기영은 「변해가네」를, 김창기는 「잊혀지는 것」을 직접 불렀다. 꾸밈없는 생활의 노래가 LP와 카세트테이프로 대학가와 다방에 퍼졌고, 이 음반은 크게 팔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창기) 김창기는 그의 가까운 음악적 동반자였다. 김창기는 그가 솔로가 된 뒤에도 「그날들」 같은 곡을 써 주었고, 그는 훗날 다시 부르기 음반에서 동물원 시절의 노래를 자신의 목소리로 되살렸다. (결단) 같은 1988년 동물원은 2집을 냈고, 그는 이 음반을 끝으로 그룹을 떠났다. 다른 멤버들은 생업을 따로 두고 아마추어로 음악을 계속하길 원했다. 그는 음악을 직업으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그룹은 이후에도 멤버를 바꿔 가며 활동을 이어 갔다. (시대) 서울 올림픽이 열린 해였다. 텔레비전이 화려한 무대를 쏟아내던 그때, 동물원의 성공은 방송보다 입소문과 음반으로 퍼지는 노래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2015년 12월 이 시절의 그를 그린 뮤지컬 「그 여름, 동물원」이 초연됐다.
김창기가 쓰고 그가 부른 동물원 1집의 머리곡이다. 1993년 「다시 부르기」에서 혼자 새로 녹음하면서 아예 그의 노래로 기억되게 됐다.
- 동물원 판은 여러 아마추어 멤버가 함께 만든 소박한 밴드 소리다. 1993년 판은 기타 중심의 단출한 편곡이다. 두 판을 나란히 들으면 그룹의 막내 보컬이 솔로 가수가 되기까지의 거리가 들린다.
- 절(벌스)에서는 거의 말하듯 낮게 시작한다. 후렴(코러스)으로 가면서 목소리를 조금씩 밀어 올리는데, 감정을 터뜨리기보다 참는 쪽에 가깝게 들린다.
- 음 끝을 잘게 떠는 창법(비브라토)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보게 하는 표식이다. 이 곡의 긴 음에서 그 특징이 또렷하다.
- LP와 카세트테이프 시절, 방송보다 입소문으로 대학가에 퍼진 노래다. 1988년의 공기를 담고 있다.
IV. 홀로 서다 · 1989–1992
(1집) 1989년 9월 첫 솔로 음반을 냈다. 「기다려줘」와 「너에게」가 실렸다. 그룹의 막내 보컬로만 알려졌던 그가 한 사람의 가수로 서는 첫걸음이었다. (결혼) 1990년 결혼했고, 딸 하나를 두었다. (2집) 1991년 2집에서 대중적인 이름을 얻었다. 한동준이 쓴 「사랑했지만」이 그의 인기의 출발점이 됐다. 당시 신인 작곡가였던 김형석이 「사랑이라는 이유로」를, 김창기가 「그날들」을 썼다. 이별과 그리움을 다룬 곡들이었지만 그의 떨리는 목소리를 거치면 감상에 젖기보다 담담한 고백처럼 들렸다. (소극장) 1991년부터 소극장 공연을 시작했다. 같은 해 김민기가 대학로에 문을 연 학전이 그의 주 무대가 됐다. 노래 사이사이 객석과 나누는 긴 이야기가 공연의 절반이었고, 관객은 이 좁은 공간에서 그를 만났다. (3집) 1992년 3월 3집을 냈다. 한동헌이 쓴 「나의 노래」는 노래하는 사람의 다짐을 담은 곡으로, 그의 자화상처럼 받아들여졌다. 직접 쓴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도 이 음반에 실렸다. (정지) 이 무렵 심야 라디오 DJ를 맡고 있었다. 초대 손님이던 소설가 마광수가 간통죄와 혼전 순결에 관한 소신을 말했는데, 그가 이를 끊지 않고 내보낸 일로 방송위원회가 두 사람에게 출연 정지를 내렸다. 날짜와 방송사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게 전해진다. 그의 무대는 대체로 방송 밖에 있었다. (시대) 1992년 봄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면서 텔레비전 순위 프로그램은 춤과 랩이 이끄는 무대로 빠르게 바뀌었다. 그는 반대 방향, 마이크 하나와 기타 하나뿐인 소극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동준이 쓴 이 곡으로 그는 처음 대중적인 이름을 얻었다. 그룹을 떠나 홀로 선 가수가 자리를 잡은 노래다.
- 건반과 현악 느낌의 배경음(신시사이저 패드)이 깔린 1990년대 초 발라드 편곡이다. 통기타 포크로만 기억되는 그의 다른 얼굴을 보여 준다.
- 후렴의 높은 음에서 목소리를 쥐어짜지 않고 떨림으로 버틴다. 그래서 절규가 아니라 혼잣말처럼 들린다.
- 곡은 지나간 사랑을 향해 미련과 체념을 함께 털어놓는 화법이다. 같은 후렴이 돌아올 때마다 감정의 온도가 조금씩 올라가도록 짜여 있다.
- 라디오 신청곡으로 오래 사랑받았고, 이후 많은 가수가 경연 프로그램에서 다시 부른 곡이다.
한동헌이 쓴 곡으로, 노래하는 사람의 다짐을 담았다. 소극장으로 걸어 들어가던 그의 자화상처럼 받아들여진 3집의 대표곡이다.
- 반복되는 기타 리듬(스트로크) 위에 노래가 실려 앞으로 걸어가듯 나아간다. 발라드라기보다 행진에 가까운 박자감이다.
- 1인칭으로 자신의 노래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다짐하는 곡이다. 그래서 노래패 시절의 합창 정서가 한 사람의 목소리로 옮겨 온 것처럼 들린다.
- 소극장 공연에서 객석과 함께 부르는 대목이 많았던 곡으로 알려져 있다. 실황 음반으로 들으면 그 분위기가 살아난다.
- 2000년대 인디 음악가들의 헌정 음반 시리즈가 이 곡의 제목 「나의 노래」를 이름으로 삼았다.
V. 다시 부르기와 천 번의 무대 · 1993–1995
(다시) 1993년 3월 「김광석 다시 부르기」를 냈다. 동물원 시절의 「거리에서」, 노래패 시절의 「광야에서」, 김현성이 쓴 「이등병의 편지」 등 1980년대의 노래를 새로 녹음한 리메이크 음반이었다. 운동권 노래와 대학가 포크를 대중가요의 언어로 옮겨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해 7월에는 학전에서 한 달 동안 장기 공연을 했다. (4집) 1994년 6월 낸 4집은 그의 재능이 정점에 이른 음반으로 평가받는다. 직접 쓴 「일어나」와 「바람이 불어오는 곳」, 시인 류근이 노랫말을 쓴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강승원이 쓴 「서른 즈음에」가 함께 실렸다. 막 서른 살이 된 그가 부른 「서른 즈음에」는 청춘이 저무는 감각을 덤덤하게 짚은 노래로, 2007년 최고의 노랫말로 뽑혔다. (천 회) 1995년 3월 「다시 부르기 2」를 냈다. 김목경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한대수의 「바람과 나」, 김창기의 「잊혀지는 것」을 다시 불렀다. 같은 해 8월 11일 학전에서 소극장 공연 1000회를 채웠다. 자꾸 공연을 연다고 '또 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쌓은 기록은 대학로에 소극장 장기 공연이 자리 잡는 데 한몫했다. (성품) 성실함 덕분에 '슈퍼맨'으로도 불렸다.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주위에는 너그러웠다고 전해진다. 후배 윤도현과도 교유했다고 알려져 있다. 동료 가수 박학기와는 오랜 친구 사이였다. (미국) 1995년 11월 미국으로 건너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와 뉴욕 맨해튼의 머킨 콘서트홀에서 노래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공연이 됐다. PC 통신 나우누리의 동호회에 직접 글을 올리며 팬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때이기도 했다.
강승원이 방송 녹화장에서 처음 부른 자작곡을 그가 청해 받아 4집에 실었다. 막 서른 살이 된 그의 목소리로 한 세대의 나이 듦을 대표하는 노래가 됐다.
- 어쿠스틱 기타를 중심으로 소리를 아낀 편곡이다. 반주가 비켜서 있어 목소리와 노랫말이 앞에 선다.
- 청춘이 손에서 빠져나가는 감각을 누구를 탓하지도 않고 덤덤하게 짚는 화법이다. 그래서 듣는 이의 나이에 따라 다르게 들린다는 말이 많다.
- 후렴의 긴 음을 끝까지 밀지 않고 떨림 속에 놓아 버리는 처리가 곡 전체의 체념과 맞물린다.
- 2007년 최고의 노랫말로 선정됐다. 2011년에는 CG로 되살린 그와 아이유가 이 곡을 함께 부르는 광고가 만들어졌다.
그가 직접 쓴 4집의 곡이다. 쓸쓸한 노래가 많은 그의 목록에서 드물게 몸을 일으켜 세우는 노래다.
- 경쾌한 통기타 리듬과 하모니카가 이끄는 포크록(포크에 록 밴드 소리를 더한 음악)이다. 첫 소절부터 박자가 앞으로 쏠린다.
- 그는 목에 거는 받침대에 하모니카를 끼우고 기타와 동시에 연주했다. 하모니카 소리가 노래 사이 빈자리를 채우며 곡의 기운을 끌어올린다.
- 가사는 지친 자신을 다그쳐 일으키는 화법이다. 같은 4집의 「서른 즈음에」와 짝을 이뤄 체념과 의지의 양면을 보여 준다.
- 공연 후반에 객석이 손뼉으로 박자를 맞추는 곡으로 자주 쓰였다고 전해진다.
블루스 기타리스트 김목경의 곡을 「다시 부르기 2」에서 다시 불렀다. 원곡보다 그의 리메이크로 더 널리 알려졌다.
- 원곡자의 블루스 감각이 남은 기타 가락 위에 그가 하모니카를 얹는다. 소박한 실내악처럼 들리는 편곡이다.
- 평생을 함께한 배우자와의 이별을 앞둔 노인의 회고를 서른 갓 넘은 가수가 부른다. 그 나이의 간극이 오히려 곡을 담담하게 만든다.
- 이야기를 차례로 풀어 가는 서사형 노래다. 절이 넘어갈 때마다 시간이 흘러가도록 짜여 있다.
- 훗날 임영웅, 하동균 등이 경연 프로그램에서 이 곡을 불러 화제가 되면서 다시 주목받았다.
VI. 남은 노래 · 1996–2026
(1월) 1996년 1월 6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서른둘이었다. 경찰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결론지었다. 그해 생전의 공연 실황을 담은 라이브 음반이 나왔고, 사후 음반과 전집이 이어졌다. (재발견) 2000년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 「이등병의 편지」가 삽입되면서, 그를 직접 본 적 없는 세대가 그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CD가 MP3와 스트리밍으로 바뀌는 동안에도 그의 음반은 꾸준히 팔렸다. 영어 위키백과는 누적 판매량을 500만 장 이상으로 적고 있다. (기술) 2011년에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되살린 그가 아이유와 「서른 즈음에」를 함께 부르는 광고가 만들어졌다. 「히든싱어」 시즌 2의 김광석 편은 프로그램을 대표하는 회차로 꼽힌다. 2021년 1월 SBS는 인공지능으로 그의 목소리를 복원해 방송했다. (기념) 2008년 학전 앞에 그의 노래비가 세워졌다. 2010년에는 그가 태어난 대구 방천시장 옆 신천 둑길에 벽화 거리 '김광석다시그리기길'이 조성됐다. 2013년 뮤지컬 「그날들」이 초연됐고, 2014년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 표창이 추서됐다. (후배) 성시경은 '슈퍼스타 김광석이 살아 있었으면 우리 음악계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후배 가수들이 모이는 추모 공연이 해마다 열린다. 2024년 학전이 문을 닫고 김민기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30주기인 2026년 1월 옛 학전 자리에서 그를 기리는 공연이 열렸다. (평가) 평론가들은 그의 노래가 사회의 문제에서 출발해, 민주화 이후 개인의 슬픔과 좌절로 옮겨 갔다고 본다. 시대의 합창에서 한 사람의 독백으로 건너간 그 길이 곧 1980~90년대 한국 청년들이 걸은 길이었다.
김현성의 곡으로 「다시 부르기」에 실렸다. 그가 떠난 뒤 2000년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 삽입되면서 새 세대에게 그를 처음 알린 노래가 됐다.
- 하모니카와 통기타로 시작하는 느린 도입부(전주)가 입영 전날의 정적을 그린다.
- 집을 떠나 군에 가는 청년이 가족과 친구에게 마음을 전하는 편지 형식의 화법이다. 크게 울지 않고 눌러 담는 창법이 곡의 무게를 만든다.
- 곡은 느리고 규칙적인 박자로 걸음을 옮기듯 나아간다. 행진곡의 기운을 아주 조용하게 뒤집어 놓은 것처럼 들린다.
- 지금도 입대를 앞둔 청년들이 가장 많이 떠올리는 노래 가운데 하나로 꼽히며, 영화 덕분에 2000년대에 다시 널리 불렸다.
덜 알려진 이야기
그의 생몰 연도는 흔히 1964–1996으로 적힌다. 하지만 실제로 태어난 날은 1963년 12월 12일이고, 1964년 1월 22일은 호적에 오른 날짜다. 출생 신고가 늦어 호적과 실제 생일이 어긋나는 일은 그 시절 한국에서 드물지 않았다. 사후 박스 세트의 부제 '1964–1996'처럼 공식 기록이 호적을 따르면서 1964년생이라는 표기가 굳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출발에는 그도 참여한 실패한 동요 음반이 있었다. 김민기가 제작한 동요 뮤지컬 음반 「개똥벌레 이야기」가 사전심의에서 떨어지자, 김민기가 노래패 '새벽'과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을 기획하자고 제안했다. 1980년대 노래운동의 상징이 된 이 노래패가 검열에 막힌 아이들 노래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사실은 그의 전기에서 각주처럼만 남아 있다. 「서른 즈음에」는 원래 그의 노래가 아니었다.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 마지막 녹화에서 작곡가 강승원이 자신이 쓴 이 곡을 처음 불렀고, 녹화장에 있던 그가 곡을 달라고 청해 4집에 실었다. 강승원도 그룹 '우리동네 사람들'의 음반에 이 곡을 실었지만, 이 노래는 끝내 그의 이름으로 기억됐다. 그는 한 문답 형식의 글에서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를 타 보고 싶다고 밝힌 적이 있다. 소극장의 조용한 가객이라는 이미지 뒤에 이런 바람이 있었다는 사실은, 후대가 만든 쓸쓸한 초상만으로는 그를 다 설명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용어 노트 📚🔎
포크
(말뜻) 영어 folk는 사람들, 민중이라는 뜻이다. 포크 음악은 본래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온 민요를 가리켰다. (한국 대중음악에서) 통기타 한 대와 목소리를 중심으로, 노랫말에 담긴 이야기를 또렷하게 전하는 노래를 말한다. 1970년대 청년 문화와 함께 퍼졌고, 1980년대에는 대학가 노래운동으로 이어졌다. 김광석은 그 맥을 1990년대로 잇는 대표적인 가수로 꼽힌다. 수련회 밤에 기타 하나를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 다 같이 부르던 노래를 떠올리면 포크의 느낌과 가깝다. (다른 데서는) 영어 fork는 철자가 다른 낱말로, 식사용 포크나 소프트웨어 개발에서 원본을 갈라 따로 만드는 일을 뜻한다.
노래운동
(한국 대중음악에서) 1970~80년대 대학생과 젊은이들이 사회의 문제를 노래로 말하고 함께 부르려 한 움직임이다. 이때 불린 노래를 민중가요라고도 부른다. 방송과 음반 시장 밖에서 동아리, 노래패, 집회를 통해 퍼졌고,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대표적인 노래패다. 반 친구들이 응원가를 직접 만들어 운동장에서 함께 부르는 것처럼, 듣는 사람이 곧 부르는 사람이 되는 노래라는 점이 핵심이다.
사전심의
(말뜻) 사전(事前)은 일이 벌어지기 전, 심의(審議)는 살펴서 따진다는 뜻이다. 발표하기 전에 미리 검사한다는 말이다. (한국 대중음악에서) 음반을 내거나 방송하기 전에 정부 기관이 노래를 먼저 검사해 통과시키거나 막던 제도다. 가사가 불온하다거나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곡이 금지곡이 됐다. 1996년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사라졌다. 숙제를 내기도 전에 선생님이 미리 검사해서 마음에 안 들면 아예 제출하지 못하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 (다른 데서는) 법률 분야에서는 기관이 결정을 내리기 전에 미리 검토하는 절차라는 일반적인 뜻으로 쓰인다.
리메이크
(말뜻) 영어 remake는 다시(re) 만든다(make)는 뜻이다. (한국 대중음악에서) 이미 발표된 노래를 다른 가수가, 또는 같은 가수가 새 편곡으로 다시 녹음하는 일이다. 김광석의 「다시 부르기」 두 장은 1970~80년대 포크와 노래패의 노래를 다시 불러 한 세대의 노래를 다음 세대에 건넨 음반이다. 할머니가 해 주던 김치찌개를 내가 같은 재료로 다시 끓이면 맛은 이어지면서도 내 손맛이 배는 것과 같다. (다른 데서는) 영화에서는 예전 작품을 새 배우와 감독이 다시 찍는 일을 뜻한다.
싱어송라이터
(말뜻) 영어 singer(노래하는 사람)와 songwriter(노래를 짓는 사람)를 합친 말이다. (한국 대중음악에서) 자기가 부를 노래를 직접 쓰는 가수를 말한다. 김광석은 「일어나」, 「바람이 불어오는 곳」,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를 직접 썼다. 한편으로는 「서른 즈음에」, 「사랑했지만」처럼 다른 작곡가의 곡도 자기 노래로 만들었다. 요리 대회에서 레시피를 직접 개발해 직접 요리하는 참가자를 떠올리면 된다.
비브라토
(말뜻) 이탈리아어 vibrare, 곧 떨다에서 나온 말로 떨리는 소리라는 뜻이다. (한국 대중음악에서) 긴 음을 낼 때 음높이를 아주 조금씩 위아래로 떨어 소리에 생기를 주는 기법이다. 김광석의 잘게 떨리는 비브라토는 몇 소절만 들어도 그를 알아보게 하는 표식이었다. 교과서적인 발성은 아니라는 지적도 받았지만, 바로 그 떨림이 감정을 실어 나른다는 평가를 받는다. 리코더로 긴 음을 불며 손가락을 살짝 흔들어 소리를 물결치게 해 본 적이 있다면 그것이 비브라토다.
소극장 공연
(한국 대중음악에서) 수백 석 이하의 작은 공연장에서 여러 날 이어서 여는 콘서트다. 무대와 객석이 가까워 가수가 노래 사이에 관객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많다. 김광석은 1991년부터 대학로 학전 등에서 공연했고, 1995년 1000회를 넘기며 소극장 장기 공연을 하나의 문화로 만들었다. 강당에서 듣는 전교 조회가 대형 콘서트라면, 담임 선생님과 둘러앉아 나누는 학급 모임이 소극장 공연이다.